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객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약 10분 후에 코타 키나바루 국제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안전벨트를 풀지 말고 자리에 앉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차창 밖을 바라보니 비행기가 낮은 구름을 뚫고 하강하기 시작한다. 해변가에는 이슬람교사원인 듯한 둥근 지붕과 흰색의 현대식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고 아스팔트 넓은 길을 건너 산 쪽으로는 택지개발공사가 진행 중인지 온통 시뻘겋다. 비행기는 아주 기분 좋게 충격 없이 활주로를 미끄러져 들어간다. 왼쪽으로 3층 공항청사가 보이고 중간에
‘KOTA KINABARU INTERNATIONAL AIRPORT'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브릿지를 통해 청사 2층으로 들어오니 보통은 출국장에나 있을 면세점들이 일렬로 서있고 이슬람교의 전통 옷인 얼굴을 가린 여인네들이 삼삼오오 서있다. 1층에 있는 입국심사는 비교적 간단했다. 까만 제복을 입은 출입국관리소직원들은 입국목적이나 여행일정 등을 묻지도 않고 서류만 보고 여권에 도장을 찍는다.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얼굴이 비교적 크고 동그란 사내가 남방차림에 ’WELCOME 서울시청산악회‘라고 쓴 네모난 종이를 들고 서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반가움에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앞으로 2박3일간 여러분과 함께 할 가이드 길종성 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현지가이드 ‘미키’ 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안내 시 자국가이드를 한 명씩 동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분들은 우리나라 말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만 말레이시아의 자국민 보호정책상 어쩔 수 없습니다. 만약 태우지 않고 다니다 걸리면 많은 벌금을 내야합니다.”
관광 버스에 오르자 젊고 핸섬한 젊은이가 마이크를 잡더니 자기소개와 로칼가이드(LOCAL GUIDE)를 소개한다.
“우선 오늘 일정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지금 시간이 4시 30분입니다만 쇼핑센타에 가서 미쳐 준비하지 못한 간단한 물건을 사시고 한식당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하신 후 여러분이 주무실 호텔 로즈가든까지 가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로즈가든까지는 약 84㎞밖에 되지 않지만 2차선에 구불구불하고 산을 오르기 때문에 2시간 반 이상이 소요됩니다.”
한식당인 ‘아리랑’은 쇼핑센타에서 300M 쯤 떨어져 있는데 60대 중반의 여사장은 고향에 사시는 할머니처럼 다감해 보인다. 메뉴판은 우리음식을 알파벳으로 써 놓았는데 서울의 음식점처럼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는 된장찌개에 깍두기, 부친개, 돼지고기, 잡채, 고추와 마늘이 곁들인 상추, 멸치, 계란찜 등으로 푸짐하게 저녁을 마쳤다. 현지인 여종원 두 명은 우리가 신기해 보이는지 시종일관 웃음 띤 얼굴로 둘이서 떠들며 서비스를 한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고 하니 입이 함박만큼 벌어진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산 위에서 내려온 어둠은 도시를 구석구석 채우고 바다의 파도까지 잠재우고 온 세상을 적막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여러분들의 여행목적이 키나바루 등정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딱 한번 올라가 보았는데 아주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주일 전부터 아침마다 학교 운동장을 열 바퀴씩 뛰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에 대하여는 쿠알라룸푸에 가시면 말레이시아 최고의 가이드가 있어 자세하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우선 궁금하신 것 있으시면 질문을 받겠습니다.”
“인사말 한가지 알려주시죠”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를 여기말로 하면 ‘아빠까바‘입니다. 그런데 그냥 ’안녕하세요‘ 해도 됩니다. 여기사람들 우리말 중 ’안녕하세요‘ 등 몇 가지는 기본적으로 압니다. 바로 한 달 전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겨울연가‘의 TV 방영이 끝났습니다. 우리는 한류(韓流)라고 합니다만 여기서는 젊은이고 학생이고 ’겨울연가‘를 못 본 사람은 왕따를 당하는 형편이구요, 겨울연가 CD 10만장이 동이 났다고 합니다.”
차창 밖은 어둠 속에 묻혀 전혀 예측이 안되고 버스의 전조등이 비치는 아스팔트위로만 날 곤충들이 보이는데 가이드는 말레이시아 부는 한류(韓流)바람이 신나는지 침을 틔기며 열변을 토한다.
“ 지난 5월 이곳 말레이시아의 실권자인 마하티르(Mohamad Mahathir) 수상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다시 한번 ‘LOOK EAST' 하며 특히 ’KOREA"를 배우자고 외쳤고 월드컵의 4강신화와 붉은 악마의 활약상이 그대로 TV로 전해지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이곳사람들의 호감도가 엄청 높아졌습니다. 저녁을 드신 식당에서 서브하는 아가씨의 인기가 덩달아 높아져 한국식당에서 일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형편입니다.”
