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 詩] 9월호에서>
(기획연재) 시로 쓰는 四季 5
홍천강의 가을과 비닐꽃
정 호
일기예보에 태풍이 북상한다고 난리다. 태풍이 무서운 것은 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바람과 함께 양동이로 내리퍼붓듯 쏟아지는 폭우 때문이다. 여름장마 때의 비와는 그 격이 다르다. 장마 때의 홍수래야 기껏 제방이 무너지거나 저지대 농작물의 침수가 고작이다. 그러나 태풍 때의 홍수는 가옥이 침수되고 농작물이 유실되고 나무가 뿌리째 넘어지고 도로가 잘려나간다. 인명피해도 장마 때보다 훨씬 크다. 몇 년에 한번 꼴로 태풍 때 수도권에서는 한강 둑이 넘친다고 난리법석을 떨기도 한다. 같은 양의 비일지라도 장마는 여러 날에 걸쳐 내리지만 태풍 때는 불과 하루 이틀만에 집중호우로 내리퍼붓기 때문이다.
내가 자신있게 한번 해보고 싶은 직업이 충주댐관리소장이다. 여주일대의 남한강이 물에 잠기느니 할 때, 한강물은 넘쳐나고 만조시간이라 한강하류의 물은 빠지지 않는다고 우려할 때, 충주댐은 넘쳐나서 단양쪽이 침수된다고 난리고, 그런다고 충주댐을 방류하면 여주와 이천 일대가 침수된다고 난리통일 때, 나는 왜 치수를 저 모양으로밖에 못하는지 울화통이 터진다. 내가 충주댐을 관리한다면 충주댐 상류의 침수도 충주댐 하류의 홍수도 결코 일어나지 않게 할 자신이 있다. 적어도 요즘처럼 기상관측이 정밀한 세상에는 말이다.
잘 알려진 대로 태풍은 중심 최대풍속이 17m/s 이상이며 폭풍우를 동반하는 열대저기압이다. 북태평양 남서부에서 발생하여 아시아 동부로 불어오는 열대성폭풍이다. 그리고 그 진로도 6,7월에는 서해해상으로 올라오다가 서해안이나 중북부 내륙쪽으로 서서히 방향을 튼다. 8,9월에는 제주도를 거쳐 중부내륙이나 남해안으로 해서 동해로 빠져나간다. 특히 많은 비를 동반한 태풍은 9월5일을 전후한 초가을이다. 태풍 중 위력도 크고 그 피해가 제일 많은 것도 이때의 태풍이다. 특히 이 무렵은 벼가 팰 때라서 꽃가루받이를 제대로 못한 벼는 쭉정이 벼가 되고 만다. 일년농사를 벼에만 의존해 온 농민들에겐 최악의 재앙이다.
그런가 하면 태풍의 영향권에 있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합동으로 태풍의 이름을 알파벳 순으로 미리 만들어 놓고 발생순서에 따라 하나씩 차례로 사용한다. 무시무시한 태풍이지만 한때 그 이름을 부드럽게 여성으로 지어서 화를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차별이라는 여성단체의 항의로 1979년부터는 남성과 여성의 이름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나는 한때 홍천과 서석 쪽으로 탐석여행을 자주 다녔다. 물론 남한강에 비해 석질도 떨어지고 깊은 맛도 덜하지만 그래도 서석 특유의 오돌토돌한 청석질 피부석은 구색용으로 봐줄 만한 것이었다. 1988년부터 탐석일행들과 몇 차례 서석을 찾았는데, 1990년 가을에는 처음 마련한 내 차인 프라이드로 아내와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을 싣고 서석을 드나들었다. 서석 하류 수하리 계곡이 내가 늘 찾아가는 탐석지였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쪽의 물걸리엔 통일신라때의 폐사지가 있다. 이름조차도 알 길 없는 절이지만 석조여래좌상,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불대좌, 광배, 삼층석탑 등 보물(541~545호)로 지정된 유물 5점이 현재는 작은 절 대승사에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어느 초가을날 우리는 물걸리 동구 밖에 있는 한 그루 거대한 밤나무 아래에서 토실토실한 알밤을 되가웃이나 줍기도 했다.
