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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도올 제5화
1. 차이나는 도올 퀴즈
질문 : 시진핑 주석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시종쉰이 가르쳤다는 논어 속 구절은 무엇일까요?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이 구절은?
대답 :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 자신이 원하지 아니하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
질문 : 선생님, 여자란 무엇입니까?
도올 : 그 책은 자기를 죽이고 항상 양보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이미지가 우리 인간과 우주의 모든 면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여성성을 이해 못하면 동양철학에 들어갈 수가 없다. <여자란 무엇인가>(1986)라는 책은 우리 사회의 혁명적인 인식의 변화를 일으켰다. 저 책은 50만부 이상 팔렸다.
2. 만리장성의 진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쌓았다고 생각한다. 만리장성을 보면, ‘그 옛날에 이렇게 엄청난 만리장성을 쌓았구나.’라고 감탄한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중국을 바라보는 거대한 오류다.
만리장성은 진시황과 무관하다. 진시황이 쌓은 게 아니다. 우리가 모든 역사적 사태를 바라볼 때, 그 실상(實相)을 알아야 한다.
진시황이 장성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미 춘추전국시대의 각 나라들이 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의 많은 부분은 이미 춘추전국시대 나라들이 쌓았다.
이미 제나라의 장성(長城)이 유명하고, 조나라, 한나라, 연나라에 군데군데 장성이 있었다. 진시황 시대에 그것을 연결해서 만리(萬里)정도 쌓은 것이다.
지금은 돌과 벽돌로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토성이었다. 큰 돌을 산꼭대기에 나르기 힘드니깐 벽돌을 구워서 쌓았다. 위치도 지금 자리가 아니었다. 수나라 때 와서 비로소 오늘의 자리가 되었다. 당나라 때도 보수를 거쳤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만리장성은 명나라가 완성한 것이다. 14~16세기에 걸쳐 쌓은 만리장성이다. 진시황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만리장성이라는 역사물 하나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중국을 말할 때 대부분은 피상적으로 말한다.
3. 만리장성을 넘은 청나라 군대
청나라는 동북지역인 만주에서 내려와, 1644년 만리장성을 뚫고, 산해관을 넘어서 명나라를 친다.
산해관(山海關) :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중요한 관문의 하나.
당시 홍타이지가 죽고 동생인 도르곤이 간다. 그때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를 무너뜨릴 적에 누가 옆에 있었는지 아는가?
도르곤(1612~1650, 多爾衰) : 홍타이지의 동생으로 청조를 굳건하게 만든 건국영웅
소현세자가 있었다.
소현세자(1612~1645) :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첫째 아들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인질로 데리고 갔지만 교육을 시킨 것이다. ‘앞으로 너는 위대한 조선의 왕이 될 테니 이런 장면을 보라.’고 한다.
1637년 병자호란으로 청에 항복한 인조. 청나라에 끌려가 9년동안 억류되었던 소현세자. 환국 두 달 뒤 의문사를 당한다.
그 뒤로 청나라는 강희대제 때 엄청난 나라를 만들어 간다.
강희제(재위 1661~1722) : 청나라 제4대 황제
4. 화이지분은 없다!
강희제는 국내 평정을 하고 만리장성에 간다. 신하들은 중원을 정복했으니 이제 만리장성을 보수하자고 한다. 전면적인 보수공사를 하자고 한다.
그러니깐 강희제가 ‘미친 소리 하지 마라.’고 한다. 언제 만리장성 때문에 북방민족이 중국을 못 쳐들어온 적이 있나? 만리장성 보수는 헛 거다. 이런 것이나 수리하느라 국력을 낭비해서 명나라가 망했다. 그리고 내가 여기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까지 분란을 일으켜서 나를 불러들인 것이다. 내가 왜 미쳤다고 만리장성하고 싸우나? 이것은 헛 거다.
이제 대청제국에서 성 밖은 오랑캐가 살고, 성 안은 중화민족이 산다고 하는 화이지분(華夷之分)도 없다.
화이지분(華夷之分) :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
어떻게 성 하나로 밖과 안을 구분할 수 있느냐? 나라가 분리될 수 있느냐? 이런 모습은 중국이 아니다. 이런 곳에 군대를 배치하면, 병력만 분산되고 돈 낭비다. 만리장성 보수로 국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강희대제가 그 당시에 이렇게 외쳤다.
