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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tello sole,sorella luna(Brother sun, sister moon)-Claudio Baglioni
성 프란치스코
1. 아씨시의 역사
로마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아씨시는 고고학적, 기념비적인 유적들이 있어 고대 도시임을 말해주고 있다.
12세기, 아씨시는 황제파의 자유도시로 선포되면서 뻬루지아에 대항해 계속해서 싸웠다. 이 기간동안에 아씨시는 시장이 열리는 광장, 황제의 성,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성 루피노 성당을 중심으로 재형성되었다. 12세기초, 도시의 새로운 정비는 시장이 열리던 광장을 시민 생활의 중심으로 만들어 놓았다. 같은 시기에 세워진 성 프란치스꼬 대성당은 도시 내의 시설과 도시 자체의 역사를 결정지음으로서 이 시기는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탄생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할 있다.
오랜 시기에 걸친 뻬루지아의 지배가 끝나고 1353년과 1367년 사이에 아씨시는 교황청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몇몇 외국의 영주, 용병대장, 그리고 다시 교황청의 지배 시대를 거쳐, 1500년도 초, 교황 바오로 화르네세(1534-1549)의 재임 기간 동안에 마지막으로 교회 국가에 흡수되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에 새로 지은 건물들은 중세 도시의 일부로 흡수되고, 1700년도 말,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대성당의 보물실과 도서관은 약탈을 당하였다. 1800년도 후반, 이탈리아의 통일과 함께 수도회의 재산들은 국유화되었다. 1900년도에 들어와서 복고풍의 중세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의 개축은 도시공간을 최종적으로 바꾸어 놓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2. 성인의 생애
프란치스꼬는 1182년 아씨시의 포목상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와 삐카 부인이라고도 하는 죠반나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1190년성 조르죠 성당의 부속 학교에 다니면서 기본적으로 라틴어와 아버지의 상업을 이을 목적으로 수학을 배웠다.
1194년오르똘라나 부인과 아씨시의 귀족인 파바로네 디 알프레듀쵸 사이에서 글라라가 탄생하였으며, 뒤이어 아녜스와 베아트리체 두 여동생이 태어났다.
1196년프란치스꼬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장사를 시작하였다.
1198년교황 루치오 3세가 돌아가시고 새 교황으로 인노첸시오 3세가 선출되었다. 아씨시는 훼데리꼬 바르바로싸의 봉건제도에 투항하여 큰 성채를 파괴하고 황제의 총독을 추방하였다. 아씨시는 자유도시가 되면서 봉건체제에서 벗어났다.
1199년아씨시 귀족들의 추방이 있었으며, 아씨시와 뻬루지아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1202년프란치스꼬는 아씨시의 군대에 지원하였다. 뻬루지아와 했던 전쟁은 아씨시의 참패로 끝났다. 프란치스꼬는 거의 1년 가까이 뻬루지아에서 포로로 남았으며, 가족들은 전쟁에서 참패한 그를 애정보다는 깊은 병 때문에 몸값을 치르고 석방해 왔다.
1204년오랜 동안의 병고생활은 프란치스꼬로 하여금 그의 미래를 다시 조명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1205년영광스러운 군인의 꿈을 안고 교황청의 징집군대와 더불어 뿔리아를 향해 출발한 프란치스꼬는 스뽈레또까지 갔다가 다시 아씨시로 돌아왔다. 같은 해에 뻬루지아와 아씨시는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아씨시의 평원에서 “신비한 나환자”를 만난 이후, 로마로 순례를 하면서 그는 한 거지와 옷을 바꾸어 입고 성 베드로의 무덤에서 그가 가진 돈을 모두 봉헌하였다.
1206년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상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교회를 쇄신하고 재건할 임무를 맡겼다. 성 다미아노 성당, 스피나의 성 베드로 성당 그리고 뽀르치웅꼴라 성당을 수리하였으며, 성모 마리아 대성당 광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속의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십자가를 그으면서 한 농부의 망토를 걸치고, 나환자들이 있는 성 베레꼰도와 굽비오로 갔다. 그리고 후에 은수자의 옷을 입고 성 다미아노로 다시 돌아왔다.
