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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선사와 배휴의 문답 1부
(전심법요)
일 러 두 기
황벽(?~850)스님은 당나라 선승으로 법명은 희운(希運)이며,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의 법을 이었다. 일찌기 출가하여 여러 곳을 다녔으며 유력하였는데 키가 7척이었다. 이마에는 둥근 혹이 있었고, 영특하며 천성적으로 선(禪)을 알았다고 한다.
천태산에서 배우다가 마조대사를 찾아가니 벌써 입적한 뒤였다. 마조의 법을 받은 백장선사를 찾아 법을 물었더니 백장선사가 말하기를 "내가 한번은 방장실에 들어가니 마조화상이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기에 내가 말하기를 "다만 그것뿐이지 딴 것이 있습니까?" 하니 마조화상이 불자를 내려놓으면서 "네가 이후에 후래를 가르친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더라.
내가 그때 불자를 다시 들어 보이니 마조화상 말씀이 "다만 그것 뿐 딴 것이 있느냐?" 하기에 내가 불자를 도로 내려놓고 자리에 앉으려 하니 마조화상이 벽력같은 "할"을 하셨는데 그때 내가 사흘이나 귀가 먹고 눈앞이 캄캄하더라." 하는 말에 황벽스님이 크게 깨쳤다고 한다.
그 후 백장의 법을 이어받아 여러 곳으로 다니며 신분을 숨기고 지냈다. 한번은 용흥사에 와서 청소나 하면서 머물고 있었는데 홍주자사(洪州刺史) 배휴가 왔다. 배휴는 안내하던 스님에게 법당 벽 그림을 가리키며 "저것이 무엇이요?" 라고 묻자 안내하는 스님이 말하기를 "고승의 상(像)입니다."
배휴가 다시 묻기를 "형상인 즉 볼 만하나 고승은 어디 있소?"
스님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니, 배휴가 말하기를 "이 절에는 선승이 없소?" 라며 묻는 것이었다.
스님이 말하기를 "최근에 한 스님이 와 계신데 선승같이 보입니다."
배휴는 그 스님을 불러오라 하였다. 바로 황벽스님이다.
배휴는 황벽스님이 오자 고승의 그림을 가리키며‘형상은 볼만하나 고승은 어디 있소?’라고 물었다.
황벽이 즉시에 "배휴!"하고 불렀다. 배휴는 엉겁결에 "네!"하고 대답하니,
황벽스님은 말하기를 "어느 곳에 있는고?" 하는 데서 배휴가 활연히 마음이 열렸다. 배휴는 그 자리에서 예를 올리고 조석으로 예배하며 법을 물었다. 그 후 황벽스님은 배휴의 간청으로 홍주 대안사에 있으면서 대중을 교화하였다. 황벽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가 12명이며 그 중에 임제스님이 법맥을 이었다. 황벽스님의 선사법요인 완능록(宛陵錄)과 전심법요(傳心法要)는 배휴가 기록한 것이다.
황벽스님의 게송
번뇌를 멀리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니
승두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할지어다.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塵勞逈脫事非常 緊把繩頭做一場
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
황벽희운 선사는 몇 년도에 출생했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그가 입적한 연대는 서기 850년이다. 남악회양으로부터 3세손이며 백장회해 선사의 법제자다. 그 아래로 임제의현 선사가 나와 임제종을 열었으니 황벽선사는 임제종의 새벽을 열어 준 원조이기도 하다. 선종의 법맥은 초대 보리달마로부터 이어져서 35대 마조도일, 36대 백장회해, 37대 황벽희운, 38대 임제의현, 39대 흥화존장으로 이어지는 법맥이다.
일명 단제선사로도 잘 알려진 황벽희운 선사는 이마에 혹이 불끈 솟아있어 불법과 인연이 깊다고 하는 말을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계신 어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황벽스님의 어머니는 사(謝)씨였다. 사씨는 열 다섯에 결혼을 하여 스물한 살이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다. 사씨는 가까운 곳 황벽산의 조그마한 산사에 올라가 열심히 불공기도를 올렸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였는지 그로부터 사씨는 태기를 느꼈고 마침내 스물두 살 되던 해에 황벽을 낳았다. 그들 내외는 황벽산에서 기도하여 아이를 얻었다 하여 이름을 황벽이라 했다.
황벽스님은 고향에 있는 황벽산에서 삭발 득도한 뒤 나중에 천태산에 이르러 정진하다가 백장회해 선사를 만나 입실을 허락받게 된다. 백장 문하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 사씨가 천 오백리나 되는 먼 거리를 걸어 황벽을 찾아왔다.
사씨는 오로지 황벽을 만나기 위해 머나먼 길을 두 달 동안이나 걸려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황벽은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다. 사씨는 임시로 숙소를 정하고 황벽을 만나보고 가리라 마음먹었지만 두 달이 흐르도록 황벽을 만날 수는 없었다. 사씨는 하는 수 없이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돌아오고 말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벽스님! 내가 자네를 찾아 온 것은 자네의 마음을 흐트러뜨리기 위함도 아니요, 자네를 데려가기 위함도 아니다. 내가 자네를 데려가기 위함이거나 또는 자네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려 함이라면 애초에 자네의 출가를 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벽스님! 이는 다만 어미의 마음이 이토록 간절함을 보여줌 외에는 다름 아니다. 부디 열심히 정진하라. 자네가 처음 집을 나올 때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깨달음은 속하고 속할 것이다.
황벽 스님! 어미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처럼 오로지 부처님을 잊지 않고 화두를 챙긴다면 자네의 깨달음은 속하고 속할 것이다. 할 말은 많지만 어미가 자식에 대한 마음을 어찌 글로 다할 수 있으랴. 부디 진중하고 또 진중하라…. 어미로부터….”
황벽스님의 피나는 수행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를 만나지 않고 되돌려 보낸 알량한 출가의식을 참회하며 정진한 끝에 마침내 백장 선사의 법을 이었다. 그리고 임제선사를 만나 법을 전하고 영원한 고요 속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황벽스님의 깨침 뒤에는 바로 그의 어머니 사씨의 편지 한 통이 있었던 것이다.
목 차
1장, 참마음 깨치면 부처 --------------------------------- 9
1. 모두가 참마음 -------------------------------------- 9
2.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버리면 부처이다 ------------ 45
3. 모양에 집착하여 부처를 구한다면 악법이다 ----------- 52
2장, 무심이 도 ---------------------------------------- 66
1. 무심도인에게 공양 올리는 것만 못하다 --------------- 66
2. 언어가 끊기고 뜻이 없으면 청정 부처이다 ------------ 76
3장, 근원이 청정한 마음 ------------------------------- 119
1. 부처 자리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 ------------------- 119
2.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찾지 말라 --------------- 122
3. 일체의 법은 얻었다 할 것이 없다 ------------------- 136
4장, 일체를 여윌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 --------------- 144
1. 본래의 마음은 맑아서 호호탕탕 걸림이 없다 --------- 144
2.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단박 깨달으라 --------- 147
5장. 허공이 곧 법신 ----------------------------------- 153
1. 일체를 여읠 줄 아는 이가 곧 부처이다 -------------- 153
2.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이다 ------------- 156
3. 성품이 곧 마음이며 마음은 곧 부처이다 ------------- 161
4.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인들 어디 있겠느냐 ------------ 167
5. 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있다 ------------------------- 175
6장, 마음을 잊어버림 ---------------------------------- 178
1.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참마음이다 ------------------ 178
2. 만법은 오직 마음일 뿐이다 ------------------------- 188
3. 참된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오고감이 없다 ----------- 194
7장, 법(法)은 무생(無生) ------------------------------ 198
1. 본래 마음에 계합할 뿐 ----------------------------- 198
2. 마음을 비우면 경계는 비고, 현상은 고요하다 -------- 203
3.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비었음을 모르고 있다 --------- 208
4.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 -------------------- 213
5. 한 법도 설할 만한 법이 없음이 설법이다 ------------ 219
6. 오직 일승의 도가 있을 뿐이다 ---------------------- 223
8장, 도(道)를 닦는다는 것 ----------------------------- 226
1. 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 226
2. 법이란 구하여 찾을 필요가 없습니까? --------------- 231
9장, 말에 떨어지다 ------------------------------------ 237
1. 말에 떨어진다고 하십니까? ------------------------- 237
10장, 사문이란 무심을 얻은 사람 ----------------------- 242
1. 실다운 법이란 없다는 말씀입니까? ------------------ 242
2. 묻는 곳에서 이미 전도된 것입니까? ----------------- 245
3. 알음알이로 배우면 도에는 도리어 어둡다 ------------ 249
4. 도에는 일정한 방위와 처소가 없다 ------------------ 252
5. 마음에는 방위도 처소도 없다 ----------------------- 255
6. 사문의 자리는 생각을 쉬어서 이루어진다 ------------ 257
7. 지식과 견해 때문에 도가 장애가 된다 --------------- 269
8. 집착함이 없으니 이것이 일없는 사람이다 ------------ 275
9. 삼승의 가르침은 다만 때맞추어 먹는 약이다 --------- 281
11장, 마음이 부처 ------------------------------------- 288
1.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다 ------------------------ 288
2. 한 생각 뜻이 생기면 6도에 떨어진다 ---------------- 294
3. 곧 그대로(卽)'라 함은 무슨 도리입니까? ------------ 303
12장,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다(以心傳心) -------------- 308
1. 망념을 없애려는 것 또한 망념이 되느니라 ----------- 308
2. 마음을 깨치면 곧 마음도 없고 법도 없다 ------------ 317
3. 마음의 성품은 얻더라도 알았다 하지 못한다 --------- 322
13장, 마음과 경계 ------------------------------------- 328
1. 마음은 경계를 비추는 그림자일 뿐이다 -------------- 328
2. 성품을 수천 가지로 말한 들 헛수고이다 ------------- 341
14장, 구함이 없음 ------------------------------------ 345
1. 도인이란 일 없는 사람 ----------------------------- 345
15장, 머문 바 없이 마음이 나면 곧 부처님의 행 --------- 349
1. 마음이 없기만 하면 번뇌 없는 지혜 ----------------- 349
2. 부처란 본래 자기 마음으로 짓는 것 --------------- 352
3. 모든 행위는 무상하다 ------------------------------ 354
4. 한 물건도 없나니,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 361
16장, 육조(六祖)는 어째서 조사가 되었는가? ------------ 363
1. 점수와 돈오 --------------------------------------- 363
1장, 참마음 깨치면 부처
1. 모두가 참마음
황벽스님이 배휴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참마음일 뿐 거기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마음은 본래로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거나 낡음을 따질 수도 없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 넘어 바로 그 몸 그대로 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 버린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으며 재어볼 수도 없다. 이 참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중생은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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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스님은 배휴에게 말하길 참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를 찾고자 하면 이룰 수 없으며 망상만 늘어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라고 하였다. 깨달은 선사들은 이와 같은 이치를 일관되게 말한다.
