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영정
□ 의암 주논개 연보 1574년(1세) 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에서 탄생 1578년(5세) 부친 주달문 사망 후,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의탁함. 숙부는 어린 조카를 김풍헌 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는 약조를 하고 금품을 받아 달아남.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다가 체포되어 장수관아에 수감됨. 1579년(6세) 이른 봄,장수현감 최경회의 심리로 재판이 열림.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돌아갈 곳이 없는 모녀는 침방 관비를 자청. 김씨 부인의 배려로 내아에서 심부름을 하며 살게 됨. 늦가을, 모녀는 무장현감으로 전직된 최경회를 따라감. 1582년(9세) 최경회가 영암군수로 전직되자 따라감. 1587년(14세) 최경회가 사도시정으로 갈 때 수행함. 1590년(17세) 최경희가 담양부사로 재직 시 부사의 아내가 됨. 최경회가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화순으로 갈 때 논개는 고향 장수로 와서 기다림. 1592년(19세) 최경회가 전라우도 의병장으로서 장수에 와서 의병올 모집하고 훈련시킬 때, 논개는 의병 훈련 뒷바라지함. 1593년(20세)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하여 2차 진주성 전투를 할 때 논개는 성안에서 전투의 뒷수발을 함.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한 뒤, 논개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의암으로 유인하여 남강에 투신 순절함.
1. 주논개의 가계 논개(論介)는 이름,호는 의암(義巖)1),성은 신안(新安) 주(朱)씨이며, 출생지는 현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이다. 그의 선대(先代)는 중국(中國) 송(宋)나라 성리학자(性理學者)인 주문공(朱文公) 희(憙)의 후손(後孫)이된다.고려 시대(高麗時代)는 예부상서(禮部商書)인 인장(印長)이 가문(家門)을 빛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을 지낸 승천(勝遷)과 승정원(承政院),우승지(右丞旨)를 역임한 공으로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7대조가 금교찰방(金郊察訪) 무현(武賢)에 이르게 된다. 6대조 응표(應杓)는 통덕랑(通德郞)을 증직(贈職) 받고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여 경상도(慶尙道) 안의현(安義縣) 서상면(西上面) 방지동(芳池洞)으로 이사를 하여 대를 이어 살게 되었다. 논개의 조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주용일(朱溶一)로서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 살았는데 이 마을은 주씨(朱氏)들만 모여 살았기 때문에 "주촌(朱村)마을"이라 했다. 논개의 부친은 달문(達文)으로 주촌마을 서당훈장(書堂訓長)이었다. 논개의 모친은 밀양 박씨(密陽 朴氏)로서 그의 선조는 팔도병사(八道兵使)로 황석산성(黃石山城) 싸움에 공적을 남긴 박명박 장군이다. 조부인 용일에게는 달문(達文)과 달무(達武)의 두 형제가 있었다. 달문은 아버지의 높은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을 배워 문장과 덕행(德行)이 주위에 널리 알려졌다. 용일의 학식과 덕망은 산등성이를 넘어 대곡리 사람들에게까지 소문이 나서 결국은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에서 대곡리로 초빙(招聘)되어 이사(移徙)까지 하게 되었다.2) 1) 촉석루 바위에 정대륭(鄭大隆)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의암(義菴)'에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2) 경성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 논개 사적연구, 신지서원,1996, 48-49쪽.
2. 주논개의 출생
주달문은 일찍이 안의현 서하면(西下面) 봉정리 밀양 박씨집 규수(閨秀)에게 장가들어 단란하게 가정을 꾸려오던 가운데 남아(男兒)를 얻으니 대룡(大龍)이라 이름 지어 귀하게 길렀으나 불행하게도 나이 15세에 괴질(怪疾)에 걸려 요절(夭折)하고 말았다.3) 후사(後嗣)가 없는 주달문 부부는 명산(名山) 장안산(長安山)4)에 들어가 정성껏 기도를 올려 주씨 가문(朱氏 家門)의 대(代)를 이어갈 자손을 점지해 줄 것을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빌었으며,그 보람이있어 박씨 부안의나이 40중년에 태기(胎氣)를 얻어 부부는 무척 가빼하였으나,여아(女兒)를 분만(分娩)하였다.5) 논개의 탄생일은 1574년 9월 3일 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사주(四柱)로 따지면 사갑술(四甲戌)이 된다. 곧 갑술년(甲戌年) 갑술월(甲戌月) 갑술일(甲戌日) 갑술시(甲戌時)이다. "술(戌)은 지지(支持)로서는 제11위에 해당하며,띠로는 개띠가 된다. 사갑술에 태어난 논개의 사주를 보고 놀란 주달문은 논개의 앞날을 격정했으나,조선의 왕 중에 영조가 사갑탄생인지라 위안하고,천한이름은 오히려길한 운명을 부른다는 관습에 따라 ‘놓은 개'라는 뜻을 가진 논개(論介)라 이름 지었다.6) 3) 장차 난을 일으킬 아이라 하여 방죽에 빠뜨려 죽였다는 전설도 있다. 4) 덕유산 영각사에서 기도했다는 조사도 있으나 주촌과 가까운 장안산일 가능성이 높다. 5) 장수문화원,앞의 책 1997, 28쪽. 6) 경성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앞의 책, 50-52쪽.
3. 장수현감 최경회(崔慶會)와의 만남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부모의 가르침을 잘 따랐으며 나이에 비해 성숙하였다. 가난했지만 화목한 가정이었다. 논개 나이 다섯 살 되던 해에7) 뜻하지 않게 아버지를 여의었다. 논개 어머니박씨 부인은 외동딸논개를 데리고 어려운 생활을 꾸려 나가던 중 시동생으로부터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박씨 부인과 논개 모녀가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시동생 주달무와 한집에서 지내자는 것이었다. 살림살이를 합치면 농사와 다른 고된 일은 남자인 달무 자신이 맡아서 할 테니 박씨 부인은 그저 집안 살림이나 돌봐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여러 날 궁리 끌에 박씨 부인은 시동생 달무의 제의를 고맙게 받아들여 살림을 합쳤다.8) 
한편 달무는 형님 달문이 죽고 난 뒤 이웃에 사는 김풍헌으로부터 은밀하게 묘한 제의를 받았다. 김풍헌은 동네에서 끼니 걱정 않고 부유하게 사는 자였다. 그런 그에게 나이가 든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몸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장애인이었다. 비록 살림살이는 흡족하다 하지만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해 그의 아들은 장가를 들지 ~~겨보게 되었다. 달문이 살아 있다면 감히 꿈에도 생각하지못할 일이었다.박씨 부인의 가정 형편은 옹색하기 그지없었고,더구나 달무라는 위인은 술과 도박으로 세월을 축내며 사는데다 적지 않은 빚까지 지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한 음모였다. 김풍헌은 달무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달무의 조카 논개를 김풍헌 집의 민며느리로 들여보내주면 그동안 달무가 시달려은 채무 전액을 갚아주는 것은 물론 상답으로 다섯 마지기를 얹어주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달무는 다른 생각 할 겨를도 없이 속으로 결정을 내려버렸다. 그리하여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박씨 부인과 살림을 합치자는 제의를 했고,박씨 부인이 망설이는 사이 쉴 새 없이채근 질을 했다.끝내 살림살이를 합치게 되자 달무는 김풍현과 은밀하게 계약을 체결했다. 논개를 김풍헌 집의 민며느리로 들어오기만 하면 땅문서는 그 즉시 넘겨준다는 약속도 함께 받았다. 달무는 손에 큰돈을 쥐게 되자 그 길로 노름판에 뛰어들어 집을 잊고 지냈다. 나쁜 소문은 걸음이 빨랐다. 박씨 부인이 시동생 달무가 저지른 비행을 알게 된 것은 며칠 뒤였다. 박씨 부인은 그제야 시동생 달무가 그토록 살림을 합치자고 종용했던 이유를 알았다. 살림을 합친 이상 논개에 대하여 달무도 친권 행사를 할 수 있가 때문에 그토록 서둘렀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고서 후회했다. 박씨 부인은 궁리 끝에 논개를 데리고 도망을 치기로 결심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논개를 김풍헌의 민며느리로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그것도 돈과 토지를 받고 논개를 인신매매한다는 세상의 비난을 듣고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재를9) 넘어 경상도로 도망쳤다. 우선 박씨 부인 친정 마을인 안의현 봉정마을(지금의 함양군 서하면 봉정)로 피신했다. 박씨 부인이 논개를 데리고 달아났다는 소문을 들은 김풍헌은 달무를 찾았지만 달무의 행방도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김풍헌은 장수 현감에게 주달무와 박씨 부인을 처벌해달라는 고소장을 냈다. 혼인하기로 약속하면서 건네준 혼인 예물을 장만하기 위한 돈을 횡령한 채 도망쳤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장수 현감인 최경회는 즉시 박씨 부인과 주달무를 체포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주달무는 행방불명이었고,친정마을에 숨어 있던 박씨 부인과 는개는 장수 현감 최경회 앞으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박씨 부인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제 겨우 네댓 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를 민며느리로 데려갈 생각을 했다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김풍헌은 인륜을 모독하는 죄를 범한 것이며,처음부터 반인륜 범죄를 목적으로 하여 체결된 주달무와의 모든 계약은 무효이며,따라서 주달무에게 자급한 금품은 김풍헌 스스로의 책임일 뿐 논개 모녀에게 반환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내용의 판결을 내렸다. 김풍헌도 오히려 곤장을 맞고 재판은 끝이 났다. 그러나 논개 모녀의 사정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어린 딸을 껴안고 울던 박씨 부인이 최경회 현감에계 호소했다. 원래 실던 주촌으로 돌아가고 싶지만,그곳은 이미 시동생 식구들의 원망과 저주가 그들을 기다릴 뿐이며, 설혹 주촌으로 돌아가 살게 된다 하더라도 김풍헌이 장차 무슨 보복을 해올지 두렵다고 했다. 그러므로 어디 살 만한 곳이 생길 동안만이라도장수현관아에서 머물게 해달라는 눈물 어린 호소를 했다. 최경회는 참으로 딱한 처지에 놓인 논개 모녀를 며칠 동안만 관아에서 지내다가 떠나라고 했다. 돌아갈 곳이 없게 된 논개 모녀의 소식을 들은 최경회의 아내 김씨는 그들을 내아로 불렀다. 박씨 부인한테서 자초지종을 듣고 난 김씨는 우선 박씨 부인의 덕성스러움과 예절에 호감이 갔고,무엇보다 어린 논개의 총명함에 마음이 끌렸다. 그리하여 김씨의 보호 아래 논개 모녀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사작했고, 그렇게 1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김씨는 논개 모녀를 친척처럼 여기게 되었다. 최경회는 1579년 무장현감으로10) 옮기게 되었다. 이때 김씨가 최경회에게 논개 모녀도 함께 데려가자고 권했다. 박씨 부인의 바느질 솜씨와 부엌살림 솜씨를 무엇보다 도 높이 샀다. 그러자 최경회는논개 모녀를 불러장차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박씨 부인은 노비로 삼아도 좋으니 함께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최경회는 김씨와 의논한 끝에 관아의 침방(針房) 관비(官婢)로 논개 모녀를 등재시킨 뒤 정식 수행원으로 삼아 무장으로 데려갔다. 그때부터 논개 모녀는 김씨의 보살핌을 받았다. 특히 논개의 총명함은 김씨의 가르침에 의해 경이롭게 빛을 더해갔다. 박씨 부인은 논개에게 일찍부터 몇 가지 일에 대한 반복 교육을 시켰다. 첫째는 최경회 현감과 김씨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경회는 논개 모녀에게 두 가지 큰 은혜를 배풀었다고 박씨는 믿었다. 끝없는 가난과 궁핍에서 모녀를 건져 내주었고,달무와 김풍헌이 모의한 인신매매의 함정에서 구원해주었다고 믿었다. 이 은혜를 갚지 못하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논개에게반복해서 말했다. 최경회는 계속 변방으로만 옮겨 다녔다. 1583년 영암 군수에서 1584년 영해 부사로 영전했다. 영해 부사로 있던 중에 사도시정(司䆃寺正)이란 중앙관직을 임명받았다. 