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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 아폴론 신전을 구경하고 한밤중에 핀도스 산맥을 넘다 (3/3)
아테네 보물창고는 신전을 작은 규모로 축소시켜 지은 봉납건물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 건물은 전체를 파로스 섬의 대리석(Parian marble)으로 지었으며, 건물 네 면의 도리아식 프리즈를 30개의 메토프로 장식했다. 조각의 주제는 반신반인 헤라클레스의 과업(북쪽 면), 아테네의 국가영웅인 테세우스의 모험(남쪽 면), 아마존과 전쟁(동쪽 출입문), 게리온과 싸움(서쪽 면)과 같이 그리스 신화에서 따왔다. 학자들은 메토프의 특징과 스타일 면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경향을 발견했는데, 하나는 아르케익 시기의 특징을 보이는 보수적인 경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르케익에서 고전기로 넘어갈 때 등장한 엄정양식(Severe style)이라는 진보된 경향이다. 따라서 메토프의 장식부조는 적어도 두 명의 조각가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리석이라는 단조로움은 메토프 표면에 색칠을 하고 금속상감 아플리케(Inlaid metal appliques)로 해소하였다. 프리즈 제작 시기는 기원전 510-4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이 보물창고는 아테네인들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확립에 대한 기념으로 지었거나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41. 아테네 보물창고의 메토프를 장식한 돋을새김 (왼쪽) 테세우스와 안티오페: 신화적 영웅 테세우스가 아마존 정벌을 감행하여 여왕 안티오페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장면. 입가에 아르케익 미소가 보인다. (오른쪽) 헤라클레스와 케리네이아의 암사슴: 헤라여신이 준 12가지 노역 가운데 하나인 케리네이아 산의 황금 뿔을 가진 암사슴을 상처를 입히지 않고 생포하는 장면, 역시 입가에 아르카익 미소를 띠였다.
대리석 옴파로스(Omphalos)는 아폴론 신전의 북동쪽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퓌티야 사제가 신탁을 받는 장소인 아뒤톤(Adyton)에 놓여 있던 옴파로스의 복제품으로 헬레니즘 또는 로마시대에 복제한 것으로 보인다. 표면에 돋을새김한 장식은 오리지널 성물을 감쌌던 양모 그물을 나타낸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옴파로스는 제우스가 서로 반대방향에 있는 세계의 두 끝에서 날려 보낸 두 마리 독수리가 중간에서 서로 마주친 지점, 즉 지구의 중심을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이 신화에는 고대 그리스인의 세계관이 담겨있다. 알렉산드로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계의 서쪽 끝은 스페인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동쪽 끝은 이란(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로 인식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두 끝을 이은 선의 중간 지점이 대략 델피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이 신라 경주였다는 사실만 알았어도, 지구의 중심 표지석인 옴파로스는 델피가 아니라 고대문명의 교차로였던 아프가니스탄의 아이하눔(Ai-Khanoum·아프가니스탄의 옥수스 강가에 세워진 알렉산드리아)에 놓여졌을 것이다.
42. 지구의 중심, 델피 신화에 따르면, 옴파로스는 제우스가 서로 반대방향에 있는 세계의 두 끝에서 날려 보낸 두 마리 독수리가 중간에서 서로 마주친 지점, 즉 지구의 중심을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이 신화에는 고대 그리스인의 세계관이 담겨있다. 알렉산드로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계의 서쪽 끝은 스페인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동쪽 끝은 이란(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로 인식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두 끝을 이은 선의 중간 지점이 대략 델피가 되기 때문이다.
신전 앞에 있던 수많은 공납물 중에서도 우뚝하게 솟은, 높이가 13m에 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 일으켰던 세 명의 여인상이 있는 이 기둥 파편은 발견 후, 복원, 연대추정, 그리고 주제 해석에 있어 수 년 동안 고고학자에게 수수께끼를 안겨주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아칸소스 잎으로 빙 둘러친 기둥 꼭대기에는 식물모양의 줄기 주위를 빙 돌아가면서 세 명의 젊은 여인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마치 공중 부양된 모습이다. 이 여인들은 각자 짧고 투명한 키톤을 입고 바구니처럼 생긴 헤드-드레스를 쓰고 있다. 왼손으로 옷의 가장자리를 쥐고 있고, 높이 든 오른손으로 거대한 세발 청동 가마솥을 지탱하고 있는데, 청동 가마솥의 기다란 세발이 세 여인을 에워싸고 있다. 튀이아드(Thyiads) 혹은 지방에서 불리던 이름인 마에나드(파르나쏘스 산에서 춤을 추었던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로 해석되는 여인들의 자세가 마치 춤추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춤추는 여인의 기둥(Dancer‘s column)'이라는 작품명이 붙었다. 그러나 현재 이 여인들은 아폴론(세 발 솥이 바로 아폴론을 상징한다)에게 공물을 바치는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케크롭스(Cecrops)의 세 자매로 해석되고 있다.
43. 옴파로스와 댄서의 기둥 기원전 330년경에 아테네의 델피순례자 행렬이 델피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여 헌정한 것이다. 높이 13m에 달하는 기둥의 윗부분에 춤추는 듯한 세 명의 여인이 조각되어 있어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었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아폴론에게 공물을 바치는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케크롭스의 세 자매로 해석되고 있다. 옴파로스는 아폴론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세 발 솥을 덮는 뚜껑으로 기둥 꼭대기에 올려놨다고 한다.
기단부의 명문에 따르면, 이 조각상은 기원전 330년경에 아테네의 델피순례자(Pythais) 행렬이 델피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여 헌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념물에 대한 가장 최근의 해석에 따르면, 옴파로스는 아폴론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세 발 솥을 덮는 뚜껑으로 기둥 꼭대기에 올려놨다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테네인의 공납 기념물(댄서의 기둥)의 상징적 중요성이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옴파로스는 지구의 배꼽이 아니라 아폴론의 솥뚜껑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단순한 가마솥 뚜껑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물건이었지만.
다음은 로마 장군이었던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기념비(Monument of Lucius Aemilius Paulus)의 기둥 윗부분을 장식했던 프리즈의 돋을새김을 살펴보자. 이 부조는 그리스·로마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조각 작품이라는데 그 가치가 있다. 그 역사적 사건이란 로마의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장군이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왕 페르세우스를 격파한 피드나 전투이다. 지중해 서쪽 패권을 두고 카르타고와 싸워 승리한 로마는 자신들의 관심을 동쪽으로 돌려 마케도니아 왕국과 여러차례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168년, 그리스 중부해안 피드나에서 로마의 집정관 파울루스가 이끄는 로마군단(레기온)과 페르세우스 왕이 지휘하는 마케도니아 군대(팔랑크스)가 나라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벌였다. 전투는 로마의 대승으로 끝나고 페르세우스는 포로로 붙잡혀 가족과 함께 로마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페르세우스 왕은 이 전투가 있기 불과 몇 년 전에 델피를 방문했다. 그는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게 될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황금으로 도금한 자신의 청동상을 세울 사각기둥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드나 전투의 승리자는 로마 장군이었고 그는 그리스의 지배자가 되었다. 내친김에 그는 자신의 청동 기마상을 페르세우스 왕이 주문했던 바로 그 사각기둥 위에 세웠다. 사각기둥의 네 면을 빙 돌아가면서 부착된 프리즈는 피드나 전투장면을 나타낸다. 여기서 로마군과 마케도니아군은 각자 지니고 있는 무기로 식별할 수 있는데, 로마군은 특유의 기다란 방패를 들고 있고 마케도니아 적군은 화려하게 장식된 동그란 방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조의 마멸과 파손이 심하여 격렬한 전투장면을 새긴 조각의 예술성을 온전히 음미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44. 아밀리우스 파울루스 기념비의 프리즈 (오른쪽) 델피신전 옆에 세웠던 아밀리우스 파울루스 로마 장군의 피드나 전투 승전기념비(복원도)이다. (왼쪽) 기념비의 상단을 장식했던 프리즈의 부조로, 마케도니아 군을 격파한 피드나 전투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작품은 신화의 장면이 아닌, 그리스·로마시대에 걸쳐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최초로 부조로 나타냈다는데 그 가치가 있다.
