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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후비
목차
1.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
2. 혜비(惠妃) 이씨(李氏)
3. 익비(益妃) 한씨(韓氏)
4. 정비(定妃) 안씨(安氏)
5. 신비(愼妃) 염씨(廉氏)
1.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 부다시리[寶塔失里]는 원나라 종실 위왕(魏王)1)의 딸이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에 몸소 북쪽 뜰에서 맞이하니 원나라에서 승의공주(承懿公主)로 봉하였다. 왕이 즉위하자 함께 고려로 돌아와서 부를 설치하여 숙옹부(肅雍府)라 하였다. 공민왕 원년(1352), 왕이 몸소 대실(大室)에서 강신제를 행하려 하자 공주가 왕의 시신들에게, “너희들이 왕을 모시고 태묘(太廟)에 나아가면 내가 반드시 죄를 줄 것이다.”라고 협박해 왕이 태묘에 가지 못했다.
공민왕 5년,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여 승려 보허(普虛)2)의 설법을 들었다. 공주가 명덕태후(明德太后)를 뒤따라오자 시녀(侍女)와 승도(僧徒)가 서로 마구 섞여 분별이 없었다. 왕이 또 보허를 내전(內殿)으로 맞아들이자 공주와 태후가 기뻐하여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며 몸소 다과를 권할 뿐 아니라 공주는 유리쟁반과 마노(瑪瑙)3)로 만든 수저 등을 시주하였다.
공민왕 8년, 재상이 공주에게 “왕이 즉위한지 9년이 되었는데도 태자를 두지 못하였으니 양가의 여자를 간택하여 후궁으로 삼기를 바랍니다.”고 건의하자 공주가 허락하였다. 이에 이제현(李齊賢)의 딸을 들여 혜비(惠妃)로 삼았으나 이는 왕의 뜻이 아니었고 공주도 후회하며 음식을 먹지 않았다. 더구나 엄수(閹竪)4)와 궁녀들이 온갖 비방과 참언을 올리자 공주도 드디어 시샘하는 마음이 생겼다.
공민왕 10년에는 홍건적을 피해 왕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했는데 갑자기 당한 일이라 연(輦)을 버리고 말을 타고 가니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이듬해 흥왕사(興王寺)의 변란5)이 일어났을 때 왕이 태후(太后)의 밀실에 들어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숨자 공주가 방문을 막고 앉았으며, 변란이 평정되자 그제야 왕이 나올 수 있었다.
공민왕 14년(1365) 2월, 왕은 공주가 임신하여 해산달이 되자 교수형과 참수형을 제외한 모든 죄수를 사면하였다. 난산으로 병이 심해지자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사원과 신사(神祠)에서 빌게 하고 또 사형수까지 사면하였다. 왕이 분향하고 단정히 앉아서 잠시도 공주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공주는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왕이 비통하여 어찌 할 바를 몰라 하자 찬성사(贊成事) 최영(崔瑩)이 다른 궁전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간청하였으나 왕은,
“내가 공주에게 그렇게 하지 않기로 약속하였으니 다른 곳으로 멀리 피하여 내 한 몸만 편하게 있을 수 없다.”
라 하며 거절하였다. 왕복명(王福命)6)에게 명하여 장례를 주관하게 하고 사흘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으며 백관들은 검은 관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 빈전도감(殯殿都監)·국장도감(國葬都監)·조묘도감(造墓都監)·재도감(齋都監) 네 도감을 설치하여 각각 판사(判事)·사(使)·부사(副使)·판관(判官)·녹사(錄事)를 두었다. 또한 산소색(山所色)·영반법색(靈飯法色)·위의색(威儀色)·상유색(喪帷色)·이거색(轜車色)·제기색(祭器色)·상복색(喪服色)·반혼색(返魂色)·복완소조색(服玩小造色)·관곽색(棺槨色)·묘실색(墓室色)·포진색(鋪陳色)·진영색(眞影色) 등 13색을 설치하고 각각 별감(別監)을 두어 장례를 돕게 하였다. 여러 관청들로 하여금 제물을 차리게 한 다음 그 가운데 풍성하고 정결하게 차린 자에게 상을 내리자, 각 관청들이 다투어 화려하고 사치하게 차리려고 힘썼으며 심지어 빚을 내어 준비한 자도 있었다.
왕은 평소에 불교를 믿었는데, 상사를 당하자 크게 불사(佛事)를 벌였다. 매 이레마다 승려들로 하여금 범패(梵唄)7)를 부르게 하여 상여를 따라 빈전(殯殿)에서 사원까지 가게 하니 깃발이 길을 덮고 꽹과리와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때로 수놓은 비단으로 사원을 덮고 금·은과 채색비단을 좌우에 나열하니 보는 이의 눈이 다 어지러웠다. 원근의 모든 승려들이 그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었다. 밀직부사(密直副使) 양백안(楊伯顔)을 원나라에 보내어 상(喪)을 고하였다. 4월 임진일 정릉(正陵)에 안장하고, 신하들이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라는 시호를 올렸다. 장례를 행하기 전에 왕은 장의 절차와 산릉(山陵)의 제도를 그리게 했는데, 그림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장례는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전례를 따랐는데 온갖 사치를 다했기 때문에 부고(府庫)가 텅 비게 되었다. 왕이 불교의 말에 현혹되어 화장하려고 하였으나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불가하다 하므로 그만 두었다. 왕이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놓고 밤낮으로 마주하고 식사하면서 슬피 울었으며, 삼년 동안이나 고기 반찬을 들지 않았다.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관직에 임명되거나 사신으로 갈 때에는 모두 능에 가서 궁중에서 행하는 예와 같이 하게 하였다.
공민왕 15년(1366), 공주의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8)의 동남쪽에 크게 짓고자 백관들에게 나무와 돌을 운반하게 하였는데 나무 하나를 수 백명의 장정이 끌어도 나아갈 수 없었다. ‘영차!’ 라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고 죽은 소들이 길가에 널려 있었다.
