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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수필 원고
작품 1
초롱꽃은 피었는데
임 인택
그때처럼 초롱꽃이 환하게 피었다. 이젠 옛 친구의 옛 일이 되었다. 초롱 들고 "이리 오너라." 큰 소리 치던 즐거운 시절. 함지고 찾아간 그 친구의 신부 집 담장 가에 오늘처럼 초롱꽃이 불을 밝히고 방긋 웃고 있었다. 이 환장하게 좋은 봄날, 춘정을 이기지 못하고 행여 가는 길 어둘까 봐 초롱꽃 초롱 앞세우고 먼 길 떠난 친구, 어느 좋은 시절 있어 다시 그때처럼 '불나비사랑' 목청껏 노래할까? 고작 다섯 해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다 옛 일이 되다니.
청춘의 한 시기를 함께 웃고 울고 다투며 보낸 친구. 스무 살의 봄에 만나 방과 후 캠퍼스 뒤 막걸리 집에 앉아 젊음을 노래했고, 시집을 함께 읽고 문학을 얘기했으며, 음악다방에 앉아 담배연기 콜록거리며 뜻 모른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폼을 잡기도 했었다. 어느 해 겨울 자취집 냉방에서 오들거리며 찬밥을 먹어도 즐거웠고, 주인집 아가씨의 얘기로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을 달래며 쓸데없이 소주잔만 축내던 그런 철부지 시절도 있었다. 비오면 비가 온데서, 눈 내리는 밤이면 어느새 들썩이는 맥박소리와 호흡을 함께 했었다. 거칠지만 생생한 기운들이 곁을 맴돌며 우리 삶의 한 자락을 청명한 가을 햇살처럼 눈부시게 만들어 온지 50여년. 참 무던한 세월을 함께 했었다.
“진정 알아주는 이 있다면, 하늘 끝이라도 이웃과 같으리. (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은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하늘절벽 끝에 앉아 있다 해도, 지척에 둔 이웃처럼 마음이 따뜻하고 흐뭇하다고 했다. 우리도 그랬었다. 멀리 있지만 마음의 그림자처럼 함께 하자고 했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고, 그리움이 따르지 않은 만남은 이내 시들해진다고 했었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 때의 마주침이라고 서로를 추슬렀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만남도 뜸해지고, 뜨겁게 뛰던 맥박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70이 가까워질 무렵부턴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멍청히 앉아있거나, 밥 먹는 한 시간 동안 그저 지나간 소리만 몇 마디 할뿐. 침묵의 공기가 천 마디 대화보다 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러다 덜컥 친구는 가고 말았다. 헤어질 때 조심해 가라는 말과, 데면데면 어 그래 손 한번 흔들어 준 것을 끝으로 우리의 만남은 끝을 맺었다. 친구는 그만큼 많이 아팠던 것이다.
길을 걷다가도 문득 친구 생각에 잠기는 건 친구는 떠났지만 함께 걷던 이 거리, 친구의 발자국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 아름다워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가까이 느껴지는 그 친구가 보고 싶다. 보이는 것 만으로만 평가 되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지만 서로의 마음을 맡기며 서로에게 마음의 의지가 되었던, 참 좋은 친구였는데.
세상사 부질없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기도 한다. 보고 싶고, 미안하다. 친구여, 힘들 때 등 한 번 두드려주지 못하고, 좀 더 따뜻하게 대하지 못한 나를 용서해주게나. 내 어깨 짐이 무겁다고 투정만 부려서 정말 미안해. 그래서 가슴은 늘 답답하고, 이제 그만 친구를 떠나보내야지 하면서도 아직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언제까지 함께할 줄 알았지만 그렇게 소중했던 사람은 어느 날 말없이 너무 빨리 가버리고 말았다. 꽃은 져도 향기는 대기 중에 머물 듯, 그대 떠난 자리에 남은 향기는 저미듯 스며드는 그리움으로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렇게 자주 가던 친구 집이었는데, 그 집 앞이 아니라 그 집 근처다. 친구가 살았던 집 근처를 우연히 지나쳐 가는데 가슴이 떨린다. 온몸이 그 쪽으로 쏠려, 세포 하나하나가 속삭인 것만 같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늘 가보고 싶었다. 그 집, 그 창이라도 보고 싶었다. 갑자기 화석처럼 굳어 있던 시간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혹 대문 앞에 서 있으면 친구의 그림자라도 볼 수 있으려나.
