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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山老村李先生遺墟碑(금산노촌이선생유허비)
- 홍직필(洪直弼)
維嶺金山郡南十五里賀老之村。卽老村李先生攸芋之遺墟也。先生生於斯卒於斯。又俎豆於斯。是爲死徙不離鄕之義。而韓文公所云鄕先生歿而祭於社者也。先生諱約東字春甫。正統辛酉進士。景泰辛未擢增廣文科。歷敭淸顯。五宰郡邑。三典營梱。又以千秋使朝天。終以吏曹參判。陞知中樞府事致仕。弘治癸丑六月十三日乘化。享年七十八。先生早悟績學。博通經籍。立朝盡忠讜之言。匡濟之策。自耽羅歸。只持一鞭。旣而曰此亦島物。懸諸官樓。歲久鞭落。邑人畫其跡以寓慕。船行遇颶風幾危。搜幕賓潛賷一甲投海。波定利涉。州人名其所曰投甲淵。立生祠祀之。是盖先生細行。而亦可驗素養也。天資寬厚。而秉執堅確。不治產業。不喜浮華。人不敢雌黃。莅官剛正淸愼。關節不通。引年乞骸。優遊桑梓。以終其出處。故名實純粹。爲幷世羣賢所尊慕而贊述焉。曰玉壺淸冰。曰玉樹淸芬。曰心如水月。節若松筠。佔畢齋金公至許以文武才德。詩禮戎律。而歸廊廟調元之責。則先生之於懿望何如哉。今去先生之日餘三百年。流風遺韻。與世寢邈。誦先生之廉貞則擬諸欝林之載石。稱先生之恬退則譬以鑑湖之抽簪而已。能諦聲名事功。振耀隆洽。蔚然爲國朝藎臣。皆本之學問者尠矣。先生服事金江湖先生。與金佔畢,曺梅溪相契。爾義德業。鑽圃冶遺緖。行治文章。爲儒林領袖。辭受行藏之各適其正者。在先生爲大德中川流也。凡稱人之善。必本其父兄師友。厚之至也。先生之造道成德。卓越乃爾。則淵源所漸。不亦盛哉。先生卒而爲聖主所悼衋。遣官致侑。賜謚平靖。被淸白選。後昆世蒙收錄。且一鄕譽髦。妥靈于景濂書院。上下崇報之典。亦備矣。先生內外子孫。蕃衍昌熾。指不勝摟。而名碩輩出。爲左海名閥。天之報施。其在斯歟。古語云逢時積德。身受福慶。又云有德者必享其榮。以及其子孫。信矣哉。公雲仍散居畿嶺。或懼先生舊址。久而迷所。樹碑以表之。尸其事者。明峻琮和也。昔程伯子顔樂亭銘曰。水不忍廢。地不忍荒。嗚呼正學。其何可忘。
直弼於先生亦云爾。
- 梅山先生文集卷之三十四 - 碑
지중추부사 증시평정(知中樞府事贈諡平靖) 이공신도비(李公神道碑)
조선국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동지성균관사(朝鮮國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同知成均館事) 증시평정공(贈諡平靖公) 노촌이선생(老村李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 서문을 함께 기록함.
8대손 통정대부 수경상도관찰사(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 이세근(李世瑾) 지음.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선생의 덕행은 일세의 추대를 받은 바이고 또한 백대의 종사(宗師)가 될 만한데도 묘안(墓顔)이 이렇게 매몰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을 비록 억측해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혹시 선생이 남기신 뜻이기 때문에 후손이 이어받아 감히 어기지 못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우리 집안 선대의 가법이 소박과 겸약(謙約)이었기 때문에 분수에 넘게 찬양하는 말세의 풍속과 전혀 상반되는 것은 아닐까?