우리나라를 생각할 때도 남북이 아무리 대치하고 벽을 쌓아봐야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국방이 되는 게 아니다. 남북을 화해시키고 벽을 허물어야 한다.
강희대제가 무슨 놈의 장성이냐! 폐장성(廢長城)이라 했다.
우리 민족도 이제는 남북의 벽을 허물고, 평화를 외쳐야 한다. 왜 개성공단을 닫고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대치를 하는가? 이것이 과연 우리 민족이 갈 길인가?
우리가 만리장성을 바라볼 때 진시황만 생각하는데, 진시황하고 장성은 관계가 없다. 지금 남아있는 만리장성은 중국의 허약한 측면을 나타내는 부끄러운 유물이다. 인민들을 고생시킨 흉물이다. 만리장성 축조에 300만 명을 동원하고,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한 200년에 걸쳐 쌓아 올린 것이다.
역사의 실상을 정확히 알아야 중국 문명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혁명을 이해할 때도 모택동, 장개석 등 몇몇의 지도자들을 아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기나긴 중국 역사의 심층을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현재의 중국을 바라볼 적에도 몇 명의 지도자를 아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5. 제7차 당대회
오늘은 2007년 상황으로 들어간다. 이때 제17차 당대회가 열린다.
공산당 전국대표회의(당대회) : 중국공산당의 최고의사결정기관
당 쪽에서 열리는 건 당대회라 하고, 국가 체제의 대표들이 여는 것에는 ‘인민’이란 말이 들어간다. ‘전인대’라고 한다.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 중국 최고의 국가 권력 기관
그럼 당대회와 전인대 중 어느 것이 중요할까? 공산당의 당대회가 전인대보다 훨씬 중요하다. 결정권이 더 크다. 당총서기와 당군사위주석은 10월 당대회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국가주석 자리는 다음해 3월 전인대에서 받는다.
당대회는 2007년 10월, 전인대는 2008년 3월.
그럼 왜 2007년에 열렸던 17차 당대회가 매우 중요하냐?
2007년은 후진타오가 주석으로 있던 기간이다. 이로부터 5년 후가 2012년이다. 2007년 당대회에서 시진핑의 국가주석 내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2012년 시진핑은 명실공히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즉, 차기 주석 자리를 결정하는 자리였기 때문 17차 당대회가 중요했다.
정치국 상무위원 : 2007년 당시 9명 중에서 2012년에 7명으로 줄어
2007년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은 모두 9명이었다. 그런데 2012년이 되면 7명으로 줄어든다. 그런데 여기서 시진핑이 6위로 들어가고, 리커치앙은 7위로 들어갔다.
시진핑 앞에 있던 5명은 다음 번에 은퇴할 나이였기 때문에, 시진핑이 6위로 갔다는 것은 차기 주석으로 결정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17차 당대회 2007년 정치국 상무위원 서열
1위 후진타오
2위 우빵꾸어
3위 원지아빠오
4위 지아칭린
5위 리치앙츠운
6위 시진핑
7위 리커치앙
이런 결정이 날 때 슬픈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 있었다. ‘난 줄 알았는데.’하고 절망감을 가장 강렬하게 느꼈던 한 사람이 있다. 사실 이 사람은 절망감을 느낀 이유도 없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안 될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6. 시진핑 라이벌, 뿨시라이
이 절망감을 느낀 사람이 누구냐? 우리나라 언론에 상당히 공개됐던 사람이다. 바로 뿨시라이(薄熙來)다.
뿨시라이의 키가 186cm였다. 미끈하게 잘 생겼다. 머리가 비상하고, 화려한 언변, 훌륭한 스피치를 자랑한다. 특히 언론사의 기자들이 좋아했다. 대중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지도자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항상 들었던 사람이다.
뿨시라이의 아버지는 뿨이뿨(薄一波)였다.
뿨이뿨(薄一波, 1908~2007) : 뿨시라이의 아버지. 1956, 1965년 국무원 부총리 역임. 문화혁명 때 숙청되었다 복권
시종쉰과 막상 막하의 원로였다. 두 분 다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다.
