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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1. 04.
신화엄경론 9권 新華嚴經論 卷第九
勒長者 李通玄(635-730)
撰第十會在法界品者,
10. 가르침을 회통해서 처음과 끝을 밝힘③
1)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①6)
이제 첫 회상 중 「세주묘엄품」을 해석하는데, 전처럼 열 단계의 과문(科文) 중에서 부처님께서 처음 정각을 성취한 것을 밝힌 일단계를 다시 둘로 나눈다. 첫째는 경전의 제목을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는 문장에 따라 뜻을 풀이하는 것이다. 今釋此初會中世主妙嚴一品,如前十段科文中第一段,明佛始成正覺,於此一段復分爲二,一釋經題目,二隨文釋義。
첫째, 경전의 제목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문) 무슨 이유로 『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 제1」이라고 이름붙였는가? 一釋經題目者,何故名爲大方廣佛華嚴經世主妙嚴品第一?
답) 대(大)란 특정 방향이 없다는 뜻이며, 방(方)은 법칙이란 뜻이며, 광(廣)은 이지(理智)가 두루하다는 뜻이며, 불(佛)이란 지혜의 체(體)가 머물거나 의지함이 없다는 뜻이면서 지혜가 자재롭다는 뜻이다. 화(華)란 법계에 두루한 다함이 없는 행[無盡行]이란 뜻이다. 행(行)이 능히 자타(自他)의 과(果)를 열기 때문에 꽃[華]이 이 열매[果]를 감득한다는 뜻이며 열린다는 뜻이다. 엄(嚴)은 장식한다는 뜻이다. 초발심주위(初發心住位)의 10신에서 작위가 있는 행화(行華)로써 10주위 속의 묘리지혜(妙理智慧/묘한 이치를 관하는 지혜)의 과(果)를 열고, 다시 작위가 없는 열 가지 행화(行華)를 발생시켜 늘 법과 행으로 서로를 장엄함으로써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도를 청정히 하기 때문에 행이 장식의 뜻이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解云:大者,無方義;方者,法則義;廣者,理智遍周義;佛者,智體無依住義,智自在義。華者,遍法界無盡行義,以行能開敷自他果故。華是感果義,開敷義,嚴是莊飾義,明初發心住位,以十信中,有作行華,開敷十住位中,妙理智慧果故。復生無作十種行華,常以法行互嚴,用淨自利利他之道故,行爲嚴飾義。
세주묘엄이란 이 초품(初品)에 있는 모든 신(神)과 천(天)의 8부 대중이 모두 세간의 주(主:주체)가 되어서 저마다 십불세계미진수의 몸에 따르는 무리들[隨身部從]과 단순히 한량없다[無量]고 말하는 것을 거느리고 도량에 와서 장엄하는데, 이는 대중을 의거해 명칭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세주묘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世主妙嚴者,以此初品有諸神天八部之衆,皆爲世間主,各將十佛世界微塵數隨身部從,或但云無量來嚴道場,此爲依衆成名。故云世主妙嚴。
또 부처님과 보살이 모두 세간의 주(主)가 됨으로써 능히 중생을 주도하고, 총체적으로 세간의 주가 되었기 때문에 또한 이 초품에서 한부(部)를 총괄해 표방한 것이니, 모두 열거하면 전부 228대중의 형상(形狀)이 같지 않은 각각의 부류가 있는데, 혹은 일불세계미진이라 말하고 혹은 십불세계미진이라 말하고, 혹은 한량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바다와 같은 회상을 장엄하기 때문에 세주묘엄이라고 말한다. 又佛及菩薩,皆爲世間之主故,以能主導衆生,摠爲世間主故,亦此初品摠標一部,都擧。摠有二百二十八衆,形狀不同各各部類,或言一佛世界微塵,或言十佛世界微塵,或言無量,以嚴海會故,言世主妙嚴。
또는 부처님의 복과 과보의 경계로 오묘히 의보와 정보를 장엄함으로써 또한 세주묘엄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니, 이는 여래께서 세간의 주가 되어서 중생을 주도하기 때문에 이 주(主)에 의거해서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或以佛福報境界妙嚴依正,亦得稱爲世主妙嚴,爲如來亦爲世間主主導衆生故,此爲依主得名。
품(品)이란 균등하게 구분한다는 뜻이다. 5위와 믿는 마음의 동일성과 차이에 따른 단계와 뜻의 종류로 구별하는 서술과 닦아 나아가는 생소함과 익숙함이 저마다 일관된 줄기가 있어서 순서가 분명하니, 이는 나중에 배우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근본적인 행(行)을 알아채게 함으로써 닦아 나아가는 데 미혹하지 않게 함을 밝힌 것이기 때문에 품류(品類)가 균등히 구별된다는 뜻이다. 品者,均別義,明五位及信心同異差降意類別敍,進修生熟各有條貫,次第分明,令後學者,自識本行進修不惑故,爲品類均別義也。
제일(第一)이란 앞뒤 순서에 따른 제일이 아니다. 법계문 안에서는 먼저와 나중이라는 순서가 없다. 모두 일시이자 둘이 없는 생각으로 동시에 드러난 모든 품 중에서 제일인 것이며, 하나[一]와 많음[多]의 연기(緣起)가 동시인 제일이다. 第一者,非是次第前後之第一,爲法界門中無前頭在後之次第,皆是一時無二念,同時顯著,諸品之第一,一多緣起同時之第一,
이거의 명칭이 바로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동시에 구족해서 상응하는 문. 바다의 물 한 방울이 백천 가지 강물이나 냇물의 모든 맛을 갖추고 있는 데 비유)이고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면서도 동일하지는 않은 문. 빈 방에 있는 천 개의 등불이 서로 비추면서도 장애가 없는 데 비유)으로써 10현문(玄門)과 6상(相)의 뜻으로 통해야 알 수 있는 것이지, 정견에 따라 헤아려 비교하는 것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제일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是名同時具足相應門一多相容不同門,以十玄門及六相義通融,不可以如情所繫故名第一。
둘째, 문자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서부터 “이처럼 한량없는 공덕 이래로”까지 71행의 경문이 있는 것을 네 개의 장과(長科)로 나누겠다.
