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전면 온막리 임금산에 있는 이창기의 묘
항일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는다
청도군 매전면 금천리, 온막리, 장연리, 북지리를 중심으로
청도에 와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찾던 중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자식은 많이 낳아야겠다는 생각이다. 특히 항일독립운동유공자의 흔적을 찾다 보면 후손이나 가까운 친인척이 살아있는 분은 대부분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의 공적을 인정받고 후손으로서 연금 혜택도 받고 있고, 또 기념비가 세워졌거나 추모 사업이 유지되고 있었다.
반면에 후손이나 가까운 친척이 없는 유공자는 아무도 국가로부터의 인정은 물론 지역민으로부터도 철저히 잊혀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의 보훈 사업이 국가가 나서 적극적으로 대상을 찾기보다는 대부분 후손의 신청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느껴진다.
먼저 일제 통감부(日帝 統監府) 시절 명성황후시해(明成皇后弑害)사건과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체결에 항의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산동지역에서도 항일 창의군(倡義軍)이 조직되어 의병활동을 하고 있던 때인 1908년 5월 19일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에 살고 있던 기독교인 이창기(李昌基·33세)는 명대동교회(明臺洞敎會)의 새벽기도회를 다녀오다가 일본군의 창검에 찔려 무참히 피살당하였다.
이때 맹의와(孟義窩. Mcfarland, Edwin Frost) 선교사와 교인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교회에 안치했다가, 마을 공동묘지인 임금산(君坪山) 중턱에 매장한 후 청도군수와 일본군 주둔 사령부에 엄중히 항의했으나 당시 치안과 사법권을 이미 장악하고 있던 일본은 오히려 폭도(暴徒)의 한사람으로 몰아 남은 유가족을 불온선인(不穩鮮人)으로 감시했다. 1910년 한일합병(韓日合倂)이 되자 일본 경찰의 감시를 견디다 못해 이창기의 처 양씨(梁氏)부인은 친정 부모를 따라 다섯 살 난 아들 의생(義生)을 데리고 서간도(西間島)로 망명길을 떠났다.
1945년 해방 후 온막리(固城李氏) 문중의 친척 중 한 사람이 금천면 동곡(東谷) 장터에서 남루한 차림으로 감을 팔고 있는 양씨부인을 만나 아들 의생의 안부를 물었더니 망명한 그해 겨울 만주에서 동사(凍死)했다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뜬 후 아무도 부인의 행적을 모른다고 한다.
후손이 없다 보니 지금의 임금산 태양광 발전소 공사 현장 위에 묻혀 있는 이창기의 무덤을 아무도 돌보지 않아 잡목 숲에 묻혀 후일 다시 찾기 어려운 지경에 놓여있어도 교회에서조차 순교자의 예우는커녕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짐작건대 나 같은 외지인의 주장에 자존심이 상했거나 배타적 심리가 작용한 것 같다. 마침 지인 중의 한 분이 ‘한국교회 역사복원 프로젝트(The Restoration of Korean Church History Project)’의 기획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그곳에 부탁해 볼 생각이다.
지금 온막리에는 먼 친척 중의 한 분인 이승윤(李承潤) 노인이 선대로부터 들어 온 후문만 겨우 전해 줄뿐 이 교회 설립자 중의 한 사람인 금석범(琴錫範)의 따님 금명진 권사와 사위 이종범 장로가 몇 해 전에 별세하여 이제는 누가 나서 적극적으로 증언해 줄 사람도 없다.
전국 매전면 향우회 회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금석범(琴錫範)의 고향이자 이창기의 부인 양씨의 친정이 있는 매전면 금천리 이사리(伊士里) 마을의 봉화금씨(奉化琴氏)나 남원양씨(南原梁氏) 문중에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분이 계시면 연락을 바란다. 내가 조사한 자료에는 일제강점기 금천리 양씨 문중에서 여러 집이 서간도로 집단 이주했다가 해방 후 귀환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 북지리 연일정씨(延日鄭氏) 문중에 이창기의 누이 한 명이 시집을 간 보첩(譜牒) 기록이 있는데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장연리 길명 마을의 만세 시위 당시 집결지
다음으로 3·1운동 당시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梅田面 長淵洞) 만세시위 사건의 관련자 후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더 안타깝다.