1208년뽀르치웅꼴라에서 미사도중 탁발 사도직의 소명을 깨달았으며, 베르나르도, 피에트로, 에지디오가 여기에 합세하였다. 같은 시기에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카타리파의 이단에 대항해 십자군 전쟁을 포고하였다.
1209년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료들이 올린 공동체적인 삶의 계획, 즉 “복음적 삶의 양식”을 구두로 인준함으로서 교황은 프란치스꼬가 세운 공동체에 “지리적 한계를 두지 않고 어디서든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였다. 설교자들의 삭발은 자격을 인정하는 표시가 되었으며, 프란치스꼬와 그의 동료들은 리보또르또의 버려진 오두막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형제들은 프란치스꼬가 주교좌 성당에서 설교 할 때에 불 마차의 환시를 목격하였다. 9월, 교황당의 브룬스위크의 오또 4세는 아씨시를 지나 로마로 여행을 하게되자 프란치스꼬와 형제들은 권력과 백성들이 황제에게 마련한 성대한 환영 식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1210년아씨시의 “귀족”과 “하층민”은 “사회 조약”에 서명하여 민생 권리의 상호 존중을 체결하였다. 프란치스꼬와 그의 형제들은 한 농부에 의해 쫓겨나 리보또르또의 오두막에서 나와 수바시오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마카베오 원장이 준 뽀르치웅꼴라로 거처를 옮겼다.
1212년뽀르치웅꼴라에서 프란치스꼬는 글라라를 봉헌하였다. 바스띠아와 수바시오의 베네딕도 수도원에 그녀를 의탁하였다가 후에 그의 여동생 아녜스와 다른 두 명의 동료들이 생겨나자 성 다미아노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1213년5월, 키우시에 사는 올란도 백작은 아레쪼에 있는 베르나 산을 프란치스꼬에게 기증하였다. 프란치스꼬는 모로코를 향한 여행을 하면서 사라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리아까지 가려고 시도해 보았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선교활동의 시작이 되었다.
1215년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개최하여 오류에 대항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혁에 박차를 꽤 하였다. 프란치스꼬 역시 다른 수도회의 설립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공의회의 개막에 참석하였으며, 거기에서 구츠만의 도메니코를 만났다. 공의회는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설립을 인정하였다.
1216년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서거하고 오노리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은 프란치스꼬가 회교도들에 대항한 십자군의 활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는 몇몇 추기경들의 비난을 누르고 뽀르치웅꼴라의 전대사를 인정하였다.
1217년뽀르치웅꼴라에서 있었던 성령강림의 총회에서 열 두 관구를 선정하여 각각 원장들을 임명하였다.
1219년모로코로 5명의 형제들을 파견하였으며, 그들은 후에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프란치스꼬는 평화와 형제애로만 무장한 채 제5차 십자군과 함께 이집트를 향해 출발하여 술탄 말렉 엘 카밀에게 그리스도교 복음인 하느님께로 개종할 것을 제안하였다.
1220년프란치스꼬는 형제들을 위한 서약서를 마련하였다. 9월 22 일에 발표한 오노리오 3세의 교황교서는 수도회의 문서 보관소에 저장되어 있다.
1221년3월, 프란치스꼬의 첫 대리자인 피에트로 가따니가 죽음으로서 3월 10일 프란치스꼬는 그의 새로운 대리자로 엘리야 형제를 선출하였다. 또한 “회개자들의 모임”인 프란치스꼬의 재속회가 탄생하였다.
1223년11월 29일, 오노리오 3세 교황은 그의 [Solet annuere] 교서를 통해 형제회의 설립을 인정하면서 프란치스꼬의 회칙을 인준하였다. 성탄절 날 프란치스꼬는 교황청에서 인정한 양식에 따라 리에띠의 그레치오에서 구유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하였다.