사도시정이란 궁중의 미곡과 간장 등의 공급과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로 최경회는 혼자 서울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부인 김씨는 벌째 여러 해째 지병을 앓고 있어서 서울로 따라가기 어려왔다. 최경회는 56세였다. 누구든 따라가서음식과 의복 수발을 들어줄 필요가 있었고, 그 책임은 나주 김씨에게 있었다. 김씨는 논개를 유심히 살폈다. 2년 전에 어머니 박씨를 여의고 혼자가 된 논개는 그때 열네 살에 불과했지만 웬만한 살림은 능히 보살필 수 있었다. 그동안 나주 김씨가 가르쳐온 덕분이기도 했다. 김씨는 최경회에게 논개를 데려가서 음식과 의복 수발을 받으라고 권했다. 논개는 최경회를 따라서 서울로 갔다. 1590년 초봄 최경회는 다시 담양 부사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그때 최경회 나이 쉰아홉 살이었고 논개는 열일곱 살이었다. 담양 부사로 부임하면서 최경회는 논개를 부실로 맞아들였다. 그리하여 논개는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최경회의 소실이 되었다, 논개가 최씨 문중 사람이 된지 9개월 뒤인 1590년 12월에 최경회는 어머니 순창임씨(淳昌林氏)의 상을 당했다.담양 부사를 사직하고 고향 화순으로 떠날 때 최경회는 논개에게 장수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권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때 첩실을 데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논개는 공손하게 이 권유를 받아들였다. 이미 최경회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초자연적 자신감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논개도 자신이 무섭게 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최경회도 그런 논개의 변신을 느꼈다.11) 7) 논개의 나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상황들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논개가 의암에서 목숨을 잃을 때를 기준으로 역 추산한 나이이다. 8) 남존여비 사상이 아닌, 여성의 판단에 자유롭게 맡기는 전통적인 관례가 았었다. 9) 장계지역에서 서상으로 넘나들던 고개. 10) 지금의 고창군 무장면 일대. 11) 정동주,논개,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0, 59-84쪽,
4. 최경회의 의병활동과 진주성 전투
1) 최경회의 의병활동 1592년(임진년)에 역사상 980여회의 외침 중 가장 처참했다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상중인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8월에 남원으로 옮겨 군사를 증원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만큼 군사 증원은 쉽지 않았다. 그는 다시 본거지를 장수로 옮길 결심을 했다. 지난날 장수 현감으로 있을 때 베푼 여러 가지 선정의 결과도 있어 의병 모집이 다른 지역보다 효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또한 장수에는 논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의병 동원과 왜군에 대한 공격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위해 장수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내는 데는 논개의 역할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기대한 만큼 장수 사람들은 협력해주었다. 장계 필강평야에다 의병청을 세우고 장수는 물론 인근의 무주,진안,금산에까지 의병 모집을 위해 사람을 파견했다. 논개는 눈에 띄지 않게 의병모집과 훈련 중인 의병들의 뒷일을 도왔다. 논개는 마을 여성들을 동원하여 의병 훈련에 필요한 여러 일들을 함께 해냈다. 조국수호 의자로 불타는 청년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훈련을 거쳐 정예병 800명을 선발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의병 지원자들이 집결했다. 한 달여의 맹렬한 훈련 끝에 마침내 최경회의 의병대는 정식으로 부대의 이름과 깃발까지 갖추었다. 조정으로부터 공인된 부대 명칭은 골(鶻)자부대였고,'골'자가 찍힌 깃발도 만들었다. 부대 명칭은 최경회가 만든 것인데, '골입아군(鶻入鴉郡)', 즉 '송골매가날아들면 갈까마귀 떼가 놀라 흩어진다.'는 뜻이었다. 1592년 9월 중순 최경회의 골자부대는 맨 첫 번째 전투인 무주 전투를 저 유명한 고바야카와 부대와 벌였다. 최경회는 적을 속이기 위한 전술을 폈다. 볏짚을 묶어 말 위에다 싣고 사람은 그 뒤에 앉아 고함을 지르게 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밤이 지새도록 그렇게 맞섰다. 왜적들은 조총을 쏘거나 화살을 퍼부었다. 대부분의 탄환과 화살은 볏짚에 꽂힐 뿐이었다. 골자부대는 왜적의 탄환과 화살이 바닥나기를기다렸다. 새벽 먼동이 트고 아침 해가 떠오르려고 할 때 골자부대는 칼과 창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왜적들은 탄환과 화살이 부족하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적들의 참담한 패배였다. 이때부터 왜적들 사이에서 골자부대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금산전투에서 승리한 왜적들은 일단 무주까지 압박해 들어왔다가 전투에서 패하자 다시 금산 방면으로 퇴각한 후 경상도 지역인 김천, 개령,성주 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 최경회는 왜적들의 퇴보로 예측되는 곳에다 골자부대를 매복시켰다. 지형이 험악하고 좁은 길이 외가닥으로 나 있는 곳으로 밖에는 적들이 퇴각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퇴각하던 왜적들은 곳곳에서 매복해 있던 골자부대의 기습을 받아 괴멸되어 갔다. 사력을 다한 탈주와 공격이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최경회 눈앞에 흰 말을 탄 왜장 한 명이 수십 명의 군사틀 데리고 다가오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이른바 '우지치(牛旨峙)'에서였다.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상남도 거창군 그리고 경상북도 김천시의 경계지점인 경북 김천시 대덕면 덕산 2리 주치(走峙)고개다. 최경회는 화살을 겨누었다. 그의 활솜씨는 일찍이 소문난 것이었다. 활은 왜장을 명중시켰다. 죽은 왜장한테서 그림 한 점과 칼 한자루를 노획하자 골자부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림은 공민왕이 그린 「청산백운도」였고 칼은 여덟자나 되는 큰 칼이었다. 한재 전남 화순의 '해주 최씨' 문중에서 보관해오고 있는 칼이 바로 1592년 9월 중순 고바야카와 부대와의 우지치전투에서 최경회가 왜장으로부터 빼앗았던 바로 그것이다. 칼의 손잡이 세 군데에 오동나뭇잎 문양이 새겨져 있다. 손잡이 안쪽에서 바깥쪽을 향하여 상·중·하단으로 나뉘어 오동나뭇잎 문양이 7-5-5형식으로 된 것(七五桐 : 상당의 오동나뭇잎은 7개의 무늬로,중단과하단의 오동나뭇잎은 각각 5개의 무늬로 되어 있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소지했던 칼을 뜻한다. 그보다 한 급 낮은 것은 5-3-3형식(五三桐 : 상단의 오동나뭇잎은 5개의 무늬로,중단과 하단은 각각 3개의 무늬로 되어 있다)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다이묘(大名)급 장군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사한 칼이다. 전남 화순의 해주 최씨 문중에서 보관해오는 칼은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칼은 무로마치 막부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서 기마부대에서 사용하는 나카마키(長券) 형식의 칼이다. 단검(短劍), 중검(中劒), 장검(長劒)가운데 약 2미터 길이의 이 장검은 말에 탄 사람이 상대방 말의 발목을 자르는 데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서 약 30년간 유행되었던 칼이다. 또한 이 칼을 만든 사람인 '모루미치(盛道)'는 일명 ‘미노(美濃)칼'의 한 분파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고향이자 그의 무기고 역할을 했던 미노 지방의 모루미치 가문은 1532년(天文 1) 경부터 세력이 커지기 사작하여 무로마치 시대(1394~1595)에 전성기를 맞았던 일본 칼의 대표적인 존재였다. 이 시기는 제철 기술이 발달하고 무사들의 영토 확장 욕구가 강해진 나머지 매일같이 전쟁이 벌어졌던 전국시대로,칼은 외형상의 멋보다는 실용성과 견고함이 특별히 중시되던 시대였다. 이와 같은 역사를 지닌 칼이 '해주 최씨' 문중으로 들어온 뒤 그 칼은 또 다른 역사를 만들기 사작했다. 금산, 무주 지방에서 패한 고바야카와 부대와 다른 왜적들은 일단 성주와 개령 방면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경상우도 지역이 다시 위험에 빠졌다. 경상우도 순찰사 조종도는 최경회의 전라우의병에게 속히 도와달라는 원군 요청을 해왔다. 최경회는 그의 골자부대 의병들에게 경상도 구원을 위한 출정을 명령했다. 그러자 대원들은 경상도 방어에 대한 부당함을 들어 완곡하게 거부했다. 왜적의 기세가 사방으로 확산돠고 있는데 어째서 호남지방을 버리고 먼 염남지방을 구원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최경회가 그들을 꾸짖었다. "호남지발도 우리나라 땅이요 영남지방도 우리나라가 아닌가? 의(義)를 위해 장수가 된 사람들이 어찌 지역의 멀고 가까운 것을 따져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때 최경회는 지역적 차별성 때문에 국가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게 될 것을 크게 우려했다. 또한 전쟁 시기인데도 당쟁과 지방색의 폐단으로 국가의 시련이 더욱 커지고 있는 현실을 가슴 아프게 여겼다. 최경회의 정치적 중립성은 이후 그의 행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그는 1592년 7월 26일 의병을 일으켜 1592년 10월 경상도로 들어온 후 죽을 때까지 9개월 동안을 줄곧 경상도에서만 지낸 유일한 호남 의병장이었다. 불평하는 장수들을 회유하여 남원을 출발한 최경회의 군은 운봉,함양을 지나 산음(山陰)으로 향했다. 한편 1592년 10월 초,왜장 도요토미는 호소카와(細川忠與),가토(加藤光泰),하세가와(長谷川香),기무라(木村重尙) 등에게 명령하여 5만 명의 왜군을 이끌고 부산에서 진주로 진격하도록 했다. 10월 3일 적병은 길을 나누어서 진주로 진격해 왔다. 한 부대는 말티고개(馬峴)를,다른 한 부대는 불천(佛遷)에서 진주를 바로 공격했다. 이때 병사 유승인이 나아가 막다가 진주성으로 물러났으나, 진주성에 영주(領主)가 둘이 되면 명령이 통일되지 못한다고 하여 유승인의 진주성 진입이 거부당했다. 성 안에서는 김시민을 수장으로 하여 항전을 준비했다. 이때 성 안에는 3,700 여 명의 남녀가 있었는데,여자에게도 모두 남장을 시키고 성문 위에는 용대기(龍大旗)를 꽂고 일렬로 대오를 지었다. 6일 아침 1천 여 명의 왜병 총수가 일제히 성 안을 향하여 총을 쏘아댔다. 천지를 뒤흔드는 이 혼란한 시기를 이용하여 왜병 3만 명이 일시에 성안으로 달려들려고 하였다. 이때 김시민은 악공을 시켜 일부러 누대 위에 올라가서 피리를 불게 하고 궁시(弓矢)와 탄환은 되도록 아꼈다. 그리고 도끼,낫. 물 끓이는 가마솥을 준비시켰다. 10일 밤 사경(四庚) 무렵, 왜병은 퇴각하는 듯 하다가 모든 횃불을 끈 채 동문으로부티 공격을 시작했다. 적은 사다리를 놓고 개미떼같이 성벽을 타고 올라왔다. 김시민의 군은 성 위에서 탄환과 화살과 불덩이,끓는 물과 돌멩이를 폭포같이 쏟아 부었다. 적의 시체는 산처럼 쌓였다. 이때 김시민은 적이 쏜 탄환에 왼쪽 겨드랑이를 맞고 쓰러졌다. 이것을 본 곤양 군수 이광악(李光岳)이대신하여 적장을 쏘아 쓰러뜨렸다. 다음날 오전 8시경 적은 퇴각했다. 이 싸움에서 곽재우는 진주성 북쪽 비봉산에 진을 쳤고,의병장 최강과 이달은 남강 건너편 두골평(頭骨坪)에 진을 치고 적의 후면을 위협했다. 의방장 김준민의 군대는 사천에서 응원하고,최경회의 군은 어속령(魚束嶺)에서 맹공을 가했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안팎의 전략이 잘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최경회의 군은 직접 성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으나 진주 인근에서 적의 후방지원을 차단시키면서 진주성 안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적들은 진주 외곽으로 후퇴하여 성주와 개령을 다시 점령하였다. 제1차 진주성 전투 이후 최경회 군의 전투는 주로 진주 외곽 지역에 산재해 있는 왜군을 격파하는데 주력했다. 최경회 군은 산음에다 군사를 주둔시키고 김면 군과 합세하여 개령을 공격했다. 그러나 개령에서 패배했다. 다시 전라도 관군과 전라도 의병 및 경상도 여러 군사가 합세하여 성주로 진격하였으나 또 실패했다.군량미와무기의 부족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경상도 의병장들은 지역 유지들에게 통문을 띄위 원조를 요청하였다. 