공민왕 16년, 원나라에서 요양이문(遼陽理問)을 지낸 쿠두테무르[忽都帖木兒]를 보내와서 노국휘익대장공주(魯國徽翼大長公主)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왕이 혼전(魂殿)9)에 행차하여 황제의 책봉을 고하고 제향(祭享)을 크게 베풀었으며 교방(敎坊)10)은 새로 지은 악사(樂詞)를 연주하였다. 왕은 공주의 초상과 마주앉아 평상시 살았을 때처럼 음식을 권하였다. 뒤에 또 정릉(正陵)에 가서 묘역을 살피고 배회하면서 슬픈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정자각(丁字閣)으로 가서 호가(胡歌)11)를 연주하고 술잔을 올렸다. 곧 공주의 시호를 고칠 것을 명했고 이인복(李仁復)과 이색(李穡)이 드디어 휘의(徽懿)로 고쳐 아뢰니 이를 따랐다.
공민왕 19년(1370), 능지기[守陵戶]12)를 두고 토지와 노비를 운암사(雲岩寺)13)에 주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나라와 가정에 배필보다 더 중한 것이 없거늘, 하물며 내조한 어진 아내는 더욱 잊을 수 없다.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는 황족으로 태어나서 꽃다운 이름을 외척에까지 전하였고, 친영(親迎)14)의 예법을 따라 우리 왕실로 시집오게 되었도다.
내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연경(燕京 : 지금의 중국 북경)에서 이미 고락을 같이 하였고 귀국한 후에는 여러 번 화란을 평정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년 ; 1361) 홍건적이 개경(開京)을 침범할 때는 남쪽으로 옮겨 가서 나를 도와 난리를 극복하였으며 계묘년(1363)에는 창졸간에 일어난 흥왕사(興王寺)의 변란에 지척에 있는 적을 몸으로 막아 가리었도다. 또한 흉악한 계략으로 국새(國璽 : 옥새)를 도둑질하려 하자 기묘한 계책을 내어 비밀히 수호하도록 한 결과 이 나라가 오늘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 공적은 제갑(提甲)15)의 옛일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온화하고 침착하여 부인의 도리를 잘 이행하였고, 자애롭고 착하여 어머니로서의 모범을 능히 드러내었도다. 부부간에 서로 경계하여 나를 바로잡아 준 바 많았으니 이렇게 살면서 같이 종묘사직을 지켜야 마땅할 터이다. 그러나 만삭의 몸으로 그만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 여기에 미치자 아픈 마음이 더욱 깊어지도다. 상국에서는 시호를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라 추증하였고 여러 신하들은 자예선안(慈睿宣安)의 시호를 올렸다. 운암사의 동쪽 기슭에 안장하고 능호를 정릉(正陵)이라 하였으며, 성 안에 있는 신위(神位)를 모신 혼전을 인희전(仁熙殿)이라 하였다.
우러러 태조 이래 역대의 법규를 살펴보고 광명 성대함을 더하여 나의 마음을 다할 것을 기약하노라. 이에 신하들과 함께 인희전에서 다음과 같이 맹세하고 발원하노라. 천수도량(千手道場)을 베풀고 덕천고(德泉庫)16)·보원고(寶源庫)·연덕궁(延德宮)·영화궁(永和宮)·영복궁(永福宮)·영흥궁(永興宮)을 이에 속하게 하여 쓰임새에 대비케 한다. 또 보원고에 별도로 해전고(解典庫)17)를 설치하고 궁중에서 공주가 쓰던 물품으로 베 15,293필을 사서 주군(州郡)에 나누어 주었다가 본전(本錢)의 다소에 따라 이자를 받아들이게 한다. 각 도의 각 색(色)의 장인들에게 공포(貢布)를 합쳐 받아 보원고에 맡겨 관장하게 하고, 운암사에 토지 2,240결과 노비 46명을 시주하여 명복을 비는데 쓰게 한다. 능호(陵戶) 114호를 두어 만기가 되어도 폐지하지 않게 한다. 부처가 위에 있고 종묘사직이 아래에 있으니, 지금 같이 맹세한 우리들 및 후대의 임금과 신하 가운데 이 맹세를 좇지 않거나 혹은 침탈하고 도용하는 자가 있으면 신(神)은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다.”
운암사는 원래 교종(敎宗)에 속하였으나 당시 창화사(昌和寺)로 고쳐 선종(禪宗)에 속하게 하였는데, 다시 광암사(光岩寺)라 고쳤다.
부다시리공주가 공민왕과 혼인하고 고려에 입국하다
○ 恭愍王. 徽懿魯國大長公主寶塔失里, 元宗室魏王之女. 王在元, 親迎于北庭, 元封承懿公主. 王卽位, 與之東還, 置府曰肅雍.
숭의공주가 공민왕에 태묘에 제사지내는 것을 저지하다
○ 元年, 王欲躬祼大室, 公主勑王侍臣曰, “若等侍王, 詣太廟, 則吾必罪之.” 由是, 王不得行.
숭의공주가 봉은사의 승려 보허를 영접하다
○ 五年, 王幸奉恩寺, 聽僧普虛說法. 公主從太后繼至, 侍女·僧徒, 雜遝無別. 王又邀普虛于內殿, 公主·太后, 喜泣下霑襟, 親侑茶果, 公主施瑠璃盤·瑪瑙匙等物.
숭의공주가 후궁 혜비의 간택을 용인했다가 질투하다
○ 八年, 宰相白公主曰, “王卽位九年, 未有太子, 願選良家女充後宮.” 公主許之. 乃納李齊賢女爲妃, 寔非王意, 公主復悔之, 不進膳. 於是, 閹竪女謁, 讒謗百端, 公主遂有妬志.
숭의공주가 흥왕사의 변란 때 공민왕의 신변을 보호하다
○ 十年, 避紅賊, 從王南幸. 事出倉卒, 去輦而馬, 見者皆泣下. 明年, 興王之變, 王入太后密室, 蒙毯而匿, 公主坐當其戶, 亂定王乃出.