종인(宗人)들이 모두 “오래된 일이라 고징(考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선조의 묘소 입구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지 않고 두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니 즉시 글을 짓고 베껴서 없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불초가 재주가 없으니 어떻게 감히 감당하겠느냐고 여러 번 힘껏 사양했으나 어쩔 수 없어 마침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삼가 승낙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백 년간 제사를 지냈던 유적이 희미하게 되어버렸으니 실로 그 만분의 일이라도 형용할 길이 없었다. 오직 유림에서 전해내려 오는 것과 국가에서 관장하는 문서에 드러난 것을 가지고, 당대 여러 명공(名公)들이 사모함을 읊은 것을 구보(舊譜)에 실어놓은 기록들을 보니 한두 가지 의거할 만한 것이 있었다. 이것들을 주워 모아 서술하니 글이 길 필요가 없었다. 사실의 요점만 잡아 후대에 알리는 방도로 삼았으니 어찌 믿고 고징(考徵)함이 있지 않겠는가?
삼가 우리나라의 도학(道學)을 살펴보면, 기자(箕子)의 가르침이 쇠미하여 끊어졌다가 포은(圃隱 : 정몽주(鄭夢周))에 이르러 비로소 환히 밝혀졌다. 야은(冶隱 : 길재(吉再))은 포은에게서, 김강호(金江湖)는 야은에게서 받았고, 점필재(佔畢齋 : 김종직(金宗直))는 가정에서 받아 한훤당(寒喧堂 : 김굉필(金宏弼))에게 전했으며, 한훤당은 다시 정암(靜庵 : 조광조(趙光祖))에게 전했으니, 이것이 연원의 대략이다.
선생과 점필재 및 조매계(曺梅溪 : 조위(曺偉))는 모두 같은 고을에서 태어나 도의(道義)를 맺고 사귀었다. 그들이 갈고 닦아 빛낸 것은 모두 포은과 야은이 전하고 한훤당과 정암이 받은 도였으니 조예의 깊고 낮음은 후학이 감히 입에 담을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세의 선비들이 선생을 김종직과 조위 두 선생과 아울러 칭송하며 살던 곳에 서원을 세우고 경렴(景濂)이라고 편액을 한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염계(濂溪 : 주돈이(周周敦)) 주부자(周夫子)는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의 정사(政事)와 관직의 업적만 보고 어떤 사람은 신선의 풍모와 도기(道氣)가 있다고 칭찬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진희이(陳希夷)와 같은 부류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독 정태중(程太中)만은 그 학문이 깊다는 것을 알았으니 심하구나 사람이 학문을 알아보기 어려움이여.
점필재는 일찍이 선생을 깊이 사모하였는데, 시를 지어 찬미하기를 “공이야말로 시서(詩書)의 진정한 영수”라고 하였다. 아, 옛 현인들의 시어(詩語)는 아무리 한 글자 반 구절이라 하더라도 정확하고 사실에 부합하여 전혀 헛되이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넘치는 말이 없기 때문에 시사(詩史)라고 했으니 선생의 점필재는 주부자(周夫子 : 주렴계)의 정태중이 아니겠는가? 구보(舊譜)에도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경전에 두로 통달했다.”고 하였고, 또 “덕행과 문예가 유림의 으뜸”이라고 하였으니 선생이 박학하고 경전에 통달하여 유림으로부터 영수(領袖)로 추앙받았음을 대략 알 수 있다.
숙종(肅宗)이 재위 중에 국조의 여지(輿誌)에 다소 누락되고 소략한 점이 있어 여러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거듭 더하여 편찬하게 하였는데, 탐라(耽羅)에 대한 각주에 이렇게 씌어 있다. “선생이 일찍이 목사로 있다가 돌아오게 되었을 때 채찍 하나만을 갖고 있었는데, 잠시 뒤에 말하기를 ‘이것 역시 섬의 물건이다’고 하면서 관아의 누각에 매달아놓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채찍이 떨어지자 고을 사람들이 그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사모의 뜻을 나타냈다.
배가 바다 한 가운데 도착했을 때 갑자기 기우뚱하면서 휘돌아 위험한 지경에 빠지자 선생이 의심하며 말했다. ‘나는 전혀 사심을 행하지 않았으나 혹시 막료 중에 속인 사람이 있어 신명(神明)이 나를 깨우쳐 주게 된 것이 아닐까?’ 과연 몰래 가져온 갑옷 하나가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강신(江神) 역시 얼음 같은 지조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마침내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갑옷을 던지라고 명하자 이윽고 파도가 잠잠해져 배가 떠나게 되었다. 지금은 그곳을 투갑연(投甲淵)이라고 부르는데,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다.”선생께는 이것이 다만 작은 일에 불과하지만 또한 평소 수양하는 바의 한 단서를 볼 수 있는 일이다.
