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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영성적중심주의
우리는 지금까지 이육사의 「광야」 시를 두고 일제 강점기 때의 나라 잃은 설움을 딛고 구원 받는 광복을 염원하는 국한된 시로 평가하였다. 그것은 조국 광복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로 그 가치를 크게 부여한 이유로 무상한 생명 존재에 대한 암시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은 종교적이면서 내적 실체를 이루는 예수님의 말씀 선포로 영원한 질서와 구원의 역사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광야」 시에서 암시하는 생명은 영원과 순간의 변증법을 보았듯이 다가오는 생태시대에 맞게 모순보다는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육사의 영성적인 「광야」 시는 이제 생태시대에 맞게 영성적으로 새롭게 접근하며 귀를 기울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창조주께서는 창조물들의 이름을 인간이 부르는 이름으로 그대로 지어 주셨다고 전한 것은 인간을 모든 창조물들의 지배지가 아닌 관리자, 보호자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특별한 관계 맺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은 창조주가 만든 우주만물 그 각각의 생명체가 지닌 창조적 역할을 인정하고 여타의 창조물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상호의존적 존재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빛과 어둠을 제일 먼저 창조하셨는데 자연물보다도 우주적 형상을 중요시 여기시면서 빛과 어둠을 우선적으로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우주론적 빛과 어둠이 무엇인지 구분되어져야 할 것이다.
창세기에서 살펴보면 1장 3-5절에서는 창조주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창조주께서는 참 보기가 좋으셨다는 기록이 있다. 성경 전반에 걸쳐서 살펴보면 빛과 어둠은 선과 악으로 구분되면서 선은 창조주 하나님, 대리자, 예언자, 예수님과 따르는 제자들을 말한다. 요한복음 1장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 하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그 말씀 안에 깨닫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23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에 의하면, 분명 깨닫는 자로 지칭하고 있다. 반면에 어둠은 잠언서 4장19절 “악인의 길은 어둠과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 하느리라.” 기록된 것을 보아 악을 말하며 배도한 천사 마귀·사단을 지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의 표현은 하늘과 땅, 무죄와 범죄행위 등 혼연일체의 존재 속에 깨닫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로 구분된다. 깨닫는 자들은 하늘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인간과 천상의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절대자의 공간으로 입성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땅 아래로 꺼져가는 사망의 길로 낭떠러지로 가는 것이다.
창세기1장 11-12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성경구절은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식물들의 비유는 성경 전반에 걸쳐 시대의 상황을 재현해 주며, 성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생태적 영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생태로 접근해야 한다. 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가지고 있는 상식과 같은 ‘암묵지 tacit knowledge’가 있다면, 그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 한결 수월할 것이다. 이것은 생태를 이해하는 것에서도 중요하지만,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강한 책, 성경 등을 읽을 때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성경을 읽다 보면 익숙한 식물이나 동물도 있지만, 전혀 생소한 문화와 배경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궁금할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파고들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이 있다. 본 연구에서 성경의 배경이 되는 절대자의 그 뜻을 깨닫게 된다면 성경을 더욱 입체적으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성경 내용으로 영성적인 시를 표현한 이육사의 「광야」, 윤동주의 「십자가」, 박두진의 「해의 품으로」, 「푸른 하늘 아래」, 「해」 등은 성경적인 이상을 갈망하며 천지를 창조한 절대자의 존재 하에 낙원에서 모든 생물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지상천국이 건설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내용이다.
이육사는 1926년 7월 베이징에 있는 중국(中國)대학 상과에 입학하여 공부했으며, 1933년에는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재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베이징에서 철학,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 시기에 성경을 접하여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과 만나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루쉰의 문학혁명은 봉건적 국민의식의 변혁을 지향하고 중국에서 막 성립된 민주공화제를 완성하고자하는 취지였으므로 이육사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33년에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육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루쉰 등 주변 인물을 통하여 철학과 종교에 관심을 가지며 신앙보다 진리에 가깝게 성경을 접한 것으로 보였다.