숭의공주가 난산으로 임종하자 공민왕이 사치스럽게 장례를 지내다
○ 十四年二月, 王以公主有身彌月, 赦二罪以下. 及難産病劇, 令有司禱于佛宇·神祠, 又赦一罪. 王焚香端坐, 暫不離側, 公主尋薨. 王悲慟, 不知所爲, 贊成事 崔瑩, 請移御他宮, 王曰, “吾與公主, 約不如是, 不可遠避他處, 以圖自便.” 命王福命主喪事, 輟朝三日, 百官玄冠素服. 設殯殿·國葬·造墓·齋四都監, 各置判事·使·副使·判官·錄事. 又設山所·靈飯法·威儀·喪帷·轜車·祭器·喪服·返魂·服玩小造·棺槨·墓室·鋪陳·眞影等十三色, 各置別監, 以供喪事. 令諸司設奠, 賞其豊潔者, 於是, 爭務華侈, 至有稱貸以辦者. 王素信釋敎, 至是大張佛事.
每七日, 令群僧梵唄, 隨魂輿, 自殯殿至寺門, 幡幢蔽路, 鐃鼓喧天. 或以錦繡, 蒙其佛宇, 金銀彩帛, 羅列左右, 觀者眩眼. 遠近諸僧, 聞者皆爭赴. 遣密直副使 楊伯顔, 如元告喪. 四月壬辰, 葬正陵, 群臣上號曰, 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 將葬, 王命畫儀衛次第·山陵制度, 觀之不覺涕泗. 喪事依齊國大長公主例, 窮奢極侈, 以此府庫虛竭. 王惑浮屠說, 欲火葬, 侍中 柳濯不可, 乃止. 王手寫公主眞, 日夜對食悲泣, 三年不進肉膳. 令朝臣除拜及出使者, 皆詣陵下, 如閤門行禮.
숭의공주의 영전 축조공사를 추진하다
○ 十五年, 大起公主影殿于王輪寺之東南, 令百官輦木石, 數百夫挽一木, 尙不能進. ‘呼耶!’ 聲動天地, 晝夜不絶, 牛死者相繼于道.
원에서 사신이 와서 노국휘익대장공주의 시호를 내리다
○ 十六年, 元遣前遼陽理問 忽都帖木兒, 賜公主謚曰, 魯國徽翼大長公主. 王幸魂殿, 告鍚命, 設大享, 敎坊奏新撰樂詞.
시호를 휘의노국대장공주로 변경하다
○ 王坐對公主眞, 侑食如平生. 後又幸正陵, 巡視塋域, 徘徊悲思, 御丁字閣, 奏胡歌獻酬. 尋命改公主謚, 李仁復·李穡, 遂改徽懿以聞, 從之.
휘의노국대장공주의 능지기를 두고 토지와 노비를 운암사에 주다
○ 十九年, 置守陵戶, 納土田·臧獲于雲岩寺. 王與群臣同盟曰, “有國有家, 配匹莫重, 矧玆內助之賢, 宜在不忘. 惟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 分派天潢, 連芳戚畹, 禮從親迎, 來嬪我家. 潛邸燕京, 旣同甘苦, 迨及東旋, 再定禍亂. 辛丑妖賊犯京, 播遷于南, 贊成克復, 癸卯興王倉猝之變, 賊在跬步, 橫身障蔽. 又其兇謀, 攘竊國璽, 乃能出奇, 密令收護, 俾我國家, 式至今日, 比功提甲, 亦無忝焉. 溫恭小心, 循蹈婦則, 慈祥惠愛, 克著母儀. 儆戒相成, 多所匡救. 是宜終始, 共守宗祧. 乃以彌月之辰, 竟殞厥身. 興言及此, 痛楚尤深. 上國贈徽懿魯國大長公主之號, 群臣獻慈睿宣安之謚. 葬于雲岩寺東麓, 號曰正陵, 神御之所在城中者曰仁熙. 仰稽太祖以來, 歷代成規, 增益光大, 期盡予心. 肆與群臣, 同發誓願, 於仁熙殿. 立千手道場, 又以德泉庫·寶源庫·延德宮·永和宮·永福宮·永興宮屬之, 以備供用. 又於寶源庫, 別置解典庫. 又將宮中所御之物, 買布一萬五千二百九十三匹, 分給州郡, 隨本多少以取息. 諸道諸色人匠, 合納貢布, 幷委寶源庫收掌. 雲岩寺納田二千二百四十結, 奴婢四十六口, 以資冥福. 置陵戶百有十四, 期至不替. 佛天在上, 宗社在下, 今我同盟, 及後代君臣, 不遵此盟, 或有侵奪盜用者, 神必殛之.” 雲岩, 元係敎宗, 今改昌化, 屬禪宗, 又改光岩.
2. 혜비(惠妃) 이씨(李氏)
혜비 이씨는 계림(鷄林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사람으로 부원군(府院君) 이제현(李齊賢)의 딸이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아들이 없으므로 재상들이 명문 집안의 딸로서 아들을 잘 낳을 만한 사람을 맞아들일 것을 청원하였기에 간택하여서 혜비로 봉하였다. 홍륜(洪倫)과 한안(韓安)18)이 여러 비들을 강제로 욕보일 때에도 혜비는 거부하고 따르지 않았다. 공민왕이 시해된 후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 惠妃李氏, 雞林人, 府院君齊賢之女. 魯國大長公主無子, 宰相請納名家女宜子者, 於是選入封惠妃. 洪倫·韓安之强辱諸妃也, 妃拒不從. 恭愍旣見弑, 剃髮爲尼.
3. 익비(益妃) 한씨(韓氏)
익비 한씨는 종실인 덕풍군(德豊君) 왕의(王義)19)의 딸로서, 간택되어 익비로 봉해졌다. 왕이 내전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익비가 일어나서 헌수하자 왕이 흡족해하며 근신(近臣) 우확(禹確)을 돌아보고 “아름다움이 어떠한가?”라고 말했다. 왕이 정신에 병이들어 홍륜(洪倫)·한안(韓安) 등을 시켜 여러 비들을 강제로 욕보이게 하였으나 익비가 이를 거절하였다. 왕이 노하여 칼을 뽑아 치려고 하기에 익비가 겁이 나서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뒤로 홍륜 등은 왕의 뜻을 사칭하여 자주 내왕하였는데 익비도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았으나 거절하지 못하여 드디어 임신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홍륜전(洪倫傳)」 등에 실려 있다.
