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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澗松) 조임도(趙壬道)선생과 합강정(合江亭)
징사(徵士) 간송(澗松) 조임도(趙壬道)선생
○ 용산마을의 생가
생가 주소 : 경남 창녕군 남지읍 용산본동길37-4
남지읍 용산리에는 징사(徵士) 간송(澗松) 조임도(趙壬道)선생이 400여 년 전에 생활하시던 생가가 있으며, 낙동강 건너 마주 보이는 용화산 자락에는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저술 활동을 하시던 합강정 그리고 합강정의 용화산 너머 동박골에는 선생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아호제 소개를 올린다.
그림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남지 체육공원의 대형주차장에서 낙동강 종주 자전거 길로 푸른 강물을 따라 억새전망대를 향하여 2.5km 정도 가면 용산마을의 간송선생의 옛집(생가)과 사우(祠宇 사당)를 만나게 된다.
선생은 본관은 함안, 자는 치원(致遠), 후에 덕남(德男)으로 바꾸었다. 호는 간송(澗松)으로 남명조식(南冥曺植)선생이 서거한 33년 후인 선조 18년(1585. 7. 17. 乙酉)에 함안 검암(儉巖 지금의 가야읍 검암리)에서 사도사 첨정(司?寺 僉正) 입암(立巖) 식(埴)의 아들로 출생하여 선조. 광해. 인조. 효종. 현종까지 5왕조를 거치면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탐구와 저술활동을 하신 당시대의 큰 학자로, 반구정(伴鷗亭) 주인인 두암(斗巖) 조방(趙垹)은 선생의 계부(季父 아버지의 막내 아우) 이시다.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 사당). 현재는 위패를 동박골 아호제 옆 사당에 옮겨서 모시고 있다.
선생은 함안조씨 간송파 파조(派祖)로 창녕의 입향조(入鄕祖)이시다.
간송 선생은 함안조씨 시조 정(鼎) 후 12대손 어계(漁溪) 조여(趙旅. 생육신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의 6세손(시조 후 17대)으로, 남명의 제자인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는 선생의 삼종형(三從兄)이다.
선생은 8세에 임진왜란을 맞아 부친을 따라 2년간 합천으로 피난 하셨고, 14세(선조30년) 정유재란으로 부친이 문헌지향(文獻之鄕)을 찾아 선생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경북 청송. 영주를 거쳐 봉화로 피난하여 반천 김중천(퇴계의 문인인 趙月川에게 수학)에게 수학하였으며, 16세에는 두곡 고응섭(杜谷 高應涉)에게 대학(大學)을 수하셨다. 17세에 부친이 칠곡 인동(仁同에 우거(寓居)하게 되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 하여 20세에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몇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뜻을 펴지 못하시고, 32세에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셨다.
선생은 퇴계문인들에게 수학하였으나 혼례는 23세에 이흘(李屹 남명의 제자인 래암 정인홍의 문인)의 따님과 혼례하여 당대의 영남의 두 학파인 강우파( 江右派 南冥 曺植)와 강좌파(江左派 退溪 李滉)의 양 학파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더우기 영남의 대표적인 사림(士林)으로 꼽히는 스승인 여헌(旅軒)의 학문은 지행병진(知行幷進)을 강조하는 데 특징이 있어, 학문의 길은 앎과 행함에 있다고 강조하였다는데 이는 구상지리(口上之理) 이저지학(耳底之學)이 아닌 남명의 실천궁행(實踐躬行) 즉 실천학문(實踐學文)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 났을 때 의병장들이 대부분 이러한 학문적 바탕위에서 의기한 것이다. 오늘날 후학들은 선생을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융화를 위하여 평생을 노력한 대표적 학자로 평가하고 있다. 조선 인조 12년에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인조25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현종1년에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현종 5년 향년 80세로 용산 자택에서 고종(考終) 하셨다. 이어서 현종7년에 통선랑 사헌부지평(通善郞 司憲府持平)으로 추증되었다.