1224년성령강림절 날 있었던 총회에서 영국 관구를 설립하여 9명의 형제들을 파견하였다. 십자가 현양 축일인 9월 14일 베르나 산에서 프란치스꼬는 그의 금욕적, 신비적 삶의 정점인 오상을 받았다.
1225년프란치스꼬는 성 다미아노의 움막에서 깊은 병고생활을 하면서 저 유명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1226년10월 3일, 뽀르치웅꼴라의 수도원에서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다음날, 아씨시의 성안에 위치한 성 조르죠 성당에 그의 유해를 모셨으며, 그의 유해는 매장하지 않은 채 석관에 모심으로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방문객들이 가까이 가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대리자인 꼬르또나의 엘리야 형제는 재속 사제들로부터 몇 명의 형제들이 성인의 무덤을 경비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가진 옷마저 벗어버린 가난의 삶
최초의 탁발수도회 설립
평화의 사도로 사명 다해
『저는 저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이제부터 나의 아버지는 더 이상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rdone)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심을 선언합니다. 이제 저는 지금까지 저의 아버지였던 분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립니다. 이제 저는 빈몸으로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1206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는 청년은 부모로부터 제공되는 물질적 풍요와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입고 있던 옷마저 돌려주면서 이같이 가족들과의 이별을 고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가난과 복음 전파의 삶」은 지금껏 너그러움, 단순하고 천진한 신앙심, 신과 인간을 향한 헌신, 자연에 대한 사랑과 진실한 겸손의 모습으로 사람들안에 전해져 오고 있으며 「중세기에 나타난 가장 사랑받는 성인중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평화의 기도」, 「태양의 노래」 등 주옥 같은 기도문으로도 친숙한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1182?∼1226)는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 불릴 만큼 복음 정신을 따르는 청빈과 무욕 무소유의 모습을 보인 성인이다.
또한 그러한 가치는 최초의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 설립과 함께 800여년의 역사가 되어 세상 안에 함께 하고 있다.
1181년 혹은 1182년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소도시 아시시 태생인 프란치스코는 포목상을 하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피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시시라는 도시 출신의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프란치스코이다. 그는 이 세상의 부귀 영화를 추구한 부모의 영향아래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들에 길들어져 있었다. 그는 부유한 부모가 제공하는 물질적인 풍요를 즐기면서 자랐고 그 역시 부모보다 오히려 더 그러한 세계를 추구했었다』(Thomas von Celano, Erste Lebensbeschreibung des hl?Franziskus, Nr.1).
생애 전반부에 대한 다소 부정적 면모를 보이고 있는 이 문장에서 엿보듯 프란치스코는 젊은 시절 유복한 생활을 했고 화려한 옷에 향락적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뻬루지아와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던 프란치스코는 1202년부터 1203년까지 포로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됐고 1205년 다시한번 전투에 참여했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일련의 계시를 듣게 된다.
무기와 전쟁도구들로 가득 찬 궁전과 성에 둘러싸여 있는 곳에서 『이 모든 것이 너와 너를 따르는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계속해서 『프란치스코, 종과 주인 중에서 누가 너에게 더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았고 이에 『당연히 주인입니다』고 답한 프란치스코에게 『그럼 너는 왜 종을 따르느냐. 아시시로 돌아가서 기다려라. 그곳에서 너에게 나의 뜻을 알려주마』라는 내용이었다.
꿈속에서의 체험은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상당한 전환점이 되었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주었다.
아시시로 돌아온 그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에 몰두하였고 어느날 아시시 산 근처 성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에 있는 십자가 상으로부터 『가서 무너지려고 하는 나의 집을 돌봐라』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글자 그대로 허물어져 가는 성당을 고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포르티운쿨라, 성베드로 성당들을 차례대로 고쳐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과제가 「교회의 내적인 삶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소명을 깨닫게 된다.
가진 옷 마저 벗어버리며 하느님으로부터의 불림을 천명한 그는 1208년 성 마티아 축일에 사도들의 파견에 관한 복음 말씀, 즉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가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그 집에 들어갈때에는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는 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어떤 길을 걷기 원하시는지 깨닫게 됐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됐다.