우왕 때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익비가 낳은 아들을 죽이기를 청하자 이를 따랐다. 애초 중랑장(中郞將) 김원계(金元桂)가 그 아이를 거두어 집에서 길렀는데 이 때 국문하니 딸이었다. 대간이 또 익비를 국문할 것을 간청했으나 우왕이 “이는 선왕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고 거절하였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왕녀 경화궁주(敬和宮主)를 익비의 집에서 기르게 하고 해당 관청에게 명하여 익비에게 토지를 내려주었다.
○ 益妃韓氏, 宗室德豊君義之女, 以選入封益妃. 王嘗宴內殿, 妃起爲壽, 王怡然, 顧謂近臣禹確曰, “美如何耶?” 及王得心疾, 令洪倫·韓安等强辱妃, 妃拒之. 王怒抽劍欲擊, 妃懼從之. 自是, 倫等矯旨, 數往來, 妃亦知其詐, 然不拒, 遂有身, 語在倫等傳. 辛禑時, 臺諫交章, 請殺妃所生子, 從之. 初中郞將 金元桂, 收其子養于家, 至是鞫之, 乃女也. 臺諫又請鞫妃, 禑不許曰, “是彰先君之失也.” 恭讓王卽位, 以王女敬和宮主養于妃家, 命有司賜妃田
4. 정비(定妃) 안씨(安氏)
정비(定妃) 안씨(安氏)는 죽주(竹州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사람으로 죽성군(竹城君) 안극인(安克人)20)의 딸이다. 공민왕 15년(1366) 간택되어 정비로 책봉되었다. 안극인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시중(侍中) 유탁(柳濯) 등과 함께 마암(馬嚴)의 공사21)를 간언하는 글을 올리자 왕은 크게 노하여 정비를 내쳐 집에 돌아가게 하면서, “너를 미워함이 아니라 네 아비를 미워하는 것이다.”라 하였다. 곧이어 정비를 불러 들였다. 홍륜(洪倫)·한안(韓安)이 여러 비들을 강제로 욕보일 때에는 정비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맨발로 목을 매어 죽으려 하니 왕이 두려워 그치게 하였다.
우왕이 즉위한 후 정비가 젊고 아름다웠으므로 정비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는가?”라 하며 늘 희롱하였다. 자주 정비의 처소에 들렀는데 혹은 하루에 두 세 차례 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혹은 들렀다가 들어가지 못하니, 추한 소문이 외부에 파다했다. 우왕이 어느 날 정비의 처소에 갔으나 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않았으므로 만나지 않았다. 정비가 동생인 판서(判書) 안숙로(安淑老)22)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우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를 삼으니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우왕 13년(1387)에 부를 세워 자혜부(慈惠府)라 하고 관속을 두었다. 이듬해 우왕이 강화도(江華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왕위를 물려주자 백관이 국새(國璽)를 받들어 정비에게 바치고, 정비의 교서에 의해 우왕의 아들 창왕을 세웠다. 창왕이 즉위하자 대신(臺臣)들이 정비와 혜비(惠妃) 및 신비(愼妃)는 모두 정실이 아니므로 세록(歲祿)만 주기를 청하였다.
이듬해 우리 태조(太祖 : 이성계)가 여러 대신과 함께 결정을 내려 정비의 교서를 받들어 공양왕을 옹립23)하였다. 공양왕이 정비를 높여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를 삼았는데 그 책명은 이러하다.
“후계자가 되는 사람은 앞선 이의 아들이니, 효도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업적이 있는 분에게는 마땅한 명예를 지니게 할 것이니 어찌 존숭하는 의전을 거행하지 않으랴? 이는 춘추(春秋)의 대의요, 고금의 통상적인 상례이다. 삼가 생각건대 왕대비께서는 대대로 귀한 가문에서 나시었고[蟬聯24)] 덕행은 정숙함에 부합하셨다. 선왕의 배필이 되자마자 곧 불운을 겪으셨으나 하루 아침에 회맹(會盟)25)을 주재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다시 안정시키는 계책을 결정하시었도다. 다른 성을 가진 자가 왕위에 오르는 재앙을 척결하고 드디어 종친 가운데 어진 이를 세웠도다.
돌아보건대 내가 보잘 것 없는 자질로서 외람되이 어렵고 중요한 사명을 맡아 나라를 맡게 된 것은 실로 대비가 도우신 공훈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로다. 그러하니 부드러운 낮 빛으로 존안을 받들어 항상 즐겁게 봉양할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지 않으면 어찌 그 지극한 은혜에 보답할 수 있으랴? 여러 사람들의 정성을 모아서 좋은 날을 택해 삼가 옥책(玉冊)과 보화를 받들어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라는 존호를 올리며 전은 경신전(敬愼殿)이라 하노라. 아름다운 경사가 크게 열리니 떳떳한 윤리를 크게 펴도다. 아름다운 예복26)을 입으심이 마땅하오니 교화는 부부의 인륜[正始27)]을 더욱 돈독히 할 것이다. 탈 없이 장수하시어 절로 태평성대의 복록을 누리시라.”
○ 定妃安氏, 竹州人, 竹城君克仁之女. 十五年, 以選入, 封定妃. 克仁爲同知密直, 與侍中 柳濯等, 上書諫馬巖役, 王大怒, 出妃歸第曰, “非惡汝也, 惡汝父也.” 尋召妃還.