육사의 광야(曠野) 시를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 당시에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면서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미래 지향적인 신념을 나타낸 저항시라고 알고 있는데, 이미 해방되고 난 후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 신문에 발표된 유고 시이다. 21세기에 와서는 저항시라기 보다 다른 깊은 내용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단순히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시상을 전개한 것으로 보이지만, 신 우주론적 신의 존재를 이야기하며 영감을 다양한 시적 상징으로 성경전서의 모든 내용을 함축한 것이다. 1연과 2연은 구약성경의 내용이고 3,4연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행적을 말하며 마지막 5연은 사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하여 나팔소리를 듣고 기록한 계시록 말씀을 표현 한 것이다. 육사는 베이징에서 성경을 상당히 깊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육사를 퇴계의 후손으로 선비 집안 출신이라서 유학을 중시하는 민족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1924년 동경, 1925년 베이징 등지에서 유학 도중에 접한 주변인물 영향으로 서양서와 철학, 종교학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야는 앞서 발표한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을 보면 확연히 변화된 내용을 알 수 있다. 십이 성좌, 수녀 등 표현한 용어는 성경을 접하지 않고는 유교적으로 보았을 때 선택적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적어도 육사의 기독교 사상은 민족의식을 한 인간의 내면화하는 진리로서 선포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의 「가을날」 -
1연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는 태초에 절대자의 피조물로 창조된 인간세계를 닭 우는 소리로 연결하며 새 세상을 연 것이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 새벽닭이 우는 것은 곧 새 세상이 다가옴을 알려주는 예고를 말한 것이다. 절대자는 땅에 더 관심을 가졌다. 땅에서 인간을 만들고 모든 생물을 만드신 것은 땅 즉 지구가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창세기는 우주론의 빅뱅과도 비교할 수 있으며 우주의 한 점에서 탄생된 인간이기에 우리의 몸은 소우주라고 표현한다.
2연의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에서는 구약의 아브라함, 이삭,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등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절대자의 대리자들이고 바다는 세상을 가르치며 그 세상에 선포하고 다스리게 했음에도 잘못 다스려서 북이스라엘, 남 유다로 두 개의 나라로 갈라졌고 그 마저도 결국 외부세력에 의해 침입 받아 흩어지고 나라 잃는 설움을 2500년간 이어져 왔다. 당시 일제강점기 상황인 우리의 처지를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3연에는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는 솔로몬이후 빛과 어둠, 즉 선과 악이 존재하는 과정에서도 이사야, 예레미아, 에스겔, 다니엘, 요나, 미가, 스가랴, 말라기 등 예언자들이 죽음에 두렵지 아니하고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을 해오면서 그리스도 탄생을 말한 것이다. 시편에서 ‘내가 네 원수로 네발등상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110장1절>하셨고,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미가5장2절>라고 예언서에 예수님 탄생이 기록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4연에는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 예수는 갖은 핍박과 고난 속을 눈 내리는 추운 겨울에 비유하면서 희생을 하시는 것을 매화 향기에 비유하고 곧은 한 마음, 홀로 굳굳하게 말씀(씨)을 선포한 것이다. 절대자, 영혼, 자연 등 초월적 실체의 초능력자의 권능에 대한 믿음으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성경 속에서 생태의식을 엿 볼 수 있다. 생태신학에서는 성경에서 생태자연주의를 찾아 생태시대를 맞이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창조된 자연 만물 가운데 가장 위협적이고 불안한 존재가 마음이 가난한 존재, 인간들인 것이다.