그것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청빈한 삶이었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으며 또한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 무렵 자신을 따르는 동료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함께 움막 생활을 하던 프란치스코는 다시한번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 성서를 세 번 펼쳤는데 이때 발견한 구절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해야될 일과 미래의 우리 형제들이 해야 될 일을 보십시오. 나의 형제여!』라고 외쳤고 한편 함께 했던 동료들은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를 복음 안에서 생생히 만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형제애는 더 나아가 자연과 우주만물에 대한 사랑의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곳곳에‘회개와 평화’ 선포
작음의 영성·형제애 추구
자연과 우주로 사랑 확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남겨준 영성은 「복음적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과 「사도적 선교적 영성」 그리고 「작음과 형제애의 추구」로 정리할 수 있다.
프란치스칸들은 특히 「그의 영성이 무엇보다 복음적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인이 살았던 당시의 13세기 교회는 교황권이 절정에 올라 황금기를 맞고 있었고 지상권 역시 교황권에 예속돼 있었던 만큼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 세상을 통치하고 세속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인 교황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그리스도관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다. 또 교회 모습은 거대한 국가 조직처럼 갖춰져 있었고 신자들 역시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봉건적 예법과 권위체를 받아들이던 처지였다. 그런 가운데 성인은 하느님을 만나 교회를 다시 세우고 복음이 지닌 진리를 증언하는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삶을 보였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를 통해 그 시대 교회에 풍미했던 그리스도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것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가난하게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프란치스코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따라야할 그리스도였다.
프란치스코는 또 자신과 초기 동료들을 「아시시의 회개자들」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며 선포하신 첫 말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따르는 것이었다. 실제 프란치스칸들이 교황으로부터 회칙을 구두로 인준받은 후 받았던 첫 공식 소명이 바로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라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칸 관계자들은 성인의 「시에나 유언」(Siena Testament)을 정신적 유산의 핵심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1226년경 성인이 중병에 걸려 시에나에서 아시시로 오는 도중 레 첼레(Le Celle)에서 구술한 것, 즉 『형제들 서로간에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청빈을 언제나 사랑하고 지켜가야 한다.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언제나 충실하고 순명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여기서는 「가난 겸손의 삶」과 함께 성인이 지닌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이 잘 드러난다.
프란치스코는 교회 없는 삶을 추구함으로써 이단에 빠지는 오류들이 범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근본 이유가 교회 안에서의 삶을 택하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다.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도들을 주축 삼아 세운 것이고 그런 만큼 교회를 통해 확인되지 않는 삶은 그리스도로 부터도 확인되지 않은 삶이라는 관점에서다.
선교적인 면 역시 13세기 교회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때 유럽내 모든 나라들이 그리스도 교회화 되었으나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 사명은 숨죽어 있던 상태였다.
프란치스코는 이에 맞서 본질적 사명인 선교에로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제자들을 보내 새로운 수도회를 곳곳에 세웠고 그들은 유럽을 신앙심으로 일깨우고 이슬람과 극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음」의 모습은 일반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을 가장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 성인에게 있어 「작음」은 권력이나 특권 지위를 얻으려는 인간적 욕망을 끊는다는 뜻이고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또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야훼의 가난한 자」처럼 되려는 바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보다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데서 출발한 것인데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을 말한다.
그는 사회적 계급이 분명했고 수도회들 안에서도 신분이 낮은 이들에게는 평수사 직분만 허용하였던 시대에서 「자신의 수도회에서는 아직도 참된 형제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의 정신은 성별 계층 계급을 벗어나서 모든 이들에 대한 형제애로 확장 되었고 더 나아가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의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성인은 1224년 9월 14일 라 베르나(La Verna) 산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세라핌 천사를 통해 오상(五傷)을 받았다. 손과 발에 나타난 상처에는 연골 형태의 못까지 있었다.
