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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 / 창 21:1-34 (518)
21장에는 이삭을 주신 사건과 이삭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인 이스마엘을 내보내심으로써 그 가정을 복의 가정으로 바르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비해주신 사건, 그리고 이삭의 장래 안전을 위한 조치로서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이 맺히도록 인도하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21장 전반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여러 번 강조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습니다(1).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아들을 주셨습니다(2).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방법도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되었고, 때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그 아이의 이름을 “이삭”(3)이라 하였고, “하나님의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했습니다(4). 참으로 이상적인 왕의 모습과 이상적인 백성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식 문제만큼은 전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역사하셨습니다. 사라는 90평생을 살아오면서 늘 자식문제만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에 어두웠겠지요.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그녀로 활짝 웃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삭’이라는 이름 자체가 ‘웃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6)라는 고백에서 사라의 기쁨이 물신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그 백성으로 인도하시며 결국은 약속하신 말씀대로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삭이 자라서 젖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8). 고대 애굽과 앗수르에서는 보통 세 살쯤에 젖을 뗐습니다. 흥겨운 잔칫날에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았습니다(9). 이스마엘은 15살 쯤 되었을 텐데, 이삭을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았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라고 기록합니다. 이스마엘의 행동은 “박해”라 표현될 만큼 상당히 거칠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마엘은 자신은 종의 아들이며, 이삭은 주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인정하지 못하고, 방자한 마음으로 이삭에게 몹쓸 짓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일을 빌미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도록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10) 사라는 이삭만 “내 아들”이며 이스마엘은 종의 아들일 뿐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이스마엘도 제 아들이고, 하갈도 여종이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마음 깊이 근심되었습니다(11).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그 후손 세대의 위계질서가 달라지는 중대한 기로였습니다. 이 문제에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12)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12). 아브라함은 ‘인간의 도리와 정’ 때문에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사라는 참 매정한 사람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업’을 중심으로 생각한 사라의 판단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태어난 약속의 자녀와 육신대로 태어난 약속되지 않은 자녀를 동일하게 취급하여 함께 유업을 받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준 후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큰 위로를 받았다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굳게 믿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결정하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자신의 허물이 빗어낸 일이지만,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수습하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겼습니다.
14-21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그 모자의 생애를 책임져주셨음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스마엘이 언약의 계승자로 선택받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인자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곤궁에 처한 하갈의 울부짖는 기도를 들으셨고, 그 아이의 소리 또한 들으셨습니다(17).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고, “그 아이와 함께” 계심으로 그가 마침내 약속하신 말씀대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20).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심판 중에 롯을 구해내신 것처럼,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필요들을 채워주셨습니다. 언약의 자녀로 선택되는 은총에서는 배제되었지만, 아브라함 때문에 일반적인 은총은 받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이긴 하지만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인격적으로 완전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대상이 된 것은 말 그대로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그들은 독특하게 구별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갈등의 순간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따라 결정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때로는 약속하신 말씀을 오해하여 실수와 허물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게 되었을 때는 즉시 돌이키는 사람들입니다. 분노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가슴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약속의 말씀에 의지해서 과감하게 결단하며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22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그 군대 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화평조약을 맺고자 합니다. 대체로 이런 조약은 아쉬운 쪽에서 먼저 청하겠지요. 아비멜렉은 이미 소왕국의 왕이고 아브라함은 이방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멜렉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와 아쉽게 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말 속에 답이 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2) 아비멜렉이 보기에, 아브라함은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두렵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과 손자에게도 거짓되게 행하지 않기를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도록 요청했습니다(23). 이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 성숙하게 되면, 외인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 된다는 증거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그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해서 책망합니다(24-25). 아브라함은 둘 사이에 먼저 공의가 시행되도록 했고, 그 터전 위에서 화평 조약을 체결합니다(26-32). 그 후 아브라함은 언약을 세운 브엘세바 땅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33)을 불렀습니다. 자기는 죽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셔서 후손들에도 약속하신 말씀을 모두 이루시며, 이를 위해 보호하시며 인도하실 것을 믿고 그리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말을 뒤집어보면 아브라함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시험과 합격 / 창 22:1-24 (419)
오늘 말씀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이 사건은 시험과 합격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고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습니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입니다.
