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골에서 새를 잡아
장작골에서 장작피워 이 형 석
담방이에서 담방 담그어 (교육학 박사, 가천문화재단 부장)
음실에서 음실 음실 먹자”
만수동의 샛골과 담방이 마을(만수3 택지), 서창동의 장자골, 운연동의 음실(陰室)등 4개의 마을 이름을 엮어서 민요조로 부르던 땅이름 노래가 전해 오고 있다.
만수동에서 으뜸되는 마을인 샛골은 조곡(鳥谷)이라고도 부른다. 1842년에 발행된 「경지읍지」에는 조동면(鳥洞面)으로 기록되어 “새(鳥)”가 많아서 새골 또 한문으로 조동이라 불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풀(=새-草)이 많아 초곡산(草谷山)이라 부르던 것이 ‘풀=새=조(鳥谷)’으로 변천되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과 경상북도 문경군 사이에 있는 새재는 조령(鳥嶺)이라고도 불러 새(調)와 관련 있는 고개이름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으나 실제로는 풀(새=억새,草)이 많아서 유래된 땅 이름이다. (이 곳은 동국여지 승람에 초점(草岾)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동 정수장 뒷편에 위치한 이 산을 마을 노인들이 초곡산(草谷山)이라 부르는데 이 산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 창설자 중의 한사람인 이승훈(李承薰. 1756 ∼1801)일가의 애닳은 사연이 서려있다.
만수동은 옛부터 평창(平昌) 이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이승훈을 비롯한 4대에 걸친 5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이승훈은 참판 이동욱(李東郁)의 아들로 서울 중림동에서 태어나 일찍이 문과에 급제(1780)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승훈은 1775년 정약용의 누이와 혼인했으며, 천주교도 이벽(李蘗 1754∼1786)을 만나 감화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1783년에 아버지를 따라 청국에 가서 북경 천주교회당에서 교리를 익힌 후 그라몽(梁棟材)신부로 부터‘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어 천주교 교리서적과 십자가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1785년 서울 명동(明禮同)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집에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교리서를 언문으로 번역해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을사추조적밀 사건이 일어나자 이승훈은 가족들의 권유로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척사문(斥邪文)을 짓고 배교했다.
1787년 다시 복교하여 권일신을 주교로 하고 자신은 스스로 신부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 은밀히 포교하던 중 1789년, 평택현감을 재수 받았을 때 다시 배교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다시 입교하여 활동하던 중 ‘서학(西學)의 서적을 발간하였다’고 하여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여 포교활동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가 예산에 유배되었으며 1796년 유배가 풀린 후 주자백록동연의(朱子白鹿同衍義)를 짓는 등 교회활동을 단절한 입장을 밝혔다. 1801년 순조때 정순(貞純)황후와 심환지(沈煥之)등 벽파세력 및 남인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계기로 사학(邪學)탄압을 내세우면서 신유(辛酉)박해를 일으켜 같은 해 2월 26일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등과 함께 연루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문집으로「만천유고」(曼川遺矯)가 있으며, 1856년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는 신원(伸寃) 되었다.
- 4대에 걸친 5명의 순교자 집안 -
이승훈의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는 고종 3년(1866)병인양요가 발생한후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진 가운데서도 비밀리에 포교활동을 하다가 1868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승훈의 증손자 연구(蓮龜), 적구(籍龜)형제는 신미양요 때 경기도 관찰사 박영보(朴永補)의 지휘아래 제물포에서 증조부, 조부, 부친에 이어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들 다섯분의 순교자들은 만수동 남동정수장 북쪽 초곡산(草谷山)에 묻혀있는데 이승훈의 유해는 1981년 경기도 광주군,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으로 옮겨져 현재는 비석과 터(가묘)만 남아있다.
4대에 걸친 5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평창이씨의 집안! 필자는 비록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장한 인물, 장한 집안이라고 찬탄하고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4대에 걸친 5명의 순교자 집안은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에서도 찾을 찾을 수 없는 일로 그 정신, 그 훌륭함은 후세에까지 길이 빛날 것이다. 그리고 이들 5분의 묘가 인천의 남동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천의 큰 자랑거리이다.
장수동 인천대공원 서쪽에 위치한 초곡산의 이승훈일가 묘소로 향하는 산길에는 마치 골고다 언덕을 연상될 수 있는 글들과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어 찾는 이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한가지 덧붙이면,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神父) 김대건(金大建, 1822∼1846)은 용인사람으로 기해사옥 때 순교한 제준(濟俊)의 아들이다.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 선교부와의 통신 연락에 필요한 비밀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백령도 연안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9월16일 서울 노량진 새남(沙場)터에서 처형 당하였는데 백령도 진리 백령 길병원은 개원 당시 명칭이 김대건의 세례명을 따서 지은 앙드레(Andre)병원이었으며, 현재 병원 경내에 김대건신부의 석상과 천주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명동성당)을 창설한 베드로 이승훈, 한국인으로서 한국 최초의 신부인 앙드레 김대건, 이 부분의 유적이 인천광역시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인천광역시민 누구나 알고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주1) 평창이씨 족보, 「인천지지」에 초곡(草谷)산으로 기록, 풀에서 유래된 땅이름임이 입증됨.
주2) 동아대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인천지지」등에 4대에 걸친 5인의 순교 기록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