이규보(1168~1241)는 눈보라 속에 말을 타고 벗을 찾았는데 마침 벗은 집에 없었다. 그는 채찍을 들어 문 앞에 크게 자기 이름을 쓰고는 이렇게 읊조렸다. “바람아 부디 쓸지를 말고,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다오.(莫敎風掃地, 好待主人至.)”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술집 문을 열고 왁자지껄한 사람들 속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온몸의 솜털이 곧추선다. 사람들은 많은데 추억이 빠져나간 자리에 빈 잔만 뎅그렇다.
사라진 존재의 흔적이 눈물 난다. 문득 내 가슴에 친구의 숨결이 불씨처럼 번진다. 화상을 입은 아린 가슴에 뜨거운 눈물이 고인다.
어젯밤 조금 뒤숭숭한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깼다. 그 시절이 그리워서일까, 올해 들어 벌써 두 번째, 먼 희미한 빛으로 내 꿈속에 친구가 찾아왔다. 며칠 있으면 친구의 5주기다. 이제 특별히 기억할 것도, 챙길 것도 없다. 그냥 이렇게 가슴에 담아두는 것으로 대신할 뿐이다. 난 그대로인데 친구는 우리 곁에 없고, 우리 두고 거기는 좋은 건지. 그 세상에는 친구 힘들게 하는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거기에서 친구가 편안했으면 좋겠다. 뭐가 그리 급해 이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떠나갔는지.
화단 가로 초롱꽃이 곱게 피었다. 어디선가 귀한 손님이 찾아올 것만 같다. 옛 양반님 네들 야간 행차 시에 “게 물렀거라!” 소리치던 하인들의 손에 든 초롱도 같고, 마치 신랑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켜놓은 청사초롱도 같다. 너무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그런 연자주색 초롱꽃 한 송이 친구 앞에 올린다. (끝)
작품 2.
통영, 문학의 바다에 빠지다
임 인택
봄이라지만, 아직 바람이 차다. 자다가도 달려가고 싶은 문학의 고장 통영, 2시간 반만의 설렘을 안고 통영에 간다. 통영, 그래 통영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이 물의 도시를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곳에는 뭔가 특별한 예감이 꿈틀거린다. 해변의 물보라와 초록색 물결. 눈부신 태양과 푸른 하늘은 그 자체가 시이자 그림이며 음악이다. 어찌 그 모습에 매료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시내 한복판에 이리도 살포시 바다를 안고 있는 도시가 또 있을까. 이른 봄이면 동백의 꽃 이파리가 눈 시리도록 말간 통영의 바다를 붉게 물들이더니, 이젠 벚꽃의 화사한 꽃물결로 무수한 섬들이 위성처럼 산재해 있는 통영의 바다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흔히 통영을 산과 바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동양의 나폴리'라 불린다. 발길 닿는 곳마다 예인들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다. 시인 이은상은 통영의 앞바다를 “결결이 일어나는 파도/ 파도 소리만 들리는 여기/ 귀로 듣다못해 앞가슴 열어젖히고/ 부딪혀 보는 바다”라고 읊었다. 또한 정지용 시인은 통영 기행문을 통해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했듯이 짙푸른 바다가 뿜어내는 기상과 통영항의 낭만, 아름다운 다도해 풍광이 사람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걸출한 예술가를 많이 배출해낸 것으로 보인다. 통영만큼 이름난 예술인을 많이 배출한 고장도 없을 것이다.
통영의 한 중학교에서는 국어는 시인 유치환, 음악은 작곡가 윤이상, 가정은 시조시인 이영도가 가르치던 시기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시인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극작가 유치진, 소설가 박경리 김용익,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김용주 등 이름만으로도 떨림을 주는 거장들이 통영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렇듯 통영 바다는 시이고, 음악이고, 잘 그려진 한 폭의 산수화이다.