뿨시뿨의 아들인 뿨시라이는 1949년생이었고, 시종쉰의 아들인 시진핑은 1953년생이었다. 즉 뿨시라이가 4살 위였다. 둘은 한 동네 에 살아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시종쉰과 뿨이뿨는 성격이 다르다. 물과 기름의 사이였다.
뿨이뿨는 공산주의 체제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자기한테 주어진 상황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유소기, 등소평 계열이었다.
유소기(劉少奇, 1898~1969) → 등소평(鄧小平, 1904~1997) → 뿨이뿨(薄一波, 1908~2007)
당연히 문화대혁명 때 이 계열은 숙청당했다. 뿨이뿨도 문혁 이후 고난의 시대를 맞았다. 혹독하게 당했다.
1967년 1월 아버지 뿨이뿨 홍위병에게 잡혀감.
뿨시라이의 어머니 후밍은 강청 계열의 소조에게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1967년 1월 15일 뿨시라이의 어머니는 자살을 하고 만다. 그래서 세 아들이 어머니의 관을 메고 항의를 하려고 했으나, 주변에서 말려서 못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원한과 울분이 찼다.
그래서 뿨시라이는 북경에서 고급 간부 자녀 출신들을 모아서 자체적으로 ‘연동(聯動)’을 조직한다. 그래서 강청 계열의 홍위병과 맞섰다. ‘우리야말로 진정한 홍위병이다!’라며 싸웠다.
그러나 강청 계열에서 이들을 탄압하여 결국 1967년 뿨시라이는 감옥에 들어간다.
1967년 12월 하순 형제가 모두 수감된다. 당시 뿨시융 20세, 뿨시라이 18세, 뿨시청 16세였다. 4년 8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1972년 풀려난 후, 베이징의 공장에서 1978년까지 다시 5년여를 일함.
감옥에 들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정강이뼈가 그대로 보일 정도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맞고, 곪고, 터지고 해서 뼈가 다 들어나는 상황까지 갔다고 한다.
그래서 뿨시라이한테 군역 이야기를 하면, ‘너희들이 문화혁명 때 당한 것은 나에 비하면 약과야!’라고 한다. 자기가 당한 게 얼마나 혹독했는지 이야기한다.
그에 반해 시진핑은 하방을 해서 시골의 인민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런 식의 곤욕보단 훨씬 나은 곤욕을 치루었다. 같은 곤욕이었지만 의미 있는 곤욕을 치루었다.
시진핑의 하방 : 1969년~1976년, 15세~22세까지
시진핑은 인민에 대한 사랑을 배워가고, 뿨시라이는 권력에 대한 원한과 증오를 속에서 쌓여간다.
시진핑은 그 고생을 하는 와중에 공산당 신청을 10번 해서, 11번째 공산당에 들어간다. 그 뒤로 청화대 화학과에 자리가 생겨서 청화대학에 들어간다. 1975년은 문화대혁명 시기였기 때문에 대입시험이 없었다.
1975년 청화대 화학 공정계(化學工程系) 입학.
중국 대학에서 77년은 중요하다. 왜냐? 1977년에 대학 입시가 부활되었다. 그래서 78학번은 최초로 시험을 쳐서 대학에 들어간 엘리트들이다. 뿨시라이와 리커치앙이 78학번이다.
뿨시라이은 북경대 역사학 학사인데, 얼마나 똑똑한지 2년 만에 중국 사회과학원에 들어가서 석사를 마치고 바로 관계로 진출했다. 그리고 계속 성장했다.
1992-2000 대련시 시장
2001-2004 요년성 성장
2004-2007 상무부 부장
특히 상무부(통상부 장관 역할) 부장 재임 시절에 정말 일을 잘했다. 그 당시 중국의 개혁, 개방으로 많은 사절단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수완을 발휘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박수를 많이 받았다.
잘생기고, 당당하고, 세계인들을 향해 큰 소리를 치면서 실리를 추구해서 인기 만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뿨시라이와 시진핑을 바라볼 때, 시진핑은 조신하고, 자기 할 일만 하고, 다소곳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뿨시라이는 잘 생기고, 천성이 튀었다. 여자도 많이 따랐다.