후손의 살림집
광해 즉위(24세) 년에는 정인홍이 오랫동안 권세를 잡고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는데 대하여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진계(陳戒)의 소를 올려 정인홍의 미움을 받게 된다.(광해2년에 5현의 문묘 종사가 성사 됨) 계속되는 과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32세에 참된 학문을 하고자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고 독서에만 전염하셨다.
34세(1618. 광해10년. 무오)에 폐모론(廢母論 대왕대비인 인목왕후를 폐하자는 논의)이 일어나 조정의 6품 이상의 관원들의 수의(收議)가 있었는데, 선생은 “신자(臣子)로서 대비를 폐출(廢黜)해서는 않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로 인하여 정인홍(남명조식의 수제자. 강우파)을 비롯한 대북파의 미움을 받게 되자 이들의 세력을 피하기 위하여 가을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함안에서 내내로 피신하여 상봉정(翔鳳亭)을 짓고 살면서 몸소 고기를 낚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부모님 공양과 모심에 효성을 다하여 백효(伯孝)로 칭송 받으셨다.
선생은 용화산 동편 끝에 살면서 용화산 서편 끝 동박골에 부친의 묘소를 모셔 놓고 바라 볼 수가 없어 안타까워 애를 태우다 49세 되던 1633(인조11년. 계유)년 봄에 홀 어머님을 모시고 함안군 칠서면 내내 마을 상봉정(翔鳳亭)에서, 부친의 묘소를 바라 볼 수 있는 창녕군 남지읍 기강(용산리)으로 이사를 와서 망모암(望慕庵)을 지어 거주하며 가을에 낙동강 건너 용화산 아호(鵝湖)에 합강정사를 지었다고 간송집에 전하고 있다. 기강(岐江)은 남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으로, 용산마을은 퇴계학파인 강좌(江左) 지역이고, 합강정은 남명학파인 강우(江右)지역으로 기강은 두 지역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축산군지 589-591페이지에 실려 있는 간송의 앙모암기와 해석문(확대/그림 클릭)
*주) 선생의 망모암(望慕庵)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昌寧文化院 刊의 昌寧鄕土史料 第九輯 昌寧縣誌. 鷲山郡誌(영산의 별호) 合本 589-591페이지를 사본하여 첨부함.
이후 선생이 생활하던 용산리 생가에는 4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후손이 대를 이어 거주하고 있었다. 선생의 생가는 6.25 한국전쟁으로 모두 불탔으나 사우(祠宇 사당)만 건재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사택(舍宅)은 복원하였으나 근래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근년에 위패를 아호제 사당을 옮겨 불천위 제사를 봉행하고 있으며, 후손들이 함안조씨 간송파 파조로 모시고 있다. 간송파 종중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불천위 제사를 모실 때는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기음강 강가로 선생을 모시러 나가면 선생이 타고 오는 말발굽소리가 강가 백사장에서 들린다고 한다.
현재 용산리 생가의 망모암(望慕庵)은 빈 터만 남아 잡초만 무성하고, 서당형의 아래채는 선생께서 쓰시게 편리하게 외측은마루를 크게 만들어 많은 사람이 함께 할 수 있게 하였고 안측은 여러 개 방으로 꾸민 것이 많은 선비들이 유숙하였음을 유추 할 수 있는 예사롭지 않은 구조임을 느낄 수 있다. 400년 세월을 이어온 선생의 자취들이 사라지는 느낌에 안타깝기 그지없으며 지금이라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함이 시급하다.
사우 담장의 기와 위에 와송(瓦松)이 무심한 세월을 말하고 있다.
자미화(紫微花 백일홍나무.배롱나무)
살림집 뒤에 선생이 심어 사랑한 자미화(紫微花 백일홍나무.배롱나무)는 400년 풍상에 고목(古木) 등걸의 주간(主幹)은 간곳없이 가녀린 자손들만 옹기종기 달고 앉아 잎만 무성한 가운데 붉은 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있어서 축산군지(鷲山郡誌 축산은 영산의 별호) 625페이지 이사편(異事編)의 기록이 진실됨을 느끼게 한다.