먼저 청마문학관이다. 망일봉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청마문학관에서 청마 유치환 시인(1908~1967)을 만난다. 어릴 적 통영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예술혼을 키운 청마의 발자취를 둘러보고 시를 감상한다. 가슴 절절하다. 우리 모두 젊은 날 한 번쯤은 가슴에 품었음직한 그 달콤한 시어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청마의 흉상과 연보와 시를 지나 유품으로 남겨진 편지뭉치 앞에 선다. 펜촉에 잉크를 묻히며 서로에 대한 안녕을 빌었으리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읽는 사람도 이렇게 가슴 절절한데. 1947년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돼,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한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1916∼1976)에게 첫눈에 반해 그 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연애편지를 보낸다. 60세 되던 1967년 청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20년간 수백 통, 아니 수천 통, 그 편지를 모아 정운은 후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영도의 아픈 마음이 통영의 푸른 물결에 출렁인다. 얼굴에 와 닿는 쌀쌀한 바닷바람이 눈물처럼 차갑다.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통영은 한적한 어촌이었을 것이다”라고 누군가 얘기했다. 통영의 앞바다에서 펼쳐진 그 날의 바다를 얘기한다. 역시 이순신 장군 아닌가. 삼도수군통제영은 경상, 전라, 충청의 3도 수군을 지휘하던 본영이다. 이충무공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세병관(국보 305호)은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쓰였던 건물로 여수 진남관(국보 304호)과 더불어 현존하는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바닥 면적이 가장 넓다고 한다. 세병관(洗兵館)이라는 이름은 두보의 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출입문 역시 거둘지(止)에 창 과(戈), 창을 거둔다는 지과문(止戈門)에서 알 수 있듯이 다시는 전쟁을 겪지 않게 해 달라는 바람이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에 이어 다시 정유재란까지, 지긋지긋한 전쟁.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의 아픔이 없기를 바라며, 통제영 앞바다를 본다. 시원한 풍광의 통영 앞바다는 맑고 푸르고 햇빛에 반짝이며 내 마음의 호수가 된다. 그림 같다는 상투적인 수식어가 절로 튀어나온다.
통제영에서 중앙우체국을 지나 중앙시장 뒷골목으로 들어선다. 시장 뒷골목답게 올망졸망 작은 음식점들이 자기 이름을 달고 손님을 부른다. 그런데 문간마다 백석의 시가 붙어있다.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여기에서 백석을 만나다니. 백석은 통영을 4번 왔다는데, 통영의 한 아가씨를 사랑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시로 남겼다 한다. 뒷골목 구경도, 시장 구경도 다 재밌다. 그래도 먹는데 비하면 야.
역시 통영의 봄은 도다리쑥국이다. 남해안의 살찐 싱싱한 도다리와 바닷가 봄 쑥을 넣어 끓인 입에 쩍쩍 달라붙는 진국은 이쪽 남해안이 아니고서는 그 맛을 느낄 수 없다. 거기다 생멸치 회는 얼마나 맛있는지, 절로 막걸리 잔을 부른다. 시끌벅적 시장에서 먹는 음식은 그대로 별미다. 다 맛있다.
슬슬 동호만을 지나 남망산 시비 공원에서 김춘수의 꽃과, 유치환의 깃발, 김상옥의 봉선화를 만나고, 알록달록 골목길 고운 동피랑도 보고, 이래저래 즐겁다.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던 김춘수(1922∼2004)시인을 만나러 간다. 유치환 시인의 결혼 때 화동(花童)을 했다던 김춘수는 통영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47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한 이후 82세로 타계할 때까지 '무의미의 시'라는 새로운 시론을 비롯해 20권이 넘는 시집을 출간했다고 김춘수 유품전시관에 쓰여 있다. 무의미란 어떤 건지, 뭐든 의미를 부여하면 어렵게만 느껴진다. 존재의 본질을 주제로 한 ‘꽃’이란 시도 그냥 읽으면 편한데, 알려고 하면 더욱 그렇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미륵도 언덕에 묻힌 박경리 소설가를 만난다. 묘비명 하나 없는 선생님의 묘소, 생전의 모습이 이러하셨겠지. 고인을 추모하는 박경리공원 바로 아래 박경리 동상과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 2008년 5월 5일 홀연히 영면하신 소설가 박경리. 이 땅의 사람들을 품어 키워주고 살리는 생명의 근본을 서술한 그의 대표작 '토지'의 친필원고와 지은 책들. 쪽진 머리, 수수한 한복차림의 젊은 시절 사진과 어록, 손수 만든 누비저고리, 생전의 모습들이 전시실에서 고스란히 남아있다. 참 위대한 작가시다.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불과 인구 14만의 소도시인 통영에 한국 문단의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유치환, 김춘수, 박경리, 세 분의 문학관과 전혁림 미술관, 윤이상 기념관, 윤이상 국제 음악당 등 많은 문화 시설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가지 말라고 봄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할 수 없이 서호시장 뒷골목에 앉아 팔딱거리는 생선에 눈 맞춤하며 주홍빛 앞바다에 얼굴 드민다.