10월 20일부터 11월 중순까지 전라좌우 의병과 김면 군이 연합전선을 이루어 개령 공격전을 펼쳤으나,왜적의 기세가 치열하여 쉽게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자 11월 중순 이후 전라좌우 의병이 분리되어 최경회의 우의병은 김면 군과 함께 개!령에서, 임계영의 좌의병은 정인홍 군과 더불어 12월 중순까지 성주성 수복전을 주도하였다. 임계영 군은 정인홍 군과 연합하여 12월 14일 총공세를 펴기로 하였다.그런데 정인홍 군은 약속를 어겨 참전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임계영 군 단독으로 성주성을 공격하였는테,이때 부장 장윤이 앞장서서 적과 접전을 벌였다. 전투는 해가 저물고 나서야 적의 패배로 끝났다. 이처럼 진주성과 경상도 일대에서 전라도 의병장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처럼 전라도 좌우 의병들의 활약상이 크게 두드러지자 비변사에서는 "각 도의 의병 가운데 곽재우, 최경회, 임계영이 거느린 군사는 쓸 만해 보입니다. 이들 세 사람이 바야흐로 경상도에 있으니 급히 군사를 정돈하여 근왕(勤王 :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것)하게" 하도록 왕에게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영남지역 유생들이 비변사의 제의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유생들의 논리는 단호했다. 진주성 전투에서 경상도 의병만으로는 왜적을 물리치기가 불가능하여 전라도 의병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했다. 제I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로 전라도가 안전해졌고, 전라도의 안전은 다시 경상도의 안전을 가져왔다고 증언했다. 나아가 전라도와 경상도의 안전으로왜적은 경성지역에만 잔존하고 있기 때문에 왜적를 몰아내기는 쉬울 것이라는 지적도 했다. 그리하여 경상도를 수호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고 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므로 비변사의 제안은 취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김성일 또한 의병장들의 근왕을 중지할 것을 조정에 건의했다.『난중잡록』 계사년 1월 8일자는 김성일의 건의문을 전하고 있다. 고을이 함락된 뒤로 겨우 대여섯 개의 빈약한 고을만이 남았는데,그나마 흉악한 왜적이 사면에 들끓어 기어코 삼키려 하는 형세입니다. 이런 때는 호남 의병이 머물러 있으면서 대처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하루아침에 군사와 무기를 거두어 물러간다면 왜적들은 후원군이 없음을 알고는 마구 몰려와 짓밟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를 회복하기위한 근거지조차 남지 않게 될까 염려됩니다. 결국 왕은 지역 유지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의병장들의 근왕을 중지케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제1차 진주성 전투 7|간 중 의병장들의 전과가 일마나 중요한 공헌을 했는가를 보여준다. 경상우도와 전략적 증요성을 증명해 준 것이 제1차 진주성 전투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왜적들이 지름길을 택하여 곡창지역 호남평야를 장악하여 조선에서 직접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한 전략적 전투였다. 이 같은 원대한 목적을 달상하기 위해 경상우도의 방어 거점인 진주성을 장악하려는 것이였다. 제1차 진주성 전투가 시작되기에 앞서 경상우도에서 전라도 의병장들에게 지원을 요청해오자,대부분의 전라도 의병들이 가까운 전라도를 두고 어째서 멀리 있는 경상도까지 가서 방어전을 펼쳐야 하느냐고 드센 반대를 했을 때,최경회가 그들을 달래고 설득시켰던 논리도 바로 경상우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임진왜란 때 왜군의 군사 행동은 조선의 주요 거점만을 연견하는 점선에 불과했을 뿐 결코 조선과의 전면전 양태는 아니었다. 따라서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활동은 승패를 떠나 우선 왜적에게 그들의 후방 기지 사수를 위한 수비병 증강을 요구하게 되었고,이 같은 현상은 곧 전방과 후방 사이의 연락 두절과 생활필수품의 원활한 보급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다. 왜군들은해로를 통한 보급품 운송을 계획했지만 이순신의 수군에게 저지당하자 보급품의 안전한 공급이 불가능해져 평양에서 더 이상의 북진이 어렵게 되었다. 이때 왜적은 이미 점령한 경상좌도를 기반으로 하여 우도를 점령하고 나아가 호남평야까지 장악하려고 했다. 의병장들도 이 같은 군사적 중요성을 인석하게 되면서 이 지역의 철저한 방어를 위해서는 흐남의 곡식을 이용해서라도 끝까지 사수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경상우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임진왜란 동안 진주 사람들의 결사 항전태세는 계속화었고,왜군에 대한 저항은 격렬할수밖에 없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호남을 공격하는 갈은 크게 세 갈래로 잡을 수 있다. 첫째는 창원→함안→정암진→의령→삼가→거창→안의→육십령→옹치 또는 거창→함양→팔량치. 둘째는 창원→진주→단성→산청→함양→팔량치 또는 함양→거창→안의→육십령→장수. 셋째는 진주→하동→섬진강→광양→구례. 이밖에 우회할 수 있는 길은 영산→창녕→낙동강→초계→합천→거창, 또는 낙동강→고령→성주→거창, 또는 지례→우지→거창. 또는 낙동강→고령→성주→거창. 또는 지례→부항현→대덕현을 넘어가는 길도 생각해볼 수 있다. 결국 영·호남의 경계는 덕유산과 지리산으로 뻗은 소백산맥의 준령들인데,이 준령을 넘나들 수 있는 목은 섬진강,팔량치,육십령, 부항현뿐이다. 또한 이들목에 접근하기 위한 유일한 외곽지대 요충이 창녕의 정암진, 초계의 적포,고령의 무계,성주,지례,우지현이다. 왜군은 가장 기본적인 세 갑래의 접근로가 의령에서 곽재우 군에게 막히자, 이번에는 우회로를 이용하여 호남 진출을 획책했다. 따라서 우회로의 전략적 중요성이 급증했다. 호남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이같은 요충지를 사수해야만 했다. 이 중요성을 해결해준 것이 의병들이었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 때문에 진주성은 언제가 되었든 또 다시 처절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왜냐하면호남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을 확보하기 위한 유일한 전략적 거점이 진주였기 때문이다.12) 12) 정동주,앞의 책.
2) 최경회의 경상우병사(右兵使) 임명 제1차 진주성 전투 이후 최경회는 조정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선조실록』권36, 26년 3월 19일자 기록은 이런 사실을 전하고 있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적이 물러나지 않고 일로에 진을 연이어 치고 있으니 한쪽에서 멋대로 충돌을 일으킬 염려가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최경회는 의병장으로서 정예병을 이끌고 지래,거창 두 지역 사이의 요충지대를 차단하였으니,호남 한도와 영남 우도가 여태까지 보존된 것은 모두 그의 힘입니다. 이제 남원 부사를 제수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를 철수하고 먼 곳으로 부임하게 한다면 보장(堡障)이 걷히게 되어 방어가 염려스럽습니다. 피차 가고 머무는 것이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니,최경회를 남원 부사에 체직하여 일이 안정될 때까지 그대로 의병을 거느리고 유방(留防)하게 하소서. 상(上)이 따랐다. 조정에서는 최경회의 공로에 대해 충분한 상훈을 내려야 한다는 것과,그 상훈 뒤에 닥쳐올 적의 방비에 어려움이 있다는 서로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경회를 다른 지역의 관리로 보내지 않고 그에게 새로운 형태의 관직을 내림으로써 최경회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보자는 의중을 드러냈다. 『선조실록』권37, 26년 4월 21일에는 이 갈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전에 이광악을 경상우병사에 제수했는데(1593년 1월 15일 성주에 주둔하고 있던 적이 남으로 내려오자 영·호남의 모든 군사가 진주성으로 들어가 지켰는테,이때 경상우병사 김면이 죽자 광양 현감 이광악으로 하여금 이 직을 대신하게 했다.),이제 서울에 있던 적이 물러갔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충청도 이상은 한숨을 돌리게 된 것 같습니다만 영남이 가장 긴요하니장수를 뽑아 임무를 맡길 때 십분 면밀하게 선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광악은 재기가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지 못하다고 하는데,갑자기 군중(軍中)에 등용되었으므로 위엄과 명망이 드러나지 못하였습니다. 의병장 최경회는 무신은 아니지만 여러 번 전공을 세워서 명성이 크게 드러났고,재능도 책임을 감당할 만하다고 합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호남의 의병은 이미 그와 찬숙해 있으니 사변이 안정될 때까지는 그대로 직을 맡겨도 되겠습니다. 그러나까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전공과 재능이 경상우병사직을 맡을 만하다고 인정받은 것이다. 그런데다 적의 남하에 따라 경상도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최경회는 다시없이 필요한 인재로 인식되었음을 말해준다. 『선조실록』권38,26년 5월 16일에는 최경회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이 있다. 경상감사 김늑은 인물이 온화하여 평시에는 한 지방의 임무를 맡는 것이 괜찮으나,지금은 군무의 조치가 평시보다 열 배는 되므로,진실로 재주와 명망이 특이하고 지모와 사려가 특출한 사람이 아니면 이 중임을 감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최경회는 새로 병사(兵使)에 임명되었는데 이 사람은 침착하고 중후하며 지략이 있어 감사에 합당하니,그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소서. 그 다음으로는 이시언과 곽재우도 임명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조정에서는 최경회를 경상우병사에 임명한 지 한달 여 만에 경상 감사로 승진시켜 경상도 방어 전략이 성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그라나 이 논의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고 김늑이 그대로 경상 감사직을 유지했다.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직에 임명된 사실이나 경상 감사에 천거된 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특히 경상우병사에 임명된 사람이 호남 출신의 최경회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당시 경상도의 군사적 위기와 동시에 절대로 물러서서는 안되는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해볼 때 더더욱 그렇다. 최경회가 임명되기 전 경상우병사는 이광악이었지만 그는 능력 부족으로 평가받아 최경회로 바뀌었다.이광악보다 앞선 경상우병사는 김면이었는데,남명 조식의 제자로서 영남의 세도가였던 점을 고려한다면,이광악의 뒤를 잇는 경상우병사는 당연히 정인홍이나 곽재우 두 사람 중에서 선임되는 것이 순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경상우병사라는 매우 중요한 시기의 직책이 영남을 대표하는 의병장에게 주어지지 않고,놀랍게도 최경회가 1593년 4월 21일 경상우병사에 임명된 것이다. 군사적·정치적 능력으로 볼 때 최경회보다 뛰어난 경상도 출신 의병장들이 있눈데도 불구하고 이들을 모두 배제시키면서 전라도 출신 의병장을 임명한 데는 그 나름의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16세기 말 조선의 정치적 상황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른바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동인 세력과 서인 세력이 서로 반목질시하면서 끊임없이 정쟁을 일삼아온 조선정치는 급기야 임진왜란의 침략전쟁 중에도 소모적인 내분과 망국적인 질시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러한 분파적인 정치세력끼리의 대립은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인 의병이 일어날 때에도 서로간의정파 소속 문제 때문에 의병의 참여형태나 운용방법에서 갈등이 생겼다. 