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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훤당 김굉필 선생 문묘 종사
조선 중기 사림파들은 군자가 다스리는 유교이상 국가를 실현하겠다는 도학정치를 추구하였다. 성리학적 학맥보다는 도학적 도통을 중시하게 된 것은 그와 같은 맥락에 따르고 있다. 즉, 정몽주를 필두로 해서 김굉필 ․ 정여창 ․ 조광조 ․ 이언적 ․ 이황으로 이어진다는 이른바 도학 정통론에 바탕으로 두었다. 고려 말기에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동방 도학의 시조라고 불렸을 만큼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고려 왕조에 극심한 사회 혼란과 위태로운 국운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쳐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켜 도학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포은은 고려말에 처음으로「주자가례」를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따르고 널리 보급하였다. 그는 당시 불교 의식에 따라 장사지내는 풍속을 따르지 않고, 가묘(家廟)를 세우고 삼년상(三年喪)을 지내는 등 유교 의례를 철저하게 지켰다. 또한 학문과 윤리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 중앙에 5부 학당(五部學堂)을 설립하고 각 지방에 향교(鄕校)를 세웠다.
중종이 즉위하는 반정(1506)이 단행되고 기묘사림은 되풀이되는 사화(士禍) 속에 억울하게 희생당해 침체되어있는 사림의 기상을 북돋우어 주기 위해서, 목숨을 잃은 사림을 복권시키고 정몽주와 김굉필 두 사람을 함께 문묘에 종사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문묘 종사는 성리학을 국가통치 이념으로 숭상하는 조선 사회에서 도학의 정통성을 잇게 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와 연결된다.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1454-1504)이 조선에 처음으로 도학의 실마리를 열어주었고 그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신도비 비문에서 그 정통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려말에는 오직 포은 정몽주 선생만이 이 도를 행하였고, 우리나라 첫 번째 유학자가 되었으며,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선생이 도학의 실마리를 열어 주었다. 비록 높은 지위를 얻어 도를 행하지 않아서도, 또한 미리 책을 저술하여 가르침을 남기지 않아서도, 오히려 한 세상 유림의 으뜸 스승이 될 수 있었고, 도학의 깃대를 세웠다.
麗氏之末, 惟有鄭先生圃隱, 知行此道, 爲海東首儒. 而至我朝, 先生, 實唱發其關鍵焉. 雖其旣不果得立行道, 又未及著書垂敎, 而猶能宗一世儒林, 立斯文赤幟.
중종 12년 8월 7일에 성균관 생원 권전을 비롯해서, 정몽주는 중국 성리학의 학통을 이었고, 김굉필은 끊어졌던 정몽주의 학통을 이어 받았으니,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음 내용은『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 옮겨 보았다.
성균관 생원 권전(權磌)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렇다. “ 신 등이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면, 단군 때로 말하면 먼 옛날이라 다시 그 특징을 살필 수 없으며, 기자(箕子)가 나라를 세우고서야 비로소 팔조(八條)를 시행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 고려 말기에 유학의 종사 정몽주(鄭夢周)가 태어나 성리(性理)를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서, 깊은 가르침을 홀로 알고 선유(先儒)와 절로 맞았으며,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이 당대를 높이 솟아 올렸으며, 부모의 상(喪)을 당해 사당을 세우는 것을 한결같이《가례(家禮)》대로 하였으며, 문물(文物)·의장(儀章)이 모두 그가 다시 정한 것이었으며, 학교를 세워서 유학을 크게 일으켜 이 학문을 밝혀서 후학에게 열어 준 것은 우리나라에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니, 학문은 주돈이(周子) · 정자(程子)에 비하면 참으로 차이가 있겠으나 공로는 주자 · 정자에 비교하면 거의 같습니다. 그 뒤로 얼마 동안 조정과 민간에서 명인(名人) · 길사(吉士)로 일컬을 만 한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만, 도(道)를 자기 임무를 삼아 가만히 멀리 정몽주의 계통을 잇고 깊이 중국 성리학의 연원(淵源)을 찾은 자는 김굉필(金宏弼)이 그 사람입니다.