구보(舊譜)에 “타고난 자품은 관대하고 후덕하며, 마음을 다잡는 것이 굳세고 확고하여 겉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산업을 경영하지 않았다. 성품 또한 강직하고 단정하여 남에게 구차스럽게 간청하지 않았다. 평생 청렴하고 신중하여 사람들이 지목하여 시비를 따지지 않았으니 진실로 유덕한 군자였다.”고 하였다.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필상(尹弼商)과 같은 분들이 사모하며 시를 읊기를 “한 조각 맑은 얼음이 옥호에 담았다.”고 하였고, “맑고 깨끗한 회포 옥호와 같네.”라고도 하였으며, “마음은 물과 달 같고 절개는 소나무와 대나무 같다.”고도 하였고, “밝은 달과 얼음 항아리 ”, “옥수(玉樹)의 맑은 향기”라고도 하였으니, 선생의 기상과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황산곡(黃山谷)이 주렴계를 찬미하여 “깨끗한 마음이 시원한 바람과 맑은 달 같다.”고 했던 말과 천년 뒤에 똑같이 들어맞은 일이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은, “간관(諫官)으로 지금 다시 현명한 인재를 얻었다.”고 읊었고, 충정공(洪忠公) 홍응(洪應)은 시에, “근본의 계책을 벌여 봉사(封事)를 올리고, 충언을 다하여 임금을 모시니, 자품은 문무를 겸전하여 웅대한 도략 펼치네.”라고 하였다. 점필재의 시 또한, “문무의 재주를 갖추고 덕도 겸했으니, 시와 예(禮)를 군율로 삼는 것 왜 꺼리랴? , 백관의 반열 중 삼달존 지녔으니, 묘당에서 재상을 구한다면, 시론은 응당 그대를 세우리라.”라고 하였다. 선생의 충언과 곧은 의론은 한 시대를 건지고 임금을 바르게 하였고, 재덕을 겸비하여 중망은 삼공(三公)이 될 만 했으며, 이름과 공업을 떨친 것이 크고 흥성하여 나라의 충성스런 신하가 되었던 것이다.
조신(曺伸)의『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물러나 고향에서 살면서 유유히 노닐며 일생을 마쳤다.”고 하였는데, 선생의 출처와 맑은 덕, 아망(雅望)은 한 시대의 기리는 바가 되었다는 것을 다 말해준다.
부음을 들은 임금이 몹시 슬퍼하며 치제(致祭)하게 하면서 유시하였다. “타고난 자품은 단정하고 근엄했고 지성(至性)은 순수하고 솔직했으며, 나가서 백리의 땅을 맡으니 치적이 제일이라는 칭송을 듣고 한 지방을 선화(宣化)하니 인애(仁愛)가 감당(甘棠)에 남았다. 일찍이 사간원의 대사간이 되었을 적에 실로 장려와 보필로 힘입어서 내가 가상히 여기고 덕이 있다고 생각하여 장차 자급을 더해주려 하였는데 하늘이 어찌 도와주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대의 부음을 들이니 더더욱 통탄스럽고 애석하구나. 평정(平靖)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는데, 시법에 ‘일을 집행함에 절제 있음을 평(平)이라 하고, 부드러운 덕으로 많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정(靖)이라 한다.’고 하였다. 사책(史冊)에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되고 자손 대대로 수록되게 되었으니 조정에서 존숭하고 포상하는 은전이 갖추어진 셈이다. 선생이 관직에 나아간 본말이 대략 이렇게 되었으니, 혹시 소위 쌓이고 쌓여서 덕행으로 나타나고 사업을 이루게 된 것이 아닐까?