헬레니즘 시대(BCE 323-146년) 이전, 즉 고전기(기원전 5-4세기)의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전쟁과 같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고 한다. 즉, 그들은 어느 특정 개인을 전쟁영웅으로 내세워 찬양하는 대신에 트로이 전쟁이나 아마존 전쟁과 같은 신화 속 이야기에 빗대어 역사적 사건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즐겨했다. 이러한 경향은 알렉산드로스 시대와 이어진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마침내 로마가 그리스 본토를 지배하고 지중해의 패자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는 피드나 전투의 승리 장면이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기념비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 기념비는 아폴론 신전 앞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일명 ‘델피의 마부상(Charioteer of Delphi)’으로 잘 알려진 전차를 모는 전사의 상은 보기 드물게 잘 보존된 청동으로 제작된 초기 고전기 미술의 명품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상 가운데 하나이다. 그 이유는 이 조각상이 아르카익 미술에서 탈피하여 고전기 이상형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청동상은 기원전 474-478년경에 시칠리아 섬에 있던 그리스인의 식민지이자 강력한 도시국가였던 겔라(Gela)의 참주, 폴뤼자로스(Polyzalos)가 퓌티아 경기의 전차종목에서 우승한 직후에 제작을 의뢰하여 아폴론에게 바친 것이다. 이 청동상은 BCE 373년에 일어난 대지진 때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서 바위 속에 파묻혔는데, 이로 인해 오히려 약탈과 파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연재해 덕분에 오히려 유물이 잘 보존된 경우로, 이로 인해 기원 후 2세기에 델피를 방문하여 델피신전의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던 파우사니아스도 이 멋진 청동상을 보지 못했다.
45. 델피의 마부상(Charioteer of Delphi) 이 청동상은 초기 고전기 미술(엄정양식)을 대표하는 명작이다. (왼쪽) 4년마다 델피에서 열렸던 퓌티아 경기의 전차종목에서 우승한 마부의 청동상 (오른쪽 위) 원래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쿼드리가)를 묘사한 커다란 청동 조형물의 일부분이다. (오른쪽 아래) 마부의 뒷모습.
마부상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Quardriga·쿼드리가)를 묘사한 커다란 청동 조형물의 일부이다. 마부상외에도 말 뒷다리 두개, 말 꼬리, 멍에 조각, 그리고 고삐조각을 잡고 있는 젊은이의 팔이 발견됐다. 이를 토대로 전체 구성을 복원한다고 했을 때, 복원된 최종 모습에 대해서 관련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마부가 올라탄 전차를 네 마리의 말이 끌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한 명 또는 두 명의 소년이 말 옆에 서서 바깥쪽 말의 고삐를 쥐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경기는 끝났고 승리를 한 마부가 챔피언의 머리띠(Diadem·다이아뎀)를 두르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관중들 앞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마부의 얼굴에는 경기에서 승리한 챔피언이라면 당연히 드러낼 것으로 예상되는 환희와 생동감이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 대신 이 젊은 운동선수는 똑바로 선채 고요한 모습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격렬했던 전차경기가 끝난 직후, 아직 먼지가 채 가시지 않은 경기장에서 관중들의 환호와 말들의 거친 숨소리가 뒤섞여 극도로 흥분된 상황에서조차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면서 관중들에게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는 우승자의 극도로 절제된 모습이 고전기 그리스에서 추구하였던 문명화된 인간의 모델이었을까? 어떤 이는 마부상의 조형미에 대해 이와 같이 근사하게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고전기 그리스인의 정신세계를 너무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보다는 마부의 얼굴에서 엿보이는 수도자와 같은 자기절제의 모습은 이 시기에 그리스인들이 추구하였던 이상적 관념의 세계를 조형물로 구현한 것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마부상이 만들어지던 초기 고전기의 미술(Early Classical Art: BCE 490-450년)을 엄정양식(Severe style)으로 부르는데, 이 때 추구하였던 조형원리는 사실주의(Realism)와 이상주의(Idealism)의 조화였다. 얼핏 보면 사실과 이상은 서로 상반된 개념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이 시기에 활약했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이상적인 것이야말로 사실적인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감각기관(눈·귀·코·혀·몸의 오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겉보기 현상이자 억측(Doxa·독사)에 불과할 뿐이며, 인간이 관념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것, 즉 시공을 벗어난 이상적인 것만이 사실이고 존재하는 것이며 진리(Episteme·에피스테메)라고 설파했다.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적 사유를 따른다면, 델피의 마부상의 얼굴모습이 왜 그렇게 희로애락의 특정 감정 상태를 드러내지 않고 선정에 든 수도자의 모습을 띄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 고전기 조각가는 사물이나 인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애썼지만 눈에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얼굴과 몸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Ideal form)로 표현하여 완벽한 아름다움(Perfect beauty)을 구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조각가는 수학과 해부학의 지식을 동원하여 얼굴·몸통·팔·다리의 길이에 비례관계를 설정했고, 몸의 무게중심이 S자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고안했으며, 마치 신의 얼굴처럼 눈동자는 먼 곳을 응시하면서 얼굴표정에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배제시켰다. 근육은 이전보다 훨씬 사실대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실제에 가까워졌다. 이를 표현하기 위한 소재로는 대리석보다는 청동이 제격이었다. 델피의 마부상은 로스트 왁스법(Lost wax method·소실주형법의 일종)을 사용하여 신체를 몇 부분으로 나누어 여러 조각의 청동 부분품을 주조한 다음 조립하여 만들었다. 또한 로스트 왁스법으로 만들었기에 청동상의 속은 텅 비어있어 대리석으로 조각했을 때보다 훨씬 가벼우면서도 균형을 잘 잡을 수 있었다.
전차를 모는 마부상의 속눈썹과 입술은 구리로 만들었고 눈은 오닉스(Onyx·글라스 페이스트의 일종)로 만들었다. 뱀 문양이라 불리는 기하문양이 있는 머리띠(다이아뎀)는 은으로 상감했다. 그는 발목까지 내려오면서 소매가 달린 키톤을 입었는데, 전차경기 선수가 입는 이런 옷을 싸이스티스(Xystis)라고 부른다. 폭이 넓은 벨트로 허리 위쪽에서 키톤을 조였고, 등 뒤 목 부분에서 교차하는 두 개의 끈이 전차가 달릴 때 키톤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막아주었다. 키톤의 수직으로 깊이 파인 주름은 그리스식 돌기둥의 세로홈을 닮았다. 이와 반대로 상체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주름이 있어 똑바로 서있는 모습의 청동상에서 느껴지는 딱딱함 혹은 뻣뻣함을 누그러뜨려준다. 이 청동상은 참으로 손에 꼽을만한 초기 고전기의 명작이다.
델피의 마부상 복제품 하나가 한국에도 있다. 이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그리스 정부가 보내서 올림픽 기간 중에 전시를 했던 작품으로 올림픽을 마친 후에 한국정교회에 기증한 것이다. 필자는 2019년 7월에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그리스 보물전’을 구경하러 갔다가 전시장 입구에 세워 둔 이 청동상을 보게 되었다. 비록 복제품이었지만, 그리스 여행을 다녀온 지 10개월 만에 한국에서 이 명작을 다시 보게 되어 감회가 무척 새로웠다.
❀ 참고-1: 2019년 6월-9월에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그리스 보물전’의 전시장 입구에 등장한 델피의 마부상
단독 전시실에 전시된 델피의 마부상 구경을 끝으로 박물관 밖으로 나왔다. 이제 바로 위쪽에 있는 델피성역을 구경할 차례다. 우리는 유적지 매표소를 지나 천천히 델피성역 안으로 들어섰다.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피성역은 파르나쏘스 산의 남서쪽에 위치한 패드리아데스(Paedriades) 절벽의 가파른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은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던 이곳에서 자신이나 국가의 운명에 대하여 신탁을 물었다.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인 초기 미케네 시대(기원전 14-11세기)에도 델피는 원시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신성한 땅이었다. 그 무렵의 델피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숭배하였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가이아의 아들로 이곳을 지키던 거대한 뱀, 퓌톤(Python)을 아폴론이 화살을 쏴 죽였고 그 이후로 델피는 아폴론을 숭배하는 주요 성소가 되었다고 한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은 기원전 8세기부터 차츰 명성을 얻으면서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과 함께 그리스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신탁소가 되었다. 그리스인과 외국의 고위관리, 국왕과 일반인들은 델피 지성소로 순례를 했다. 그리고 델피의 신탁에 큰돈을 지불했다. 지성소는 겨울철을 제외한 일 년에 아홉 달 동안만, 그것도 한 달에 불과 며칠간만 신탁을 위한 의식을 실시했기 때문에 신탁의뢰인이 많을 경우에는 몇 달씩 이곳에 묵으면서 자기차례를 기다렸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신탁을 받으려면 상당한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중반, 로마가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쇠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중요한 정치적 의사결정을 로마의 상원의원들이 내렸기 때문에 델피신탁이 더 이상 끼어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델피는 점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로마인들은 델피의 보물을 꺼내서 배에 싣고 로마로 가져갔다. 기원전 1세기 후반부터 아폴론 신전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였다. 온전히 숭배되었던 과거와 달리 지성소는 완전히 무시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원후 390년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이교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피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이후 중세시대에는 성역의 폐허 위에 마을이 세워져 아폴론의 성역마저 자취를 감추었으나 19세기말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발굴에 착수하여 마을의 서쪽을 재건하고 델피라 명명하였다.
