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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소설>
조난(遭難)
고천석
회색빛 띤 산악의 분위기는 음울했다. 기온은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늦가을 저녁인데, 어둠이 사위를 둘러싸 황망했다. 시공간이 불명확한곳에 장막이 드리워진 것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런 정황에서 뜻하지 않게 소설가 강호길을 만난다. 그를 만난 것은 의심 없는 사실이다. 만났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기묘한 산행 길에 오른다. 그러나 제대로 된 등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싶다. 등산 준비를 해서 다녀온 것도 아니고, 산행을 했다고 하면 적어도 등산복과 등산화 정도는 기본적으로 착용했어야 옳았다. 등반복이 만일에 조난당할 때 완전 방어 복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등산길에 들고자하는 사람들이 갖추는 최소한의 기본복장이 아닌가. 그럼에도 느닷없는 볼 일로 평상복을 하고 가까운 곳에 외출했다 돌아온 기분이었다.
어쩐 일인지 살아있는 내 이 몸뚱이로는 실감할 수 없었다. 저녁 무렵에 산을 내려오던 기억뿐이다. 내려올 때는 저녁때라서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개밥바라기 사라진 뒤쯤인가 보다. 그러나 개밥바라기가 다른 별자리로 이동을 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별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까. 모른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천하가 내려다보이는 정상이 아닌 산골이나 산중턱 또는 비탈 등에서는 시야가 좁아 더욱 그랬다. 그 때 내가 바라보던 앞산은 지극히 가까이에 있어 현기증을 가져다 줄 정도의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바로 코앞에 맞닿아 있는 산은 단단하고 결이 고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 있는 산, 중턱 상위부분까지 불빛은 별들처럼 무리를 이루어 박혀 있고, 정상 가까이에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덩이 산이었다. 민둥산 정상엔 불빛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불빛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애 없었다고 하는 말이 더 맞는 말일 것 같다. 그러나 바로 정상 중턱 지점엔 수많은 점등불이 켜져 있었고, 산사에서 새어 나온 불빛일까. 산사가 그렇게 빼곡하게 들어차 있을 리 없으니, 산사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불빛과도 같았다. 성탄절에 점멸되지 않은 채 설치된 점등불빛인 양 뽐내고 있었다. 나는 이미 강호길과 아직 방향감각을 잃지 않은 하산 길에 들었다. 그러나 내가 바라본 앞산은 어느 정도 높았는지 대층 가늠이 가지만 정작 내가 언제 올랐는지 조차 모르고 하산 길에 들어있는 산은 얼마나 높을까.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 때 나는 등지고 있던 산이라서 정상을 돌아 올려다 볼 경황이 아니었다. 설사 돌아서 고개를 들어 쳐다 본다한들 정상까지 눈에 들어올 리도 만무하고. 그날 아침에 조간을 펼치니 야당을 떠나 무소속으로 있던 정 아무개 의원은 또다시 소속했던 당으로 복귀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지지자 500여명과 함께「무등산」을 등산하면서 일행에게 말했다는 “복당은 8부 능선을 넘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정치에 대한 야망과 그의 의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무등산」은 ‘광주와 더불어 시대의 고뇌를 삭히고 대화합을 향한 창조적 미래를 갈망하는 빛고을의 이상향이었다.’ 산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연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처로 삼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산이라는 대자연은 영험함이 분명 존재하기에 언제나 인간에겐 의젓하고 엄숙함으로 다가오기에 그러리라. 광주의 성산인 「무등산」은 1,187m. 높이 아래 광주와 전남 담양군, 화순군 등 3개 지역을 품에 감싸고 있는, ‘그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하면 산에 올랐던 사람들이 수없이 옮겼을 말이었다. ‘비할 데 없이 멋진 산’이라는 「무등산」의 소감이 그대로 이름에 녹아들어 있는 것 같다.
「무등산」은 골골이 새끼 산을 낳고, 이름도 어여쁜 고갯마루를 수 없이 만들어 놓았다. 산은 결코 낮지 않은 산인 데도 완만한 등산로가 지천에 깔려 있어 어머니 품과도 같다는 느낌이었다. 산새가 그렇게 완만해 보인다고 동네 뒷산 오르듯이 할 수는 없다.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영험함이 골짜기마다 팽배해 그 기세가 맹렬하게 일어날 것 같다.
「무등산」은 역사와 문학의 산실로 더욱 빛을 발할 터였다. ‘먹줄을 퉁겨 깎아 세운 듯하다’고 해 ‘입석 대’와 ‘서석 대’는 각이 뚜렷한 바위기둥 무리가 천연 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고........광주에서 올려다 본 ‘입석 대’ 북쪽의 ‘서석 대’는 수정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래서 별명이 ‘수정병풍’인가 . 광주 목사로 재직하고 있던 임 훈(1574년, 선조 7년 74세. 호 葛川, 이조판서 추증)이 관리들과 주위에 사는 여러 선비들을 초청하여 그는 가마를 타고 일부 선비들은 말을 타고 유람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인사와 등산 취지를 지방 관리와 수종들 그리고 선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사에 모두들 다망하실 텐데 이렇게 산행을 함께 해 주셔서 고맙소이다. 여러분과 모처럼 어렵게 산행을 하게 되었으니 우리 한 번 산행을 흡족하도록 즐겨봅시다 들. 여러분 모두가 심신을 달련하고 몸과 마음에 묻은 세속의 거친 때를 말끔히 씻어내어 버리고 새롭게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도록 하십시다그려........”라고.......‘마음을 비우는데........’ 는 산행이 더 할 바 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그 때 바로 우리가 하산하기 시작하던 위치가 떠올랐다. 의식이 들었던 위치가 바로 8부 능선이라는 감이 잡힌다. 내려오기에 정신이 팔려 위치 파악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둠 속 사위는 허망에 가까웠다. 장막에 가려진 산악이듯 말이다. 살필 시야는 점점 좁혀 들어 급박한 상황으로 이미 접어들고, 사위스럽던 정황임에도 내 마음은 불안해하거나 그렇게 서두르지도 않았다. 강호길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부근에 있었던 사찰 승려에게 우리가 지금 방황하지 않고 가야할 방향을 물었던 것 같다. 가까이 있던 그가 어느 틈에 승려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스님이 그러는데, 이 아래로 내려가되 일단은 산골짜기 따라 낮은 곳으로 가라는 군요.”
“체, 뭐 우리가 장님이라도 되는가. 생눈을 버젓이 뜨고 있는 사람이 그런 것도 모르는 어린이라도 되는가. 산길을 그렇게 가르쳐 주게........”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지나서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바로 그 때가 밤이었으니, 밤이 되면 온 천지가 어두워 눈뜬장님과도 같았을 것이니까.
“길을 찾아가다 해매거든 자기들이 있는 길로 찾아오래.”
강호길은 예전 등산길에 오른 첫날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등산을 마치고 석주사(釋周寺)라는 사찰에서 일박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랬을까.
나는 또 푸념을 했다. 뽀로통한 표정으로........,
“저녁엔 성한 사람도 장님처럼 앞뒤를 분간 못하는데 사찰은 또 어떻게 찾아간담.”
대답 아닌 이런 시큰둥한 군소리를 했다. 비록 달은 보이지 않았더라도 칠흑 같은 밤은 아니었다. 바로 그 때 나도 모르게 이런 어리광스런 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 나온다.
“우리는 산에서 헤매는 미아다........”