趙澗松先生祠宇內 有紫微花一樹 本先生手植而 屢世經驗則 其宗家運否則 其木死幾年間元無
조간송선생사우내 유자미화일수 본선생수식이 누세경험칙 기종가운불칙 기목사기년간원무
枝葉 幾年後其家運福則 或一邊生芽惑中心出芽依舊簇立云云而
지엽 기년후기가운복칙 혹일변생아혹중심출아의구족립운운이
해) 조간송 선생님의 사우 안에 자미화 한 나무 있으니 이는 선생께서 심으신 것이다. 여러 대를 거쳐 경험한 바, 그 종가의 운이 쇠하면 그 나무가 말라죽어 몇 해고 가지와 잎이 없어지고, 또 몇 년 후에 그 집안 운이 돌아온즉 그 한쪽에 싹이 트고 혹은 중심에서 눈이 나와 옛날처럼 무성하게 자라나더라고 한다.
간송집 권2 시(詩)편 '龍山一樹紫微花'
간송집 권2 시(詩) 편에 ‘龍山一樹紫微花 花外茅?是我家 只爲松楸長入望 非無勝地寄生涯
(용산일수자미화 화외모첨시아가 지위송추장입망 비무승지기생애)’
'용산에 자미화(백일홍. 배롱나무) 한 그루와 자미화 밖에 초가집이 내 집이다.
장차 소나무와 오동나무가 크게 자라는 것을 보고자 좋은 땅이 없지 않으나 여기서 살아간다.'
라고 선생은 노래하였다.
*징사(徵士)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나라(임금)에서 벼슬을 내려도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을 칭하는데, 많은 징사 중에 관직에 나아간 사람도 있다.
*처사(處士)는 학식과 덕행이 뛰어나도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를 칭한다.
*불천위(不遷位)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인 말로서 '부조위'라고도 한다. 4대 선조까지 제사를 모시고 5대가 되면 위패를 사당에서 옮겨 묘소에 묻고 기일날 지내는 기제사는 모시지 않고 묘사 때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제사법이나, 우리 모두가 존경해야할 인물에 대하여서는 자손이 있는 한 신위를 옮겨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시면서 영세불가망(永世不可忘)의 조상으로서 수 백 년이 지나도록 제향(祭享) 한다.
나라에서 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 유림에서 정한 '향불천위(鄕不遷位 = 유림불천위)' 문중에서 정한 '사불천위(私不遷位 = 문중불천위)'로 크게 구분 한다.
선생의 생가와 사우를 출발하여, 합강정으로 향한다.
○ 합강정(合江亭)
남지철교를 건너 철교산을 거쳐 도홍마을에 도착하면 용화산을 종주하는 산악자전거(MTB) 도로가 개통되어 내려다보는 전경이 천하 절경이다. 푸른 숲에 덮여 있는 용화산과 발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억겁의 낙동강과 대안의 더 넓은 낙동강 둔치 체육공원과 유채꽃밭 그리고 남지 시가지가 풍요로운 시골의 면모를 볼 수 있게 한다. 4대강사업으로 강변의 넓은 은빛 백사장은 사라지고 없다. 모래 위의 서걱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물너울 모래톱도 동심 한 편에 묻어두고 좋은 곳만 바라본다. 반구정에서 댓질고개를 내리받이 길로 800미터 내려오면 빼어난 풍광의 합강정(合江亭)이다. 남지체육공원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합강정까지 거리는 대략 5.0km 왕복 10km 내외다. 합강정에서 동박골 아호제를 거쳐 칠서 공단 4거리를 거쳐서 오는 길은 약 15.0km로 많이 둘러서 오는 길이다. 또한 용화산 정상과 반구정을 둘러서 오면 시간은 더욱 길어지게 된다. 이 점 참고하여 첨부된 지도를 참고하여 일정을 계획하는 것이 좋다.