어째서 찾고자 하면 이루지 못하며 구하고자 하면 점점 더 멀어진다고 하는 것인가를 살펴야 한다. 만약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마음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혼란만 가중될 뿐 어리석음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새로운 안목을 지닐 것이며 진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얻을 것이다.
붓다는 능엄경에서 이르길 수행자가 비록 많이 듣고 알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과오를 이루게 된 원인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수행자들이 무상보리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다 2종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착란하게 수행하는 탓이니 마치 모래를 삶아 좋은 음식을 만들려는 것이라 비록 미진 같은 겁을 지내어도 될 수 없는 일이니라.
무엇이 이종이냐, 하나는 너와 중생들이 사물을 의지하여 생기는 생멸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은 것이요, 둘은 보리 열반의 본체는 본래부터 청정하고 밝건만 다시 밝히려는 무명으로 인하여 밝음을 잃어버린 것이니라. 모든 중생들이 본래부터 밝은 본체를 잃어버린 탓으로 종일토록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간추려 말하자면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생멸심이니 생멸심을 통해서는 먼지처럼 수많은 세월을 지낸다 해도 가능치 않다는 것이다. 생멸심이란 깨달음의 청정하고 밝음을 다시 밝히려는 망념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본래로 밝은 깨달음의 성품을 다시 밝히려 들기에 깨달음을 얻고 구하려는 행위를 가리켜 무명이라고 하였다. 어째서 깨닫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마음에 대하여 무명을 행하는 어리석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인가,
심지어는 그것이 세속에서 탐욕을 행하는 것처럼 탐욕의 근본을 돕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종일토록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억울하게 여러 갈래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즉 재물과 명예를 구함과 같이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류가 지니고 있는 마음의 다스림과 마음을 정복하려는 꿈이란 물거품처럼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하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감 잡지 못한다. 마음을 생멸심이라고 하지만 생멸심외에는 다른 어떤 마음의 존재 여부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붓다로부터 법맥이 끊어짐 없이 이어지는 선사들의 말씀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칠흑 같은 바다에서 깜빡거리는 등대불과 같다. 붓다께서 말씀한 바와 같이 생멸심 아닌 것을 의지해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는데 생멸심이 아닌 다른 마음을 감 잡지 못한다면 생멸심이란 우리의 본래 마음이 아니란 사실부터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붓다는 아난존자에게 손을 내 보이며 묻기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아난존자가 답하였다. 보았나이다.
불이 말씀하였다. 네가 무엇으로 보았느냐? 눈으로 보았나이다.
불이 말씀하시길, 네가 지금 눈으로는 손을 보겠다마는 무엇을 마음이라 하여 나의 주먹이 비추임을 받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여래께서 지금 마음이 있는 데를 묻사오매 제가 마음으로 추측하고 찾아보는 터이오니 이렇게 추측하고 찾아보는 것을 마음이라 하겠나이다.
불이 말씀하였다. 아니다. 아난아 그것은 네 마음이 아니니라.
아난이 놀라면서 여쭙기를, 이것이 저의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하리이까?
불이 아난에게 말씀하였다. 그것은 사물을 분별하는 허망한 모양의 생각이라 너의 참성품을 의혹케 하는 것이니 네가 무시로부터 금생에 이르도록 도적을 오인하여 아들인 줄 여기고 너의 본래 항상한 것을 잃어버린 탓으로 생사에서 전전함을 받느니라.
그리고는 라후라 존재에게 종을 한 번 치게 하시고 아난에게 묻기를 네가 지금 듣느냐, 못 듣느냐?
아난이 다 말하되 듣나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종을 쉬어 소리가 없으매 불이 또 묻기를 네가 지금 듣느냐 듣지 못하느냐?
아난이 말하되 듣지 못하나이다.
불이 말씀하시길, 소리가 없어지면 들음이 없다하지만 참으로 들음이 없다면 듣는 성품이 아주 없어져서 고목과 같을 것이니 소리가 없어 듣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느냐, 네가 아직 생각이 전도하여 보고 듣는 육근의 성품은 항상하건만 뒤바뀐 생각으로 인하여 소리는 있었다 없었다 할지언정 듣는 성품이란 들었다 못 들었다 하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설사 네 몸이 죽어 목숨이 없어진들 육근의 성품이야 어찌 없어지겠느냐, 그러므로 항상심을 알지 못하고 생멸심으로 수행할 근본으로 삼는다면 모래를 삶아 밥을 만들려는 것처럼 옳지 않다고 말씀하였다.
이상과 같이 능엄경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우리가 불생불멸하는 성품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생멸의 마음을 따라서 마음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지 생멸심을 집착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고통을 완전히 벗어나 영원한 마음의 평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생불멸하는 성품을 먼저 밝혀야 한다.
이를 가리켜 바른 견해(正見)라고 말한다. 바른 견해란 절대관념을 의미한다. 중국의 조사들은 절대관념을 성취한 까닭에 스승으로부터 법맥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참성품은 불생불멸하며 허공처럼 어디에든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성품으로 인해 우리들 육신뿐 아니라 온 세상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성품을 얻고 구하려는 것은 찾고 구하려는 그것이 참성품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참성품을 내가 얻고자 한다면 나와 참성품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부처와 조사의 말씀처럼 우리가 만약 참성품의 존재라면 참성품을 얻고 구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그날까지 참성품과 등지고 달려야 하는 어긋난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래서 바른 견해를 지니지 못한 중생을 무명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승찬대사, 혜능대사, 마조대사, 황벽선사, 임제선사 등은 모두가 절대관념을 성취한 까닭에 마음을 항복받은 선각자라고 불리며 붓다의 법맥을 이어받은 조사가 된 것이다.