산사의 스님들이 들으라고, 또는 다른 하산 객들에게 구조의 신호라도 보내듯이 약간 억양이 높은 장난기 어린 소리였다. 그 때 사람들은 내가 부르짖는 소리에도 쳐다보거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묵묵히 한 사람 한 사람 순차적으로 우리 앞을 가로지나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저승사자를 따라 쥐 죽은 듯 음산한 분위기 속에 걷고 있는 것 같다. 밤이라서 조난당할까 두려워 공포에 휩싸인 채 걷고 있는 것일까. 사실상 조난은 무서웠다. 조난 사고는 비교적 젊은 층에 많다. 그들은 세상사 연륜이 짧아 지혜가 부족해서일까. 높은 산 오르기를 갈망하나 자신의 체력과 등반 기술을 연마한 후라야 한다. 그리고 겸허한 태도로 산행에 임해야한다. 산행에서 피로는 반드시 초조감을 불러일으킨다.
극도의 초조감은 정상에서 벗어난 정신 상태에 빠지기 쉽다. 일몰과 기온의 급강하, 시계의 장애등이 위험해 일몰 전에 산행을 마쳐야 한다. 강한 햇빛으로 몸이 쇠약, 권태, 수분 상실 등으로 근육경직이 일어날 때 조난은 찾아든다. 중국 고사에는 ‘술을 좋아한 사람이 사먹을 수 없는 형편이라서 원 없이 마실 수 있는 군에 들어간다.’는 말이 있다. 나는 끼니라도 때우며 세월을 죽일까 하고 군에 지원 입대했다. 당시 나는 이렇다 할 직업이 없었다. 무위도식하고 있을 때다.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논산 수용연대 정문에 들어가기까지 나는 자유의 몸이었다. 서울 한양대학교에서 징집 장병들은 환송식을 성대히 치르고 기차에 몸을 내 맡기었다. 나 같은 처지의 입대자는 훈련소로 떠나는 중이라도 논산에 들어가기 싫으면 하시라도 자기고향으로 되돌아가도 상관이 없다고 수송 담당관은 말해 주었다. 그런 처지인 나에게 점심때가 되었는데도 매정스럽게 배당되는 음식은 없었다. 그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자 내게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훈련장 울타리 안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정말 푸대접이었다. 다행히 징집자의 결원이(뜻하지 않게 징집에 응할 수 없는 응소자의 자리가 생기면 그 빈자리를 충당하려고 소수의 확정되지 않은 지원병을 모집 해 훈련소까지 의무감 없이 선택의지로 따라간다)있었나 보다. 내겐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나로서는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게 된 것이 몹시 흥분되는 일이었다.
2
8주간의 논산 훈련소 26년대에서 훈련을 마친 나는 곧 바로 동부전선 향로봉1) 근무지 부대로 배치되었다. 소총 소대원으로 근무할 때는 엄동설한이었다. 나는 괴죄죄한 행색으로 소대 향도2)의 당번병 일을 맡았다. 낮으로는 기관총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나무질통을 등에 메고 자갈과 모래를 퍼 나르는 진지 공사판에서 작업을 해야 했다. 나는 체력이 딸려 아침 세수할 때마다 코피가 흘러내려 주체하지 못했다.
눈이 산 정상을 하얗게 덮은 날 아침이었다. 눈을 녹여 밥을 하고 국을 끓이는 취사장으로 내려갔다. 이미 많은 병사들이 옹기종기 줄을 서서 밥 배식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반합에 국을 먼저 받아다가 숯불이 이글거리는 가마솥 아궁이에 올려놓았다. 영하 20〬가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라서 막사까지 가지고 가는 사이 식어버리기에 뜨겁게 데우느라 그랬다. 향도의 밥과 내 밥을 배식받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밥 배식을 받아와 국 그릇 반합을 가지러 가마솥 아궁이에 돌아와 보니 국 반합이 보이지 않았다. 밥을 타느라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감쪽같이 도둑을 맞은 것이다. 다른 병사들은 막사로 모두 다 올라가 취사장엔 나 혼자 뿐이다. 아무리 발을 동동 굴리며 찾아 헤매어도 국 반합은 찾을 수 없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다. 나의 이성은 이미 잃은 지 오래다. 취사장 주위를 온통 찾아 허둥거려도 헛수고다. 소대막사에선 병사들의 식사시간이 끝나갈 즈음인데도 나는 어쩌지 못하고 취사장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다. 향도의 지랄 같은 성질을 잘 아는 터라 그의 문책이 두려워 공포감마저 피할 길이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향도는 다른 병사들이 식사가 다 끝나도록 군침만 삼키며 밥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보나마나 그의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을 터다. 향도는 이제나 저제나 애를 태우고 있어도 당번병은 밥을 가지고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취사장 주위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선나는 어슬렁어슬렁 국도 없는 밥 반합만 가지고 막사로 올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향도는 정말 얼굴이 몹시 일그러져 있다. 서릿발 돋는 그의 얼굴에 살기 짙은 왕방울 같은 눈빛은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 삼킬 것 같다. 그것도 그럴 것이 향로봉 정상에서는 진지작업이 끝나고 끼니때마다 기다려지는 것이 꿀맛과도 같은 밥인데, 그걸 멍청하게 방해한자가 바로 나다. 어떤 처벌도 감내해야 한다. 막사 문을 열고 막 들어서자 내 얼굴이 뚫어져라 소대원들이 눈총을 쏘고 있다.
삭막한 그런 분위기에서도 향도는 구진 말 한마디 내뱉지 않는다. 아예 입을 뻥긋하지도 않았다. 기가 막히면 말이 안 나온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다. 군 입대 전 그의 전력은 넝마주이 생활을 했다고 한다. 누가 부모인지도 모르고 밑바닥 개차반과도 다름없는 생활을 해온 사람이다. 그런 모진 삶에서 악밖에 남지 않았다는 평소 그의 말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바, 그의 성깔은 익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나는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엄청난 일을 저지른 내 어리석음을 웬일로 그냥 넘어가나 했다. 긴장 속에 휩싸여있던 내 심신이 채 풀리기도 전, 그 날 밤, 이윽고 향도의 반응은 드러내었다. 그 때 비로소 수긍이 갔다.
향로봉 정상엔 5월 초여름인데도 주위 산골에는 눈이 아직도 녹지 않고 있었다. 비가 내린 후라서 그런지 살을 에는 듯이 추웠다. 채감 온도가 영하10〬는 되는 것 같다. 낮은 키의 잡나무에 한 때 내린 비는 내리자마자 곧바로 고드름으로 맺힌다. 우리 분대 9명의 병사들은 정각 밤 12시에 내복 차림으로 산 정상에 엎드려뻗쳐 있어야 했다. 곧 바로 술에 얼큰히 취한 향도는 생 참나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분대원의 이름을 부르면서 엉덩이에 매타작을 시작했다. 매타작은 한 병사에 20대씩이다. 평소 술을 즐겨마시던 그는 대대부식차량이 산 정상에 부식을 실어오르내릴 때마다 부탁을 해 막걸리를 구해다 놓고 일과가 끝나면 홀짝홀짝 마셔오던 것을 그날은 한꺼번에 많이 마셨던 것 같다. 화가 치민 그의 성질에 반합을 도둑맞은 이 사건을 감당하기 어려워 그리 대취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맨 정신으로는 차마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행동할 수 없어 술로 이성을 잃지 않고는 결행할 수 없기에 그리 작정했는지 모른다. 병사들을 두들기는 것도 술기운으로 하는 모양이다. 온 힘을 다해 내려치는 몽둥이질에 힘이 들었는지 10대 정도 휘두르고는 갖은 협박성이 담긴 악담을 입에 거품을 물고 한 10여 분간은 퍼붓는다. 그리고 또다시 매타작을 시작하곤 한다. 향도는 그날 아침 국도 없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해 소대원 앞에 망신살이 뻗혀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얼마 안 있으면 군에서 가장 혹독하고 두렵다는 보급지휘검열을 앞두고 있는 때라서 잃어버린 반합을 채워두어야 하는 급박한 책임감이 향도에게 더욱 압박감을 갖게 한 것이다.