오상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상황이었지만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의 회개와 복음 전파를 위해 이탈리아 중부 지역으로 두루 다니는 투혼을 발휘했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임종이 다다르자 회원들은 성인의 원의에 따라 수도회 요람인 뽀르찌운꿀라로 모셨고 1226년 10월 3일 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들은 뒤 눈을 감았다.
죽음에 앞서 남긴 성인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회개와 복음적 소명에 대해 주님께 드린 뜨거운 감사였으며 하느님께서 친히 형제회를 창설하신데 대한 확인」이었다. 그는 또한 초창기의 완전한 가난 단순 겸손을 회상하며 특히 육체 노동에 대한 기쁨을 회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프란치스코는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됐다.
프란치스코의 타우 십자가
타우(T)란?
들어가는 말
타우(Tau)는 십자가의 일종으로서 역사적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 프란치스꼬의 생활과 행동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나아가 신심의 대상이 됨으로써 성 다미아노 십자가와 더불어 탁월한 프란치스칸 상징의 하나가 되었다.
타우(T)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아홉 번째, 그리고 히브리어의 스물 두 번째 즉 마지막 글자이다. 타우는 성서적으로 ‘하느님의 것’이란 표지요 ‘구원의 표’로 인식되었다. 이에 대한 언급은 에제케엘 예언서에 나온다. “이마에 표(타우)가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라”(에제 9,6). 여기서 말하는 타우 표시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에서 구원되었듯이(출애 12, 21-28 참조), 타우 표를 지니는 사람은 구원의 표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타우 표시는 성서적인 표지일 뿐 아니라 로마의 까따꼼바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지니고 있다.
1. 성 프란치스꼬의 문장이요 서명인 타우
“프란치스꼬는 어떤 글자보다도 타우(T)자를 좋아하였고, 그 타우로 친히 편지에 서명하였으며, 방마다 벽에 타우자를 붙였다. 그리고 천상의 환시를 목격한 하느님의 사람인 빠치피꼬가 자기의 두 눈으로 복되신 사부님의 이마에서 커다란 타우 표시를 보았다. 그 글자는 여러 색깔로 되어 있었고, 황금빛을 내고 있었다.”(3첼 3: 대전 4,9 참조) 또한 “이 표시는 프란치스꼬가 일 때문이나 사랑으로 어떤 글을 전해야 할 때 편지에 표시했던 바로 그 타우자였다”.(3첼 159)
이렇듯 타우에 대한 프란치스꼬의 경건한 애정과 깊은 신심은, 역시 타우로 서명하도록 권장한 성 보나벤뚜라에 의해 더욱 강하게 부각되었다. “프란치스꼬는 항상 이 특별한 표시(타우)에 대해서 큰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종종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사용하기를 권했다. 그는 그것을 모든 편지 끝에 써넣곤 하였는데, 이는 마치 그의 유일한 소망이 에제키엘의 예언에서 읽을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인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타우)를 해주는 것’(에제 9,4) 같았다.”(대전 4,9) 또한 “그분 자신이 활동하기 전 그때마다 타우로써 표하였다.”(소전 2,9)
2. 성 프란치스꼬가 남긴 타우 표시들
이렇듯 타우 표시가 프란치스꼬에 의해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기작가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역사 자료들을 보기로 하자.
첫 번째 사료는 1229년에서 1238년 사이에 수비아꼬 분도회 수도원의 미사 경본에 쓰여진 “모든 성직자들에게 보내신” 두 번째 편지의 사본이다. 이 사본에는 그의 편지와 더불어 그의 타우 서명이 정교하게 베껴져 있다.
두 번째 사료는 현재 아씨시 성 프란치스꼬 대성당 유물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성 프란치스꼬가 라 베르나에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의심과 낙심에 빠져 있던 ‘레오 형제에게 써준 축복문’이다. 프란치스꼬는 이 축복문에 타우 표시를 남겼다. 레오 형제는 이 축복문의 끝부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복되신 프란치스꼬가 나, 레오 형제에게 자신의 손가락으로 이 축복문을 써주셨습니다.”