그분들이 남겨놓은 어록에는 단 한군데라도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논하지 않고 있다. 오직 바른 견해를 통해 마음이 본래 없음을 알아야만 마음의 온갖 끄달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번뇌 없는 영원한 평화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견해를 지니지 않고 마음을 단속하려는 것은 생멸심을 찬양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불생불멸의 성품을 찾아보려 해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불생불멸의 성품이 드러나지 못하는 것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찾아보려는 그 마음에 의해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어째서 가로막혔다고 말하는 것인가, 불생불멸의 성품을 참마음이라고 이름한다면 참마음을 이리저리 헤아리려는 것은 마치 손바닥 위에 과일을 올려놓고 여기저기를 살펴보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참마음은 마음이라는 손바닥 위에 올려 진 과일과 같은 처량한 신세일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우리들 본성의 마음이라고 부를 수가 있겠는가, 참마음은 마음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참마음을 발견하려면 마음의 헤아림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물질이 공이며 공이 곧 물질이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또는 하늘과 땅이 같은 뿌리라는 천지동근(天地同根),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가 다를 바 없다는 말을 숱하게 들어도 그러한 이치를 밝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관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랜 동안 팔이 안으로 굽혀져서 물건을 당겨오도록 살아온 것처럼 보고 듣는 즉시로 언어적 관념이 들어서기 때문에 절대관념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틀 잡힌 습성이 절대관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절대관념을 알기 쉽도록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면서 죽어가는 생로병사의 거듭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죽음은 또 다른 생을 싹 틔우며 옷을 갈아입듯 노쇠한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육신을 받고 있다. 그처럼 태어남과 죽음이란 연결된 고리처럼 순환하며 돌고 있다.
만일 우리가 육신의 감각으로 이루어진 마음만을 위주로 산다면 살아있는 육신만을 나라고 인정하는 꼴이 된다. 육신이 소멸된 죽음의 상태 역시도 나(我)가 존재하므로 삶을 일으킬 수 있다면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그때에는 육신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일어나고 멸하는 생멸의 마음이 아니라 움직임이 없는 부동의 마음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 마음이야말로 생사에 관계없이 존재하는 우리의 본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육신이 있든 없든 항상하는 마음이 곧 절대관념이다.
황벽선사가 서두에서 말씀하고 있는 한 물건(참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를 찾고자 하면 이룰 수 없으며 망상만 늘어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절대관념으로서의 마음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을 나누고 있다. 그런 탓에 생멸심으로 절대관념을 찾고자 한다면 생사의 몸을 함께 지닌 나(我)로서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황벽스님의 말씀은 절대관념인 참마음에서 한 치의 오차도 벗어남이 없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서 무의식에 각인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주인이 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없던 마음이 생겨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던 생멸심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하던 불생불멸의 마음이 주인 되는 것이다.
한 물건(참마음)이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종잡을 수 없는 한 물건일지라도 찾아다님을 멈출 수도 없다.
우리는 업력으로 인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세간의 일이란 종래에는 시든 꽃처럼 허망하게 보이는 때문일 것이다.
황벽스님은 이르길 ‘불생불멸의 마음이란 본래로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모양도 없고,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언어를 초월하여 존재하므로 마치 허공과 같다.
이처럼 허공과도 같은 참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다. 그러나 모양에 집착하는 생멸심을 통해 그것을 찾고 구하려 하면 그럴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 버린다.’ 라고 하였다.
찾고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참마음과 어긋나지 않으므로 참마음이 온전한 주인공이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찾고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참마음을 발견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참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극소수에 불과한 것을 보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문제를 발견하려면 마음의 속성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마음이란 움직임을 지니고 있다. 인식하고 분별하고 판단한 것들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며 변화시키려는 의도를 일으키는 것이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이란 하고자 하는 바를 지닌 물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재료가 있어야 한다. 무엇을 재료로 하여 하고자 하는 의지와 욕구를 일으킬 수 있는지 살핀다면 그것은 생각일 것이다.
생각이란 보고 듣고 맛보면서 나타난 것이며 그와 같은 기억을 통해 예전에 좋았던 경험을 되살려 다시금 그러한 상태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경험이란 과거로 흘러갔기에 과거를 다시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을 통하여 과거의 좋았던 이미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보고 듣고 맛보는 것들은 매순간 과거로 흘러가고 있다.
생각이란 지금 현재에 기반하고 있다. 허기짐을 느끼거나 포만감을 느끼는 것도 지금 현재하는 것이며 더위와 추위 등을 느끼는 것도 지금 현재가 그렇다는 것이다.
반면에 마음이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허기진 경험을 통해 포만감을 느끼고 싶어하고 추위로 고생을 겪었기에 따스함을 느끼려고 한다. 이처럼 마음이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를 꿈꾸고 있다. 반면에 생각은 지금 현재에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각과 마음은 존재하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어째서 마음은 존재의 차원이 다른 생각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것인가, 우리에게는 과거의 입력된 정보들이 모여서 나라는 이미지가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이미지를 통해서 보고 들으려 하기 때문에 생각을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틀 잡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은 마음과는 다른 차원을 지녔기에 마음과 같은 방향을 지닌 것도 있고 다른 방향을 지닌 것도 있다. 같으면 욕망이 일어나고 다르면 분노가 생기게 된다.
만일 마음이 생각을 순순히 몰아갈 수 있다면 분노와 원망 등의 감정을 일으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에 대하여 문제 삼지 않을 것이며 살아있음에 대하여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다. 내 의지와는 다른 고통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또한 마음이 생각과는 다른 차원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문제가 나타난다. 즉 마음이 생각을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고자 하는데 생각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마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아는 것이다.
내 마음 같지만 내 마음 같지 않은 마음 때문에 갈등과 혼란을 겪으면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황벽스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과는 질적으로 다른 마음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
물론 그 마음과 참마음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참마음을 가리키려는 것은 마음과 참마음을 나누어 보기 때문에 달라진 것이다.
우리가 만일 황벽스님이 가리키는 마음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이해가 된다면 여태껏 고집하며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것은 마치 날개 달린 애벌레가 기어 다니기만 하다가 날개짓을 하는 순간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
우리도 그와 같다. 이미 하늘과 땅을 넘나들며, 생사를 뛰어넘는 무한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땅에서만 기어 다니려 했기에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전과 설명을 통해서 불생불멸의 성품을 지닌 존재란 사실을 이해하지만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감 잡을 수 없고 텅 비어 있다면 어떠한 작용도 없을 것인데 과연 그것이 어째서 필요한 것인지도 헤아리질 못한다.
만일 불생불멸의 성품을 내가 느낄 수 있다면 불생불멸의 성품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보듯 그것을 느끼는 또 다른 성품이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의 성품은 내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불생불멸의 성품을 알고자 하고 그것에 대해 밝히려 한다면 끝내 불생불멸의 성품을 바라보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야 한다.
등대불과 같은 황벽스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방향을 잡고자 한다면 우리는 세상 끝나는 그날까지 길을 잃고 헤맬 것이다. 황벽스님의 말씀은 절대관념에서 한 치의 벗어남도 없다. 절대관념이 무엇인지를 터득하지 못한다면 남쪽을 북쪽을 알고 가는 사람처럼 미혹에 빠진 것이다.
인간이란 의미는 다리에 놓여 진 존재라는 뜻이다. 다리란 건너라고 있는 것이지 거기에서 살라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아무튼 건너긴 건너야겠는데 좋은 것을 보면 애착하고, 싫은 소리를 들으면 원망하는 마음이 멈추지 못하는 탓에 엉거주춤 다리에서 집짓고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불생불멸의 참마음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기 보다는 어째서 마음이 생각을 움직이려 하는지에 대한 속성을 먼저 살피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마음이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건이지만 마음의 다스림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리의 세계로 들어감에 있어서는 아상을 일으키는 망념에 불과할 뿐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올바른 길이란 아상을 일으키는 마음의 소멸을 가리킨다. 마음을 소멸시키려 함도 결국은 마음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마음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하면 고통을 벗어나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의 끝없는 노력도 결국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마칠 것이다.
우리가 참마음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생멸의 속성을 지닌 마음을 내 마음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부터 참마음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마음이라 알고 있는 생멸심이란 사물에 의한 잔상(殘像)이 일어난 것이다. 잔상이란 가령 바둑을 두고 나면 바둑에 대한 영상이 내면에 머물게 된다. 이와 같은 잔상에 의해 마음이 이루어진 것이기에 마음으로 추구하거나 원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잔상의 얼룩에 불과하다.
마음이 항상 분주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텅 비고 고요하여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를 경험할 수 있다. 그처럼 고요한 마음의 상태 역시도 마음의 잔상으로 비롯된 것이다. 잠시뿐이라 해도 생각과 마음이 전혀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적멸의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생기고 멸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의 생하고 멸함이 반복적으로 나타나지만 마음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한 탓으로 무심코 지나간 것이다. 마음이 움직임 없는 고요한 상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보고 듣고 맛보고 기억을 떠올리는 등의 일을 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무언가를 보고 듣고 맛본다면 좋고 나쁘거나 내 맘에 들고 안 들고 하는 헤아림이 생겨나면서 마음이 활동하게 된다. 즉 마음이란 보고 듣고 맛보는 대상을 접하면서 나타나는 것이다.
