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학을 위한 참회록
―최원현의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의 경우
한상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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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현(崔元賢)이 최근에 발표한 수필집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는 한 마디로 수필이 무엇인가를 감득하게 한다. 이 수필집은 수필문학에 대한 세간의 매도와 질시가 여전한 가운데 오로지 수필을 위하여 수필창작에 힘쓰는 한 작가의 수필에 바치는 헌사(獻詞)와도 같다. 그래 이 수필집에는 수필에 대한 반성문이자 참회록과도 같은 작가의 소박한 작가 정신이 담겨져 있다. 도도한 시대의 험난한 강을 넘고 있는 한 수필작가의 진솔하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듣게 한다.
그런 수필작가에게 고민이 있다면 자신이 창작하고 있는 수필에 대한 세간의 무례다. 즉 수필문학에 대한 폄훼가 작가를 왜소하게 만드는 경우가 없지 않다. 자신이 몰두하는 장르에 대한 성취감보다는 혹여 작가를 위축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그만큼 창작 의욕은 반감될 염려가 있다. 그보다 그 논의가 적절치 못할 때 작가는 마땅히 그 부당함을 토설해야 할 것이다.
수필집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는 이런 작가의 수필문학에 대한 애정을 직접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다. 새삼스럽게 다시금 수필에 대한 폄훼가 자가당착적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기기만이요, 우월주의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이미 수필문학이 미래문학의 선두주자로 달려가는 때에 구태여 그 진위에 대한 논의를 거듭함은 지면의 낭비여서이다. 그럼에도 아직 미몽에 사로잡혀 자기 기만에 함몰해 있는 작가들이 있는가하면, 수필문학의 진수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의 대상으로 삼거나 자기현시의 찬란한 언어적 성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허나 어느 때 어느 사회든 그런 이들은 있게 마련이요, 그 안에서 창조적 발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 전반의 영향을 끼칠 공공연한 자리에서의 망발은 삼가야 할 일이겠다.
지난 6월초, 나는 모 일간신문 기자의 기사를 읽다가 얼굴이 화끈거리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기자가 '북 리뷰', 이 책을 말한다'라는 난에서 한 여류수필가의 수필집을 평하며 수필문학을 사정없이 비하하는 표현을 쓴 것을 보고는 너무 당혹스럽고 부끄럽기도 하여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도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수필은 '때묻은 장르'로 변한 지 이미 오래이고, '소나 말도 뛰어들고 있다.' '아무나 쓰는 글'이요, '누구도 정색하고 읽지 않는 장르'요, '끼리끼리 문학'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헐겁게 이름을 파는 매명(賣名)의 글'이요, '턱없는 자기 위안으로서의 감상주의파 글'이라는 것이다.
수필도 과연 문학에 속하는가 싶은 의문을 만드는 것'도 수필가들의 자업자득이라는 평이다.
채 40도 안된 젊은 수필가가 수필집을 내었다. 아버지와 동생의 출산 등 작가 자신의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단아하고 정갈한 필치로 사실감있게 그려냈다는 평이다. 그런데 아직 신인이랄 수 있는 한 젊은 작가의 작품을 독자에게 어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수 백 년 동안 뿌리를 내려온 수필문학을 문학으로 여길 수도 없는 글로까지 격하한다는 것은 그 지나침을 아무리 젊은 혈기로 이해해 주려 해도 쉽게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다.
―<어떤 반성문>, 312-313쪽
작가의 분노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 어불성설도 유만부득이다. 젊은 기자의 오만한 논리가 그렇거니와 '인간학'이어야 할 수필에 대해 과연 그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렇다고 그의 언술을 전적으로 부정하려 드는 것은 아니다. 더러는 그런 비판을 받아도 될만한 작가의 작품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 잘못에, 특정 작가의 작품에 대한 지나친 인상적 비평일 뿐이다. "수필 장르 전반에 대하여 도전이랄 수도 있는"이라는 작가의 표현은 적절하다.