“이 새끼들아 내일 모래면 보급지휘검열인데 어떻게 할 거야 응,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보급품이 있어 걱정인데 거기다가 반합까지 없어졌으니 언제까지 완전히 채워 놓을 거야, 이 병신 같은 자식들아, 너희들은 다른 소대에서 훔쳐오지는 못할망정 왜 어발이 같이 도둑만 맞느냐 말이야......,”
그는 평소 맑은 정신으로는 말수가 적다. 그의 성격은 좀 과묵한 편이다. 그러나 입에 술이 들어가면 막말을 자유자제로 해댄다. 평소 말 수가 적은 그는 술기운을 빌어 용기를 내는 것 같다.
매를 맞지 않아도 될 다른 분대원은 내 실수로 애먼 매를 맞고 있는 것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첫 번째 병사가 두 차례 매타작 20대를 치르고 이제 두 번째 병사에게 옮겨간다. 그 병사에게도 10대를 휘두르더니 가진 욕설을 또 퍼부어댄다.
“이 밤이 지나기 전에 반합은 반드시 채워 놓으란 말이야, 알겠나? 응 어떻게 채울 거야, 이 새끼들아 어디 대답 좀 해봐.......,”
바로 그 때 세 번째 병사가 벌떡 일어난다.
“일병 박 근래입니다. 제가 잠을 못자더라도 꼭 채워놓겠습니다.”
“이 새끼야 누가 네 맘대로 일어나라고 했어 건방지게 말이야, 빨리 엎드리지 못해 엎드린 채 다시 말해봐 더 세밀하게......,”
그는 세 번째 병사에게 발길질을 해대었다.
그 순간 나는 차라리 매를 빨리 맞는 편이 더 마음의 고통이 나아질 것 같다. 오히려 먼저 매타작을 당한 병사가 부러웠다. 다른 병사가 매를 맞는 동안 내 두 다리는 후들후들 떨린다. 그 순간은 온 몸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고통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견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나는 맨 마지막 순서다. 매를 맞는 물리적인 고통보다 나 때문에 애먼 매를 맞는 동료 병사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더욱 고통스럽다. 그날 밤 우리 분대 원들이 매를 맞느라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시간은 무려 세 시간도 넘게 걸렸다. 초죽음이 된 분대 원들은 막상 걸어서 막사로 가려고 해도 마음대로 걸어지지 않는다. 향도는 매타작이 끝나자 한기가 몰려왔는지 힁허케 자리를 떠나 버린다. 분대 원들은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해 서로서로가 붙들고 어깨에 팔을 걸쳐 이끌고 겨우 막사로 돌아왔으나 바르게 누울 수가 없었다. 엉덩이가 부풀어 오르고 어떤 병사는 살점이 찢겨져 팬티가 검붉게 물들었다. 나도 체력이 약한 편이어서 그랬는지 팬티는 물론 군복 하의까지 피로 적셔 있었다. 분대 원들은 그날 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잠을 재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내 실수로 그렇게 고통을 당했음에도 누구하나 내게 불평을 한 사람은 없었다. 한 사람이 잘못해도 분대 원 전체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군율이 철저하게 물들어있는 병사들 같다.
그 날 이후로 소대원들은 반합을 잃어버릴까봐 베개 삼아 머리에 베고 잠을 잤다. 다른 막사에 보급품이 흘러들면 같은 막사 내에서 연쇄적으로 분실사건이 그치지 않고 돌고 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해에 육군군수참모로 재직하던 이 범준 대령이 20연대장으로 부임하여 오는 바람에 연대내 부족한 보급품을 에이급인 새것으로 모두 채워 주었다. 그 덕에 보급지휘검열은 무사히 넘겼다. 그런 후로는 부대 내 분실사건은 사라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근무하던 향로봉 정상에서 10여 킬로 지점엔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는 무산3)이 바라다 보인다. 진지에 들어가 포대경으로 관찰해 보면 흰 옷으로 갈아입은 인민군병사들이 밭갈이를 하는지 잠시 동안 움직인 가 했더니 이내 자취를 감춰버린다. 아군이 주둔한 향로봉과 대치하고 있는 무산과의 사이에는 5월이 지나도록 나무에 새순은 안 보이고 눈도 녹지 않고 있다. 그곳의 여름은 매우 짧고 겨울은 길었다. 물론 여름철 밤에도 비가 오고 기온이 내려가면 나뭇가지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린 때가 많았다. 여름에도 예측할 수 없이 기온은 그렇게 급강하했다.
3
나는 어느 날 밤 보초병 경계를 교대하기 위해 막사를 벗어나 경계초소를 향해 가다가 길을 잃었다. 낮에 보았던 위치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찾아갔으나 정반대지역이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헤매며 방황했을까. 막사에서도 초소에서도 교대할 시간이 지났는데, 교대병이 나타나지 않으니 소대가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이쪽 정상에 오르면 거기가 거기 같고 내가 꼭 여우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실컷 헤매다가 어떻게 막사로 되돌아오게 되었는지 모르게 제정신이 아니었다. 겨울철엔 그렇게 헤매다가 방향감각을 잃고 지쳐 결국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
여름철엔 분대별로 적진 가까이에 있는 산골짜기 거점에 나가 경계를 서는 일이 있다. 녹음을 틈탄 간첩들이 지나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3명을 일조로 분산시켜 천막을 치고서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해 지키는 경계근무다. 명분은 그렇지만 실질적인 행동은 밤에 경계를 서고 낮에는 약초를 캐고 다래를 따고 머루를 따 빈 통에 발효되도록 저장하는 일이다. 근무규칙은 정상적으로 지켜질리 없다. 밤에는 교대로 잠복해 경계를 선다지만 밤에 뜬 눈으로 지새우고 낮에 산실과를 딸 수는 없다. 거점 잠복근무는 분대장의 재량에 맡겨진 채 경계근무가 이루어진다. 그렇게 6개월 동안 나가 있는 것은 내무생활에서 해방감을 맛보는 즐거움이다. 병사들은 통제 된 단체생활보다 자유로움을 언제나 그리워한다.
명사수 선임하사는 칼빈 소총을 어깨에 메고 산돼지나 곰 사냥을 다니는 것이 일과다. 부대장의 지시로 하는 모양 같은데, 부대장은 상급부대장인 연대장과 사단장에게 곰쓸개와 살코기 일부를 상납하는 경우가 있다고 선임하사는 공공연히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옛 풍습처럼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자발적인 공경의 표시 또는 아랫사람을 아낀다는 증표로 순수한 우정차원의 진실한 마음에서 분수에 넘치지 않는 것이라면 누가 나무랄까. 상납하는 물품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속셈을 드러내고 순수함에서 일탈될 때 엄청난 재물로 둔갑해 군 사회를 병들게 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짙푸른 8월도 어느덧 거의 지나가고 있다. 9월 중순께나 되었을까, 나는 산 다래를 따려고 그랬는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적이 주둔한 지역 가까이 산골짝으로 내려갔다가 거의 하루를 방황한 일이 있다. 나는 같은 상황의 분지에서 한 동안 그렇게 맴돌았다.