끝으로 폰떼꼴롬보의 막달레나 성당의 오른쪽 복음을 앍는 쪽 위의 창문턱에 남아있는 붉은 색 타우를 들 수 있다. 이것은 15세기부터 흰석회 도료로 덮혀있던 것인데 1920년대 초에 발견되었다. 이 타우가 그려진 시기는 성 프란치스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사료들에 덧붙여 그분의 사후에 일어난 다음과 같은 기적들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스띠아 교구내 코리 출신의 한 주민이 한쪽 다리를 완전히 못쓰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꼬는 그의 이런 사정을 모르는 채 할 수 없었으니 한 동료와 함께 그에게 나타났다. 성인은 그의 간청을 들어주러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타우자가 밑에 새겨져 있는 지팡이를 그의 환부에 갖다 대었다. 잠시 후 상처가 아물고 환자는 건강을 회복했으며, 지금까지도 성인이 당신의 지팡이를 댄 그 자리에서 타우자를 볼 수 있다.’(3첼 159)
3. 성 프란치스꼬의 타우 신심에 직접 영향을 준 계기들
성 프란치스꼬의 타우에 대한 깊은 신심이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그는 아주 오래된 그리스도교 신앙으로부터는 물론이고, 당시의 학문적이면서도 유행하던 신비적, 성서적인 흐름의 영향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제 4차 라떼란 공의회와 성 안또니오 병원 수도회 수도자들이었다.
1) 제 4차 라떼라노 공의회
1215년 개최된 제 4차 라떼라노 공의회에는 공의회 교부 자격으로 2212명이 참석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주교가 412명, 아빠스들과 수도회 장상들이 800명, 그리고 각계 각층의 인물들로서 신학자들, 대사들, 수도회의 공의회 대표들과 영적운동의 지도자들이 포함되었다. 1209년 이미 회칙의 구두 인준을 받았던 프란치스꼬는 바로 이 영적운동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공의회에 참석하였다.(2첼 17; 회칙 해설 서문 14; 작은 형제회 연대기 III, 9쪽 등 참조) 프란치스꼬의 라떼라노 공의회 참석 사실은 도미니꼬회 제라르드 파쉐(Gérard Fachet)와 쁘레몽뜨레회의 부까르도 디 우르스페르그의 증언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이 공의회에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성 프란치스꼬에게 내려주신 복음적 생활과 회칙에 대하여 모든 고위 성직자들과 수도회의 장상들, 그리고 프란치스꼬를 따르려는 이들에게 알렸다”.(회칙 해설 서문 14; 참조 뻬루 67)
그런데, 공의회에 참석한 프란치스꼬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1215년 11월 11일에 있었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공의회 개막 연설이었다. 교황은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왔는지 모른다”(루가 22,15)는 말씀을 주제로 택했다. 여기서 그는 ‘빠스카’가 ‘과월절’을 의미한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공의회야말로 ‘새로운 과월절로서 삼중전이(즉 육체의, 영신의, 영원불멸의 전이)의 계기가 되리라는 희망을 표명하였다.
육체적 전이(轉移)는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한 군대 출정으로 깨닫게 되고, 영적인 전이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아가는 것으로서 보편적인 교회의 개혁인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생명에서 참 생명에로의 영원한 전이는 성사들의 의미,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영적인 전이를 말하면서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발칙한 짓을 역겨워하며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타우)를 해 주어라”(에제 9,4)라는 말씀을 상기시켰다. 이어 교황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타우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요 그 형태가 빌라도에 의해 명패가 붙여진 예수님의 십자가 그 이전에 보여졌던 십자가를 나타내줍니다. 타우는 십자가의 광채가 자신의 모든 행위에서 드러나고, 사도 바오로가 말하듯 악습과 죄악과 더불어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이마에 지니게 되는 표입니다. 그러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가 아니라면 그 어떤 것에도 나의 영광을 두고 싶지 않으며, 그 때문에 세상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나는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니 타우와 십자가의 승리자들이 되십시오!”
첫댓글 성프란치스코가 시작하셨다는 구유예절, 올 크리스마스 우리의 조촐하고 아름다운 구유가 기대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