洪倫·韓安之强辱諸妃也, 妃被髮徒跣, 欲縊死, 王懼而止. 辛禑卽位, 妃年少美而艶, 禑每戱之曰, “予後宮人, 何無如母氏者乎?” 數如妃所, 或一日兩三至, 或夜至, 或至而不得入, 頗有醜聲聞於外. 禑一日如妃所, 妃以有疾不梳不見. 妃見其弟判書 安淑老女於禑, 禑納爲賢妃, 人謂, “妃畏人譏, 欲以自掩也.” 十三年, 立府曰慈惠, 置官屬.
明年, 禑遜于江華, 百官奉傳國璽, 獻于妃, 遂以妃敎, 立禑子昌. 昌卽位, 臺臣, 以妃及惠妃·愼妃俱非正嫡, 請只給歲祿. 明年, 我太祖與諸大臣定策, 奉妃敎, 迎立恭讓王. 王尊妃爲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 冊曰, “爲之後者爲之子, 當推孝敬之心, 有是實者, 有是名, 盍擧尊崇之典? 此春秋之大義, 而古今之通規. 恭惟王大妃, 系出蟬聯, 德符窈窕. 先朝作配, 尋遭中否之運, 一旦主盟, 坐定再安之策. 旣廓除異姓之禍, 仍遂立宗親之賢. 顧以眇末之資, 獲叨艱大之托, 化家爲國, 實蒙補鍊之功. 順色承顔, 恒奉怡愉之養, 然不進其嘉號, 曷足酬其至恩? 率籲衆情, 爰擇穀旦, 謹奉冊寶, 上尊號曰, 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 殿曰敬愼. 誕膺休慶, 丕敍彝倫. 象服是宜, 化益敦於正始. 眉壽無害, 福自享於大平.”
5. 신비(愼妃) 염씨(廉氏)
신비(愼妃) 염씨(廉氏)는 서원현(瑞原縣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사람으로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의 딸이다. 간택되어 신비로 봉해졌다. 홍륜(洪倫)·한안(韓安)이 여러 비들을 강제로 욕보일 때 신비는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공민왕이 시해 당하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 愼妃廉氏, 瑞原縣人, 曲城府院君悌臣之女. 以選入封愼妃. 洪倫·韓安之强辱諸妃也, 妃拒不從. 恭愍旣見弑, 剃髮爲尼.
각주
1 위왕 : 원나라 종실 인물 가운데 위왕에 책봉된 인물은 아무가[阿木哥]와 그의 아들 보로테무르[孛羅帖木兒]가 있다. 아무가는 세조 쿠빌라이[忽必烈]의 손자이며 성종 테무르[鐵木耳]의 형인 순종(順宗)으로 추존된 다라발라[答剌八剌]의 아들로, 무종 카이샨[海山]과 인종 아유르바르와다[愛育黎拔力八達]는 모두 그의 동생이다. 아무가는 고려와의 인연이 깊었다. 인종 4년(1317 : 충숙왕 4년) 윤정월에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대청도(大靑島 :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면)로 옮겨지고, 태정제 즉위년(1323 : 충숙왕 10년) 10월에 원나라로 소환될 때까지 6년 간 고려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금동(金童)은 충숙왕과 혼인하였다. 아무가의 아들로는 차례로 토부카[脫不花], 만자(蠻子), 아루[阿魯], 보라테무르[孛羅帖木兒], 탕오타이[唐兀台], 다르만시리[答兒蠻失里], 보라[孛羅] 등이 있는데, 여기서 노국대장공주의 아버지는 위왕인 보라테무르인 것으로 보인다.
『원사元史』 권107, 표2, 종실세계표.
2 보허(1301~1382) : 자가 태고(太古)이고 보우(普愚)라고도 하며, 홍주 홍씨(洪州洪氏) 홍연(洪延)과 양근 정씨(楊根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지산파(迦智山派)에 속하는 회암사(檜巖寺)의 광지선사(廣智禪師)에게 출가한 후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고 충목왕 2년(1346)부터 2년 동안 원나라에 머물면서 임제종(臨濟宗)의 18세인 석옥 청공(石屋淸珙)에게 배우고 귀국하였으며, 나옹 혜근(懶翁慧勤)·백운 경한(白雲景閑)과 함께 원나라에서 새로운 선법인 임제선을 연구하였다. 공민왕의 지나친 불교신앙과 신돈(辛旽)의 그릇된 정사를 지적하였으며, 신돈을 사승(邪僧)이라고 비판하고 그에게 정사를 맡기지 말도록 탄핵하다가 오히려 속리산으로 유배되었으나 신돈이 죽은 이후 공민왕에 의해 국사로 책봉되었다. 또한 그는 선교의 통합과 교단쇄신운동을 전개하여, 임제선을 중심으로 9산선문의 통일운동을 펼치고, 공민왕 5년(1356) 원용부(圓融府)를 설치하여 선·교의 통합은 물론 선에 있어서도 9산의 대립과 상쟁을 종식시켜 조화와 원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는 교단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백장청규(百丈淸規)』와 『치문경행(緇門警行)』을 간행하는 데도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같이 태고 보우(太古普愚)는 임제종의 도입과 선양을 통해 고려말의 타락한 불교계와 정치를 쇄신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공민왕이 시해되고 유학자들의 거센 배불론 때문에 큰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의 사상경향은 간화선(看話禪)이 중심으로, 특히 무자공안(無子公案)에 의한 후학지도와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선사상을 주장하였다. 이 공적영지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원용한 하택신회(荷澤神會)의 공적지(空寂知)와 일치하나 그 관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의 문인으로는 보각국사(普覺國師) 혼수(混修)·대지국사(大智國師) 찬영(粲英) 등이 있다.
「답방산거사(答方山居士)」·「태고행장(太古行狀)」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상 ; 『한국불교전서』 6, 동국대출판부, 1984.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241·254·350·385·389·411~414·432쪽.
권기종, 「임제종의 수입과 불교계의 동향」 『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100~103쪽.
3 마노 : 원석의 모양이 말의 뇌수를 닮은 보석으로 칠보(七寶) 가운데 하나이다. 색에 따라 백마노·홍마노·자마노 등이 있으며, 대롱 모양으로 가공한 형태를 관옥(管玉)이라 한다. 사람들은 이를 지니고 있으면 재앙을 예방한다고 믿었다.