첫 번째, 처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에서부터 “처츰으로 정각을 성취하다”에 이르기까지 여덟 구(句)의 경문이 있는 것은 총체적으로 의심을 끊고 믿음을 성취함을 밝힌 분(分)인데, 앞의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는 결집(結集)할 때 경전을 듣는 주체를 밝힌 것이며, 뒤의 “부처님께서는 마갈제국 아란야의 법보리도량 안에 계시면서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했다”는 여래께서 도를 얻은 곳을 서술한 것이다. 二隨文釋義者,從如是我聞一時至如是無量功德以來,於中有七十一行經,長科爲四分,一從初如是我聞一時以下至始成正覺,於中有八句經,摠明斷疑成信分,前之六字,明結集聞經之主,後之五句序致如來得道之處。
두 번째 “그 땅이 견고하고” 이하부터 “오묘한 음성이 멀리 퍼져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에 이르기까지 26행 반의 경문이 있는데, 모두 부처님의 의보와 정보를 찬탄함을 발힌 것이다. 이 국토는 타방(他方)과 보살의 신력(神力)으로 도량을 장엄한 분(分)으로서 마치 제석천의 그물과 같은 타방이다.二其地堅固以下,至妙音遐暢無處不及,於中有二十六行半經,摠明歎佛依正,此土他方及菩薩神力莊嚴道場分,此如帝網之他方。
세 번째, “이때 세존께서는 이 법좌에 거처하시며” 이하부터 “있는 바 모든 장엄을 드러나게 하고”에 이르기까지 13행의 경문이 있는데, 부처님의 성도와 수행, 과(果)가 원만한 의보와 정보, 과보의 공덕인 자비와 지혜로 중생을 다스리는데 그 자재로움이 끝이 없음을 밝힌 분(分)이다.
네 번째, “십불세계미준수보살” 이하부터 “한량없는 공덕”에 이르기까지 30행의 경문이 있는데, 보살 대중이 둘러싸고 있음을 밝힌 분(分)이다.三爾時,世尊處於此座以下,至所有莊嚴悉令顯現,於中有十三行經,歎佛成道修行果滿依正,報德悲智攝生自在無邊分。四從有十佛世界微塵數菩薩以下,至無量功德,於中有三十行經,明菩薩大衆圍繞分。
또 처음 의심을 끊고 믿음을 성취하는 분(分)은 그 뜻을 셋으로 나누는데, 첫째는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정하는 것이며, 둘째는 경전을 설하는 때를 정하는 것이며, 셋째는 경전의 글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又從初斷疑成信分中,義分爲三,一定傳教人,二定說經時分,三釋經文義。
첫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정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다음은 3승 중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권의 해석이다. 一定傳教人者,如三乘中大智度論第二卷所釋,
“여래께서 열반에 들 때에 아난(阿難)에게 ‘12부 경정을 너는 반드시 유통시켜라’고 고했으며, 다시 우파리(優波離)에겐 ‘일체의 계율을 너는 반딧 받아들여서 간직하라’고 고했으며, 아나율(阿那律)에겐 ‘너는 천안(天眼)을 얻었으니 반드시 사리(舍利)를 수호하고 사람을 권해서 공양하게 하라’고 고했으며, 대중들에겐 ‘내가 만약 1겁을 머문다 한들, 아니면 1겁을 줄인다 한들 모임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이다’라고 고하였다. 如來臨入涅槃時告阿難十二部經,汝當流通。告優波離一切戒律,汝當受持。告阿那律汝得天眼當守護舍利勸人供養。告大衆言:我若住一劫若減一劫,會亦當滅,
말씀을 마치신 뒤, 쌍림(雙林)에서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서 열반에 들려고 하니, 친척인 아난이 애착의 습기를 없애지 못해서 마음이 근심의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아니로두(阿泥盧豆:아나율)가 아난에게 말했다.語已雙林北首而臥入般涅槃。阿難親屬,愛習未除,心沒憂海,阿泥盧豆語阿難:
‘당신은 부처님의 법장(法藏)을 수호할 이이니, 범부들어철 므슷로 근심의 바다에 빠져선 안 된다.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다 무상허가늘 당신은 어째서 근심을 하는가? 또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손수 당신에게 법을 부촉하셨는데, 당신은 지금 근심과 번민으로 부촉받은 일을 잃고 있다. 세존께선 비록 오늘은 계시겠지만 내일 아침이면 안 계실 터이니, 당신은 반드시 부처님께 미래의 중요한 일을 물으시오.’ 汝是守護佛法藏者,不應如凡夫人自沒憂海,諸有爲法,竝是無常,汝何愁憂?又佛世尊手付汝法,汝今愁悶失所受事,世尊今日雖在明朝卽無,汝當問佛未來要事,
아니로두는 중요한 일로서 네 가지 질문을 가르쳐 주었는데, 하나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엔 몸소 스스로 설법을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믿고 받들지만, 여래가 멸진한 뒤엔 일체 경전의 첫머리에 어떤 말을 두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고, 盧豆教問要事有四。一問如來在世親自說法人皆信受,如來滅後一切經首當置何言?
둘째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엔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있지만, 여래가 멸진한 뒤엔 누구를 스승으로 삼습니까?’라는 질문이고, 二問如來在世諸比丘等以佛爲師如來滅後以何爲師?
셋째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엔 모든 비구들이 부님을 의지해서 머물지만, 여래가 멸진한 뒤엔 누구를 의지해서 머뭅니까?’라는 질문이고, 三問如來在世諸比丘,等依佛而住,如來滅後依誰而住?
넷째는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엔 악한 성품을 가진 차닉(車匿/찬다카. 석가족으로서 부처님께서 출가하실 때 건척이라는 흰 말을 끌었다. 나중에 출가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나, 석가족임을 과시하여 다른 비구들을 경시하는 나쁜 성격 때문에 제자들은 그를 묵빈법(黙擯法)으로 대치하였다. 묵빈법을 안 하고 인사도 안하고 상대도 해주지 않는 것)을 부처님 스스로 다스렸디만, 부처님께서 멸진하신 뒤엔 어떻게 함께 거주합니까?’라는 질문이다. 四問如來在世惡性車匿佛自治之,佛滅度後云何共住?