상무부 부장까지 지내고 전도가 창창하던 사람이 왜 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지 못했냐?
7. 대를 이어 엇갈리는 인연
중국인들은 중국 현대사에서 오늘날 가장 중요한 맥을 잇는 인물로 모택동이나 등소평을 생각하는데, 중국은 제일 중요한 인물을 호요방(胡耀邦)이라고 생각한다.
호요방(胡耀邦) : 11, 12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80년대 민주화 시위 진압 거부로 실각.
호요방은 근본이 착한 사람이다. ‘인민의 소리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권좌에 앉은 사람은 양보할 줄 알아야 하고, 인민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한 사람이다.
이 흐름에 결정적으로 쐐기를 박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등소평이다. ‘안 된다. 개혁개방은 되지만 사회주의 원칙을 바꾸는 것은 어떠한 흐름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호요방을 실각시킨 앞잡이가 바로 바로 뿨이뿨였다. 그런데 뿨이뿨가 호요방을 칠 때 유일하게 반대한 사람이 있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호요방의 생각이 옳은데 왜 비판하는가? 호요방에 대한 모든 판결은 부당하다!’고 용감히 일어서서 반대한 유일한 사람이 시종쉰이다. 그러면서 호요방을 지지했던 시종쉰은 다시 권력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리고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다.
1980년대 학생들은 정치개혁과 민주화 요구
호요방, 시위탄압 명령 거부로 실각 후 의문사(1989.4.)
학생들 천안문에서 호요방 추도집회 계기로 민주화 요구 시위
등소평 1989년 6월 3일~4일 인민해방군 동원
무차별 발포로 시위진압
중국 당국 공식 집계 319명 사망
그런데 이 뿨이뿨라는 사람은 체제 변화에 굉장히 충실하다. 그런데 등소평의 심복 뿨이뿨는 실수를 한다.
천안문 사태 이후 장쩌민(江澤民)이 총서기로 부임한다. 장쩌민은 상해파지만, 이념적으로 보수파다. 사회주의 원칙을 지키고, 개혁개방을 너무 서두르지 말자고 주장한다.
이러니깐 등소평이 남순강화를 하면서 개혁개방을 빨리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순강화(南巡講話) : 1992년 등소평이 남방 여러 도시 순회하며 개혁개방을 촉구한 연설
왜 그랬을까? 결국 민중의 함성이 천안문 사태로 터져 나왔다. 그 천안문 사태의 무마를 위해서는 개혁개방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쩌민은 개혁개방에 너무 급히 따라가지 말자고 한다.
그러니깐 뿨이뿨는 ‘아, 이번에는 장쩌민을 치라는 말씀이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쩌민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자 당 원로, 당내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야! 여기까지 치면 난리가 난다. 왜 멀쩡한 사람을 치냐?’고 한다.
그러면서 장쩌민은 빨리 개혁개방의 흐름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고 장쩌민이 힘을 잡으면서 뿨이뿨는 미운털이 박힌다. 게다가 장쩌민 입장에서 뿨이뿨의 아들인 뿨시라이를 좋게 볼 수 없었다. 결국 뿨시라이를 위로 올리지 않는다.
17차 당대회에서 뿨시라이는 사실 기대를 했다. 그리고 시진핑을 어려서부터 봤지만 ‘쟤가 어떻게 나하고...?’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시진핑은 상무위원 6위에 올라가고, 뿨시라이는 탈락한다.
8. 뿨시라이의 와신상담
그리고 뿨시라이는 2007년 중경시 서기로 부임한다.
2007년 12월 1일 중경시 당서기 부임
중경시(重慶市)는 시(市)지만 성(省)보다 위상이 높다. 이것도 대단한 것인데, 뿨시라이 입장에서 보면, 완전한 좌천이었다.
중경시(重慶市) : 북경, 천진, 상해와 함께 중국 4대 직할시. 인구 약 3,090만명으로 4대 직할시 중 가장 많음
이 사람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쓰렸다. ‘내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라고 생각한다. 또 영향을 준 것은 그 해 2월에 아버지 뿨이뿨도 돌아가신다. 그래서 연줄도 다 끊어졌다.