김굉필의 사람됨은 기국(氣局)이 단정하고 성품과 행실이 닦이고 깨끗하며, 성학(聖學)에 뜻을 돈독이하고 실천에 힘써서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모두 경건하였고, 높이 앉으면 의젓하고 가까이 가면 따뜻하며, 사람을 친절하게 가르쳐서 부지런히 지극한 정성을 보이며, 배우러 가는 자가 있으면 누구에게나《소학小學》·《대학大學》을 가르쳐서 규모가 이미 정해져 있고 절목(節目)에 질서가 있으며, 정치가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서 환난(患難)을 당하였지만, 태연히 처신하여 도탑고 공경스런 공부를 처음과 같이 하여 늦추지 않고 죽을 때까지 밤낮으로 계속하였습니다.
그에게 배운 자는 이 학문에 근본을 얻어 듣고, 그를 만난 자는 이 사람의 행동거지를 존경하였으며, 지금에 학자가 그를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생각하여 덕행을 귀하게 여기고 문장과 예술을 비천하게 여기며, 경전을 존중하고 이단(異端)을 억제할 줄 알았으니, 전하께서 좋고 나쁨을 밝히고 장점과 약점을 살펴서 기강을 정돈하고 습속을 장려하시는 것이 실로 김굉필의 영향력 덕택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혜택을 입은 자는 온 세상이 다 같은데도, 이 두 사람에 공로를 아는 자는 온 세상에 거의 없으니, 지금이 전하께서 송나라 황제 이종이 펼친 옛일을 다시 일으키셔야 할 때이며, 전하께서 공경함으로 어진 사람을 높이고 진실함으로 학문을 숭상하여 운수가 융성하고 도(道)가 밝아질 바로 그때인데, 도리어 이 두 선비는 아직도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 안유(安裕)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조정에서 법을 훼손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풍속을 순화하고 사습(士習)을 개신하는 것이 이 한 일에 달려 있는데,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신 등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춘추(春秋)가 부성(富盛)하고 치평(治平)을 꾀하는 데에 성의를 기울이시어 바야흐로 유신(維新)의 교화가 일어나는데, 도리어 송나라 황제 이종(理宗)이 펼친 한 가지 일에 미칠 수 없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작은 틈이라도 들어오는 광명(光明)을 넓히고 강건(剛健)으로 결단하여 어명을 발하여 특별히 윤허를 내리시어, 정몽주 ·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게 하여 우리나라에 만세토록 이어갈 도학(道學)의 중요함을 밝혀서 이 백성이 으뜸으로 삼아 따를 바가 있는 줄 알게 하소서. 그러면 이 학문에 다행하고 사림(士林)에게 다행할 것입니다.”【소(疏)는 권전(權磌)이 지었다.】
사신은 논한다. 당시에 학자가 흔히 조광조(趙光祖)의 무리를 사모하여 이학(理學)을 숭상하고 사장(詞章)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처음으로 학문하는 어린 사람 중에도 그의 이름을 사모하여 글을 읽지 않고 마치 참선(參禪)하듯이 하루 종일 단정히 무릎을 꿇어앉아 있는 자가 있으므로 사장(師長)들이 다 가엾게 여겼으나 감히 그 폐단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권전(權磌)이 조광조의 무리와 교유하고 성균관에서 수업한 때가 있어서 조금 성리학의 문호(門戶)를 알고 힘써 고론(高論)을 숭상하였으므로 동료 중에서 명망이 가장 중하였는데, 그 용모가 못나고 마음이 좁고 행동이 괴이하여 사람들이 흔히 그가 간사한 줄로 의심하였으나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였다. 홍문관(弘文館)이 김굉필(金宏弼) 등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니, 권전이 그 말에 따라 앞장서 주장하여 상소해서 청한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니, 전교하기를, “너희 상소의 뜻을 보건대, 정몽주 ·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여 우리나라에 만세토록 이어갈 도학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니, 너희 뜻이 가상하다. 너희 상소를 조정(朝廷)에 의논하라.”하였다.
