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 미 순 교 성 지
1. goodnews - 성지 - 대전교구, 해미성지
http://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menugubun=holyplace&ctxtOrgCode=71&ctxtGyoguCode=12&Orggubun=71&ctxtHigh=&ctxtLow=&curpage=2&ctxtOrder= name1 &ctxtOrderType=&ctxtOrgNum=2312&PSIZE=20
<위 게시된 내용 중 주요 부분 소개>
생매장 구덩이에 부는 바람
지번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10
도로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홈페이지 http://www.haemi.or.kr
전자메일 mbh7799@hanmail.net
어느 순교지나 선조들의 위대한 정신과 숨결이 느껴져 후손을 자랑스럽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폐부를 찌르는 깊은 신음과 함께 서려 있기도 하다.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반 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의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할 때뿐만 아니라 해미 진영은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 참수 · 몰매질 · 석형 · 백지사형 ·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시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됐다.
이렇게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이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이들이 숨져 간 유적지는 현재 깨끗하게 단장돼 있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라 알아듣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오는 생매장터인 진둠벙 주위로 십자가의 길 14처와 노천 성당이 조성되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에는 동헌과 교우들이 갇혔던 옥사가 복원되었고, 그 앞에는 고문대로 쓰였던 호야나무(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가 무심히 남아 있다. 이 나무 위에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서문 밖 순교성지에는 1956년에 서산 성당(현 서산동문동 성당)으로 이전 · 보존되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에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1월 8일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서문 밖 순교성지에는 현재 자리개 돌다리 모조품과 1989년에 건립한 순교현양비가 우뚝 서 있다.
1935년에는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원래 순교터인 생매장 순교지의 해미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었다.
해미 성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성지는 한티 고개이다. 이 고개는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외길이지만 압송로 표지 리본이 눈에 잘 띄게 달려 있어 별 어려움 없이 순례할 수 있다.
내부.해미 성지는 3,000여 명의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새 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소성당과 대성당은 무명 순교자들의 생매장 구덩이를 상징하는 원형구조로 건립되었고, 실내 장식과 외부 건물 또한 죽음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이른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쉼터의 이미지를 갖도록 했다. 성당 뒤편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을 건립하였다. 유해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해 축복식을 가졌다.
2008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 고시된 해미 성지는 2015년까지 지자체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순례지로 개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우선 순교자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순교한 뒤 매장되는 과정을 복원한 십자가의 길 14처를 읍성 곳곳에 세웠다. 이어서 성지 인근의 사유지를 매입해 순례자의 숲, 연못, 청소년 수련관 등을 세우고 성지 주변 해미천도 순차적으로 정비할 계획이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 성지를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갖고 해미읍성에서 폐막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미 순교성지 기념관 앞에서 전날 광화문 광장에서 복자품에 올린 해미 순교자 3위(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 시복 기념비 제막식도 가졌다.
해미 성지는 교통이 사통팔달(四通八達)로 시원스레 뚫려 있어 다소 거리는 멀지만 당일이나 1박 2일로 순례하기는 안성맞춤이다. 인근에는 수덕사로 유명한 덕산 도립공원과 가야산, 덕산 온천, 태안 해안 국립공원 그리고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볼 수 있는 안면도 등이 자리하고 있어 주말 가족 순례 코스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2월 2일)]
충청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순교 터가 되어 온 곳은 공주와 해미, 그리고 홍주였다. 이 중에서 해미는 병마절도사의 읍성이 있는데다가 내포 지역과 가까웠으므로 1799년에 인언민(마르티노)과 박취득(라우렌시오)이 순교한 이래 박해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특히 덕산의 '배나드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3구)는 1817년에 해미 포졸들이 몰려와 신자들을 해미로 끌고 가서 처형한 애환을 담고 있는 교우촌이다. 또 그 이웃에 있는 '용머리'(현 삽교읍 용동리의 주래)는 인언민의 생매장지로, 1991년 이래 삽교 본당 신자들이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조성한 사적지가 있다.