(끝)
작품 3.
섬은 아득히 구름 저편에 있고
임 인택
밀려든 작은 파도가 스르르 모래톱에 스며들 듯 봄이 찾아오다가도, 그러다 한 번은 이렇게 꽃샘추위로 몸살을 앓아야 봄이 봄다워지나 보다. 아직은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지난 가을 남해 미조항에서 설리 가던 언덕길에 마주한 그 아름답고 장엄한 낙조의 허무와, 앵강만을 커다란 여백으로 둔 노도(櫓島)의 애잔함이 눈앞에 아른거려 이른 발걸음을 하게 한다.
일점선도남해(一點仙島南海). 한 점의 신선이 사는 섬이라고 지금은 아름다운 관광지로 각광받는 남해를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지만, 옛날 도성 천리 밖에 있는 외딴섬 남해는 유배지로 유명했다. 조선 초기 서예가인 자암 김구, 서포 김만중, 남구만, 조선 후기 문신 류의양 등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었다. 각자의 사연으로 떠나온 유배의 생활은 절망적이었지만, 고독과 절망적인 삶 속에서 꽃피운 문학의 혼은 불후의 문학작품으로 승화 되어 남해유배문학관을 이루어 놓았다.
얼마나 많은 유배객들의 설음과 원망의 눈물이 모여 이슬다리를 만들었기에 노량(露梁)이라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노량의 물결 거센 바다를 본다. 옛 사람들은 이 바다를 지나 남해로 들어왔다. 남해는 섬이다. 육지와 섬, 섬과 섬을 이어주는 것은 오직 바다 위에 떠다닐 수 있는 작은 배뿐, 하지만 배는 곧 섬을 떠나야 한다. 섬과 같은 인생을 강요당하는 것이 유배(流配) 아니겠는가. 임금님과 함께 학문과 정세를 논하던 지체 높은 분들이 한 순간에 나락에 떨어져 길 따라 산을 넘고 내를 건너 처음 느껴보는 배고픔을 견뎌가며 걷고 또 걸어야 했던, 이곳에 유배 온 이들은 무슨 사연으로 가장 가혹한 형별이라는 절도안치를 당해 먼 남쪽 바다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때도 지금처럼 마치 자유를 노래하듯, 무심한 갈매기만 하늘을 날고 있었으리라,
서포 김만중을 만나려 노도에 간다. 그러나 노도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애틋하다. 옛날 한양에서 천릿길을 걸어와, 하동 노량에서 배를 타고 남해의 선착장에 내려 백리 길을 또 걸어, 앵강만 입구의 벽련 포구에 있는 배를 한 번 더 타야 만날 수 있는 섬 중의 섬이기도 하다. “섬은 아득히 구름 저편에 있고 방장, 봉래산도 가까이 보인다. 일가친척들과 떨어져 혼자 외롭건만 남들은 나를 신선으로 보겠구나.” 노도는 그렇게 외롭게 떠있는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는 작은 섬이다.