중경에 부임하면서 뿨시라이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완전히 작전을 변경한다. 중경의 서기로 부임하면서 부임연설부터 아주 명문이었다.
“나는 이제 여기서 정의로운 우리 민족의 정도를 구현하겠다.”고 하면서 ‘따헤이(打黑)’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흑을 친다’는 말이다. 흑이 뭐냐? 바로 마피아다. 그러면서 모든 마피아를 조지기 시작한다.
당시 경비일가(警匪一家)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마피아하고 공안경찰이 일가(一家)라는 말이다.
경비일가(警匪一家) : 경찰과 범죄자가 한 집안처럼 친하다.
그래서 시(市) 서기로 부임하자마자, 공안국부터 쳐들어간다. 길거리를 다니는 양아치를 잡아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 국민의 원성을 사던 문강(文强)이란 인물이 있다. 공안국 부국장이었다.
문강(文强) : 전 중경시 사법 국장(검찰총장 역할) ‘범죄와의 전쟁’에서 체포된 최고위급 인사.
이 사람은 어마어마한 트윈 타워라는 별장으로 소유하고 있었고, 연못 밑을 방수 처리하여 돈을 파묻어 두고 있었다.
이때의 수사를 ‘연극성 수사’라고 했다. 수사 자체를 하나의 드라마처럼 만들었다.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Live TV로 방영을 했다. 어떻게 했느냐?
금붕어가 펄떡펄떡 튀는 연못으로 들어가서 현금만 2,000만 위안(36억원)을 마구 건져 올리는 장면을 생방송 TV로 방영한다. 난리가 났다.
당시 시진핑이 아직 등장하기 전이었는데, 사람들이 오랜만에 숨통이 트여서 환호를 하였다. 이것은 시진핑의 ‘반부패’ 정책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2007년 뿨시라이 중경시 당서기 부임
2009년 부패관리척결 ‘반부패’ 정책
2012년 시진핑 당 총서기 취임
2009년 당시 시진핑은 부주석으로 몸을 사리고 말도 조심하고 있었다. 탈 없이 5년만 지나면 주석이 되니깐 조용히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뿨시라이는 중경 시에 가서 전쟁을 했다.
문강을 잡아 중경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재판을 한다. 그리고 1심에서 사형을 판결한다. 그러자 문강은 항소를 한다. 1달 후 2심에서 문강에게 다시 사형을 판결한다. 그리고 1달 후 사형에 처한다.
폭력조직 비호, 뇌물 수수, 여대생 성폭행 혐의로 사형
“우리 시정부는 수많은 인민 군중들과 경제계 기업계의 발전을 위해 깨끗한 정치, 사회 환경을 제공해야 합니다. 타흑 정책은 꼭 필요한 정책입니다.” -뿨시라이
그러니까 ‘우리 성으로 뿨시라이를 보내라!’ ‘뿨시라이야말로 우리 민중의 진정한 구원자다!’라며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가 일어난다.
중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었던 정치적 show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조용히 있어야 했는데, 이 사람은 목숨을 걸고 반대로 간 것이다.
‘나는 민중의 힘을 얻어서 중앙을 포위하겠다!’ ‘중앙이 나를 깔보고 중경으로 보냈지? 네 아버지의 원죄가 있으니, 거기서 썩다가 꺼지라고? 난 그렇게 사라질 수 없다!’고 자기 표현을 한 것이다. 뿨시라이는 인민 사이다가 되었다.
그렇게 일이 진행되면서, 제거한 마피아들이 4,000명이었다. 마피아와 부패 공무원을 일망타진한다.
그런 작업을 하는 데 가장 탁월했던 인물로 뿨시라이의 오른팔 왕리쥔이라는 사람이 있다.
왕리쥔(王立軍, 1959년~) : 2009~2011 중경시 공안국 국장. 2012년 중경시 부시장.
이 사람은 요녕성 대련시에서 25년간 경찰로 근무한 사람이다. 워낙 유능하고 소신껏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뿨시라이가 중경으로 데려왔는데, 중경에서 실력 발휘를 한 것이다.