신문사 문화부 기자의 말이려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정작 작가 자신에게도 있다. 연전 문협선거가 끝나고 어느 소설가의 뒷이야기 속에는 여류수필가들을 마치 '아줌마 부대' 정도로 폄하하여 표현한 일이 있었는가하면(『월간문학』2001-4월호), 다음과 같은 수필가 장영희의 글( 2002년 '좋은 문장쓰기 상'을 수상한)은 수필에 대한 세간의 매도와 폄하를 다시금 상기하게 한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서강대 교수들은 소위 '업적보고'라는 것을 한다 지난 1년간의 학문적 업적을 점수로 환산하여 학교에 보고하는 것이다. 국내학술지 논문 한 편에 100점, 전공서적 한 권에 500점, 지도학생 한 명에 1점 등 열심히 합셈, 곱셈을 하며 행여 점수 될만한 일을 1점이라도 잊은 게 없는가 골똘히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런데 점수 기준 평가표를 보면 재미있는 항목이 있다. '수필집' 또는 신문칼럼을 묶어 낸 책은 '고려 외' 즉 영점 처리라는 것이다. 재능은 없어도 가끔 '수필'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글을 쓰고 또 이렇게 신문칼럼을 쓰고 있으니, 나는 공교롭게도 업적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신문 칼럼은 그렇다 치고, 소설집, 시집이 권당 500점인데 반해서 수필집은 영점이라는 것은 좀 그렇다. 아마도 수필은 학문과 별로 관계가 없고 재능과 노력이 없이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듯하다. 하긴 하다못해 나까지 '신변잡기'와 '수필'을 구별 못하고 수필을 쓴다고 우기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제대로 된 수필은 진정한 의미에서 엄연한 문학의 한 장르이다. 물론 수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문제이겠지만 웬만한 작가들이나 사상가들-찰스 램,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웰, 헨리 데이빗 씨로우, 제임스 써버 등-은 위대한 수필가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일보」, 2002. 2.2. 제25225호)
대학에서조차 수필에 대한 시선이 이러하고 보면, 아직도 수필문학에 대한 폄훼와 매도는 수필문학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의 기인으로 보아야 할 듯 싶다. 정녕 소설집이나 시집에 비하여 수필집은 아무나 쓸 수 있는 신변잡기의 기록쯤인가. 학문의 전당인 대학이 이 정도이니 다른 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여 신문기자의 언술이나 문단의 이름 있는 소설가나 대학 당국자의 인식이 이렇듯 대동소이한 것은 수필문학에 대한 인식부족이기 보다는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 외에는 타기하고자 하는 우월주의나 지식인의 공명심의 발로는 아니겠는가.
수필가 최원현의 반성문을 다시 보자.
한국문인협회 회원 중 우리 수필가는 시인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수필이 문학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있는가하면 각종 창작지원 제도에서도 제외되거나 소외되기 일쑤고, 수필작품을 심사하거나 그러한 지원금 심사에도 수필가가 아닌 평론이나 타 장르의 문인이 수필부문을 심사하는 등 문학의 서자 취급을 받고 있음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원로 및 젊고 패기 넘치는 수필가가 많음에도 수필의 문학적 위치를 놓고 아직까지도 문학이니 아니니 할 정도라면 수필가라는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떤 반성문>, 315쪽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이런 문단 현실이나 수필을 바라보는 이들의 왜곡되고 굴절된 시선에 대하여 그가 현실 문제에 대한 비판이나 자괴에 그치지 않고 "내가 쓴 한 편의 수필이 한국수필문학을 대표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는 수필 쓰기에 임해야 할 것이고, 그래야만 일간지의 한 기자가 수필문학 전반을 놓고 그렇게 까지 말할 수 있었던 모욕적인 지적을 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언술은 수필문학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긍정적 사고요.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도 자기 발견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겠다. 이는 참으로 타당한 견해라 하겠다. 적절한 비판은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문학권력 논쟁이 어느 때보다 심각한 이때에 폭력적 비평도 문제겠지만, 비평을 그저 악평으로만 간주하는 일도 위험천만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비평이 "눈가림과 사탕발림의 늪에 빠져있다"는 지적(「동아일보」, 2002년 1월 29일자, 김광일, <'주례사비평'을 비평하면>) 에도 눈을 돌릴 때여서다.