당초에, 생원(生員) 안처겸(安處謙) · 안정(安珽) 등이 성균관 안에 들어가서 맨 먼저 정몽주 · 김굉필을 종사할 것을 주장하여 그날로 의논을 정하려 하였으나, 유생(儒生)들이 ‘정몽주는 부끄러울 것이 없겠으나 김굉필은 두드러진 일이 없으므로 문득 논의할 수 없으니, 차차 듣고 보아서 의논해야 하겠다.’ 하여, 다들 불쾌한 기색을 품으므로 안정(安珽) 등이 감히 강제하지는 못하였으나 크게 화를 내고 공손하지 않은 말을 하였다. 그 뜻은 김굉필을 종사하게 해서 그것을 빙자하여 당(黨)을 세우자는 데에 있었는데, 처음부터 정몽주를 위하여 계책을 세운 것은 아니다.
그 뒤에 며칠이 지나도 의논이 정해지지 않고, 성균관 유생들이 서로 말하기를 ‘종사 여부는 조정에 달려 있는 것이고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의논이 순연하지는 못하나 상소하는 것이야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상소하였는데, 이것은 대개 안정 등이 홍문관의 한 두 시종(侍從)의 풍촉(諷囑)을 듣고서 한 것이다.
成均生員權磌等上疏, 其略曰:臣等謹按, 臣等竊念, 惟我東方, 若檀君之世, 洪荒遠矣, 不復徵也, 箕子肇封, 僅能施八條而已。 惟幸皇天眷佑, 廼生儒宗鄭夢周於麗季, 硏窮性理, 學海淵博, 默會奧旨, 暗合先儒。 忠孝大節, 聳動當世, 制喪立廟, 一依《家禮》。 文物、儀章, 皆其更定, 建學設校, 丕興儒術, 明斯道、啓後學, 東方一人而已。 比學周、程, 誠亦有級; 比功周、程, 殆有同焉。 爾來若干年間, 朝著、委巷, 名人、吉士, 豈無可稱者? 然其爾自任, 隱然遠紹夢周之緖, 深究濂、洛之源者, 有若金宏弼其人也。
宏弼爲人, 氣局端方, 性行修潔。 篤志聖學, 勉力踐實, 視聽言動, 敬無不在, 危坐儼然, 卽之溫然。 敎人諄諄, 藹見至誠, 有就學者, 莫不先之以《小學》、《大學》, 規模已定, 節目有倫, 遭世政亂, 間關患難, 處之怡如, 篤敬做功, 如初不弛, 以日以夜, 死而後已。 游其門者, 得聞斯道之柸樸; 承其顔者, 仰慕斯人之風儀。 今之學者, 擬爲山斗, 尙知其有以貴德行, 而賤文藝; 尊經術而抑異端, 殿下之欲以明好惡、審取捨, 整頓綱紀、宣揚風化者, 實繇宏弼之力也。
然蒙斯二人之澤者, 擧世皆同, 而知斯二人之功者, 擧世蓋寡, 此正殿下擧淳祐故事之秋也。 殿下尊賢以敬, 崇學以誠, 運盛道明, 惟其時也, 而顧此二儒, 尙未與於薛聰、崔致遠、安裕之列, 聖朝虧典, 莫斯爲甚。 醇風俗, 新士習, 在此一擧, 臣等未知殿下以爲何如也。
殿下春秋鼎盛, 銳意圖治, 方將興維新之化, 而顧不能有及理宗之一事乎? 惜乎! 理宗, 尊濂、洛、朱、張, 而黜王安石, 可謂有能好人、能惡人之仁矣。 而權姦迭用, 乃有眞德秀、魏了翁之賢, 而不能師。 是, 見賢而不知賢; 見不賢而不知不賢之闇者也, 尙奚足爲殿下陳之哉? 伏惟殿下, 廓容光之明、決乾剛之斷, 渙發玉音, 特賜允可, 使夢周、宏弼, 得從祀文廟, 明東方萬世道學之重, 而庶斯民, 知有所宗也, 斯道幸甚, 士林幸甚。【疏乃權磌製也。】
【史臣曰: “當時學者, 多慕趙光祖輩, 崇尙理學, 不貴詞章。 初學小子, 亦慕其名, 不讀書, 終日端坐, 如參禪者有之, 師長皆病之, 而亦不敢矯其弊。 磌與光祖輩交游, 時居泮宮修業, 稍識理學門戶, 務尙高論, 在儕輩中名最重, 然其容貌怪陋, 心隘行詭, 人多疑其邪譎, 而不敢指言。 弘文館請將金宏弼等從祀文廟, 磌因其言, 首倡上疏請之。”】
疏入, 傳曰: “觀爾等疏意, 欲以鄭夢周、金宏弼, 從祀文廟, 明東方萬世之道學, 爾意可嘉。 當以爾疏, 議于朝廷。”
初, 生員安處謙、安珽等入館中, 首以鄭夢周、金宏弼從祀事倡之, 欲於其日定議, 諸生以爲: “夢周則可無愧矣, 宏弼則無顯顯之事, 不可遽論, 徐當聞見議之。” 皆懷不快之色, 珽等不敢强之, 大有忿然不遜之辭。 其意乃在從祀宏弼, 藉以樹黨, 而獨擧宏弼, 則人無信服者, 故不得已兼擧夢周, 初非爲夢周, 而設計也。
後數日, 議猶未定, 館中諸生相謂曰: “從祀與否, 在朝廷耳, 非吾等之所知也。 議雖不純, 上疏何害?” 至是上疏, 蓋珽等聞弘文館一二侍從之諷囑, 而爲之。