나는 그 때 골짜기에 내려가 그만 방향감각을 잃고 만 것이다. 이 산 정상에 올라와 봐도 그 곳 같고 저 산 꼭대기에 올라가 봐도 역시 마찬가지다. 사방의 산 정상을 그렇게 수십 차례 오르내렸다. 나는 산악부대 근무 중 그렇게 사고를 잘 저질렀던 우둔한 병사였다. 그 때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훈련병 시절 독도법을 배울 때 익혀둔 것이 뇌리에 스쳐 지났다. 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나타난 나이테를 보고 방향을 알아내는 일이다. 베어낸 나무 등걸에는 반드시 나무의 연륜을 가리키는 동그란 선이 미완성된 거미줄처럼 둘러 쳐져 있다. 연륜의 선은 나무가 자라면서 일 년에 한 줄씩 생겨난다고 교육을 받았다. 줄이 그어진 숫자를 보고 나무의 연륜을 판단할 수 있었다. 나무의 몸체를 두르는 선과 선의 간격이 좁은 쪽은 북쪽이고 반대로 넓은 쪽은 남쪽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차가운 북풍이 몰아쳐 오는 곳은 북쪽이라서 나무가 추위에 움츠러들어 더디 자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쪽을 바라보는 쪽 몸체는 추위에 위축되어 성장속도가 늦어진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고. 남쪽으로 두른 부분은 북쪽을 등지고 있기에 따뜻한 햇볕을 밭아 비교적 성장이 순탄하니까 선의 폭이 널찍해지는 것이다. 연륜선의 간격이 널찍하게 그려져 있다는 것은 나무의 키나 둘레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그래서 나는 나무의 연륜선 간격이 넓은 곳이 남쪽임을 곧 알아차린 것이다.
산 정상에 올라 보면 또다시 혼동이 일어났지만 나는 무조건 나무의 나이테가 가르쳐 준 남쪽 방향으로 걸어간 결과 부대막사에 이르게 되었다. 그 사실을 모르면 영락없이 산중에 고립되어 조난당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특히 산악에 근무하는 군인은 철저하게 그런 방법을 익혀 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훈련병 시절 교육 받을 때는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대충 넘겼던 것 같다. 나는 어렴풋이 산악 훈련 중에 교육 받았던 옛 기억을 살려 그런 나이테 방식을 활용했던 것으로 조난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조난을 벗어나지 못하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선임 병들이 근무하던 때는 바둑판을 만드는 재료인 피나무라든가 목재로 쓸 만한 나무들이 향로봉 일부 중턱에는 울창했었다. 그런 우거진 숲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내어 거의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 간첩들이 남하할 때 은폐물이 되기에 우람한 나무들을 베어버린 것이다. 베어낸 나무는 삼판(杉板)을 만들어 후생복지사업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후방으로 실어 내어간다. 후생복지사업에는 군 지휘부의 정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 질 터다. 당시 군 사회의 분위기는 신뢰도가 낮았다. 국방을 지키는 것이 군의 지상명령인데 이유야 어떻든 삼판 사업권을 민간인에게 맡기지 않고 군 지휘부에서 손을 댄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다. 고물 철촉이나 전투 때에 적을 향해 퍼부은 기관총 포탄 피 등을 사병들이 주어다 수집해 놓으면 이를 팔아서 부대장들이 사사롭게 처리하느라 정직하지 못했다.
또 그 뿐인가. 대대취사를 할 경우에 어쩐 일인지 군량미 재고가 많이 남았다. 군에 납품되는 양이 많아서 그런 것이라면 모르되 사병들의 식사 분량을 줄이지 않았을까 의심스러웠다. 깊이 생각해 보면 사병들 개개인이 타지로 출타하거나 전입과 파견생활, 그리고 전역하는 등 그 같은 이동병력이 수시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실질적인 군 보급량과는 다소 차이가 날 것이다. 물론 군 일보 상에 잡힌 병력숫자와 공급량은 어느 시점에선 일치된다.
우리 대대장은 서울에 가족을 두고 수시로 서울로 군량미를 실어내 간다. 병참부에서 보급되는 보급품과 부식을 빼돌리는 일, 검문소에서 또는 특수부대원에게 빼앗기고 나면 병사들의 몫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 자명 했다.
대대는 3개 중대와 대대본부로 부대단위를 이루고 있는데 내가 중대본부로 내려와 복무한지가 꽤나 흘러 거의 전역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다.
어느 날 밤중에 느닷없는 비상이 선포되었다. 왜 비상이 걸렸는지 아무런 징후도 없었다. 중대장까지도 비상출동의 원인을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병사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10분 내로 대대본부 앞으로 집합하라는 대대장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비상명령을 내린 대대장은 작은 키에 성격이 좀 모가 났다. 사병들이 언뜻 보아도 그의 인품은 쉽게 읽혀진다. 우리 대대는 긴급 출동으로 향로봉 고지를 향해 허우적거리며 구보를 했다. 향로봉 8부 능선쯤에서 다시 부대로 회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대대장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부대대장(소령)에게 지휘 책임을 일임한 것 같다. 무전기를 통해 대대장으로부터 귀대명령이 전해온 모양이다. 부대원 모두가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한 동안은 왜 부대가 출동했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들려온 소문은 엉뚱했다. 그 날 낮에 군단장이 예하부대에 시찰을 나왔을 때다. 군단장은 거나한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그 비용을 분담하기로 한 연대장과 사단장은 연회가 끝나자마자 슬그머니 군단장 배웅을 핑계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연회비용은 고스란히 대대장이 뒤집어쓰고 말았다. 대대장은 자기가 바가지를 쓴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로 대대본부로 돌아왔다. 비용을 뒤집어 쓴 화풀이로 부대원들에 그렇게 비상출동으로 앙갚음을 한 것이다. 정말 있을 수도 없고 또다시 이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군부대에서의 괴팍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4
내가 산행을 한 것은 분명 잠시 동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르자 아니었다. 내 마음이 변한 것일까. 시간과 정황이 바뀐 것일까. 내가 착각을 한 것일까. 정신은 들었지만 아직은 분명한 의식 상태라고 말할 수 없으니 그런 명징한 상태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동안이란 것이 한나절인지 아니면 하루 동안이었는지 점점 시간이 흐르고 보니 분명치 않다.
애초에 강호길은 내게 광주에 있는 산이라고 말하면서 기묘한 산을 촬영했던 사진을 보여 준 데서 일은 시작된다. 나는 어떤 이유로 혹은 어떤 동기로 물리적 기능을 가진 내 육체가 아닌 상태로 광주에 소재한 산으로 옮겨 간 것일까.
나는 6개월간의 소총소대에 배치되어 피나게 막 노동일을 했다. 중대본부의 행정병 깜이 되는 신병이 전입하면 초년엔 막 노동일과 잡역일, 그리고 야전훈련으로 단련을 시킨 후 행정병으로 업무를 맡기는 것이 중대의 관례다.
나는 사무 병으로 중대 병사들의 모든 신상에 대한 업무를 총괄했다. 행정을 책임지는 인사계 선임하사가 있다고는 하나 인사계는 행정 실무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행정업무에 밝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대체로 부대 밖의 업무를 선호해 대부분 부대 밖으로 나돌았다. 행정반 업무는 담당병사들이 각자가 책임을 지고 처리한다. 얼마 전 소설가 강호길로부터『매머드 사냥』이란 이름의 작품집을 받은 일이 있었다. 책표지는 앞뒤 검은 바탕으로 장식한 책이다. 앞표지 아랫단엔 코끼리 두 마리가 황무지를 지나고 있는 사진이 곁들어 있었다. 앞서 가는 것은 어미가 되고, 뒤를 바짝 따라가는 것은 체구가 어미의 반 정도 될까하는데 출생한지 일 년은 넘은 아기 코끼리 같다. 뒤표지에는 코끼리 네 마리가 풀을 뜯는 뒷모습의 정경을 배치했다. 작가가 왜 매머드 급의 상징물로 코끼리 그림을 책 표지로 차용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화전민에게 달려든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은 분명 아닐 테고, 코끼리는 양순한 동물이기에 그런 사악한 자들을 상징적으로 대비되기에는 너무나 다른 이질감이 앞선다. 그렇다면 곽 노인을 대동한 화자인 당사자와 박가라는 대학교 재단이사와 강 중령으로 대비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놈이 있었으니 이는 강 중령을 상징적으로 내세운 것일까. 평소에 강 중령은 뒤늦게 깨달은 바지만 마음이 유약해 어린이의 이미지로 설정한다면 어떨까. 모질던 세상사에 휩쓸려 지내던 사악함에서 우주적 순수한 본심으로 돌아온 그는 고결한 성품으로 상징된 산령이 되어 그의 업보를 치르고 영험한 경지에 이르렀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가 삼라만상에 접어들어 철없는 인생들을 위한 천사로 변신하여 작가에게 현시 되었을까.