서석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운 나들잇길이었다. 영동고속도로로 원주까지 가서 횡성으로, 횡성에서 서석까지는 50분간 달리는데 갑천 청일을 지나도록 당시만 해도 차량 한 대 마주치지 않는 한적한 길이었다. 그랬기에 막 운전면허를 딴 아내의 도로운전 연수를 하기에는 딱이었다. 서석 지나면 탐석지인 수하리까지는 포장도 되지 않은 도로였다. 서석천은 홍천강의 상류에 위치하는 만큼 물이 맑아서 우리 아이들은 거기서 멱을 감고 놀았다. 유치원에서 막 수영을 배운 아들은 물웅덩이 작은 소에서 헤엄질을 잘도 해대었다.
그리고 한차례 태풍과 홍수가 있었고, 추수무렵이던 10월의 어느날에 서석천엘 갔었는데 홍수 지나간 계곡이었지만 붉덩물을 덮어쓴 흔적만이 계곡을 메우고 있을 뿐 계곡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인간의 개발바람을 타지 않은 자연은 이렇게 자연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큰물이 지나고 나면 돌밭은 뒤집어져서 새로운 수석감의 돌이 발견되곤 한다. 그래서 수석에 미치다시피한 사람들은 홍수가 난 직후엔 얼씨구나, 하고 돌밭으로 달려간다. 홍수가 나면 그 물살에 돌밭이 뒤집어지고, 냇속에 있던 돌이나 돌밭 땅속 깊이 숨어있던 돌들도 물살에 쓸려 돌밭 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물이 휩쓸고 간 지역으로 물이 빠지기 무섭게 탐석들을 간다. 그러나 이때 언행을 아주 조심해야 한다. 홍수피해 복구에 정신없는 현지 주민들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야지 자칫하다간 몽둥이로 두들겨맞기 십상이다. 그래서 홍수로 돌밭이 뒤집어져도 피해복구가 끝날 쯤이나 되어야 물난리 지난 곳으로 탐석을 가곤 했다. 그러나 장소에 따라서는 홍수가 지나고 곧바로 달려가는 곳도 더러 있다. 십여년 전만 해도 나는 홍수가 나던 바로 다음 휴일날 단양의 괴곡 골짜기로 탐석을 가곤 했다. 거기는 골짜기여서 인가도 없고 논밭들도 골짝보다 위에 있으니 농작물의 피해는커녕 주민조차 만날 수 없는 곳이라 맘 편히 탐석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휴일에 갔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돌밭을 다 훑고간 뒤였다. 직장에 매이지 않은 석상(石商)들은 비가 오는데도 계곡 옆에 천막을 치고 있다가 물이 빠지기 무섭게 계곡을 뒤졌기 때문이다. 최상류 골짜기라서 비가 그치면 물은 금방 줄어들기에 궂은 날씨에도 탐석이 가능했던 것이다. 남한강이 충주댐으로 수몰이 되면서 질 좋은 남한강 수석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론 거기 이상은 없었으니까.
큰 태풍이 지나간 어느 해 초가을이었다. 비바람이 한꺼번에 몰아쳤고 서울의 저지대는 침수됐고 한강물이 넘친다고 난리법석을 떨던 다음 주 휴일이었다. 때는 바로 이때다! 하면서 우리 수석회의 회원들은 명석에의 꿈을 안고 홍천강으로 탐석을 갔다. 청평 가평의 북한강을 지나 의암댐을 건너 신동 지나 어유포리에서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을 만났다. 그 전에 작은 개천 하나를 지나는데 이번 태풍홍수에 교각도 무너지고 다리의 시멘트 상판도 떠내려가고 없다. 큰물이 지고 1주일이 지난 후라서인지 냇물은 수량이 줄었고 평소처럼 맑게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승합차를 밀어서 가까스로 개천을 건넜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홍천강변의 노일리 일대는 온통 큰물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도로변 쑥대머리며 달맞이꽃 쑥부쟁이 등 잡초들이 붉덩물을 뒤집어쓴 탓인지 잎들이 희뿌옇다. 그리고 여기저기 초목들에는 온통 폐비닐들이 걸쳐져 있었다. 