打黑의 전국적 영웅 왕리쥔
405개 범죄조직 일망타진
4,425명 구속
그러면서 창홍(唱紅)을 한다.
창홍(唱紅) : 중국공산당의 혁명가요를 불러 사회주의 문화를 부흥시키겠다는 뿨시라이 정책
옛날에 공산주의 혁명을 했을 때, 불렀던 혁명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무슨 이야기냐?
지금의 경제개발은 다 헛거다. 옛날에 어려웠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었고, 높은 놈도 없고, 낮은 놈도 없었다. 그래도 하나 된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이기만 하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혁명 가요를 부르는 운동이 전개된다. 빨간옷을 입고 깃발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러니까 전인민이 ‘뿨시라이 만세! 공산주의 만세!’를 불렀다. ‘이제 평등사회를 만드는 홍기를 다시 나부끼자!’ 이러면서 뿨시라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중국역사에서 있어본 적이 없는 위대한 영웅이 된다.
범죄조직 405개 소탕
농민공 취업 알선
대규모 임대주택 보급
성장보다 분배 강조
9. 화려하고 슬픈 스캔들
그런데 여기서 불행한 사건이 터진다. 사실 이 사건에 대해서 뿨시라이 본인은 잘 몰랐다고 한다. 사실인지 몰라도 2개월 후에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뿨시라이 부인인 꾸카이라이는 아주 엄청난 혁명가 집안의 딸로 북경대 법학과를 나와 인권 변호도 했던 중국 최고의 변호사였다. 아주 우수한 여자였다.
꾸카이라이(谷開來) : 중국공산당 혁명 간부 곡경생(谷景生) 장군의 막내딸. 북경대 법대 출신의 변호사. 뿨시라이의 부인. 미국을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서 처음으로 승소를 이끈 중국 변호사.
이 사람들의 아들이 뿨꾸아꾸아다. 아버지 못지않은 풍운아다. 아주 바람둥이고, 못하는 운동이 없다. 공부도 잘 했다.
여기서 부자(父子)에게 불행한 사건이 터진다.
뿨시라이는 시내의 어마어마한 호텔 28층을 혼자 썼다. 바람둥이라서 매일 밤 여자가 바뀌는 생활을 했다. 그래서 부인이 외로웠을 것이다. 보시라이의 바람기에 지쳤을 것이다.
여기에 닐 헤이우드(Neil Heywood)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 사람은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영어교사였다. 그런데 단순한 영어교사가 아니라, 영국기업들을 위한 중국 컨설팅업체를 운영했다. 브로커 노릇을 한 것이다. 외국 기업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 중간에서 커미션을 먹었다.
닐 헤이우드(Neil Heywood, 1970~2011) : 뿨시라이의 아들 뿨꾸아꾸아의 영어 가정교사. 뿨꾸아꾸아의 영국유학 주선.
그래서 꿔시라이의 부인인 꾸카이라이와 알게 되었다. 영국 잡지 등 외신에 의하면 둘 사이는 내연의 관계였다고 한다.
개혁개방 시기에는 공직자 자녀들의 유학 붐이 있었다. 뿨꾸아꾸아를 옥스퍼드로 보내서, 하버드 케네디스쿨까지 보냈다. 이런 과정에서 헤이우드가 돈세탁을 해 주었다. 중국 사람들은 돈세탁을 ‘흰장갑(白手套)’이라고 한다. 손을 안 더럽히고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다. 헤이우드는 흰장갑 노릇을 해 주었다. 그런데 커미션으로 엄청난 돈을 요구한 거 같다.
뿨시라이 일가의 돈세탁 규모 : 의혹이지만 약 8억 파운드 -> 약 1조 3천억 원 정도.
헤이우드는 뿨꾸아꾸아를 볼모로 꾸카이라이를 협박했던 거 같다. 그러자 독이 든 술을 먹여 헤이우드를 죽인다. 그리고 닐 헤이우드는 사망 2시간 후에 발견되었다고 발표한다. 알코올 중독사로 사망처리하고, 부검 없이 화장시켰다.
10. 인민 영웅의 몰락
그런데 이 자리에 있던 경관들이 당시 뿨시라이의 심복인 공안국장 왕리쥔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다.