2
그렇다면 수필작가 최원현의 작가정신은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한 단초는 바로 작가의 머리글에서 찾을 수 있다. 수필집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의 머리말은 다소 특이한 발상법을 구사하고 있다. 수필을 왜 쓰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그의 수필쓰기는 한 마디로 그리움과 짝사랑이다.
내게 수필은 그리움이다.
수필은 쓰는 게 아니라 빚어내는 거라고 말해 왔었다.
침향(沈香)같은 수필을 쓰고 싶었다.
수필은 나의 사랑이다.
나의 병은 매우 깊다. 이 나이 되도록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긴 그림자를 끌며 그리움 병을 앓고 있다.
이렇게 다섯 마디로 되어 있는 이 머리말은 그가 왜 수필을 쓰는가에 대한 답으로 화두는 '그리움과 짝사랑'이다. 발상 자체가 특이하며 고도로 순화된 작가 정신을 읽게 한다.
수필 <나의 나됨>에는 이런 화두에 대한 구체적인 언술이 보인다. 화자에게 수필은 그리움이다. 그래서 "나의 수필속엔 늘 새벽 이슬에 젖은 것 같은 촉촉함이 배어 있다.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는 곳에서 밤 내 함초롬이 젖어 가던 풀꽃처럼 상큼한 신선함인 것 같으나 슬픔이 가득 담겨있는 이슬. 그 이슬에 스며있는 그리움의 냄새. 나의 수필은 그렇게 늘 아련한 그리움 속에서 출발했다."(279쪽)라고. 다분히 감성적이면서 여운을 지닌 글이다. 화자 자신의 술회와 같이 그의 수필은 두 줄기 흐름 즉 어머니로 모아지는 이룰 수 없는 그리움의 상(像)과 유년부터 현재까지의 실체 있는 그리움이라고 했다. 이런 그리움을 수필의 화두로 하여 침향과도 같은 수필을 창작하고자 하는 작가. 그래서 그는 "나에게 있어 수필은 '나'라고 하는 나무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뿌리 끝 물즐이다. 늘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나만의 동굴이기도 하다."(283쪽)라고 말하고 있으며, "나의 수필은 내 삶의 이야기들이 나 아닌 다른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떨림을 일으켜 처음 내가 내었던 소리보다 더 맑은 소리가 되게하여 그의 마음과 지금의 나의 마음이 교차할 때 일어나는 전율같은 감동, 그 감동을 키우는 것이라 생각한다."(283-284쪽)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가 무엇 때문에 수필을 창작하는지 그 출발의 동인을 찾게 한다. 어디까지나 수필이 인간을 바탕으로 한 '인간학'이라고 할 때 그의 창작의 출발이 "나의 사람됨"에서 출발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여기서 작가 최원현의 수필은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의 모습이라는 등식이 형성된다. 다음의 수필 <나의 수필은>은 이런 화자의 수필 창작에 대한 소회와 일치한다.
수필을 써 온 지가 꽤 되었습니다만 수필이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수필은 나란 나무에 비와 바람과 햇볕이 되어 내 삶의 정서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해 주었고, 현재 속의 나에게 늘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어린 날, 마주앉아 팽팽하게 옷감을 당기며, 빨갛게 잘 피어오른 숯불다리미로 스윽스윽 다림질을 하시던 할머니. 할머니와 맞잡았던 그 다림질감 위를 흐르던 숯불보다 뜨거운 그리움. 나의 수필은 그런 그리움이고 언제까지나 식지 않은 따스함이며,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소중한 추억들, 그 추억들의 냄새, 소리, 숨결이 고픕니다.
