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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참되게 하라.
처음도 참되게 하고 중간도 참되게 하고
그 끝도 참되게 하라.
<대품반야경> 중에서
해설
우리에게 ‘처음’이란 말은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어떤 도전적인 의미를 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일을 시작 할때는 항상 열심히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처음 마음먹었던 다짐이 흐지부지되고 유종(有終)의 미를 거두지 못 할 때가 많다.
대승경전의 하나인 <대품반야경>에는 다음과 같은 설법이 있다. ‘초중후선(初中後善)’이란 말은 ‘처음, 중간, 끝에도 항상 변함이 없이 착하게 하라.’는 뜻이다. 물론, 경전에서의 의미는 다르다. 여래의 설법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그 끝에서나 항상 모순이 있어서는 안 되며 또한 설법을 듣는 이도 변함없이 여래의 설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무책임한 사람들을 본다. 생각 없이 남이 듣기 좋은 말만을 던져 놓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식으로 잊어버리는 예가 아주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치가의 공약이다. 이런 사람은 신뢰하기가 매우 힘들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신뢰’다. 그러한 ‘신뢰’를 얻게 하는 것이 ‘말과 행동’이다. 그래서 ‘말과 행동’에는 항상 책임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부처님이 ‘초중후선’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이 일찍이 ‘초중후선’에 대해 재가신도들에게 세심하게 설법을 한 적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일을 시작했으면 끝을 맺어야 하고 중도에서 쉬거나 그만두지 말라. 또한 이익과 손해를 따져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바다에 모든 강물이 모여들듯이 날마다 재물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또한 악한 사람, 비겁한 사람, 권세를 휘두르는 사람에게는 재물을 빌려주지 말라. 그리고 스스로 사치를 하지 말고 남들에게 베풀어 법도를 잃지 않는다면 살아서 행복하고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리라.”
부처님이 강조한 것은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으며, 만약 시작을 하면 일이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설사 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재기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처음부터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항상 말만 먼저 해놓고 이에 대해 실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스스로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
이렇듯이 부처님의 말씀은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이 없다. 원래 종교의 세계는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내면적인 마음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인 마음은 항상 스스로의 가치관에 의해 움직인다.
72. 생로병사를 통한 깨달음에 대하여.
늙음과 병듦, 죽음은
이 세상에 보내진 세 명의 천사이다.
<열반경> 중에서
해설
인간은 모두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는다. 이러한 명제는 그 어떤 눈부신 의학과 과학으로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오히려 이 세 가지가 인간에게 보내진 천사라고 하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왜일까?
만약, 인간이 이러한 과정을 겪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일까? 만일, 인간이 태어나서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면 이 좁은 세상은 인간으로 해서 포화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얼토당토않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일찍이 부처님은 ‘자아’가 무엇인가에 대해 강조하셨다. ‘자아’란 ‘참모습’ 혹은 ‘진정한 나’로 해석할 수 있다. 부처님은 인간이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자아의 참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며, 사실 인간이 나고 병들고 죽는 것은 고통이지만 이보다 더 큰 고통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병들고, 늙고,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부질없는 세상에 애착을 가지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 즉 ‘나’와 ‘나의 것’이 영원히 존재하길 바라는 생각이 인간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그 어떤 확신도 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확신할 수 없다는 것 자체도 하나의 고통임이 틀림없다. 부처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통해서 인간이 깨달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덧없기 때문에 ‘나’와 ‘나의 것’에 대한 모든 집착이 사라져 마음의 고통도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주어진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천사와도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주위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 모습을 많이 보아 왔다. 늙음, 병듦, 죽음은 우리에게 교훈을 던져주는 세사람의 천사인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할까 한다.
생전에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끌려갔다.
“너는 어찌하여 살아서 나쁜 일만을 골라서 하였느냐. 네 곁에 있던 세 사람의 천사가 그렇게 간곡하게 이야기를 했거늘 너는 뉘우치지 않았으니 지옥으로 가거라.”
“염라대왕님, 저는 단 한 번도 세 사람의 천사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아직도 뉘우치지 못했단 말이야. 너는 살면서 주름이 많고 허리가 굽은 늙은 노인을 보지 못했느냐.”
“보았습니다.”
“너는 또한 살면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병들어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느냐.”
“보았습니다.”
“그리고 너의 주위에서 목숨이 끊어져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못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내가 너에게 보낸 세 사람의 천사이니라. 너에게 선행을 쌓을 세 가지의 기회를 주었는데도 이를 못 본채 하지 않았느냐.”
73. 우리의 생활은 욕망에 기초하여 행해진다.
욕망은 애착에서 생겨나며
우리의 생활은 그 욕망에 기초하여 행해진다.
<원각경> 중에서
해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길을 막고 100인의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사람만 생각할 수 있다, 사람만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 사람만 섹스를 쾌락의 도구로 이용한다 등등. 그러나 동물과 사람의 차이를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욕망이다.
인간에겐 대개 다섯 가지의 욕망이 있다. 재물욕, 색욕, 명예욕, 음식욕, 수면욕이 그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고 인생 오욕(五慾)이라고 한다. 이 오욕 때문에 인간은 서로 죽이고 짓밟고 다투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은 동물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이 욕망이라는 것은 인간을 무한하게 발전시키기도 하고, 때론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인간의 욕망에 대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옛날 한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집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 음식을 담을 그릇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직 수행과 명상의 기쁨만으로 홀로 즐겁게 살았다. 도무지 그에게서는 그 어떤 욕망의 그늘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기거하는 동굴로 한 친구가 찾아와 <바가바드기타>라는 힌두교 3대 경전을 그에게 선물했다. 이 책은 인도인들이 두고두고 읽는 정신의 지침서다. 그는 이 책을 아주 귀중하게 다루었다.
그런데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그는 책의 한 귀퉁이가 찢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이에 쥐가 책의 일부분을 갉아먹었던 것이다. 그는 그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구했다. 그런데 고양이가 먹을 우유가 필요해 그는 다시 암소를 구했다. 그리고 암소를 기르기 힘들어 여자를 찾았다. 그런데 그 여자와 함께 동굴에서 사는 것이 힘들어 다시 집을 지었고, 그 여자와 지내다 보니 아기가 생겼다. 그는 아기와 여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마침내 수행자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욕망에 길들여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욕망의 근원이 어디에서부터 생기는가를 잘 보여준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이나 ‘전생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불교의 전생론은 사실 본질적인 불교의 교리가 아니다. 전생이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이 나타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사상이다. 영어로 말하자면 ‘커즈 앤 이펙트(Cause and Effect)’이다.
그럼 인간의 욕망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선(禪)을 닦는 것이 좋다. 선은 자기의 욕망을 육화시키고 자신의 정신을 맑게 하는데 아주 좋다. 옛날 조주(趙州) 선사는 “도(道)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여보게, 이리 와서 차나 한잔 마시게.”라고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끽다거(喫茶去)다. 그렇다. 도란 특별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차를 마시는 것도 도요,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듣는 것도 도다. 차별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 것도 도인 것이다.
사실 선반 위에 진리가 놓여있더라도 그것을 가져와서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고 있지만, 대중들에게 진리를 찾아줄 수 있는 선각자는 별로 없다. 또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행자는 더욱 부족하다. 이것이 바로 수행자가 현생에서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대중을 진리로 이끌고 나아가 올바른 삶의 도를 깨치게 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도도 깨달음도 없는 것이다.
74. 즐겁고 괴로운 마음에 대하여.