중종 12년(1517) 8월8일에 조강(朝講)경연 자리에서 이 상소를 읽고 김굉필 문묘종사에 관해 논의하였다.
중종이 말하였다.어제 태학생 상소를 보니, 정몽주 ․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이다. 종사할 수 있는 사람이 문묘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옳지 않으며, 종사받지 못할 사람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도 또한 옳지 않다. 우리나라 도학이 밝지 않아, 이전에도 말한 자가 있었고, 지금 태학생의 상소도 이와 같으니, 의론하는 것이 옳겠다.
정광필이 말하였다.신의 자제도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전수받은 자가 있었고, 그 사람이 품은 뜻이 지극히 바르고 실천이 독실하니 포상하는 일을 망설여서는 안 되지만,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의논해서 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조광조가 말하였다.김굉필처럼 품은 뜻이 지극히 바르고 실천에 도가 있는 사람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정광필이 말하였다.선대에 유학자에 비하면 학문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널리 의논해서 해야 합니다. 조광조가 말하였다.송나라 유학자가 이미 성현들이 드러내지 못하였던 것을 최선을 다하여 남김없이 드러냈으니, 크게 어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지라도 학문을 떨치는 일은 참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한 때에 사림이 왕의 보좌가 될 만한 재주라고 일컬었으니, 그 사람을 알 만합니다.
검토관 기준이 말하였다.우리나라는 도학이 밝지 못하여 인심이 흐려졌는데, 고려 말기에 오로지 정몽주가 빼어나게 태어나서 성리학의 종장이 되어 그 연원을 조금 열어 놓았고, 우리 조선에 있어서는 사림의 풍습이 비천하여 나아갈 바를 몰랐는데, 김굉필이 젊어서 김종직에게 수학하여 문호(門戶)를 조금 알고, 스스로 송나라 유학자들이 남긴 실마리를 얻어 그 규모를 극진히 하였고, 본성을 지키고 살피는 수양 방법과 실천함이 바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와 같았으니, 학문을 떨치는 일은 못하였지만, 평소에 올바른 도를 닦은 공적은 지극히 컸고, 그 뒤로 사람이 이 사람을 사모하여 선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다투어 본받았다. 다행히 크게 유위한 사림이 그 사이에 나와서 이 사람이 바른 도를 닦는 것을 본받는다면, 성리학을 도운 공적이 참으로 작지 않을 것이며, 학문을 떨치지는 못하였더라도 후학에게 훌륭한 혜택을 입힌 공이 지극할 것 입니다. 그러므로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단연코 망설일 것이 없습니다.
헌납 민수원이 말하였다.김굉필은 지극히 바른 사람이니 그 학문이 순수하게 바르고 본성을 지키고 살피는 수양 하나 하나가 경건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또한 생각해 알 수 있습니다. 근래 인심이 퇴폐하여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혹 성리학에 뜻을 두어 이 도를 밝히고자 하는 자가 있는 것은 모두 김굉필 이룬 힘입니다.