반구정 내리받이 길에서 본 합강정(合江亭)의 만추
징사(徵士) 간송(澗松) 조임도(趙壬道)선생은, 8세 때 임진왜란을 당해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나 합천·경북 청송·영주·봉화·의성 등지로 옮겨 살았다. 이때 선생은 퇴계 학맥을 이은 여러 선비들로부터 공부를 배웠으며, 19세 때 비로소 고향인 검암에 돌아와 곤지재(困知齋)를 짓고 시냇가에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서 ‘간송(澗松)’이라고 스스로 호를 붙였다. 그리고 시한 수를 지어 좌우명으로 삼고자 했다.
‘爲愛澗邊松 天寒不改容(위애간변송 천한불개용)’
‘시냇가의 소나무를 사랑하니 날씨가 추워도 그 모습 변치 않기 때문이라네’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아 올곧은 선비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정면에서 본 합강정 /입구의 낙원문, 안쪽에 합강정 편액이 보인다.
徵士間松趙先生遺墟碑(징사간송조선생유허비) 앞.뒷면 / 華耕趙再奎事蹟記念碑(화경조재규사적기념비) 앞 .뒷면
정사에 도착하면 정사로 오르는 계단 옆에 “징사간송조선생유허비(徵士澗松趙先生遺許碑)”와 화경조재규사적기념비(華耕趙再奎事蹟記念碑)가 나란히 서있고, 합강정사를 지키고 있는 선생이 심은 400년 수령의 은행나무(나무 둘레 4.6m,높이 약35m,가지 폭 약25m)가 천수(天壽)의 위풍으로 선생의 학업을 엿보게 한다.
화경조재규사적기념비(華耕趙再奎事蹟記念碑)에서" 낙문건립 봉정이축 치석원장(洛門建立 鳳亭移築 治石垣墻)"이라 했으니 낙원문은 이때 세우고 담장도 만들고 내내에 있던 상봉정터에는 "상봉정 유허비"를 세우고 합강정을 중수하는 등 제반 비용을 趙再奎가 많이 부담 한 것으로 추정된다.
돌계단을 밟고 낙원문(洛源門)을 들어서 처마 밑의 합강정 편액과 대청마루 안쪽벽면에 합강정사 편액이 있다 . 나그네가 지나쳐 가기만 할 뿐 사람이 거주하지 않으니 정비와 정돈은 잘 되어 있으나 휑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다.
합강정사는 간송(間松) 조임도(趙任道)선생이 은거하며 수학하던 곳으로, 49세(인조 11년. 1633 계유) 봄에 내내(奈內)에서 기강(岐江 : 지금의 용산리)으로 옮겨와 살 때, 용산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강 건너 용화산 기슭 함안군 장암리 장포 산60-1의 현 위치에 왼쪽에 사월루(沙月樓) 오른쪽에 연어대(鳶漁臺) 등 소정삼간(小亭三間)을 지어 합강정사(合江精舍)라 현판하고 은거(隱居)하였다고 암모암기(望慕巖記)에 전한다.
정사(精舍)는 정면 3칸 측변 2칸의 목조와가건물(木造瓦家建物)이며 이곳에 간송문집 및 금라전신록책판이 소장되어있었다. 그 후 합강정은 1924년과 1937년에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은 소나무를 노래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려 스스로 담근질한 것을 '재송간변(栽松澗邊)' 에서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간송(間松) 조임도(趙任道)선생은 평소 존모(尊慕)하기를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동계 정온(桐溪 鄭蘊), 외재 이후경(畏齋 李厚慶), 모계 문위(茅谿 文緯), 수암 유진(修巖 柳袗), 미수 허목(眉 許穆) 등제공(諸公)이었는데 서로 도의풍절(道義風節)이 같았다.
하루는 나라님(임금님.암행어서.관료)께서 간송의 높은 명성을 듣고 망모암을 찾아왔다. 그런데 간송은 짚신을 삼으며 집에 들어오는 손님을 바라보지도 않고 관료임을 알았으나 짐짓, "선 빚 얻고 후 빚 갚다니!" 하면서 맞았다.
나라님이 하도 기가 막혀, "낙동강 구구봉(용화산)을 줄까? 낙동강 칠백 리를 줄까?" 물었다. 간송은 구구봉을 달라고 하여 용화산을 하사 받았다. 그래서 용화산 구구봉이 함안 조씨의 소유가 되었다고 전한다.