아난이 그가 가르쳐 준 대로 부처님께 물으니, 세존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첫째, 경전의 첫머리엔 반드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如是我聞一時]……’의 여섯 글자의 구절을 두어라. 阿難如教請問世尊,世尊荅云:經首當置如是我聞一時等六字爲句。
둘째, 비구는 모두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계율)로써 스승을 삼아라. 셋째, 모든 비구는 다 사념처(四念處/첫째 신념처(身念處):육신의 청정하지 못함을 관하는 것. 둘째 수념처(受念處):우리가 수용하는 쾌락이 사실은 고통이라고 관하는 것. 셋째 심념처(心念處):마음의 무상함을 관하는 것. 넷째 법념처(法念處):일체법의 무아를 관하는 것)를 머무는 곳으로 삼아라. 넷째, 악한 성품의 비구는 범단(梵檀)으로 다스려라(한역하면 黙擯)이다)≻. 二云:諸比丘皆以波羅提木叉爲師。三云:諸比丘皆以四念處爲住。四云:惡性比丘以梵檀治之,此云默擯。
만약 마음이 부드럽게 조복되면 그를 위해 『가전연경(迦旃延經)』을 설하는데, 이는 유무(有無)를 벗어나 아만심(我慢心)을 타파하는 것이다. 도 다섯 권의 『대비경(大悲經)』에서는 아난이 부처님께 ‘어떻게 법안(法眼/여기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가리킴)을 결집해야 합니까?’라고 여쭈니,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답하셨다.若心軟伏爲說迦旃延經。此云:離有無破我慢心。又如五卷大悲經中,阿難請佛,云何結集法眼?佛告阿難:
‘내가 멸도(滅度)한 뒤에 대덕(大德) 비구가 반드시 ≺세존께선 어느 곳에서 『대아타나경(大阿陀那經)』 등을 설했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반드시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선 마가타국 보리수 밑에서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해 법을 설했으며, 나아가 사라쌍수(紗羅雙樹) 사이에서 설했다≻고 대답하거라.’ 我滅度後,大德比丘應如是問:世尊何處說大阿陁那等經?汝應如是荅:如是我聞,一時,佛在摩伽陁國菩提樹下,初成正覺說法,乃至娑羅雙樹間說,
이처럼 20여 곳에서 설한 경전을 부처님께서 스스로 거듭 아난에게 가르치셔서 이와 같이 결집을 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여섯 글자의 뜻은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쳐 세움으로써 나중에 경전을 듣는 자의 의심을 끊게 한 것이니, 이는 다른 사람이 설한 것도 아니며 아난이 스스로 설한 것도 아니라 열반에 의거해서 세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如是等二十餘處所說之經,佛自重教阿難結集如是。是故此六字句義,佛教立故,斷後聞經者疑,知非是他餘人說故,亦非阿難自說,依涅槃安立如經初,
경전의 첫머리에서 과문(科文)에 준거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서부터 “처음 정각을 성취했다”에 이르기까지 여덟 구(句)가 있음을 다섯 권의 『대비경』의 설에 의거해서 중생들의 의심을 끊게 하겠다. 准科文,從如是我聞一時至始成正覺有八句,依五卷經說令衆斷疑。
즉 “이와 같이[如是]”가 1구(句)며, “나는 들었다[我聞]”가 2구며, “한 때[一時]”가 3구며, “부처님께서 계시다[佛在]”가 4구며, “마갈제국(摩竭提國)”과 “아란야법(阿蘭若法)”과 “보리도량중[菩提場中]”의 세 구는 하나의 뜻으로 단지 한 곳을 서술한 것이라서 3법(法)이 바로 하나가 되니,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했다”와 더불어 여섯 구가 된다. 一者如是 是一句,我聞是二句,一時是三句,佛在是四句,摩竭提國阿蘭若法菩提場中,此之三句義,唯是一,但陳其一處三法是一,幷始成正覺爲六句。
즉 “이와 같이”와 “내가 들었다”와 “한때”와 “부처님께서 계시다”와 “보리도량”과 “처음으로 정각을 성취했다”를 합쳐서 여섯 구가 되는 것이다. 是故如是我聞一時佛在菩提場中始成正覺,總爲六句,
이제 “이와 같이[如是]”라고 한 것에서 여(如)는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라는 것이며, 시(是)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지 이설(異說)이 아님을 구별한 것이다. 이 두 낱말이 서로 따르면서 믿음을 합쳐 틀림이 엇으니, 이는 진정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지 아난이 설한 것이 아니며, 또한 마왕이나 범천이 설한 것도 아니란 것을 밝힌 것이다. 今言如是者,如卽如佛所言,是者是佛所說,簡非異說兩名相順契信不殊,明眞是佛說非阿難自說亦非魔梵所說。
또 “나는 들었다”는 한 구절은 아난이 부처님께 들은 것이지 이리저리 전해지는 말을 들은 것이 아니며, 비인(非人)이 지은 것도 아니다. 또한 외도의 경서(經書)에서 파란 새가 물고 왔다거나 돌로 된 벼랑이 무너져서 얻었다고 하는 것돠도 가지 않은 것이니, 이는 의심을 끊어 믿음을 이루게 하는 분(分)이다. 又我聞一句,是阿難從佛所聞,非轉轉傳聞故,亦非是非人所制故。又非如外道,經書靑鳥銜來石崖崩得,是斷疑成信分,
진제삼장(眞諦三藏)이 말했다.