옛 자취를 따라 한 걸음씩 내딛다보면 서글픈 풍경에 마음 한편이 아련해진다. 푸른 바다 건너편에 남해 금산의 절경이 펼쳐져 있어 아름다우면서도 고독한 천혜의 유배지이다. 후세에 복원한 소박한 초가집과 그가 손수 팠다는 낡은 우물 터, 돌아간 후 몸을 잠시 뉘었던 묘 터가 남아있어 서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서포의 아버지 김익겸은 강화도 사수를 맡아 항전했지만 끝내 지키지 못하고 강화유도대장 김상용과 함께 남문에서 화약을 터트려 자분(自焚)하고 만다. 윤씨 부인은 전란을 피해 배를 타고 가던 중, 애를 낳으니 그가 바로 서포 김만중이다. 전란 중에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어머니 윤씨 부인의 엄격한 교육으로 14세 때 과거에 급제하고, 그 뒤 대제학 의금부 판서 등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으나 당파싸움으로 인한 혼란한 정세로 유배(流配)와 방면(放免)을 되풀이 하다가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머나먼 남해의 절도(絶島)인 노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
전해진 얘기로는, 어느 늦은 봄날 유배지를 찾아온 어머니와 아내의 피맺힌 만남을 통해 한글소설 구운몽이 탄생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식이 보고 싶어 한양에서 남해까지 왔건만 자식의 적소까지는 다가설 수 없어서 애를 태웠다. 벽련 포구에서 노도까지는 불과 1Km. 먼빛으로 서로 마주보며 손짓 발짓으로 말했으리라. 서포는 울음을 참으면서 소리 질러 집안 안부를 물었을 거고, 어머니는 바람에 실려 부디 몸조심하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겠지. 그날 이후 서포는 소설 쓰기에 매달렸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다. 소설은 완성 되었지만 보낼 길이 막연했다. 그렇게 다녀가신 그해 가을에 어머니는 눈을 감으셨다. 소식을 갖고 온 조카에게 완성된 구운몽을 들려 보내면서 장례에도 못가는 불효자식을 대신해 구운몽을 어머니 영전에 올려달라며 차마 목이 메어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 쓴 소설이지만 정작 그 소설을 읽어보지도 못한 채 눈을 감은 어머니를 부르며 바다건너 북녘 먼 하늘만 쳐다보며 피눈물을 삼켰다.
꿈속에서 여덟 명의 선녀와 함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그것은 결국 한갓 헛된 꿈이었음을 말해주는 ‘구운몽’처럼 그 앞에 놓인 생은 부질없었다. 그의 앞길을 밝혀주는 어머니라는 등불이 꺼지자 자신의 삶은 더욱 작고 초라해졌다. 푸른 하늘가에 홀로 앉았다 앵강만 푸른 바닷물에 홀로 잠기며, 겨울 내내 서포는 그렇게 앓으며 파도소리에 묻힌 채 유배지 불 꺼진 방에서 홀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무슨 숙명이던가? 바다 위에서 태어나 섬에서 생을 마감하다니. 노도에 유배온 지 4년만인 1692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우리말과 글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인 한문으로 글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 말을 흉내 내는 것과 같다면서 국문가사 예찬론을 폈던 서포 김만중의 목소리가 이 봄 노도를 씻어가는 파도소리로 다가온다. 초옥 주변은 동백꽃이 한창이다. 송이채 뚝뚝 떨어진 꽃들이 마당에 수북하다. 햇빛에 반짝이는 푸른 잎 사이로 동백꽃은 저리도 붉은데, 300년이 지난 지금도 초옥 툇마루에 앉노라면 쓸쓸한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와 몸을 욱신거리게 한다. 혹 서포도 마당에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들고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사친시(思親詩)로 남긴 건 아닌지.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립다는 말 쓰려하니/ 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 먼저 가리우네/
몇 번이나 붓 적셨다가 도로 던져 버렸나/ 문집에 남해에서 쓴 시는 응당 빼야겠네“
남해 큰 섬 벽련나루에서 배로 10분도 안된 거리. 남해바다 앵강만 고즈넉한 호수에 폭 잠긴, 잘 그려진 수묵화 한 폭이 문득문득 내 발목을 잡아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한다. 노도는 여전히 쉽게 닿기 어려운 막막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섬으로 푸른 바닷물 속에 잠겨 다시 나를 부를 것이다. (끝)
임인택
1944년 7월 31일생.
월간 ‘문학21’, 개간 ‘문학춘추’ 수필 등단(2002년)
한국문인협회, 광주, 전남 문인협회, 광고 문학회 회원
광주문학상, 보성문학상, 경북일보 문학대전, 대구일보 수필대전 등 수상
전남수필회장 역임
현/ 문학춘추작가회장, 광주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장, 전남문인협회 이사
수필집 ‘삶의 여백’, ‘마음에 꽃등 하나 달고’, ‘때론 바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