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신(信)]’의 어원
“지구의 나이는 신앙적인 나이와 과학적인 나이가 다르다”그럼 둘 중 하나는 틀려야 한다. 창조과학의 6000년 지구 나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신앙적으로 믿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한마디로‘틀리지만 믿는다.’는 말이다. 틀리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인가?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는 것인가?
믿을/신(信)은 인(人)과 언(言)의 자형이 결합된‘신’글말(자음)의 회의이다. 흔히 ‘사람의[인(人)] 말[언(言)]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신(信)을 설명한다. 맞는 말이다. 그럼 그 믿음은 무엇인가? 그래서 기존의 신(信) 그‘믿음’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사람의 말이 믿음인가?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만 믿을 뿐이다. 하나님 말씀으로의 창조과학이 비롯된 까닭이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뿐인 신(神)이다. 우리말 ‘신나다’는 ‘신이 나다’의 준말이고, 나아가 ‘신명나다, 신명이 나다’의 준말이다. 신명(神明)의 한자어는 중국말로 신령(神靈)의 뜻이다. 곧 신명(神明)은 우리말 ‘신명’의 음차이다. 우리말 ‘신’은 ‘좋은 일이 있거나 또는 어떤 일에 흥미가 생기어 매우 좋아진 기분’이 사전적 설명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기분을 일으키는 것이 ‘신’이다. 한마디로 ‘시[시게(알곡), 아기씨, 존재]를 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명’은 ‘씨(존재)를 나게 마키는(<옛>매기는, 정하는) 영(밝은 기운)’의 준말로, 천명 혹은 소명의 다른 말이다. 각자의 신명이 각자의 천명이고 소명이다. 각자의 소명을 이루어가는 일이 ‘신명이 나는’ 일이다.
사람[인(人)]의 목적 그 존재이유가 ‘신명’이고, 말[언(言)]의 존재이유 그 목적도 ‘신명’이며, 믿음의 목적도 ‘신명’이다. 즉, 우리가 믿는 것은 ‘신명’을 믿는 것이다. 신명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의 말 속에 깃든 신명을 드러내고 받아 드리는 것이 ‘믿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말하는 것은 각자의 신명(소명)을 드러내며 서로의 마음(천명)을 나누기 위함이다. 따라서 말에 깃든 뜻이 하나님의 뜻이다. 역설적으로 말을 창조한 사람이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반어법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름을 가진다. 부모가 이름을 지어주면서 내가 태어난다. 이름을 불러 주면서 내 이름으로 내 존재가 창조된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중에서.
‘빛이 있으라.’의 하나님 말씀은, 뒤집어 보면, 어둠을 비추어 밝히는 의미를 부여해 ‘비추는 이(것)’의 준말 ‘빛’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표현과 다름없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을 창조한 것이다. 세상의 존재를 그 존재이유를 따져 새롭게 그 의미를 부여하여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담이 불러주는 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세상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아담은 하나님 뜻의 대리인이다. 그래서 아담이 이름을 부여한 행위는 말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대로 그 뜻에 따라 이름을 지어준 것의 상징이다.
신앙적으로 지구의 나이를 6000년으로 보는 것은, 다시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언어로 천지를 재창조했다는 반증이다. 즉, 하나님은 말을 창조한 사람이고, 아담은 글을 창조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과학적(역사적)으로 문자의 발명이 대략 6000년에 가깝기 때문이다. 덧붙여 바벨탑은 문자 창제의 비유 그 신화로 볼 수 있다. 인류가 흩어지며 민족마다 서로 다른 문자를 발명하면서 하나의 말이 수많은 언어로 흩어진 것이다.
언어의 기원에 대해 언어학자들은 대략 십만 년에서 오만 년으로 보고 있듯, 성경의 계산은 말과 문자의 간격을 간략화 시켜 기술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담의 창조와 천지 창조의 간격이 생략되어있다. 창세기의 서술이 천지창조와 아담의 창조를 나누어 구분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신앙적 믿음의 근거는 ‘성경무오론’곧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틀릴 리가 없다는‘신[하나님]의 무오론’이다. 창조과학의 지구나이 6000년은 문자창조의 나이이다. 사실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어야 마땅하다. 과학적인 성경 창세기의 팩트는 언어의 창조이다. 세상을 말로써 재창조한 것이다. 팩트에 오류가 있다면, 신의 오류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해석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믿을/신(信)은 소전에 나타나고, 그 이전에는 없는 글자이다. ‘믿음’이란 말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필요 없었다는 반증이다. 바꾸어 말하면 불신이 없는 사회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믿음’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것은 불신이 생기기 시작하여 ‘믿음’을 강요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각을 바꾸면 ‘믿음’의 뜻이 다른 뜻으로 쓰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였을까? 신(信)의 얼개와 견주면, 신(申)과 같다. 그리고 신(申)은 또한 신(神)의 뜻이기도 하다. 곧 신(神)이 바로 신(信)의 뒷면이다. 오늘날 우리는 신(神)을 믿는 것이 아니라 강요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불신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神)을 죽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神)을 죽이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불신의 시대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신(神)을 창조하면서 믿음을 창조하고 불신을 낳았다.
신(申)의 갑골문이다. 사전에서 번개가 칠 때 구부러지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으나 뒤에 지지(地支)의 아홉 번째 글자로 뜻(원숭이)이 가차되었다고 설명하는 글자이다. 더불어 ‘펼, 알릴’뜻도 가지고 있다.