관찰사가 주재하던 공주 감영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다른 어디보다도 많았다. 지금의 공주시 반죽동 사대부고 자리에 봉황산을 뒤로하고 감영(監營)이 있었는데, 순교자들의 처형은 이곳이 아니라 교동에 있는 금강변의 '황새바위'(옛 공주 형무소 자리, 일명 항쇠(項鎖)바위)에서 행해졌다. 또 영장이 주재하던 홍주에서는 주로 관아(현 홍성읍 오관리) 인근의 형지나 옥 안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정에서 순교자들에게 내린 판결은 원칙적으로 정법(正法), 곧 참수형이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한 경우와 문초를 받다가 장형(杖刑)에 못 이겨 순교한 경우도 많았다. 교수형은 일반적으로 구멍이 있는 큰 돌(일명 형구돌)이나 벽에 뚫은 구멍에 줄을 넣고 순교자의 목을 얽어 맨 다음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는 방법이 있었고, 한 번에 많은 신자들을 처형할 경우에는 두껍고 큰 널 가운데로 여러 구명을 뚫고 줄을 꿴 다음, 신자들의 목을 구멍에 넣도록 하고 양쪽에서 줄을 당겨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 1866년 11월에 홍주에서 교수형을 당한 김선양(요셉) 등 17명의 교우가 이 형벌로 순교하였다.
한편 홍주와 해미는 공주 감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한국 행형사(行刑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남형(濫刑)이 자행되었다. 사람의 머리를 쇠도리깨로 치거나 큰 형구돌 위에 머리를 놓고 쳐서 죽이는 자리개질이 있었고, 사람의 머리를 누인 뒤에 대들보 형틀을 내리쳐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것은 해미와 홍주에서 있었던 생매장이었다.
생매장은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가해진 특이한 방법으로, 각지에서 체포되어 온 신자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참수하기가 어렵게 되자 지방 관아에서 제멋대로 행한 것이었다. 해미의 경우를 보면, 읍성에서 조금 떨어진 조산리(造山里) 숲 속으로 끌고 가서 구덩이를 파고 신자들을 산 채로 묻어 버렸다고 한다. 이 사실은 훗날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가 진행되었고, 1935년 4월 1일에는 마침내 그 현장이 발굴되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병인년 해미에서 있은 대박해의 진상은 벌써 70년이나 되는(1935년 현재) 옛적 일이므로 소년이나 청년 중에는 그런 일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노인 몇 분이 아직 생존하여 보고들은 바를 자세히 말해 주었으므로, 틀림없는 역사를 발견하여 천주의 영광과 치명자의 승리를 전하게 되었다.
노인들의 증거에 따라서 모든 사정을 자세히 조사한 후, 금년(1935년) '조산리'에서 치명자의 유해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의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 없이 몇 십 명이 되나, 아직 남아 있어 수습된 유해는 10여 명 가량밖에 안 된다. 병오년(1906년) 큰물에 봉분이 다 없어져서 무덤의 형적은 보이지 아니하였지만, 증인들의 가르침에 따라 똑똑히 안 후에 서산과 해미 관공서의 승낙을 얻어 발굴한 결과 유해를 많이 얻게 되었다("해미 치명자 유해", [경향잡지] 제29권 815호-제30권 822호).
혹독했던 병인박해와 관련된 순교 터 중에서 가장 먼저 사적지로 조성된 곳은 해미로, 대전교구에서는 1975년 10월 24일 이곳에 순교 탑을 건립하였으며, 1983년 12월에는 생매장지를 확보하여 본격적으로 사적지 조성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1995년 9월에는 서산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되어 있던 생매장 순교자들의 유해를 순교 탑 아래로 옮겨 안치하였다. 다음으로 공주의 황새바위 순교 터는 교동 본당과 중동 본당에서 그 터를 매입한 뒤 1985년 11월 7일에 순교 탑과 기념 경당을 건립하였다. 또 황새바위 순교자 중에서 목천 소학골(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 출신의 배문호(베드로)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고향에 안장하였으며, 1990년 겨울에 그 무덤이 확인된 후 지금까지 사적지 조성 사업이 진행되어 오고 있다.