조광조가 말하였다.김굉필이 마땅한 때를 만나지 못하여 인의 도덕에 뜻을 품고서 자기 몸을 바르게 하였을 따름이지, 한 때 수업한 사람은 다만 목표를 알았을 뿐이지 깊은 뜻을 몰랐으니, 누가 김굉필과 성리학을 논변하였겠습니까? 품은 뜻이 바르고 본성을 지키고 살피는 수양이 옛 사람과 저절로 맞았습니다. 전하께서 사정을 헤아리어 문묘에 종사하도록 한다면, 아랫사람 모두가 뜻과 사기를 격앙시켜 그 품은 뜻이 바르게 된 것 입니다.또 아뢰었다.「소학」은 인륜이 일상생활에 쓰이는 일이 갖추어져 있어 가르치고 나아가게 하는 방법으로는 이 책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 근래 습속이 거칠어서 이것을 읽지 않는다. 가끔 이것을 배우는 자가 있더라도 부모와 형제들 모두가 화근의 모태가 된다고 하여 말리니,「소학」이 훌륭한 책이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반드시 말리려는 까닭은 세상에서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재상들이 한번 연산군을 폐위한 반정을 겪은 뒤부터, 모두 일시적으로 편안하려는 마음을 품어, 자제들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습속에 거슬리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니, 기상이 날로 흩어져 다시 떨치지 못하였다. 만약에 사표가 될 사람이 그 사이에 태어나서 최선을 다해서 교도하는 방법을 가르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중략).
또 아뢰었다.정여창 김굉필의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고, 성삼문 박팽년도 아울러 의논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크게 공정하고 지극히 바른 뜻입니다.(중략)
대간 승정원에서 문묘 종사의 일을 거듭하여 논의하였으나, 정광필이 불가하다고 하고, 중종도 그렇게 여겼다. 대간이 이전에 일을 논의하였지만 윤허하지 않았다.
上曰;昨見太學生上疏, 鄭夢周 金宏弼從祀文廟事也. 可祀之人, 不入於文廟, 不可. 不可祀之人, 祀於文廟, 亦不可, 東方道學不明, 故頃者亦有言之者, 今太學生之疏如是, 議之可也. 光弼曰;臣之子弟, 亦有受業於宏弼者. 其人物所趨至正, 踐履篤實, 褒賞之事, 不可持疑也. 從祀文廟, 議之至當.
光祖曰;所趨至正, 行己有道, 如宏弼之人, 不易得也.光弼曰. 比之先儒, 無發揮聖經之事 , 配享文廟, 宜廣議而爲之.光祖曰;宋室名儒, 已發 先聖之所未發, 極盡無餘, 則雖大賢, 生於此世, 發揮聖經, 固不可爲也. 一時士林, 以王佐之才稱焉, 可知其人也.
檢討官奇遵曰;吾東方理學不明, 人心貿貿, 而高麗之末, 惟夢周珽生, 爲理學之宗, 稍開之源. 逮乎我朝, 士習卑汚, 不知所向, 而宏弼少受業於金宗直, 稍知門戶, 自得宋儒之餘緖, 極盡規模, 其動靜施爲, 直與程 ․ 朱一體, 雖不發揮聖經, 其居家修正之功, 至大. 厥後, 士林思想斯人如養心. 爭慕效之, 幸有大有爲之士, 出於其間, 法斯人修正之道, 則其爲翼斯文之功, 誠不細矣. 雖不發揮聖經, 其嘉惠後學之功, 至矣則從祀廟廷斷無疑矣.獻納閔壽元曰;宏弼, 至人也. 其學術醇正, 一動一靜, 不離乎敬, 則亦可想見. 近來人心頹靡, 不志於學問, 或有於理學, 欲明斯道者, 皆宏弼之力也.