즐거움을 받아도 함부로 기뻐하지 말고
괴로움에 부딪혀도 근심을 더하지 말아야 한다.
<잡아함경> 중에서
해설
우리가 일상적으로 쉽게 접하는 법구(法句)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백팔번뇌일 것이다. 그러나 대개 불교 신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이 백팔번뇌의 의미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잘 모른다. 불교에는 육근(六根)이라는 용어가 있다. 안근(眼根), 비근(鼻根), 이근(耳根), 설근(舌根), 신근(身根), 의근(意根)인데 인간의 육체를 여섯 개로 나눈것이다. 즉 눈, 코, 귀, 혀, 몸, 마음이다. 여기에 즐거움, 나쁨, 평등 즉 호악평등(好惡平等)의 3을 곱하면 18번뇌가 생긴다.
그리고 육근의 인식 작용인 육식(六識)에다가 세 수, 즉 낙수(樂受), 고수(苦受), 사수(捨受)의 3을 곱하면 이것 또한 18번뇌가 생긴다. 낙수란 즐거움, 고수란 괴로움, 사수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말한다. 이 둘을 더하면 36가지의 번뇌가 생기는데 여기다가 과거세, 현세, 미래세의 3을 곱하면 108번뇌가 되는 것이다.
결국 108번뇌의 의미는 현세의 번뇌뿐만이 아니라 전생과 현생, 미래 생에서 오는 모든 번뇌를 말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러한 백팔번뇌를 모두 없애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테를 이루는 육근을 모두 참회해야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육근 참회인 것이다. 인간의 번뇌는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이 여섯가지가 만드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는 육근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육근을 맑게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 눈은 찌든 공해로부터 언제나 피로하고, 귀는 욕과 거짓말과 싸움 소리를 듣고 있으며, 코는 나쁜 냄새로 가득하고, 혀는 날마다 거짓말을 양산한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으며 마음은 언제나 나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108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다만 즐거움과 괴로움을 스스로 삭이고 열심히 기도하며 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잡아함>에 나오는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다.
부처님이 고향인 카필라바스투의 니그로다 동산에 계실 때였다. 그 때 마하나마가 찾아와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부처님,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은 따뜻하고 풍족하여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나 미친 사람과 그릇된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과 함께 살다보면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를 잃어버릴까 걱정됩니다. 또 내가 죽은 뒤 악도에 태어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부처님이 비유를 들어 대답했다.
“저기 언덕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고 하자. 그 나무는 평소에 한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만약 저 나무의 밑동을 잘라버리면 그 나무는 어느 쪽으로 넘어질 것 같은가?”
“당연히 기운 쪽으로 넘어집니다.”
부처님이 다시 말하였다.
“마하나마야, 너도 그와 같다. 남이 어떻게 살든지 오직 너만 바르게 산다면 결코 나쁜 곳에 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삼보에 귀의해 몸과 마음을 이미 닦았기 때문이니라. 네가 목숨을 마친 뒤에 비록 몸이 불에 태워지거나 땅에 묻힌다 하더라도 네가 가진 마음은 오랫동안 믿음의 햇빛을 쪼여왔기 때문이다. 또한 계율을 지키고 많은 보시를 행하고 많은 법문을 듣고 지혜의 햇빛을 쪼였으므로 미래에도 반드시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
<잡아함> 중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남은 늘 나쁜 일을 하는데 나 혼자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알아줄까. 부처님은 이런 생각조차 자신을 번뇌로 이끌게 해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언덕 위의 큰 나무가 휘어진 대로 넘어가듯이, 죄는 지은 대로 가고 공은 쌓은 대로 간다.’는 것이다. 사실 마음의 번뇌를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75. 이 세상에서 행복의 힘이 가장 훌륭하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힘 중에서
행복의 힘이 가장 훌륭하다.
<증일아함경> 중에서
해설
하늘은 짓지 않은 복을 내리지 않으며, 사람은 짓지 않은 죄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의 법칙이다. 즉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과 같다. 우리는 은연중에 짓지도 않은 큰 복을 자꾸만 기다린다. 이것을 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한 마디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행복이란 자신이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얻기 힘든 것이 바로 행복이다. 스스로 해탈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부처님조차 이러한 행복을 얻고자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부처님과 눈이 먼 아니룻다에 관한 이야기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하루는 아니룻다가 낡은 옷을 바느질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님인 아니룻다는 아무리 바늘에 실을 꿰려고 해도 도무지 꿸 수가 없었다. 아니룻다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훌륭한 성자 중에서 누군가 나를 위해 이 바늘귀에 실을 꿰어 주신다면 큰 공덕을 쌓을 텐데.”
그러자 누군가가 아니룻다의 귀에 소곤거렸다.
“아니룻다여, 내가 너의 바늘귀에 실을 꿰어줄 테니 나에게 공덕을 쌓게 해다오.”
아니룻다가 들어보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부처님이었다. 아니룻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의아했다. 이미 공덕을 많이 쌓은 부처님께서 다시 공덕을 쌓을 기회를 달라고 하다니 그로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처님, 제가 그냥 중얼거린 것은 이 세상의 구도자들 중에서 나에게 작은 도움을 주어 공덕을 쌓으라고 한 말인데, 부처님께서 어찌 이런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행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 중에서 나보다 더 간절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룻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부처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룻다가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이미 어떤 망설임의 바다를 건너 집착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그 무엇도 바랄 것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무엇 때문에 행복을 바란다고 하십니까.”
그러자 부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궁극의 경지를 다한 자도 아직 추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얻기 힘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마음의 행복’이라고 했던 것이다. 모든 인욕에 한계가 없듯, 모든 보시에도 한계가 없다. 베풀면 베풀수록 더 크게 돌아오는 것이 보시의 공덕인 것이다.
“하늘 세계나 인간 세계도 행복의 힘보다 더 뛰어난 것은 없다. 부처의 길(佛道)도 역시 그것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다. 어찌 그대는 마음의 행복을 가지지 못하고 복을 받기를 원하는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76. 남편의 도리에 대하여.
남편은 아내를 예절로써 대하고 위신을 지키며
항상 의복과 음식을 넉넉히 대어 주어야 한다.
<육방예경> 중에서
해설
옛날에 한 농부와 아내가 있었다. 둘 사이는 금슬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아내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끼니때가 되면 김을 매는 남편을 위해 밥을 지어 그 먼 십 리 길을 오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농부는 평소와는 다르게 심한 허기를 느꼈다.
“조금만 기다리면 아내가 오겠지.”
그는 밭고랑에 앉아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아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먼발치에서 음식을 머리에 이고 걸어오는 아내가 보였다. 농부는
“얼씨구나”
하면서 그의 아내를 논두렁 밖까지 마중 나갔다. 하지만 아내는 십 리 길을 걸어오면서 배가 너무 고팠다. 밥을 지으면서 너무 시장했지만 남편 때문에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쌀독이 비어 동네에서 쌀을 꾸어야 될 형편이라 점심밥은 남편이 먹을 한 그릇뿐이었다. 아내는 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멀리 남편이 보였지만 그녀는 끝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지고 온 밥을 모두 먹고 말았다. 남편은 자신이 배고프다는 소리를 하지도 못하고 그저 아내의 모습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기가 막힌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중국의 낭야 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본 것을 읊었던 이야기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두고 동양 최고의 선지식이었던 서옹 스님이 쓴 착어가 있다.
“산호로 만든 베개 위에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이여,
반은 그대를 사모하고 반은 그대를 원망하도다.”