그가 내게 보낸 작품 중에는 토속 신앙 차원에서 바라본 영험한 산의 분위기를 잘 묘사한 단편「산령山靈」과 시사성이 높은 시대적 정치 상황을 사실감 넘치게 잘 그려져 있는 중편인 「매머드 사냥」등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었다. 작품집은 중견작가가 쓴 것이라는 선입견은 접어두더라도 대체적으로 호감을 불러와 잘 읽혀지는 소설이었다. 글의 성향이 나의 의중과도 맞아 떨어진 것 같다. 나는 지금 강호길의 작품집을 평론하려는 따위나 그의 책을 작가로서 북 리뷰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인사계는 군매점에서 군것질한 금액이 병사 개개인의 급여를 초과한 명단이 월초에 행정반에 올라오면 그 명단에 적힌 병사들을 행정반에 불러 엎드려놓는다. 한 사람 한 사람 반성할 기회를 몽둥이찜질로 대신 한다.
“아직 귀때기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말이야 시건방지게 피. 엑스 거래를 오버 해, 그 따위 버릇을 어디서 배워먹었어! 응, 돈이 모자라면 먹지 말아야지 이 자식들이 아직도 군대정신이 안 들었어, 내가 너희들 군대 맛을 빳다 방망이로 톡톡히 보여 주겠다. 알았나!”
인사계는 나무 몽둥이로 10대씩 매타작을 해댔다. 그렇게 호되게 몽둥이질을 당하고난 병사들의 궁둥이는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런 매를 맞고 지나면 그 때뿐이다. 언제 그랬냐싶게, 그렇게 혼쭐나고도 그 달에도 여전히 월급을 초과하는 병사들이 많아 그런 일은 매월 반복 되었다. 술을 즐기는 병사들로선 인사계로부터 매를 맞는 것은 차후 문제고 당장 갈증이 나는데 소주나 막걸리의 유혹을 어찌 피할 수 있을까. 그런 병사들은 술 마시는 재미 말고는 낙이 없다. 병사들에게는 매월 지급된다고 해서 봉급(俸給) 또는 월급(月給) 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지만 정당한 대가는 아니었다. 아무리 국토방위의 의무가 있어 의무병으로 입대한 병사들이지만 너무나 현실성 없는 금액이 봉급이란 이름으로 사병들에게 지급되는 것은 낯 뜨겁고도 간사스런 짓 같다.
주특기 709의 행정 분류 사병인 나는 중대장의 위임을 받아 모든 인사행정을 맡아 처리한다. 물론 중대장과 소대장들의 신상까지 포함해서다. 장교나 사병들의 포상 휴가라든가 진급, 전역문제, 중대원 월급이 도착되면 각개 병사나 장교에게 지급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처리할 일이 많다. 차 상급 부대인사과에서 10여명의 사병들에 의해 분담 처리되는 업무를 중대 서무계는 인사과 병사들이 요구하는 각종 서류를 작성 보고해야한다. 업무범위가 그렇게 다양하고 폭이 넓다는 말이다. 물론 몇 천 명을 지휘하는 차 상급부대와 정원이 170명인 중대병력을 다루는 행정업무량은 병력 수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5
다시 사진에 대한 등산이야기를 지속 해야겠다. 나는 그 때 그가 보여 준 사진을 분명 그와 함께 감상하고 있었다. 아니 감상이라고까지 격식을 갖추어 말할 게재가 못된다. 그냥 고개를 바짝 들이대고 무심하게 보고 있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진은 디지털 카메라 뒤쪽에 장착된 액정화면에 나타난 피사체로 찍힌 산을 보고 있다. 그가 얼마 전에 촬영해온 사진이라면서 내게 보여 준 것을. 사진기는 그가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무게감 있는 니콘인지, 캐논이었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꽤나 고급스런 사진기임엔 틀림없다. 언젠가 소설가협회 지방 세미나에서다. 그는 사진작가에 가까운 수준으로 능수능란하게 사진기를 다루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 송부해 주는 그 이상에 그의 숨은 또 다른 뜻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게는 그에 대한 그 이상의 사실을 알 이유도 없다.
그가 촬영한 산이 광주에 있다는 기억으로 지금 그 산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와 함께 동반해서. 구체적인 기억은 나지 않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그가 아주 경치가 좋고 위엄이 깃든 신령한 산이라서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내게 재의했을 테고, 지금 나는 그의 카메라에 담긴 피사체의 산 형상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분명 그의 제안에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앞서 내려올 때 감지했던 앞산에 대한 영험함에 위압감이 들다 못해 현기증까지 일으켰던 산임엔 분명했다. 그런 산에서 소리 없이 부르는 산령이 된(강 중령이 아닌)그 천사의 손짓에 나도 모르는 사이 따라나섰을 테고, 나는 산령보다 천사라는 이미지에 더 호감이 가기에 천사라 부르려고 한다. 그 때 나는 이 세상인지 분명치 않으나 차원이 다른 경지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상태가 몇 차원의 세계라는 것도 나는 알지 못했다.
이제 의식이 뚜렷해지고 보니 그 동기나 목적의식 여부에 관계없이 산행이 이루어진 것 같다. 현실의 경험과는 달리 별도로 내면적이고 신비가 깔린 지구 어느 구석에서 일어난 것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는 볼 수 없는 산을 보이도록 가상으로 꾸며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 그와 함께 지금 산행에 들어서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순간 지금의 기억이 없는 사진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 밖에는 알지 못한다. 어떤 경로를 통해 강호길과 함께 광주에 있다는 그 산을 감쪽같이 오르게 되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상태다.
내게는 그것이 신비로운 일에 가깝다. 어떤 상황에서 산에 올랐다가 하산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나 산행에서 돌아온 것은 분명하다. 그 때 나는 그 산이 언젠가 한 번 다녀왔던 것처럼 산의 모양새는 그리 낯설지 않다. 다행히 우리는 헤매지 않고 무사히 하산해 우리가 묵어야할 허름한 방으로 들어간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옆에 있는 또 다른 방으로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내가 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시간이 흘러가자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어떤 말을 했는지 영영 기억에 떠오르지 않은 채.
6
한 노병사가 몇 차례 군 감옥에서 지내다가 10여년이 넘도록 제대를 못하고 이날 출옥해 우리 부대로 전입해온 일이 있다. 거의 40대에 접어든 노 병사다. 그는 이제 이 부대에서 그 동안 지긋지긋한 군 감옥 생활을 청산하고 제대를 해야 하겠다고 각별히 다짐하고 있었다.