光祖曰;宏弼不遇當時, 懷仁義, 抱道德, 以正其身而已, 其一時受業之人, 但知向方, 未知蘊奧, 則誰與宏弼, 抗論性理之道哉? 所趨至正, 其動靜, 暗合古人. 自上斟酌, 而從祀廟廷, 則下人皆激昻志氣, 其所趨亦正矣.又曰;「小學」之書, 人倫日用之事具備, 而誘掖勸進之道, 無踰于此書. 近來習俗偸薄, 專不讀之, 間有學之者, 父兄皆以爲禍胎而沮之. 非不知「小學」之美, 而必止之者, 恐不得見容於世也. 今之宰相, 一經廢朝之後 , 皆懷姑息之心, 敎子弟, 必曰. 勿爲忤俗之事. 氣象日至於渙散, 而不復振矣. 自近年以後, 士習稍稍興起, 而若有師表之人, 出於其間, 極盡誘掖之方, 則皆不美哉?(中略)
大臣, 而成三問, 朴彭年, 亦幷議之, 此, 大公至正之意也.(中略)
臺諫 ․ 侍從以廟見事, 反覆論啓, 光弼以爲不可. 上不亦可以爲然. 臺諫又論前事, 不允.
다음해 중종 13년 4월 28일에 사림의 습속을 바로잡을 것을 논의하면서, 다시 한훤당을 문묘종사에 관해 논의하였다.
조광조가 말하였다.김굉필 같은 사람은 비록 당시에 벼슬은 하지 못하였지만, 지금의 선비들이 그의 풍문을 듣고 선행을 하려는 자가 또한 많으니, 이것은 모두 굉필의 영향력입니다. 그 사습(士習)의 원기가 그에게 힘입어 이같이 보존되었습니다. 굉필은 비록 조정에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그 영향력을 숭상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당시에 포부를 펼칠게 하였다면, 그 공효를 어찌 우연이라 하겠습니까? 선행을 하는 선비는 몸을 가다듬기에 게을리 하지 않고, 남들이 자신을 그르게 여길까 염려하여 감히 불선(不善)을 하지 못합니다. 그 사이에 바르지 않은 마음을 품은 자가 선인(善人)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마음에 원한을 쌓아 두고 있었으니, 만약 하루아침에 그 원한을 풀게 되면 사림(士林)의 화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김종직은 처음 길재(吉再)에게 수업하였으니, 길재는 곧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입니다. 그러니 종직이 전업(傳業)한 연원(淵源)은 실로 그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조금이라도 선행을 할 줄 아는 자는 그의 문하에서 수업한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선한 사람들끼리 서로 어울리므로 자연 도(道)가 같아져 서로 추천한 것은 당연한 것인데, 승건은 쓰기를 ‘서로 추천하며 하나의 당을 만든다.’고 하였으니, 자신의 영리를 일삼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서로 무리를 짓는 것을 당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김종직 같은 무리는 공평한 마음으로 협력하며 더불어 선행을 하려 했는데, 승건이 이와 같이 썼으니 통탄할 일입니다.
사신은 논한다. 김굉필(宏弼)은 근세에 대유학자이다. 그 평생에 처신과 학문이 한결같이 정자(程子)·주자(朱子)로 지표를 삼고 성학(聖學)에 전심하여 업적이 몹시 높았으며, 본성을 지키고 살피는 수양이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이 중도의 규범을 지켰다. 처음에는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수학하였는데 종직 또한 당세에 이름난 유학자였다. 그러나 김종직의 학문은 문장에 치우치므로 굉필은 그를 마음속으로 꺼리다가 즉시 버리고 성학에 전심하였는데, 연산조 때 임사홍이 그것을 위선(僞善)이라 하여 살해하였다.