서옹 스님
연시처럼 기막히게 아름답다. 그 순간, 남편은 아내가 미웠을 것이다. 또 ‘오죽하면’이라는 연민의 정도 느꼈을 것이다. 즉 반은 사모하고 반은 원망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듯 이 세상은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져있다. ‘누군가를 반은 사랑하고 반은 미워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생의 전부일 수도 있다. 만약 이것마저 비울 수 있다면 사람은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중아함경>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선남자여, 만일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고 어여삐 생각하면 반드시 이익이 불어날 것이요, 흉하거나 쇠하지 않으리라. 또한 남편은 다섯 가지 일로 처자를 사랑하고 공경하며 생활할 물품을 대주어야 한다. 그 다섯 가지는 무엇인가? 첫째는 처자를 어여삐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영락 따위의 장식품을 주는 것이요, 넷째는 집안에서 편안함을 얻게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아내의 친족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중아함경>중에서
또한 부처님은 “모은 재물은 네 등분하여 한 몫은 옷과 음식을 마련하는 데 쓰고, 두 몫은 사업하는 데 쓰며, 나머지 한 몫은 저축하여 힘든 때를 대비하라. 밭에 곡식 심는 것이 제일이고, 장사하는 것이 그 다음이며, 소와 염소와 가축을 길러라. 또 여러 자식들이 있거든 각기 그 짝을 구하고 아울러 가축들을 가법(家法)에 맞게 하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가정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고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77.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분율> 중에서
해설
하루에 한 번은 거울을 바라볼 것이다. 가끔 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누구일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낯설다는 느낌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이것을 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내관(內觀), 곧 자기 탐구이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행위는 인간만이 할 수있는 일이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 심리학 교수인 티모시 윌슨은 “인간은 항상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의 세계를 여행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는 항상 ‘내가 낯설다’라는 생각이 있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오감(五感)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짧은 순간에도 약 일천일백만 개라고 한다. 그 엄청난 정보 중에서 인간이 의식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40여 개를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의 정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몰래 처리하게 되는데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적응 무의식’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평소에 보이는 기질과 특성, 성격 중 거의 대부분이 이 ‘적응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 사람들이 매일 반복하는 행동일수록 무의식적이 되어, 나중에는 그것이 요구하는 노력이나 의식적인 관심이 점점 더 적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이 던지는 가장 값진 가르침 하나는, 행동의 변화가 종종 태도나 감정의 변화를 부른다는 것이다.
아주 매력적인 여자 연구원이 공원에서 남자들에게 접근해 설문지에 답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자들의 절반은 깊은 협곡 위에 걸린 다리 위에서 설문지를 작성했다. 절반은 다리를 건넌 뒤 공원 벤치에 앉아 쉬면서 설문지를 채웠다. 여자 연구원은 남자들에게 전화번호를 주고 연구와 관련해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를 해도 좋다고 말했다.
결과는 이렇게 나타났다. 다리 위에서 설문에 응한 남자의 65%가 여자 연구원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벤치에 앉아 설문에 응한 사람 중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30%에 지나지 않았다.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뛴 것을 남자들은 자신들이 그 여자에게 끌린 것으로 잘못 해석했던 것이다. 이렇듯 자신을 잘 알지 못한 탓에 엉뚱한 사람에게 사랑을 품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바로 티모시 윌슨이 말하는 ‘적응 무의식’이다.
어느 날 부처님이 숲속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그 때 30여명의 남자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부처님을 발견하고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혹시 이곳에 한 여자가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관료의 자제들이었는데 저마다 부인을 데리고 숲에 놀러왔다. 그런데 그 중의 한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아 기생을 데리고 왔는데 모두 놀이에 정신없이 빠져 있을 때 그 기생이 몰래 재물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그들이 여자를 찾고 있는 사정을 들은 부처님은 웃으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들이여,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도망친 여자를 찾고자 하는 일과 자기 자신을 찾는 일 중 어느 쪽이 더욱 중요한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남자들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자리에 앉아 내가 자기 자신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방법에 대해 설법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후 모두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부처님 역시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 자신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셨다. 우리의 삶에서 ‘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어찌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78. 깨달음을 부처라 한다.
깨달음을 부처라 한다.
<대일경> 중에서
해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금강경을 단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공(空)이다. 즉 ‘비어 있다’라는 뜻이다. 은밀히 말하면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비우고, 육신을 비우고, 색을 비우고, 욕망을 비우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금강경에는 공은 없고 ‘자아(自我)’와 ‘나’가 넘친다. 금강경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수보리(須菩提)의 문답으로 되어 있는 책이다. 어리석은 제자를 깨우치기 위한 부처님의 설법이 주를 이룬다.
수보리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의 집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이 때문에 훗날 사람들은 수보리를 두고 ‘공’을 뜻하는 순야다(舜若多)라고 불렀다. 수보리는 부처에게서 ‘공’의 이치를 가장 잘 깨달은 최상의 수행자였기에, 그를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고도 부른다. 즉 부처의 제자로서 ‘공’을 제대로 이해한 수행자였던 것이다.
스승인 석가모니와 제자인 수보리의 문답을 통해 궁극적 삶의 깨달음을 깨쳐 나가는 경전이 바로 금강경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지해야 할 사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자인 수보리보다 더 높은 경지에서 질문과 답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묻는 자와 대답을 하는 자의 경지가 일치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래서 금강경이 사람들에게 더 깊은 감동을 던져 준다고 할 것이다.
금강경의 첫 부분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된다. 이를 해석하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이다. 사실 이 같은 설법은 애초부터 문자로 전해지지는 않았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제자들 중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통해 입으로 전해진 것을 부처님의 제자인 가섭존자(迦葉尊者)가 모았고, 이후 대승불교 운동을 통해 문자로 기록된 것이다. 실제로 가섭은 부처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제자였다.
어느 날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그 많은 제자들 중에 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 가섭의 이 웃음을 보고 다른 제자들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더구나 그 꽃 한 송이의 의미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래선(如來禪)이다. 여래선은 본래부터 모든 중생이 원만구족하다는 여래의 가르침에 의하여 깨닫는 선을 말한다. 그 꽃 한 송이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가섭 이후부터 부처님의 말씀은 입과 입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나는 부처님의 그림자와 같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아난존자이다. 그는 기억력이 매우 좋아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칭송되었다. 즉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으며, 가장 잘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열반 이후 제자들이 모일 때도 부처님의 설법은 모두 아난존자가 외웠으며, 이를 다시 다른 제자들이 읊조렸다.