최경회는 엄밀히 따진다면 서인 계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최경회는 전쟁 시기인 그 시점에 당색과 지방색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에 절대로 그런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영남 의병장들과 화합하여 왜적을 격멸시키는 데에만 몰두했다. 사실 김면이 경상우병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관과의 대립을 피하고 관군과 의병군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진력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조정에서도 당파와 지방색이야말로 왜적보다 무서운 내부의 적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던 셈이다. 영남 사람이라는 세력을 기반으로 한 정인홍이 경상우병사 임명에서 배제된 이유는 그가 의병을 사병화하여 향촌에서의 사소한 이익과 권리를 챙기는 데 이용한다는 여론 때문이었다. 절의를 숭상하는 남명 학문을 계승한 그의 이 같은 태도는 지나치게 원칙론에 머물며 상대 세력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독선적 성향에 기인한다. 그 결과 그는 민심으로부터 원망을 들으면서 시대적인 소명과진실에서 멀어져 있었다. 겨기에 비해 최경회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임진년 9월 경상도 원군요청 때 부하들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설득시켜 기어코 제때에 지원했다. 부하들의 반대 의견에 대하여 그는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일축하지 않고, 지원하는 것이 왜 옳은지를 충분히 설명해줌으로써 의병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부하들에 대한 그의 이 같은 세심한 배려와억압적이지 않은 인간적 태도는 곧 그의 의병군이 강해질 수 있는 숨겨진 비밀이기도 했다. 의병들은 그런 최경회를 전적으로 신뢰했고,최경회는 부하들의 신뢰에 대하여 전투에서의 승리로 답했다. 최경회와 의병들 간의 굳건한 신뢰와 그로 인한 단결력은 다른 의병군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답고 빛나는 교훈이었다. 전라도 출신 의병들을 이끌고 경상도로 온 최경회와 그의 의병군들은 경상도 의병장들과 잘 융합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미묘한 문제가 될 수 있는 경상우병사 임명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어느 지역이나 계열을 강조하는 인물을 선택하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인물을 선정하려 했다. 전쟁터에서 당리당략만 따르면서 사사로운 이익만을 챙기는 저 숱한 정치적 인물보다는 국가의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 진력할 것으로 보이는 인물을 찾던 중 최경회가 발탁된 것이다. 그라나 조정의 이러한 목적은 결국 실패했다. 최경회를 경상우병사로 천거하자 이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시기하면서 정치적 이해관계를 겉으로 드러낸 정파도 있었는데 이러한 갈등은 결국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극명하게 드러났고,이 전투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참담한 패배가 예견되어 있었다. 지방색의 모순과 폐해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처럼 극명하게 드러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슬픈 일이다. 논개나 부군이 의병장으로서 왜적과의 전투에 참여한 뒤부터 그 전과는 사뭇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전쟁 전의 생각이 주로 최경회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전쟁 이후로는 최경회의 의병 활동과 의병들의 목숨을 건 행동에 대한 경외심과 자신도 그 활동에 참여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자주 경험하게 되었다. 최경회의 나이는 벌써 62세였다. 그런데도 피가 끓는 청년들과 함께 밤낮을 안 가리고 전쟁터를 누비면서 의병들을 지휘했다. 의병은 나라와 겨례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목숨을 내걸고 적과의 전투에 나선 의에 살고 의에 죽기로 맹세한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의 의로운 마음을 더욱 강하게 키위주는 것은 그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의 도덕적 품행이라고 입버릇처럼 되뇌던 최경회를 떠올릴 때마다논개는 새삼 경외감이 커졌다. 그리고 최경회의 몸을 돌보지 않는 그 같은 큰 행동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왜 그토록 자신과 가문의 현실적 이익이나 명예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위험하고 힘든 전쟁터에서 앞장을 서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일 때마다 논개는 골똘히 그 생각에만 때달리곤 했다. 그러면서 최경회와 함께 살어온 지난 15년 동안 논개 자신의 마음속에 항상 자리해 온 최경회에 대한 생각들을 다시금 뒤돌아보게 되었다. 크나큰 은혜를 배푼 은인, 변방의 현감이나 군수 혹은 부사로만 전전하면서도 단 한 번 불평을 입 밖에 내지 않고 부임지마다 최선을 다해 백성을 위하던 정직하고 청빈한 삶의 태도, 부인 나주 김씨에 대한 정중하고 자상한 예의,부모와 형제를 생각하는 남다른인간에의 표현을 볼 때마다 논개는 그저 최경회의 그늘에서 숨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시없는 행복으로 알았다. 그때는 그저 그렇게만 느끼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젠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기 사작했다. 15년 전의 그 운명적인 재판이 있은 뒤로 최경회의 은총 아래서 살아나 철이 들고 인간의 길을 깨닫기까지 그 숱한 날들이 어떤 간곡한 인연의 힘으로 오갔는지를 새롭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되물을수록 점점 더 알 수 없는 의심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쩌면 그 같은 의심은 논개 자신으로서는 깨닫기 불가능한 차원의 문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였다. 하지만 최경회가 그토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예순이 넘은 몸으로도 전쟁터의 위기와 극한 상황 속에서 헌신하고 있는 이유와,논개 자신의 서럽고 구차한 육신과 운명을 최경회의 삶 속으로 이끌어 지켜주고 키워준 까닭이 모두 크고 깊은 알 수 없는 차원에 속하는 한 가지 능력에서 나왔으리라는 어렴풋한 예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예감은 차츰 확신으로 바뀌었다. 의병들에게서도 격조 높고단호한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확신에 찬 신념과 전장에서의 결연한 죽음을 목격하면서 논개는 그저 한 사내를 흠모하고 사랑받기만을 바라며 사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의병들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인지를 불쑥불쑥 상상해 보기도 했다.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의 정치적 모순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었다. 지배계급의 당쟁은 국론을 분열시켰고,정치와 관료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여 조선 사회는 붕괴되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지 20 여일 만에 서울이 함락된 것은 조선의 정치가 얼마나 부패하고 무능했는가를 극명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다. 관료들의 민중에 대한 수탈과 오랜 가렴주구로 민심은 정부를 멀리 떠나 있었다. 그런 중에 왜적의침략을 받게 된 조선 정부는 왜적을 막기 위해 군대를 급히 정돈하고 부족한 군사력을 보충하려 했지만 군사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서울이 왜적에게 함락당하고 왕이 피난길에 오르자 민중들은 왕의 피난길을 막고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다. 왕이 서울을 떠나자 노비들은 그들의 노비문서를 보관하고 있던 장례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고 이 때문에 궁궐이 모두 불타 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불행 가운데서 일어선 것이 의병이다. 국가를 책임진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징병에는 결연히 반대했던 민중들이었지만,민중의 지도자가 나서서나라와 민중을 구하자는 절규에는 마치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는 심정과 같이 기꺼이 응했던 것이 의병이다. 논개는 최경회가 장수 월강평야에서 장대(將臺)를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최경회의 '골자부대'가 승승장구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논개는 전신을 휘감고 도는 묘한 감동의 전류를 체험하면서 조금씩 정신적인 변신을 향하여 눈뜨기 시작했다. 최경회는 무주 적상산성전투 이후로 줄곧 경상도 지역에만 머물렀다. 장수에서 백릿길 또는 그보다 약간 먼 곳에서 전투틀 벌였기 때문에 논개는 거의 빠짐없이 최경회의 건강과 안부를 들을 수 있었다. 제1차 진주성 전투가 있은 후 겨울로 접어들었다. 최경회의 골자부대가 겨울을 나야 하는 지역은 지리산과 덕유산의 동쪽과 북쪽이었기 빠문에 혹독한 추위, 눈보라와의 싸움만 해도 이며 목숨를 내걸다시피 해야만 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은 마냥 부족할 따름이었고,더구나 최경회는 예순을 넘긴 노인이었다.하지만 단 한 번도 앓아누운 적은 없었다. 만사를 인내 하나로 넉넉하게 다스려냈다. 논개는의병의 아내들과 함께 겨울 내내 솜을 넣어 누빈 갑옷을 지어 전선으로 보냈고,전사한 의병의 가족과 슬픔을 함께 했다. 겨울을 나는 동안 최경회의 골자부대는 추위와 불리한 전투 상황으로 많은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엄청난 시련과 슬픔 속에서도 전선을 내놓지 않는 의병들의 모습를 보면서 논개의 정신적 변화는 차츰 또렷해지는 목적의식으로 몸을 바꾸어갔다. 그러던 중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준 최경회의 부장한테서 는개는 매우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것은 1593년 2월 12일부터 벌어진 행주산성전투에 관한 소식이었다. 무엇보다 논개를 감동시킨 것은 행주대첩에서 권율 장군에게 패한 왜군이 다름 아닌 고바야카와 부대였다는 사실이었다. 고바야카와 부대라면 이미 1592년 9월 중순에 있었던 무주전투에서 최경회의 골자부대에게 치명적인 패배틀 당했던 그 부대였다. 또한 논개를 더욱 흥분시킨 것은 고바야카와 부대와의 최후의 혈전 장면이었다. 그러니까 행주산성전투가 막바지에 돌입했을 때 왜군으로서는 마지막 남아 있던 제7대 대장 고바야카와는 행주산성 서북쪽 자성(子城)을 지키던 승군(僧軍)을 돌파하고 성을 공략하기 위한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다. 승군은 동요했다. 행주산성이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때 권율도 총공격으로 맞서 왜적과의 치열한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조선관군도 화살이 다했다. 그때부터 투석전이 벌어졌다. 이 같은 절대 절명의 순간에 성 안에 있던 부녀자들이 총동원되었다. 부녀자들은 입고 있던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치마 앞폭으로 돌멩이를 날라 오기 시작했다. 돌멩이가 유인한 무기로 변한 전쟁터에서 여성들이치마로 날라다 준 돌멩이는 곧 승전의 결정적 원동력이 되었다. 논개는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에 눈을 빛내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그때까지 모호한 빛깔과 모습으로만 맴돌던 그 신비한 차원의 내용들이 보다 또렷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최경회가 지닌 그 놀라운 세계,의병들이 온몸으로 실천해 보이고 있는 그 불가사의한 자신감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방법과 기회가 한층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때 최경회는 논개에게 간략한 소식을 전한 뒤 곧장 창원에 있는 경상우병영으로 옮겨갔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날 약속을 했지만 논개는 그 약속만 믿고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조선 사회의 윤리와 인습의 질긴 껍질과 끈으로 칭칭 묶여버린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차원을 논개는 볼 수 있게 되었다. 