내내에 상봉정을 지어 함안 검암리에서 이사 왔는데 합강정으로 옮겨지었다고 "상봉정 중건기"에 전한다.
상봉정 주련에서 빼어난 경관과 함께 절제와 배려에 대한 선생의 큰 뜻이 상봉(翔鳳) 이라는 정자의 이름처럼 각인된다.
翔鳳亭 상봉정
상봉정 주련 해
상봉정중건기(翔鳳亭重建記)
상봉정중건기(翔鳳亭重建記) 해(解)
원래 징사 간송당 조선생의 상봉정은 토구(??)에 있었다.
선생은 일찍 경북 안동 봉화에서 반천 김공문하에서 수업하고 나아가 문강공 여헌 장선생에게 학문을 닦고 덕을 쌓아, 당시에 북인이 방자하게 권세를 부려도 선생은 의연하게 대처하여 그들을 피하여 강호에 은거하여 학습하는 즐거움을 삶의 낙으로 뜻을 세우시고 나라에서 세 번이나 불러도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섬기기에는 늙도록 인효(仁孝)로 정성을 다 하고, 양묘지상(兩廟之喪 仁祖와 孝宗 喪)에 졸곡을 이루도록 육류와 생선을 먹지 않고 또 소동시무14조(疏陳時務十四條)에 전하는 말을 바르게 듣고 깨우쳐서 선생이 마음을 세운바 스스로 생각을 기다리어 이미 그 도학 문장과 지조행의가 바르고 두텁고 고결하여 당시에 남쪽에 우뚝 선 큰 학자로서 화합과 존경과 믿음이 백세의 후손까지 이어지는 유풍(遺風)이 되었다. 강(洛東江)과 달 사이 용화산의 늙은 소나무와 바위는 푸르게 덮이어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의연하게 낙동강에 비치는 큰 기상이 어찌 선생과 다름이 있으리오.
이 정자는 옛날 칠원 내내에 있었다. 오랜 세월에 초목이 무성하여 황폐되어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한탄하여 지난 경신년 봄에 관의 도움으로 합강정을 중수할 때, 그 남은 땅에 선생의 장구가 있던 그 옛터를 잊어버리지 않고 상봉정을 건립하였다. 이 정자에 올라 선생의 상봉을 읊고 외우니 상쾌한 기운이 아침 햇살과 같이 완연하여 모두 감흥에 겨워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였다. 이 정사의 사역은 후손인 재규가 여러 사람의 성금으로 거액을 이루어 건축하였는데 이는 선생을 위하는 정성이 없으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지금 정자를 완공하여 후손 용찬이 문중 어른들의 명을 받아 나에게 중원 기문을 청하니 전말을 돌아보고 불문한 내가 어찌 가당하리오. 연절(然?)로서 이름을 세겨 민간에 영광을 이룸에 무례하게 삼가 이 글을 써서 이 정자에 연고실상을 고경을 머물게 하노라
갑자년(1924년) 춘분절에 진성이씨 동은 삼가 쓰다.(甲子春分節 眞城李東恩謹 記)
*주)토구(菟裘) : 본래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지명인데, 은거지(隱居地)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노나라 은공(隱公)이 “내가 장차 토구 땅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늙으리라.”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春秋左⽒傳 「隱公」 11年)
*상봉정(翔鳳亭)은 함안군 칠서면 내내(奈內)의 현 능가사 남서편 50여m 거리 산자락에 유허비(遺墟碑)가 있었다.