대상이 없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마음은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처럼 마음이 고요하게 멸한 상태를 가리켜 참마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보고 들으면 마음은 또다시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참마음으로 살기 위해서 보고 듣지 않고 고목나무처럼 산다면 그러한 참마음이란 개도 싫다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육신을 구속하면서 고요함만을 관하는 것으로 마음을 닦는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노력을 행하는 것이다. 이치를 밝히지 못하고 마음을 닦는다면 남쪽을 북쪽으로 알고 달리는 사람처럼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마음을 집중하면서 고요함을 관하는 것을 선정삼매라고 한다. 선정삼매가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산만한 마음으로는 어느 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정삼매를 통해 마음을 항복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선정삼매를 통해서는 참마음이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함을 이루는 것은 마음이 생멸의 속성을 지녔음을 알기 위함이다. 마음이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은 흐린 물을 가만히 오래 두어 맑은 물이 나타남과 같다.
이것을 처음으로 객진번뇌를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맑은 물이 나타났지만 바닥에는 흙 앙금이 가라앉은 상태이므로 보고 들음으로써 흔들면 또 다시 마음은 혼탁한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삼매의 고요함을 통하여 우리들 내면에는 이처럼 맑고 순수한 상태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늘 보고 듣고 말하면서 활동하는 탓으로 마음이 고요한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것이다. 고요한 상태를 경험했다고 해도 보고 들음을 통해서 마음이 나타나면 고요함이란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지게 된다.
만일 흙 앙금을 걸러내고 맑은 물만 남게 되면 그때는 아무리 보고 들음으로 흔들어도 항상 맑고 순수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흙 앙금을 버리고 맑은 물만 남는 것이 근본 무명을 영원히 끊는 것이라고 하였다.
흙 앙금을 버리는 것은 고요함을 관하는 것으로는 가능치 않다. 그래서 절대관념의 참마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흙 앙금을 버리기 위해 고요함을 관하려는 그것이 혼탁함을 일으키는 주범인 흙 앙금이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의 움직임이 멸한 상태라서 고요하다면 마음이 사라졌으므로 고요한 적멸에 들어있다는 것도 알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 산만하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마음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상태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마음이 분주하고 화를 내고 기쁨에 젖어있고 고요하여 적멸한 것까지 모든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마음과는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마음이 생하고 멸하는 속성과는 관계없이 항상 지켜보는 성품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지켜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마음은 기쁨과 슬픔에 물드는 일없이 항상 깨어있는 상태로 내면의 지켜봄을 행하고 있다.
지켜보는 마음이 기쁨과 슬픔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기쁨 속에서도 슬픔을 느낄 수 있고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희로애락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변함없이 늘 그대로 존재한다는 의미와 같다.
지켜보는 마음은 생멸의 마음처럼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하지 않는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탓으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지 지켜봄은 항상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
육신과 내면이 어떤 상태에 있건 간에 지켜보는 성품이 있으므로 항상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어디에도 물들지 않으며 늘 변함없이 존재하기에 탐욕을 행하는 것도 알고 분노하는 것도 알며 심지어는 자신에게 합리화를 하며 자신에게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남들에게 거짓말을 해도 자신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지켜보는 성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남을 속이듯 자신을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지켜보는 성품이란 어디에도 물들지 않으므로 비록 자신의 의도라 해도 그것을 물들이지 못하는 까닭이다.
지켜보는 성품에 대해서는 어떠한 장식도 붙을 수 없으며 어떠한 의도적인 작용도 가할 수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했고 또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러할 것이다.
그 자리는 황벽스님의 말씀처럼 허공과 같이 텅 빔과 공함의 모습이며, 예로부터 한결같은 그 모습 그대로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잔상으로 일으킨 마음을 쫓아다니느라고 골방 깊이 묻어둔 것이다.
황벽스님의 말씀대로 참마음 그대로가 부처인데도 모양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하므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다. 참마음과 한 순간도 떨어져 살지 못하면서도 얻고 구함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얻고 구하려는 마음을 안고 산다는 것은 무언가 항상 필요로 한다는 것이며 갈증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음을 통해서는 진리가 발견될 수 없다.
설령 진리를 발견했다고 해도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란 마음의 갈증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만일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얻고 구함으로 물든 마음을 통해 진리를 성취하려 한다면 아상의 흙먼지가 다할 날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목숨에 어찌 마음이 없으랴만 아상의 마음을 쉬기 위해서 산만함을 가라앉히는 집중도 하고 정진도 하는 것이다. 참성품을 성취하려는 것이 아상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알지 못하면 잘못된 길에서 헤매는 것이다.
우리들 마음이란 보고 듣고 맛본 기억의 갈고리에 붙잡혀 있다. 흐린 물을 맑히려면 가만히 내버려두면 흙 앙금은 가라앉고 맑은 물이 드러나게 된다. 맑은 물이 우리들 본래의 순수한 마음이란 것을 알기 위하여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히 가라앉히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촉감을 느낀 기억들로 하여금 잠시도 쉬질 않고 마음의 거품이 솟구쳐 나온다. 심지어는 감각과 의식이 잠들어 있음에도 꿈으로 보고 듣고 헤아림을 행하고 있다.
잠시도 쉬질 않고 움직이는 마음을 따라 살게 되면 이것저것 참견하고 싶은 것도 많아지고 욕망과 분노로 물들게 된다. 그렇기에 마음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중생들은 열반의 성품이 존재함을 알지 못하고 본래로 고요하며 불생불멸하는 성품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탓이기도 하다.
불생불멸의 성품이란 태어남도 없고 멸함도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여기에는 있고 저기에는 없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언제고 어디에든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불생불멸의 성품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있고 없음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허공을 떠나서는 잠시도 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모든 삼라만상이란 형상을 지녔으며 형상을 지닌 만큼의 공간을 간직하고 있다. 공간을 간직한 것들은 시간도 함께 작용되고 있다. 그래서 형상을 지닌 것들은 시간이 다하면 사라질 허망함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내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물건도 역시 시간과 공간을 통해 형성된 그림자와 같다. 사물을 보고 들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황벽스님은 이르길 우리가 지닌 그 마음은 그대로가 부처이기에 얻고 구하려는 마음만 쉬면 부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에 마음이 흐린 물처럼 존재한다. 마음이 그대로 부처라고 한 것은 흐린 물 따로 있고 맑은 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흐린 물속에는 맑은 물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흐린 물이 된 것은 보고 들으면서 나타난 생각을 내 입맛에 맞도록 움직이려 하기 때문이다. 그처럼 생각을 움직이려는 것이 곧 생멸심이기에 황벽스님은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그 즉시 본성과는 어긋난다고 하였다.
황벽스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들으려면 다음과 같다. 생각을 움직이려는 마음이 나타났기에 본성과 어긋난 것이라고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즉 생각을 움직이려고 나타난 마음이거나 보고 들으면서 나타난 생각이거나 간에 모든 것이 본성의 마음으로 행해짐을 까맣게 잊고 산다는 것이다.
황벽스님이 말과 글로써 후대에게 전하려는 것도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책이나 신문의 활자를 들여다보면 눈이 곧 피로해짐을 느끼지만 산이나 허공을 볼 때에는 눈이 피로함을 느끼지 않는다.
만일 황벽스님께서 배휴를 만나지 않았다면 황벽스님의 글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절대관념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생각을 움직이려는 의도된 바를 일으키지 않는다.
신문을 보든 산을 보든 눈으로 본다는 것은 같지만 마음이 들어서고 안 들어선다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수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들어서면 결과를 예상하기 때문에 피로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이미 작위를 지닌 것이므로 올바른 수행이라 할 수 없다. 황벽스님은 우리와 똑같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지만 거기에 마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황벽스님과 똑같이 보고 듣고 말하면서 살아도 마음에 대해서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본성으로 행해짐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이다.
본성과 털끝만치라도 어긋나게 되면 과녁을 벗어난 것과 같아서 본성으로 행하고 있음을 다시 기억해도 이미 틀어진 상태를 회복하진 못한다.
우리가 내면과 육신에 대하여 낱낱이 지켜봄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단지 지켜봄만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켜보며 살든 안 지켜보며 살든 살아감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굳이 번거롭게 지켜봄을 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에 바쁠 텐데 말이다.