순교자들이 겪은 시련은 혹독하다 못해 처참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천상의 행복과 신앙 후손들에 대한 희망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 "순교자의 피가 또 다른 순교자를 낳고, 그들의 피가 공동체의 모퉁잇돌이 된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
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해미 고을은 조선 중기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위한 진영이 있던 곳으로 진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며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는데, 공식적인 박해 외에도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의 옥사에는 늘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나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자리개질 등으로 죽어갔습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이나 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순교한 이들의 정확한 신원과 행적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수천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의 이름과 출신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생매장과 수장으로 숨져 간 진둠벙 주변에는 십자가의 길과 노천 성당 등이 조성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읍성에는 동헌과 교우들을 가두었던 옥사가 복원되었고, 그 앞에는 고문대로 쓰던 호야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서문 밖 순교성지에는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하여 보존하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2009년 1월 다시 해미 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고, 1989년에 건립한 순교현양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1935년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원래의 순교터인 해미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었습니다.
해미 성지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무명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성당 뒤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을 건립했습니다. 유해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2008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 고시된 해미 성지는 2015년까지 지자체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순례지로 개발할 예정입니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 성지를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갖고 해미읍성에서 폐막미사를 집전했습니다.
미사시간 안내
주일미사 일 11:00
평일미사 월 11:00 화 11:00 수 11:00 목 11:00 금 11:00
토 11:00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 해미읍성(수 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 진영)
http://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menugubun=holyplace&ctxtOrgCode=71&ctxtGyoguCode=12&Orggubun=71&ctxtHigh=&ctxtLow=&curpage=2&ctxtOrder= name1 &ctxtOrderType=&ctxtOrgNum=2373&PSIZE=20
지번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79
도로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
전화번호 (041)688-3183 홈페이지 http://www.haemi.or.kr
관련기관 해미 성지 관련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을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 수비를 명목으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將)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을 기록한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여 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박해 때만 해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지속적인 박해 동안 해미 진영(지금의 해미읍성, 사적 제116호)에 있던 두 채의 큰 옥사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바로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또한 옥사 앞에는 당시 순교자들의 손발을 묶고 나뭇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던 일명 호야나무(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가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을 희미하게 간직한 채 지금도 우뚝 서 있다. 그래서 1950년대에 해미 공소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하여 옥사터 주변 땅 1,800여 평을 확보하여 공소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 정부가 문화재 관리 정책이란 명목으로 공소 강당을 철거하고 그 터를 일부 보상, 일부 징발한 후 순교 기념비만 새로 세워주었다. 그 후 오늘날까지 옥사터에 대한 교회 자체적인 성역화 사업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내포 지방에서 끌려와 옥사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순교 선열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의 서문 밖으로 끌어내어 교수 · 참수 · 몰매질 · 석형 · 백지사형 · 동사형 등으로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더욱 잔인한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다. 즉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어 죽이기도 하였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은 해미 진영의 서문 밖 바로 앞에 있는 70여 평의 좁은 순교성지에 자리개질에 이용되던 돌다리가 보존되어 있는데, 1956년에 서산 성당(현 서산동문동 성당)으로 이전 · 보존되다가 1986년 9월에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1월 8일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현재 서문 밖 순교성지에 있는 자리개 돌다리는 모조품이다. 그리고 도로로 둘러싸인 순교지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순교현양비는 1989년 6월 24일 세운 것이다.
1866년 병인년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많은 수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으로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든 후, 한 마디 명령으로 산 사람들을 밀어 넣고 흙과 자갈을 덮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해미 지역의 외인들은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하여 ‘죄인 둠벙’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때 캐어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묻었다는 증거이다. 1935년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의 지도 하에 해미 진영 서녘의 생매장 순교 벌판에 대한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때 발굴한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 성물들은 그해 4월 2일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원래 순교터로 이장되었다. 이때 순교자들의 유해 일부는 별도로 보존 처리하여 모셨다가 현재는 해미순교성지 기념관 내의 유해참배실에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역 뒤에는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탑이 세워졌다.