이것이 오늘날의 경전이 되었다. 사실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이것은 수보리가 이경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위대한 다이몬드 경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전해지고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원정사에서 1250인의 큰 비구 스님들과 함께 계실 때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공양 시간이 되자 가사를 걸치고 걸식을 하기 위해 발우를 들고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한 집씩 차례로 돌며 탁발을 하신 다음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하셨다. 공양을 마치시고는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놓으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가장 첫 부분인 1장이다. 부처님은 여기서 일상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즉 현재의 삶, 이 순간을 말한 것에 다름이 없다. 제자들을 모아 법회를 열게 된 연유(緣由)를 알리는 바로 이 부분을 두고 금강경을 주해(註解)하신 많은 선승(禪僧)들은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부처님 최상의 설법이라고까지 하고 있다. 사실 언뜻 보면 아무 것도 설한 것이 없으며 우리가 공부해야 할 그 어떤 가르침도 드러나 있지 않다. 그저 평범한 부처님의 일과를 잠깐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의 눈으로 하루 일과를 살고 계시는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삶에 대해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의 고정관념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오직 자신의 잣대와 가치관에 따라 현재의 자기를 판단하는 것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순간이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금강경 1장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아난존자는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판단이 개입됨이 없이, 아무런 가감도 없이 그대로 부처님께 들은 것만을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들은 무엇을 말할 때 대부분 ‘내말’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물론 내 말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말은 사회에서, 학교에서, 책에서, 스승님들에게서 얻어들은 말이다. 그런 것들을 내 잣대, 색안경에 비추어 걸러내어 ‘내 식대로’ 조합하는 역할 정도를 할 뿐인 것이다.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얻어들은 것을 ‘내 생각’이라고 고집하며, ‘내 말’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물론 스스로도 그것이 온전한 내 생각이라 착각하고, 옳은 생각인 줄 알고 산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때, 혹은 부처님 말씀을 누군가에게 들려줄 때, 아난존자의 이런 겸손함과 진실함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말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또한 말을 순수하고 참되게 전달할 수 있으며, ‘내가 옳다’라는 아상이 비워진 텅 빈 진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이야 그저 입가에 떠오르는 말들을 아무런 여과 없이, 그것도 자기 생각인양 마구 떠들고 누군가에게 주워들은 내용을 내말처럼 마구 토해내다 보니, 내면에서 침묵과 명상을 통해 향기롭게 피어오르는 진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팔만대장경이라는 수많은 경전의 형태로 생생한 부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데는 아난의 역할이 가히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79. 사람의 얼굴 표정을 보면 마음을 알 수 있다.
물이 흐리거나, 끓고 있지 않거나,
이끼로 덮여 있지 않다면
제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상응부경전> 중에서
해설
우리의 몸은 눈, 코, 입, 귀, 몸, 그리고 뜻(意)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불교에서 육근이라고 하는데 이 중의 가장 으뜸은 뜻이다. 뜻은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마음이 움직여 우리의 오감을 작동시킨다. 사람의 얼굴 표정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사람이 가진 내관(內觀), 즉 마음의 심리 상태가 얼굴로 전이가 되어 표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국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 있거나 흐리거나 슬픔에 빠져있다면 자신의 얼굴 역시 편안한 모습이 될 수가 없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머물 때, 상가라라는 한 바라문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
“부처님, 오늘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 저는 때때로 내 마음이 혼란스럽고 혼미하여 배운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리 그것을 다시 떠올리려 해도 되지 않을 때가 있으며 또한 어떤 때는 마음이 저 맑은 물처럼 맑아 아직 깨닫지 못한 것까지도 거침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옵니까?”
부처님은 바라문의 이야기를 듣고 물그릇을 하나 가지고 와 그의 앞에 놓았다.
“바라문이여 여기 그릇 속에 맑은 물이 담겨져 있다. 만약 그 맑은 물속에 빨강색이나 파랑색의 물감을 떨어뜨려 물의 색을 바뀌게 한다면 물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다. 사람의 마음이 온갖 탐욕으로 흐려져 있거나 마음이 밝지 못하면 세상의 그 무엇도 올바르게 비추지 못할 것이다.”
바라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처님의 말씀이 다시 이어졌다.
“또한 그 그릇의 물이 불 위에 놓여 있어 끓고 있다면 역시 얼굴을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이 노여움으로 끓고 있다면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온전하게 볼 수가 없다. 또한 물 위에 이끼가 덮여있을 때도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이 어리석음이나 남에 대한 의심, 혹은 진리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담고 있으면 세상의 그 어떤것도 비추어 볼 수가 없다.”
그제야 바라문은 왜 자신의 마음이 오락가락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부처님의 삼독(三毒)에 대한 설법이다. 인간의 마음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 즉 탐진치(耽瞋恥)에 덮여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그 마음을 없애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정견(正見)이다. 정견이란 어떤 사물을 볼 때 올바르게 보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설법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체 법에 대한 참다운 실상을 알게 하는 지혜인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알아야 한다. 아래에 한 재미있는 예가 있다. 스님의 설법은 바로 오늘 이 순간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정견(正見)이다.
예전에 한 스님이 미국에서 법문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 때 한 대중이 자리에 일어나 느닷없이 그 스님의 법문을 가로막고 질문을 던졌다.
“스님은 기적을 일으키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에게 그 기적을 보여주십시오.”
스님은 느닷없는 말을 듣고 잠시 법문을 거두고, 주장자로 법상을 ‘탕’ 하고 내리쳤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네, 스님. 저는 불법을 믿지 않사오나 스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신다면 오늘부터 불교 신자가 되겠습니다.”
그 스님은 다시 주장자로 법상을 내리쳤다.
“오늘 밥을 먹고 왔느냐.”
“네, 스님.”
“그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그래. 그것이 기적이니라.”
“아,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스님!”
“억지라니 이 놈! 하루 밥을 먹고 힘을 쓰며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이 어찌 기적이 아니란 말인가.”
큰 스님의 눈빛은 법당의 천정까지도 뚫을 기세였다.
“그래, 네가 밥을 먹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 아니란 말인가. 너는 어디에서 왔는가.”
“잘 모릅니다.”
“그것조차 모르는 놈이 기적을 묻는다는 말이지. 현재 네가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니라.”
그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스님의 말씀이 너무도 옳습니다.”
80. 부처님과 보살의 행은 집착이 없다.
부처님과 보살의 행은 집착이 없다.
<금강경> 중에서
해설
금강이란 일반적으로 다이아몬드를 뜻한다. 다이아몬드는 금강불괴(金剛不壞)라고 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여 결코 어떠한 물질에도 깨어지지 않으며 그 어떤 변화 속에서도 결코 파괴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것은 아주 희고 투명하며 한없이 청정해 깨끗한 빛을 내뿜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특성을 비유하여 부처님의 경전을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이하 금강경)이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금강경은 부처님이 쓰신 최고의 경전이라 보면 된다. 금강경은 불성(佛性)과 반야(般若)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원래부터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불성은 그 어떤 세상의 변화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으며 깨어지지 않는다. 그런 불성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반야이다.
본래부터 우리의 몸에는 반야의 지혜가 숨어 있다. 이 지혜는 금강과 같이 결코 파괴되지 않으며 청정하다. 일각에서는 금강의 지혜가 금강처럼 견고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이 가진 번뇌가 금강과 같이 견고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번뇌를 끊는 반야바라밀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의 불성은 본체(本體)를 의미한다. 반야란 이 본체를 이해하고 체득하는 하나의 지혜인 것이다. 그래서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다. 이것이 바로 불이사상(不二思想)이다. 우리 안에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 반야의 지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반야는 범어로서 ‘프라즈나(Prajna)’라고 하며, 팔리어로는 ‘판냐’라고 한다. 반야는 바로 ‘판냐’의 음역인 것이다.
사실 반야는 번역을 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우리말로 해석해 본다면 ‘지혜’라는 말이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반야를 일상적인 의미의 지혜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들이 헤아릴 수 없는 무분별의 지혜, 즉 최고의 경지이다. ‘부처님의 지혜’라고 보면 된다.