5연에서는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도 요한을 통해 2천년(천고)후에 천사들(백마)과 함께 오실 재림 목자(초인)가 있으니 간절히 원하는 백성들(광야)에게 구원의 선포를 하리라는 것이다. 계시록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리라’<19장14절>라고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을 보면 재림 목자가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오게 되면 백성들에게 구원의 선포를 하고 그 뒤를 따르게 한다는 것이다. 광야(曠野)는 曠(밝을 광)은 ‘비우다, 넓다’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밝다”라는 의미에 더 두고 싶으며, 野(들 야)는 민간 또는 성 밖 사람들에게 의미를 더 두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위의 해석으로 보아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에게 선택 받는 자들은 “밝고 빛나는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Leonardo Boff는 『생태공명』에서 빅뱅부터 브라질 대중음악 가운데 한 형태인 보사노바나 컴퓨터에 이르기 까지 우주적 과정의 통일성을 보도록 이끈다. 또한 자연이 인간 존재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육사의 광야 시에서도 우주발생 안에 절대자의 존재를 다루고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물질 안에 존재하는 성령들은 신학적 성찰이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육사는 서정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상징적으로 씌어 진 시들이 주로 소재로 하여 시각적인 특징이다. 황혼, 청포도, 교목, 파초 등에서 생태적인 환경을 두고 화자의 소망과 굳은 의지를 암시하고 있다. 「꽃」 시를 보면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 대한 소망과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당시에 처해진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가 찾아올 것을 확신하는, 화자의 강인한 현실 극복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 이육사의 「꽃」 전문 -
1연의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난 곳 그리고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때」에서는 축복의 땅이라고 생각한 조국이 핍박을 받고 있어 하늘에서 내리는 기운도 없는 때이다. 갈라디아서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4장29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지배자는 육체를 따르는 자들이고 우리 민족은 성령을 따라 난자들이 되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어서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시구는 핍박을 받는 우리는 꽃을 피운다. 그것도 정열적으로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으면서 꾸준히 나아간다. 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꽃」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므로 성경에서는 그 새로운 세계로 인도될 자들은 핍박이 선행조건으로 나온다. 디모테오후서에 ‘무릇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3장12절>라고 말씀하듯이 새 세계를 동경하는 자는 이 과정을 거쳐야만 은혜와 평강 속에 살아가게 된다.
2연에서는 더욱 강렬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툰드라는 기후변화가 심하고 영구동토층으로 불리는 곳으로 인간이 살기에는 부적당하다. 겨우 벼랑 끝의 돌출부와 물이 얕은 자갈층에서 이끼류와 로제트 식물만이 자라는 곳이다. 그런 환경에서도 우리는 꽃을 피우기 위해 「꽃 맹아리」를 눈 속에서도 생명을 키울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다가올 새로운 세계는 겨자 씨 한 알이라도 자기 밭에 심는 자의 것이다. 그러면서 제비떼 오길 기다린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새 세상을 말한다.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에서는 마태복음에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며 그 인자가 천국의 아들들이라’ <13장37절>고 하였기에 인내하고 꽃을 피우면 그 약속이 지켜진다.
이어지는 3연에서 「한 바다」는 “넓은 세상”을 말하며, 그 세상에서 하늘의 선택 받는 우뚝 솟는 곳에 머물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름다운 성에 있게 된다. 계시록에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21장2절>라고 말한 것처럼 천국이 도래되어 아름답게 성숙된다는 것이다.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라고 외치는 것은 계시록에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7장 9절>라고 성경 내용대로 무리가 떼를 지어 몰려온다.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라는 시 구절은 이제 완성이 되어 거룩한 성에서 몰려오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 성 예루살렘에서 함께 기쁨을 나누자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겨내어 빛을 되칮는 광복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추운 겨울(억압)이 지나면 봄(해방)이 찾아와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처럼, 핍박받는 상황은 인내하고 간절하게 원하면 구할 수 있다는 희망찬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우리를 저버리지 못할 구원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꽃이 피어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육사의 시와 관련지어 식민지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으로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희생정신으로 포괄하려고 평가를 했다. 그러나 화자는 베이징에서 루쉰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적 철학사상과 깊은 성경지식이 겸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종교 철학에 심취한 결과로 볼 수 있으며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확실한 의지로 정립하였으며, 성경의 깨달음 척도를 알 수 있다.
「광야」, 「꽃」 두 편의 시를 보면, 화자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다림의 자세를 통해 우리 민족의 해방과 같은 재창조의 역사를 염원하는 시인의 의지가 담겨있다. 그 새로운 세상을 조국 광복으로 해석 된다면 육사를 저항시인에서 뛰어 넘어 영성적인 시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