그런데 이렇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이 불확실한 이름과 출신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을 뿐, 그 밖의 모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모두가 무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순교자들 중 홍주(홍성)와 공주 등 상급 고을로 이송된 순교자들은 이송 사실과 이름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으로 보아 그 이송된 순교자들은 해미 진영장의 독자적 처결에 있어서 사후에 문책거리가 됨직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며, 해미 진영은 처형 후 문책의 배후 세력을 갖지 못한 서민층 신자들만을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죽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미 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설립된 후 해미 순교선열현양회를 발족하였고, 순교성지 확보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꾸준히 모금한 결과 1998년 말에 생매장 순교터 부지 약 7천 여평을 확보하였고, 이어서 1999년 5월부터 3천 명의 회원들로부터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아 2000년 8월 기공식을 갖고 2003년 6월 17일 무명 순교자 기념 성당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오늘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 성지를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갖고 해미읍성에서 폐막미사를 집전하였다. [출처 : 해미성지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30일)]
감옥터와 호야나무
높이 5미터, 길이 1,800미터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의 대지 위에 내옥 ·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울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갔던 감옥은 발굴 작업 및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복원 재현되었다.
그 감옥터 옆에 있는 호야나무는 신자들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즉 오늘도 이 호야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 줄에 움푹 패도록 옛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관아터와 장터길
진영장이 호령하던 옛 동헌 또한 헐려 없어졌다가 복원되었다. 그 옆에 아문과 호서좌영의 옛 모습 또한 복원되어 있고, 그 주위로 노송 여러 그루가 당시 호령 소리, 곤장 치는 소리, 비명 소리를 이파리마다 묻혀 놓은 듯 그 자리에 서 있다. 관아터로부터 남서쪽으로 헐려진 옛 집터 사이사이에 질퍼덕한 길이 있었다. 옛 저자 길로 옛님들이 저주의 욕설을 온몸에 묻혀가며 형장으로 호송되던 길이었다.
서문 밖 순교지.
이곳의 자리개 돌다리는 해미 성지로 옮겨졌고 이곳에는 현재 모형이 놓여있다. 옆에는 순교현양비가 우뚝 서 있다.관아터와 장터길 진영장이 호령하던 옛 동헌 또한 헐려 없어졌다가 복원되었다. 그 옆에 아문과 호서좌영의 옛 모습 또한 복원되어 있고, 그 주위로 노송 여러 그루가 당시 호령 소리, 곤장 치는 소리, 비명 소리를 이파리마다 묻혀 놓은 듯 그 자리에 서 있다. 관아터로부터 남서쪽으로 헐려진 옛 집터 사이사이에 질퍼덕한 길이 있었다. 옛 저자 길로 옛님들이 저주의 욕설을 온몸에 묻혀가며 형장으로 호송되던 길이었다.
서문 밖 순교지
저자 길을 따라 서쪽 하수로에 다다르면, ‘재앙을 떨쳐내는 문’이 비껴 있다. 재앙의 씨알머리를 서쪽에 내어 버리듯이, 사학 무리를 이 문 밖으로 끌어내어 쳐 죽었다. 잡아들일 때 빼앗았던 십자가의 묵주 등을 이 문의 난간에 넣어놓고, 지나가며 밟게 하여 천주학을 버리고 목숨을 살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임들은 성물에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문턱을 넘어 가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이 문의 누각에는 지성루(枳城樓)라 쓰여 있는데, 본래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이 서문이란 그 임들이 가시밭 이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그 임들을 밀어 넣고 돌로 찧던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하수구를 가로 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는 그야말로 사람 도마였고, 여기저기 시체가 쌓여 썩고 피가 땅에 젖어 남아 흐르는 곳이 서문 밖이었으니 여기서 죽은 목숨이 몇 천이나 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어 그저 “시산혈하를 이루던 곳이었다.”라는 말만 남아 있다.