가이드는 계속해서 이곳 사바 주에 있는 ‘오랑우탄보호구역’, 말레이시아 이슬람의 ‘결혼제도’,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원목을 벌목하여 만든 ‘보루네오가구’등 끝없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길은 꼬부랑 꼬부랑 거리고, 계속 오르막길이고, 더구나 차량들이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좌측통행을 하니 커브 길에서 앞에서 오는 차가 마주칠 때면 차가 충돌하는 것 같아 아찔아찔하다. “이제 한 10분 정도만 가면 로즈가든에 도착하게 됩니다. 말레이시아는 약 300년간 영국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도가 영국식이고 지금도 영어가 공용어를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사람들은 말레이시안 원주민, 화교, 인도인이 섞여서 살지만 기본적으로 누구나 영어를 합니다. 호텔에 로즈가든은 중국사람이 경영하고 있습니다만 영어가 가능하니 영어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버스에서 내리니 아늑하고 조용한 2층 목조건물이 다가온다. 외부에 설치한 등마다 갓을 씌워 간접조명을 한데다가 주변이 모두 어둠 속에 잠겨 외딴섬에 서 있는 등대에 서 있는 기분이다. 마당에는 버섯모양의 지붕을 한 2-3인이 쉴 수 있는 휴게시설이 보이고 주위의 꽃들은 갑작스런 밤 손님에 놀랐는지 어쩔 줄을 모르고 더 붉어진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바로 호텔 카운터가 있고 맞은편에 넓은 식당이 보이고 주방이 왼쪽 계단에 옆에 오픈 되어 있다. “객실 배정을 하는 동안 이번 여행기간 중 생일을 맞이하는 회원들을 위한 합동 축하행사가 있겠습니다. 오늘 생일이신 손점숙 회원님, 그리고 29일날 생일이신 권미자 회원님과 신랑께서는 같이 앞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회계를 담당한 한병선 회원이 코타 키나바루 슈퍼에서 준비한 생일용 케잌과 샴페인을 앞에 놓고 전 회원이 둘러앉았다.
“두 분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회원들의 축복 속에 맞는 생일이기에 더 뜻이 있지 않은가 생각이 됩니다.”
회장님의 축하인사에 이어 생일축하 노래가 퍼지고, 주인공들이 케잌을 함께 자르고, 촛불을 불어 끄고, 샴페인을 터트렸다. 이어서 이종상 회장께서 로칼가이드 ‘미키’와 호텔 로즈가든 사장에게 미리 준비한 월드컵홍보용 명함집과 우편엽서를 선물로 주자 두 사람은 미쳐 생각하지 못한 일인지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좋아한다. 객실배정을 받아 키를 받아 나누어주려고 돌아서려는데 여사장이 양주 한 병을 손에 쥐어 준다.
“여러분 잠깐만! 로즈가든의 사장님께서 우리들 선물에 대한 답례로 양주 한 병을 주셨습니다. 내일 산행을 앞두고 한잔의 뜻이 있는 분들은 짐 정리를 하시고 바로 1층 식당으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부가 배정 받은 217호실 문을 여니 큰 침대가 셋이 나란히 뵝고 둘이 앉아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응접 세트 하나, 옷장과 온수 샤워기가 달린 세면장이 설치되어 있다. 뒤 베란다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나가보니 교교(皎皎)한 달빛아래 거대한 산 그림자가 웅크리고 앉아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호텔 로즈가든을 내려다보고 있다. 산허리를 감싼 구름은 마치 소복한 여인이 흰 치마를 두른 듯 하고 달빛에 반사된 정상은 돌아앉아 흰머리를 빗고 있는 여인네처럼 범접(犯接)하기 힘든 모습니다.
‘4000m 이상의 고산(高山)은 누구도 장담을 하지 못하는 어려운 산행입니다. 산에 오르는 회원 각자의 굳은 의지와 하늘의 도움, 즉 좋은 날씨의 도움이 있어야 ......’
떠나올 때 김종순 부총무께서 하신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1층 식당으로 내려오니 회장님을 비롯하여 10여명의 회원들이 로즈가든 사장이 주신 양주를 들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밖으로 나와보니 함종국 회원과 조우봉 회원이 버섯 테이블아래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기분이 어때요?”
“천상의 나라에 온 것 같아요. 정원이 전부 꽃 이예요. 집 주변 사방(四方)이 모두 꽃으로 둘러 쌓여 있고, 너무 시원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깨끗하고 너무 맑아요”
흙 냄새를 맡으며 꽃잎을 만져보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달을 보며 나는 천지간의 존재하는 모든 미물(微物)에게 기원하였다.
“천지신명이시여 우리들 모두는 내일 ‘죽은 자들의 안식처’를 찾아갑니다. 우리 모두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간절한 기원이 하늘나라에 전해졌는지 적도의 밤하늘에 긴 별똥이 대각선을 그리며 남쪽나라로 날아간다. 아마도 우리의 기원에 대한 답이었으리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로즈가든의 밤은 시나브로 깊어만 갔다.
오늘은 가장 깊고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게 해 주소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당신을 떠나 보내야 했던
마리아의 비통한 가슴에 꽂힌
한 자루의 어둠으로 흐느끼게 하소서
배신의 죄를 슬피 울던
베드로의 절절한 통곡처럼
나도 당신 앞에
겸허한 어둠으로 엎드리게 하소서
죽음의 쓴 잔을 마셔
죽음보다 강해진 사랑의 주인이여
당신을 닮지 않고는
내가 감히 사랑한다고
뽐내지 말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했기에
더 깊이 절망했던 이들과 함께
오늘은 돌무덤에 갇힌
한 점 칙칙한 어둠이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과 함께 잠들어
당신과 함께 깨어날
한 점 눈부신 어둠이게 하소서
- 기 도, 이 해 인 -
김호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