46. 델피성역의 건축물과 기념물 1. 로만 아고라 2. 리산데르의 기념물 3. 트로이 목마 4. 아테네 마라톤 기념물 5. 코르키라(코르푸 섬)의 청동 황소 6. 아르카디아 기념물 7. 헬레니스틱 스토아 8. 아르고스 왕의 엑시드라 9. 시프노스 보물창고 10. 테베 보물창고 11. 보이오티아 보물창고 12. 아테네 보물창고 13. 메가라 보물창고 14. 코린토스 보물창고 15. 낙소스 스핑크스 16. 다각형 옹벽 17. 아테네 스토아 18. 플라타이아이 삼발이 의자 19. 로도스의 전차 20. 아폴론 신전제단 21. 아폴론 시탈카스(Sitalcas·곡식의 수호자) 청동상 22. 아폴론 신전 23. 극장 24. 서쪽 스토아
델피성역의 전성기였던 기원전 6세기에 이곳은 높다란 담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동쪽과 서쪽에 출입구가 있었다. 델피 도시는 둘러친 담벼락 바깥에 있었고 수백 년에 걸쳐 몇몇 지점에서 확장되었다. 석재로 만든 첫 아폴론 신전과 수많은 보물창고, 즉 전쟁 승리와 고결한 행위를 기념하기 위해 여러 도시국가가 바친 봉납물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로써 작지만 신전 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이 대부분 기원전 6세기-5세기 초에 세워졌다. 여기에는 우아한 시프노스 보물창고, 테베, 보이오티아, 현재 유일하게 복원된 아테네 보물창고, 메가라, 크니도스, 코린토스를 비롯한 여러 도시국가의 보물창고가 있었다. 성역에서 공간 배치의 핵심은 당연히 아폴론 신전이다. 담으로 둘러친 성역의 남동쪽 출입구에서 시작하는 신성한 길은 보이오티아 보물창고 앞에서 한 바퀴 크게 휘돌아 신전의 대형 제단 앞에서 끝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스런 길을 따라 각종 신상 및 삼발이 의자와 같은 값비싼 예술품이 명문이 새겨진 기단이나 기둥, 비석 위에 세워졌다. 이것은 고대사회에서조차 유일무이한 야외 박물관이 등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늘날, 이 수많은 작품 가운데 극히 몇 개만이 살아남아 보존되었다. 둘러친 담벼락은 북쪽으로 확장되었는데 여기엔 북서쪽 구석의 가파른 경사면에 세워진 극장도 포함된다. 지성소 담 밖으로 나가 극장 위쪽의 오르막을 올라가다 다시 서쪽으로 500m 정도 걸어가면 고대 스타디움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퓌티아 축제 기간에 열린 체육대회가 열렸다. 이곳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신전으로 향하기 위해 신성한 길의 길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로만 아고라(Roman agora)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성역으로 진입하는 동쪽 출입문이 있는 담벼락에 바싹 붙어 있었다. 건물 형태는 전형적인 스토아 건물이다. 그 옛날 성스런 길을 따라 주변에 세웠던 화려한 보물창고와 갖가지 기념물은 오늘날 완전히 사라지고 기단부만 간신히 남아 있어 사실 길 주변의 유적은 크게 볼 것은 없다. 이곳에서 관광객의 감탄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산과 계곡 풍경이다. 우리는 호쾌한 주변경치를 감상하면서 아테네 보물창고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47. 로만 아고라 신전으로 향하기 위해 신성한 길의 길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로만 아고라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성역으로 진입하는 동쪽 출입문이 있는 담벼락에 바싹 붙어 있었다. 건물 형태는 전형적인 스토아 건물이다.
48. 성스런 길 그 옛날 성스런 길 주변에 세웠던 화려한 보물창고와 기념물은 오늘날 완전히 사라지고 기단부만 간신히 남아 있어 사실 길 주변의 유적은 크게 볼 것은 없다. 이곳에서 관광객의 감탄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산과 계곡 풍경이다. 저 앞쪽으로 학생들이 지나가는 길 왼쪽에 바싹 붙은 시프노스 보물창고의 플랫폼이 보인다.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는 성스런 길은 보이오티아 보물창고 터 앞에서 니은자(∠)로 확 꺾인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에는 길 오른쪽에 있는 높다란 석축에 가려 보이지 않던 자그마한 건물이 꺾인 길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 방문객의 눈길을 잡아끈다. 그 이유는 이 아담한 보물창고 건물이 델피 유적지에서 온전한 형태로 복원된 유일한 건물이기 때문이다. 건물 앞에는 약간 허접한 옴파로스가 놓여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이곳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상징물로 제우스가 박아놓았다는 배꼽 돌을 관광객을 위해 복원해 놓은 것 같다. 약간 허접해 보이긴 하지만 델피의 상질물인 옴파로스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49. 아테네 보물창고 델피 유적지에서 온전한 형태로 복원된 유일한 건물로 기원전 510-48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보물창고는 아테네인들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확립에 대한 기념으로 지었거나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건물 정면의 양쪽 끝에 있는 사각 벽기둥을 그리스 건축에서는 안타(Anta)라고 부르는데, 양쪽 안타 사이에 두 개의 원형 돌기둥이 있으면 이주식(二柱式·Distyle) 건물로 불린다.
아테네 보물창고
길에서 올려다 보이는 건물의 남쪽 면 상단에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의 활약상을 메토프 부조로 장식했다. 정면 출입구는 신전처럼 동쪽을 향해 있다. 정면에 서서 건물을 바라보면, 나오스(Naos) 또는 셀라(Cella)라고 불리는 신전의 방(여기선 창고) 왼쪽과 오른쪽 벽이 앞쪽으로 쭉 튀어나와서 프로나오스(Pronaos)라 불리는 공간을 만들면서 삼각형 박공을 떠받는 일종의 기둥으로 사용됐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건물 정면의 양쪽 끝에 있는 사각 벽기둥을 그리스 건축에서는 안타(Anta)라고 부르는데, 양쪽 안타 사이에 두 개의 원형 돌기둥이 있으면 이주식(二柱式·Distyle) 건물이 된다. 출입문이 있는 동쪽 프리즈에는 아마존 전쟁을 부조로 새겨놓았는데 마멸이 심하여 조각의 구체적인 장면을 알아볼 수는 없다.
여기서 계단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다 보면, 길 왼쪽에 시빌의 바위(The Rock of Sibyl)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바위는 델피신전 위쪽에 우뚝 솟은 패드리아데스 절벽으로부터 굴러 떨어진 것이다. 이 지역의 전설에 따르면, 델피의 최초 여자 예언자인 히에로필레 시빌(Hierophile Sibyl)이 바로 이 바위 위에 서서 예언을 노래했다고 한다. 그녀는 태양신 아폴론 숭배가 이곳에 자리 잡기 훨씬 전인 미케네 시기의 델피 예언자였으며, 트로이의 멸망을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시빌 바위”가 있던 장소는 델피에서 가장 오래된 숭배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다.
50. 시빌의 바위 이 지역의 전설에 따르면, 델피의 최초 여자 예언자인 히에로필레 시빌(Hierophile Sibyl)이 바로 이 바위 위에 서서 예언을 노래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트로이의 멸망도 예언했다고 전해지므로 그녀는 아폴론 숭배가 자리 잡기 전 미케네 시기(기원전 14-11세기)의 델피 예언자였다. “시빌 바위”가 있던 장소는 델피에서 가장 오래된 숭배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다.