“미세율(微細律)에 의거하건대, 아난이 법좌에 오를 때, 그 몸이 부처님처럼 상호(相好)가 구족하였다. 대중들이 이 상서로움을 보고 마침내 세 가지 의심을 일으켰다. 如眞諦三藏云:依微細律,阿難當昇法座之時,其身如佛具足相好,衆見此瑞遂生三疑,
첫째는 부처님께서 열반에서 일어나셔서 다시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시는가 의심하는 것이며, 둘째는 타방(他方)의 부처님께서 오셨나 의심하는 것이며, 셋째는 아난이 몸을 바꿔 성불했는가 의심하는 것이다.” 一疑佛大師從涅槃起,更爲衆生說法,二疑他方佛來,三疑阿難轉身成佛。
이제 이 세 가지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여섯 글자를 세우는 것이니, 아난은 스스로 “이 같은 법은 내가 부처님께 들어서 안 것이지, 부처님께서 다시 일어난 자신이 성불한 것이 아니라 다만 법력을 썼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부처님과 같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높은 법좌에서 내려오자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이 여섯 글자로 온갖 의심을 끊은 것이다. 今爲除此三疑故,安立六字,是阿難自稱如是之法我從佛聞。知非是佛重起所說法,亦非他方佛來,又非阿難自身成佛,但以法力故令我似佛。是故,下高座已還復本形,以此義故,以此六字用斷衆疑。
문) 3승에서 설했듯이, 아난은 부처님께서 도를 얻으신 밤에 태어났고, 나이 20에 비로소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무 살 이후의 경전은 직접 들었겠지만 이전의 것은 전해 들은 것입니다. 問如三乘中說阿難,旣是佛得道夜,生年二十方爲佛弟子,其二十年已後經是親聞,已前傳聞故,
이 때문에 『전법륜경(轉法輪經)』에서는 “아난이 결집할 때 스스로 게송을 설하길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설하실 때, 그때는 내가 보지 못하였다. 轉法輪經云:阿難結集,自說偈曰:佛初說法時,爾時我不見,
다만 부처님께서 바라나(波羅奈_에 유행(遊行)하실 때, 다섯 비구를 위해 4제(諦)의 법문을 굴렸다고 내가 전해 들었다’고 하였다”고 설했습니다. 따라서 스무 살 이전은 직접 들은 것이 아님을 압니다. 如是展轉聞,佛遊波羅奈,爲五比丘衆,轉四諦法輪。故知以前非親聞故。
답)/고려대장경본에서는 또[又]라고 나와 있으나 탄허스님의 현토본에서와 같이 답으로 봄이 적적할 것 같다) 『살바다론(薩婆多論)』에서는 “아난이 부처님의 시자(侍者)가 되었을 때 소원을 청하기를 ‘원컨대 부처님께서 20년간 설하신 경전을 모두 저를 위해 설해 주시고, 저에게 고의(故依:부처님께서 입으시던 옷)과 잔식(殘食:부처님께서 드시던 음식)을 주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고 설하고 있다. 알아야 할 것은 이것도 직접 들은 것이라는 것이다. 又薩婆多論云:阿難爲佛作侍者時,請願言,願佛二十年中所說之經,盡爲我說,勿與我故衣及殘食,將知此也是親聞。
또 『열반경』에서는 “아난은 많이 들어 아는[多聞] 사람이라 존재하시든 존재하지 않으시든 자연히 늘 상(常)과 무상(無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설했으며, 또 “아난은 각의삼매(覺意三昧)를 얻어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을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항상 듣는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아난이 법을 전했다는 것은 3승의 경전에서 모두 설하고 있다. 又如涅槃經云:阿難多聞士,若在若不在,自然常解了,常與無常義。又阿難得覺意三昧,佛所說經遠近常聞,此以阿難傳法,竝是三乘經中所說,
그러나 『대방광불화엄경』에서는 법을 전한 아난이 앞에서 말한 것과는 같지 않으니, 무릇 천중천(天中天)이시며 시방의 조어(調御)이신 교화하는 의식(儀式)의 주체와 짝[主伴]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인연이겠는가? 如此大方廣佛華嚴經傳法阿難,非如上說。夫天中之天十方調御化儀主伴,豈是小緣,
스스로의 기류(器類)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음양을 보이고 영향을 끼침으로써 삼세(三世)와 9세(世)의 궁극적인 겁을 일념에 알며, 다함이 없는 고금(古今)을 늘 즉석처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自非器類齊肩示陰陽而影響,三世九世窮劫一念而知,無盡古今常如卽夕,
이제 3승의 정견(情見)으로 시종(始終)을 지연시키거나 재촉하는 자는 그 가르침을 전한 주체를 상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지만, 이제 이 『화엄경』의 가르침을 전한 주반(主伴)을 밝힌 자는 신(神)이 현묘한 근원을 사무치고 도가 지혜의 바다와 대등해서 마치 문수와 보현이 서로 모범이 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어찌 살아 있을 때의 나이를 논해서 먼저와 나중의 견해를 짓겠는가? 今以三乘情見延促始終者,未可詳其傳教之主,今此華嚴經明傳教主伴者,皆是神洞玄源道齊智海,如文殊、普賢互爲師範之者所爲也,豈論生時年歲作前後之見?
이처럼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셔서 법륜을 굴리실 때 여래는 성품 바다의 대지혜[性海大智]의 인(印)으로 중생의 욕망에 인(印)을 쳐서 문자로 삼았는데, 일음(一音) 속에서 먼저와 나중의 사이가 없이 일시에 널리 인을 침으로써 즐기는 욕망의 차이에 따라 저마다 자기 마음이 즐기는 법을 따르게 하여 다 얻어 듣게 한 것이다. 如是佛出興世轉法輪。時如來以性海大智之印,印衆生情欲爲文字,於一音中無前後際,一時普印,隨樂不同,各隨自心所樂之法皆得聞之。
설사 아난이 가르침을 전하는 주반(主伴)을 행하여 보인 자라 할지라도, 이는 보현행의 바다에서 근기에 따라 높거나 낮게 그 흐름에 맡겨 출몰(出沒)함으로써 근기에 의거해 자취를 나타낸 것이니, 3승의 정해진 예(例)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같은 교설은 그 일을 성현(聖賢)이 은밀히 함께 하는 것이니, 이는 3승에 응해 방편으로 교화한 것이지 완전한 가르침[了敎]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設阿難示行傳教之主伴者,是普賢行海隨器高低,出沒任流依根現迹,皆不得以三乘定例,如上所說,竝是聖賢,密潛同事,是應三乘權化,未爲了教,
『아사세왕참회경(阿闍世王懺悔經)』에는 세 종류의 아난이 있다. 첫째는 아난타(阿難陀)로서 한역하면 경희(慶喜)인데, 성문의 법장(法藏)을 지니면서 그 이상의 2승에 대해선 능력을 따르고 분수를 따른다. 阿闍世王懺悔經,有三種阿難。一阿難陁,此云慶喜,持聲聞法藏,於上二乘隨力隨分,