1. 하나님의 시험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가 시험하시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약속을 주시기 위한 부르심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번엔 시험하시기 위해 부르십니다. 항상 주님의 부르심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따르는 사람이 좋은 신앙인입니다. 성경에서 시험은 크게 두 가지 형태입니다. 그 주체와 목적에 따라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시험(test)으로 목적이 선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단이 악한 목적으로 하는 시험(temptation)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얼마나 되는지 달아보고 싶으셨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될 합당한 그릇으로 세우시는 훈련의 한 부분입니다. 마땅히 합격하면 그에 합당한 상급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아들을 잡아서 각을 뜨고 태워 드리라고 하십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라는 말에서 귀하고 귀한 아들을 바치라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을 바치라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신을 드리라고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아들을 포기하라 하십니다. 어렵게 얻은 것일수록 우리의 애착은 강해집니다. 그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연단하실 때 바로 그것을 건드립니다. 집착을 포기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의 말씀만을 따르라 하십니다. 바로 아브라함에게도 하필이면 아들인 것은 바로 그가 그렇게도 아끼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곳 브엘세바에서 드리는 게 아닙니다. 모리아 땅으로 가라 하십니다. 모리아는 예루살렘을 싸고 있는 산악지대입니다. 3일이나 걸렸습니다. 이 3일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 고뇌와 고민이란 걸 누가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시험의 특성이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분명 쉬운 것이 아닙니다. 벧전 4:12 말씀처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입니다. 쉬운 시험이라면 이토록 오늘날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도 갑자기 이런 주님의 시험이 올지 모릅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은 시험을 당하지 않은 이들이 아니고 시험을 이긴 자들입니다.
2. 아브라함의 합격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불 시험에서 승리합니다. 히 11:17-19에서 이 때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Yes”만 있는 사람입니다. (고후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명령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전적 신뢰가 이 시험을 이기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신 것은 그 아들이 아닙니다. (10-12)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원하셨습니다. 그 아들 이삭의 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포기하는지 못 하는지를 아시기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것 중에 가장 진귀한 것이 바로 그 아들이기에 대표로 아들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서슴없이 그것을 포기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우선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3) 주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떠납니다. 지체하지 않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지체하다 때를 놓칩니다. 신앙인은 자신에게 다가온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가는 도중 돌발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아들의 돌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의연한 태도로 답합니다.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리라.”(8) 자기의 결단이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답변입니다. 정말 양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는 확신이기 보다 그런 바람을 가져보는 것이겠지요. 아브라함은 정말로 이삭을 잡으려고 했습니다.(10) 그것은 이미 죽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런 행위를 그렇게 인정하셨습니다. (12)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럼 그 이전에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었습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임을 인정한단 말입니다. 행위로 주님께 인정받았습니다. 인정받은 그에게 비로소 예전에 약속하셨던 복을 굳혀주십니다. 17-19절이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어 그의 씨가 대적의 문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원수들을 이기고 많은 성읍들을 얻을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최종승리가 성취됩니다. 20절부터는 갑자기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나홀은 12 아들을 낳았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아들 브두엘은 리브가라는 딸을 이삭에게 시집을 보냄으로 이스라엘과 관련을 맺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후손이 이제 이삭과 리브가를 통해서 이어지고 그 약속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게 됨을 분명하게 나타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족장도 한 명 못낸 가정이지만 경건한 사람 브두엘은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사용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릴 시험하실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무기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하나님을 향한 전적 신뢰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순종하시 바랍니다. 이론과 생각에 머무르지 말고 신앙을 행동화하는 용기가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신앙인이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의 주인공입니다. 이런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라의 죽음과 막벨라 굴 / 창 23:1-20 (212)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나그네로 살다가 아내의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기록은 사라의 죽음에 대해서 "죽었다." "슬퍼하며 애통했다"는 단 두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여덟 절을 매장지를 얻기 위하여 막벨라 밭과 굴을 매입하는 과정을 길고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막벨라 밭과 굴이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다"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슬픈 현실을 사명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입니다. 