지켜봄을 행하게 되면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전부 지켜봄과 함께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작은 의도일지라도 지켜봄의 바탕이 깔려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즉 지켜봄을 통해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타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켜봄이란 불생불멸의 성품이다. 그와 같은 불생불멸의 성품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고 나쁜 양변을 통해 마음을 일으키는 탓으로 지켜봄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희로애락에 몸살을 앓아야 하는 고통의 늪으로 빠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옳고 저런 생각은 그르다거나 이런 것은 내 맘에 들고 저런 것은 맘에 안 든다는 이분적 관념으로 보고 듣기에 좋은 것을 보고 들으면 욕망을 일으키고 나쁜 것을 통해서는 분노를 일으키는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마음의 작용을 전부 무시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삶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내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그것도 그렇고, 또한 내 마음을 바로 알고자 하는 그것도 사실은 지켜봄이 행하고 있음을 까마득히 잊고 산다는 사실만큼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통이 일어나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지 못하고 뜻이 거부되면서 나타난다. 그처럼 보고 듣는 즉시로 사사건건 생각을 움직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면 뜻한 바와는 다르게 세상이 움직일 수도 있다. 세상에 나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본인처럼 자신의 의도를 반영시키려 하므로 세상은 총칼 없는 전쟁터가 되고 있다. 행복의 공을 놓치지 않으려고 모두가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남에게 다 주고 어디 멀리로 떠나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을 주의 깊게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비록 몸은 세상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더라도 고통의 원인을 스스로 잉태하고 있다면 매번 고통 없음을 찾아 떠나지만 도착하는 곳마다 고통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고통이란 하고자 하는 바가 관철되지 못해 생겨났다면 어째서 고통을 일으키는 의도를 지닌 마음이 나타난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마음이란 보고 들으면서 나타난 생각을 움직이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이다.
즉 보고 들음을 통해 좋고 나쁜 것으로 편 갈라 놓았다. 좋은 것은 욕망으로 나쁜 것은 분노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생각은 생각처럼 양쪽으로 편 갈라 놓거나 움직일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생각이란 눈과 귀가 받아들인 사물을 통해 일어난 허공꽃과 같다. 마치 감각기관이라는 거울에 비친 영상과 같은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이 생각을 통제하고 싶어하지만 거울에 비친 영상을 문질러 없애려는 것과 같고, 허공꽃을 주물러 열매를 따려는 것과 같다.
생각을 움직이려는 것이나 좋고 나쁜 것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나 모양만 다를 뿐 그것이 미혹함이다. 허공꽃을 허공꽃으로 알지 못하고 그림자를 그림자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티끌만치라도 양변을 통한 편 가름이 존재한다면 마음은 어느 한쪽에 집착을 일으켜야 한다.
집착을 일으키는 것은 세상과 육신을 그만치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집착으로 인하여 집착하는 것도 역시 불생불멸의 성품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마음의 속성으로 인하여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불생불멸의 성품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등지게 된다.
참마음을 발견하기 위해서 마음을 쉬려고 하거나, 마음을 쉬는 방법을 찾는다면 그 또한 양변의 마음이다. 안 쉬는 마음과 쉬어야 하는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각에 작용을 가하는 것이 망념이라고 말씀하는 황벽스님의 의도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돈오를 주장한 혜능대사 이후로는 단박 깨달음을 중시하다보니 이처럼 해박한 이론을 지닌 황벽스님 같은 선지식을 찾아보기가 드문 형편이다.
원각경에서는 참마음을 얻지 못하는 두 가지 장애를 말하였다. 그것은 이장과 사장인데 이장이란 이치의 장애가 있는 것이고 사장이란 실천적인 장애를 의미한다.
즉 논리적으로는 완벽해도 번뇌를 끊을 수 있는 정진의 힘이 부족하거나 번뇌를 끊는 실천은 완벽해도 이치를 알지 못한다면 한 쪽 날개로 날려는 새와 같을 것이다. 성문과 연각이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성문은 너무 이치적으로만 알려하고 연각은 너무 실천만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행이 앉아서 고요함을 관하려는 것만을 중시한다면 아직 수행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바른 견해가 들어서지 못한 탓으로 고요함에 집착한다는 것은 생멸심을 떠받드는 일에 불과하다.
생멸심의 속성은 한번 고요해지면 한번 번잡해지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용수철처럼 누른 만큼 튀어 오르기 때문이다. 생멸심으로는 고요함이 끝까지 고요할 수 없다. 보고 듣고 맛보는 것이 헤아림을 일으키기에 고요함과 번잡함을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참마음은 내면의 고요함과 번잡함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그 마음은 고요와 번잡에도 물드는 법이 없다. 이처럼 어디에도 물들지 않음이 곧 중도를 지켜가는 것이다.
고요함에 집착한다는 것은 마음이 양변을 통한 좋고 나쁨을 쉴 새 없이 뿜어내는 성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요함을 집착한다면 번잡함은 그림자처럼 달라붙게 된다.
고요함을 취하기 위해 번잡함을 떼어놓으려 한다. 이것과 저것으로 양변이 나누어지면 좋고 나쁨의 헤아림이 등장한다. 그것은 마치 한손에는 분필을 들고 다른 손에는 지우개를 든 것과 같다. 지우기 위해 써야하고, 쓰기 위해 지워야 하는 끝없는 반복이 이어진다. 그것이 마음의 습성이다.
마음은 늘 지금 현재를 벗어나 존재하기에 무언가 다른 것을 꿈꾸고 있다. 그러한 마음의 습성을 지켜봄이 마음을 닦는 수행이다. 앉는 것이란 가장 힘을 많이 받는 것이므로 좌선을 통해 집중력이 생겨나면 모든 행주좌와에서 항상 지켜봄을 놓치지 않도록 일깨울 수 있다. 양변으로 편 갈라 놓는 마음을 끊고 의도를 지닌 마음을 이긴 자 실로 위대하다.
참마음은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 넘어 바로 그 몸 그대로 일 뿐이지만 생각을 움직이려는 탓에 어긋난 것이다. 양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상을 지닌 것과 같다. 나의 중심에서 바라보고 내가 목적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과 반대되는 것들을 물리치고 싶어 한다.
마음이 얻고 구하려는 생각에 물들어 있다면 나를 부족함 없이 채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도움 되는 것과 도움 되지 않는 것으로 나누어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양변을 달리면 마음이 본래 참마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어느 마음을 참마음이라고 가리킬 것인가, 참마음이란 두 갈래로 나누어진 마음이 아니다. 그렇기에 마음을 통해서는 참마음을 찾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부득불 참마음은 얻고 구하려는 생각에 물들지 않는 마음이라고 설명해야 한다. 내면을 지켜보는 마음은 좋고 나쁜 것으로 나누어진 마음이 아니기에 참마음에는 마음도 없고 참마음도 없다. 오직 전체로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과 참마음으로 나누고 있다. 좋고 나쁜 것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는 탓이다. 그래서 참마음은 좋고 마음은 나쁘다고 믿는다. 이것이 양변을 오르내리는 마음의 습성이다. 그래서 좋은 것은 취하려 하고 나쁜 것은 떨쳐야 한다.
이와 같이 얻고 구하려는 마음을 통해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말은 부처를 얻으려 하고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은 마음속으로 부처를 가리키고 있다. 그 마음은 이미 부처와 부처 아님이라는 양변을 나누고 있으므로 부처를 찾아야 하고 부처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가리킨다는 것은 가리키는 그것이 아니어야 한다. 따라서 부처를 가리키는 일이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세상 끝까지 부처 아님으로 남아야 한다.
참마음이든 부처든 그것을 짐작하고 헤아리는 것은 부처를 가리키며 해석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부처를 지나쳐가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달이 될 수 없다. 손가락에 머물지 않고 벗어나야 달을 볼 것인데 손가락에만 머물러 있다면 손가락을 달로 알 수밖에 없다.
황벽스님은 부처를 얻고 구하려는 유위적인 노력에는 가치를 두지 않는다. 유위적인 노력이란 어딘가로 향해야 하는 목적지가 있다는 것이며 목적지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참마음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유위적인 노력을 벗어난다는 것은 허공을 이해한 것과 같다. 허공을 목적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허공의 무엇을 목적하겠는가,
우리가 얻고 구하려는 유위적인 노력의 벽을 허물지 못하는 것은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를 가늠하는 마음이 쉴 새 없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를 떠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나와 내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육신의 고정된 모습이나 얻고 싶다는 의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앉아서 아상을 비우려하고 욕망에 대한 마음의 집착을 벗어나려 해도 본래부터 고요하고 물들지 않는 참마음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알지 못하면 모두가 망상일 뿐이다.
또한 모든 것이 참마음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안다는 것만으로 능사가 될 수는 없다. 육신은 스스로의 습관과 중독성을 일으키는 습성을 지녔기에 의지를 통해서는 그것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신으로 행하는 집착이란 흙탕물과 같다. 유위적인 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뜻한 바를 집착한다는 의미와 같다. 그것이 악마의 갈고리에 걸려든 것이다.
