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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적 필문
박영규 박사
한국그린문학 명예회원
전)경찰관, 전북경찰학교 교수
Ⅰ. 너희 집은 안 돼.
나에겐 아주 자극적이고 슬픈 기억이 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집안의 위계질서가 엄하여 웃어른들의 말씀에 이의를 달거나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가 없었다.
내가 고교 졸업시기에 나의 진로를 상의하기 위해 집안의 잘나가는 (현재 공직의 중상 급 간부)어른을 찾아간 일이 있다. 지금의 수능시험 시기쯤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분은 나에게 “어떤 진로를 희망하느냐”고 물으셔서 “법을 공부하고 싶다”고 대답 했더니 “상대를 가서 돈벌이를 생각 하라” 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집에서 5급 공무원(지금의 8. 9급 공무원)만 나와도 우리나라 대통령을 배출한 것보다 성공한 집안이 될 것” 이라는 것이었다.
집안 어른의 그 말씀은 우리 부모님이 전혀 학교를 다니지 않으셔서 아는 것이 없고, 사는 형편도 어려우니 돈벌이를 하라는 것이었는데, 그 이면에는 “너희 부모가 무식하니 너희가 공부를 해본들 공직에 나갈 수 있겠느냐, 돈이라도 벌어라” 는 우리 집을 무시하는 말씀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순수하게 생각하면 우리 집의 어려운 형편과 그 당시의 사회현실을 따라서 하신 조언으로 악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어린 내 마음은 그래도 집안의 어른이고 나름대로 잘 배우고 성공한 존경하는 분이기에 찾아가 진로를 상의 드린 것인데 무안을 당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 분은 자녀들도 잘 키우고 좋은 대학 보내고 부족할 것 없는 삶이었기에 우리의 사는 것이 안타까워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 때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모시고 살 때이고, 어머니는 그 분들의 말씀이라면 돌이 금이라고 해도 믿으시던 때이니 그 말씀 한 마디는 큰 위력이 있었다.
결국 나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을 가지 못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분의 말씀이 마음에 걸려 늘 생각 속에 맴돌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탓하기도 했었다.
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내 책가방을 빼앗고 “네가 장남이니 학교는 그만 다니고 돈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네가 돈을 벌지 않으면 우리 열 식구가 다 굶어 죽는다.” 고 하셔서 책가방 없이 학교(고교 2년 때)를 다닌 일이 있다. 그 후 3개월쯤 지나서, 집안의 다른 어른이 어머니를 불러 “집 팔고 논 팔아서라도 학교 보내라”고 강하게 질책하신 말씀을 듣고서야 책가방을 내주셔서 책가방 들고 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니, 집안 어른의 말씀이 그토록 무게가 있었던 것이다.
집안의 어른께서는 좀 더 희망적이고 격려가 될 만한 말씀을 주셨을 것인데, 왜 내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으나, 그 말씀이 나에게는 자극이 되었고, 내가 소망하는 일들을 성취하기 위해 집념으로 임했던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너희 집은 안 돼” 는 안 될 일을 되게 하기 위한 자극이었고, 분발하여 열심을 다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이제 형제가 다 장성하여 가정을 꾸리고, 그 가정의 가장으로써 자기 본분을 다하고 있음에 비추어보면, 그 어른의 말씀은 전혀 틀리고 말았다. 나는 공직의 중견간부로 조직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위치에서 일했고, 학자로써의 학업 성취(박사)도 이루었으며, 대학교수로 후학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으니, 그 분의 말씀대로 라면 나는 대단히 성공한 셈이다. 막내 동생이 공직의 중급 직위에 있으니 또한 성공한 것이고, 다른 동생들도 나름대로 직장과 사업을 통해 어려움 없이 살고 있으니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전 가족이 하나님의 택정 안에 있고, 그 은혜 안에서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의 중직으로 택함을 받아 일하게 하셨으니 하나님 안에서도 성공한 것이다.
누구라도 마음대로 평가하고, 무시해선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가 나와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 창조주의 섭리와 역사하심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집안의 어른은 “너희 집는 안 돼” 하고 그 당시의 모습만으로 평가했지만, 인생 여정을 앞서 인도하셔서 오늘의 축복으로 채워주신 은혜에 너무 감사할 뿐이다.
가만히 뒷동산 숲길을 걸으며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음미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Ⅱ. 동지(冬至) 팥죽 한 그릇
오늘은 동짓날이다. 태양력 24절기 중의 하나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기도 하다.