소총소대에 배치된 어느 날 그가 소대생활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행정반에 들어와 내게 통사정을 했다. 그의 소원은 취사병으로 근무하는 것이었다. 보병 아닌 취사병 행정병 등 기타 특수병과는 일주일에 하루씩 별도의 교육을 실시하나 형식적인 교육일 때가 많았다. 그러기에 일반 훈련이나 잡역동원은 면제된다. 특수병과인 취사병은 사병들의 음식을 책임져야할 책무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고참병이 되면 보조 병들에게 지시나 하고 밥하고 국 끓이는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관여하지 않는다. 나는 인사계에게 보고하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대대 단위의 취사이기에 대대본부의 소속 취사장 책임자인 선임하사에게 요청해 양해를 구해야 하는 절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더라도 보통은 중대 서무 병의 입김으로 그 정도의 소원은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그는 10여 년 동안 군대 감옥 생활을 한 데다 나이가 40대에 접어들고 있으니 굳어 있는 신체는 활기 넘치는 소대생활에 한계가 있었다. 그의 몸은 여간 굼뜨지 않았다.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어 결국 그는 소대원들과 일체감 있게 생활할 수 없었다. 군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소대원들의 민첩한 활동이나 훈련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동작이 굼뜨면 선임하사로부터 빳다 세례가 쏟아지기 마련. 그런 상황에서 연령대로보아 군 생활이 몸에 배지 않은 그가 견뎌내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다른 부대에서 이런 그의 신체조건을 감안하지 않고 말단 소대생활을 강요하다시피 한 결과 탈영을 밥 먹듯이 자행했던 것이다. 나는 그와 개인 상담을 통해 그런 그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에게 소대원 생활을 강요하면 탈영을 부추기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같은 병사로서 그의 사정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가 각별히 다짐했던 대로 군 생활을 마치고 이번만은 필히 전역하게 되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도움을 주기로 작정했다. 그가 취사장에 배치된 후 몇 개월간은 식당 일에 잘 적응해 나갔다. 급박한 보고사항이나 행정업무가 바쁠 때 나는 식사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때가 있다. 그런 때 그 노 병사는 특별부식(육류나 생선)이 나올 때마다 반합에 따로 챙겨다 행정반으로 가져오곤 했다. 이를 사양한 내게 그는 한사코 “양 하사님을 내가 챙겨드리지 않으면 끼니를 굶고 있으니 어떻게 그냥 모르는 척 하겠어요. 저의 소원을 들어주신 고마운 사람에게 이게 뭐 대수라고 그럽니까. 내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사양마시고 어서 아침을 드세요.”
그의 정은 고마웠지만 그가 나이로 보나 군번으로 봐도 형님이 되어도 몇 째 형님이 될 텐데, 이런 심부름을 하게 용납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우선 앞섰다.
우리 부대로 전입해 와 6개월짼가 되는 어느 날, 그가 행정반으로 나를 다시 찾아왔다. 집에 노모가 몸져누워 계시다는 것을 이웃 사람이 써 보낸 편지를 가지고 와 내게 보여 주었다. 그러니 어쩌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참 딱한 노릇이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청원휴가인데..........정말 난감했다. 물론 사고경력이 없는 정상적인 병사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아 당연히 청원휴가를 신청할 수 있지만 이 노 병사에겐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청원휴가를 신청해 줄 해당 병사는 결격사유가 없어야 한다. 그는 사고자란 낙인이 찍힌 특별관리 대상이었다. 그를 청원휴가를 보내고 말고의 결정권은 중대장의 재량에 달린 문제이긴 하나, 나는 인간적으로 그에 대한 연민에 정이 있어 그랬는지 개인적인 그의 신상에 결함이 있음에도 어떻게든 그를 도와주고 싶은 충동이 앞섰다. 중대장에게 사병들의 소원을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검토해 달라고 건의하고 인사계(상사)에게도 통사정을 했다. 그러나 중대장은 물론 인사계 까지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다. 그의 전력으로 보아 귀대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 그는 그의 몸이 부대 밖으로 벗어나기만 하면 귀대하지 않는 전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전역기간은 앞으로 1년여를 남겨두고 있는데.
병석에 누워있는 부모를 자식으로서 돌봐 드려야하는 외아들로서의 그의 처지가 군율과는 상치되니 어쩌면 좋을까. 그에게 군율은 차후 문제이고 부모와 자식의 문제가 더 우선일 거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가 책임지기로 작정하고 중대장과 인사계에게 매달렸다. 다행이 그들은 장교와 사병의 처지를 떠나 결국 인간적으로 동정심이 발동했는지 반승낙을 받아냈다. 나는 곧바로 그에 대한 피치 못할 사정을 이유로 적어 청원휴가를 신청했다.
중대장과 인사계의 승낙을 받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지금까지 내가 책임감 있게 중대 인사 행정업무를 하자 없이 잘 해 온 까닭도 작용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이어져 왔던 차 상급부대 행정부서 담당자들과의 유대감을 갖게 된 것은 전임자로부터 물려받은 방법을 활용해 온 것도 보탬이 되었다. 유기적으로 차 상급부대 인사과의 관련 병사들과 평소에 친분을 두텁게 쌓아두면 중대의 업무처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군 법률로 정해진 진급, 전역, 연가, 봉급 등 대통령 령 또는 국방부령으로 하달된 것은 중대장의 재량이 미치지 못했지만 사단 이하 부대의 권한에 속하는 모든 업무에는 유리한 점이 없지 않았다. 사병의 복지 측면에서 다른 부대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것은 서무병사의 역량과도 무관치 않았다. 차 상급부대와의 유대는 이미 전역 해 나간 선임 병들이 전통적으로 지속해 온 것을 그대로 내게 까지 물려진 것을 지속적으로 유지 해 온 것이다.
나는 어떤 연유에서 이런 생각이 밤사이에 떠오른 것일까. 잠에서 깨어나고 보니 새벽 4시 30분이었다. 강호길이 말한 「산령」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감명 깊게 일었던 그 「산령」을 다시 읽어본다.
죄 없는 화전민 세 가족을 죽도록 방치한 것은 결국 자기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후회하고 자책했던 강 중령, 그는 군복까지 벗었어도 불쌍한 죽은 이들에게 지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산행 중에 소낙비가 범람한 계곡물은 세차게 하천으로 흘러내린다. 급작스럽게 불어난 물을 미처 피하지 못한 강 중령은 급류에 휩쓸려 그의 주검까지도 사라져버린다. 군경 합동으로 헬리콥터까지 동원된 수색작업도 결국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의 소지품이라던가, 그를 증명해 낼만한 아무런 증거물이 되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수색작업은 무위로 돌아가고, 작중 인물이기도 한 작가 일행은 우정과 윤리적인 책임감을 느껴 몇 년을 그렇게 산행을 통해 강 중령을 애타게 찾으려 했으나 그의 시신은커녕 지금껏 그의 행적조차도 오리무중이었다. 높고도 유명세를 지닌 산악은 기후변동이 보통의 산과는 유다르게 심통을 부릴 때가 많았다. 대표적인 백두산4) 천지가 그렇고 절경이 아름답다는 금강산5)이 그렇다. 이런 명산들은 설사 날이 맑게 갠 날에 등산을 한다 해도 어느 틈에 급작스럽게 물안개가 서리거나 비가 내릴 때가 있다. 그것도 폭우로 퍼부을 때가 많다. 잠시 또 기온이 내려간다 싶으면 눈이 내려 산악인들의 발길을 묶어 놓아 꼼짝달싹도 못하게 해 황당할 때가 있다.
남쪽의 명산, 설악산6) 지리산7) 그리고 한라산8)도 기후가 변화무쌍하고 일교차가 심한 대표적인 영산이다. 특히 백두산과 금강산은 비가 오거나 물안개가 자욱해 일 년 내내 맑은 날이 흔치 않다. 날씨가 좋다가도 급작스럽게 우기가 몰려오거나 기온이 급강하할 때가 흔했다. 내가 근무하던 낮은 향로봉에서도 여름밤일지라도 비가 오고나면 수은주가 급격하게 내려갔다. 그러면 나무에는 자동으로 고드름이 맺혀 있게 된다. 겨울에 내리는 눈은 초여름까지 녹지 않는다. 이에 비할 바 없이 높은 명산이야 기후변동이 오죽할까.
