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전남 광주에서 살았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는데 당시 행재소(임금이 피난하여 거처하던 곳)인 의주에 장계를 전달하고자 했으나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자 17세의 소년인 정충신이 자원하여 왜군의 사이를 뚫 고 외주까지 가서 장계를 전달한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 해 가을에 행재소에서 실시한 무과에 급제한 후 1623년 안주 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 이괄의 난 때에는 도원수(都元 帥) 장만의 휘하에서 진부대장으로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의 안산에서 무찔러 진무공신 1등으로 금남군에 봉하여졌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 에 대한 쇠폐를 거절하고 청과 절교할 것을 결정하여 이 사실을 청조에 알리려고 김대건을 사신으로 보내자 공은 김시향과 함께 탄식하며 사신을 머무르게 하고 조정에 재고할 것을 청하는 상소 를 올렸다가 당진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다시 장연으로 옮겨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곧 풀려서 이듬해 포도대장,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1636년 병이 심해져 운명했다.
(지곡과의 인연)
이곳 대요리 일대는 당시 이괄의 땅이었던 것을 정부에서 환수 한 바 있었다.
정충신이 이괄의 난을 평정한 후 장만의 건의로 이 땅을 정충신 에게 주어 사패지지(賜牌之地)가 되었다.
말년에 병이 깊어지자 당진에 와 있었는데 대산 망일사에서 40 여 일 간 정양한 바 있고 이곳 국사봉을 돌아보고 자기가 죽거 든 이곳에 장사 지내라고 묘소를 지정해 놓았다. 이때 지정한 곳 이 현재의 묘소로서 진충사에서 위쪽 국사봉 아래에 있다.
따라서 지곡면과 특별한 인과 관계는 없고 이후 정충신의 자손 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여 현재까지도 금성 정씨 일 가가 계속 살고 있다.
( 정충신장군 일화(逸話) )
공은 장만을 따라 명나라에 여러 번 다녀왔고 광해군 9년(1617) 에는 일본에도 가서 국제정세도 살폈다. 또한 당시 만주지방에서 는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우리 나라가 명나라와 통교함을 트 집잡아 침략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조정에서는 후금의 동태를 살 피도록 당시 만포진 첨사인 공을 사신으로 보냈다.
누루하치도 공의 명성을 일찍이 들었겠지만 회담하는 자리에서 공의 기세를 꺾고자 좌우에 창검을 든 군사들을 세웠으며 장소 를 호화롭게 치장하였다.
청 태조는 “조선에는 인물이 없어 너 같은 소소인(小小人)을 보내서 국사를 논하게 했느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공은 껄껄 웃으며 “우리 나라는 사람을 쓰는 법도가 따로 있어 서 예의 도덕을 잘 지키는 나라에는 대대인(大大人)을 보내지만 포악하고 힘만 주장하는 나라에는 소소인을 보낸다. 그대는 소장 부를 잘 알아보는구려. 그런데 나 같은 소장부가 무엇이 무서워 이처럼 창검의 숲을 세우고 맞이하시오.”하니 태조가 더 할말을 잃었다.
청태종이 네 아들을 불러 공께 인사를 시키니 공은 넷째 아들 차례가 되자 일어나서 맞절을 하는 것이었다. 태종이 물으니 진 시황이 다시 태어났기로 그런 것이라 했다. 과연 후일에 중국을 통일하는 천태종이 되었다. 그후 정충신이 있는 동안 청나라는 침범해 오지 않았다. 이외에도 주체성 있는 외교 활동으로 국위 를 선양하고 국난을 타개한 위대한 전략가요, 외교관이요, 정치 가였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려고 하자 이항복이 불가함을 아뢰자 북청으로 귀양을 보낸다.
스승이었던 이항복을 모시고 북청 까지 동행하여 이항복이 그곳에서 죽으니 시체를 염습하여 모시 고 고향인 포천에 장사 지내고 3년간 심상(心喪)하였다. 그만큼 의리가 강한 장군이었다.
또 한 분의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추모제향이 열리는 이유는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장군의 사우 진충사에서 서편으로 800여m 떨어진 마힐산의 국사봉 중턱에 장군의 부인과 함께 나란히 쌍분으로 안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남 나주 출신으로 광주의 중심 상가인 금남로가 그의 칭호를 따서 붙인 정충신 장군의 묘소가 이곳 서산에 있게 된 연유는 저선 인조2년(1624)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 장군이 전부대장으로서 토벌군을 이끌고 서울 길마재에서 반군을 전멸 시켜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 일등공신이 되어 나라에서 국사봉을 중심으로 약 45만여 평의 땅을 장군에게 사패지지로 하사하였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이에 장군 생존시에는 아들 빙과 지상을 대동하고 유택을 친히 잡아 놓고 아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 자 자리에 장사지내 주도록 당부한 곳이라고 전한다.
공신의 호칭 중에 충무공(忠武公)은 국란 등에 국가에 큰 공을 세운 무신들에게 내려준 호칭으로 이방원의 명으로 정몽주를 척살하고, 1차 및 2차 왕자의 난에서 큰 공을 세운 조영무(趙英茂, ?~1414),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구성군 이준(李浚), 한때 '
소년 장수'로 유명했던 남이(南怡, 1441~1468), 임진왜란에서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이괄의 난을 평정한 이수일(李守一), 임진왜란 때 17세의 나이로 광주 목사 권율 밑에서 활약하였고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 휘하에서 전부대장으로 이괄의 군사를 무찔렀던 정충신(鄭忠信, 1576~1636),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호위하였던 구인후(具仁候,1578~1658), 3000명의 군사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전사한 김응하(金應河, 1580∼1619)가 그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