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신천 바르게 알기
1. 발원지
<위키백과>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의 동부에 흐르는 하천으로 대구 달성군 가창면 비슬산 최정상에서 발원
하여, 가창면 용계리에서 대천을 합류하여, 대구광역시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질러 북구 침산동에
서 금호강과 합류하며 둑에는 산책로 및 운동로가 조성되어 있고, 체육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신천의 서쪽 둑에는 신천대로가있고, 동쪽 둑에는 신천동로가 있어 대구시의 중요한 교통 시설이
되고 있다.
<실제 사실>
신천의 발원지는 가창면 우록리의 도덕골과 밤티골에서 시작된 두개의 개울이 황촌에서 합쳐져
서 우록지를 거쳐 내려오다가 우록리의 도덕골에서 흘러내리는 하천과 하백록교에서 만난다.
그리고 계속 북쪽으로 흐르면서 안벌골과 치실골에서 흐르는 개울과 만나 비슬산 자락의 시매골
과 진밭못에서 시작된 용계천과 가창의 덕안사 부근에서 합쳐진다. 다시 북쪽으로 흐르다가 신천교
부근에서 범물동 골짜기에서 시작된 범어천과 만나 계속 대구시를 북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다가 침
산동에서 금호강과 만나게 된다.
가창면 비슬산에서 발원했다는 설은 잘못된 사실이다.
<우록리 산과 개울>
2. 신천의 이름
<신천의 전설>
첫째, 이서가 신천의 물줄기를 변경시키고 신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둘째, 왕건이 대구에서 후퇴할 때에 신천을 건너 앞산의 은적사로 무사히 갈 수 있었기에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데 큰 도움을 받아서 왕건이 신천이라고 하였다.
<이서의 잘못된 치적>
이서가 1778년에 물줄기를 돌리고 신천이라고 했다는 것을 이공제비까지 세우고 추앙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 잡아야할 것이다.
1778년 이전에 제작된 팔도여지지도, 광여도 등에 나타난 신천의 물줄기는 현재의 신천 물줄기와 동일하다.
또 1778년 이전에 발간된 경상도지리지(1425년 완성),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지리지 완성),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완성)의 대구편에 이미 신천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신천의 지명 조사>
신천이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이다. 관련 고문헌을 모두 참고해 봐도 대구 신천의 지명유
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신천이라는 용어가 대구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경기도 양주시의 신천이나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주변의 신천은 샛강에서 유래된것을 보면
대구의 신천 역시 대구부와 대구부의 속현인 수성현 사이를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에서 ‘사이천’
또는 ‘새천(샛강)’이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간천(間川)’이 아닌 신천으로 오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신천의 크기
가. 길이 12.5 km
나. 유역면적 165.3 k㎥
4. 조류서식지
청둥오리, 왜가리, 해오라가, 수달이 서식하는 이유는 먹이가 되는 물고기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잉어를 방생하여 새로운 신천을 이루고 있다.
5. 화석
범어천과 신천이 만나는 상류 부분과 수성교와 동신교 사이, 용두산성 부근의 개울에도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있어 신천 연구에 도움을 준다. 용두산성 윗부분의 개울에도
<참고자료> 세종실록지리지
1424년(세종 6) 11월세종이 변계량(卞季良)에게 지지의 편찬을 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425년에『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가 먼저 편찬되었으며 이어 나머지 도의 지리지가 순차적으로 완성되었다. 이를 재편집하여 1432년(세종 14)에 전국 지리지인『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로 완성되었다.
1450년(세종 32)세종이 승하한 후 1452년(문종 2)에『세종장헌대왕실록』163권을 편찬할 때 세종의 업적이 많아 오례의(五禮儀) 8권, 악보(樂譜) 12권, 칠정산(七政算) 8권과 함께 지리지(地理志) 8권이 수록되었다. 기본적인 내용은『신찬팔도지리지』를 기초로 하면서 거기에 빠져 있던 1419년(세종 1)에서 1432년(세종 14)까지의 사실 변화를 첨가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변화 상황은 특별히 세종 말년까지 반영하여 제148권에서 제155권까지 수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