해미 성지 내로 옮겨 보존 중인 해미 읍성 서문 밖 순교지의 자리개 돌.
피의 제사장 자리개돌 서문 밖 순교지에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은 가지가지였다.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 명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로 하였으며,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죽이기도 하였다.
특히 잔인하게는 돌다리 위에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 명의 군졸들이 들어 올려 자리개질(태질)하여 머리와 가슴을 으스러뜨리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양촌 사람 방영창 안토니오 등 수많은 분들이 순교하였다.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지져 숨을 끊어 버렸다. 이 자리개돌은 서문 밖 순교성지 일부를 확보하여 보존하다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1월 8일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서문 밖에는 현재 모조품을 준비해 두었다.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kr, 2005,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1년 12월 2일)]
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해미 고을은 조선 중기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위한 진영이 있던 곳으로 진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며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는데, 공식적인 박해 외에도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의 옥사에는 늘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나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자리개질 등으로 죽어갔습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이나 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순교한 이들의 정확한 신원과 행적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수천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의 이름과 출신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생매장과 수장으로 숨져 간 진둠벙 주변에는 십자가의 길과 노천 성당 등이 조성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 읍성에는 동헌과 교우들을 가두었던 옥사가 복원되었고, 그 앞에는 고문대로 쓰던 호야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서문 밖 순교성지에는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하여 보존하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2009년 1월 다시 해미 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고, 1989년에 건립한 순교현양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1935년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원래의 순교터인 해미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었습니다.
해미 성지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무명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성당 뒤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을 건립했습니다. 유해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2008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 고시된 해미 성지는 2015년까지 지자체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순례지로 개발할 예정입니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 성지를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갖고 해미읍성에서 폐막미사를 집전했습니다.
미사시간 안내
주일미사 일 11:00 미사 일정은 해미 순교성지 것입니다.
평일미사 월 11:00 화 11:00 수 11:00 목 11:00 금 11:00
토 11:00 후원회원들을 위한 미사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3. 천주교 대전교구 - 60주년 행사자료
http://www.djcatholic.or.kr/home/pds/60th_notice.php?enter=v&idx=13574&page=1&s=&k=
<위 게시된 내용 중 주요 부분 소개>
2-1. 6차 도보성지순례 : 해미순교성지
(덕산→해미순교성지)리플렛입니다.(08.5.17 토)
1. 해미순교성지에 대하여
1) 백 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수 천여 명이나 참혹하게 처형된 곳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백 여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반 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백여년의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대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할 때뿐만 아니라 해미 진영은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1418년에 병영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사적 116호)은 1790년대로부터 백여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수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1790년대에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를 비롯한 순교자들은 187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백삼십 여명이 이름을 남겨놓고 있지만 그 외의 수천 명의 이름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해미의 땅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쓰러져 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799년에 이보현과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10년 옥고 후 옥사하였으며, 충청도지방의 대대적 박해 시기였던 1819(을해) 년과 1827(정해)년 기간 동안에는 손여옥 등 수많은 신자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순교 하였다.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을 해미 진영 군졸들이 수시로 급습하고 재산을 약탈한 후 신자들을 체포하여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하였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신분을 고려하여야 할 사람들(양반층)은 상급 처소인 홍주, 공주,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대부분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심리 절차(기록) 없이 해미에서 처형되어 글자 그대로 무명 신자들이 수천 명 순교한 곳이 해미 땅이다. 1866(병인)년 이후 몇 년 간의 큰 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숫자가 1천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가 수 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인언민(마르티노)등 일백삼십 여명 뿐이다.
.
2) 순교자들이 넘던 한티 고개
면천 고을과 예산 및 덕산 고을의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 군졸들이 압송하여 넘던 고개이다. 교우들이 무리지어 살던 면천은 황무실 마을과 덕산의 용머리 마을, 배나드리 마을 등지에서 집단으로 체포되어 넘어 오기도 하였다. 한티 고개를 넘어 붙잡혀 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개 마루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던 곳에는 옛 주막의 터만이 남아 있다.
