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이 상 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바쁘게 살아왔던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러자니 고향의 옛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30분 정도의 거리를 오가야 했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는 야산과 냇가, 넓은 평야가 있어서 친구들과 함께 놀았다. 이곳이 2007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지정된 슬로시티로 삼지내(三支川;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마을이다.
마을에는 굽이굽이 돌담길과 한옥들이 이어져 있고, 주위의 산들이 멀리 보이는 고즈넉한 시골의 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1500년 전 백제 시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동쪽에는 월봉산, 남쪽에는 국수봉이 솟아 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의 모습이 마치 봉황이 날개를 뻗어 감싸 안고 있는 형국이다. ‘삼지 내(三支川)’는 세 갈래 실개천을 뜻한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후, 평소 가보고 싶었던 이곳에 잠시 들렀다. 마을의 역사를 따라 만들어진 ‘약초 밥상’이라는 음식점과 한옥 고택, 돌담길, 남극루 등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로 돌아온 착각에 빠져든다.
새해가 되면 정월 대보름 행사와 달팽이 시장 축제가 열리고 줄타기 공연, 민속놀이체험, 달집태우기의 행사도 열린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나의 눈길을 끄는 곳은 ‘달팽이 학당’이었다. 이 학당은 사람들에게 느린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 맛보게 하기 위해 만든 배움의 장소이다. 이 지역에서 살면서 전통을 지켜온 분들이 관광객들에게 체험학습을 시키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꿀 초, 한약 방향제, 수제 막걸리, 쌀 엿, 한과 만들기와 윷놀이, 제기차기, 투호, 활쏘기 등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 또 방문자들에게 아름다운 한옥의 잠자리도 마련해 준다.
달팽이 학당에서 배우는‘느리게 사는 삶’은 게으름을 피우자는 의미가 아닌 달콤한 삶. 행복한 삶을 위해 속도를 늦추고 자신을 돌아보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 고향이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그동안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기 위한 진정한 의미를 되찾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향의 슬로시티를 둘러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조용히 반추해본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광주, 서울, 대구, 미국 등 외지에서 살아왔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앞만 보고 서두르며 바쁘게 살았던 날이 대부분이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갖지 못했고 뭐에 쫓기듯 앞만 보고 달려왔다. 바쁘고 힘들게 사는 것이 잘사는 일이고 행복한 삶인 줄 알았다.
바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삶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잃어버린 것들도 많은 것 같다. 친척과 친구들과도 만나지 못했고,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책 읽기나 글쓰기는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여행도 많이 하지 못했고, 영화나 문화행사에도 좀처럼 가보지 못하고 아등바등 살았다.
훗날 행복한 가정을 꾸며 보겠다고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더니 ‘직장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퇴직을 종용하고, 자식들은 나를 이웃집 아저씨 보듯 하고, 부인은 ‘낯선 남자를’ 거북스러워한다.’라며 푸념하던 어느 가장의 이야기가 이제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예닐곱 해 전에 보았던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오기가미 나오코가 감독했고 고바야시 사토미(타이코 분)가 주연한 <안경>이라는 일본의 코미디 영화다.
일본의 조용한 남쪽 섬을 찾은 주인공(타이코)은 관광할 만한 것도 없고 재미있는 놀이도 전혀 없는 이곳에서 단순하고 느긋한 섬사람들의 이상한 생활 방식에 많이 당황한다. 그러다가 점차 그들을 이해하고 적응해 가면서 함께 즐기게 된다. 며칠간의 휴식 끝에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은 타이코는 “사색하는 데에도 뭔가 요령이 있나요?”라고 그들에게 묻는다. 그들의 대답은 “서두르지 않는 것이랍니다.”였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바빠서 정신이 없이 살았던 나는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느리지만, 서서히 행복을 찾아가는 그들의 삶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는 바쁘게 살아왔던 지난날을 추억하며, 그동안 잃고 살아왔던 행복한 삶과 느림의 미학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며 여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다.
- 2022년 9월 월간 한올문학 수필 대상 작품
첫댓글 수필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