끊임없이 계속된 뜨겁고 처절한 정신적 변신을 위한 몸부림 끝에 가까스로 깨닫게된 자아완성의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을 시작했다. 최경회는 1593년 6월 15일 진주성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우병영 소재지인 창원에서 주로 지냈다. 왜군의 총공격설이 난무하던 어느 날 충정병사 황진(黃進)이 병영으로 찾아왔다. 황진은 뜻밖에도 논개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 느닷없는 광경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는 최경회에게 논개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지난 4월 최경회가 보낸 소식을 들은 후 아무래도 장수에서 가만히 앉아 전쟁이 끝나기만을기다릴 수 없었다했다. 더구나 왜적들이 부산 쪽으로 집결한 다음 총력을 기울여 진주성을 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에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최경회가 경상우병사만 아니어도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수 있었겠지만 어느 것 하나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어짜면 지금의 이별은 영이별이 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 때문에 장수를 떠나왔다고 했다. 남자 모습으로 변장하고서 결국 최경회가 머무는 창원을 향하여 출발했다는 것이다. 논개가 육십령을 넘을 때 덕유산 산자락엔 원추리 꽃이 풀숲에 숨어서 논개의 위험한 여행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별다른 사고 없이 오다가 산청군 오부면에서 왜적의 척후병에게 붙들렸다. 왜적들은 논개를 함안 쪽으로 압송했다. 왜군의 포로가 된 논개가 함안 양곡 부근을 지날 때 마침 충청병사 황진이 최경회와 진주성 방어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그 곳을 지나고 있었다.황진의 군사들은 왜적을 발견하자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여 간단히 왜적 소부대를 소탕했다. 그 과정에서 남자로 변복한 논개를 발견했다. 논개는 최경회와의 관계와 최경회에게 가던 중임을 말했고,황진은 으아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일단 최경회에게로 논개를 데려갔다. 최경회는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논개를 더 이상 떼어놓지 못하고 남장을 시켜 진주성으로 함께 들어갔다. 한편 왜병이 서율에서 철수하게 되자 도원수 김명원과 순변사 이빈은 각 도의 장수들을 이끌고 적을 추격하여 남하한 다음,김명원은 선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6월 7일 감사 권율과 도원수직을 교대한 뒤 의령현 등 여러 읍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이때 도원수 권율,의병장 곽재우,경기방어사 고언백 등 관군과 의병 사이에 전술상의 문제로 의견이 분분했다. 한편 동래 등에 주둔해 있던 왜병 20 여만 명이 김해,창원을 거쳐 함안의 진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해에서는 육로로,창녕에서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수륙으로 병진하여 함안,의령, 반성을 차례로 점령했다. 왜군이 함안 일대를 분탕질하자 순변사 이빈은 급히 의령으로 와서 각 도의 장수들에게 말했다. 왜적들의 계획은 필시 진주를 함락시키는데 있으며, 지금 진주성에 있는 군사로는 성을 지키는 것이 무리이므로, 각 도의 의병을 진주로 보내어 도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각 도의 장수들은 이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또한 도원수 권율이 지강(枝江)을 건너 왜적을 공격하려고 하자 진주성을지켜야 한다는 수성론(守城論)과 진주성을 비워버린 채 외곽에서 적의 기세를 꺾자는 공성론이 대립하게 되었다. 수성론자들은 만약 진주성을 포기하면 적은 내지(內地) 깊숙이 쳐들어와 그 환난을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이니 당장 진주성으로 들어가 적을 막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성파들의 주장이 더 강했다.『난중잡록』,『선조수정실록』에는 공성파의 한 사람이었던 곽재우의 주장을 적고 있다. "왜적의 세력이 강성하고 아군은 오합지졸이어서 싸울 만한 사람이 적을 뿐만 아니라 군량미도 없으니 경솔하게 전진하지 못한다……, 오직 임기응변할 수 있는 자만이 제대로 군사를 부릴 수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적을 헤아릴 수 있다. 지금 적병의 성대한 세력으로 보아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기세를 떨치고 있는데,그들을 3리 밖에 안 되는 외로운 성으로 어떻게 방어하겠는가?나는 차라리 밖에서 원조할지언정 성에 들어가지는 않겠다……, 이 몸이 죽는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나 전투 경험이 많은 노련한 군졸들을 어떻게 차마 버릴 수 있겠는가?" 곽재우는 진주성을 사수하기보다는 외곽 지역에서 적을 공격하여 적의 예봉을 꺾는 게 더 좋은 전술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수성론과 공성론의 대립이 험악해지자 순변사 이빈은 곽재우에게 의령 정암진의 수비를 요구했다. 그리고 최경회,황진,고종후, 선거이, 홍계남은 차례로 진주성에 들어갔다. 도원수 권율은 전라병사 선거이에게 전령을 보내어 성에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성을 나가 일시에 산청방면으로 퇴각하자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은 크게 동요했다. 최경회,김천일,황진은 동요하는 군사들을 진정시키는 한편 진주성으로 몰려든 3만 여명의 민간인들에게 질서를 유지하라며 위로와 진정책을 함께 사용했다. 그 엄청난 민간인들 중에는 멀리 울산이나 경주에서 피난 온사람들도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부터 1593년 6월 중순에 이르는 15개월 남짓 남해안을 낀 경상도 지역. 즉 경주,울산,부산,마산,거제,함안,고성,충무, 남해,사천, 하동 등지의 주민들은 참혹할 지경으로 왜군들에게 짓밟혔다. 젊은 남자들은 모두 의병이나 관군으로 전쟁터에 나가고, 집에는 노인과 부녀자,어린아이들 뿐이었다. 부녀자들이 겪은 수난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견디다못한 사람들은 피난을 떠나 진주성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비록 숫자로는 3만 여명이라 했지만 왜적과 싸울 수 있는 전투력을 전혀 지니고 있지 못했다. 이들 피난민들의 문제가 새로운 걱정거리였다. 이때 논개와 젊은 부녀자들이 나섰다. 좁은 성 안에서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행주산성전투에서처럼 각자 역할을 맡아서 참여하자는 결의를 하고 즉시 조직에 나섰다. 물을 끓일 사람,끓는 물을 성벽 아래로 쏟아 부을 사람,돌멩이를 주워 모을 사람 등으로 역할을 분담시켰다. 공성론자들의 진주성 입성 거부는 다른 의병장들에게 여파를 미쳤다. 특히 진주성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하던 이빈 조차도 산청 쪽으로 피산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 같은 미묘한 분위기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최경회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기도 했다. 또한 정파가 다른 김천일 계열의 서인에 대응하는 동안 계열의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경상우병사직까지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에게 넘겨준 점이 정파적 대결을 가속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결국 공성론자들이 주장했던 전술,즉 분산 작전으로 왜적에 대항하면서 적의 예봉을 꺾는,이른바 차고 빠지는 전술은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적이 가까이 오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모습도 보였다. 왜군이 다시 의령 일대를 분탕하자 도원수 권율과 이빈 등이 모두 쫓겨 함양을 거쳐 남원으로 도망하고,정암진을 지키던 경상도 의병들도 이곳을 포가한 채 퇴군하고 말았다. 한편 이같이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최후의 결전을 앞에 둔 진주성 안의 형편은 몹시 어지러왔다. 진주 목사 서례원(徐禮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장 김천일이 성 안을 지휘했다. 얼핏 보기에는 지휘 계통이 문란이자 난맥상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일이었다.13) 13) 정동주, 앞의 책.
3) 진주성의 최후 왜군이 진주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왜군은 치밀한 작전계획에 따라 병력을 여섯 부대로 나누어 각각 책임 구역을 할당하고 조직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성의 북쪽은 가토 기요마사의 지휘 아래 2만 5,600명이 포진했다. 이 부대 안에는 21명의 부장(副將)이 용맹을 떨치는 병사들을 지휘했는데 그 중엔 저 유명한 스모의 제2인자이자 괴력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져 이 부대를 상징하는 천하무적 기다 마코베도 있었다. 성의 서쪽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휘를 받는 2만6천명, 성의 동쪽은 우키타의 부대 1만8,800명,, 모리가 책임자인 제4부대 2만2,300명은예비대로 대기시켰다. 고바야카와가 지휘하는 제5부대는 가토를 지원하게 했고,요시카와의 재6부대 약 1천 여 명은 남강 오른쪽의 언덕에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응원군을 차단시키기 위해 매복했다. 진주성은 천해의 요새였다. 만약 적절한 응원군이 외곽에서 지원하고,상호 연락만 된다면 웬만한 공격에는 견딜 수 있는 훌륭한 성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외곽지대와 연락이 두절되고 응원과 보급이 없다면 흡사 바다 한복판에 떠 있는 작은 배와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되는 곳이기도 했다. 제2차 진주성전투는 경상우도 관찰사의 절제를 받으면서 진주목사가 통솔하는 본주군(本州軍)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수행되었던 제1차 전투 때와는 상황이 크게 달랐다. 우선 적군이 총력전을 펼치고 나오는 만큼 아군도 총력전으로 대응해야만 했다. 그러나 적이 함안으로 진출하자 관군과 의병들은 모두 갖가지 구실을 붙여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 버렸다. 한편 명나라군은 대구, 남원,상주에 머물면서도 조선 정부의 거듭되는 지원요청에도 불구하고 원병을 파견하지 않은 채 방관만 했다. 따라서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성 안으르 들어간 군사들은 성이 완전히 포위된 채 성 밖 백 리 안에는 수성군을 후원하기 위한 단 한 명의 아군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고립 속에 놓였다. 거기에다 진주성 안의 군사는 겨우 3천명 남짓했다. 왜군이 정예병9만 3천명으로 총공격을 펼치는데 아군은 겨우 3천 여 명의 혼성 군으로 맞섰다. 나머지 수 만 명은 피난민들이기 때문에 전투력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후 계속된 왜군들의 약탈과 방화로 양식은 모두 바닥이 났고,전쟁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하자 양식은 더욱 귀해졌다. 전주성 안에 모여든 수 만 명의 피난민들은 참담하게 굶주리는 중이었고, 군사들도 군량미가 바닥나서 절망적인 상태였다. 거기에다 외부와의 연락이 모두 차단되고 일체의응원과 물자 원조가 없었기 때문에 전투를 치르지 않고 왜군들이 포위망을 고수하기만 해도 성안 사람들은 머지않아 굶어 죽거나 투항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벌써 패색이 짙었다. 왜적들은 진주성을 지원하는 군대를 차단하기 위해 진주성을 중심으로 모든 인근 마을 곳곳에다 군대를 중첩적으로 분산하여 주둔시켰는데,그 병력들은 진주성 사방 백 리 안에 꽉 들어차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첫날의 전투상황을 놓고 지휘관들 사이에는 다시 갈등이 표출되었다. 