아직도 서른일곱 살이나 된 아들 이삭을 장가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막막한 심정과 슬픔 가운데서, 땅 한 평 소유하지 못하고 거류민이요, 나그네에 불과한 자신의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며 땅을 살 생각을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차이가 열 살이나 됩니다(창 17:17). 아브라함이 75세, 사라가 65세에 하란을 떠났다면 127세에 죽음을 맞을 때까지 그들은 62년 동안이나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허락하신 이 땅을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하여 소유하고픈 구체적인 의지를 가지고 기도하며 기다려 왔을 것입니다. 사라의 죽음은 바로 이런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라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운데서도 많은 이웃들이 조문하러 모인 때를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위기는 절망하는 자에게 걸림돌이 되고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지만 기회로 생각하는 이에게는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되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하는 문을 두드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것이 개인의 종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기회를 삼았고 후손을 위한 정착의 시발점을 삼았습니다. 우리들은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신앙의 선진들이 스스로를, 이 땅에서 나그네요 외국인이라 하면서 신앙과 사명으로 영원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갔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우리 모두의 사랑과 소망을 다 쏟을 수 있는 천국의 통로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슬픔이든 고난이든 어떤 일을 만나든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음으로 인생의 기회를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손해 보는 장사지만, 소망으로 거래를 하였습니다.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아브라함이 땅을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거절합니다. "무상으로 대여해 드릴 테니 시신을 매장만 하십시오."하며 너그러운 것 같지만 점잖게 그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무역상이란 뜻입니다. 성경에서 가나안이라고 지칭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그리스 문명보다도 더 먼저 해상무역이 발달했던 곳입니다. 동양과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를 잇는 해상무역 국가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노련한 장사꾼입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정착한 농경사회 사람이 아닌 떠돌이, 반 유목민입니다. 나그네인 아브라함을 '내 주여,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고 추켜세우며 "땅값이 은 4백 세겔이지만 어찌 당신과 나 사이에 흥정을 하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말도 하지 않고 은 4백 세겔을 지불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가치를 믿었습니다. 미래에 후손들을 향한 가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손해나는 거래지만 그냥 달라는 그대로 주고 샀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밭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밭에 묻혀있는 보화를 보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라고 했습니다. 진주 장사가 지금까지 모아온 수백 수천 수만 개의 진주를 다 팔아서 사고 싶은 단 하나의 값진 진주, 그것이 바로 천국의 가치입니다(마 13:44-46). 우리는 천국의 가치,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3. 사랑하는 사람은 떠났지만, 그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롬 4:11에서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의 조상일 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조상입니다. 주후 1100년경의 사람 마이모니테스라는 랍비는 "모든 신앙인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기도하라."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모두 아브라함의 소유지로 확정되었습니다. 헤브론에 있는 이 막벨라 굴에 사라를 묻고 후일, 아브라함 자신이 묻혔으며, 이삭과 리브가, 레아와 야곱이 묻힘으로 이곳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조상의 땅이 되었습니다. 후일 여호수아가 이 땅을 정복하여 갈렙에게 분배하였고 레위인의 성읍이 되었으며 도피성을 설치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막벨라라고 하는 이름은 '두 배' '겹쳐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세계에 살면서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신앙이란 미래를 남기고 떠나는 것입니다. 계절이 지나간 자리에 열매가 남듯이 역사가 지나간 자리에 이름이 남고 사람이 떠나간 자리에는 업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업적은 신앙적이어야 하며 사명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길이 기억되고 우리의 후손들이 안식할 주님의 처소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막벨라 굴을 매입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읍시다.
아브라함의 신앙 / 창 24:1-67 (38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결혼이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여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이 풍성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혼이 그와 같이 되기 위해서는 단 한가지 길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가 올바른 배우자,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배우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만나고 결혼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애와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1.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1-9)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의 결혼할 때를 정하시고 계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이는 순수한 결혼과 한 가정 내에서 면면히 전해져 내려와야 할 믿는 자들의 전통인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순전한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7-8절에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 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고 경고했습니다.