아, 대체로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고 별다른 물건이 아니라 정사(政事)와 관직의 업적이 바로 학문한 바를 행하는 것이다. 예전에 정태중(程太中)이 아니었더라면 주렴계의 정사와 관직의 업적은 심오한 학문이 드러난 것이라는 사실을 송나라 사람들이 끝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지금 선생을 보면서도 역시 덕망과 치적, 맑음만 알고, 그 덕망과 치적, 맑은 절개가 진실로 포은(圃隱)과 야은(冶隱)을 사숙(私淑)하고 점필재(佔畢齋)에게서 부족함을 취한 데에 바탕을 두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것은 선생을 모르는 것이고 학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선조의 묘명을 쓰는 것을 자세히 보면 필시 당세에 문학에 능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의 입언(立言)을 빌리게 되는데, 그 말 또한 그 집안의 기록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점필재와 같은 명공(名公)들처럼 문학과 지식이 뛰어나고 선조의 행의와 사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익히 목격한 사람을 얻어 집안의 기록에 의하지 않고도 스스로 말을 만들고 명(銘)을 짓는다면 더더욱 훌륭하고 믿을 만할 것이니, 조상을 존숭하고 선조를 소중히 하는 뜻에 어찌 유감이 있겠는가? 선생의 생몰과 관력, 세계(世系), 자손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씨는 삼한(三韓)의 대성(大姓)으로 윗대에 이총언(李悤言)이라는 사람이 고려의 왕이 삼한을 통합하는 것을 도운 공로를 세워 벽진(碧珍)에서 개호(開號 : 벽진장군)하였다. 벽진은 지금의 성주(星州)이고, 그로 인해 후손들은 여기에 적을 두게 되었다. 그 뒤로 관직이 끊이지 않았는데, 진현관(進賢館)대제학 이견간(李堅榦)이 문학으로 이름을 날려 세상에서는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고 불렀으며, 이견간의 동생 이성간(李成榦)은 중문지후대장군(中門祗候大將軍)이 되었다.
이희목(李希牧)은 본조(本朝)에 들어와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지내고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선생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간혹 이희목이 산화파(山花派)로서 이성간의 후사를 이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족보에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부 이존실(李存實)은 군기소감(軍器少監)으로 병조참판을 추증 받았고, 부친 이덕손(李德孫)은 남해현령(南海縣令)을 지내고 호조판서를 추증 받았다. 3대에 내려진 추증은 선생이 귀하게 된 결과이다. 모친 증 정부인 고흥 유씨(高興柳氏)는 공조전서(工曹典書) 유무(柳務)의 딸이고 밀직승지(密直承旨) 유택(柳澤)의 손녀(孫女)이며,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유청신(柳淸臣)의 증손녀이다.
선생은 영락 병신년(태종 16, 1416년) 5월에 태어났다. 이름은 약동(約東)이고 자(字)는 춘보(春甫)다. 정통 신유년(세종 23, 1441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경태 신미년(문종 1, 1451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하였다.
관직은 내직(內職)으로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종부시정(宗簿寺正),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호조참판(戶曹參判),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고, 외직(外職)으로는 황간현감(黃澗縣監), 청도군수(淸道郡守), 구성부사(龜城府使), 제주목사(濟州牧使), 경상좌도수사(慶尙左道水使), 경주부윤(慶州府尹),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냈다. 중간에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마지막 관직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였다.
홍치 계축년(성종 6, 1493년) 6월 13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享年)이 78세였다. 배필은 정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안변부사(安邊府使)를 지낸 이지명(李知命)의 딸이다. 분묘는 선생과 같은 무덤이고 광중(壙中)을 달리하였다.
아들 셋과 딸 넷을 두었다. 아들 이경원(李庚元)은 첨지(僉知), 이승원(李承元)은 통정(通政)이었고, 이소원(李紹元)은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좌랑(佐郞)을 지냈다. 딸들은 상장군(上將軍) 김순성(金順成), 여윤성(呂允成), 사직(司直) 김예강(金禮康), 현감(縣監) 강효손(姜孝孫)에게 출가하였다.