시빌의 바위를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눈앞에 아폴론 신전 터를 지탱하는 기다란 옹벽이 펼쳐지면서, 그 아래에 기둥 서너 개가 줄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다각형 옹벽(Polygonal wall)은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화재로 불타버린 첫 번째 아폴론 신전보다 더 큰 신전을 짓기 위해서 신전 터를 넓게 확장하려고 쌓아 올린 옹벽이다. 옹벽을 쌓는데 사용된 다각형 돌덩이는 각 면을 곡선으로 그랭이질을 하여 돌덩이끼리 서로 빈틈없이 아귀가 잘 맞아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처럼 다각형 돌덩이의 각 변이 곡선으로 이루어진 옹벽을 특히 레스보스 스타일의 다각형 옹벽(Lesbian style polygonal wall)이라 부른다. 원래 옹벽의 높이는 지금보다 대략 2m 정도 더 높았다고 하며,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맨 위 4-5단은 치수가 비슷한 직육면체 돌덩이를 육합쌓기(Isodomic masonry)로 쌓아올렸다. 아마도 이것은 신전의 울타리였을 것이다. 대략 90 m 길이의 기다란 옹벽에는 기원전 2-3세기에 새겨진 800여개의 명문이 있다고 하며, 그 내용은 대부분 노예해방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51. 아폴론 신전의 다각형 옹벽과 아테네 스토아 기원전 6세기 후반에 아폴론 신전을 새로 짓기 위해서 신전 터를 넓게 확장하려고 쌓아 올린 레스비안 스타일의 다각형 옹벽이다.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옹벽을 쌓는 방법에는 육합(Isodomic), 가육합(Pseudo-isodomic), 사다리꼴(Trapezoidal), 다각형(Polygonal), 레스보스 다각형(Lesbian polygonal) 쌓기가 있었다. 옹벽 앞에 있는 돌기둥은 아테네 스토아의 잔해이다. 노란 화살표로 표시된 곳이 12.5 m 높이의 낙소스 스핑크스가 세워졌던 기단이다.
다각형 옹벽 바로 앞에 돌기둥 서너 개가 서 있어 이 좁은 공간에 무슨 건물이 있었을까하는 궁금증을 일으킨다. 이곳은 아테네 스토아(Stoa of the Athenians)가 있던 자리로, 페르시아 전쟁 때 해전승리로 획득한 전리품을 진열하기 위해 세운 열주 건물이라고 한다. 그리스 건축에서 스토아는 기둥이 한줄 또는 두 줄로 늘어서 회랑을 형성하고 이 위에 지붕이 씌워진 건물을 일컫는데 대개는 아고라 주변에 세워져 가게나 사무실과 같은 공공용도로 사용되었다. 아테네 스토아의 길이는 30m이며, 정면에는 통돌로 만든 7개의 대리석 기둥이 있었고(현재 4개가 살아남았다.) 이 위에 나무지붕을 씌웠다. 건축 시기는 아테네 봉납창고와 비슷한 기원전 510-470년으로, 아테네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쳐부순 후 적선의 밧줄과 뱃머리에 있던 인물상 머리(Ship figurehead)를 이 스토아에 진열하고 아폴론 신에게 바친 것이다. 이 건물은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있어 결정적이고 지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 델피라는 범그리스적 지성소에 아테네 대중이 돈을 모아 건설했다고 한다. 이곳에 서서 길게 늘어선 옹벽의 중간쯤을 잘 살펴보면, 방금 전 델피박물관에서 보았던 낙소스 스핑크스를 세웠던 기단부가 보인다.
복원도: 아폴론 신전, 터를 지탱하는 다각형 옹벽, 옹벽 아래 아테네 스토아, 낙소스 스핑크스
아폴론 신전을 향해 완만한 오르막 계단을 천천히 오르면 계단 오른쪽으로 높이 솟아있는 델피의 뱀 기둥(The Serpent Column)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기념물은 필자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던 2015년 9월 중순에는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구글검색으로 확인해 보니, 2015년에 이곳에 세웠다는 건립년도만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필자가 이곳을 다녀간 그 해 10월에서 12월 사이에 복제품을 세운 듯하다. 이 뱀 기둥은 기원전 479년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최후의 플라타이아이 전투(Battle of Plataeae)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다음해인 기원전 478년에 이곳에 세운 것으로, 플라타이아 삼발이 의자(Plataean Tripod) 또는 델피 삼발이 의자(Delphi Tripod)라고도 불린다. 지금부터 무려 2500년 전 유물인 오리지널 작품은 현재 터키 이스탄불의 술탄아흐메트 광장(일명 히포드롬 광장)에 세워져 있다.
52. 성스런 길 끝자락과 델피의 뱀기둥 2015년에 아폴론 신전 맞은편에 복제품을 세운 것이다. 이 기념비는 기원전 479년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최후의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다음해인 기원전 478년에 세운 것이다. 지금부터 무려 2500년 전 작품으로, 진품은 터키 이스탄불에 있다.
이 멋진 기념비가 고향을 떠나 이스탄불로 장소를 옮기게 된 사연은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때문이다. 그는 기원후 324년 로마제국의 수도를 이태리 로마에서 흑해연안 보스포루스 해협의 고대도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뀐 해는 330년)으로 옮겼는데 새 수도를 멋지게 장식하기 위해 그 해에 이 청동 뱀기둥을 옮겨왔다.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칭칭 꼬아 상승하는 모습의 뱀 기둥 전체높이는 8미터였으나 현재는 뱀의 머리와 머리 위에 얹은 델피 삼발이 의자는 사라져 없어지고 몸통부분 5미터만 남았다. 현재 오리지널 뱀 머리 하나는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또 다른 하나는 영국박물관에 있고, 나머지 한 개는 분실되었다. 꽈배기처럼 비비 꼬인 뱀 기둥 아랫부분에 플라타이아 전투에 참여했던 31개 도시국가 이름이 각인되어 있다. 뱀의 몸통 굵기는 꼬리로 갈수록 얇아지기 때문에 세 마리의 뱀이 몸을 비비 꼬아 만든 꽈배기의 간격도 아래로 갈수록 촘촘해진다. 정말 리얼하다! 또한 이 청동작품 역시 로스트 왁스법으로 주조하여 꽈배기 속은 텅 비어 있다. 이런 청동작품을 볼 때마다, 거의 신의 경지에 오른 고대 그리스인의 금속주조기술에 참으로 감탄하게 된다.
참고: 델피의 뱀기둥: (맨 왼쪽) 복원도. 세 마리의 뱀 머리 위에 델피 삼발이 의자가 올려져 있다 (오른쪽 위) 청동뱀 세마리 (오른쪽 아래)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된 청동뱀 머리
아폴론 신전 앞에 마치 두툼한 담벼락처럼 보이는 것은 키오스의 제단(The alter of the Chiots)으로, 기원전 4세기 에게 해의 키오스 섬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이 제단은 지진으로 무너졌던 아폴론 신전을 다시 지을 때 주 제단이 되었으며, 맨 아래 기단부와 맨 위쪽 코니스는 하얀 대리석으로, 나머지는 검은 색깔의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기단부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델피 신전의 사제들이 키오스 시민들에게 프로만테이아(Promanteia·다른 도시국가보다 먼저 신탁을 받게 해주는 특전)를 부여했다고 한다. 이 제단은 아폴론 신전의 무녀인 퓌티아가 신탁의식을 거행할 때, 어린 염소를 여기에 올려놓고 희생제를 치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53. 델피의 뱀기둥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몸을 칭칭 꼬아 꽈배기처럼 보이는 뱀 기둥의 원래 높이는 8m이다. 현재는 뱀의 머리와 머리 위에 얹었던 삼발이 의자가 없어지고 몸통부분 5m만 남았다. 이 청동작품 역시 로스트 왁스법으로 주조하여 뱀 기둥의 속은 텅 비어 있다. 신전 앞에 마치 담벼락처럼 보이는 것은 아폴론 신전의 제단이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5시에 가까워졌다. 서쪽 하늘에는 흰 구름조각이 넓게 흩어져 있어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태양의 강렬한 햇빛을 적당히 가려주었다. 우리는 뱀 기둥 맞은편에 있는 아폴론 신전으로 걸어갔다. 오늘날 이곳에서 보는 아폴론 신전은, 기원전 4세기에 이곳을 강타한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알크메오니드 신전을 대신하여 새로 지은 신전의 유적이다. 건축구조는 신전의 네 면을 한 줄의 원기둥으로 빙 둘러친 신전(Peripteral temple)이며, 정면과 측면에서 보았을 때 기둥의 개수가 6x15인 전형적인 헥사스타일의 도리아식 신전(Hexastyle doric temple)이다. 현재 살아남은 6개의 돌기둥은 모진 풍파에 상처투성이지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원기둥은 여전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돌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시적인 힘이 느껴진다.