이치의 장애를 벗어난다는 것은 참마음이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으키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치의 장애를 벗어났다고 해서 육신까지 제어하기란 불가능하다. 육신의 장애란 눈과 귀와 혀 등을 단속함으로써 집착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그것이 실천의 장애라고 하는 사장에 해당된다.
이장을 끊는 것은 이치를 터득함으로써 마음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사장을 끊는 것은 육신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일컫는다. 이장과 사장의 영역은 서로 달라서 육신을 구속함으로써 이치의 장애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또한 이치의 장애를 벗어났다고 해서 육신의 집착까지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장애를 벗어나야 하지만 황벽스님은 실천적인 장애보다는 이치의 장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실천적인 장애란 육신의 흐트러짐을 막는 것이기에 우리가 익히 아는 방법을 따라서 육신을 제어할 수 있으므로 크게 논할 부분은 아니다. 다만 감각기관인 눈과 귀와 혀와 목젖 등을 단속하여 육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향하지 않도록 보고 들음을 차단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일이라 할 것이다.
즉 보고 듣고 맛보고 촉감하고 헤아림을 통해 의도된 바를 일으키는 탓으로 육근의 성품이 항상 끊어짐 없이 존재하는 참성품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사장이란 보고 듣고 맛보는 육근의 작용을 통해 마음이 밖으로 흘러나가 의도된 바를 일으키는 망념으로 변한 것이다. 반면에 이장이란 그처럼 생겨난 망념으로 인하여 육근의 성품이 항상 끊어짐 없이 존재하는 참성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정혜쌍수란 육신을 고요하게 머물도록(定) 하면서 마음이 의도를 지니지 않게 하는 것이며, 헤(慧)란 얻고 구하려는 마음의 허망한 속성을 이해하고 일체의 생각과 행동 모두가 참성품으로 행해짐을 아는 것이다.
북쪽을 남쪽으로 알고 가는 미혹에 빠졌다면 스스로의 착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착각으로부터 벗어나면 이치의 장애든 실전의 장애든 모든 것이 걸림 없이 제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우리가 어떤 착각에 빠졌는지를 본인 스스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참마음이란 형상이 없지만 관념적으로 존재하는 것만도 아니다. 보고 듣는 성품이란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며 지켜보는 성품도 지금 현재하기 때문에 과거의 허상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하는 성품에 대하여 그것을 얻으려 하고 추구하려는 마음을 쉬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만일 참마음이 지금 현재 하지 않고 어디 멀리 숨겨져 있다면 그것을 끝까지 찾아가서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를 떠난 적도 없으며 과거나 미래로 도망가지도 않는데 어째서 그것에 대하여 갈증을 일으키면서도 발견하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황벽스님의 말씀대로 모양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다고 하였듯이 구하지 않는 마음을 내기가 어째서 그토록 힘든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만치 우리는 마음을 쫓아다니면서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다보니 참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마음을 쫓아다녀서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항상 무언가 획기적이고 새로운 파라다이스를 꿈꾸고 있다. 참마음이란 어찌 생각하면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마음을 부수는 것인지도 모른다.
꿈꾸는 마음으로 인해 삶이 낭비된 느낌이 들고 그 마음으로 인해 잠시도 쉴 틈 없이 어딘가로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목적지도 없이 내달려야 하는 삶, 어쩌면 인생이 본래 그렇게 생겨먹은 물건인지도 모르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마음의 부림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답답하기도 한 것이다.
마음을 내 마음대로 다스리고 싶다는 욕구가 바로 참마음을 원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매달린 것과 같다. 달은 필요치 않다. 오로지 손가락이 중요한 까닭이다.
마음으로는 세상에서 인정받는 즐거움을 놓치기 싫어하며, 참마음으로는 마음의 평화를 이루고자 하기에 두 가지를 다 얻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잠에서 깨어남과 꿈속을 전전함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참마음을 찾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내 마음인 여기서 또 다른 내 마음을 찾겠다는 의미와 같다. 결국 무엇이든지 내 손아귀에 붙들어야 내 것이 된다는 식이다. 참마음일지라도 내가 집어 들고 내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이다.
내가 집어든 것이라면 그것이 나라고는 말할 수 없다. 나와는 다른 물건이기에 내가 집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마음이 주인노릇을 하기에 비록 참마음이 우리들 본래의 마음일지라도 본래의 마음이어서는 안 된다.
펄펄 살아있음에도 생명을 찾고 구하려 한다면 스스로 살아있음을 알지 못함과 같다. 배를 타고 있으면서도 배를 찾는다면 자신이 배를 타고 있음을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참마음을 찾으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본성의 마음으로 살고 있음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과 같다. 참마음이 전부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는 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찾으려는 마음이 계속되는 만큼 참마음과는 등지고 멀어질 뿐이다.
찾고 구하려는 물건이 아무런 형상도 없는 허공이라면 허공을 구하려고 찾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허공이란 있고 없음이 없다.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하면서 온 세상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참마음이 생사와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허공처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세상이 끝나도 여전히 허공처럼 존재할 것이다. 육신의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내면에서 행해지는 작은 의도라도 지켜봄은 잠시도 떠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참마음으로 살아가면서도 마음에 휘둘려 눈먼 사람처럼 그것을 보지 못하기에 참마음뿐이면서도 참마음으로 살지를 못하고 있다.
남쪽을 북쪽으로 알고 달리는 사람처럼 참마음에 대한 추구와 헤아림을 멈추지 못하면 여전히 북쪽을 향해 가면서도 남쪽의 도착지를 찾는 것과 같다.
마음으로 행하는 것들이 본래 참마음이라면 마음도 참마음과 별개의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참마음이 되지 못함은 이것만이 진실한 것이며 저것은 허망하다고 생각하는 때문이다. 그것이 집착을 일으키는 마음의 속성이다. 그와 같은 양변의 개념을 놓지 못하면 참마음과는 등질 수밖에 없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려는 것이 참마음으로 살지 못하는 허망함이다. 참마음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남 없이 살면서도 추측하고 헤아림을 멈추지 못하기에 그조차도 참마음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가로막고 있다.
언어로써 생각을 일으킴은 모두가 망념을 행하는 것이다. 언어란 상대적인 관념이기에 허공과 같은 절대적인 세계를 가리킬 수 없다. 절대적인 세계는 전체로 존재하기에 상대와 절대가 나누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을 가리키려는 언어의 상대적 관념이란 절대와 상대를 나누려는 것이기에 알음알이란 허망한 물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망념을 행하든 말든, 망념을 행하는 것도 참마음이고 참마음으로 생각과 말과 행동의 전부를 행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즉각 참마음의 삶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가,
그것은 마치 꿈속을 전전하면서 꿈꾸는 실체를 발견하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참마음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잠재의식에서 받아들여야 하는데 실천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천이 따르지 못한다는 것은 마음과 육신이 따로 논다는 말이다. 육신과 분리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육신에 대하여 이렇게든 저렇게든 원하고 있는, 의도하는 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도된 바를 지녔다는 것은 꿈속을 전전하는 것과 같다. 육신과 마음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의도하는 바가 없는 마음이란 육신과 일치한 마음이며 꿈속을 전전하는 마음이 아니다.
육신은 한 웅큼의 고깃덩어리와 같아서 스스로의 움직임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런데도 육신이 습관과 중독성을 지녔다는 것은 육신이 마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보고 들으면서 나타난 생각들로 인하여 생겨난 마음은 전부가 육신을 중심으로 맴돌도록 기준 잡혀 있다.
무언가 의도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전부 육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육신에 대하여 병들지 않고 늙지 말고 죽지 말았으면 하면서 원하는 바를 지녔기에 육신과도 어긋난 길을 걷고 있다.
참마음을 얻고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참마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목적은 육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육신을 향해가는 마음이기에 의도된 바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것은 마음과 육신 모두에게 죽음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가능치 않은 일이다. 그만치 우리가 너무 오랜 동안을 마음을 주인으로 믿어온 탓에 잠재의식에서 거부당하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된 것들과 비교하려는 분별과 하고자 하는 의도를 일으키는 마음이 떨어져 내리려면 잠재의식이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잠재의식에서 참마음으로 살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늘 지켜보는 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지켜보는 마음이 모든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는 참 주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보고 듣는 것도 참마음이 주인 되어서 보고 들어야 한다.
앞으로 전개되는 황벽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하면서 살펴야 한다. 만일 참마음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따로 참마음을 얻고 구해야 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선각자라고 말할 수 없다.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 맹자 등 중국 사상가의 글들은 마음의 양식이 될지언정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는 없다. 절대 관념인 참마음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황벽스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미 참마음으로 살고 있음을 언급되는 부분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참마음의 삶을 거부하고 있는 비교함과 의도된 바가 소멸될 수 있도록 참마음으로 생각과 행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마음 깊숙이 각인되어야 한다. 그것이 마음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2.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버리면 부처이다.
