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친정과 군제 개편
1945년 8.15 이후 한국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한국 근현대 역사서들이 한우충동(汗牛充棟)할 정도에 이르건만, 민족정통성의 시각에서 집필된
것은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대부분의 근현대 관련 역사서는 물론이고, 논문들의 대부분도 정통성의 맥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일종의
'개화사관(開化史觀)'이라고나 할만한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한 민족의 존립근거를 제시해 주는 역사적 정통성을 떠나서 그
민족의 역사적 흐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할 때,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대단히 심각할 수도 있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정통성에 대한 민족구성원들간의 의견차이나 충돌로 인하여 민족적 구심력이 깨어지고, 민족분열과 허무주의적인 민족도덕성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민족의 현대사가 스스로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증명을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서문 중에서]
고종의 친정과 군제 개편
고종은 친정초기에 자주 발생한 궁궐화재 등으로 궁궐방위 및 국가관리에 큰 문젯점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군제개편을 단행했다. 고종은 궁궐화재
4개월 후인 서기1874년 4월 5일에 우선 궁궐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명했다. 즉, 궁궐 숙위를 담당하던 용호영과 무예청 이외에
궁궐파수대를 창설하여 훈련대장이 관장하게끔 하도록 조치했다. 그에 대하여 영의정 이 유원은 예산부족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으나, 고종은 각
영군(營軍)에서 인원을 차출해서 궁궐수비를 강화하도록 했다. 그에 따라 6월 20일에는 우선 500명으로 구성된 궁 파수군이 조직되었고
무위소(武衛所)로 명명되었다.
무위소 병력은 급속히 늘어나서 7월 11일에는 828명으로 증강되었고, 다시 9월 26일에는
984명으로 증가되었는데, 무예청과의 통합과정에서 2,000명까지 증강되었고, 최정예부대로 우대받았다. 운양호사건 후인 서1875년 10월
13일에는 삼군부에 속했던 별초군(別抄軍)도 무위소가 관장하게 되었고, 강화조약이 체결된 후인 서1877년 4월에는 용호영과 총융청도 관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도청의 업무도 감독하는 막강한 군사조직으로 발전했다. 그에 따라서 최고책임자인 무위도통사는 삼상과 같은 서열에 들게
되었고, 무위소는 자연스럽게 친위군의 형식과 내용을 구비하게 되었다.
고종은 또한 무위소를 신무기체계로 무장시키고자 했다.
고종은 개항직후 일본인들이 선물형식으로 진상한 회선포와 육연발단총, 칠연발단총 등을 모방해서 무위소에서 자기황, 칠연발총 등을 제조케 하기도
했고, 일제 무라다 소총을 도입해서 연구 개발하게 하는 등 신무기의 도입과 개발을 서둘렀다.
조속한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하여
젊은 군주의 예민한 감각으로 서양 근대문물의 도입에 노력을 경주한 고종은 서1880년부터 더욱 문물도입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서1880년
12월에는 청나라의 새로운 제도를 본따서 새로운 국정담당 중심기관으로서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서1881년 1월에는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여 급속히 성장하는 일본의 군사력과 문물 등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파악하도록 했고, 서1881년 4월에는 교련병대(속칭
'왜별기')를 창설했고, 서1881년 7월에는 청나라에 영선사(領選使) 일행을 파견해서 새로운 군사장비 제조법 등을 배우도록
했다.
그에 이어서 고종은 군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키로 하고, 서1881년 11월 24일에 각 영(營)을 통폐합해서 두 개의
영으로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리하여 12월 25일에는 무위소·훈련도감·용호영·호위청을 통합해서 무위영으로, 금위영·어영청·총융청을 통합해서
장어영(壯禦營)으로 삼았다. 이는 예전의 오영(五營)체제의 결점으로 지적되어 왔던 군 통수계통의 복잡성을 시정해서 보다 단순한 지휘체계로 전환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서 무위대장에는 이 경하, 장어대장에는 신 정희가 임명되었다.
무위영은 결국 무위소의 기능을 더욱 확충하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가장 신임받는 친위대로서의 진용을 갖춘 것이었다. 즉, 양영 체제는 임금과 궁궐의 호위에 최우선적인 목표를 둔 친군
체제(親軍體制)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교련병대의 창설과 양 영의 확대개편 등에 필요한 국방예산은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서두른 군비강화는
필연적으로 군사들에 대한 처우문제를 야기했다. 특히 그런대로 대우가 충실했던 교련병대에 비해서 현저히 대우가 열악했던 양 영의 하급군졸들간에는
불만이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