54. 델피 아폴론 신전의 파사드 신전의 기둥 개수가 6x15인 전형적인 헥사스타일의 도리아식 신전(Hexastyle doric temple)이다. 현재는 정면에 4개, 측면에 2개의 돌기둥만 간신히 남았지만, 오랜 풍파에 시달린 듯한 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초적 포스가 매우 강렬하다.
아폴론 신전과 델피성역 풍경
그리스 신전의 내부공간은 보통 프로나오스-나오스-아뒤톤-오피스토도모스로 구획된다. 고대기록에 의하면, 신전의 문간방에 해당하는 프로나오스의 벽면에 다음과 같이 유명한 델피 격언(Delphi maxim) 세 개가 각인되어 있었다.
γνῶθι σεαυτόν (know thyself): 너 자신을 알라.
ηδὲν ἄγαν (nothing in excess): 중용을 지켜라
Ἑγγύα πάρα δ'ἄτη (make a pledge and mischief is nigh):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마라.
이 경구는 그리스의 칠현인 가운데 한명 혹은 몇 명이 말했다고 고대기록에서 전하고 있지만, 현대 학자들에 의하면 델피신전에 각인된 세 개의 격언를 누가 맨 처음 얘기했는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가장 가능성이 있는 주장은 델피 격언이라는 것이 이미 당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경구였으며 단지 나중에 특정 현인이 지어낸 것처럼 알려졌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스 대중에게 델피격언은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1960년대 초, 아프가니스탄의 북동쪽에서 오랫동안 잊힌 고대그리스 도시, 아이하눔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여기서 발굴된 석비받침의 정면에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석비받침의 왼쪽 명문;
성지 퓌토에 헌정된, 명성이 자자한 옛 현인들의 귀한 말씀들,
클레아르코스(Klearchos)가 이 격언들을 정성껏 베껴,
멀리 빛나도록 키네아스의 성소에 격언을 새긴 비를 세운다.
석비받침의 오른쪽 명문;
어려서는 예의를 배워라.
젊어서는 스스로를 절제하라.
중년이 되어서는 공평하라.
노년에는 좋은 조언을 주라.
그리고 후회 없이 죽어라
55. 아프가니스탄의 고대 그리스 도시, 아이하눔에서 발굴된 석비 받침대와 명문 아이하눔은 헬레니즘 시기에 아프가니스탄에 자리 잡은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주요 도시였다. 이곳에서 발굴된 석비 받침대에 147개에 달하는 델피 격언 가운데 인생훈에 해당하는 맨 마지막 5개 격언이 새겨져 있다.
성지 퓌토(Holy pytho)는 델피를 지칭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서 아시아로 간 그리스인들이 기원전 3세기 중반 아프가니스탄에 세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도시, 아이하눔에서 델피까지 거리는 대략 10,000km이다. 그리스인 클레아르코스는 왕복 20,000km에 이르는 엄청난 거리를 무릅쓰고 옛 현인들의 귀한 말씀인 델피 격언을 정성스럽게 베껴와 널리 빛나도록 아이하눔의 비석에 새겨 놓았다. 147개에 달하는 델피격언을 새겨놓은 비석은 사라지고 없지만 인생훈(人生訓)에 해당하는 맨 마지막 5개 격언이 비석 받침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아뒤톤은 신전의 본전에 해당하는 나오스의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 없는’ 또는 ‘접근할 수 없는’이란 뜻이다. 단어의 뜻이 의미하듯이 이곳은 오직 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방으로 신전에서 섬기는 신상을 모셔둔 신전 속의 사당이다. 델피의 무녀 퓌티야는 신탁을 받기 위해 나오스와 계단으로 연결된 아뒤톤으로 내려가 옴파로스 옆에 놓인 삼발이 의자에 앉았다. 한손으로는 월계수 가지를 붙들고, 다른 한손에는 카쏘티스 샘물을 담은 접시를 들고 지하의 갈라진 바위틈에서 새어나오는 에틸렌 가스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무아지경 상태에 빠진 후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그러면 지성소의 신관이 그녀의 신탁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해석을 해서 신탁 의뢰인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한다 해도 신탁의 내용은 대개 비밀스럽고 모호했기 때문에 신탁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예를 들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이웃국가인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여도 될지 알아보기 위해 신탁을 구했을 때가 그러했다. 그는 “당신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위대한 제국을 파괴할 것이다.”라는 신탁을 받았다. 그는 신탁의 예언에 용기를 얻어 전쟁을 일으켰지만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게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리디아 왕국은 멸망하였다. 신탁에서 얘기한 위대한 제국은 페르시아가 아닌 자신의 왕국 리디아였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BCE 480-479) 전쟁에서 전황을 반전시킨 살라미스 해전은 신탁의 해석을 정확히 한 그리스 정치가이자 장군인 테미스토클레스 덕분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두 번째 침공으로 두려움에 빠진 그리스인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델피 신탁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퓌티아로부터 “나무 성벽만이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애매한 신탁을 받았다. 나무 성벽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아테네인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이들은 나무 성벽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둘러싼 가시덤불이라 주장하고 아크로폴리스에서 농성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나무 성벽이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해서 지난 몇 년간 서둘러 건조했던 함선(목선)을 뜻하는 것이라 해석하였다. 그는 시민들을 설득하여 코린토스로 피난시키고 힘 쓸 수 있는 장정들을 200척의 전함에 승선시켰다. 마침내 페르시아 대군에 의해 아테네는 함락되었고 아크로폴리스는 불에 탔지만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해군이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전황은 그리스에 유리하게 바뀌었다. 이듬해 벌어진 플라타이아이 평원의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또 다시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오늘날 아폴론 신전은 아뒤톤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고 세월의 풍파에 시달린 돌기둥 6개와 기단부에 해당하는 스틸로베이트만 횡뎅그렁하게 놓여 있다. 신전 정면에서 돌기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나서, 뭔가 모를 아련함에 쉽게 자리를 뜨질 못하고 스틸로베이트의 검은색 돌담 옆에서 괜스레 왔다갔다 서성였지만 세월의 무상함만 진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우리는 아폴론 신전을 뒤로 하고 바로 위쪽에 있는 극장을 구경하러 돌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극장은 아폴론 신전 앞에 펼쳐진 장쾌한 산과 깊은 계곡이 바라다 보이는 멋진 장소에 원형으로 지어졌다. 아폴론이 델피에 신탁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여기서 퓌티야 종교축제가 열렸다. 처음에는 음악과 춤, 시 낭송 경연만 하다가 위쪽에 스타디움이 완공되면서 체육경기가 추가되었다. 기원전에 세웠던 극장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으며, 현재 극장은 기원후 1세기 로마제국 초기에 만든 것으로 반원형 관객석에는 5천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로마의 극장구조에서 관객석 앞에 말발굽 모양의 빈 공간을 "춤추는 공간"이란 뜻의 오케스트라(Orchestra)라고 부른다. 단어가 뜻하는 바와 같이 합창단(Chorus)이 오케스트라에 서서 노래하거나 춤을 추었다. 오케스트라 뒤쪽에 약 1m 높이의 연극무대가 딸린 스케네(Skene)라 불리는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기초석 몇 개만 남아있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원후 67년, 네로황제의 델피방문에 대비하여 이곳을 보수하면서 프로스케니온(Proskenion·무대 아래쪽 정면)을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을 묘사한 부조로 장식했는데 요행히 일부 부조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델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극장 구경을 마치고 고대 그리스의 4대 올림픽 경기 가운데 하나인 퓌티야 경기가 열렸던 스타디움을 구경하기 위해 다소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갔다. 발 아래로 극장과 아폴론 신전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이 델피성역의 뷰포인트이다. 탁 트인 앞쪽을 제외하고 사방이 높다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 암벽은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햇살을 받아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은빛으로 반짝이고 앞쪽에 넓게 펼쳐진 바위산은 웅장하며 계곡은 깊숙하다. 앞쪽(남쪽) 계곡에는 프레이스토스 강(Pleistos river)이 흐른다. 이 강은 파르나쏘스 산에서 발원하여 델피 남쪽의 계곡을 지나 올리브 나무가 울창한 크리싸 평원을 거쳐 코린트만으로 흘러들어간다. 여기서 사방을 둘러보면 델피 성역은 확실히 신기가 서린 곳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이곳은 완벽한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이다!