1919년 3월 10일 청도에서는 맨 처음으로 매전면 장연리에서 주민 김집이(金集伊), 노이만(盧二萬), 이선이(李善伊), 이작지(李作之), 이용술(李龍述), 최두천(崔斗千), 이학천(李學千), 배돌이(裵乭伊) 등이 주도하여 주민 100여 명이 참가한 야간 만세시위를 감행하여 청도 지역 3.1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제 탄압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지금도 그 후손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나는 이 사건 후 도주하여 행방불명된 주동자 김집이(金集伊)의 행적을 찾아 그가 살던 집의 구 등기부 등본상의 소유주인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경주김씨(慶州金氏) 문중과 모계중고등학교(慕溪中高等學校) 설립자인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백곡마을 김해김씨(金海金氏) 문중을 찾아가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 집터는 1959년 장싯골 사람 반재우(潘在雨) 씨에게 이전되고, 1970년에 길명 사람 이은기(李殷基) 씨가 매입하여 현재까지 소유하고 있다.
또, 도주하였다가 훗날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아 복역 후 출소한 노이만(盧二萬)의 본적지인 매전면 내리에 가서 수소문한 후 성과 없이 돌아왔는데 얼마 후 금천면 임당리에서 장연노씨(長淵盧氏) 문중의 한 분이 노이만의 손자임을 주장하며 연락이 왔다. 그의 주장은 당시 상황과 매우 일치하여 증빙자료를 찾던 중에 유일한 증인인 고모(노이만의 딸로 추정)가 지난해 별세하여 확인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먼저 만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아직 남아있다.
그런데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예상했던 고성이씨 문중으로 짐작되는 후손을 아무도 못 찾아 너무 안타깝다. 그 외에도 당시의 관련자가 8명이나 되는데 아무도 후손임을 주장하거나 이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1919년 5월 16일 자 대구지방검찰청의 불기소 사건 목록에서 찾은 이 사건 관련자의 인적사항은 다음과 같다. 혹 아시는 분이 있으면 연락을 바란다. 이 명단을 자세히 보면 노이만과 이선이는 주소가 같은 점으로 보아 부부인 것 같고, 이학천과 배돌이의 집도 주소가 같아 일하는 동거인인 것 같고, 대부분 길명 마을 사림이나 최두천은 깃당 마을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1) 김집이(金集伊) 28세/ 주소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665번지/ 보안법위반, 기소중지 불기소 *행방불명
(2) 노이만(盧二萬) 34세/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674번지/ 보안법위반, 기소중지 불기소 *후일 검거되어 징역 4월 수형
(3) 이선이(李善伊) 32세/ 주소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674번지/ 보안법위반, 기소유예 불기소
(4) 이작지(李作之) 30세/ 주소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365번지/ 보안법위반, 기소유예 불기소
(5) 이용술(李龍述) 31세/ 주소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367번지/ 보안법위반, 기소유예 불기소
(6) 최두천(崔斗千) 24세/ 주소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314번지/ 보안법위반, 기소유예 불기소
(7) 이학천(李學千) 29세/ 주소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374번지/ 보안법위반, 기소유예 불기소
(8) 배돌이(裵乭伊) 30세/ 주소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374번지/ 보안법위반, 기소유예 불기소
http://blog.naver.com/kjyoun24/221041817846
첫댓글 금석범 어르신의 따님인 금명진 권사님은 제 7촌 아지매 되시는데, 몇 년 전에 돌아가셨지요.
배움도 많고, 지혜로우셨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아지매 택호가 뭐였더라??? 아. 명동댁이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가님들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울러 작은집 아재와 아지매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저 세상에 계신 분들, 우리 부모님을 비롯해서 옛 시절의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선생께서 관심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동댁'이란 택호도 기억해 두겠습니다.
매전초등학교 동문들이 기억하는 모든 것은 소중한 역사 자료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