간송(間松) 조임도(趙任道)선생의 문집의 강제12영
합강정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강제십이영(江濟十二詠) 시판(詩板)
강재 12영〔江齋十二詠〕
망모암(望慕庵)
바라보고 그리워한들 무슨 수로 볼 수 있을까 / 望慕何由見 망모하유견
소나무 숲에 묵은 풀도 우거졌는데 / 松間宿草荒 송간숙초황
부질없이 풍수지탄을 품고 / 空懷風樹恨 공회풍수한
비장하게 료아장을 읊어보네 / 莊誦蓼莪章 장송료아장
연어대(鳶魚臺)
천 길 물속에서 고기가 뛰고 / 魚躍千尋水 어약천심수
만 길 하늘에 솔개가 나네 / 鳶飛萬仞天 연비만인천
천기는 저절로 움직일 수 있으니 / 天機能自動 천기능자동
지극한 이치는 여기서 밝게 드러난다네 / 至理此昭然 지리차소연
석천와(石泉窩)
돌구멍에 신령스런 샘이 솟으니 / 石竇靈泉逬 석두령천병
깊고 맑아 거울 같은 웅덩이가 되었네 / 泓澄一鑑窪 홍징일감와
스님이 와서 초가를 짓더니 / 僧來結茅舍 승래결모사
양치질 하고 산수간에 누웠네 / 漱玉臥煙霞 수옥와연하
사월루(沙月樓)
휘영청 달빛이 대낮처럼 밝으니 / 皓月明如晝 호월명여주
넓은 모래밭이 은보다 더 하얗네 / 平沙白勝銀 평사백승은
정신이 맑아 잠이 오지 않는데 / 神淸無夢寐 신청무몽매
눈앞엔 가는 티끌 한 점도 없네 / 眼界絶纖塵 안계절섬진
와운헌(臥雲軒)
밤이면 처마 끝에 머무는 것이 좋고 / 夜愛簷端宿 야애첨단숙
아침이면 언덕 위를 나는 것이 예쁘지 / 朝憐隴上飛 조련롱상비
이불과 베개가 차가워 꿈을 깨니 / 夢驚衾枕泠 몽경금침령
창문과 벽이 안개로 가득 찼네 / 窓壁滿霏微 창벽만비미
농월담(弄月潭)
장마 지나고 연못이 맑아진 뒤 / 潦盡潭澄後 료진담징후
하늘 위에 달이 뜬 때 / 天空月上時 천공월상시
조각배가 물에 비친 그림자에 올라타 있으니 / 片舟凌倒影 편주릉도영
이 즐거움이야 말로 누가 알리오 / 此樂也誰知 차락야수지
병풍바위〔石屛〕
벽려가 바위를 뒤덮었는데 / 薜荔縈巖石 벽려영암석
높고 낮게 끊어졌다 또 이어지네 / 高低斷復連 고저단복련
푸른 병풍이 살아 있는 그림을 펼쳐내니 / 蒼屛開活畫 창병개활화
그림자가 물속 하늘에 거꾸로 비치네 / 影倒水中天 영도수중천
노암(鱸巖)
장한이 지녔던 삼오의 흥취 / 張翰三吳興 장한삼오흥
엄광이 즐겼던 칠리탄의 바람 / 嚴陵七里風 엄릉칠리풍
낚싯대 하나로 세상사를 잊었으니 / 一竿忘世事 일간망세사
누가 이 한가한 늙은이와 비슷할까 / 誰似此閒翁 수사차한옹
소나무 비파〔松琴〕
솔바람 소리 바람 따라 흩어지니 / 松籟隨風散 송뢰수풍산
시원한 태고의 소리로다 / 泠然太古音 령연태고음
듣기만 해도 가슴속이 시원해지는데 / 聽來襟韻爽 청래금운상
칠현금이 무슨 소용 있으랴 / 何用七絃琴 하용칠현금
장사배〔商帆〕
돛단배 황급히 어디서 오는가 / 帆急來何所 범급래하소
동남쪽 장사꾼의 배로다 / 東南賈客船 동남고객선
저녁노을 가을 포구 너머로 비치는데 / 殘霞秋浦外 잔하추포외
가랑비는 저무는 강변에 내리네 / 細雨暮江邊 세우모강변
먼 하늘 기러기〔雲鴻〕
아득히 구름 노니는 하늘 끝 / 萬里雲霄外 만리운소외
가물가물 보이는 한 마리 기러기여 / 冥冥一箇鴻 명명일개홍
배가 부르지 않다고 근심하지 말고 / 莫愁腸未飽 막수장미포
더욱 힘차게 날아 센 활을 피하라 / 增擊避彊弓 증격피강궁
물결 속 갈매기〔波鷗〕
드넓고 푸른 물결 위 / 浩蕩滄波上 호탕창파상
짝지어 노니는 하얀 갈매기 / 雙飛雪點鷗 쌍비설점구
내 머리도 너와 같이 희니 / 吾頭同爾白 오두동이백
이 빈 배 곁으로 오려무나 / 來傍此虛舟 내방차허주
*望慕庵(망모암) : 간송이 아버지 산소를 바라보기 위하여 지은 암자.