56. 극장 위에서 바라본 델피성역 전경 발 아래로 극장과 아폴론 신전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이 델피성역의 뷰포인트이다. 탁 트인 앞쪽만 제외하고 사방이 높다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 암벽은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햇살을 받아 마치 물고기의 비늘처럼 은빛으로 반짝인다. 앞쪽에 넓게 펼쳐진 바위산은 웅장하며 계곡은 깊숙하고 강물도 흐른다. 왼쪽에 사선으로 암벽이 갈라져 생긴 협곡을 따라 나무가 울창하다. 이곳 협곡 입구에 카스탈리아 샘이 있다. 이 샘에서 아폴론의 신탁의식을 거행하기 전에 무녀와 제관이 몸을 씻는 정화의식을 거행했다. 여기서 사방을 둘러보면 델피성역은 확실히 신기가 서린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델피 극장 모습 현재 극장은 기원후 1세기 로마제국 초기에 만든 것으로, 반원형 관객석은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델피 아폴론 성역은 범그리스인의 성소였다. 기원전 582년 이래로 4대 범그리스 경기(Panhellenic games) 가운데 하나인 퓌티아 경기가 이곳에서 4년 주기로 열렸다. 그리스 세계에서 퓌티아경기는 올림픽경기 다음으로 중요하였기에 그리스 본토와 에게 해는 물론 지중해 주변의 모든 그리스 식민지에서 참가한 운동선수들이 이 경기에서 실력을 겨루었다. 6일내지 8일간 지속된 축제는 퓌톤에 대한 아폴론의 승리를 재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4일간에 걸친 축제 후에 이곳 스타디움에서 체육경기가 시작되었다.
초창기였던 기원전 5세기에 땅을 편평하게 다져 레이싱 트랙을 만들었으며, 이 때는 관중석이 따로 없어 관중들은 그냥 땅바닥에 앉았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가 로마황제로 등극한 기원후 2세기에 들어섰을 때, 아테네의 부자였던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출연한 기부금으로 스타디움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였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대리석 관중석과 아치형 문이 세 개 달린 출입구 기념물은 이 당시에 세워진 것이다.
트랙의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은 마치 일등병 계급장처럼 두 줄로 구멍이 뚫린 납작한 돌을 일렬로 깔아 표시했다. 이 출발선에 17-18명의 선수가 동시에 발을 디디고 달리기를 겨루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과 도착지점간 거리는 스타디움 길이의 척도인 스타디온(Stadion)으로 나타냈다. 퓌티야 경기장의 1 스타디온은 177.55 m에 해당한다.(보통 1 stadion=180 m이다.) 스타디움의 관중석에는 최대 6,500명의 관중이 앉을 수 있었으며 심판석은 스타디움 북쪽 중앙에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심판석에는 대리석으로 된 의자등받이가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레이싱 트랙의 출발선은 동쪽에 있으며, 출발선 뒤쪽으로 세 개의 아치가 설치된 출입문 기념물이 현재도 남아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세 개의 아치는 네 개의 두툼한 기둥으로 지탱되었으며 중앙에 있는 두 개의 기둥에는 조각상을 설치했던 벽감이 남아있다.
57. 퓌티아 경기가 열린 델피 스타디움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과 도착지점간 거리는 스타디움 길이의 척도인 스타디온으로 나타냈다. 퓌티야 경기장의 1 스타디온은 177.55 m에 해당한다. 심판석은 스타디움 북쪽 중앙에 있고 출발선 뒤쪽으로 세 개의 아치가 설치된 출입문 기념물이 보인다. 이 곳에서 전차경기를 제외한 뜀박질 경기와 5종경기가 열렸다. 길 옆에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스타디움의 출발선: 트랙의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은 마치 일등병 계급장처럼 두 줄로 구멍이 뚫린 납작한 돌을 일렬로 깔아 표시했다. 이 출발선에 17-18명의 선수가 동시에 발을 디디고 달리기를 겨루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과 도착지점간 거리는 스타디움 길이의 척도인 스타디온(Stadion)으로 나타냈다. 퓌티야 경기장의 1 스타디온은 177.55m에 해당한다.(보통 1 stadion=180m 이다.)
퓌티야 체육대회는 6-8일간 진행된 축제의 다섯째 날에 스타디움에서 행해졌다.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아폴론과 다프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의 배경무대인 테살리의 템페 계곡에서 꺾어 만든 월계관이 수여됐다. 스타디움에서 열린 체육대회 가운데는 스타디온(Stadion·스타디온 길이만큼, 즉 180m를 뛰는 단거리 경주), 디아우로스(Diaulos·스타디온 길이의 2배(400m)를 뛰는 경기), 히삐오스(Hippios·스타디온의 4배(800m)를 뛰는 경기), 도리코스(Dolichos: 스타디온의 24배를 뛰는 장거리 달리기) 그리고 5종경기인 펜타쓰론(Pentathlon: 달리기, 레슬링, 멀리뛰기, 원반 던지기, 창 던지기의 다섯 종목을 겨루는 복합경기)이 있었다. 퓌티아 체육대회는 호프리토드로모스(Hoplitodromos; 투구와 정강이받이를 착용하고 방패를 들고 스타디온의 2-4배를 달리는 무장경기)를 겨루는 것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현대 올림픽 육상경기에서 100m 달리기를 모든 육상종목 가운데 최고로 치듯이, 고대 그리스의 경기에서도 스타디온을 최고로 여겨서, 이 종목의 우승자를 사실상 (전차경기도 포함하여) 전체 경기의 MVP로 쳐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델피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된 델피의 마부는 어디에서 전차경기를 했을까? 전차경기는 대회 마지막 날에 이곳 델피 스타디움이 아닌 델피성역 아래 해안(코린트만)에서 멀지 않은 크리싸 평원에 있는 히포드롬(경마장)에서 열렸다. 경마 종목에는 전차가 없는 승마경기, 말 두필이 끄는 전차경기(Synoris), 말 네 필이 끄는 전차경기(Tethrippon)가 있었고, 승마경기는 인기가 없어 일찌감치 올림픽 종목에서 퇴출됐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스타디움 안쪽으로 관광객이 들어갈 수 없도록 줄을 쳐 놓았다. 관광객은 오직 스타디움의 서쪽 끝(종착점)에서만 구경할 수 있다. 이곳 관람을 끝으로 델피성역 구경을 모두 마쳤다. 이제 이곳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아테나 프로나이아 지성소 구경만 남았다. 시각을 살펴보니, 어느덧 오후 5시 반을 가리켰다. 배가 출출해서 빵이라도 사먹을 요량으로 아내가 박물관 매점에 들렀지만 살만한 것이 없다면서 비스킷 두 봉지를 사갖고 나왔다. 테라스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쉬면서 과자를 먹고 있으니, 어디선가 커다란 검정개 두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와 앉는다. 눈매가 순한 순둥이였다. 비스킷을 몇 개 던져주니 잘 받아먹는다. 검정개와 비스킷을 절반씩 나눠먹고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테나 성역으로 가기 위해 2차선 차도를 따라 걸어내려가는데 아까 오후 세시에 도착했을 때보다 승용차들이 많이 빠져나가 도로변에는 비어있는 자리가 많이 보였다.