그렇다면 그의 주검을 찾을 수 없었던 강 중령이 어떻게 신령으로 나타났을까. 그는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외계인에게 납치라도 당한 것은 아닐까. 외계인들이 지구를 내방할 때 지구인들은 자신들을 신이나 또는 천사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비행접시는 이동할 때 지구인들이 식별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도 그럴 테고 지구인들의 심중을 모두 꿰뚫어보기도 할 테지만, 우주인들의 여러 정황이 지구인들 보다는 훨씬 진보된 것이 신비에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7
아니나 다를까. 15일의 청원 휴가기간 날짜가 다 됐는데도 노 사병으로부터는 감감무소식이다. 나는 불안 한 마음으로 밤 12시(보통은 10시)까지 귀대 마감 시간을 연장하여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날 24시간 내에 부대 미복귀자로 차 상급부대에 보고를 해야 할 사항이었다. 노 병사에 대한 나의 결단을 부정적으로 봤던 주위 병사들은 시선들이 곱지 않았다. 그들 시선에 어린 불만은 거보란 듯이 나를 질시하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이 일을 중대장과 인사계에게 책임진다고 우겨 청원휴가를 보낸 당사자이니 실질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 일 단 차 상급부대 담당 병에게는 실제적인 상황인 미귀자로 유선 보고를 했다. 그 담당병과 나와는 사실상 묵계가 있었다. 사실은 사실대로 보고하되 재량 있는 차 상급부대 담당 선에서 그 위 상급부대에 규정된 일정 범위 내에서 최대한 보고를 늦추는 것이다. 군대에서 허위보고란 어마어마한 중징계 감이었다. 비록 하사관인 서무계가 책임진다고 한 것은 중대내부에서는 통용될지 모르나, 상급부대와의 공적인 책임은 중대장에게 있다. 중대장으로서는 이런 때 참으로 불편부당한 일이었다. 사고는 믿었던 부하하사관이 치고 실제적인 책임을 묻게 되니 중대장으로서는 부당한 군율이었다. 사고가 일어나면 모든 것을 부대장인 자기가 처벌받아야 했으니까, 그런 중대장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내가 중대장의 처벌을 무책임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야 없다. 이일을 수습하기 위해 내가 발 벗고 나서야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는 차 상급부대 담당 실무자와 언제나 은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군인도 정이 깃들어있는 인간이었다. 군 행정업무 간에도 인간적인 호소를 해올 때는 군 규정만을 주장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한 인간을 기필코 처벌주기위한 것이 군율만은 아니라는 것에 실무진간에 서로 공감한 것이다. 가능한 처벌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내게 책임이 지워진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이번 노 병사 미귀사건만은 그를 군 감옥에 보내지 않고 전역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동정심이 강한 느낌으로 작용했다.
나의 그런 의지가 중대장, 인사계, 차 상급부대 담당 하사관을 설득 양해를 얻어낸 것이다. 나는 일주일 특별휴가증을 소지하고 서울 아현동에 거주하는 노 병사 집을 찾아 나섰다. 70이 지난 그의 노모는 판자로 가려진 오두막 같은 곳에 몸져 누워있었다. 그런 노모를 부양하기 위해 노 병사는 아현동 어느 쌀가게에서 쌀을 배달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움찔 놀라는 표정이었다. 자기를 체포하러 온 것으로 생각해 적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군 수사기관에서 곧 체포하러 올 것을 대비해 각오는 하고 있었다고 한다. 부드러운 내 말투와 자초지종을 듣고 그는 이내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쓰러내려 안정감을 찾은 것 같았다. 그리고는 고마움에 복받쳐 눈물을 지었다. 그가 집에 와 보니 어머니는 몸져누워 계시며 병환 중에 누구하나 돌봐줄 사람은 없었다. 병석에 있는 어머니를 버려두고 부대로 발길을 차마 옮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 병사라고 어찌 이 번 만은 무사히 전역을 해야겠다는 각오가 안 섰을까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현실 앞에 군에서의 처벌은 잠시 뒤의 일이었다. 나는 부대의 긴박한 분위기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고 일단 그를 안심시켰다. 더불어 그를 처벌하지 않고 이번에는 꼭 전역을 하도록 돕겠다는 중대장의 뜻과 부대원들의 용기 있는 귀대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내 말대로 따르면 중대장과 중대원들이 분명히 약속을 지킬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그날 저녁으로 나는 그를 앞세워 그가 종사하던 쌀가게 주인을 만났다. 그와 함께 일하던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그의 딱한 처지를 전해 주고 도움을 요청했다. 병석에 누워 있는 그의 노모를 보살펴줄 것을 애원했다. 그가 다시 특별휴가를 얻어 돌아올 때까지 그의 어머니를 맡아달라고 통사정 했다. 그 은혜는 제대해서 꼭 갚겠다는 것을 노 병사는 눈물로서 호소했다. 그의 이웃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실을 전연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군인 신분이면서 이렇게 탈영을 밥 먹듯이 해 왔다는 사실도 금시초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력이 부끄러워 지금의 거주지로 옮겨 살게 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탓도 있다. 그는 방 월세가 부담스러워 더 허름한 방을 얻어 이사 온 것이다.
그의 이웃 사람들은 노 병사에게 어머니 걱정은 하지 말고 부대로 돌아가라고 선뜻 격려해주었다. 쌀가게 주인은 그가 제대할 때까지 어머니가 필요한 식량은 대주겠다고 약속했다. 쌀가게에서 함께 일하던 이가 어머니 뒷바라지를 돕겠다는 다짐도 들었다. 참 고마운 이웃사촌이었다. 효의 측면에서 보면 그는 심성이 고운 효자가 분명했다. 그러나 나라에 충성이 효보다 우선일 때 국법은 준엄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에게는 병든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었다.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구 한 사람 도와 줄 친인척도 없으니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국법은 중대했다. 그런 사사로운 일까지 베려할 수 없는 것이 군율이었다. 아마도 지금은 노 병사의 경우 같은 처지라면 군 법률적으로 군 생활을 면제 등 적절한 대책이 있을 것이다.
당시에도 비록 그런 삭막한 군율이 있더라도 이를 다루는 실무자들의 재량에 따라 군율을 벗어나지 않고 얼마든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와 나는 다음 날 부대로 일찍 귀대했다. 겨우 안정을 찾아 부대에 돌아온 그는 어머니 생각에 처음엔 일손이 잘 잡히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10여일이 지났을까. 주위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그의 노모는 병석에서 일어나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안부의 편지가 부대로 날아왔다. 쌀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과 동네 이웃집으로부터 두 차례나 부대로 편지를 발송했던 것이다.
나는 중대장의 인장을 소지하고 중대장이 바쁠 때는 내 마음대로 서명하여 모든 문서는 서무하사관인 내손에서 처리되어 발송되곤 했다. 권한이 주어진 만큼 책임도 따랐다. 그렇다고 내가 내게 일임된 권한을 남용한 일은 결코 없었다. 차 상급부대에 공문서식을 상신하는데 규정위반(차 상급부대의 공문서 규정은 상단 부문 2.5cm, 하단부문엔 2cm, 옆 부문엔 1.5cm씩 각각 띄어 쓰는 것이나 내용상의 틀에 벗어나면 「규정위반」이라는 고무인을 찍어 회송된다)을 세 차례 이상 받으면 중대장 견책사항으로 군 기록카드에 반영이 된다. 중대 서무계의 행정업무 잘못 여하에 따라 중대장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중대는 전통적으로 차 상급부대와 인사과 장교계, 사병계, 서무계 등 여러 부서 담당 행정병과 유대가 돈독했다. 휴일이면 그들과 어울려 외출하여 함께 식사도 하고 새 작업복이나 소모품이 필요하다고 하면 보급 담당 병에게 부탁해 재고품에서 그들의 필요사항을 채워주곤 했다. 상급부대에서 상금을 내 건 아이디어 공모에 포상금 제도가 가끔 있었다.