光祖曰: “如金宏弼, 雖不顯仕於一時, 然今之士子聞其風, 而欲爲善者亦多, 此皆宏弼之力也。 其士習之元氣, 賴而猶存如此。 宏弼雖未登揚於朝廷之上, 而尙流其餘風。況若設施於一時, 則其效豈偶然哉? 爲善之士, 飭勵不弛, 恐人之非己也, 而不敢爲不善也。其間有不公之心者, 忌善人之不與己也, 積憤怨之心, 一朝若發其憤怨, 則士林之禍必極矣。爲善之士, 亦非不知有禍, 但恃聖明在上而已。 然勢甚孤弱, 恐主上一回所向, 則將必有廢朝慘酷之禍也。(中略)
金宗直初受業於吉再, 再卽鄭夢周之門人也。宗直傳業淵源, 固有自矣, 在今稍知爲善者, 受業於其門者也。 其時善人, 以類相從, 自然道同, 互爲推薦, 固也, 而承健書曰: ‘互相吹噓, 自作一黨。’所謂黨者, 營身謀利, 相與爲徒, 則曰黨, 可也, 如金宗直之徒, 公心協力, 相與爲善, 而承健所書如此, 痛矣。
史臣曰; “宏弼, 近世大儒也。平生處身學問, 一以程、朱爲法, 潛心聖學, 所得甚高, 一動一靜, 無或悖違, 周旋中規, 折旋中矩。 初學於金宗直。 宗直亦一時名儒, 其學頗拘於文章, 宏弼心嫌焉, 卽棄而乃專意於聖學。 廢朝時, 任士洪以爲矯行而殺之。
중종 12년(1517)에 정몽주는 단독으로 문묘에 종사 받을 수 있었지만, 김굉필 문묘종사는 당시 공신과 외척 사이에서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들이 중앙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이황 ․ 기대승 등에 의해서 국론으로 통일되기에 이르렀다. 선조 3년(1570)부터 광해군에 문묘종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성균관 유생들은 연중행사처럼 조선 오현 문묘종사를 건의하였다.
선조 38년(1605)에 임진왜란 때 화재로 불탄 성균관 문묘가 재건되면서, 문묘종사 건의는 더욱 빈발해졌다. 이때부터 성균관 유생뿐만 아니라, 전국 유생들까지 가세하였다. 선조 뒤를 이어받은 광해군은 정통성이 약한 군주였다. 정권유지를 위해서는 사림의 지지를 얻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광해군 2년(1610) 9월 5일에 성균관과 전국 각 도 유생들이 계속해서 상소를 올려 한훤당은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1450-1504)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 ․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 ․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과 더불어 조선 오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종사 받았고, 한훤당이 조선 오현에 첫머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광해 33권, 2년(1610)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9월 5일(정미) 7 번째 기사
광해 2년(1610년) 9월 5일에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 조광조(趙光祖) · 이언적(李彦迪) · 이황(李滉) 다섯 현인을 문묘 종사하는 일로서 교서를 내리다.
“하늘이 큰 현인을 낸 것은 우연치 않은 일로서, 이는 실로 소장(消長)하는 기준에 관계되는 것이다. 덕이 있는 자에게 영원한 종사를 베풀어야 함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일이니 존경해서 보답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반포하여 의지해서 따르게 한다.
우리 동방을 돌아보건대 나라가 변방에 치우쳐 바른 학문에 근본 뜻을 전수받은 일이 드물었다. 기자(箕子)에 의해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가르침이 펼쳐져 예의의 방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라 시대에 뛰어난 인재들도 문장에 치우치는 습속을 벗어나지 못했고,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천 년 동안에 겨우 포은 정몽주 한 사람을 보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리 역대 임금께서 거듭 인덕(仁德)을 베푸시는 때를 만나 참으로 문명을 진작시키는 운세를 맞게 되면서, 김굉필 · 정여창 · 조광조 · 이언적 · 이황 과 같은 다섯 신하가 나오게 되었는데, 이들이야말로 중국 성리학 정통을 확립한 학자들이 전승한 것을 터득하고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을 이룩한 이들로서 그 법도가 매한가지이니, 의심하고 비판하는 무리들을 그 누가 끼어들게 할 수 있겠는가. 포부를 펼치고 못 펼치는 것은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 가령 한 시대에 굴욕스러운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옳고 그릇됨은 저절로 정해지는 것이니, 어찌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만 알려지겠는가?
오로지 이황을 보더라도 명종과 선조에게 인정을 받은 현신(賢臣)으로서, 뜻은 중국 고대 삼대 국가를 만회하려는 데 있었는데, 그의 주장과 가르침을 보면 실로 ‘해동에 주자’ 라고 할 만하고, 잘못을 바로잡고 바르게 경계시킴을 올린 것은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내리는 일은 융성하게 거행했지만, 단지 문묘 종사하는 일만은 미처 행할 겨를이 없었다.