왕리쥔은 ‘이건 곤란하다.’고 생각해서 뿨시라이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 헤이우드 사건 어떻게 수습하실 겁니까?’라고 한다. 뿨시라이는 속으로 이놈이 지금 자신을 협박하는 거라고 오해한다.
그 다음 날로 왕리쥔을 공안국장에서 중경 부시장으로 승진시킨다. 부시장은 문화, 예술, 종교, 위생을 담당하는 허울뿐인 자리였다.
그러면서 공안들이 왕리쥔에게 가서 ‘갖고 계신 권총을 내놓으시죠. 이제 더 이상 공안이 아니기 때문에 무기를 소지할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
여기서 왕리쥔은 화가 났다. ‘너희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한다. 총을 내놓는 게 문제가 아니라, 총은 권력의 상징이다. 총을 내놓으면 뿨시라이 밑에서 살 수 없고, 닐 헤이우드처럼 죽을 거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계속 설득을 해서 총을 반납했으며, 그 다음날로 부시장 으로 발령이 난다. 그런데 공안국장 자리를 빼앗긴 다음 날, 왕리쥔은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일주일 후, 공안부청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 급한 일이 있으니깐, 고속도로 입구 표 받는 곳에 나오라고 한다. 지금 미국 총영사관에 가야겠다고 한다. 그러자 부청장은 연락을 해놓겠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을 벌고, 뿨 일가의 모든 비밀을 손에 쥔 왕리쥔은 곧바로 미국 총영사관으로 향한다.
무장경찰, 특수경찰이 즉각 성도의 미국 총 영사관을 에워쌌다. 중경시장 황기범이라는 사람이 들어가서 세 시간 가까이 면담을 하여 중재에 나섰다.
이 사람의 목적은 단 하나 왕리쥔의 체포였다. 왕리쥔은 총영사관에 가면서, 뿨시라이에 관련된 모든 서류를 가지고 들어갔다. 그렇게 세 시간의 담판을 거쳐서 총영사가 내린 결론은 이 사람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서약을 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국가안전부에서 신변 안전과 공정한 조사를 보장하겠다.’는 서약서 3부를 작성한다.
그래서 전국 공안의 빛나는 별이었던 왕리쥔은 성도의 미국 총영사관을 나와 바로 비행기 타고 북경의 특수 심문 기지라고 하는 북경 국가안전부에서 조사를 받는다.
여기서부터 일이 어떻게 전개됐는가?
11. 쇼는 끝났다 배우는 퇴장
이 사건을 우리가 정확하게 모르면 중국을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의 시진핑 정권이 탄생되는 과정의 모든 열쇠가 여기서 풀린다.
질문 : 만약 저 사건이 없었다면 뿨시라이가 정상에 섰을 수도 있었나요?
도올 : 그런데 결정적인 건 뭐냐면, 뿨시라이 스캔들의 핵심은 꾸카이라이의 살인명령이다. 이것은 민중들에게 설득이 안 되는 부분이다.
나중에 뿨시라이가 최후진술을 한 부분을 보면, 이렇다.
“나에게 가족과 부하를 잘 관리하지 못한 큰 잘못이 있습니다. 제 재판을 통해 공산이 공정함을 추구한다는 점을 잘 보여줬습니다. ”
-뿨시라이 최후 진술문 중(2013년 8월 26일)
뿨시라이 무기징역, 꾸카이라이 무기징역, 왕리쥔 징역 20년
정치사에 있어서 악인, 선인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이게 어쩌다가 운명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거기서 뿨시라이는 자기 운명을 깨닫고 방향을 잘 잡았어야 했는데,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큰 비극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비극적인 운명으로 빠져들어 간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
자기가 맡은 시간만은 장한 듯이
무대 위에서 떠들지만
그것이 지나가면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일 뿐
-맥베스
12. 차돌상
오늘의 차돌상은 독서도이다. 독서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大江東去(대강동거) 浪淘盡(랑도진)
장강 그 거대한 물길 동쪽으로 흘러가는데
千古風流人物(천고풍류인물)
파도, 천고의 풍류, 인물을 모두 휩쓸고 내려가네!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염노교(念奴嬌) 첫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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