고대인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여기고 축제를 열어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하여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설이라 한다.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가 있어 설 다음가는 작은 설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
동짓날의 팥죽은 시절식(時節食)이라 하여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 즉 집안의 악귀(惡鬼)를 쫓아내는 것이다.
또 동짓날 눈이 많이 오고 날씨가 추우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기도 하다.
팥죽의 축귀 얘기가 나오니 출애급 과정에서 열 번째 하나님의 재앙으로 애급의 장자를 모조리 죽게 만든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 생각이 난다.
여기서는 동짓날의 유래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의 마음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예로부터 동짓날은 팥죽을 끓여먹던 유래가 있다. 동짓날 팥죽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 것이라 하여 나이 먹기 싫어 팥죽 안 먹는다고 농을 하던 생각이 난다.
동지가 되면 어머니는 팥죽에 세알미를 넣어 맛있게 끓여주시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그 옛날의 추억이 새롭다.
오늘은 집에서 끓이진 않았으나 팥죽을 사다가라도 먹었으니 어쩔 수 없이 한 살은 더 먹었고 이제 집 나이 이순의 꼭 반절이다.
사실은 오늘 아침부터 아내가 안절부절이다. ‘오늘이 동짓날 팥죽 먹는 날인데...’ 하면서...
나는 속으로 ‘팥죽 한 그릇 사다가 먹으면 되지’ 하면서 지나쳤는데, 오후에 또 팥죽 타령을 한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엄마(장모님)한테 팥죽 한 그릇 사다드릴까?’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하! 아침부터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랬던 것을 눈치 채지 못했으니 나는 참 둔하다. 그래서 얼른 생각 난 것처럼 그러자고 했더니 너무 좋아한다.
아침에 어머니가 전화를 해서 물김치(동치미)도 없고 밥 먹을 반찬이 마땅찮다고 했는데 그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젊은 날에는 손수 팥죽을 끓여 자식들을 먹여주시던 어머니가 연세 높아(나이 많아) 손수 할 수 없으니 딸의 마음이 걸렸던 모양이다.
나는 아내를 보면서 부모의 마음과 자식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효라는 것이 많이 퇴색되어 부모에 대한 마음도 의례적이거나 인연에 의한 우리 문화의 한 측면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시대이다.
아직도 마음으로나마 부모를 생각하고 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우리 문화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의 마음은 참 아름다운 마음이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생각한다 해도 부모의 마음을 따르려면 어림도 없다. 그 만큼 부모의 마음이, 그 사랑이 크다는 것은 다 아는 상식이다.
우리 아버지는 내 나이 19세 때(고2)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내 나이 30대 중반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늘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인자하신 분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늘 고부간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가만히 부엌으로 들어와 등을 감싸며 위로하고 달래주셨던 아버지를 기억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나의 생각은 평가하기가 난해하다. 우리 어머니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분이셨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사셨던 분이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안 먹어 본 욕이 없다. 옛사람들은 보통 일상처럼 쓰던 말이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분이기에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다만 지금은 그런 험한 욕을 쓰는 분은 없을 것으로 안다. 그러나 옛날 그 시절에는 욕이 하나의 일상어였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마 그 시절에는 마음에 맺힌 “한”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의미 없이 했던 ‘스트레스 해소용’ 화풀이였던 것 같다. 욕(험한 저주의 말)은 제일 자주 싱거운 놈 할 때 쓰는 말로 “썩을 놈” 정도는 아주 고상한 말이다. “잡아먹을 놈, 육시를 할 놈, 찢어죽일 놈, 호랭(랑)이 물어갈 놈, 염병할 놈, 오살을 할 놈 등등” 수없이 많다.
더 심한 경우는 취업을 못해 집에서 백수로 있을 때 “저놈의 방거충이(백수를 의미: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놈) 나가 죽어버려라”는 말은 과연 저 분이 나를 낳아주신 분인가 하고 의구심을 가질 정도였다.
그게 내가 취업 전에 늘 들었던 험한 말들이다. 아마도 혼자서 많은 자식들과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나온 억지의 화풀이 이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할머니(용띠)와 어머니(호랑이띠)가 아버지(쥐띠)의 먼저 가신 것에 대한 울화로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 싸우는 모습은 실로 “용호상박” 그대로였다. 그러니 어머니가 집에 안정적으로 계실 수가 없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도 어머니는 어디 밖에 나가서 내 자랑을 많이 하고 다니셨던 것을 보면, 어머니의 험한 말은 어디 하소연할 곳 없는 답답함과 그 화로 인해 저절로 나온 것일 뿐 악의가 전혀 없는 일상의 불평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취업이 되어 객지에 있을 때 늘 자식 자랑에 침이 마를 정도였던 어머니의 사랑이 험한 말에 악의가 없음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어머니가 집에 계셔서 동생들과 가정을 맡길 수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 책임에 대한 부담이 먼저 내 마음을 짓눌렀던 기억이 난다.