2. 일어서서 아내를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10-11)
이 종은 일어나서 선물을 가지고 나홀의 성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나홀성은 아브라함의 동생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곳으로, 아브라함이 살아계신 참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 신부 감을 구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그는 그 성의 우물가로 갔는데 그곳은 그 성의 여인들이 저녁에 함께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3. 하나님의 인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12-14)
종은 우물 옆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가 이삭의 신부 감을 찾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그는 누구에게 접근하거나 말을 건네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그는 간절히 기도했고 구체적인 증거를 구했습니다. 그 종은 하나님께 그녀가 마땅한 여인이라면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에게 다가와 열 마리의 낙타에게도 물을 길어주도록 요청하였습니다.
4. 자신의 기도를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15-25)
이는 매우 극적인 장면입니다. 종이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종이 기도하는 중에 한 젊은 여인이 우물로 나왔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의 신부로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이 구했던 바로 그 표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종은 리브가에게 선물을 주고 그녀의 가족에 대해 물은 후 자신을 유숙하게 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5. 하나님의 자비와 성실과 인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26-27)
종의 마음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주께서 자신을 증거 하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종을 아브라함의 친척의 집, 진실한 믿음을 가진 젊은 여인을 찾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6. 가족들의 환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28-32)
리브가는 집으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알리고 손님이 유숙할 곳을 준비했습니다. 리브가의 오라비 라반은 뛰어나가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라반은 손님에게 자기 집에서 유할 것을 원하고 낙타를 돌보아 주었으며 손님 및 그 일행들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7. 적절한 시기에 자신의 마음과 목적을 나누고 밝히는 것입니다.(33-48)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대리인으로서 이삭이 리브가와 그의 가족들에게 했더라도 역시 똑같이 했을 그런 방식으로 결혼에 관한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이 구절들은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재음미하는 것입니다. 그 종이 리브가와 그의 가족에게 자신의 마음과 목적, 그리고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식사하기 전 매우 적절한 시기에 밝혔다는 것입니다.
8. 결혼에 대한 분명한 결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49-51절)
공손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그는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삼게 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분명한 주님의 인도를 인정한 가족들은 그 종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리브가를 이삭과 결혼시키기로 허락했습니다.
9. 결혼의 결정을 확정하고 증거를 세우는 것입니다.(52-61)
그는 즉시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는 즉시 선물을 리브가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즐거워했고 모든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이 리브가를 잃음으로써 갖게 되는 상실감을 위로했습니다. 하룻밤 잔 후 다음날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 떠나기를 원했지만 가족들은 리브가가 그렇게 빨리 떠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에게 열흘 만 더 머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을 급히 서둘러야 함을 계속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리브가에게 그 결정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리브가가 떠나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즉시 떠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가족은 여종과 함께 리브가를 보냈습니다. 가족은 리브가에게 축복을 빌었습니다. 이는 그녀가 아브라함의 약속의 혈통에 소속될 것임을 나타내는 예언입니다. 종은 리브가와 일행을 데리고 이삭을 향해 떠났습니다.