바라밀은 범어로 ‘파라미타(Paramita)’이며, 이 또한 적절하게 옮길 만한 한자가 없었기에 그대로 발음만 따와 ‘바라밀다’, 혹은 ‘바라밀’로 번역해 놓은 것이 많다. 바라밀다, 바라밀은 ‘도피안(到彼岸)’, ‘도무극(到無極)’, ‘사구경(事究竟)’으로, ‘바라’는 ‘저 언덕(피안)’을 ‘밀다’는 ‘건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언덕’에서 부처님 깨달음의 세계인, 금강 반야의 세계인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을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언덕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 즉 차안(此岸)으로 아직 깨닫지 못하여 탐진치에 물든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다른 말로 사바세계이다. 즉 인토(忍土)로 삼독의 번뇌를 참아야 하고, 오온(五蘊)으로 비롯되는 온갖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 세계인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예토(穢土)라 하여 삼독심에 물들어 오염된 땅을 말하기도 한다. 저 언덕, 피안(彼岸)이란 차안(此岸)의 상대되는 개념으로 삼독심에서 벗어나 신구의 삼업이 청정하여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세계, 즉 정토(淨土)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경(經)이란 수트라(Sutra)이며 원래 의미는 ‘실’, ‘줄’이다. 옛날 경전들은 보통 대나무나 나무껍질 등의 판에 적어 여러 개의 실로 묶어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경을 연결하여 묶어주는 실처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소중한 내용들을 이어놓은 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란 경의 의미를 해석해 보면 ‘금강과도 같은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가르침들을 설해 놓은 경’인 것이다. 금강경은 한국의 선종에서 중국의 조사선(祖師禪)을 그대로 이어 오면서 천 년 동안 한국 불교의 지주가 되어 왔다.
81. 수행하지 않은 사람은 지난날만 탄식한다.
젊었을 때 수행하지 않아 참 보배를 얻지 못한 사람은
부러진 활처럼 버려져
부질없이 지난날만 탄식한다.
<법구경> 중에서
해설
부처님이 거처한 곳은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이다. 고(孤)란 한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말한다. 독(獨)은 자식 없는 노인을 말한다. 다시 생각해 보면 비구도 그러하다. 비구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으며 늙어서는 아이가 없다. 그들이 거처하는 곳이 바로 고독원인 것이다.
우리가 많이 쓰고 있는 외롭고 쓸쓸하다는 ‘고독’이라는 한자도 같다. 그러니 스님이란 외롭고 고독한 수행자라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선을 깨닫는 것은 어떤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이라는 말만이 통하는 행선(行禪)이다.
오래 전 한국에는 잠 때문에 깨달은 맷돌 선사라는 분이 있었다. 이 스님은 앉거나 서있거나 밥을 먹거나 일하거나 수행을 하거나 계속 졸았던 것이다. 이런 스님에게 참선을 한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수행을 하기만 하면 잠이 쏟아져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선사는 졸면서 걷다가 큰 나무에 부딪쳤다. 마침 그걸 보고 있던 한 여인이 깔깔깔 웃어댔다. 선사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같은 졸음을 고치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등허리에 맷돌을 지고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도를 깨달았다. 그가 바로 맷돌 선사다.
불교가 재미있는 철학이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니 문자와 알음알이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오직 참선을 위해 도를 구하는 것이 불교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이라는 말은 그래서 위대한 말인 것이다.
얼마 전 외국 선원에서 일어난 일이다. 수행을 위해 머리를 깎고 출가한 외국인 비구들이 그곳에 와 있었다. 그들은 한국의 문화와 풍속, 습관, 더욱이 절간의 법도를 알리 만무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그 미국인 비구들은 일요일에는 그들의 문화적 습관대로 염불도 하지 않고 태평스럽게 늦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참다 지친 그 선원의 한 큰 스님이 방문을 확 열어젖혔다. 미국인 비구들은 깜작 놀라 모두 눈이 둥그레졌다.
“무슨 일인가? 어째서 자네들은 아직도 자고 있는 것인가.”
그 중의 한 사람이 대답했다.
“선사님, 미국에서 일요일은 쉬는 날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수행을 했으니 하루는 쉬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일주일에 하루는 쉬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게 미국 스타일입니다.”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보이는가?”
미국인 비구가 대답했다.
“네, 보입니다.”
“태양은 쉬는 날이 없네. 밖에 바람 부는 소리가 들리는가?”
“네, 들립니다.”
“바람 역시 쉬는 날이 없네. 태양도, 새도, 나무도, 꽃도, 그리고 모든 동물들도 쉬는 날이 없네. 자네들은 선을 수행중이네. 다시 말해서 보살이 되고자 하는 것이지. 보살의 마음은 쉬는 날이 없어. 그것은 한국의 스타일도 미국의 스타일도 아니네. 다만 대자대비일 뿐이네. 어서 일어나 참선을 하게.”
큰 스님의 일침이었다. 그렇다. 수행이란 날을 가리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깨달음의 행위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은 그에 대해 의무를 다하는 것이 하나의 수행이다. 수행은 수행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82. 승패를 떠나 마음의 고요를 얻은 사람은 즐겁게 산다.
승자는 원한을 낳고 패자는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이기고 짐을 떠나
마음의 고요를 얻은 사람은 즐겁게 산다.
<법구경> 중에서
해설
사랑 때문에 시작한 고대 트로이의 전쟁에서부터 오늘날 크고 작은 분쟁의 밑바탕에는 종교적인 갈등이 깔려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도 은밀히 말하면 그와 같다. 이라크는 현재 수니파, 쿠르드족, 시아파 세 민족으로 분리되어 서로 반목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갈등은 사실 부처님 살아계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多)민족이 살고 있는 인도의 역사는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 사실 우리나라만큼 종교 다변화 정책에 있어 성공한 나라는 드물다. 일각에서는 한국에서의 종교가 다변화 된 것은 불교의 덕이 크다고 한다.
사실 어느 분야든지 기득권이라는 것이 있다. 한국 종교의 기득권은 누가 뭐래도 불교가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불교는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다. 불교가 가지고 있는 사상 자체가 배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의 신념은 그 어떤 투쟁적인 역사도 철저히 배격한다.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은 ‘자비(慈悲)’이다. 자비란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돕는다.’라는 말이다. 이 자비 사상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평등(平等)하다’는 논리를 낳는다. 그런 근본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기에 불교는 다른 종교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떠한가. 지하철 안에서 혹은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예수를 믿어라’고 고함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여하튼 어떠한 경우라도 종교는 누구에 의해 강제되어서는 안되며, 또한 강제해서도 안된다. 심지어 어느 사찰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화재가 일어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두 종교의 마찰이 쉼 없이 일어나고 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재미있는 우화 한 토막을 얘기해 보자.
사자와 멧돼지가 숲속의 옹달샘에서 만났다. 둘은 샘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격렬하게 싸웠다. 싸움에 지친 그들은 잠시 싸움을 멈추고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그 주변 나뭇가지에는 독수리 떼가 앉아 있었고, 하늘에는 까마귀들이 뱅뱅 돌고 있었다.
사자와 멧돼지들의 싸움이 끝나면 그들은 죽은 고기와 버려진 옹달샘을 차지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자와 멧돼지는 그들을 보자 생각을 바꾸었다. 옹달샘은 나누어 먹으면 된다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이렇듯이 대결과 다툼은 생각만 조금 바꾸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늘 화해보다 우위에 있어서 지구촌에는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한번쯤 뒤돌아서서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싶다.
83. 올바른 참선에 대하여.
진리로 나아가는 길을 버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범부의 일상생활을 하는 것,
그것이 올바른 참선이다.
<유마경> 중에서
해설
일제 강점기, 한용운 스님은 나라를 빼앗긴 아픔이 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지러운 마음과 몸을 달래기 위해 스님은 틈만 나면 사람들이 많이 있는 장터에 나갔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즐거웠다. 활기찬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우울한 마음도 자연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기고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은 스님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다.