결국 어머니, 아니 부모는 내 삶의 보호자요 그 책임을 다하는 분일뿐, 자식인 나는 부모에 대한 애틋하고 책임 있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자식인 내가 부모가 되고, 자식 중의 둘째(정아)가 결혼 3개월 만에 남편(사위)과 함께 출근 길 운전 중, 눈길 교통사고로 천국으로 귀의했다.
자식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먼저 생각한 것은 “아무래도 좋으니 제발 살기만 해다오.” 하면서 부안의 사고현장까지 가면서 수없이 되뇌었던 기도이기도 했다. 그때의 참담한 심경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정아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다. 너무 아픈 마음에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데도 오히려 위로의 말을 하는 사람이 더 얄밉다.
“당신이 당해 보지 않아서 그래” 하고 쏘아주고 싶은 심경이다.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말 없이 바라보거나 가만히 어깨를 두드려 주는 사람이 고맙다.
믿음도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절망과 낙담뿐이다. 아내는 실신하여 병실에 누워 있다. 이게 부모의 마음이다. 얼마나 쓰리고 아픈지...
지금도 시간이 나면 우리는 정아의 산소에 들러 가만히 불러본다.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것 같은 아이, 우리 가정은 정아의 사고 이후 가족사진 찍는 것이 재미가 없다.
만약 정아가 있다면 우리 가정은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할까?
생각나는 것은 사는 날 동안 정아에게 더 잘 해주지 못했던 기억만이 나를 우울하게 하고 후회의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세월이 가고 21년이 지난 지금도 아쉽고 보고 싶은 마음 가득하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옛말의 “부모는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정아의 사고 이후 나는 어느 곳에서나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잘 하라는 말을 많이 한다. 나는 잘 하지 못했는데 지나고 나니 모든 것이 후회스럽고 민망하다.
우리에겐 정아 외에도 세 아이(30~40대 인데도 나는 늘 우리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내 눈에는 아직도 정말 어린애들일 뿐이다) 들이 있다. 다들 은혜 안에서 제 몫을 하며 잘 살고 있다.
그래도 늘 아쉬운 것은 먼저 간 자식 생각이 난다. 정아가 간 이후로는 정말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금 쪽같이 귀한 자식들인지 늘 그들의 안전과 평안과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
동짓날 팥죽을 생각하며 부모의 자식에 대한 마음과 자식으로서의 부모에 대한 마음을 그려보았다. 부모에겐 이기적이고 자식에겐 희생적인 삶이 세상 사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해된다.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라지만 이제라도 어른들이 주시는 교훈들을 새겨 자식으로서의 부모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갚아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부모의 큰 사랑, 나도 지금 부모가 되어있음을 생각하자.
아내가 동짓날 팥죽을 끓여주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아내의 부모 공경하는 마음이 너무 아름다워 그의 바람을 이루어 주었더니 내 마음 또한 훈훈하다.
작은 마음이라도 팥죽 한 그릇에 그토록 좋아하시는 어머니,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계시는 집을 나서는 우리를, 팥죽 드시던 것을 멈추시고 문 밖까지 배웅하며 이웃에게 자랑하시는 모습이 마음에 찡하다.
인생여정이 다하는 그 때까지 건강하게 만수하시기를 소망해 본다.
Ⅲ. 인사와 인상
인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평소 알고 있던 사람과는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주고, 모르던 사람과는 서로 연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인사는 밝은 모습과 웃는 얼굴로 하게 되고, 그 인사를 통해 그 사람의 내면의 모습이 타인에게 전해지기도 한다.
인사는 사회생활과 대인관계의 성공을 위해 참 중요하고 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가 전북경찰청 경무계에 근무하게 되었을 때이다. 모시던 상사가 누구를 만나든지 인사를 잘 해야 한다는 충언의 말씀을 주셨다.