4 엄수 : 내환(內宦)·시인(侍人)·엄인(閹人)·엄시(閹寺)·엄수(閹竪)·중관(中官)·중사(中使)·중환(中宦)·총환(寵宦)·혼관(閽官)·혼시(閽寺)·화자(火者)·환관(宦官)·환수(宦竪)·환시(宦侍)·환자(宦者)·황문(黃門)·폐환(嬖宦)이라고도 하며, 고려~조선시대 궁궐 내에서 잡무를 담당한 내관(內官 : 내시)을 말한다. 고려 전기 국왕의 숙위와 근시를 맡은 내시직에는 세족가문의 자제와 경전이나 글에 뛰어난 문신들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의종 이후에는 환관들이 임명되어 국왕의 측근세력으로 활동하였으며, 원간섭기 이후에는 이들이 국왕의 측근세력으로 활동하면서 대간들의 권한을 대신하여 정치에 개입하고 토지를 점탈하는 등 정치·경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고려시대 환관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22, 열전35, 환자 서문 참조.
5 흥왕사의 변란 : 공민왕 12년(1363) 국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한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로부터 돌아와 흥왕사(興王寺)의 행궁에 머물러 있을 때 김용(金鏞)이 김수(金守)·조련(曹連) 등을 보내어 국왕을 살해하려고 한 반란사건을 말한다. 김용은 두 차례의 홍건적 침입을 격퇴하여 전공을 세운 정세운(鄭世雲)을 시기하다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에게 그를 죽이게 하고 그 죄를 세 사람에게 뒤집어 씌워 모두 죽였다. 그리고 복주에서 돌아와 흥왕사의 행궁에서 거처하던 공민왕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공민왕은 환관 이강달(李剛達)·안도치[安都赤]의 기지로 죽음을 모면하였다. 이 변란은 최영(崔瑩) 등이 군사를 이끌고 행궁에 이르러 토벌함으로써 끝나게 되었지만 김용은 오히려 1등 공신에 봉해졌다. 그러나 곧 사실이 발각되자 김용은 그 동안의 공로로 죽음은 면하였으나 밀성군(密城郡 :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에 귀양갔다가 다시 계림부(鷄林府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로 옮긴 뒤 사지가 잘려 전국에 돌려진 후 개경에서 처형되었다. 이 변란의 결과 공민왕의 외척이며 최고의 지원세력이던 홍언박(洪彦博)이 죽임을 당하면서 친왕세력이 와해된 반면, 변란의 진압에 전공을 세웠던 최영 등 무장세력의 입지가 더욱 강화되었다. 『고려사』 권131, 열전44, 반역, 김용전(金鏞傳) 참조.
민현구, 「백문보 연구」 『동양학』 17, 단국대, 1987.
김광철, 「개혁정치의 추진과 신진사대부의 성장」 『한국사』 19, 국사편찬위원회, 1996, 138쪽.
6 왕복명(?~?) : 공민왕~우왕 때 판사(判事)·부대언(副代言)·평리(評理)를 역임한 무신관료이다. 공민왕 8년(1359)에는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전공을 세웠다가 같은 왕 12년 11월에는 기해격주홍적이등공신(己亥擊走紅賊二等功臣)이 되었다. 우왕 6년(1380) 8월에는 양광·전라·경상도원수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왜구를 격퇴하였다. 그의 아들은 조선 정종 때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낸 왕흥(王興)이며, 왕흥의 딸이 우왕의 제8비 선비(善妃)가 되었다가 우왕이 폐위된 이후 문화 유씨(文化柳氏) 유은지(柳隱之)와 재혼하였다. 시호가 충정(忠靖)이다. 개성군(開城君)이 된 사실로 보아 개성 왕씨(開城王氏)로 짐작된다.
『태조실록』 권1, 총서, 우왕 6년 8월.
7 범패 : 사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부르는 불교의례 음악의 한 종류이다. 의례를 시작할 때 처음 여래묘색신(如來妙色身)의 게송(偈頌)을 읊는다. 종류로는 안차비들이 부르는 안차비소리, 바깥차비가 부르는 홑소리와 짓소리, 축원하는 화청(和請)과 회심곡(回心曲) 등 4가지가 있다. 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시왕각배재(十王各拜齋)·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수륙재(水陸齋)·영산재(靈山齋) 등 5가지 재에서 연주된다.
8 왕륜사 : 태조 2년(919) 개경(開京)의 송악산(松岳山) 고려동(高麗洞)에 창건한 개경 10사원 가운데 하나로, 해동종[海東宗·法性宗]에 소속한 교종계통의 왕실 진전(眞殿)사원이며, 강화천도 이후인 고종 30년(1243) 8월에는 강화경(江華京)에도 같은 사원이 창건되었다. 고려시대 왕륜사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 경종,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 참조.
9 혼전 : 혼궁(魂宮)·혼당(魂堂)이라고도 하며, 국왕이나 왕비의 국상 가운데 장사를 마치고 나서 종묘(宗廟)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神位)를 봉안하던 공간을 말한다. 국왕의 경우에는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신위가 혼전에 모셔지며, 왕비의 경우에는 국왕의 신위가 종묘에 배향될 때까지 혼전에 모셨다.
10 교방 : 고려시대 춤·노래·음악을 하는 기녀 등을 가르치고 관장하던 중앙의 음악기관이다. 왕실 연회나 제례·가례(嘉禮) 및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와 같은 국가 불교의례 등의 행사 때 공연하였으며, 대개 속악(俗樂 : 향악)과 당악(唐樂)을 담당하였다. 현종 즉위년(1009) 2월에 정지하였으나, 뒤에 복구되었으며, 충렬왕 5년(1279) 11월에는 각 지방에서 얼굴과 기예가 뛰어난 기생을 선발하여 교방에 충당하였다. 고려시대 교방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68, 예지, 가례, 대관전(大觀殿)에서 군신을 연회하는 의식 참조.