3) 벌판길과 진둠벙
1790년대부터 80여 년간 시산 혈하를 이루던 서문 밖 사형터는 병인대박해시(1866년 이후)에는 주거 인접지역인 관계로 대량의 사학죄인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 수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 생매장 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된다.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죄인들을 외나무 다리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쳐 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사람들 입에 " 죄인둠벙 " 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진둠벙" 이라 불리게 되었다.
4) 생매장 순교지 “여숫골”
동구 밖 서쪽의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기에 "숲정이"라 불리던 곳이다. 오늘엔 논으로 가꾸어진 벌판이지만 병인년에는 숱한 천주학 죄인들이 산 채로 묻힌 곳이다. 이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 되었는데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산 사람들이 묻히던 어느 날엔 함께 묻힐 동아리 가운데에 어여쁜 규수도 있었다 한다. 형장의 눈에 들어온 규수의 자색은 연민을 자아내었다. 어여쁜 얼굴에 어찌 사학을 하여 죽을 몸이 되려느냐고 살려줄 터이니 사학을 버리라고 꾀었으나 입술을 깨물고 그 규수가 먼저 구덩이에 뛰어 내리니 동아리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묻히더라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 온다. 그 날 묻히던 그 찰나에 하늘이 천둥으로 합성하고 사흘을 안개로서 생무덤을 덮어 주더라고 전해 온다. 묻히던 순교자들이 끊임없이 하늘에 외쳐대는 소리가 있었으니, "예수, 마리아! "라는 간구였다. 허나 구경꾼들이 듣고 전하여 준 오늘까지의 동리 사람들 말로는 "여수머리"라 하여 여우 홀린 머리채로 죽어 갔다고 해서 이 숲정이를 "여숫골" 이라 부르고 있다.
5) 무명 순교자 묘-서산 상홍리 묘
병인박해 시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 목격하였던 이주필, 임인필, 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1935년 서산 성당의 범 베드로신부가 생매장지 일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 및 묵주, 십자가를 수습하여 서산군 음암면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었다. 1995년 순교자 대축일에 이를 다시 해미 성지로 이장하여 본래의 순교터(현 순교자 기념탑 앞)에 모셨다. 상홍리 순교자 묘소 자리에는 십자고상과 진토가 된 순교자 유해 일부를 모셔두고 있다.
6) 순교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1773~1800년)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약간 고집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된 후에는 어떻게나 난폭하였던지 아무도 그를 억제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20세가 좀 넘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프란치스코의 누이였다.진리를 깨달은 뒤 얼마 안 되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소행을 고치고 본성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결혼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모친의 권유에 순종하기 위하여 결혼을 하였다. 그런 다음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기 위해 황심과 함께 충청도 연산으로 이주해 살았고, 1795년에는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다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프란치스코의 열심은 날로 증가하였다. 그는 보속과 고행에 열중한 나머지 산중에 들어가 힘들게 생활한 적도 있었다.1797년의 정사박해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프란치스코는 박해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족과 동네 교우들을 격려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날마다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박해가 시작된 지 한두 해가 지난 어느 날,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오래지 아니하여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술을 대접하면서 ‘이것이 마지막 잔치’라고 말하였다. 과연 이틀 후에 포졸들이 연산 땅에 나타났고, 그는 즉시 체포되어 그 곳 관아로 압송되었다.연산 관장은 포졸들에게 끌려온 프란치스코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확인한 뒤, 교우들과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도록 하면서 배교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만물의 대군(大君)이신 천주께 대해 말한 책을 관장에게 맡길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화가 난 관장은 포졸들로 하여금 그에게 혹독한 매질을 하도록 한 다음 옥에 가두었다. 얼마 후 프란치스코는 충청 감사의 명에 따라 그의 고향 덕산을 관할하는 해미 관장에게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형벌 가운데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사람들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에게 있으니, 어찌 그분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한나절 이상이나 프란치스코는 갖은 고문을 당하였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옥으로 끌려간 뒤에도 그는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함께 갇힌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해미 관장은 할 수 없이 감사에게 프란치스코의 처분을 문의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아무 것도 자백하지 않으면 매를 쳐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그는 다시 한 번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관장이 사형 선고문을 내밀자, 기쁜 표정으로 거기에 서명을 하였다. 다음날 아침, 프란치스코는 장터로 끌려 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나니들은 그를 넘어뜨린 후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끝장을 냈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며칠 후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토록 많은 형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으며, 이를 직접 목격한 비신자들 여러 명이 입교하였다고 한다.