그 당시만 해도 도청과 지방청이 같은 건물 안에 있어 사복을 입으면 누가 도청 직원이고 누가 지방청 직원인지, 또는 민원인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제 막 발령을 받아 새로 온 신입 직원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나는 늘 상사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가는 길마다 만나는 이들이 누구이든(도청, 지방청 직원 가리지 않고, 민원인이던 일용직 사환이든 모두에게) 먼저 고개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그러기 불과 3개월이 되기 전에 나는 많은 사람들을 사귀게 되었고 그 인맥이 나의 경찰관 재직 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지방청에 내 직급에 맞는 자리가 빌 때마다 내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 덕으로 지방청과 각 경찰서의 내근부서에서, 또는 기획 실무분야에서 근무를 많이 하게 되어 실무에 대한 지식을 많이 익히게 되었다. 그 결과 내 능력을 인정받는 계기도 되어 인사고과 등 근무평정에도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방청 교통계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감찰계에 근무하는 H주임이 아침 출근할 때면 꼭 만나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기를 한 6개월이 지나고 그가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 근무처를 이동하게 되었다. 그가 근무처를 이동하면서 나에게 하는 말이 “나는 늘 박주임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늘 밝게 웃는 모습으로 인사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출근 때마다 의도적으로 박주임을 만나려고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인사를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그 칭찬을 들으니까 더욱 좋아서 저 멀리 가는 사람들에게까지 찾아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면 그 분은 “어 그래, 그래, 너 아무개 아들이지” 하면서 칭찬을 해주시곤 하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한 번도 내 인상이 좋다거나 잘 생겼다고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런데도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내 인상이 늘 웃는 얼굴이고 밝아서 좋고, 걱정근심이 없는 사람같이 편하다고 한다.(집에서는 인상이 고약하고 직업티를 낸다고 투정인데 밖의 평가는 정반대이다.)
그래도 인상이 고약하고 어둡다는 말보다는 밝고 웃는 얼굴이라는 평가가 훨씬 좋지 않은가.
나는 오히려 주변의 늘 웃는 인상이고 밝은 모습과 인사 잘한다는 평가가 더욱 좋다. 그래서 그 평가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기 위해 더 조심스럽게 노력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려운 일 또는 곤란한 일이 생기면, 내게 편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다 잘 해결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다.
오히려 나쁜 결과가 나왔을 때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한 시련이거니 생각하고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려 노력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변화에 적응한 나는 다음에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
Ⅳ. 천명운(天命(天明)云)
나는 내 이름 외에 호(號:별호)를 “천명운(天命(天明)云)”이라고 지어 부른 것이 중학생 때이니 벌써 50여 년 전 일이다.
내가 내 이름 외에 별호를 스스로 지어 가지게 된 것은 역사를 좋아해서 옛사람들이 본명 외에 별호를 쓰는 것에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 내 별호를 어떻게 쓸까 많은 생각 중에 만든 별호가 “천명운”이다.
이름자 그대로 나는 하늘의 명(天命)을 받고 사는 사람이고 나의 앞길은 늘 밝게 이루어질 것(明云)이라는 미래에 대한 의지이기도 하였다.
아침 산길을 걸으며 조용히 지나온 날들을 상고하는 중에 불현듯 내 별호 “천명운”을 생각해 보았다. 그 의미와 뜻과 이루심의 오늘을.....
세월이 흘러 이순을 훌쩍 넘어 지금 생각하니 역시 내 삶은 창조주의 이루심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의 인생 여정이 크게 흠되지 않았던 것은 내 별호에 나타남같이 늘 하늘의 움직임이 나와 함께 함을 믿었고, 그 믿음 안에서 나름대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곤경에 처해도 근심하고 걱정하는 일이 별로 길지 않다. 아마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주기 위한 일시적인 시련이나 고통으로 생각할 뿐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그 많은 상급기관이나 감찰부서의 감사를 받았어도 감사 준비에 최선을 다 하지만, 미처 하지 못하고 감사가 닥치면 그대로 손 놓고,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부딪치곤 했다. 그리고 반드시 그 결과는 늘 칭찬과 상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감사관이 지적하고 찾아내기 전에 적극적으로 공과를 미리 밝히고 열심히 했던 결과이다.
이런 결과는 내가 아마 유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만든 내 별호 “천명운” 그 이름이 내가 바라고 생각했던 대로 이루어진 것은, 그 별호를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영이 나를 인도하심인 것을 오늘 생각하게 한다.
“천명운”은 내 삶의 모든 것은 천명(天命)이요, 내 앞날을 밝게 이끌어 주시리라(明云)는 믿음으로 지은 것인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별호와 같이 되어졌음을 느끼며, 그 별호 하나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와 같이 남은 인생여정도 함께 하심을 믿고 더욱 조심스럽게 마음을 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되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