표의병(彪義兵: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희복은 그의 고향 순천에서 아무 벼슬도 없이 실다가 아우인 희열과 함께 의병으로 참전, 진주성 함락 때 전사했다. 두 형제의 의로운 정신을 칭송하는 뜻) 부장(副將) 강희복은 적의 세력이 너무 강력하므로 관군의 구원요청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김천일도 동의했다. 그리하여 임우화를 구원 특사로 파견하기로 했다. 그런데 임우화는 톡사로 가던 도중에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다. 그날 이후 왜적은 포로가 된 임우화를 공격 때마다 역이용했다. 결박당한 임우화를 공격진 맨 앞줄에다 세워놓음으로써 성 안의 병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적이 가까이 다가오지만 동료인 임우화 때문에 활을 쏘지도 못했다. 그런 틈을 이용하여 왜적들은 공세를 취했다. 몇 차례 그런 상황을 겪게 된 성안의 장방들은 사기가 떨어졌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왜적들의 간교한 술책에 이끌려 다닐 수만은 없었다. 첫날 전투 이후 적은 다시 작전을 바꾸었다. 진주성은 서쪽과 남쪽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기 때문에 이곳으로는 공격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 나머지 동쪽과 북쪽 그리고 서북쪽은 인공적인 성벽을 쌓아올렸고, 성 바깥에는 깊고 넓은 인공 호수를 파서 성벽을 에웨싸도록 해놓았다. 웨냐하면 동쪽과 북쪽은 성보다 훨씬 높은 산이 빙 둘러쳐져 있어서 성벽 접근이 비교적 쉬웠다. 그래서흐수를 만들어 둔 것이다. 왜적은 그 호수를 끊고 물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물이 빠져 나가자 흙을 퍼붓고 돋우어 평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성 밑에 땅굴을 파서 장대석을 뽑아버림으로써 성벽을 붕괴시켜 성을 함락시키려 했다. 워낙 수가 많았기 때문에 위협은 점점 커졌다. 밤낮 없이 쉬지 않고 전투가 벌어졌다. 장마가 시작되어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왜적의 희생 못지않게 아군의 피해도 컸다. 사흘째 되는 날 최경회와 김천일은 성루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흡사 구원병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김천일이 구원병이 온다고 소리쳤고,성 안 장병들은 큰북을 치면서 기뻐했다. 그리고는 성루에 올라와 구원병이 온다는 쪽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구원병은 어디에도없었다. 앞에는 적병들 뿐이었다. 김천일의 눈에 환시현상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만큼 구원병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그 무렵 고성 의병장 최강(崔堈)은 진주를 구원하려고 했으나 적의 세력이 워낙 막강하여 손을 쓰지 못하고 다시 고성으로 돌아갔다. 이 와중에 최강을 따라왔던 함안의 피난민들 300 여 명이 왜군에게 포위당해 위기를 맞았다. 최강은 왜적과 싸워 피난민들을 구출했다. 하지만 곽재우에 의해 제의되었던 그 게릴라식 유격전이나 측면 또는 배후 공격 같은 것은 어디서도 시도되지 않았고, 명나라장군의 명령으로 진주를 구원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명나라 장수들은 모두 싸우기를 거부했다. 아군들은 관군,의병 할 것 없이 마치 강 건너 불구결 하듯 진주성이 서서히 함락되어가는 모습을 멀찌감치 지켜보고만 있는 형상이었다. 전투는 잠시도 쉬지 않고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성 안에는 죽은 사람의 시체가 비에 젖은 채 여기저기 뒹굴었고, 성 밖의 왜적들의 시체도 늘어났다. 전투는 격렬해지고,군량미 부족이 가져온 심리적 위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갔다. 왜군은 귀갑차(龜甲車)라는 것을 만들어 전투에 배치했다. 귀갑차는 나무궤짝을 바퀴가 네 개 달린 차 위에 올려놓고 군사가 안에 들어가 작동하는 신무기였다. 이는 침투에 적합한 무기인데 가토 기요마사가 발명해낸 것이었다. 전투가 계속될수록 수성군 수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왜적들은 줄어든 만큼만 병력을 보충하는 것이 아나라 본래 수보다 증강시켜 공격에 나섰다. 성 안과 성 밖의 세력은 사간이 흐를수록 그 격차가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거기에다 왜군들은 진주성 어느 부분이 취약한지를 알아낸 다음 그 부분에 집중적인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취약한 부분은 토성을 쌓아올린 동쪽이었다. 왜병들은 동문 밖에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었다. 성벽보다 높게 만든 언덕 위에 올라가 성 안을 내려다보면서 총포를 마구 쏘아대기 시작했다. 분명 왜적들의 작전 변화였다. 그러자 성 안의 수성군도 황진이 직접 이 구역을 책임지고 나서서 성 밖과의 대좌 지점에 토산을 쌓아 올려 응전했다. 흙을 쌓아올릴 때 옷과 모자를 벗어 던져 버리고 황진 자신이 몸소 흙과 돌을 져 날랐다. 이 광경을 본 성 안의 피난민들은 감격했다. 모든 피난민들이 달려들었다. 참으로 무서운 힘이었다. 수만 명의 피난민들은 밤을 새우며 흙과 돌을 날랐다. 부슬비를 맞으면서 사력을 다해 흙를나르는 피난민들의 모습엔 독기가 뻗쳤다. 새벽녘이 될 무렵 커다란 산 하나가 불쑥 솟아났다. 피난민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그러면서 성 안에 웅크리고 앉아 두려워만 할 것이 아니라 싸우자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쌓아올린 현자총통(玄字銃筒)을 발사하여 왜적들이 쌓아올린 흙더미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왜적들도 보라는 듯이 수 천 명을 동원하여 다시 흙더미를 쌓아 올렸다. 이날 낮에만 삼진삼퇴,야간에는 사진 사퇴하는 사이에 김천일은 명나라군과 관군 측에 구원 특사를 보냈다. 그러나 끝끝내 단한명의 원군도 보내오지 않았다. 왜적은 목궤(木櫃)를 만들어 생피로 덮어 싸고, 이를 각자의 머리에 인 채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다가와 성을 허물기 시작했다. 귀갑차도 동원되었다. 귀갑차를 성벽에 바짝 갖다 붙여놓고 그 안에서 성벽을 허물었다. 그러자 성 안에서는 큰 돌을 굴러 내렸다. 목궤와 귀갑차가 큰 돌에 맞아 찌그러지거나 박살이 났다. 목궤나 귀갑차 안에 있던 왜적들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화살을 퍼 부으니 적은 또다시 퇴각했다. 적은 다시 작전을 바꾸었다. 이번엔 동쪽 성문 밖에다 큰 기둥을 두 개 새우고 그 위에 판자를 설치한 후 올라가 성 안을 향하여 불붙은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화살들을 성 안의 초가들을 겨닝했고 초가는일시에 불바다를 이루었다. 이에 맞선 황진도 기둥을 세우고 판자를 깐 위에 올라가서 총포를 쏘아 적의 판자 기둥을 쓰러뜨렸다. 전세는 점점 불리해졌다. 진주 목사 서례원은 겁에 질려 당황해했다. 목사가 불안해하는 모습은 피난민들에게 당장 나쁜 영향을 미쳤다. 그러자 최경회가 당장 서례원 대신 사천 현감 장윤으로 암시 진주 목사를 삼아 성 안의 동요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장병들은 쉴 새 없이 계속되는 격전에다가 먹지도 자지도 못해 피로가 가중되어 재풀에 지쳐가고 았었다. 거기에다 연일 퍼붓는 폭우로 주무기인 활이 모두 풀어져 버려서 제대로 싸울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 전세는 여러 측면에서 대단히 불리하고 위급한 지경으로 치달았다. 그때 왜적은 항복을 종용하는 전단을 뿌리기 시작했다. 한문으로 쓴,항복을 유도하는 전단의 효과는 뜻밖으로 컸다. 피난민들 가운데 동요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동쪽의 성 한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왜적들은 이 틈을 타서 성벽을 넘으려 했고 김준민은 이를 막다가 전사했다. 왜적들은 동서 양쪽 성문 밖에다 다섯 개의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대나무를 엮어서 방책을 만들어 놓고 성 안을 굽어보면서 총탄을 쏟아 부었다. 성 안에서 순식간에 300 여명의 전사자가 생겼다. 일대 혼란이 일었다. 왜적의 공격은 다른 날과 달리 다양하게 동시다발적으로감행되었다. 커다란 나무궤짝으로 사륜차를 만들어 그 위에 수 십 명을 싣고,각자 철모를 쓴 왜군들이 궤짝을 밀어 성벽 아래에서 접근해서는 철추(鐵椎)로 성벽에 구멍을 뚫었다.성 바깥에서의 공격만으로는 성을 함락시키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성 안으로 적병을 들여보낼 계획이었다. 또한 성의 기층을 굴착하여 성벽을 붕괴시킬 공작도 병행했다. 따라서 성벽 곳곳에 구멍이 뚫리거나 기층이 파헤쳐졌다. 전부를 시작한 지 여드레째가 되는 날 진주 목사 서례원의 실수로 인하여 그의 책임구역이 야간을 틈탄 적병에 의해 거의 뚫린 상태가 되었다. 적병이 그 곳을 집중 공격해왔으나,황진·이종인을 선두로 한 성 안 사람들이 사력을 쏟아 부은 끝에 겨우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날 성 아래 잠복해 있던 적병에 의해 황진이 전사했다. 갑자기 성 안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면서 수성군들도 동요하기시작했다. 전세가 반전되기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성 안에 있던 피난민들이 성을 뛰어 넘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또 어떤 자들은 남강에 뛰어들어 강을 건너가기도 하고,계속된 장마로 불어난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들 목소리가 자욱했다, 달아나던 피난민들은 대부분 왜병들에게 살해되었지만 탈출하려는 사람들 수는 계속 늘어만 갔다. 최경회와 김천일은 이런 광경을 보면서 피눈물을 흘렸다. 끝내 관군과 의병들은 진주성 안의 수성군들과 수 만 명의 피난민들을 외면하고 말 것인가 싶어 분한 기분으로 또 울먹거렸다. 그때 논개는 피난민들과 함께 전투를 벌이며 애를 태우고 있었다. 패전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최경회는 진주 목사 서례원으로 하여금 충청병사 황진을 대신하여 순성장(巡城將)으로 삼았다. 그러나 서례원이 그 직책을 감당해낼 수 없어 사천 현감 장윤으로 대체시켰지만 장윤 또한 전사하고 말았다. 이제 성 안에는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효과적인 작전수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오후 1시경 폭우가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부터 문제로 등장했던 동쪽 성문과 성이 폭우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허물어진 성벽을 쌓을 사람도, 그것을 지휘할 사람도 없었다. 돌이 아닌 흙벽이기 때문에 여러 날 동안 비에 젖은 나머지 힘없이 무너졌고, 앞이 안 보이도록 쏟아지는 폭우는 흙벽의 복원을 가로막았다. 왜적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무너진 성문 앞으로 개미때처럼 몰려들었다. 김해 부사 이종인이 그의 병사들과 함께 창으로 육박전을 별여서 간신히 적병을 물리쳤다. 그러자 적병은 서북문을 공격했다. 서북문은 김천일의 책임구역이었다. 그라나 김천일은 물밀 듯이 밀려드는 적병을 끝내 저지하지 못한 채 촉석루 쪽으로 후퇴했다. 적병은 드디어 성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진주 목사 서례원은 도망쳤고그때까지 실아남았던 군사들도 더는 대항하여 싸울 기력이 없었다. 적병을 피하여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피난민들도 살아남기 위해 성 밖으로 달아났다. 논개는 썰물처럼 무서운 기세로 밀려 나가는 피난민 대열에 떠밀려서 성 밖으로 나왔다. 왜병들은 피난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쳤다. 논개는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하여 피난민 대열에 섞였다. 마침내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사방에서 적병이 몰려들었고 폭우는 계속되었다. 남강은 붉은 황톳물로 넘쳐 흘렀다.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즉시 조카 홍우(弘宇)를 불렀다. 홍우는 최경회의 중형 경장(慶長)의 큰 아들로서 최경회 군대 군관이자 막하 장수였다. 홍우에게 유언을 할 참이었다. 먼저 1592년 9월 우지치 전투 때 왜장에게서 빼앗은 그 칼과 공민왕이 그린『청산백운도』, 그리고 입고 있던 관복(官服)을 벗어주면서 그 물건들을 고향 화순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조카 홍우가 떠나고 나자 김천일이 달려왔다. 