둘째는 나나타발타나(阿難陀跋陀羅)로서 한역하면 경희현(慶喜賢)인데, 중승(中乘)의 법장을 지니면서 그 이상의 대승에 대해선 능력을 따르고 분수를 따르며, 그 이하의 소승은 받아 들여서 겸하여 지닌다. 二阿難陁跋陁羅,此云慶喜賢,持中乘法藏,於上大乘隨力隨分,於下小乘容與兼持,
셋째는 아난타사가라(阿難陀娑伽羅)로서 한역하면 경희해(慶喜海)인데, 보살대승의 법장을 지니면서 그 이하의 소승은 받아들여 겸하여 지닌다. 이것 역시 3승에서 가르침을 전한 아난이라서 실교(實敎)가 되지는 못하지만, 三阿難陁娑伽羅,此云慶喜海,菩薩持大乘法藏,於下小乘容與兼持此者,亦是三乘中傳教阿難未爲實教,
이같은 『화엄경』의 가르침을 전한 아난은 높은 법좌에 오를 때는 몸이 모든 부처님과 같고, 일시에 단박 4승(乘) 등의 가르침을 연설함으로써 근기에 따라 모두 결집하고 있으니, 이는 곧 아난과 부처님의 체용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해석 역시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如是華嚴經傳教阿難者,正阿難昇高座時,身同諸佛,一時頓演四乘等教,隨根結集,卽阿難與佛體用不殊,此釋亦不違道理。
또 『열반경』에서는 “아난이 듣지 못한 경전은 홍광(弘廣)보살이 유통해야 한다”고 했다. 이 경전에 견주어 보건대, 3승이 알 바가 아니라서 홍광보살이 가르침을 전한 것이 잘못이 아니니, 이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칭한 것은 홍광보살을 말한다. 又如涅槃經云:阿難所未聞經,弘廣菩薩當爲流通,若望此經非三乘所知,卽此弘廣菩薩傳教非謬,今此稱如是我聞者,弘廣菩薩也。
도 『대지도론』애서는 문수사리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칭했으니, 이는 그 논 속에서 문수사리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도 4백 년 동안 여전히 세상에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 『대지도론』에서는 “문수사리는 아난과 함께 그 밖의 청정한 곳에서 마하연장(摩訶衍藏)을 결집했다”고 했다. 又大智度論云:是文殊師利稱如是我聞,以彼論中云:文殊師利佛涅槃後四百年中時,文殊師利猶在世間故。又如大智度論云:文殊師利與阿難,在餘淸淨處,結集摩訶衍藏,
이상과 같은 해석은 모두 성자(聖者)의 방편을 따라서 말한 것이다. 만약 대강의 체(體)로써 논한다면, 모두가 여래와 문수사리와 보현보살의 사(事)를 따르는 행이기 때문에 설사 3신(身)의 아난을 말한다. 如上所釋,摠是聖者隨方便言。若以大體論之,摠是如來、文殊師利、普賢菩薩隨事之行故,設言三身阿難,
하여도 역시 마찬가지라서 모두가 부처님 스스로의 보현행 속의 근기에 따른 방편이 근기에 따라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한 것이다. 이상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정하는 것을 마친다. 亦復如是,摠是佛自普賢行中隨根方便隨器高低故,已上定傳教人竟。
둘째,/「세주묘엄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문장에 따라 뜻을 풀이하는 것에서 의식을 끊고 믿음을 성취하는 분(分)을 셋으로 나눈 것 중 두 번째이다) 경전을 설할 때를 정한다는 것은 대략 열 가지로 가르침을 설할 때 전후 시기의 차이를 세운 것이다. 二定說經時分者,略立十種說教前後不同。
첫째, 『역사경(力士經)』에서는 부처님께서 처음 성도하고서 17일간 사유한 뒤에 녹야원에서 법을 설했다고 한다. 一如力士經說佛初成道一七日思惟已卽於鹿園說法。
둘째, 『대품경(大品經)』에서는 부처님께서 처음 성도하고 나서 녹야원에서 4제의 법륜을 굴리자 한량없는 중생이 성문의 마음과 독각의 마음과 대보리심을 발했다고 설하는데, 시일(時日)은 말하지 않았다. 二如大品經說,佛初成道鹿園轉四諦法輪,無量衆發聲聞心乃至獨覺心大菩提心,不言時日
셋째, 『법화경』에서는 37일 만에 녹야원으로 가서 법을 설했다고 한다. 三如法華經說,三七日詣鹿園說法。
넷째, 『사분율(四分律)』과 『살바다론(薩婆多論)』에서는 42일 만에 비로소 법을 설했다고 한다.四如四分戒及薩婆多論,六七日方說法。
다섯째, 『흥기행경(興起行俓)』과 『출요경(出曜經)』에선 49일 만에 비로소 법을 설했다고 한다.五如興起行經及出曜經,七七日方說法。
여섯째, 『오분율(五分律)』에서는 56일 만에 비로소 법을 설했다고 한다.六如五分律,八七日方說法。
일곱째, 『대지도론』에서는 57일 만에 비로소 법을 설했다고 한다. 七如大智度論,五十七日方說法。
여덟째, 『십이유행경(十二遊行經)』에서는 1년 동안 법을 설하지 않았다고 한다.八如十二遊行經,說一年不說法。
아홉째, 지금 당나라의 장(藏)법사에 의하면, 결정코 여래 성도 후 27일 만에 『화엄경』을 설했다고 정했다. 이상 부처님의 설법 시기를 전후가 같지 않게 보는 것은 모두 자기 견해에 따라서 부처님의 설법이 전후가 같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니, 이는 근본법계의 실(實)을 이루는 설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九依今唐朝藏法師,決定將如來成道定二七日說華嚴經,已上見佛說法前後不同,皆是隨自見佛說法前後不同,非是依本法界成實之說。
열째, 이제 나 이 통현은 이 화엄법계문을 의거해서 법을 설하는 시기를 정하고, 또 본교(本敎)에 의거해서 그 시기를 정할 것이니, 모두 앞에서 설한 것과는 같지가 않다. 여래께서 진(眞)에 의거해 세상에 나와 사물을 이롭게 한 것은 또한 진(眞)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 만약 저마다 스스로 자기 정(情)만을 쫓는다면, 영겁토록 고통의 땅[苦趣]에서 길을 잃고 윤회하면서 진(眞)을 어기고 허망함만을 따를 것이다. 十今通玄依此華嚴法界門定說法時分還依本教定其時分,摠不如上,如來依眞,出世利物,還令至眞。若也各自隨逐自情,永劫迷輪苦趣乖眞逐妄,
그러나 부처님의 뜻은 이렇지가 않다. 경전에 스스로 분명한 문장이 있으니, 어찌 그 가르침을 어길 것이며, 방편만을 좇고 실(實)을 등진다면 업장(業障)이 어지 쉬겠는가? 저 「십정품」에서 “여래께서 찰나간에 세상에 출현해서 열반에 든 것이 모두 때[時]가 없다”고 설했으니, 찰나간이라고 말한 것은 오히려 의탁해서 말한 것이다. 佛意不然,經自有明文,何須違教,逐權背實障業何休?如十定品說,如來於剎那際出現於世入涅槃,摠無時也,言剎那際者,猶是寄言爾。
실제로는 때가 없는 것이라서 곧 일체시(一切時)에 출현한 것이며, 일체시에 설법한 것이며, 일체시에 열반한 것이니, 이는 적용(寂用:體用)이 장애가 없기 때문이며 중생심을 따라 나타났기 때문이다. 以無時卽一切時出現,一切時說法,一切時涅槃,爲寂用無礙故,隨衆生心現故。
또 『법화경』에서 “내가 성불한 이래로 한량없는 아승기겁을 지냈다”고 말한 것은 때[時]로써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한량없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 때가 되는 것이라서 정함을 삼은 것이지, 세간의 정견에 따른 생각을 좇아 한량없는 상념을 삼은 것은 아니다. 又如法華經,吾從成佛已,來經無量阿僧祇劫,以無時可量故言無量,此爲佛說法時,以此爲定,不逐世情遠思爲無量之想也。