2. 해미읍성에 대하여(해미읍성 내에서의 순교자들의 신앙과 발자취)
1) 감옥터와 호야나무
높이 5미터 길이 1.800미터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이조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쌓인 울타리 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복원되어 호야나무 옆에 자리하고 있다.그 감옥터 옆에는 지금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으로 오늘도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 줄에 움푹 패이도록 순교자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2) 관아터와 장터길
진영장이 호령하던 옛 동헌은 지금은 헐려 없어지고 그 집터만 철책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옆자리에 아문과 호서좌영의 옛 모습이 복원되어 있고 뜨락에 있었을 법한 노송 여섯 그루가 당시 호령소리, 곤장 치는 소리, 비명 소리를 이파리마다 묻혀 놓은 듯 그 터에 서 있다. 관아 터로부터 남서쪽으로 헐려진 옛 집터 사이사이에 질퍼덕한 길이 있다. 옛 저자길이다. 순교성현들이 저주의 욕설을 온몸에 묻혀가며 형장으로 호송되던 길이다.
3) 서문 밖 순교지
저자길을 따라 서쪽 하수로에 다다르면, " 재앙을 떨쳐내는 문 " 이 비껴 있다. 재앙의 씨알머리를 서쪽에 내어 버리듯이, 사학 무리를 이 문 밖으로 끌어내어 쳐 죽었다. 잡아들일 때 빼앗았던 십자가의 묵주 등을 이 문의 난간에다 넣어놓고, 지나가면 밟게 하여 천주학을 버리고 목숨을 살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그님들은 성물에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문턱을 넘어 가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이 문의 누각에는 지성루라 쓰여 있는데, 본래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이 서문이란 그님들이 가시밭 이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순교성현들을 밀어 넣고 돌로 찧던 하구수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하수구를 가로 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는 그야말로 사람 도마였고, 여기저기 시체가 쌓여 썩고 피가 땅에 젖어 남아 흐르는 곳이 서문 밖이었으니 여기서 죽은 목숨이 몇 천이나 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어 그저 "시산혈하를 이루던 곳 이었다"라는 말만 남아 있다.
4) 피의 제사장 자리개돌
서문 밖 순교지에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은 가지가지였다.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 명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로 하였으며,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죽이기도 하였다.특히 잔인한 형벌로는 돌다리 위에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 명의 군졸들이 들어 올려 자리개질(태질)하여 머리와 가슴을 으스러지게 하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시 양촌 사람 방영창 안토니오 등 수많은 분들이 순교하였다.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지져 숨을 끊어 버렸다. 이 자리개 돌은 서문 밖 순교 성지 일부를 확보하여 보존하고 있다.
자리개돌 : 서문 밖 사형장의 개울위에 있던 돌다리이다. 길이 4.2m, 너비 1.5m, 두께 30㎝로 몇 병사가 신자의 몸을 들어 올려서 내
려뜨리면 머리가 깨져서 죽어갔다.
- 해미 순교 성지 오시는 길 [P. 해미 성지 관리소 사무실 (041) 688-3183 ]
참고자료 도보성지순례일정
-09:00 덕산 충의사 집결 및 접수
-09:30 출발
-11:30 대왕석재 도착 및 점심식사(8㎞)
-13:00 출발
-14:30 해미읍성 도착 및 휴식
-15:00 읍성출발
-15:40 해미성지에서 파견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