무엇을 새로 만든다거나, 무엇을 근사하게 개조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 열린 풀잎에서 풀 향기와 이슬을, 구름 속을 뚫고 나온 햇살에서 부시지 않은 밝음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 모습에서 변하지 않은 신선함들을 수필이란 그릇에 소중히 담아내어 그들이 서로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그들이 내는 빛, 냄새, 소리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작업이라고 할까요? 거기에 나의 삶, 내 이웃, 가족, 친구, 동료들의 숨결이 합해져서 가장 순수한 감동으로 열리는 하나의 세계,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요? ―<나의 수필은>, 224-225쪽
"나란 나무에 비와 바람과 햇볕이 되어 내 삶의 정서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해준" 것이 수필이요, 추억의 냄새이자 소리며 숨결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을 조화롭게 하는 작업 이를 그는 수필 쓰기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라는 시점에서 뒤돌아보고, 생각해보고, 관조하며 나를 통해 따스하고 잔잔하게 감동을 열어가게 하는 문학이 수필이라면 되도록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 향내, 그 감흥, 그 기분을 오늘에 옮겨놓아 나를 통해 그것들을 오늘에 피어올리는 작업이 수필이란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나를 돌아본다는 것처럼 두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결코 속일 수 없음이며, 그렇기에 나를 돌아보는 모든 것은 진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225-226쪽)"라는 화자의 말은 수필쓰기에 대한 작가 정신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작가 정신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 이 글에서는 그 일면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3
수필작가 최원현은 자신의 수필을 그리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 그리움은 시간상에서 주로 과거에 의지하며 그 대상이 여럿일 수 있으나 그의 수필 속에서는 추억의 냄새, 소리, 숨결로 형상화되고 있다. 구체적 상관물은 화자로 하여금 추억을 반추하게 하는 매체이지만, 주로 어머니로 나타나고 있다.
교회당 문 앞에서 종탑을 올려다보았다. 종탑에 뚫려있는 사각 구멍으로 흔들리며 소리를 내고 있는 종이 보였다. 이쪽 저쪽으로 힘껏 온몸을 흔들어 오가며 만들어 내고있는 종소리에 갑자기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종소리에 깨어난 듯 잊고 있었던 옛날 일들이 소롯이 고개를 든다. ―<그리움의 소리>, 45쪽
퇴근길 도심에서 듣는 때아닌 종소리가 그로 하여금 유년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종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맑혀주기도 하고, 잊어버렸던 옛 것들을 되살아나게 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희망을 갖게도 해 주었다."(47쪽)고. 그러니 울리지 않는 종일 때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 된다. 화자는 여기서 의미화의 단계로 진입한다. "종은 자신을 때려 남에게 필요한 소리를 들려주는데 나는 언제쯤이나 저 종처럼 내 몫의 소리를 내게 될까."고.
'하얀고무신'은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반추하게 한다. 여기에 수필 <섬이 되어>는 외로움을 그리움과 동격으로 처리하고 있다. 제3부의 '어머니가 보이는 강'은 이같은 화자의 정서가 잘 표백된 부분이다.
이 수필집의 2.3부는 대체로 기행과 관련되어 있으나 전형적 틀에서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수필의 제목 자체가 참신하며 정서와 이미지로 충일해 있다. '어미니가 보이는 강'. 말할 것도 없이 정서의 축은 '그리움'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그리움의 본향>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겨울 사모곡>에 이어지고 드디어 어머니가 보이는 강 ①∼③을 통해 구체화된다. 통상적인 여행기이지만 화자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끌어내기 위한 작은 충격과 통합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한 의미화로 그리움이라는 정서에 직핍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작가 최원현의 정서의 진폭은 그리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일상적 사소한 화소의 경우에도 인간애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의 간결한 문장, 유려한 문체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특히 충일한 작가 정신이 그의 수필을 빛나게 한다. 한마디로 최원현의 수필집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는 작가의 수필문학을 위한 참회록이라 하겠다. 이런 수필을 두고 어디 비문학성 운운하랴. 수필에 대한 화자의 정성을 높이 살만하다. 최원현 수필집《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2002. 3. 범우사. 값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