부처에게 부처를 찾게 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붙잡는다면, 겁(劫)이 지나고 몸이 다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버리면 부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므로 중생이라 해서 마음이 줄지 않고, 부처라 해서 더 늘지도 않는다.
또한 6도 만행과 항하사 같은 공덕이 본래 그 자체에 갖추어져 있어서, 닦아서 보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연을 만나면 곧 베풀고, 인연이 그치면 그대로 고요하나니, 만일 이것이 부처임을 결정코 믿질 않고 겉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하려 하고, 그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면 그 모두가 망상일 뿐 도와는 서로 어긋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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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스님은 이르길 부처에게 부처를 찾게 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붙잡는다면, 겁(劫)이 지나고 몸이 다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에게 참마음이 있고 참마음을 가리키려는 마음이 있으므로 마음이 두 조각이 되었다.
두 조각이 된 마음으로서는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는 사실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부처를 지나쳐 갔다고 해서 부처 그대로의 본성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본성은 본래 생멸함이 없으므로 단지 양변의 마음만 건드리지 않고 먼지를 털어내려 하지 않으면 마음은 그대로 부처이다.
양변의 마음을 쥐고 흔들면 겁이 지나고 몸이 전부 닳아 없어져도 부처 그대로인 마음을 깨닫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눈이 가장 가까운 눈썹을 못 보는 것과 같다.
눈이 눈썹을 보려는 생각이 없을 때 그 사람은 눈썹을 본 것이다. 더 이상 눈썹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참마음을 찾으려고 하거나 마음이 참마음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은 그 마음은 눈이 눈썹을 보려고 발버둥치는 것과 같다.
깨닫는 것은 마음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육신을 단련시킨다고 성취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일정한 방법과 자세를 고집하고 육신을 통해 마음을 정복 받으려 한다면 문제를 바로보지 못한 것이다.
물론 육신은 마음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비새는 지붕처럼 육신이 스스로의 질서를 지니지 못하면 마음만 단련시킨다고 빗방울을 막을 수는 없다. 과일도 껍질과 알맹이가 있다.
알맹이를 보호하기 위해 껍질이 있지만 껍질로 인해 알맹이가 생기는 것이다. 껍질이 손상되면 알맹이도 온전치 못하다. 따라서 껍질과 알맹이가 서로 다른 무엇이 아니다.
마음의 속성은 알지 못하고 껍질만 단련시키려 하거나, 눈에 보이는 껍질만 중시하여 이치는 버리고 실천만을 중시한다면 마음의 속성을 도외시함으로써 잘못된 노력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고자 한다면 무언가 의도된 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도된 바를 찾아내고 마음의 속성을 이해한 후에야 올바른 실천을 행할 수 있다. 그래서 법이 필요한 것이다.
법이란 길을 먼저 걸어본 사람들의 안내서이기에 그분들의 말을 꼼꼼히 챙겨 들어야 한다. 마음은 까딱 잘못하면 집착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사나운 맹수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마음이 집착에 빠지면 오도 가도 못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선지식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모두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야 한다.
마음이 집착으로 빠지는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고 붓다로부터 조사와 선사들의 법맥이 끊어짐 없이 흘러오는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에 방향을 잡지 못한 배는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예전에 알던 마음 찾기 방식을 잠시 접어두고 황벽스님의 불빛으로 방향을 잡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더구나 배휴라는 사람이 스님에게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궁금해 하던 것들을 남김없이 파헤치고 있다.
마음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은 종교, 종파에 상관없다. 종교인들만 마음을 지닌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잠시 종교도 잊어버리고 오직 마음에만 집중해야 한다.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대충 그럴 것이다 라는 식으로 넘어가서는 될 일이 아니다. 하나씩 어째서 그런 것인가를 이해하는 차원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인하여 달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스스로 부처인데도 중생으로 전락했다면 손가락을 치우면 되지만 그것이 사실 쉽지가 않다.
마음을 닦는다는 말은 참마음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치우는 것과 같다. 마음을 텅 비우면 세상 일은 인연을 따라 흐르는 구름처럼 왔다가 가고 갔다간 다시 오기를 반복한다.
선택이 떨어진 마음은 삶의 인도를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마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음은 오랫동안 내 맘에 들고 안 들고 하는 습성으로 물들어 있기에 잠시라도 좋고 싫은 분별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결국 마음을 비우기는 해야겠지만 비운다고 비워지는 물건도 아니기에 내 마음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이 그토록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힘든 것은 마음이 고정적인 실체를 지니고 있지 않은 탓일 것이다.
운동선수가 근육을 단련시키듯 몇 개월만 열심히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기고 틀 잡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몸을 단련시키는 것은 하고자 하는 의지만 강하다면 이룰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고정적인 실체가 없기 때문에 마음을 단련시키는 것이란 마치 허공을 주물러 무언가를 만들려는 것과 같다.
마음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마음을 주물러 완성시키려 해도 그것을 이루지 못하기에 망상만 들끓게 된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도 이미 허공처럼 비워진 물건임에도 무언가 가득 찼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컵이 이미 비워졌는데 그것을 자꾸만 비워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컵은 끝내 비워지지 않을 것이다. 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비워져 있음을 알지 못하기에 비우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컵의 본성이란 비어있음이다. 만일 컵에 쥬스가 들었다고 그것을 쥬스컵이라고 못 박아 부를 수는 없다. 쥬스는 언젠가 비워지고 다른 것으로 계속해서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컵은 언제나 그대로이다.
참마음도 마치 컵과 같다. 참마음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언제나 변하고 소멸되며 다른 것들로 계속 바뀌어간다. 참마음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우리는 마음이라 알고 있으므로 마음을 참마음 또는 참성품, 마음바탕으로 구별하여 부를 수밖에 없다.
황벽스님도 마음과 구별하여 한마음이라 이름하고 있다. 마음바탕은 항상 고요하며 경계를 만나도 물들지 않고 늘 항상하며 한결같이 변함없는 그대로이다.
우리는 마음의 내용물을 마음인 줄 아는 탓으로 마음바탕을 잃어버렸기에 경계를 만나 요동치는 기쁨과 슬픔에 웃고 울 수밖에 없다. 컵은 자신이 어떤 내용물을 담고 있든 모습을 달리하지 않는 것처럼 참마음도 내용물이 기쁨이나 슬픔으로 채워진다 해도 그것에 따라 변하거나 물들지 않는다.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를 따라 산다는 것은 기쁨에 젖어 살고 싶으며 슬픔은 멀리 떠나고 싶은 까닭이다. 기쁨과 슬픔이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며 모처럼 찾아온 기회가 위기로 변할 수도 있다.
기쁨과 슬픔이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하면서 번갈아 모습을 드러내는 낮과 밤처럼 존재한다. 만일 마음바탕인 참마음이 허공처럼 낮과 밤에 물들지 않는 내 마음인 줄 알고 있다면 기쁨과 슬픔이라는 양변에 의해 마음이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
참마음이 내 마음인 줄 모르기에 기쁨과 슬픔을 통해 애착과 원망의 거품을 쏟아내고 있다. 어떤 사람이 정신이 혼미하여 허공에서 생겨난 무수한 허공꽃을 보고는 허공꽃이 허공에서 생겼으므로 허공이 허공꽃을 만든 장본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원래 허공에는 허공꽃을 품고 있지 않다. 우리들 마음 바탕은 허공처럼 물들지 않고 늘거나 줄지도 않으며 그 마음은 본래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다.
그런데도 생각을 움직여 참마음을 찾기 위해 마음을 비우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은 허공에서 허공꽃이 생긴 것과 같다. 그 사람은 다시 생각하기를 내가 분명히 허공꽃을 보았지만 이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허망한 놀음에 빠지지 않으려면 허공꽃이 생기지 못하도록 허공을 비워야겠다면서 허공을 닦아내려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음이 기쁨과 슬픔에 물들어 요동치다보니 허망한 생각이 들어 마음을 비우고 싶은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다. 마음을 비우려는 것은 허공꽃을 문질러 없애려는 것과 같다. 허공에는 본래 허공꽃이 없으며 컵은 본래 어떠한 내용물도 담고 있지 않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면 이치의 장애를 일으키므로 실천에도 성과를 기대하지 못한다. 빈 컵을 계속해서 비우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컵은 본래부터 비어있음처럼 마음의 바탕에는 어떠한 내용물(마음)도 뿌리내리지 못함을 먼저 알아야 한다. 만일 그것을 알지 못하고 마음을 닦아 참마음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의 수고는 허공꽃 밑에 앉아서 열매 맺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한낱 부질없는 꿈에 불과할 것이다.