성이 함락되었음을 다시 확인했다. 이종인,이잠, 강희복,오유는 최후까지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결국 김천일,최경회, 고종후는 성 함락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자결하기로 맹세했다. 세 사람은 시뻘건 황톳물이 범람하는 남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 성을 완전히 장악한 왜병들의 광란이 시작되었다. 성 안에 살아 있는 것은 모조리 도륙 당했다. 성 안 곳곳에 시체가 뒹굴었고,촉석루에서 남강 북안에 이르기까지는 쌓인 시체들이 서로 겹치거나 헐틀어진 채 비를 맞고 있었다. 청천강에서 옥봉에 이르는 5리 사이에는 시체들이 쌓여 강물을 막았다. 강바닥부터 쌓인 시체들이 강둑 높이까지 차오르자 강물은 핏물로 변해 강기슭에 있는집들의 안마당까지 질퍽거렸다. 군인 복장을 한 시체보다는 피난민들 시체가 훨씬 많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인들 시체 곁에는 역시 뼈가 앙상한 젖먹이들과 어린아아들 시체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왜적들의 광란은 좀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성 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죽은 시체들을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찌르고 토막 냈다. 가축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에 띄는대로 모조리 죽였다. 이제 살아 있는 것은 왜적 자신들 뿐이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도끼를 들고 성 안에 서서 있는 나무는 모조리 찍어 베어버렸고 우물마다 독을 풀었다. 이제 서 있는 것도 모조리 사라졌다. 마지막으로진주성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평지로 만들었다. 그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지시받은 데로 진주성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그런 다음 다시 군대를 두 갈래로 재편성하여 진주성 와곽지대의 초토화에 나섰다. 제1대는 단성, 산청 등지로 나갔고,제2대는 섬진강을 따라 구례,곡성까지 진출하여 약탈과 살상을 자행하다가 7월 9일에 모두 진주로 복귀했다. 7월초였다. 가토 휘하의 여러 부장들은 제1대에 배속되어 단성,산청 등지를 유린하고 전라도로 떠난 부대들보다 일찍 진주로 돌아왔다. 이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된 그들은 전승 축하연을 준비했다. 워낙 격전을 치렀기 때문에 엄청난 사상자가 생겨났고, 병사들의 사기도 침체되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질탕하게 한판 노는 것이 좋은 방법임을 다들 알고 있었다. 전승 축하연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려면 술과 여자가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진주 관기들을 모조리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진주 관기는 옛날부터 유명했다. 제2차 진주성전투가 계속되던 중에도 진주 관기를 대표하는 한 나아든 기생이 김천일을 찾아와 격렬한 항의를 한 적이 있었다. 진주성 안에 들어와 전투를 벌이고 있던 관군 중 몇몇이 기생들이 거주하는 집으로 들어와서 기생들을겁탈하는가 하면,밤낮을 안 가리고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기생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그들 대표가 김천일을 찾아가 항의한 것이었다. 그러자 김천일은 그 기생을 건방지다고 꾸짖었다. 그러나 그 가생은 물러서지 않았다. 병사들이 군율에 따르지 않고 횡포를 부리도록 내벼려두는 것은 군율이 없기 때문이며,이런 문란한 자세로 어찌 왜적에 대항하여 이길 수 있겠느냐고 따져 묻자 김천일이 그 기생의 목을 베어버린 일도 있었다. 지난 전투 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관기들은 왜적들의 소집에 전율했다. 그때 진주성 밖의 작은 암자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논개는 성 함락 이후의 소식을 낱낱이 듣고 있었다. 최경회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논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은혜와 사랑 모두를 승화시킬 묘책을 찾고 있던 중 진주 관기들을 소집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전승 축하연에 들어갈 수 있는 조선 사람은 진주 관기들뿐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논개는 마침내 그토록 오래 꿈꾸어오던 자아완성의 기회가 왔음을 깨달으면서 한층 더 냉철해졌다. 은밀한 수소문 끝에 진주 관기들이 7월 초순의 어느 날 오후에 촉성루로 집결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논개는 관기들 틈에 끼어 촉석루까지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각오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왜장 한 놈은 죽이고 자신도 죽을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 자신이 기생 신분으로 가장하여 왜장을 죽인 다음 생기게 될 세상의 오해와 능멸 따위로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망설여졌다. 최경회의 부실로서 최경회를 따라 자결해 버린다면 한결 편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결해 버린다면 정절을 지킨 열녀가 되어 해주 최씨 가문과 신안 주씨 가문의 영예가 될 것이고, 논개 자신은 열녀 반열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손쉬운 삶이 주는 명예보다는 더 높고 큰 삶을 살고 싶었다. 진주성 싸움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민중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문제는 관기들 틈에 끼어서 촉석루까지 가는 과정이었다.고심하던 끝에 논개는 장수를 떠날 때 몸에 지녔던 약간의 금붙이로 모시를 구해 치마 적삼 한 벌을 급히 만들었다. 관기로 가장하기 위한 극단적 모험이었다. 일부러 머리도 감았다. 머리를 곱게 빗어 비녀를 다시 찌르고, 새 모시옷을 입었다. 죽음과의 입맞춤을 위해 정신적 변신으로 거듭난 논개는 이제 갓 스무 살의 눈부신 여인이었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희고 부드러워 향기나는 피부였지만 죽음을 속이기 위해 마지막 화장을 했다. 관기들이 촉석루를 향해 들어서기 시작할 때 논개는 저만치 뒤처져서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그들을 따라 걸었다. 지난 전쟁 중에 여러 명의 관기가 죽거나 달아났고 더러는 중상을 입거나 해서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에 수가 많이 줄었다. 관기들의 발걸음은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어쩌면 이번 걸음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관기들은 저마다 수심이 컸다. 그런데 그날의 촉석루가는 길에는 살아남은 진주 관기 외에도 적잖은 여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전쟁에서 죽지 않은 일반 여인들이 왜병들에게 끌려가면서 발악하거나 울고 있었다. 옆 사람에게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다. 논개는 차라리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촉석루에는 주로 왜장들이 모여 앉아 있었고,촉석루 아래 땅바닥엔 왜병들이 모여 앉아 있다가 관기들과 일반 여인들이 들어서는 모임을 보고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논개는 촉석루 가까이 다가서면서 주위를 살폈다. 관기들 속에 섞여서 촉석루까지 올라가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촉석루에 올라가면 노래와 춤 그리고 술잔 시중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논개는 한 번 더 자신의 위장 잠입 목적을 떠올렸다. 면저 자결한 최경회의 직위만큼 높은 계급을 지닌 왜장을 죽일 수만 있다면 다시없는 기쁨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냉철해야만 한다.왜냐하면 누가 직위가 높은지를 짐작으로 가려내아만 하기 때문이다. 그때 촉석루 아래 강가에 작은 바위 하나가 보였다. 순간 논개는 그 바위가 자신의 목적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 직감했다. 유인책을 쓰자는 생각이었다. 미끼를 향해 달라들도록 꾀를 짜냈다. 장맛비가 잠시 그친 탓에 그 바위 면은 아슬아슬하게 물 위에 드러나 있었다. 남강은 범람을 그치긴 했으나 아직도 시뻘건 황톳물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무섭게 흐르고 있었다. 논개는 매우 위험한 모험에도전했다. 자신이 바위위에 올라가 미끼 노릇을 할 때 어떤 왜장이 걸려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도리어 능멸을 당할지도 모른다. 왜장들은 벌써 거나하게 술기가 올라 있었고,병사들도 술에 취한 모습들이었다. 논개는 아주 천천히 마치 산보하듯이 강가를 거닐기 사작했다. 촉석루에 을라간 관기들은 몹시 두려워서 주저하다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으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렇게 사간이 흐르는 동안 논개는 강가를 거닐다 말고 강물 저만치 안쪽에 끝부분만 드러나 있는 바위를 바라보았다. 위암(危巖)이란 바위였다. 물에서 위암까지는 어른 팔로 한 발은 됨직한 거리였다. 그때 촉석루 위 남쪽 난간에 기대어 앉아서 술을 마시던 왜장 하나가 아래쪽 강기슭에 눈부시게 흰옷을 입고 거닐고 있는 논개를 발견하고는 저 여자를 과연 누가 차지할 것인지 내기를 걸자고 했다.그러자 촉석루 위에 있던 왜장들은 일제히 강가에 서 있는 흰 모시옷을 입은 여인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다른 관기들도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지만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논개는 자신의 계획이 큰 차질이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제 남은 것은 왜장을 유인하는 일이었다. 논개는 물속의 위암에 다시 눈길을 주었다. 좋은 장소라는 확신이 들었다. 위암 사방은 물길이 무섭게 휘감고 돌아 다시없는 죽음의 자리였다. 논개는 신을 벗어 들고 힘껏 뛰어 위암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측석루 위에 왜장들은 더욱 호기심이 발동했다. 논개는 짐짓 촉석루 쪽을 쳐다보면서 미소를 띤 채 서 있다가 다시 옆모습를 보이면서 우수에 찬 얼굴로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최경회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나간 19년의 세월 모두가 최경회의 사랑 위에서 피어난 꽃이라 여겨졌다. 그때 왜장 하나가 어느새 달려 내려와 논개를 향해 뭐라고 지껄였다. 논개는 사내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왜장은 당당한 체구였다. 계속 뭐라고 지껄였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건장한 체구의 왜장이 재미있다는 듯이 손짓을 해 대는 것으로 봐서는 논개더러 뭍으로 나오라는 시늉 같았다. 그러자 논개가 조금 더 환하게 웃어 보이면서 도리어 왜장 더러 위암 쪽으로 건너오라는손짓을 해 보였다. 촉석루 위에서는 왜장들이 함성을 지르며 웃어댔다. 왜장은 몇 번이나 망설였다. 논개는 계속 손짓을 했다. 강아지를 부르는 시늉의 손짓이었다. 마침내 왜장이 성큼 위암으로 건너뛰었다. 한쪽 발이 바위에 닿자마자 논개를 덥석 껴안았다. 왜장은 논개를 다시 껴안았다.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논개는 왜장에게 안긴 채 왜장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왜장은 싱글벙글 웃었다. 논개의 두 팔이 왜장의허리를 살며시 휘감았다. 왜장은 몹시 만족한 듯 논개에게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논개는 왜장의 허리 뒤로 돌려진 손끝으로 양손에 끼워진 옥가락지를 확인한 다음 깍지를 꽉 꼈다. 앞으로 슬쩍 왜장을 잡아 당겨 보았다. 왜장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왜장은 몹시 기분이 좋은 모양으로 논개가 잡아끄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촉석루 위에서는 계속하여 함성이 터져 나왔다. 