사실 스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선을 닦고 불법을 공부하는 것이다. 한용운 스님은 그 당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수행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행자가 수행을 게을리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심우장 목부화상이여, 어느 날 어느 때에 소를 잃었는가.
호를 목부라 하였으니 소를 얻어 기르는 것이 분명한데
집을 심우장이라 하였으니 소를 잃은 것도 분명하구나.
심우장 목부화상이여, 지금 소를 찾고 있는가.
소를 먹이고 있는가.
소를 찾고 먹이는 것을 함께 잊었는가.
삼각산 높은 봉우리는 높고
낮은 봉우리는 낮아
바람은 소슬하고 물은 차디찬데
목부화상이여!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경봉 스님
경봉 스님이 한용운 스님에게 보낸 편지이다. 한용운 스님이 만년에 수도하던 초가집 한 채에 심우장(尋牛莊)이란 이름을 붙였기에 경봉 스님은 그를 ‘심우장 목부화상’이라 불렀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을 구하는 것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다. 한용운 스님의 또 다른 일화이다.
하루는 스님이 장터를 걸어가다 길모퉁이에서 어떤 아낙과 상추 장수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보았다.
“상추가 왜 이리 조금이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저쪽에 파는 상추보다 훨씬 양이 적다고요.”
“웬걸요. 아주머니가 적다고 생각하면 적어 보이고, 많다고 생각하면 많아 보이는 법이지요.”
“그런 말이 어디 있소?”
“여기 있소.”
스님은 아낙과 상추 장수가 하는 말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다. 상추 장수의 말이 꽤 재미있었던 것이다.
‘적다고 생각하면 적어 보이고, 많다고 생각하면 많아 보이고……’
스님은 장터를 돌아 나오며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선외선(禪外禪)이었던 것이다. 선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도 있다는 것을 상추 장수가 통렬하게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여유에서 얻어지는 선이었다. 그렇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상추 장수의 터무니없는 장삿속에서 한용운 스님은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중생은 본디 마음에서 거짓을 떠나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범부의 한 생각에 집착하게 된다. 즉 자기 중심적인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그것에 집착하는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 선(禪)은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망상을 버리는 과정이요, 높은 도와 학문의 깊이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근심은 망상에서 시작되고 그로 인해 인생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84. 악업을 행하면 평안을 얻기 힘들다.
자기를 사랑해야 함을 안다면
자기를 악(惡)과 연결시키지 말라.
악업을 행하는 사람들은 평안을 얻기 힘들다.
<잡아함경> 중에서
해설
오늘날 한국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성철 스님이 인간의 영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유명한 ‘불생불멸 상주법계(不生不滅 常住法界)’란 법문이다. 성철 스님은 ‘질량보존의 법칙’을 증명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앤더슨(Carl. D. Ander Son)과 세그레(Emilio Segre)의 예를 들며 인간의 영혼은 윤회한다고 법문을 한 적이 있었다.
“물 한 그릇을 얼게 하면 얼음(氷)이 되고 얼음을 녹이면 물이 된다.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되었다고 물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또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었다고 얼음이 없어지고 물만 생긴 것이 아니다. 얼음이 없어지지도 않고, 물이 없어지지도 않았으니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물 한 그릇은 항상 그대로일 뿐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다. 이것이 상주법계다. 불교의 ‘불생불멸 상주법계’라는 것은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 즉 에너지가 질량이며 질량이 에너지라는 등가원리에 의해 물리적으로 증명된 일이다.”
성철 스님
그 당시 이 법문은 불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스님이 물리학 이론을 동원해 법문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은 무형의 에너지를 유형인 질량으로 전환시키고, 또 유형인 질량을 무형인 에너지로 전환시켰다.
사실 부처님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인간의 영혼은 윤회한다는 것을 설파했다. 부처님은 대승, 소승, 경전, 논전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몸을 바꾸어서 다시 태어난다.”고 밝히고 있다. 윤회는 불교의 원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만약 윤회한다면 윤회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불교에서 그것을 영혼이라고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의 식(識)으로 말하면 제 8 아라야식(阿懶耶識)을 가리키며 그것은 영혼 자체를 뜻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흔히 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인간의 이 같은 의식은 그대로 남아 생사 윤회하는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정적 사실이며 그 과보가 분명하다고 많은 경전에서는 이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불교에서는 현생에 지은 죄는 현생이든 후생이든 그 과보를 반드시 받는다고 한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오직 사악한 마음 때문이지만, 이 마음이 선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동물의 유형에서 진화했다는 학설도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동물의 유산이며, 마음을 초월하지 않는 한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사백 만년이나 걸린 기나긴 진화과정의 산물이며,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거쳐 왔던 여러 동물들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엄청난 과거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그 의식이란 바로 업이며 사람들은 이를 흔히 ‘마음’이라고 부른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합하고, 어머니가 수태를 하고, 그리고 간답바(Gandhahha)각주1) 가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의 씨앗이 심어진다. 그러나 새로 태어날 생명이 과거에 어떤 인연, 어떤 업보를 지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모와 태어날 생명이 과거에 좋은 관계였다면 은혜로운 자식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생에 있어 어떠한 경우라도 악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더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 어떤 악업도 만들어서는 안된다.
85. 원하는 소망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명예를 얻고자 하면 계율을 지키고,
재물을 얻고자 하면 보시를 행하고,
덕망을 얻으려 하면 진실한 삶을 살고,
좋은 벗을 얻고자 하면 먼저 은혜를 베풀어라.
<잡아함경> 중에서
해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간절히 원하는 소망이 있다. 그것은 명예와 재물, 덕망, 그리고 좋은 벗이다. 물론 이 네 가지를 동시에 가지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다고 해도 사실 이루기가 힘들다. 이 세상은 이 네 가지를 모두 가지기에는 힘든 구조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명예를 얻으면 재물과 멀어지고, 재물을 가지면 덕망을 잃기 쉬우며, 덕망을 얻으려면 재물을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중에서 마음먹기에 따라 쉽게 얻을 수가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덕망과 좋은 벗을 구하는 일이다. 재물은 노력하면 반드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명예 또한 그렇다. 그러나 덕망은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면 물질과 명예와는 상관없이 얻을 수 있다. 또한 좋은 벗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하나 있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는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많은 보시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업과 복덕과 관계가 있다. 전생에 업이 많은 사람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모으려고 해도 모으는 순간 빠져 나간다고 한다. 또한 전생에 복덕이 많은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큰 복을 받아 언젠가 큰 재물을 받는다는 것이 불교적 논리이다.
복덕을 많이 받는 사람은 전생이든 현생이든 보시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보시란 물질적인 도움을 많이 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적든 많든 남이 모르게 좋은 일을 한 것을 뜻한다. 만약, 내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보시’를 행하다면 자신의 공덕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이를 위해 기부를 한다. 그런 사람들은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마음이 사욕으로 물들지 않고 진실로 깨끗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 네 가지를 성취하기 위해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설령 다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삶의 원칙을 스스로 세우고 살아야 할 것이다.