큰물에 휩쓸려온 폐비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강변에 가까운 산길에 있는 키를 넘는 높이의 아카시아나 밤나무 느티나무 가지에도 흉하게 온갖 비닐들이 걸려있는 것이었다. 주로 검거나 흰 비닐들인데 간혹 붉은, 혹은 노랗거나 파란 비닐도 보였다. 이렇게 높은 산길까지 물이 차오른 것으로 보아 이 계곡도 심한 협곡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 비닐들을 바라보며 아득하게 현기증을 느꼈다. 큰물에 채 휩쓸리지 못해 그냥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것만도 저 정도인데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폐비닐들이 홍수에 떠내려 갔을까. 저것은 빙산의 일각이 아니라 빙산의 만분의 일각일 뿐이다. 홍수 때엔 그냥 떠내려가는 물일뿐이지만 그게 가평댐 팔담댐에 모이면 수자원이 되고, 그게 결국 우리의 식수로 돌아오지 않는가. 우리의 자연은 현대문명의 이기 앞에서, 잡초가 햇빛을 보지 못하게 밭을 뒤덮는 검은 비닐로, 수퍼에서 우유를 담아주는 색색의 바구니로, 라면봉지로 과자봉지로 세제포장지로, 이렇게 양산 되어 유통되는 폐비닐들로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
그러다 나는 이 물난리 지나간 폐허의 현장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흉하게 걸쳐져 있는 비닐들을 꽃 아닌 꽃으로 환치해보는 내 눈엔 고사목에도 울긋불긋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폐비닐꽃이나 피워내고 있는 자신을 떠올렸다. 시답지도 않은 시나 쓰는 내겐 더 이상 봄날이 없을 것이라 예단하며.
태풍 지나간 홍천강 노일리 계곡
비닐꽃 수없이 피었다
모두가 희거나 검은 꽃들이다 간혹
누리끼리한 꽃 푸르거나 붉은 꽃도 숨은 듯 피어있지만
강변 둔치 쑥대머리 달맞이꽃 대궁이며
높다란 미루나무에도 산길 싸리나무 아카시아 가지에도
지천으로 피었다 작년 태풍에 쓰러진 느티나무 가지에도
새 움 돋아나듯 흐드러지게 피었다
집중호우에 병목 같았던 협곡
홍수 지나자
때 아닌 화원이다 물 들어찼던 산중턱까지
만발한 꽃밭이다
벌나비처럼 사람들 몰려들지만
그 꽃내 즐기는 벌나비는 없다
뿌리 뽑혀 말라죽은 팽나무가지에 희부옇게 핀 꽃
(대나무도 100년 만에 꽃피우고는 뿌리째 썩는댔지)
툭, 건드려 본다
묻어있던 꽃가루가 분분분 흩날린다
찢겨져 너풀대는 수많은 꽃잎 바라보며
물난리 다 지나간 나의 꽃철을 떠올렸다 아늑히 짧았던,
이제는 폐비닐꽃 너덜대는 내 잔가지에
더 이상 봄날은 없다
- 拙著 비닐꽃 (다시올문학 2010 가을호에 발표한 시)
첫댓글 홍천 두촌면 지안리에 두촌농원엔 단아하고 반듯한 정수남시인이 있는데 혼자서 삼만평이란 농원을 혼자서 일구고 시를 짓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가면 맛있는 음식과 맨드라미 차를 줍니다. 엊그제 16일에도 홍천에 가는길에 정시인을 만나고 왔지요. 홍천은 물맑고 인심좋은 곳이지요.
후박님은 좋은데 다녀왔군요. 나도 좀 달고 다녀요. ㅎㅎㅎ
可以觀, 그물망 관팔력과 사실적 표현이 볼만합니다.
절호시인의 <비닐꽃>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 한번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제 운전실력으론 귀하신 분들을 모시고 가긴 염려스러워서 연구중입니다. ㅎㅎ
운전실력 자랑 말고 언제나 조심운전 양보운전!!!
안녕하신지요? 기회 되면 저도 두촌면으로 데려가 주실 수 있는지요? 운전은 제가 해도 되는데...
저도 가실적에 데려가 주세요..^^한국에는 비경이 참으로 많다고 알고 있는데요..^^저는 주로 사진으로만 보아서 심신에는 그렇게 좋지는 못합니다.^^무었이든지 직접가서 보는 것도 또다른 감동을 선사 하지요.^^
산수님 방학 때 꼭 한번 가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