손자(孫子)부터 지금까지 10대를 넘었는데, 다 기록(記錄)할 수 없으므로 그 중 가장 현달한 사람만을 뽑아서 적는다. 통정 이승원의 후손인 현감(縣監) 이후경(李厚慶)과 세마(洗馬) 이홀(李屹)은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좌랑(佐郞) 이소원의 후손(後孫)으로는 판서인 충숙공 (忠肅公) 이상길(李尙吉)이 절의(節義)로 이름을 날렸으며, 평사(評事) 이상철(李尙哲), 참지(參知) 이상급(李尙伋), 감사(監司) 이상일(李尙逸), 지사(知事) 이경(李坰), 승지 이인(李寅)이 있다. 외예(外裔)에는 찬성(贊成) 이덕형(李德泂), 의정(議政) 남이웅(南以雄), 참의(參議) 이덕수(李德洙), 참찬(參贊) 이홍연(李弘淵), 감사(監司) 이태연(李泰淵), 이동직(李東稷), 판서 이수언(李秀彦), 부윤府尹) 박수홍(朴守弘)이 있으며, 의정 신익상(申翼相)은 과거에서 장원하여 이름을 날렸다. 참의 김홍미(金弘美), 전한(典翰) 김홍민(金弘敏)은 사직(司直) 김예강의 후예(後裔)이고, 제학(提學) 이준은 상장군(上將軍) 김순성의 외예(外裔)이며, 나머지는 모두 족보(族譜)에 있다.
아, 무릇 후손(後孫)의 번창을 논하는 자는 필시 선조의 음덕(蔭德)으로 돌리는데 하물며 학행(學行)과 절의(節義)의 내력이 있음에랴?
명(銘)하기를,
아! 선생은 재주와 덕이 높아 유림의 사표 되었네.
얼음과 황벽나무의 맑은 절조 채찍 두고 갑옷 던지니,
이름은 남쪽 땅에 매이고 지위와 명망 더욱 높았네.
임금의 돌봄 융숭하여 이미 정경에 올랐고,
장차 정승에 오르려는데 나이 늙었다고 물러나
옛 동산에 살았으니저 토구가 떠오른다네.
하로의 마을은 영남의 남쪽에 있어
우리나라의 추로이니 점필재와 매계와 더불어
도의로 벗이 되었네 서로서로 따르며
성리를 궁구하니 선비들 법도로 삼고
아울러 제사도 지내네.
보잘 것 없는 후손은 어진 선조 계심이 즐거운데
과분하게 영남의 도백 되어 묘소에 절하게 되었으니
말씀 직접 듣는 듯 추모의 마음 더하네.
산천은 완연하고 송백은 의구한데
지나는 사람 예를 갖출 테니
하물며 후손임에랴 묘소 쓸고 제전 드림
영구히 하기 위해 종인들이 회의하여
옥돌 다듬어 세우고 명을 써 후대에 알리니
선조의 공업 이어가기 바란다.
숭정갑신년 후 두 번째 계묘년(경종 3, 1723년) 12 월 일.
선생의 장자 첨지공(僉知公)의 현손(玄孫) 이사눌(李思訥)이 효도와 학문으로 이름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저(이세근)가 이 글을 지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가 이제야 종인(宗人)들의 말을 듣고 알게 되어 추기(追記)하여 왼쪽에 새기게 되었다. 종손 이주보(李冑普)는 선생의 10대손인데 선대의 업적을 잘 지켰으니 그 또한 가상하다.
선생의 외원손(外遠孫) 밀양(密陽) 박익령(朴益齡) 글씨.