갑골문은 을(乙)의 좌우에 ‘∨’과 ‘∧’[입(入)의 갑골문] 혹은 상하로 바뀐‘ )’[궐(亅)의 갑골문]의 변형체로 구성되었다. 즉, ‘을러대며 나누어(일으켜)[을(乙)] 신명을[신] 드러내고[∨] 들이다[∧(入)]’또는 ‘위[하늘]와 아래[땅]로 벌려(구무럭거려) 을러대며 나누어 신명이 나게 하다’는 얼개(구조)이다. 신(信)과 비슷한 구조이다. 나아가 비약하면 천지를 나누어 창조하고, 각각의 신명[천명, 소명]을 드러내 들이어주는 창조주 신(神)을 나타냈다. 신(神)이 금문에 나타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즉, 신(申)이 주로 지지(地支)의 아홉 번째 뜻으로 쓰이자 금문시대에 시(示)를 덧붙여 새로 신(神)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신명을 위 아래로 벌려 펼치고 알리는 뜻으로 전주(轉注)되어 쓰이다가 소전시대에 다시 인(人)을 덧붙여 펼/신(伸)으로 구분했다. 어쨌든 우리에게 각각의 신명을 드러내 들이어 진 존재가 신(神)이다. 각각의 존재에 나뉘어 모두에게 함께 깃들여 진 마음이다. 그래서 한자의 신(神)은 서양적 창조주의 의미보다는 ‘정신’이나 ‘혼’의 의미가 더 강하다.
우리말 ‘믿다’는 ‘미내어(<옛>내밀어) 드러내다 또는 들이다’의 준말이다. 신(信)과 비교하면 단지 ‘신명’이 생략된 말이다. 생략했다는 것은 생략해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모두가 무엇을 생략한 말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보편적 사고의 패턴인 정령사상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인간에 깃든 정령의 다른 말이 ‘신명’이다.
모두에게 신명이 깃들어 있음은 모두가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존재임을 뜻한다. 그런데도 서로 다른 우리가 다양하게 있는 까닭은 하나님의 뜻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내 몸은 수 조(兆)의 세포로 구성되어있다. 각각의 세포는 나의 여줄가리(주된 몸뚱이나 원줄기에 딸린 물건)이다. 각 세포는 내 뜻을 이루는 소명을 가지고 존재한다. 나는 은하의 여줄가리이고, 은하는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을 여줄가리고 가지고 있다. 수많은 은하는 우주의 여줄가리일 뿐이다. 그리고 나 또한 우주의 여줄가리이다.
우주는 프렉탈 구조이다. 모든 자연수는 ‘1’의 프렉탈이듯, 프렉탈 얼개는 우주의 신명이 내 안에 존재하는 구조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까닭이다. 나는 우주의 뜻을 이루는 소명을 받고 태어난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 모든 존재는 우주의 신 그 신명의 뜻에 따라 존재한다. 신명으로 모두가 수렴된다. 우리가 서로의 신명을 드러내 밝히며 나누는 것은 다양한 하나님 뜻을 공유하며 나누기 위함이다. 다양한 하나님 뜻을 공유하고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 되기 그 공존을 위함이다.
신(神)이 금문시대에 출현했다는 것은 그 시대에 이미 신격화가 무르익었다는 반증이다. 공무를 수행하는 위정자(제사장)를 신격화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있는 신명을 분리시켰다. 신격화는 우상화를 포장한 말이다. 우상화는 내 안의 신을 버리고 남의 신을 숭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전시대 곧 진시황 시대에 모두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짐(朕)’ - 천명(소명)의 짐을 진 나 - 을 오직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말로 강제한 사실이 그 증거이다. 즉, 믿음을 강요하기 시작하면서 신(信)이 소전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우상화는 내 안의 신(神) 그 신명을 강탈하고 강탈당하는 일이다. 내 안의 천명을 강탈당하면 우상의 꼭두각시가 필연이다. 역설적으로 우상화 곧 신격화는 꼭두각시의 노예를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믿음을 강요하고 강요당하는 이유이다. 믿음은 결코 강요하거나 강요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 안의 신명을 드러내 보여주고, 남의 드러난 신명을 보고 내 안에 받아 드리는 일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말을 창조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결코 아니다. 예수가 그의 천명을 드러내 행한 일을 믿을 뿐이다. 종교는 인류의 스승(선각자)들을 신격화 시키면서 타락의 길을 걸어왔다. 각자에 깃든 신명 그 신(神)을 죽이는 일이 어찌 종교일 수 있겠는가? 믿음을 강요하고 강탈하는 일이 어찌 종교일 수 있겠는가?
말은 자연(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밝힌 뜻이다. 우리의 존재이유로서 요청된 뜻이다. 성경 창세기의 천지창조 내용은 역설적으로 천지의 이치 곧 우리의 존재이유를 담은 뜻으로 말을 창조한 것이다. 창세기는 최초의 언어 그 말의 창세기이다. 세상의 뜻을 말 속에 담아낸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의 하나님은 말을 창조한 하나님이다. 우리의 존재이유가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 말 속에 이미 깃들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계시의 말씀이다. 각자의 천명 그 소명을 깨닫는 계시의 말씀이다. 성경은 결코 목적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 그 신명을 깨닫기 위한 ‘믿음’의 도구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한자에서 자음의 뜻이 빠지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이 빠진 것과 같다. 한자의 육서(六書)가 자음의 법칙인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