설사 명예를 얻지 못하더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말것이며, 설사 재물을 얻지 못하더라도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도둑질을 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덕망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항상 진실한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이런 다짐을 한다면 자연히 좋은 벗은 생기기 마련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어쩌면 명예와 덕망, 재물이 저절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즉 부처님 말씀대로 ‘구하지 말고 스스로 노력한다면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네 가지를 성취하기 위해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 깊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나의 선행이, 나의 진실한 말 한마디가 남에게 큰 기쁨이 되는 순간, 그대는 또 하나의 공덕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남을 돕지 않고 복을 구하는 것은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86. 인간에게는 나쁜 업을 짓는 10가지 과보가 있다.
인간에게는 나쁜 업을 짓는 10가지 과보가 있다.
<잡아함경> 중에서
해설
부처님이 사밧티 기원정사에 있을 때 제자들을 불러 놓고 다음과 같이 설법을 하셨다.
“살생을 일삼으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고 설령 인간으로 환생한다 하더라도 수명이 짧아진다.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고 설령 인간으로 환생한다 하더라도 항상 가난할 것이다. 남의 여자를 탐하면 지옥에 떨어지고 설령 인간으로 환생한다 하더라도 남편이나 부인이 남의 꼬임에 빠질 것이다.
또한 이치에 맞지 않고 사려 깊지 않은 말을 하면 지옥에 떨어지고 설령 인간으로 환생한다 하더라도 신용을 얻지 못하며, 비단결 같은 말로 거짓말을 하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설령 인간으로 환생한다 하더라도 남의 놀림을 받을 것이며, 남에게 나쁜 욕설을 일삼으면 지옥에 떨어지고 설령 인간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곳에 의지하게 되면 지옥에 떨어지고 설령 인간으로 환생한다 하더라도 욕심쟁이가 될 것이며, 화내기를 좋아하면 지옥에 떨어지고 설령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분노할 일이 많이 생길 것이며, 삿되고 어리석어 사리 분별을 잘 못하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설령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10가지의 선업을 행하면 죽어서 천상에 갈 것이다. 만약 인간으로 환생하게 되면 오래 살고 부자가 될 것이며, 배우자가 정숙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할 것이며, 남의 놀림을 받지 않고 좋은 벗을 사귀게 되고, 좋은 목소리을 가지게 될 것이며, 남으로부터 신뢰를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욕망이 적어지고 성냄이 없으며 항상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善惡)을 결정짓는 과보(果報)는 명쾌하다. 인간의 삼업(三業)은 몸(身), 입(口), 생각(意)인데 이것이 ‘선을 행하였느냐, 악을 행하였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에서 몸은 세 가지, 입은 네 가지, 생각은 세 가지의 업을 각각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선과 악에 따라 십선업(十善業), 십악업(十惡業)으로 구분한다.
몸이 가지는 세 가지의 신업(身業)은 살생각주1) , 투도(偸盜)각주2) , 사음(邪淫)각주3) 이며 구업이 가지는 네 가지는 망어(妄語)각주4) , 기어(綺語)각주5) , 양설(兩舌)각주6) ,악구(惡口)각주7) 이다. 또한 생각으로 짓는 세 가지 업은 탐심(貪心)각주8) , 진심(瞋心)각주9) , 치심(癡心)각주10) 이다.
물론, 이 10가지의 업들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몸과 정신을 맑게 하는 작업’이다. 이것들을 모두 지키기는 매우 어렵지만 마음만 먹으면 행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소한 이를 가슴에 새기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보다 나은 미래를 기약할수 있을 것이다. 몸과 정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올바른 인격자로 살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됨됨이는 마음에 번뇌가 얼마나 많고 적은가로 판단한다. 몸과 정신이 깨끗하고 맑은 사람은 그의 내면 또한 밝은 빛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갖는 존재에 대한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경지이다. 삼업과 10가지의 과보는 설사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상식 범주 안에서 능히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을 바르게 실천하면 도 다른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87. 인간에게는 여덟 가지의 괴로움이 있다.
인간에게는 여덟 가지의 괴로움이 있다.
<법구경> 중에서
해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인간 실존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고’라는 것이 인간의 즐거움과 반대적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아니다. 은밀하게 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육체와 정신이 당하는 고통이 아니다. ‘고’라는 것은 즐거움이 연속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고(苦)는 고통이 아니라 낙(樂)’이라는 말이 나온다.
세계 유수의 불교 학자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고’를 오히려 즐거움이라고 번역해야 옳다고까지 한다. 바꾸어 말하면 ‘고’는 즐거움이란 것이 없으면 생길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괴로운 것은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고’의 본질이다.
즉 ‘고’를 이해하려만 인간이 가진 ‘욕망’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고’는 그만큼 상대적으로 커지기 마련이다. 즉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자기충족성의 한계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고’도 끝이 없고 한계가 없다. 그렇기에 욕망을 가진 인간은 평생 동안 ‘고’를 느끼고 살아간다.
그럼 인간에게 있어서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내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할까? 그것도 인간의 ‘즐거움’이라 말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즐거움은 ‘고’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고’와 ‘낙’은 이렇게 연속선상에 있으며, 이것이 인간 실존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의 상관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땅 위에는 두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한 개의 동그라미 속에는 10개의 구슬이 있고 또 하나의 동그라미 속에는 구슬이 하나도 없다. 한 개의 구슬을 옮겨가면 10개의 구슬은 아홉개가 되고 하나도 없었던 동그라미 속에 구슬이 하나 생긴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구슬을 옮기면 10개의 구슬은 사라지고 구슬이 없었던 동그라미 속에 10개의 구슬이 생긴다.
바로 이것이 ‘낙’과 ‘고’의 상관관계인 것이다. 즐거움이 열 개 있으면 괴로움이 열 개가 생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즐거움’이란 것은 보통 ‘욕망’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니 곧 ‘욕망’은 ‘고’라는 등식이 생기게 된다.
부처님은 인간에게 여덟 가지의 ‘고’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생고(生苦), 노고(老苦), 병고(病苦), 사고(死苦), 즉 인간이 태어나서 가지는 네 가지의 기본적인 괴로움에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더하면 팔고(八苦)이다.
이 팔고 중에서 애별리고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 원증회고는 원한을 가진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 구불득고는 원하는 것을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괴로움, 오음성고는 인간이 가지는 정(有情)을 형성하고 있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음에서 생기는 몸과 마음의 고뇌를 말한다. 이 중에서 가장 큰 괴로움은 구불득고인데 이것은 인간의 욕망과 관계된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를 취하면 또 다른 욕망이 생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고’는 ‘욕망, 집착, 즐거움’이라는 연속성의 고리가 주는 고통이다. 범부가 살아가기 위해 어느 정도의 욕망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욕망은 인간을 고통속에 빠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됨을 명심해야 한다.
88. 이 세상에서 나 만큼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사람의 생각은 막힘없이 이 세상 어디라도 가지만,
그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찾지 못한다.
<초기불전 우다나> 중에서
해설
어느 여름날 혜암 스님과 진성 스님이 만공 스님을 모시고 간월도에서 안면도(安眠島)로 갈 때였다. 세 사람이 매우 작은 배를 타고 가면서 스쳐가는 먼 산들과 바닷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만공 스님이 제자인 진성 스님에게 물었다.
“저 산이 가느냐. 이 배가 가느냐?”
“산과 배가 둘 다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렇게 가느냐?”
만공 스님이 다시 묻자 진성 스님은 배 앞으로 나와 한참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자 옆에 앉았던 혜암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산이 가는 것도 아니요, 배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렇게 가는가?”
만공 스님이 다시 물었다. 혜암 스님은 마침 들고 있던 흰 손수건을 번쩍 들어 보였다.
“이 손수건이 흔들리니 무형의 바람이 우리를 가게 합니다.”