10. 결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62-67)
이삭은 저녁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낙타들이 오는 것을 보았고 곧 그들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리브가는 먼 곳에서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이삭을 보고 낙타에서 내렸습니다. 그녀는 종에게 그 남자가 누구인지 물었고 종은 그가 이삭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리브가는 최고의 존경과 예의로 행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그들이 처음 만날 때 너울로 얼굴을 가린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종은 자신이 리브가를 찾게 된 경위를 이삭에게 다 말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사랑하여 결혼했습니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깊은 상심에 잠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함으로 위로가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위로받는 성도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의 죽음 / 창 25:1-34 (412)
아브라함은 이제 이 땅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인생의 순례 길을 끝마쳤습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 땅에서 순례를 마감할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이 땅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때는 오직 한 가지만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약속을 성취하십니다.(1-4)
아브라함은 140세였고 외로웠습니다. 사라는 3년 전에 죽었고, 이삭과 리브가는 결혼 후 남쪽으로 이사해 브엘라해로이로 옮겨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외로이 홀로 남겨졌고, 노년에 가까이 사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생의 마지막을 홀로 지내는 것은 그에게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그두라와 결혼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재산 분배와 약속의 씨인 이삭에 대한 보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5-6)
아브라함은 육축이 많았습니다.(13;2) 그는 목축이 매우 많았으므로 318명 이상의 일꾼들이 그를 위해 일했습니다.(14;14) 일꾼들의 가족들을 포함하면 아브라함은 아마도 1000명 이상의 식솔들을 거느렸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가나안에서 가장 강력한 족장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은과 금도 풍부했습니다.(13:2) 아브라함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이삭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는 그두라에게서 난 여섯 아들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재물은 각각 목축이나 다른 사업을 시작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자신의 여섯 아들들을 이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도록 동방으로 보내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의 유산을 놓고 일어날 다툼의 소지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로, 세상적이고 타협하는 삶을 사는 가까운 가족들의 세속적인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능한 한 이삭을 세속적인 영향력으로부터 구별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이삭에게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혈통으로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받고 약속의 씨 곧 세상의 구세주를 태어나게 할 택함 받은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살아있는 동안에 이삭이 장래에 겪을 가능한 어려움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3. 아브라함의 죽음입니다.(7-10)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기운이 다하여”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열조에게 돌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죽음 앞에서 화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둘이 함께 아버지의 장사를 치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와 함께 묻혔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그의 두 아들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을 성취하십니다.(11-18)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간단히 언급됩니다. 본문의 주된 초점은 이스마엘 입니다. 그는 큰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열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5. 결혼은 경건한 가정의 토대입니다.(19-20)
이삭은 40세의 나이에 리브가와 결혼 했습니다.
6. 기도는 가정생활의 중요한 부분입니다.(21-22)
이삭과 리브가가 결혼한 지 20년 동안 이 부부는 아이를 갖고자 노력했으나 임신할 수 없었습니다.
7. 하나님의 축복이 이 가정에 충만하게 임하였습니다.(23)
주님은 리브가에게 다음의 두 가지 놀라운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민족을 일으키기 위해 이 가정을 택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자녀는 커다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이 아니고 아우를 택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아기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나 하나님께서는 어린 자를 택하셔서 큰 자보다 더 강하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작은 아들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유업으로 물려주실 것임을 명확히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땅과 구세주의 약속된 혈통을 말합니다.
8. 하나님께서는 건강한 쌍둥이가 리브가와 이삭 사이에 태어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축복을 증명해주셨습니다.(24-26)
한 아들은 붉은 빛을 띠고 나왔는데 털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는 에서라고 불렸는데 후에 에돔 민족의 조상이 됩니다. 둘째 아들은 에서의 발꿈치를 붙들고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그가 에서를 대신하여 장자의 자리를 얻게 될 것을 상징합니다. 그는 야곱이라 불렸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를 이룰 것입니다.
9. 부모의 무책임하고 세속적인 행동이 나타나 있습니다.(27-28)
에서는 활발했지만 가정이나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넓은 들판을 좋아하여 마음껏 돌아다니며 제약받지 않고 행동했습니다. 그는 사냥을 자신의 생업으로 삼았습니다. 야곱은 에서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야곱은 조용한 성격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가족의 문제와 일들을 처리했습니다. 그는 장막에 거하며 일꾼들과 가축들과 가족의 일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들의 부모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많은 부모들이 너무도 자주 범하게 되는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을 편애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에서보다 야곱과 영적인 유대감을 가졌습니다.
10. 에서와 야곱의 세속적인 행동입니다.(29-34)
어느 날 에서는 매우 지치고 배고픈 상태로 사냥에서 돌아왔는데 마침 야곱이 죽을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야곱에게 가서 죽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31-34절에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귀함을 알았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가볍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장자는 가업을 이을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말로 그렇게 한다고 장자의 순서가 바뀌겠는가하고 야곱이 하자는 대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라고 불리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성도의 뜻은 거룩한 자, 성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거룩히 구별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로써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