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봉오동 전투
▲ 저수지로 변해있는 봉오동 전투의 현장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최진동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작전 등 활발한 활동에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하였다. 일본군이 잠복해 있는 독립군 부대 앞까지 추격해왔을 때가 6월 6일 오전 10시였다. 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명을 사살하였다. 6월 7일 새벽 야스카와 부대가 전방 300m의 텅빈 안산 촌락으로 돌입하자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야스카와부대는 니히미 중대와 합세하여 응전했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불의의 기습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야스카와 부대는 야마자키 중대를 주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야스카와 부대가 고려령 서방에 도착했을 때, 북방 및 동북방 고지에서 매복하고 있던 소수 독립군의
▲봉오동 반일전적지 기념비
치열한 사격을 받고 참패를 당하였다.
일본군은 안산과 고려령 두 전투에서 120명의 전사자를 낸 뒤에도 거듭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말려들어 봉오동으로 유인되었다. 봉오동 전투는 삼둔자 부근 전투에 이어 전개되었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령의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장 수십 리를 뻗은 계곡 지대이다.
독립군은 6월 7일 아침부터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해 홍범도와 최진동의 연합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남산 중턱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유도하도록 하였다. 일본군 주력 부대가 독립군이 잠복한 포위망에 들어설 즈음에 일제히 사격을 단행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상촌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다. 홍범도 장군의 명령에 따라 동·서·북 3면에서 협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반면 아군은 장교 1명, 병졸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냈을 따름이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지리적 요지를 선용한 뛰어난 작전계획에 있었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 중 하나이다.
봉오동 전투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1920년 6월 7일 반일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장으로 한 조선민족 독립운동 대한북로독군부(반일독립군)는 협산 벽곡 봉오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일군 19사단 소속부대, 아라요시 중위의 남양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감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폈다. 반일독립군은 빈틈없이 매복진을 쳐 놓고 있다가 오후 1시경 일군이 기여들자 삼면고지에서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다. 이 맹격전에서 일군 150여명을 살상하고 10여 명을 부상 입혔으며 보총 60여 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로획하였다. 연변한인 무장 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 침략사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 놓았으며 인민 대중의 반일투지를 크게 북돋아 주었다. 우리는 이 전적지의 참뜻이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하여 이 옥서를 새긴다.
1993년 6월 7일
▣ 홍범도(洪範圖)
홍범도(1868~1943)는 평안북도 자성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갑산으로 이사한 뒤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 해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 등과 함께 산포대를 조직한 뒤 삼수·갑산 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대적하여 북청·후치령을
▲크질오르다의 홍범도 동상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 다음 해 부하 박영신으로 하여금 함북 경원의 수비대를 습격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만포진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다. 이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그 뒤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되었다.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여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양성에 힘썼으나,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참변을 겪은 뒤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 이후 연해주에서 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곳에서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1982년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 《레닌기치》 기자들과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크질오르다 중앙공동묘역으로 이장하였으며, 흉상과 3개의 기념비를 세웠다. 또 말년에 거주하던 집은 크질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집 근처의 거리는 ‘홍범도 거리’로 지정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