*요아장(蓼莪章) :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슬픔을 노래한 시이다. 《시경》12장 蓼莪章 첫머리에 나온다. 〈요아(蓼莪)〉에 “길고 큰 아름다운 쑥이라 여겼더니, 아름다운 쑥이 아니라 제비쑥이로다. 슬프고 슬프다, 부모님 나를 낳으시느라 몹시 수고롭고 병드셨도다.〔蓼蓼者莪, 匪莪伊蒿. 哀哀父母, 生我勞瘁 요요자아 비아이호 애애부모 생아구로 〕”라는 구절이 있다.
*蓼 여뀌 료(요) : ‘신고(辛苦 어려운 일을 당하여 몹시 애씀. 또는 그 고생. • 온갖 ∼를 겪다.)함’의 비유
*벽려(薜荔) : 향기 나는 나무 덩굴 이름이다.
*장한(張翰)이 …… 흥취 : 삼오는 장강(長江) 하류 지역으로, 장한의 고향이다. 장한은 가을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말하기를, “인생살이에 있어서는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한 법인데, 어찌 벼슬에 얽매여서 수천 리 밖을 떠돌면서 명예와 관작을 노리겠는가. 人生貴得適意爾(인생귀득적의이) 何能羈宦數千里以要名爵(하능기환수천리이요명작)” 하고는, 드디어 수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
*엄광(嚴光)이 …… 바람 : 후한(後漢)의 엄광은 광무제(光武帝)와 함께 유학했던 친구였다. 광무제가 제업을 달성하고 그를 맞이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삼고자 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동려현(桐廬縣)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으나, 그의 청아한 절개는 당시의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았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김익재 양기석 구경아 정현섭 (공역) ┃ 2015
정사의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편액이 지난 세월의 무심함을 말하듯이 편액만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정사의 절경을 소재(小題)로 쓴 『강제십이영(江濟十二詠)』 시판(詩板)이 지난 세월의 풍상을 몸으로 말하고 있다.
망모암은 기음강 용산마을 생가에 있었는데, 6.25 한국전쟁 당시에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현판만 이 곳에 보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은행나무 아래 강변에는 넓은 너럭바위와 암반의 절벽면과 그 아래 곳곳의 넓은 백사장과 푸른 강물의 조화로운 어울림이 인심 좋은 시골 아낙네 같아 덤치기 낚시로, 달이 뜨면 강물에 달기둥을 이루는 월주(月柱)가 내리는 풍광은 절경의 극치를 이루게 하였다고 한다.
간송(間松) 조임도(趙任道)선생은 50세에 공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때 남명이 강학하던 김해 산해정(山海亭)이 있던 신어산(神漁山)기슭의 신산서원(新山書院 1578년 건립. 1609년 사액)에 남명학의 후학에서 원장을 맡을 만한 사람이 없어 오랫동안 공석으로 있던 것을 유림의 여러 선비들의 추대로 간송선생이 원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퇴계학을 공부한 선생이 원장을 맡았다는 것은 당시의 강우지방(江右地方)에서 선생의 명망이 대단히 높음을 알 수 있다.