知中樞府事贈諡平靖李公神道碑
有明朝鮮國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同知成均館事 贈謚平靖公老村李先生神道碑銘幷序
八世孫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世瑾敬撰
通訓大夫前行沔川郡守世玧敬書
朝散大夫前行 王子師傅世瑍敬篆
維嶺之金陵治南墨坊山坐乾之原有封若堂卽我先祖平靖公老村先生衣屨之藏也先生就世二百三十年八世孫世瑾
奉承餘庥忝按是道招集道內諸宗人共瞻掃而祭之墓前舊有短碣厪盈尺苔剝字泐殆不能省識其所記者亦甚略綽且
不記撰述人名姓竊伏念先生德行爲一世所推亦可爲百代宗師而墓顔之埋沒如此乆遠事雖不可臆斷其或出於先生
遺意而後承莫之敢違耶抑吾家先法樸素謙約故一與末俗之賁飭揄揚相反耶諸宗人咸曰古矣不可徵而吾先祖隧外
桓楹之樹終不容闕湏亟自爲文以圖不朽頋不肖不才何敢當屢力辤弗獲遂汗顔而敬諾焉然累百禩遺蹟알昧實無以
形容其萬一惟儒林所傳誦國家掌故文書所著見當世諸名公所詠慕舊譜所載錄猶有一二可据者掇此而叙之則文不
必多要其實其爲諗後之道豈不信而有徵乎謹按吾東道學自箕敎晦絶至圃隱始倡明冶隱受于圃隱金江湖受于冶隱
佔畢齋受于家庭傳之寒暄堂寒暄堂傳之靜庵此淵源大略而先生與佔畢齋及曹梅溪生並一鄕結爲道義交其所講磨
麗澤者儘是圃冶所傳寒靜所受之道則造詣深淺雖非後學所敢容喙宜乎一時縫掖之徒稱先生並金曹兩先生揭虔于
所居而扁以景濂也濂溪夫子在當時人只見其政事宦業或稱有仙風道氣或疑以希夷之流獨程太中知其爲學甚矣人
之知學之難也畢齋甞慕先生深至詠詩以美之曰公是詩書眞領袖噫古賢詩語雖隻字半句必鑿鑿中實絶無浮夸過溢
之辤故謂之詩史則先生之畢齋其周夫子之程太中耶舊譜亦曰生而志學博通經傳口德行文藝冠于儒林先生之博學
通經儒林之推爲領袖개可知矣 肅廟在宥以國朝輿誌多所闕略 命諸儒臣重加纂修其耽羅脚下有曰先生曾爲牧
及歸只持一鞭旣而曰此亦島物懸之官樓歲乆鞭落邑人盡其迹以寓慕舟到洋中忽傾回幾危先生疑然曰吾行無一私
或幕中人欺凂致令神明諭我耶果有潛賫一甲事至是皆以爲江神亦不欲凂氷操遂告以實命投之乃波정舟行至今名
其所曰投甲淵州人立祠享之此在先生特其細事而亦可見平日所養之一端也舊譜曰天資寬厚秉心堅確不喜浮華不
治産業性又剛正無區區于請平生淸愼人不得指以爲是非眞有德君子如尹坡平弼商諸公慕詠之詩曰一段淸氷置玉
壺有曰蕭灑襟懷仁玉壺有曰心如水月節若松筠有曰明月氷壺有曰玉樹淸芬先生氣像襟韻可以想見而其與黃山谷
贊美周夫子以爲灑落如光風霽月者同符於千載之下矣徐四佳居正詩曰諫官今復得賢才洪忠貞應詩曰鋪張大崇進
封事殫盡忠言近 御筵曰資兼文武騁雄圖畢齋之詩亦曰文武才全德又兼曰何妨詩禮爲戎律曰百辟班中三達尊曰
廟堂若要調元者時論應歸獨立君其忠言讜論濟時匡君才德兼備望屬三能聲名事㓛振耀隆洽蔚然爲國藎臣而曹伸
謏聞錄云引年退居桑梓偶遊以終其出處淸德雅望爲一代所仰慕斯言盡之矣赴聞 上 震진遣官賜祭諭曰天資端謹
至性純直出宰百里治稱第一分陜宣下遺愛棠茇曾長薇垣實賴勵翼于嘉乃德將以增秩天胡不吊乃至此極聞卿之訃
彌增歎惜 贈謚平靖謚法執 事有制曰平柔德安衆曰靖史錄淸白子孫世蒙收錄 聖朝 崇褒之典備矣而先生立朝本
末大率具是倘所謂藴之爲德行發而爲事業者非耶噫夫所謂學非異常別件物如政事宦業乃行其所學也向非程太中