만공 스님이 다시 물었다.
“자네 살림이 언제부터 그러한가?”
혜암 스님이 다시 말했다.
“제 살림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하옵니다.”
만공 스님은 혜암 스님의 말씀을 듣고 말없이 점두(點頭)하였다.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대상과 항상 우주적 관계를 맺고 있다. 우주적 관계란 바로 나 자신이 우주이며 이 만물이 우주인데 나와 만물이 끊임없이 어떤 작용을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더욱 궁극적인 것은 그 우주란 것이 내 자신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공 스님과 혜암 스님의 선문답 속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이 산이 가느냐, 이 배가 가느냐.’의 질문에 ‘산도 배도 다 가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온다. 산도 배도 가지 않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우리를 가게 한다는 암시이다. 그런데 혜암 스님은 손수건을 흔드는 ‘무형의 바람’이라고 했다. 정말 무형의 바람이 나와 배와 산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만공 스님이 혜암 스님에게 한 ‘자네 살림이 언제부터 그러한가.’라는 질문은 어떤 질책을 담고 있다. 수행자가 겨우 ‘그 정도 밖에 하지 못하는가.’라는 것일 게다. 그러나 혜암은 분명 만공스님의 질문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우리는 만공 스님과 혜암 스님의 선문답 속에서 궁극적인 해답은 바로 ‘아(我)’의 자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무언가를 움직이는 것은 저 산도 아니고, 배도 아니고, 무형의 바람도 아니며, 바로 ‘아’라는 것일 게다.
“이 세상에 가장 사랑해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해치지 않으며, 남을 원망하지 않으며, 남의 원한을 사지 않는다.”라는 부처님의 말씀도 바로 이와 같은 논리이다.
우리는 이제 자각의 눈을 떠야 한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욕망이 가득한 모습, 허세와 방종, 게으르고 무기력한 자기에서 깨어나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런 자기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자기에게 주어진 미래는 없다.
“이 세상에서 나 만큼 더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부처님 자신도 자기 자신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받을 수도 없으며 또한 줄 수도 없음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89. 욕망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살아가라.
이 몸이 괴로움의 근본이며,
나머지 괴로움은 지엽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관경> 중에서
해설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다. 부처님이 길을 가시다가 우연히 네 사람의 제자들이 ‘인간의 괴로움’에 대하여 담론하는 것을 들었다. 한 제자는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것이 참기 힘든 ‘음욕’이라고 했으며, 또 한 제자는 그 보다 더 큰 괴로움은 ‘분노’라고 했다. 또 한 제자는 천하에 가장 큰 괴로움은 ‘배고픔’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듣고 있던 마지막 제자는 ‘공포심’이 가장 괴롭다고 했다. 그 때 부처님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괴로움의 근본을 모르고 있구나. 세상의 고통 중에서 제일 큰 고통은 우리의 몸 자체에 있다. 너희들이 말하는 음욕, 성냄, 배고픔, 공포심 등은 몸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고통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곧 중생의 온갖 고통과 재앙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생로병사의 무상함을 깨달아 이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제야 네 명의 제자들은 크게 깨우쳤다.
그렇다. 우리에게 가장 큰 고통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몸을 가졌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고통이라는 말과 같다. 배고프면 밥 먹고, 똥 누고 싶으면 똥 누고 잠이 오면 잠자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행복한 삶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만약 우리의 몸이 이 중에서 단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벌써 우리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 가지 작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우(遇)를 범하고 있다. 이 말은 바로 욕망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이치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에 시달리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그것 이상의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보다 더 많은 재물을 원하고, 또한 남보다 더 많은 지식을 원하고, 남보다 더 많은 명예를 가지기를 원한다.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부처님이 재물의 무기성(無記性), 혹은 중립성(中立性)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재물에 욕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항상 자아(自我)의 책임이 따른다. 열심히 노력하여 얻는 재물은 그것만으로도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남을 위해하고, 도둑질을 하여 얻은 재물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재물에 대한 탐욕이 가져오는 위험성에 대한 부처님의 경고이기도 하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그 자체만으로도 괴로움이다. 그럼, 이러한 우리 몸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몸은 격류(激流)와 눈에 보이지 않는 덫, 튼튼한 방책(防柵), 깨부수기 힘든 바위산 같은 고통 앞에 가로놓여 있다. 마음을 오직 하나로 모아 선(善)과 정(精)에 깃들면 그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다.
선(善)이란 악에 물들지 않은 마음이고, 정(精)이란 거울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이다. ‘어느 것도 진아(眞我)가 아니다.’라는 밝은 지혜로 나를 바라볼 때 마침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도 이와 상통한다. 무구청정(無垢淸淨)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5장. 진정한 깨달음에 대한 부처님 말씀.
큰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가지치기를 잘해야 한다. 내 몸의 나쁜 것을 버려야만 비로소 큰 사람이 된다는 이치와 같다. 원래 깨달음이란 많은 생각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이는 깊은 생각에서 우러나오는 밝은 이치를 깨달았을 때 비로소 큰 사람이 된다는 말과 같다. 한 몸에 너무 많은 것을 달지 말라. 명예와 재물, 자식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의 몸이 무거워지는 것과 같다. 검소하고 진실되게 사는 것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오직 남을 위해 아무 조건 없는 보시가 부처의 깨달음이다. 청담스님
90. 깨우쳐 행하지 않으면 아니 깨우치는 것만 못하다.
전에는 비록 게을렀어도
후에 벗어난 사람은 세상을 밝게 비춘다.
전에는 비록 악했어도
후에 벗어난 사람은 세상을 밝게 비춘다.
마치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초기불전 테라가타 비구의 고백> 중에서
해설
우리의 삶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일을 함에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바른 길을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또 다시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위해 일에 대한 면밀한 검증과 판단을 내리고 그에 맞게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쉽게 좌절하고 마침내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불교 격언 중에 ‘깨우쳐 행하지 않으면 아니 깨우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스스로 잘못된 일임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너무도 뻔하다. 성공도 이와 같다. 오늘날 이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단순할 수도 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인연(然)을 맺고 있는 사람은 불과 백여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억 만 명이 함께 살아가는 이 지구상에서 과연 당신이 밀접하게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은 몇명인지 당장 돌이켜 보라.
아마 진실로 그대와 가까운 사람은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몇 명의 인연조차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다면 당신은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럼 왜 당신은 그 몇 사람에게조차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 원인은 오직 그대 탓이다. 그대가 가진 게으름, 그대가 가진 어리석음, 그대가 가진 나쁜 습관, 그대가 가진 욕심이 그대가 가진 소중한 인연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목표 지향적이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고 나면 우리는 또 다른 목표를 세운다. 우리의 삶은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인간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그것이 돈 문제이든, 성격 문제이든,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결국 수없이 쌓아온 인연의 끈을 놓아버리게 되며, 결국에는 ‘나’조차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로 인해 생기는 정신적인 갈등은 상상 이상이다. 갈등은 또다른 갈등을 낳고 결국에는 홀로 견디지 못할 외로움에 빠져 심한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임종을 앞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남긴 최후의 말이 있다.
“바야 담마, 산카랴.”
즉 “모든 존재는 흘러가는 것이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나쁜 사람은 ‘짧은 우리의 인생을 헛되이 게으르게 보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의 이 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 나의 시간이 가장 위대한 시간이다. 이 귀중한 시간을 어찌하여 그대는 헛되이 보내고 있는가. 바로 지금 이 순간 그대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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