그리하여 때가 없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 때라서 본교로써 본시(本時)를 설한 것이니, 본시란 것은 법계의 때[時]가 없음이다. 以無時 是佛說法時也。以本教說本時,本時者,法界無時也。
「십정품」에서 “찰나간에 세상에 출현해서 세상에 들었다”는 것은 때가 옮겨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찰나간은 법계의 천이(遷移)할 수 없는 때를 총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如十定品,以剎那際出現於世入涅槃者,意言時無可移如剎那際,摠明法界無可遷移時也。
이제 경전을 설한 때를 정하는 것은 단지 삼세 고금의 정견이 다한 것으로 본래의 법을 설한 때를 삼는 것이니, 앞서 아라한 정견에 따라 제접하는 권교의 설을 의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今定說經時分,只是三世古今情盡,以爲本說法時也。不可依前權教逐情引接之說。
셋째/의심을 끊고 믿음을 성취하는 분(分)을 셋으로 나눈 것 중 세 번째이다.) 경전의 문장에 따라 뜻을 해석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처음의 여섯 글자/여시아문일시(如是我聞一時)를 말함)로부터 여덟 구(句)의 의심을 끊고 믿음을 이루는 분(分)가지는 『대지도론』에 의거하면, 여(如)란 순(順:따르다)이며 시(是)란 인(印:인가)이니, 곧 인순(印順)하여 믿음으로 받아 지니기 때문에 여시(如是)라고 말한 것이다. 三釋經文義者,一從初六字八句斷疑成信分中,依大智度論云:如者,順也。又是者,印也,卽印順信受故言如是。
이처럼 일부 문장의 뜻을 모두 들어서 곧바로 이미 들은 법을 가리키기 때문에 여시(如是)라고 말한 것이다. 如是摠擧一部文義,卽指已所聞之法故。故云如是。
또 장이 삼장(長耳三藏)이 삼보(三寶)를 해석한 것에 의거해 보면, 첫째 부처님을 요약한 것인데, 여(如)는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라 하고, 시(是)는 내가 들은 것이며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라 한다. 又依長耳三藏約三寶釋,一約佛,謂如佛所說,是我所聞,是佛所說。
또 장(藏)법사의 법에 대한 해석에 의거해 보면, 여(如)는 내가 들은 것이라 하고, 시(是)는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라 한다. 또 여는 이치에 부합한 가르침이며, 시는 내가 들은 것이라 한다. 又依藏法師釋約法云:謂如我所聞,是佛所說。又如稱理教 是我所聞
지금 나 이통현은 법을 해석하기를, 여(如)는 모든 법이 같기 때문이며, 시(是)는 곧 부처님이기 때문에 여시(如是)라고 말한 것이니, 법계 대지혜의 진아(眞我)로써 부처님께서 설한 법계 대지혜의 진경(眞經)을 듣기 때문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말한 것이다. 又今通玄約法釋云 如者諸法如故,是者卽是佛故,故言如是。以法界大智之眞我,聞佛說法界大智之眞經,故言如是我聞,
이는 곧 스승과 제자의 체(體)가 하나란 것을 밝힌 것이니, 이것은 화엄법계문을 해석해서 초발심의 인과와 이지(理智)가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卽明師弟體一,此約華嚴法界門釋,爲明初發心因果理智不異佛故。
또 일체법이 여(如)이니, 법체(法體)가 여(如)함으로써 법을 설한 자와 법도 또한 여(如)하다. 그리하여 법계의 지혜가 바로 듣는 바의 지혜라서 지혜 또한 여여( 如如)하기 때문에 여시(如是)라고 말한 것이니,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니라야 비로소 부처님께서 설한 경전을 들을 것이다. 又一切法如也,以法體如,所說法者,及法亦如,此法界智是所聞之智,智亦如如故,故言如是。心境不二方聞佛所說經,
만약 마음과 경계가 차이가 있으면, 부처님께서 설한 것을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믿고 따르면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若心境有差不可聞佛所說,亦復不能信順領受故,
아문(我聞)이란 것은 법계 지혜의 진아(眞我)가 법계 지혜의 진불(眞佛)을 보고 또한 법계 지혜의 진경(眞經)을 듣는 것이다. 즉 법계 지혜의 진인(眞人)이 서로 주(主)와 반려[伴]가 되어서 법계 지혜의 진중생(眞衆生)을 교화해 법계 지혜의 진성(眞性)으로 깨달아 들게 하기 때문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고 말한 것이다. 我聞者,是法界智之眞我,還見法界智之眞佛,還聞法界智之眞經,摠法界智之眞人,互爲主伴,還化法界智之眞衆生,悟入法界智之眞性故故,言如是我聞。
무릇 불일(佛日)의 출현은 온갖 종류의 중생을 교화하는 궤범(軌範)이니, 결집을 통해 경전을 전한 주반(主伴)은 스스로 기류(氣類ㅜ)가 빛을 가지런히 하고 도(道)가 서로 알아서 사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夫佛日出興化群生之軌範,所有結集傳經之主伴,自非氣類齊光道相知而利物,
그리하여 홍광보살과 문수사리와 여래의 자행(自行)인 보현행 등으로 성스러운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실다움[實]이지, 실다움이 아닌 종지(種智) 밖의 3승인이 가르침을 전할 수 있겠는가? 以弘廣菩薩、文殊師利、如來自行、普賢等,傳持聖教,是實也。非實是種智外,三乘之人能傳教乎?
설사 아난일지라도 역시 동류(同流)라서 다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인 대지혜의 진아(眞我)로써 여래의 대지혜가 설한 진경(眞經)을 듣는 것이니, 이는 가아(仮我)가 아니고 부처님의 지견(知見)과 같기 때문에 여시아문이라고 말한 것이라서 『열반경』의 네 가지 연(緣)의 화합을 갖추어서 듣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設是阿難亦是同流,皆以常樂我淨大智慧之眞,我聞如來大智所說之眞經,非假我故,皆如佛知見故,言如是我聞。不同涅槃具四緣和合之所聞故。
4연이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이근(耳根)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소리가 있어서 들을 수 있는 것이며, 셋째는 중간에 장애가 없는 것이며, 넷째는 욕망이 있어서 이같은 들음[聞]을 듣고자 한 것이니, 이러한 것은 범부의 들음이다. 云何四緣?一耳根不壞,二聲在可聞,三中間無障礙,四有欲欲聞如是之聞,是凡夫聞故。
또 범부와 3승은 열 가지 연(緣)이 있어야 비로소 얻어 듣는다.