11 호가 : 북쪽의 호인(胡人 : 여진족·거란족·몽고족 등)들로부터 전래되어 우리나라에서 부르던 노래이다. 한편 이들로부터 전래된 피리를 호적(胡笛)이라 한다.
12 수릉호 : 수묘인(守墓人)이라고도 하며, 고려시대 역대 국왕이나 왕비의 능을 지키고 관리하던 민호(民戶)이다. 이들은 대개 왕실에 소속된 노비들이 맡았으며, 그 역이 세습되었다.
13 운암사 : 고려시대 개경 봉명산(鳳鳴山)에 있던 사원이다. 원래 교종계통에 소속되었으나 창화사(昌和寺)라 이름을 바꾸면서 선종 사원이 되었다가 공민왕 19년(1370)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사원의 동쪽 기슭에 안장하면서 광암사(光岩寺)라 하였고, 우왕 때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진전을 옮기고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라 하였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이 사원에 행차하였고, 공주가 죽은 이후에도 자주 들렀다. 특히 공민왕은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토지·노비 등을 이 사원에 시주하였다. 한편 이 사원에 대해 읊은 김극기(金克己)·이인로(李仁老)·이색(李穡)의 시가 전해지고 있는데, 김극기의 시에는 날마다 강석이 열렸고, 경전연구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태조가 창건한 개경의 십대 사원 가운데 포함되는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보제사))와 다른 사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개성부, 고적.
고유섭, 『송도의 고적』, 열화당, 1977.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97, 83쪽.
14 친영 : 육례(六禮) 가운데 하나로,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는 일을 말한다.
15 제갑 :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부인인 신혜왕후(神惠王后) 정주 유씨(貞州柳氏)가 태조에게 갑옷을 입혀 격려하면서 궁예(弓裔)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게 한 사실을 말한다. 이 정변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 태조,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傳) 참조.
16 덕천고 : 의성창(義成倉) 등과 함께 원간섭기 이후 왕실의 재정을 담당한 관청으로, 충렬왕 원년(1275) 정월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에게 탕목읍(湯沐邑)으로 주었던 계림(鷄林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경산(京山 :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등지에서 바친 능라·주포·마포 등과 위전(位田)에서 거두어들인 쌀·콩을 재정기반으로 삼았다. 무인집권기 이후 왕실재정기구가 문란해지고 내장택(內莊宅)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의성창·덕천고·보원고(寶源庫)·의순고(義順庫)·덕녕고(德寧庫) 등의 왕실 창고가 발달하여 창고(倉庫)·궁사(宮司)가 왕실재정의 중추가 되었다. 충선왕 때 덕천창(德泉倉)이라 하면서 사(使 : 종5품)·부사(副使 : 종6품)·승(丞 : 종7품) 등의 관원을 두었다가 충숙왕 12년(1325)에는 이름을 덕천고로 고치면서 관원을 전부 없애버렸으나, 같은 왕 17년 다시 관원을 두면서 사헌부 소속의 규정(糾正)이 그 업무를 감독하게 하였다. 공민왕 4년(1355)에는 관원과 규정에 의한 감독도 폐지하고 환관 가운데서 제거(提擧 : 창고의 장)와 별감(別鑑)을 두어 업무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때 광흥창(廣興倉)이 녹봉재원으로 수납해 온 능라(綾羅)·세포(細布) 등 고을의 공부(貢賦)를 함부로 수납하여 국가재정의 궁핍화를 초래함으로써 우왕 14년에는 이행(李行) 등이 덕천고에 사·부사·승·주부를 둘 것을 청하였다. 덕천고는 조선 전기에도 운영되다가 태종 3년(103) 내섬시(內贍寺)로 개칭되었다. 고려시대 덕천고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77, 백관지, 덕천고(德泉庫) 참조.
김옥근, 『고려재정사연구』, 일조각, 1996, 107~112쪽.
박종진, 『고려시기 재정운영과 조세제도』, 서울대출판부, 2000, 111·182~184·191~198쪽.
17 해전고 : 고려 후기 직물·피혁을 관장하던 창고이다. 공민왕 18년(1369)에 보원해전고(寶源解典庫)를 설치하면서 부속으로 설치되었다. 보원해전고에는 사(使 : 종5품)·부사(副使 : 종6품)·승(丞 : 종7품)·주부(注簿 : 종8품)·녹사(錄事 : 종9품)를 각각 한명씩 배치해 두었다. 그러나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보원해전고를 혁파하고, 비색(備色)에 준하여 제용고(濟用庫)를 설치하여 그 업무를 맡게 하였으나 공양왕 3년(1391) 다시 보원해전고를 설치하고, 여기에 제용고 및 공판서(供辦署)를 병합하여 기능을 확대시켰다.
18 한안(?~1374) :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청주 한씨 한방신(韓方信)의 아들로, 공민왕 때 자제위(子弟衛)에 소속되었다. 같은 왕 23년(1374) 9월 최만생(崔萬生) 등과 함께 공민왕 시해에 가담했다가 처형됨으로써 그 집안의 가세도 쇠퇴하였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07, 열전20, 한강전(韓康傳) 참조.
김광철, 『고려후기세족층연구』, 동아대출판부, 1991, 234쪽, [청주한씨 가계도].
19 왕의 :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증손이다.