❀ 델피박물관의 댕댕이 테라스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쉬면서 과자를 먹고 있으니, 어디선가 커다란 검정개 두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와 앉는다. 눈매가 순한 순둥이였다. 비스킷을 몇 개 던져주니 잘 받아먹었다. 우리는 검정개와 비스킷을 절반씩 나눠먹고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물관에서 아테나 성역으로 가는 길의 중간쯤에서 도로가 그리스 알파벳 람다(Λ)처럼 크게 꺾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카스탈리아 샘(Castalia spring)이 있다. 샘물의 이름은 강의 신 아켈로스(Achelous)의 딸이자 물의 요정인 카스탈리아(Castalia)에서 따왔다고 한다. 고대에 아폴론 신탁을 받기 위한 제의를 시작할 때, 퓌티아 여사제와 신관은 이 샘에서 몸을 씻고 성수를 마시는 정화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신탁의뢰인들도 이곳에서 몸을 씻어 자신의 몸을 정화한 다음 사제의 행렬을 쫒아 월계수 나뭇가지를 들고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델피 지성소는 파르나쏘스 산의 남서쪽에 있는 거대한 암반 덩어리를 일컫는 패드리아데스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암괴는 둘로 갈라져 암벽 사이에 좁고 깊은 틈을 만들었다. 협곡의 왼쪽(서쪽) 암괴는 ‘장미 빛’이란 뜻의 로디니(Rhodhini)로 불리고, 오른쪽(동쪽) 암괴는 ‘대담한’이란 뜻의 프레보코스(Phleboukos)로 불린다. 암괴가 갈라진 틈새 깊숙한 곳에 카스탈리아 옹달샘이 있다. 신화에 의하면, 가이아의 아들로 원래 이곳의 신탁소를 지켰던 왕뱀 퓌톤이 협곡의 동굴에서 살았는데 아폴론이 활을 쏴서 퓌톤을 죽이고 자신의 신탁소를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이 협곡은 그리스인들에게 매우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 동양의 음양설로 설명한다면, 이 협곡은 음에 해당하고 아폴론 신전은 양에 해당한다. 델피성역은 음기와 양기가 한자리에 모여 있어 두 기운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상서로운 장소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 델피성역 주변지역 풍경 (위) 델피 지성소는 파르나쏘스 산의 남서쪽에 있는 거대한 암반 덩어리를 일컫는 패드리아데스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단층대가 있어 지진에 취약했다. (아래) 패드리아데스 암괴는 둘로 갈라져 암벽 사이에 좁고 깊은 틈을 만들었다. 협곡의 왼쪽(서쪽) 암괴는 ‘장미 빛’이란 뜻의 로디니로 불리고, 오른쪽(동쪽) 암괴는 ‘대담한’이란 뜻의 프레보코스로 불린다. 암괴가 갈라져 생긴 협곡 깊숙한 곳에 카스탈리아 샘이 있다.
이 계곡에는 카스탈리아 샘으로 불리는 곳이 무려 세 군데나 있다. 샘을 뜻하는 영어단어에는 스프링(Spring)과 파운틴(Fountain)이 있다. 두 영어단어는 크게 구별하지 않고 섞어 쓰고 있지만 스프링이란 단어에는 땅에서 솟구쳐 나온 물이 고여 만든 자연적 옹달샘이란 느낌이, 파운틴에는 구조물이 둘러쳐져 있고 로마시대에는 분수까지 설치된 인공적 샘이란 느낌이 있다. 따라서 두 암벽 사이 협곡의 샘은 카스탈리아 스프링으로 부르는 게 맞고, 지금 우리가 내려다보고 있는 길 옆의 샘은 카스탈리아 파운틴이라 부르는 것이 적당해 보인다. 이 샘은 기원전 6세기초(BCE 600-590년)에 만들어졌기에 아르카익 파운틴(Archaic fountain)으로도 불린다. 이것은 바위를 직사각형으로 깊게 파내고 측면에 석축을 쌓아 만들었다. 욕조 바닥에는 평편한 돌을 깔았고 석벽을 따라 석재 벤치를 둘렀다. 바위를 깎아 만든 수로를 통해서 흘러들어온 물은 네 개의 사자머리 주둥이를 통해서 욕조로 쏟아졌다.
카스탈리아 샘으로 불리는 세 번째 샘은 이곳 도로변에서 암벽(북쪽)을 향해 50m 정도 걸어올라가면 나온다. 이것은 기원전 1세기에 만든 것이라서 헬레니스틱 파운틴(Hellenistic fountain) 또는 로만 파운틴(Roman fountain)으로도 불린다. 이 샘은 협곡의 오른쪽 암벽, 즉 프레보코스의 아랫부분을 깎아서 만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 샘은 록 파운틴(Rock fountain)으로도 불린다. 욕조 위 암벽에 구멍을 파서 벽감 몇 개를 만들어 놨는데, 순례자들이 카스탈리아 요정에게 바치는 봉납물(보통 작은 인물상)을 이곳에 올려놨다고 한다. 이 파운틴은 낙석의 위험으로 인해 올라가는 길목에 설치된 철제 울타리의 자물쇠를 채워놓아 지금은 가까이 다가가서 구경할 수 없다. 그러나 도로변에 있는 아르카익 파운틴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암벽을 바라다보면, 마치 연극에서 사용하는 얼굴가면처럼 생긴 벽감 세 개를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다.
58. 카스탈리아 샘(아르카익 파운틴과 로만 파운틴) 도로 옆에 있는 이 샘은 기원전 6세기초에 만들어졌기에 아르카익 파운틴으로도 불린다. 바위를 직사각형으로 깊게 파내고 측면에 석축을 쌓아 만들었다. 이곳에서 북쪽(암벽)으로 50m 정도 걸어올라가면 기원전 1세기에 만든 로만 파운틴이 있다. 이것은 협곡의 오른쪽 암벽의 아랫부분을 깎아서 만든 것이다. 도로변에 있는 아르카익 파운틴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암벽을 바라다보면, 노란색 동그라미 친 곳에 로만 파운틴에 설치된 벽감 세 개를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다. 사진 왼쪽 위에 있는 네모난 작은 사진은 로만 파운틴을 가까이에서 본 것이다.
문득 시간을 살펴보니 벌써 오후 6시 40분이었다. 오늘 이곳에서 메테오라 방향으로 가려면 핀도스 산맥을 넘어야 했기에 우리는 서둘러야 했다. 이 길은 험한 산길이라 가능하면 일찍 출발해서 깜깜해지기 전에 산을 빠져나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여 아테나 프로나이아 성역으로 갔다.
아테나 프로나이아 지성소(The Sanctuary of Athena Pronaia)는 고대 그리스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인 톨로스(Tholos)를 포함한 다수의 신전과 보물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프로나이아(Pronaia)는 ‘신전 앞(before the Temple)’이란 뜻이다. 단어가 말해 주듯이, 여기는 순례자가 동쪽 길을 따라 델피로 갈 때 마주치게 되는 첫 번째 지성소이다. 이곳에는 오래 전 미케네시대에 이미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믿는 가이아 여신을 모신 숭배 장소도 있었다. 이 시기에 만든 작은 점토 인물상은 대부분 이곳에서 발굴되었는데 현재 델피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아테나 성역은 협소한 계곡 터에 자리를 잡은 관계로 대지가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이다. 출입구는 동쪽 끝에 있었다.(오늘날에는 서쪽에 진입로가 나 있다.) 신·구 아테나 신전을 포함한 건축물은 대부분 파괴되어 기초만 남아있다. 지성소 터에서 가장 오래된 곳은 동쪽이다. 이곳에서 미케네 주거지 유적이 발굴되었다. 첫 아테나 신전은 7세기에 도리아식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지진으로 파괴되어 기원전 6세기 초, 같은 자리에 신전을 다시 지었다. 동쪽에 있는 옛 신전은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난 해인 기원전 480년에 신전 뒤켠의 암벽에서 바위덩어리가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크게 부서졌고, 기원전 373년에는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59. 아테나 프로나이아 지성소 이곳에는 여러 신전과 보물창고가 있다. 지형관계로 신전 출입구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위)1. 작은 신전 2. 제단 3. 구 아테나 신전(기원전 6-7세기) 4. 보물창고 6. 톨로스 7. 신 아테나 신전(기원전 4세기 초), (아래 왼쪽) 톨로스 복원도, (아래 오른쪽) 톨로스 평면도
성역의 중앙에는 2동의 봉납창고와 톨로스(Tholos)가 들어섰다. 톨로스는 후기 고전기에 속하는 기원전 4세기(BCE 380-360년)에 지은 원형의 건물로 고대 그리스 건축을 대표하는 명작 가운데 하나이다. 검은 색깔의 엘레우시스 석재를 사용하여 삼단으로 계단식 플랫폼을 깔고 이 위에 아티카 지역에서 나는 흰색 펜텔릭 마블로 본체를 지었다. 이 건물에 관한 어떤 명문이나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서 건물용도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며 아마도 중요한 신상을 보관했을 것으로만 짐작하고 있다. 이 톨로스는 아테나 성역에서 유일하게 일부분이라도 복원된 건물인데다 워낙 예뻐서 관광객들은 이 건물이 아테나 신전인 줄 착각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델피의 톨로스는 에피다우로스에 있는 아스클레피온의 톨로스를 설계한 소아시아 포카이아 출신의 건축가, 테오도로스(Theodorus)가 설계하였다. 원형의 스틸로베이트(플랫폼) 위에 20개의 도리아식 기둥을 세웠고, 셀라 안쪽에는 10개의 코린트식 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바깥쪽과 셀라의 안쪽 프리즈에는 각각 40개 메토프가 부착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새겨 넣은 부조의 주제는 아마존 전쟁과 켄타우로스 전쟁이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메토프 부조와 석상의 일부 파편이 델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현재 이곳에 복원된 도리아식 기둥 세 개와 이 위에 얹은 엔태블러처는 1938년에 세운 것으로 엔태블러처 상단 코니스의 장식문양과 메토프의 부조는 델피박물관에 전시된 실물을 복제한 것이다.