3. 모양에 집착하여 부처를 구한다면 악법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다시 다른 부처가 없으며, 또한 다른 어떤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은 허공같이 밝고 깨끗하여 어떤 모습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법의 몸(法體)과 어긋나는 동시에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
비롯됨이 없는 옛날로부터 모양에 집착한 부처란 없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를 두는 것이니, 차제 있는 부처란 본래로 없다. 참마음 깨치면 다시 더 작은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한 마음으로 다름없음이 허공과 같아서, 그것에는 잡됨도 무너짐도 없고, 온 누리를 비추는 햇살과도 같다. 해가 떠올라 온 천하가 두루 밝아질 때라도 허공은 한 번도 밝은 적이 없으며, 해가 져서 어둠이 온 천하를 덮을지라도 허공은 어두웠던 적이 없다. 이렇게 밝고 어두운 경계가 서로 번갈아 바뀐다 해도 허공의 성품은 툭 트이어 변하지 않는 것이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꼭 이와 같다.
만약 부처를 관(觀)하면서 깨끗하고 밝으며 속박을 벗어났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린다든가, 중생은 때 묻고 어두우며 생사의 고통이 있으리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고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수많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깨닫지 못할 것인데, 이는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오직 이 참마음일 뿐, 거기에 티끌만큼의 어떤 법도 있을 수 없으니, 이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이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 마음 바탕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마음에서 마음을 내고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서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악법이지 깨닫는 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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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스님은 이르길 오직 마음이 그대로 진리이고 참마음일 뿐, 거기에 티끌만치라도 닦고 비우려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참마음을 가로막는 장애라고 하였다.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려는 것은 육신과 삼라만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굳게 믿는 까닭이다. 육신과 삼라만상이 불필요하다거나 쓸모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실한 것으로 굳게 믿는다면 이런 것은 쥐어야 하고 저런 것은 놓아야 하는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진실과 허망, 좋고 나쁨, 중요함과 소홀함 등으로 나누려는 것은 결국 모양에 집착한다는 의미이고 집착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탓으로 참마음인 법의 몸(법신)으로써 양변을 나누고 집착하고 있음을 돌아볼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모양에 집착하는 것은 참마음과는 어긋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을 닦고 비우려는 의지가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은 비워질 수 없는 마음을 비우려는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란 눈이 보고 귀가 들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보고 듣지 못한다면 마음을 일으키지 못한다. 마음을 일으킬만한 재료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해도 그것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 축적된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끄집어오는 것을 오온이라고 한다. 오온으로 인하여 마음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활동성을 지녔다고 믿는 것이다. 황벽스님도 오온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였는데 오온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마음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눈과 귀가 사물을 대하면서 일으킨 그림자이다. 이처럼 마음이란 사물을 반연하여 생겨났지만 보고 듣지 못한다 해도 본능의 생각은 일어난다. 배고픔과 더위 추위 등은 사물을 반연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마음이 아니라 생각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는 생각과 마음을 같은 것으로 여기지만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다. 마음은 생각이 모여 이룬 것이며 생각의 뜻이고, 생각을 통해 의도를 지닌 것이다.
원래는 없던 길도 사람들이 다니면 생겨나는 것처럼 생각은 하고자 하는 뜻이 없지만 반복적으로 행하다보면 생겨나는 길처럼 의도를 지닌 생각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이 마음이다.
따지고 보면 마음은 본래 없던 것인데 느닷없이 생겨났기에 망념이라고 한다. 그러나 생각은 망념이 아니다. 망념이란 생각을 망가뜨린다는 의미와 같다. 보고 듣고 맛보고 헤아림은 생명체 모두가 사용하는 성품이기에 우주적인 성품이다.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생각을 통해 모양을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으면 하고 저런 것은 내게 주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의도가 없는 것은 생각이고, 의도를 지닌 것은 마음에 해당될 것이다.
생각을 틀 잡아 모양을 짓는 것은 하고자 하는 바를 지녔기에 마음이 된다. 그러나 자신의 의도된 바와는 반대되는 것들이 나타났을 때 고통이 생겨난다. 만일 생각만 있고 마음이 없다면 고통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하고자 하는 바가 없으므로 뜻이 꺾이거나 좌절당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오는 데로 받고 주어지는 데로 살뿐이다. 원치 않는 상황을 만나더라도 살아있음의 대가 정도로 여긴다면 고통은 더 이상 슬픔을 불러오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완성된 자신을 희망하는 욕구가 본능처럼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고통이란 보다 나은 삶을 원하는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즉 욕망과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엄연한 사실조차도 우리는 도외시하고 있다. 고통은 피하고 욕망은 성취되길 바라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평생 동안 고통을 멀리 보내고 욕망이 성취되기를 바라면서 살아간다. 이 말은 결국 마음의 습성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기에 본래부터 전체로 존재하는 허공을 고통의 허공과 욕망의 허공으로 두 쪽 내려는 것과 같다.
마음을 닦고 비우려는 것은 마음을 실체로써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연 마음이란 비우면 비워질 수 있는 실체로써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마음이란 본래 없던 길인데 생각이 반복되면서 뜻을 지녔기에 생겨난 것이라 허망한 그림자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닦고 비운다고 없어질 성질은 아니다. 건드리지 않으면 스스로 사라질 물건인데도 허망하게 닦고 비우려는 생각이 붙어 망념으로 돌아선 것이다.
부지런히 마음을 닦는다고는 하지만 남쪽을 북쪽으로 알고 가는 사람처럼 미혹에 빠진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될수록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일 것이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도 닦아야 할 마음이란 본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황벽스님은 이르길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를 두는 것이니, 차제 있는 부처란 본래로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은 점차로 부처를 이루려는 것과 같다. 부처 자리에 무언가가 있다면 점차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산의 정상을 오르듯 오늘은 산 중턱까지 오르고 내일은 정상을 정복하는 일도 가능하다.
부처의 자리란 올라가서 정복될 자리가 아니다. 이미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점차로 깨달아갈 수는 없다. 물론 우리가 참마음을 통해서 모든 행위를 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점차로 깊어지지만 완전한 깨달음이란 단박에 일어난다.
마치 잠에서 깨어남과 같이 순식간에 뇌리를 파고든다. 우리는 황벽스님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그것으로 깨달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마음은 자신이 해오던 습관대로 좋고 나쁜 양변을 계속 만들면서 욕망과 분노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참마음은 본래가 텅 비어있으며, 고통과 욕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욕망을 일으키지 않으면 고통도 생겨나지 못한다는 분명한 이해가 들어서야 한다. 욕망으로 인해 고통이 생겨난다는 사실에 대한 깨침이 없기에, 고통을 회피하려는 욕망을 통해 고통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다.
고통을 불러들이는 욕망을 일으킨다 해도 마음이란 산의 길처럼 없던 곳에서 생겨난 것이라 본래는 없는 것이다. 무엇으로 욕망을 일으켰다고 말할 것이며, 무엇이 고통을 받는다고 말할 것인가,
육신이 스스로 통증을 지각하지는 못한다. 마음이 있음으로 해서 육신의 통증도 느끼고 정신적인 고통도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받는 것은 마음을 통해서 받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란 실체가 아니라 생각이 과거로 흘러가서 이미지로 관념화된 생각이다.
따라서 과거의 이미지를 통해 생각을 좋고 나쁨으로 나누려는 것이 마음이다. 그렇기에 마음이란 과거로써 존재하는 허상에 불과하다. 허상적인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마음이기에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고통도 또한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치통으로 고통스럽다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고통은 계속되어야 한다. 갑자기 일확천금이 굴러온다거나 치통보다 심각한 통증이 생겨나면 치통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의사가 마취를 하지 않고 최면만으로 수술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할 것이다.
고통과 마찬가지로 욕망도 뿌리 없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참마음은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으며 텅 비어있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욕망에 물들고 분노로 타오르면서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성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고통 받을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통증을 따라 아픔을 느끼듯이 자신이 소유한 물건의 변변치 못함을 따라 참으로 열심히 고통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이 본성이 텅 비어있음을 알지 못하기에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을 다시 내려놓고 싶어 한다. 즉 거짓된 마음을 벗어나 참마음을 밝히려는 망념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그것 역시도 마음의 습성에 의해 희롱을 당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들리는 현상들이 허망한 속성을 지녔다는 것은 알아차렸지만 여전히 마음에 의한 허망한 틀 속에 갇혀있다. 무엇으로 인해 허망한 속성이 생겼는지를 감 잡지 못한 탓이다.
보고 들으면서 나타난 생각들을 통해 좋고 나쁨을 가늠하려는 것이 마음으로 하여금 의도를 지니도록 하는 허망함을 일으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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