정덕(正德) 중종 1년(1506년)때에 처음으로 종사하자는 유생과 신하의 요청이 있었는데, 그 뒤에 선왕 선조께서 즉위하신 초엽부터는 수많은 사림들에게 기세높은 문장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그 조치를 경솔하게 취하기가 어려워서 그렇게 하신 것일 뿐이니, 어찌 높이고 숭상하는 것이 지극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야 있겠는가.
내가 왕위를 계승함에 이르러 그들과 같은 시대에 있지 못함을 한탄하며 전해 내려오는 모범이 나에게 있어 주기를 바랐으나, 저승에서 다시 일으킬 수 없는 것을 어찌 하겠는가. 이에 문묘에 종사하여 제사를 받들면서 영원토록 사표로 삼게 하는 동시에, 40년 동안 고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응답하고 천만 세에 걸쳐 태평의 기업을 열 수 있도록 하리라 생각하였다. 이는 대체로 이만큼 기다릴 필요가 있어서 그러했던 것이니, 어찌 하늘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렇게 하겠는가.
이에 금년 9월 4일에 증(贈) 의정부 우의정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 증 의정부 우의정 문헌공(文獻公) 정여창 , 증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 증 의정부 영의정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 증 의정부 영의정 문순공(文純公) 이황 다섯 현신을 문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종사하기로 하였다. 아, 이로써 보는 이들을 우뚝 솟아 올리고 새로운 기상을 진작시키려 하는데, 이 나라에 어진 대부들은 그 누구나 모두 현인을 벗으로 삼는 마음을 가질 것이고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영원히 아름다운 본보기로 삼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이에 교시하는 바이니, 모두 잘 이해하리라 믿는다.”
【대제학 이정구(李廷龜)가 지어 올렸다.】
이정구(1564년-1635년)은 조선 중기에 한문학에 대가로서, 신흠 · 장유 · 이색과 더불어 4대 문장가로 손꼽힌다.
○從祀 金宏弼 、 鄭汝昌 、 趙光祖 、 李彦迪 、 李滉 等于文廟, 下敎書曰:
天之生大賢也不偶, 實係消長之機; 德必得常祀而無疑, 宜擧崇報之典。 玆用播告, 俾有依歸。
稽我東國之偏荒, 罕傳正學之宗旨。 箕 疇布敎, 雖識禮義之方; 羅 代蜚英, 未免詞藻之陋。 迄至 麗 季千載, 僅見 圃隱 一人。
洪惟祖宗熙洽之辰, 允屬文明振作之運, 有若 金 、 鄭 、 趙 、 李 五臣者出, 眞得濂洛關閩諸子之傳, 格致誠正之功, 其揆一也, 讒謟媢嫉之輩, 誰使參之? 窮通有時, 縱負一世之屈, 是非自定, 何待百年而知?
惟 滉 也, 遭遇兩朝, 其志則挽回三代, 立言垂訓, 實是海東之 考亭 , 格非獻規, 不愧 河南 之 程氏 。 肆竝隆爵謚之贈, 顧未遑俎豆之儀。
在 正德 紀元, 始有儒臣之陳請, 自先王初服, 屢見多士之抗章, 惟其擧措之難輕, 豈云尊尙之不至?
逮予纘緖, 恨不同時, 尙有典刑, 奈九泉之難作? 其從與享, 庶百世以爲師, 爰答四十載顒望之情, 擬啓千萬世太平之業。 蓋有待而然也, 庸非天而誰歟?
玆於本年九月初四日, 以贈議政府右議政 文敬公 金宏弼 、贈議政府右議政 文獻公 鄭汝昌 、贈議政府領議政 文正公 趙光祖 、贈議政府領議政 文元公 李彦迪 、贈議政府領議政 文純公 李滉 等五賢臣, 從祀于文廟東西廡。 於戲! 聳動觀瞻, 作新氣象, 是邦大夫, 賢者孰無尙友之心, 吾黨小子, 斐然永存矜式之地。
【大提學 李廷龜 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