아테나 프로나이아 지성소
(오른쪽: 신 아테나 신전터(BC 4세기초), 가운데: 톨로스, 왼쪽: 보물창고 터, 왼쪽 맨끝: 구 아테나 신전 터(BC 6-7세기)
60. 아테나 프로나이아 지성소의 톨로스 후기 고전기에 속하는 기원전 4세기 초에 지은 원형 건물로 고대 그리스 건축을 대표하는 명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건물에 관한 어떤 명문이나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서 건물용도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톨로스
톨로스 바깥쪽 부조(주제: 아마존 전쟁), 코니스(Cornice)와 시마(Sima:빗물받이 홈통) 잔해 (델피박물관)
기원전 360년경, 지성소의 서쪽에 아테나 또는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치는 새 신전을 세웠다. 건물 정면에 도리아식 기둥 여섯 개를 세운 프로스타일 신전이며 지형의 제약으로 인해 규모는 작다. 새 신전 역시 기단부만 남아 있는데, 앞서 보았던 아폴론 신전의 다각형 석축처럼 이 기단부도 다각형 돌덩이로 치밀하게 짜 맞춘 것을 볼 수 있다. 톨로스 구경을 끝으로 델피 구경을 모두 마쳤다. 시계를 살펴보니 7시가 다 되었다. 약 4시간에 걸쳐 델피 유적을 구경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 박물관 너머 델피 마을에는 들를 수가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남쪽의 코린트만 경치를 바라보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달래고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다만, 3년 전에 보았던 풍경을 이곳에 짧게 소개하고 델피 기행을 마치는 게 좋을 것 같다.
박물관에서 델피마을을 향해 S자로 휘어진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유럽의 여러 나라 국기가 꼽혀 있는 장소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델피남쪽 코린트만을 바라보는 풍치가 제법 호쾌하다. 델피 성역의 계곡에서부터 코린트만의 항구도시 이테아(Itea)에 이르는 크리싸 평원(오늘날에는 암피싸 평원으로 불리기도 한다.)에는 올리브 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 평원은 옛날에 아폴론의 신성한 땅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테아 옆에 키라(Kirra 또는 Cirrha)로 불리던 옛 항구가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도시국가에서 델피에 가려면 배를 타고 코린트만을 건너 키라 항구에 도착한 다음, 크리싸 평원을 지나서 프레이스토스 강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올라와 델피신전에 도착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델피-키라 옛길 트래킹이라는 도보관광이 있다. 이 트래킹은 가이드와 함께 델피에서 키라까지 총거리 15km에 이르는 고도차 600m의 내리막길을 약 4시간동안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구경한 다음, 투어회사에서 제공하는 차를 타고 다시 델피로 돌아오는 것이다. 언젠가 또 다시 그리스에 오게 된다면, 그때는 유적지 답사보다는 이런 옛길을 한가롭게 걸어보고 싶다.
❀ 델피마을 입구에 있는 유럽국기 행렬 델피마을 입구 가까이에 있는 이곳에서 남쪽의 코린트만을 바라보는 풍치가 제법 호쾌하다. 두 팔을 벌리고 오른손에 불꽃을 쥐고 있는 동상은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와 불이라는 조형물이다.
61. 델피마을에서 바라 본 크리싸 평원과 코린트만 델피성역 아래 계곡에서부터 코린트만의 항구도시 이테아(3)에 이르는 크리싸 평원(2)에는 올리브 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 평원은 고대에 아폴론의 신성한 땅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사진에서 마치 길처럼 보이는 것(1)은 델피계곡을 흐르는 프레이스토스 강이다. 이 강은 우기인 겨울철에만 물이 흐른다고 한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면서 나무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차량 내비게이션으로 다음 목적지인 메테오라까지 거리와 시간을 살펴보니 239km에 3시간 넘게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오늘 중으로 메테오라까지 가기는 틀렸기에 일단 그리스의 백두대간인 핀도스 산맥을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북쪽으로 달리다가 호텔이 있을만한 도시가 보이면 그곳에서 묵기로 하였다. 나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델피-릴리아-테르모필레-라미아를 거쳐 메테오라로 가는 길을 택했는데, 핀도스 산맥의 끝자락에 있는 델피를 벗어나는 길이 어느 정도 험한지 내비게이션 지도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달리 알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이 길 이외에는 다른 길도 없는 듯해서 일단 출발하였다.
62. 그리스 북쪽여행을 함께 한 나의 애마, 현대 i30 승용차
우리는 48번 국도를 타고 아라호바 마을 방향으로 가다가 Y자로 갈라지는 길목에서 내비가 가리키는 왼쪽의 좁은 산길로 올라섰다. 여행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 길은 산비탈에 자리 잡은 아라호바 마을의 서북쪽 외곽을 거쳐 핀도스 산맥을 넘는 매우 꼬불꼬불한 산길이었다. 나는 내비가 가리키는 대로 차를 몰아 아라호바 마을 외곽에 들어섰는데 이곳에서 길이 갑자기 세갈래로 나뉘었다. 나는 살짝 당황하여 차를 급히 세웠다. 내비는 나지막한 언덕으로 올라가는 가운데 좁은 길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이 길은 마을로 진입하는 길이지 산길로 향하는 길 같지가 않았다. 차에서 내려 언덕 위로 뛰어올라가 살펴보니 바로 마을이었고 길은 휘어져 골목길로 이어지는데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스마트폰의 구글지도를 켜도 마찬가지라 도움이 안 되었다. ‘이리로 가도 될까?’하고 아내와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한참을 망설이다 일단 가까운 마트에 들러 빵 몇 개와 물을 산 다음 언덕길로 차를 몰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길은 마을을 통과하여 다시 산길과 만나게 되는 일종의 질러가는 길이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다른 차와 마주칠까 조마조마하면서 어렵사리 빠져나왔다. 이곳을 빠져 나오니 다시 산길이 나타났다. 산머리를 향해 S자로 휘어진 길을 두어 차례 휘돌며 힘차게 올라갔다. 차가 산머리 길을 달릴 때, 저 멀리 서쪽 하늘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인 노을이 점차 빛을 잃어가면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부지런히 밤길을 달려 핀도스 산맥을 벗어나야 했다. 이 산길은 가로등이 전혀 없는데다 S자로 크게 휘어진 내리막길의 연속이라서 조심스레 달려야했다.
63. 해질녘 아라호바 마을 뒤쪽 산길을 넘으면서 저녁 8시가 가까운 시간에 핀도스 산맥을 넘어 메테오라로 향했다. 차가 산머리 길을 달릴 때, 서쪽 하늘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인 노을이 점차 빛을 잃어가면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어둠으로 덮인 산은 차량통행이 거의 없어 적막했다. 달리는 차 앞으로 산짐승이 뛰어들까봐 신경이 약간 쓰였지만 그럭저럭 야간운전을 할만 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네댓 채가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어떤 마을을 지나칠 때는 마치 유령마을에 들어선 듯 머리털이 주뼛 곤두서기도 했다. 그래서 어쩌다 가끔 맞은편에서 전조등을 켜고 다가오는 승용차나 화물차를 만나게 되면 마치 험한 등산길에서 사람을 만난 양 반가웠다. 호텔이 있을만한 도시를 만나기까지 대략 두어 시간동안 쉼 없이 달렸고 그 사이에 큰 산맥 한 개와 작은 산맥 한 개를 넘었다. 시각은 어느덧 밤 9시 반을 훌쩍 넘어섰다. 나는 피곤하기도 하고 슬슬 졸음도 오기 시작해서 호텔이 있을만한 곳이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기로 했다.
산맥을 무사히 넘고 평지를 한참 달리고 있을 때, 멀리 떨어진 앞쪽에 불빛이 휘황한 도시가 보여 우리는 이름 모를 이 도시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길치인 나는 시내로 진입할 수 있는 출구를 두어 차례 놓친 끝에 어렵사리 이 도시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큰 도로에서 벗어나 무작정 어느 동네로 차를 몰고 들어가 호텔을 찾았다. 다행히 허름한 한 호텔을 발견하여 이곳에서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아침에 휴대폰의 구글지도로 검색해 보니 이 도시 이름은 라미아(Lamia)였다. 이렇게 난생 처음해본 유럽 자동차 여행의 첫날이 무사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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