첫째 본식(本識)을 의지하고, 又凡夫及三乘有十種緣方得聞,一本識爲依,
둘째 이식(耳識)의 종자가 씨앗[因]이 되고, 二耳識種子爲因,
셋째 말나(末那:제7식)가 오염의 의지가 되고, 三末那爲染污依,
넷째 의식(意識:제6식)이 서로 의지하고, 四意識相依,
다섯째 자류(自類)의 이식(耳識)이 무간(無間)의 의지가 되고/전오식(前五識) 중에서 이식(耳識)을 가리키는데, 이 5식은 생멸하지만 식 자체는 무간(無間)이기 때문에 무간의 의지가 된다고 한 것) 五自類耳識爲無閒依,
여섯째 이근(耳根)이 무너지지 않은 것이 경계의 근(根)이 되고, 六耳根不壞爲境根,
일곱째 듣고자 하는 뜻을 짓고, 七作意欲聞,
여덟째 경계가 소연(所緣)의 연(緣)이 되고, 八境爲所緣緣
아홉째 중간에 장애가 없고, 九中間無障礙,
열째 경계가 가까워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十境近在可聞,
이같은 들음은 범부와 3승의 한량이 있는 들음이라서 이 화엄교의 보살이 온 법계의 대지혜로 들음을 삼기 때문에 다시 능(能)과 소(所)가 없는 하나의 뚜렷하고 밝은 지혜 경계[智境]로써 일념에 삼세겁의 한량없는 모든 소리를 널리 듣는 것과는 같지가 않다. 如是之聞,是凡夫及三乘有限量聞。不同此教菩薩以遍法界大智慧爲聞,更無能所,以一圓明智境,一念普聞三世劫無量等諸聲,皆不如上說。
이처럼 앞서 설한 범부와 3승이 한량없는 겁을 계교하는 것과 같지가 않은 이유는 법계문 속에서 일념일시(一念一時)에 들음으로써 지혜가 안팎이 없이 일시에 듣기 때문이다. 凡夫及三乘繫無量劫者,是法界門中一念一時聞,以智無裏外一時聞故。一時者,
『양섭론(梁攝論)』에 의거하면 ‘일시(一時)’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평등(平等)의 시(時)니 부침(浮沈)과 전도(顚倒)가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화합(和合)의 시니 지금 듣고 능히 듣고 올바로 듣기 때문이며, 셋째는 법륜을 굴리는 시이니 곧 올바로 설하고 올바로 받아들이는 때이기 때문이다. 依梁攝論,一時有三義,一平等時,無沈浮顚倒故,二和合時,謂令聞能聞正聞故,三轉法輪時,卽正說正受時,
고인(古人)들의 설에 의거해 보면, 올바로 『법화경』을 설할 때는 다른 경을 설할 때가 아니고, 올바로 『금강반야경』을 설할 때는 다른 경전을 설할 때가 아닌 것을 일시(一時)라고 이름을 붙인다. 故如依諸古人說,正是說法華經時,非是說餘經時,正是說金剛般若經時,非是說餘經時,名爲一時
이처럼 해당되는 경전을 올바로 설할 때를 취해서 일시라고 이름 붙인 것이지만, 이제 이 『대바왕불화엄경』을 설한 때는 그렇지가 않다. 즉 이 법계의 체(體)를 통해 의탁해서 말하는데, 1찰나에 세상에 출현하고 열반에 들기 때문에 이름붙이는 거이니, 앞서 말한 일시의 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取正是說當部經時,名爲一時。今此說大方廣佛華嚴經時,卽不爾,卽是以法界體寄言,一剎那際,出世及涅槃,以一言音,一時遍周十方國土轉法輪時,名爲一時。非如上說一時之義。
부처란 깨달음[覺]이다. 깨음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시각(始覺)이고, 다른 하나는 본각(本覺)이다. 이 부처란 것은 시종(始終)이 없음을 깨달아서 삼세의 장애가 다한 것을 부처라고 부르는데, 이는 세상에 출현함이 있고 열반이 있고, 또 시(始)와 종(終)이 있는 3승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佛者,覺也。覺有二義,一始覺,二本覺,此佛者,覺無始終,三世障盡名之爲佛,不如權教有出世涅槃有始終故。
또 『대지도론』에서는 부처에는 네 가지 뜻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 유덕(有德)이라는 명칭인데, 바가(婆伽)는 덕의 명칭이고 바(婆)는 유(有)의 명칭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분별(巧分別)이란 명칭인데, 바가는 분별의 명칭이고 바는 교(巧)의 명칭이기 때문이다. 又佛者,大智度論中,有四義,一名有德,謂婆伽名德婆名有故,二名巧分別,婆伽名分別婆名巧故,
셋째는 유성(有聲)이라는 명칭인데, 바가는 성(聲)의 명칭이고 바는 유(有)의 명칭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능파음노치(能破婬怒癡)/능히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음 타파한다.)라는 명칭인데, 바가는 파(破)의 명칭이고 바(婆)는 음노치(婬怒癡)의 명칭이기 때문이다. 三名有聲,婆伽名聲婆名有故,四名能破婬怒癡,婆伽名破,婆名婬怒癡故。
또 『불지론(佛地論)』에서는 여섯 가지 뜻을 설하고 있는데, 그 게송에서 “자재로움과 치열한 무성함과 단정한 위엄과 명칭(名稱)과 길상(吉祥)과 존귀(尊貴)”라고 했다. 이처럼 여섯 가지 차별의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바가바(婆伽婆)라고 호칭한 것이다. 又佛地論說有六義,頌云:自在熾盛及端嚴,名稱吉祥與尊貴,具斯六種義差別,是故摠號爲薄伽。
재(在)란 어느 곳에나 계신 것인데,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사(事)를 가리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법을 드는 것이다. 사(事)를 가리키는 것이란 “마갈제국에 계시다”에서 그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在者,在何處?所有二義,一指事,二擧法。指事者,在摩竭提國,且指其國,
법을 들었다는 것은 어느 곳에나 계신 것이니 법계에 있는 것이다. 즉 사(事)가 바로 법계라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니 법계는 중간이나 변두리, 크고 작음, 피(彼)와 차(此)라 없는 탓이다. 擧法者,在何處也?在法界,卽事卽法界無二故,爲法界無中邊大小彼此故。