20 안극인(?~1383) :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추증된 죽산 안씨(竹山安氏) 안사경(安社卿)의 아들로, 충혜왕 때 과거에 급제한 이후 우왕 때까지 동경도병마사(東京道兵馬使)·우상시(右常侍)·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등을 역임하고 죽성군(竹城君)이 된 문신관료이다. 충목왕 3년(1347)에는 정치도감(整治都監)의 도감관(都監官)으로 활동하였으며, 공민왕 17년(1368)에는 노국대장공주의 영전(影殿)을 증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자신의 집에 감금당하였다. 우왕 3년(1377) 4월에는 지공거로서 동지공거 권중화(權仲和)와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성석연(成石珚)·정구(鄭矩)·최문리(崔文利)·박위(朴爲)·배충(裵衷)·이격(李格)·권진(權軫)·박해(朴晐)·민치강[閔致康·閔開]·정홍(鄭洪)·채해(蔡海)·문로(文魯)·하득부(河得孚)·박위(朴偉)·조승숙(趙承肅)·이여충(李汝忠)·김조(金稠)·우홍수(禹洪壽)·김미(金彌)·최긍(崔兢)·이직(李稷)·방중량[房仲良·房士良]·허조(許操)·정휘(鄭揮)·김구(金舊)·이확(李擴)·윤회종(尹會宗)·최담(崔霮)·이백순(李伯順)·염치화[廉致和·廉致庸]·김득수(金得綏)·우홍강(禹洪康)·김호[金虎·金度] 등을 선발하였다. 이 집안은 안극인—안숙로(安淑老) 부자 때 크게 성장하여 여말선초에 사족으로 발전하였다. 안극인의 딸 정비(定妃) 안씨가 공민왕의 제4비가 되고 안숙로의 딸 현비(賢妃) 안씨가 우왕의 제9비가 되는 등 고려 말 왕실의 외척이 되었으며, 공양왕 3년(1391) 7월에는 안극인의 할아버지 안한평(安漢平)이 양경공(襄景公)으로, 안사경이 희정공(僖靖公)으로, 안극인이 문정공(文貞公)으로 각각 시호를 추증받았다. 조선 태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정경공(貞景公) 안등(安謄)도 안극인의 손자이다.
『태종실록』 권34, 태종 17년 10월 을유, 전 형조판서 안등의 졸기.
민현구, 「정치도감의 성격」 『동방학지』 23·24합, 1980, 131쪽.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289쪽.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71·516~521쪽.
21 마암(馬巖)의 공사 :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영전(影殿)을 마암에 옮겨 건설하는 공사를 말한다.
22 안숙로(?~1394) : 안숙로(安叔老)라고도 하며, 죽성군(竹城君)이 된 죽산 안씨 안극인(安克仁)의 아들이자 공민왕의 제4비인 정비(定妃) 안씨의 동생으로, 우왕~공양왕 때 판서(判書)·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역임한 문신관료이다. 공양왕 2년(1390) 6월에는 연왕(燕王 : 명나라의 成祖)의 빙문사(聘問使)로 갔으나, 이듬해에는 그의 딸이 우왕의 제9비 현비(賢妃) 안씨였으므로 퇴직당하였다. 아들로는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안망지(安望之)와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을 역임한 안경지(安敬之)가 있다. 한편 그의 졸기에는 순흥 안씨(順興安氏)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태조실록』 권6, 태조 3년 7월 경자, 전 지밀직사사 안숙로의 졸기.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289쪽.
23 옹립 : 위화도회군 직후부터 제기된 우·창 비왕설(禑昌非王說)을 근거로 공양왕을 옹립한 사실을 말한다. 이성계세력에 속한 조준(趙浚)·윤소종(尹紹宗)·오사충(吳思忠) 등 급진적 사대부들은 유교의 명분론과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앞세워 창왕의 즉위에 반대하였으며, 반면에 이색(李穡) 등은 군신의리(君臣義理)와 천리(天理)·천륜(天倫)을 주장하면서 이에 맞서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이성계세력은 위화도회군 직후 이색 등 온건론자의 입장을 수용하여 창왕의 즉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김저(金佇)의 옥사를 계기로 이성계·정몽주(鄭夢周)·조준·정도전(鄭道傳)·심덕부(沈德符)·지용기(池湧奇)·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박위(朴葳) 등은 다시 우·창 비왕설을 제기하면서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워 공양왕의 옹립을 적극 추진하여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박형표, 「조선건국에 대한 시비」 『학술지』 8, 건국대, 1967.
윤두수, 「우창비왕설의 연구」 『고고역사학지』 5·6, 1990.
도현철, 『고려말 사대부의 정치사상연구』, 일조각, 1999, 232~234쪽.
24 선련 : 매미 소리가 이어져 끊이지 않는 것과 같이 연속한다는 뜻이다. 『양서(梁書)』 권33, 열전27, 왕균전(王筠傳)에는 “천지 개벽 이래로 아직껏 작위가 계속 이어진 적이 없다. 그러나 문장 재주는 서로 이어졌으니 왕씨가 흥성한 것과 같은 것이다(自開間以來 未有爵位蟬聯 文才相繼 如王氏之盛者也).”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종실(宗室)의 뜻이 된다.
25 회맹 : 회맹연(會盟宴)·회맹제(會盟祭)라고도 하며, 국왕이 공신들과 산 짐승을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그 피를 나누어 마시며 단결을 맹세하던 의식을 말한다.
26 예복 : 상복(象服)은 왕후나 지위가 높은 부인이 법도에 맞게 갖춰 입은 예복을 말한다. 『시경(詩經)』, 국풍(國風), 용(鄘), 군자해로(君子偕老)에 “훌륭한 의복이 잘 어울린다만 / 그대의 정숙하지 못함은 / 무엇 때문이라 할까?(象服是炅宜 子之不淑 云如之何).”의 전(傳)에는 “상복은 존귀한 자가 장식하는 것이다(象服 尊者所以爲節).”라 하였다.
27 부부의 인륜 : 정시(正始)는 처음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나 인륜의 처음 즉 부부관계를 바르게 한다는 의미다. 『시경(詩經)』 「국풍(國風)」 관저(關雎) “周南·召南 正始之道 王化之基”의 소(疏)에는 “주남과 소남 25편의 시는 모두 그 처음을 바르게 하는 큰 도이며, 왕업에 있어 풍속 교화의 기본이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을 기본으로 삼고 먼 것은 가까운 것을 처음으로 삼는 것이니, 왕은 자신의 집을 바르게 하고 난 뒤에 자신의 나라에 미쳐야 하니 이것이 그 처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다(周南·召南 二十五篇之詩 皆是正其初始之大道 王業風化之基本也 高以下爲基 遠以近爲始 文王正其家 而後及其國 是正其始也).”라 하였다.
고려사열전 공민왕(恭愍王) 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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