則宋人終莫能知周夫子政事宦業皆其邃學所發此誠可慨也今之視先生亦徒以德望治行恬節而不知其德望治行恬
節寔本於私淑圃冶取益佔畢則是不知先生也不知學之爲學也重念世之爲其先銘石者必淸當世能文學有知識者所
立言而其言也又不能不待乎其家之記乗苟得文學知識如畢齋諸名公目飫其先之行業終始不待其家記乗而自爲言
者以銘之則豈不愈美愈信而無憾於尊祖重先之義也耶若其生卒官歷世系子姓序列于左李爲三韓大姓上祖諱忩言
贊麗王統合之㓛開號於碧珍珍今星州子姓仍籍焉其後靑紫蟬嫣洎乎進賢館大提學諱堅幹以文鳴世稱山花先生其
弟諱成幹中門祗候大將軍至諱希牧入 本朝判宗簿寺事贈工曹參議於先生爲曾祖 或云宗簿公以山花泒繼祗候
後而譜失其詳祖諱存實軍器少監 贈兵曹參判考諱德孫南海縣令 贈戶曹判書三世貤爵用先生貴也妣 贈 貞夫
人高興柳氏工曹典書務之女密直承旨澤之孫都僉議政丞淸臣之曾孫先生以永樂丙申五月降諱約東字春甫正統辛
酉進士景泰辛未登增廣文科歷職內而司憲府持平宗簿寺正司諫院大司諫戶曹參判同知成均館事漢城府左尹吏曹
參判外而黃澗縣監淸道郡守龜城府使濟州牧使慶尙左道水使慶州府尹全羅道觀察使開城府留守間以千秋使朝天
卒官知中樞府事以弘治癸丑六月十三日乗化享年七十八配貞夫人完山李氏考安邊府使知命塟與先生同塋異室擧
三男四女男庚元僉知承元通政紹元文科佐郞女金順成上將軍呂允成金禮康司直姜孝孫縣監自孫以下今踰十世不
能盡錄撮其最顯者通政後縣監厚慶洗馬屹以學行顯佐郞後判書忠肅公尙吉以節義顯評事尙哲參知尙伋監司尙逸
知事坰承旨外裔贊成李德泂議政南以雄參議李德洙參贊弘淵監司泰淵東稷判書秀彦府尹朴守弘議政申翼相以
科甲顯參議弘美典翰弘敏司直之後也副提學李埈上將之外裔也餘見譜噫凡後昆蕃昌論者必歸之先德况學行節義
其来有自乎銘曰
猗歟先生才德俱邵 儒林師表
氷檗淸操 留鞭投甲名繫朱雀
位望彌尊 睿眷隆渥旣躋卿
月將登台閣 引年退賁趾丘園
緬彼菟裘賀老之村
惟嶺以南我東鄒魯畢老梅翁道義相詡
杖屨追隨性理硏究 多士矜式並享爼豆 藐玆孱孫樂有賢祖
叨受嶺臬獲拜遺墓 如承謦欬罙增感慕
山川宛然松栢依舊
過者必式矧伊其後奠掃封塋期以
永乆 諸宗會議貞珉是竪 銘以詔後佇冀繩武
崇禎甲申後二癸卯十二月日
先生長胤僉知公玄孫思訥以孝義學問名備載新增輿誌而世瑾撰文時未及聞知今因諸宗言追記之비刻于左方宗孫
胄普於先生爲十世孫能保守先業其亦可尙也
先生外遠孫密陽朴益齡敬書
지중추부사증시평정공노촌이선생신도비(知中樞府事贈謚平靜公老村李先生神道碑)
김천시 양천동 349-3
평정이공신도비(平靜李公神道碑)
김천시 구성면 양각2리 산111
양각초등학교를 지나 먹방못에서 100m 지점 두 갈래 길에서 우측 산으로 150m 지점에 2기의 비가 있는데, 그 중 우측에 있는 비가 노촌이선생신도비이다. 비의 크기는 폭 75㎝, 높이 320㎝, 두께 34㎝이다. 옥개 문양이 쌍용 문양이다. 전면에 ‘평정이공신도비(平靜李公神道碑)’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건립 연대는 ‘숭정갑신후이계묘십이월일(崇禎甲申後二癸卯十二月日)[1723]’로 되어 있다. 1993년에 재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