또 마갈제국이란 한역하면 불해국(不害國)이다. 마(摩)란 무(無)를 말하며, 갈제는 해(害)를 말하니, 총체적으로는 무해국(無害國)이 된다. 또 마란 불(不)이며 갈제는 지(至)니, 이는 이 나라의 장수가 지모가 있고 병졸도 용맹하여 이웃의 적국이 침략해 오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또 마(摩)란 변(遍)이며 갈제는 총혜(聰慧)니, 이는 총명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나라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 마란 대(大)며 갈제란 체(體)이니, 이는 5인토(印土) 중 이 나라가 가장 크고 모든 나라를 통솔하기 때문에 대체(大體)라고 하는 것이며, 또 이 나라의 왕이 사형을 행하지 않고 죄가 있는 자는 한림(寒林) 속에 보냄으로써 부처님의 대자비를 밝히고 있기에 그 처소로써 덕을 나타낸 것이다. 又摩竭提國者,此云不害國,摩者云無,竭提云害,摠云無害國。又云摩者,不也,竭提者至,言其此國將謀兵勇鄰國敵不能侵至。又摩者,遍也,竭提云聰慧,此國爲多有聰慧人,遍其國內故。又云摩者,大也,竭提,體也。謂五印土中,此國最大,統攝諸國,故云大體也。此國王不行刑戮,其有罪者,送置寒林中,爲明佛大悲,以處表德故,
아란야법은 한역하면 적정처(寂靜處)이고, 이 적정(寂靜)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사(事)요 다른 하나는 이(理)이다. 첫째, 사(事)는 마가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 근처 구루빈라(漚樓頻螺) 마을에서 대략 5리(里) 거리인 1 우후지(牛吼地)에 계시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阿蘭若法,此云寂靜處。寂靜,有二義,一事,二理。一事者,在摩伽陁國尼連河側漚樓頻螺聚落中,去人間五里,一牛吼地也。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곳에는 일만명의 도량신(道場神)이 늘 그곳에 있고, 일체 부처님께서 정각을 성취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모두 그 속에 있는 것은 여래의 만행이 원만해서 중도(中道)가 치우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이곳이 염부제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理)란 일체법이 스스로 적정한 것이니, 동(動)에 즉해서 항상 적정하기 때문이다. 此處有一萬道場神,常在其處,一切諸佛,示成正覺,摠在其中,表如來萬行圓滿中道無邊故,此處是閻浮提之中心故。二理者,卽一切法自體靜故,卽動而常靜故。
보리도량에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사(事)요 둘째는 이(理)이다. 첫째 사(事)란 앞에서처럼 니련선하 근처를 말하며, 둘째 이(理)란 법계에 두루하는 것이다. 법계가 끝이 없으니 중도도 끝이 없어서 일체의 찰토에서 모두 성불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세간의 도량은 더러움을 가려내고, 법의 도량은 미혹을 다스리니, 성불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중생의 미혹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菩提道場者,有二義故,一事,二理。一事者,如前尼連河邊,二理者遍法界也。法界無邊中道無邊,於一切剎皆示成佛故,如世間場簡穢故,法場治惑故,示現成佛治衆生惑故。
이 도량은 의주석(依主釋)/육리합석(六離合席)의 하나. 두 개 이상의 명사로 이루어진 합성어에서 뒤의 말에 제한되어 주(主)와 반려[伴]의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방법. 예컨대 안식(眼識)이라고 하면 안(眼)이라는 주9主)를 의거해서 식(識)이라는 반려를 나타내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그 속에 계시면서 성도(成道)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主)를 의지해서 이름을 얻어 깨달음의 도량[覺場]이 되는 것이다. 此場依主釋,爲佛在其中現成道故,依主得名爲覺場也。
시성정각(始成正覺)이란 고금의 정(情)이 다한 것을 시(始)라 이름 붙이고, 마음에 의지함이 없는 것을 정(正)이라 이름붙이고, 이치와 지혜가 상응하는 것을 각(覺)이라 이름붙이고, 이러한 법을 얻는 것을 성(成)이라 이름 붙인다. 始成正覺者,古今情盡,名之爲始,心無所依,名之爲正,理智相應,名之爲覺,得如是法,名之爲成。
또 스스로를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는 것을 각(覺)이라 이름붙이기도 한다. 이상 여덟 구(句) 중 의심을 끊고 믿음을 성취한다는 분(分)에 대한 해석을 마친다. 又自覺覺他,名之爲覺,以上釋八句中斷疑成信分竟。
둘째/문장에 따라 뜻을 풀이하는 것을 넷으로 나눈 것 중 두 번째이다.) 도량을 장엄하는 분(分)은 다음과 같다. “그 땅이 견고해서[其地堅固]” 이하부터 “오묘한 음성이 멀리 퍼져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妙音遐暢無處不及]”에 이르기까지 26행 반의 경전에 있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정보(正報)ㆍ의보(依報)와 도량을 장엄함을 밝힌 것이다. 第二莊嚴道場分者,從其地堅固以下,至妙音遐暢無處不及,於中有二十六行半經,明如來依正二報莊嚴道場,
이 한 대목의 문장 속에 여래의 본성이 네 종류의 인(因)을 행함으로써 네 종류의 과보를 얻는 것을 밝히겠다. 하나의 심성(心性) 속에는 네 종류의 인(因) 있어서 10바라밀을 행하고 있으니, 또한 그 속에서 각각 열 가지 장엄을 얻는다. 於此一段文中,明如來本行中,四種因感四種果報,於一心性中,有四種因,行十波羅蜜。又於其中,各得十種莊嚴,
네 종류의 인과(因果)란 무엇인가?
첫째, 법신의 인(因)으로 금강지(金剛地)를 과보로 얻는 것이다. 경전에서 “그 땅이 견고해서”라고 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그 땅 위에 열 가지 장엄이 있는 것은 바로 10바라밀로 의보(依報)를 이루는 것이고, 금강지로 정보(正報)를 삼는 것이다.何者爲四種因?第一以法身因報得金剛地。經云:其地堅固者是也。其地上有十種莊嚴,卽以十波羅蜜以成依報,金剛地爲正報。
무엇이 열 가지 장엄인가?
첫째, 법신 중의 대지혜로 단(檀)의 체(體)를 삼는 것이니, 1행(行) 가운데 10행을 갖춰 총체적으로 원만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경전의 종지는 1행이 곧 일체행으로 주(主)와 반(伴)이 항상 원만하기 때문에 보륜(寶輪)의 원만함으로 금지(金地)를 장엄한 것이니, 이는 하나가 곧 일체란 것을 밝힌 것이다. 何者爲十種莊嚴?一以法性中大智以爲檀體者,卽一行中具十行摠圓故,以此經宗一行卽一切行主伴恒圓滿故。故以寶輪圓滿用嚴金地,明一卽一切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