논개는 숨을 몰아쉬면서 위암 끝에 섰다. 한 번 더 최경회를 떠올렸다. 살아서 함께 못다 한 사랑이 목을 찔렀다. 또한 폭우 아래 무너지는 흙 담처럼 죽어 가던 민중들의 처절한 절규가 들려왔다. 순간 두 손에 혼신의 힘을 주면서 왜장을 껴안고 강물 쪽으로 힘껏 떠밀었다. 왜장의 비명과 촉석루 위에서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던 왜장들의 비명이 들린 것은 같은 순간이었다. 남강 물은 여전히 도도하게흘렀다. 논개가 살해한 왜장은 게야무라 로쿠스케였다.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죽음은 뜻밖으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왜군들은 그등안 진주성 전투에서 입은 막대한 병력 손실과 그로 인한 전력의 약화로 사실상 호남 공략이라는 최대 목적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 달성은 실패하고 만 셈이었다. 결국 왜군의 호남 진출을 저지시켜야만 한다는 호남 의병들의 당찬 의지는 수많은 죽음으로써 달성된셈이었다. 그리하여 진주성 전투가 있었기에 왜적의 침략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고,남방의 보급기지로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된 호남이 보존될 수 있었다. 족음에 입 맞춘 논개의 의거는 민족적 결단이었다. 그의 죽음은 제2차 진주성전투 이후 깊은 울분과 회한에 싸여 있던 모든 민중들의 강렬한 저항의식을 드높였다. 논개가 왜장을 살해한 행위는 민족의 울분을 가시게 한 순국의 여인에 대한 민족적 감정으로 확산·승화되었다. 그리하여 진주 사람들은 논개의 의거 현장이자 순국의 성소(聖所) 그리고 한국 민족주의의 성지(聖地)인 '위암'에'의암(義巖)'이라 새겨, 시간을 넘고 공간을 초월하는 한국 민족주의의 표상으로 삼았다. 또한 그 곁에 '의암사적비'를 세워 논개를 가슴속의 영원한 애인으로 삼았다. 스스로가 창기(娼妓)로서 받아야 할 수모와 모멸을 마다하지 않고 오로지 반외세 조국 전쟁의 신성한 목적에 복무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이 짐작할 수 없는 숭고한 사랑을 실천한 근대적·혁명적인 그 여인의 이름을 우리는 '논개'라 부른다.14) 14) 정동주, 앞의 책.
5. 주논개의 묘소
한편 진주성 함락을 전후로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진 전라도 의병들의 수는 이 전투의 참담함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최경회와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온 의병은 800 명이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80 명 정도밖에 안되었다. 최경회와 함께 온 의병들은 대부분 화순과 능주,그리고 장수가 고향인 청년들이었고,그들 모두는 최경회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흠모의 마음으로 최후까지그의 곁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가장 큰 희생을 기록했다. 그런 만큼 그의 의병들은 다른 의병장 휘하의 의병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특별히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했다. 최경회가 자결하는 순간을 곁에서 지켜본 그의 의병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참담한 심정으로 최후를 맞았다. 그 의병 가운데 장수 출신들은 논개와 최경회의 관계가 지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중요하게 여겼다. 최경회가 자결하던 날의 남강은 열흘이 넘게 계속된 폭우로 범람했다. 수많은 시체들이 격랑 치는 강물에 떠밀려 갔다. 살아남은 80 여 명의 의병들은 경계심이 다소 늦춰질 때까지 몸을 숨겨야만 했다. 왜적들은 성 함락 후 다시 진주 외곽지대의 초토화에 나섰고 그 며칠 후인 7월 초순 논개가 왜장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진주는 물론 진주에서 100 여리 밖에까지 순식간에 퍼졌다. 다시 그 며칠 후 왜적들은 울산과 부산 쪽으로 완전히 철수했다. 논개의 죽음은 물러가는 왜적들을 숨어서 지켜보는 진주 사람들 가슴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논개가 조선을 건졌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던 중 진주 외곽지대에서 숨어 지내던 최경회의 의병들은 놀라운 소문을 들었다. 진주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남강의 한 물굽이에 수백구도 넘는 시체들이 떠밀려와쌓여 있다는 소문이었다. 의병들은 서둘렀다. 진주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남강 가슭을 따라 내려가면서 시체를 찾기 시작했다. 강을 따라가면서 소문으로 들은 그 시체가 쌓여 았는 곳이 어디인지 계속 묻다가 문산에서 그곳이 어딘지를 알아냈다. ‘지수(智水)목’이라는 곳이라고 했다. 의병들이 지수목으로 찾아갔을 때 그곳은 시체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남강이 굽이쳐 흘러 내려오다가 지수목이라는 곳에 이르러 직각으로 휘어졌다. 남강은 지수목에 이르기 전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곡선이거나 짧지만 직선으로도 흐르면서 들판과 계곡을 지나다가 지수목에서 갑자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직각을 이루었다. 바로 그 직각을 이루면서 왼쪽으로 돌기 시작하는 꼭지점 부분이 안쪽으로 넓게 열려 있었다. 마치 물고기를 잡기 위해 거대한 자루의 아가리를그 꼭지점 부근에다 갖다 대고, 자루 안에는 물고기가 꽉 차 있는 형상이었다. 그 곳을 지수목이라고 부르는데 대략 가로 새로가 2킬로미터 되는 늪이었다. 그 늪은 남강보다 지면이 낮았다. 따라서 지수목에 이르기 전 남강은 약 2킬로미터 가량을 직선으로 흐르는데, 범람한 남강이 직선으로 곧장 흘러오다가 갑자기 왼쪽으로 물길이 꺾이는 곳에서 오른쪽의 거대한 늪 쪽으로 물길이 쏠리게 되어 있었다. 지수목은 대곡면·진성면·사봉면 세 지역의 경계지점이기도 했다. 특히 시체나 통나무 등 무게를 지닌 물체들은 직각으로 꺾이는 그 지점에서는 예외 없이 오른쪽으로 치우치면서 지수목의 늪으로 빨러드는 것이었다. 의병들이 도착했을 때는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시체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 진주성이 함락되던 날부터 떠내려 오기 시작한 시체들은 밀리고 쌓이면서 부패하기 시작했다. 악취가 인근 마을까지 진동했다. 호남 의병들은 후회했다. 빨리 이곳으로 와서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수습해야 도리였다는 것을 아프게 뉘우쳤다. 두 사람의 시체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곳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러자그들이 놀라운 사실을 얘기해주었다. 진주성이 함락된 이틀 뒤 호남 의병 몇 명이 이곳으로 와서 한 의병장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기슭에다 무덤을 짓지 않고 평장(平葬)을 해 두었다던데 그 시신이 진주병사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 전에는 진주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내려와서 여자의 시신을 건져 역시 평장을 했다는 것이었다. 의병들은 평장을 해둔 두 곳을 조심스럽게 파헤쳤다. 먼저 가 매장해둔 것은 최경회였고, 뒤의 것은 논개임이 확인되었다. 의병들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급히 관 두개를 맞추어 짰다. 의병들은 서둘렀다. 일단 장수까지 운구해 가자는 목표를 세웠다. 지수에서 의령쪽으로 건너 안의까지는 약 80킬로미터 거리였다. 관을 메고 걷는 길이기 때문에 하루 밤낮이나 이틀 가량 걸리는 길이다. 뛰지않고 가면서 묘소문제를 의논했다. 최경회의 시신을 떠메고 화순까지 간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 그리하여 우선 논개와 한곳에 매장해 두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이장을 해도 좋으리라는 데 뜻이 모아졌다. 그러자 논개의 묘지도 문제가 되었다. 장수에는 묘소를 돌봐줄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의논하던 끝에 논개의 묘지로 최종 결론이 난 곳은 논개의 선조들이 살았고 지금도 일족들이 많은 함양군 서상면 방지 부근이었다. 안의에서 서상까지는 다시 16킬로미터 거리다. 의병들은 함양 서상까지 와서 방지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양지쪽 산비탈에다 두 사람의 묘지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각자의 고향으로돌아갔다.15) 15) 정동주, 앞의 책.
6. 주논개 순국(殉國)의 역사적 평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숱한 사람들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그 죽음이 자발적이었던지, 아니면 타율적이었던지 간에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 임진왜란 당시 그 많은 죽음 중에서도 후세에 가장 뚜렷한 영향과 의미를 남겨준 인물은 해전의 영웅 이순신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장을 껴안고 죽은 논개(論介)일 것이다. 우리가 논개의 죽음을 의·열(義·烈)로 기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논개가 연약한 한 여인이었다는 사실ㅃ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여러 장수들이 죽음을 택한 것은 그들이 국은(國恩)을 두터이 입어 왔던 사대부들이었으므로 국난을 당하여 살신보국(殺身保國)함은 봉건사회의 신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논개는 6만여 성민의 학살현장에서 가녀린 어린 여자의 몸으로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던졌를 뿐 아니라 이웃과 겨레의 원수였던 왜장을 죽였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그녀의 죽음을 기릴 수 있는 것이다. 계사년 칠월칠석 촉석루에서 승전에 도취한 왜장들이 아리땁고 가날프기만 했던 한 여인에 의하여 왜군이 가장 용맹한 선봉장을 잃어버린 왜군은 사기가 꺾이어 전의를 잃어 버린데다 2차 진주성을 지킨 장수들이 한결같이 호남 출신 장수이므로 호남지방민의 투철한 호국정신에 미리 겁을 먹고 호남지방 침공을 포기하고 부산진으로 병력을 후퇴시키고 임전왜란이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국난을 당하여 살신보국(殺身保國)함은 봉건사회의 신하된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논개는 6만여 성민의 학살 현장에서 선봉에선 관군이나 의병도 아닌 일반 국민으로서 전쟁에 깊이 관여하였고,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죽음에 초연하여 왜장을 살해하였다. 임금이나 아버지 흑은 남편의 죽음을 맞이하여 그냥 따라 죽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살아남은 사람을 위한 최대한의 적극적인 인간적노력이 부과될 때,인간으로서의 최선의 가치 있는 삶이 될 뿐 아니라 후세의 귀감이 될 것이다. 물론 천하에 가장 흉한 일로서 자살 하는 것 보다 더 큰 일이 없으며,또한 자살한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직 의리에 입각한 행위를 해야 할 경우에 자신의 몸을 죽여야 한다면 당연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이 호랑이나 도적에게 핍박당할 무렵 아내가 뒤따라 호위하다가 죽으면 열부(烈婦)이다. 또한 흉악한 사람이 음탕한 사람에게 핍박당하여 억지로 몸이 더러워질 경우에 굴복하지 않고 죽어도열부이다. 하지만 삶에 대한 지식 없이 죽음을 나무 가벼이 여겨 쉽게 생을 포기할 경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리정신(義理情神)에 투철한 행위야 말로 당연히 높이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논개의 죽음이야 말로 의리정신에 투철한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죽음에 초연했기 때문에 자살하여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판단하고 적장을 죽임으로서 복수할 것을 마음에 품었을 것이다. 이것이 삶에 대한 투철한 의지가 뒷받침 된 것이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신의 최선의 행위라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인륜편(人倫篇)에서 논개를 관기의신분인데도 효열(孝烈)의 항목에다 기록하여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정을 기리고 있다. 논개의 의리정신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아울러 불의에 철저히 죽음으로 대항하여 임의적인 폭력성에 저항함으로써 그러한 것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준 좋은 본보기이다. 나라를 구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왜장과 함께 몸을 바쳐 순국한 의리정신이야 말로 오늘날 민족정기의 회복과 국민정신교육의 계도적 차원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논개는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오히려 죽지 않고 역사 속에 다시 부활하여 400 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민족의 혼을 드높인 충절(忠節)의 표상(表象)으로 많은 국민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이다. 논개야말로 죽었으되 죽지 않았으며,모든 것을 버렸으되 오히려 모든 것을 얻게 된 승리의 삶을 산 의인(義人)이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16)
이 자료는 (사)의암주논개정신선양회에서 복사하여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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