합강정사에는 영조20년(1744)에 간행한 간송문집책판(澗松文集冊版)과 순조13년(1813년)에 간행된 함안의 역사와 고려말 충신 이방실 장군과 함안군 출신자들의 업적을 기록한 금라전언록책판(金羅傳言錄冊版)이 소장되어있었으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었으며, 이러한 책판들은 합강정에 보관되어 오다 도난 등 보관관리에 문제가 발생하여 아오제 옆에 별도의 보관서고를 만들어 보관하였으나 이 또한 도난과 온습에 의한 과학적 관리가 어려워 현재는 함안박물관에 보관 관리되고 있다.
간송문집 책판과 금라전언록 책판 안내판(상) 금라전언록 책판(중) 간송문집 책판(하)
선생은 80세(1664. 현종5년)로 용산리 생가에서 고종(考終)하셨다.
저서는 이광정이 서문을 쓴 간송집(澗松集), 금라전언록과 풍수음(風樹吟), 유모가(孺慕歌)가 있으며, 기문으로는 ‘망모암기(望慕巖記)’와 곽재우 망우정사(忘憂亭舍)의 ‘여현정기(與賢亭記)’가 있다.
1666년 사림의 건의로 조정에서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추증하였으며, 함안군 안인리에 송정서원(松亭書院)을 건립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享祀)하고 있다.
말무덤산과 개비리길 그리고 억새전망대
남강이 낙동강과 합류되는 곳. 기강(岐江 걸음강)
정사를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목이 또한 절경이다.
남강이 낙동강 품으로 합수되어 들어오는 기강(岐江 걸음강) 장포나루. 장포나루는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으로 대산면 장암과 의령 지정면의 성산과 창녕 남지읍의 용산 마을의 창나루 3곳을 연결해 주는 나루였다. 사공은 의령의 성산에 상주하여 주막(酒幕)을 열고 남지장을 왕래하는 주민들을 건네주는 중요한 교통과 소통의 길이었다. 필자도 1970년대 말까지 오트바이를 나룻배에 싣고 성산으로 왕래하기도 하였던 나루로 지역주민들의 애달픈 과거의 애환이 서려 있던 나루터였는데, 지금은 교량 가설을 추진하는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더욱이 창녕. 밀양. 의령. 함안이 국회의원 선거구로 통합된 만큼, 어느 날 갑자기 광안대교 같은 새로운 명소를 이곳에서 바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임진왜란의 천강홍의장군의 말발굽소리와 함성이 말무덤산 개비리길 단풍 따라 들린다.
합강정을 거쳐 배수장을 지나 동박골 마을의 아호제(鵝湖齊)로 발걸음을 옮겨 선생의 사당과 묘소를 참배한다.
○ 아호제(鵝湖齊)
아호제는 함안군 대산면 구암4길 194-2번지에 위치하는 함안조씨 재실이다. 함안군에서 합강정에 보관되어 오던 간송문집 책판과 금라전언록 책판을 보관하기 위하여 책판 서고를 지었으나 완벽하게 보관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아 함안 박물관으로 옮겨서 보관하게됨에 따라 비어 있는 서고를 간송선생과 부인의 위패를 모시는 사우로 현재 사용하고 있다. 원래의 용산마을의 사우는 사택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관리에 애로가 많아 여기로 옮겼다고 후손이 귀띰해 주었다.
아호제 전경
아호제
아호제 주련 해
선생의 사우(祠宇 사당)
사우(祠宇 사당)에는 선생과 벽진이씨와 안악이씨 두 부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선생의 선고(先考) 입암공(立巖公) 묘소. 사우에서 100여m도 못도는 거리의 뒷산.
선생과 안악이씨 쌍분 묘역 / 상석(床石). 비석(碑石). 망두석(望頭石). 양석물(羊石物)
선생과 안악이씨 쌍분. 입암공 묘소를 거쳐 뒷산 300여m 거리의 평전(平田)에 모셔져 있다.
선생의 비석
남지로 되돌아가는 길은, 지나온 용화산 산길을 택하여 갈 수도 있으며, 아니면 동박골 마을에서 칠서 공단 네거리를 거쳐서 귀환하는 도로는 모두 평지의 시골 길이라 전답에서 작업하는 농부의 모습과 다양한 농작물의 자라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인상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