한 번은 상부에서 안전수칙 제안 공모를 해 왔다. 나는 다짜고짜 거기에 응모해 엉겁결에 당선되었다. 포상금을 받으면 그들과 함께 시간을 가지면서 그에 대한 비용을 충당하곤 했다. 그 때의 포상금은 당시 내(일반하사 급여는 800원, 병장은 200원)급여의 10배가 넘는 큰돈이었다. 그런 기회를 적절히 활용한 덕에 부대장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 없이 업무를 원활하게 처리하게 되었다. 전임 서무하사관들은 업무에 달관하여 제대 6개월 전부터 차 상급부대 동료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며 요령을 피웠다. 그래도 자기 업무는 깔끔하게 잘 처리했다. 그들 모두가 대대로 전통을 이어받아 업무에 유종의 미를 거두고 모두들 전역을 해 성공적으로 사회에 진출했다. 그러나 나는 제대 당일까지 업무에 손을 놓지 못했다. 요령부득인지 아니면 내가 일복이 터져 그랬을까. 이거 하나 분명한 것은 전임하사관은 대대로 전해진 깔끔한 필체를 내게도 어김없이 물려졌다. 그들의 필체는 한 결 같이 면사무소 호적계 담당자의 필체처럼 매끄럽고 유려했다. 원래 내 필체는 별로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었으나 그들의 글씨체로 바뀌어 사회생활에서도 득을 보았다.
8
한 때 나는 아파트 건물을 맡아 근무할 때,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의 기록 칩을 모니터에 연결 검색 해 본 일이 있었다. 아파트 방문객들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개개인의 몸동작을 엿볼 수 있었다. 이래서 주민들의 사생활에 대한 침해가 되겠구나 싶었다. 남녀가 부둥켜안고 포옹과 입맞춤 등의 모습을 뜻하지 않게 엿볼 때가 있었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옷매무새를 뽐내는가 하면 갖가지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내가 이렇게 주민들의 개인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장면들은 반대로 되돌리거나 빠른 속도로 원점으로 되감으면 속도가 너무 빨라 사람의 형태조차 식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는 속도의 수치라든가 계수의 단위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더 빠르게 회전시키면 아애 물체의 흔적조차 확인하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외계인이 타고 온 나선형 비행접시는 그 빠르기가 사람의 시야를 초월해 벗어난 상태라라는 것을 인지했다. 유한된 우리 지구인의 시력으로는 포착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지구인의 약점을 이용해 자기들 안방 드나들듯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지구를 내방해올 것이라는 상상은 너무나 자명했다. 그 일은 사실감 넘치는 현실이 될 것이었다. 그런 정황 하에 드나드는 외계인들이 지구인의 눈에는 쉽게 눈에 띄지 않을 터였다. 그들에게 협조가 가능하고 이해심이 넓고 심성이 고운 사람들만을 선택 개인적인 접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만 지구인에게 그들이 발견되는 순간은 지구 이착륙을 위해 속도감을 어느 시점부터 줄여야할 때 일 것이다. 이는 그들의 조금도 오차 없는 사전 계산된 의도적인 작전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지구인 개개인의 속성과 인격을 감지하는 휴먼전자파를 이용 그들이 접선하기 좋은 곳으로 비밀리에 유도하는 경지까지 진보해 있을 것이었다.
「매머드 사냥」의 화자는 강 중령의 실종이 단순 실종 같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처럼 예기치 않은 실종이 아니라 사전에 충분히 준비 되었던 계획적인 실종이었다고 하는 데서 더욱 심중을 굳힌 것이다. 어디엔가 분명히 강 중령이 살아 있을 것이란 그의 믿음이 이를 뒷받침한 것이리라.
그의 말처럼 감쪽같이 정말 공기 중에 사라져 버린 것일까. 나는 또 다른 방향에서 상상해 보았다. 강 중령은 물길에 조난당했다. 그의 시신은 산골에서 흘러내리는 물길 따라 흘러 종국엔 강물에 잠겨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상태를 가정한다면 조난을 산악 지점에서 그의 주검을 찾는다는 것은 헛수고 일 뿐이다. 그러나 그가 분명 공기 중에 사라졌다고 하는 것이 맞는다고 하면 강 중령은 분명 외계인의 구조로 사라졌을 것이란 판단이 선다. 그렇다면 강물에서 그의 시신을 찾는다는 것조차 허망한 일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실종이 있었으나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미궁에 빠진 사건이 얼마나 많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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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香爐峰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과 수동면 사이에 있다. 1,293미터.
2) 嚮 導 : 소대 선임하사를 대리하는 선임 병.
3) 巫 山 강원도 高城군과 麟蹄군 사이에 있다. 1,320m.
4) 白頭山 : 함경남북도와 중국 심양과의 국경 사이 長白山脈의 동방에 자리 잡은 한국 제1의 산. 최고봉인 兵使峰에 칼데라호(caldera 湖)인 天池가 있다. 2,744미터.
5) 金剛山 : 강원도 북부에 있는 黑雲岩과 花崗巖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奇巖怪石이 많다. 1만 2천봉의 곳곳에 폭포, 못, 사찰이 있어 그 경치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철 따라 봄엔 금강산, 여름엔 蓬萊山, 가을엔 楓嶽山, 겨울엔 皆骨山이라 부른다. 위치상으로 內霧재의 서쪽을 內金剛, 동쪽을 外金剛, 바다에 솟아있는 섬들을 海金剛이라 부른다. 특히 외금강에는 新萬物草, 구만물초, 내 만물초가 있다. 1,638미터.
6) 雪嶽山 : 강원도 襄陽군과 麟蹄군 사이에 있다. 太白山脈 중에 솟은 명산이다. 주봉은 大靑峰, 태백산맥을 동서 경계선으로 하여 인제군 쪽을 내설악, 양양군 쪽을 외설악이라고 한다. 남한 3대 고산 중의 하나. 그 高峻雄壯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경관으로는 飛仙臺, 蔚山바위, 飛龍瀑布, 金剛窟, 장수대, 新興寺 등이 있다. 1,708미터.
7) 智異山 : 경상남도 咸陽군, 山靑군과 전라북도 求禮군 사이에 있다. 소백산맥의 서남단 지역에 높이 솟아있는 殘丘로 洛東江의 분수령을 이루고 예로부터 方丈山, 頭流山과 함께 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서남쪽의 老姑壇에 이르는 일대의 산림은 놀라운 자연림으로 식물학, 林學의 좋은 연구지다. 국립공원의 하나. 1,915미터.
8) 漢拏山 : 제주도 중앙의 주봉. 산 위에는 둘레 3km, 직경 500m의 大噴火口였던 白鹿潭이 있고, 산허리에서 산기슭에 걸쳐 300여개의 側火山이 있다. 화산체는 제3기말에서 4기 초의 암류와 그 후의 玄武岩으로 이루어져있다. 1002년과 1007년에 분화하여 많은 용암을 분출시켰다. 지금은 休火山이다. 삼신산의 하나, 북쪽 기슭에 있는 三姓穴은 道民의 創祖인 세神人이 용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참나무, 산 벚나무, 단풍나무 등의 고목을 비롯하여 三帶의 식물이 울창하다. 학술연구 자료의 수집 장소다. 국립공원의 하나. 1,950미터.
고천석 : 자유문학에 단편 <익명>으로 신인상
<세레나데><물너울 저편><공유결제시대> 등 단편집과
<풍류랑의 애가><금술잔>등 장편소설 5권 출간
한국소설가협, 한국문인협회, 자유문학, 한국세계작가회 회원.
황희문화예술상 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