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억제하고 다양한 교육으로 질적 제고 이룰 것’ 설립취지 무색
자사고 떠난 학생 3년간 2700여명…28%는 정원미달
‘교과’보다 ‘적성’ 위주로 운영 자율권 준다면 전망 낙관
중학교 3학년 학생을 둔 학부모들을 요즘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고등학교의 특성에 따라 붙여지는 이름이다. 과거 인문계와 실업계로 대분되던 고교학교 분류가 이제는 특목고, 특성화고, 마이스터고 등 이름만으로는 특성과 역할을 구분 짓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는 인문계고가 ‘자립형’이라는 이름하에 사립고와 공립고로 불리더니 지금은 또 ‘자율형’ 고교라고 불리고 있다.
특목고와 특성화고 관련 내용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특목고와 특성화고는 일반고(필수 이수 116단위)보다 필수 이수 단위가 적은 대신(72단위) 학교별 전문교과를 80단위 이상 이수하도록 한 고교를 말한다. 외국어고는 영어·스페인어·중국어 등 전공 언어별 전문교과를, 국제고는 국제법·국제외교·국제문제 등의 전문교과를 각각 배우는 식이다.
학생과 학부모를 가장 헷갈리게 하는 고교는 ‘자율형고등학교’다. 자율고는 크게 자율형사립고와 자율형공립고로 구분된다. 자율형사립고는 전기 고교에, 자율형공립고는 후기 고교에 각각 속한다.
자율형사립고는 필수이수단위(최소 58단위)를 제외한 나머지 교과군 별 이수 단위를 지킬 필요 없이 교육과정을 자유롭게 편성할 수 있다. 지난 2010년 개정된 초중등 교육법에 따라 민족사관고 등의 자립형사립고도 자율형사립고로 편제됐다. 단, 기존 자립형사립고는 학생 선발권을 갖고 전국에서 신입생을 모집할 수 있다. 나머지 자율형사립고는 거주 지역 내에서만 지원 가능하고, 지원자(평준화지역은 내신 상위 50% 이내 지원 가능) 중 추첨으로 선발한다.
자율형공립고는 일반 공립고 중 교과군 별 이수 단위를 학교 자율에 따라 50% 증감할 수 있어 일반고보다 교과 편성이 자유로운 학교다(필수 이수단위는 72단위). 서울 구현고 등 전국에 58개교가 운영 중이다. 거주지 내 학교만 지원 가능하며, 평준화 지역은 후기 고교 전형 기간에 ‘선(先)지원 후(後)추첨’ 방식으로, 비평준화 지역은 학교 자율로 각각 신입생을 선발한다.
이렇듯 선진화된 고교교육을 실시하자는 취지로 출범한 ‘자율형’ 학교가 기로에 섰다. 그중에서도 자율형사립고가 신입생 미달로 정원을 줄이거나 지정 취소되는 등 학생들에게 외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얼마 전 전국의 2012년도 자율형사립고 정원 1만8415명 중 올해 줄였거나 감축 예정인 인원은 모두 840명(4.56%)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중 서울 지역 감축인원은 630명으로 전체의 75%를 차지했다. 서울 소재의 경문고ㆍ우신고ㆍ대성고가 각 70명, 70명, 35명을 감축했고, 자립형사립고 지정이 취소돼 내년 일반고로 전환하는 용문고는 정원 455명을 모두 줄인다.
이같이 서울지역에서 자율고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지정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전국의 자율고는 총 50개로 절반인 25개교가 서울에 밀집해 있다.
교과부 관계자는 “특히 서울의 동북권 및 서남권 지역에 학교가 몰려 있어 한정된 학생 자원을 두고 유치 경쟁이 치열하다”고 설명했다. 성적이 높은 학생들이 과학고, 국제고, 외고 등 특목고로 빠져나가 자율고에 대한 수요가 낮다는 점도 자율고 미달사태의 원인으로 꼽힌다.
자율형사립고는 현 정부의 고교 다양화 정책에 따라 2009년 도입됐으며 수업료를 일반고의 3배로 걷을 수 있고 교과운영 등에서 자율성을 인정받지만 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학생들을 선발하는 자체 시험을 치르는 특목고와 달리 자율형사립고는 내신 성적 상위 50% 이내의 학생의 지원을 받아 추첨으로 신입생을 뽑는다.
교과부는 2012년까지 전국에 자율고 100곳을 지정한다는 당초 계획을 사실상 수정한 상태다. 전국적으로 50개교가 운영되고 있지만, 매년 신입생 정원도 채우지 못하는 학교가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미충원 자율형사립고는 모두 14곳으로 서울 8곳, 대구 2곳, 광주 2곳, 부산과 전북이 각각 1곳으로 집계됐다.
교과부는 잇따른 미달사태에 지정 속도를 늦추고 정원감축과 함께 워크아웃을 통한 재정지원에 나서겠다는 대책을 내놨으나 당초 자율고 설립취지와는 맞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재정지원하지 않는 대신 연간 500만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받을 수 있고, 교육과정의 자율성을 갖는 자율고의 본래 설립취지와는 어긋난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를 떠난 학생이 올 8월까지 27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율형사립고의 문제는 지난 5일 교과부 국정감사에서도 도마에 올랐다.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소속 민주통합당 박홍근 의원은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 재학생 전출·자퇴 현황에 따르면 자사고를 떠난 학생이 2010년 445명, 2011년 1622명, 2012년 658명으로 모두 2725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이는 MB표 교육상징인 자사고가 파행 운영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라며 “자사고는 사교육을 억제하고 다양한 교육으로 질적 제고를 이루겠다는 당초 취지와는 달리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다 평균 등록금이 410만원에 이르는 등 교육비 부담이 커 학생과 학부모의 외면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2010년 2.35대 1이었던 입시 경쟁률이 해마다 감소해 올해는 1.4대 1로 큰 폭으로 하락했다. 특히 올해 전체 자사고 50개교의 28%인 14개교는 정원 미달인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의 동양고와 용문고는 정원미달로 정상적인 학교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올해 지정을 취소한 바 있다.
박 의원은 “당초 귀족학교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사회적 배려대상자를 정원의 20% 이상 선발하도록 의무화 했는데 이들에 대한 학비를 261억8065만 원 등 모두 353억8179만원을 국고로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충원률이 17.2%에 달하는 등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손충모 전교조 대변인은 “자율고 정책은 정부 목표의 절반밖에 달성하지 못했고, 그마저도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며 “교육정책이 잘못됐다는 판정이 나면 실패를 인정하고, 빨리 수습하는 게 학부모와 학생들의 피해를 줄이는 길”이라고 비판했다.
“일반고로 돌아가겠다” vs “첫 대입, 인기 오를 것” 전망 엇갈려
현 정부 교육정책의 핵심 축인 자사고가 도입 3년째를 맞이하면서 성공과 실패의 기로에 섰다. 2010년 도입 이후 불과 3년 만에 일반고로 전환하는 학교가 나왔는가 하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자사고 타이틀을 떠안고 있는 학교도 있다. 반면 자사고가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하는 만큼 이들의 대입 성적표에 따라 자사고의 인기가 치솟을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도 나온다.
‘자사고 실패론’은 올해 초 서울 지역 자사고를 중심으로 신입생 미달 사태로 인한 일반고 전환과 정원 감축이 이슈가 되면서 떠올랐다. 일반고에 비해 학비가 3배나 비싼데도 차별성 없는 교육과정이 문제였다. 전국 50개 자사고 가운데 14곳에서 지난해 신입생 미달 사태를 겪었다. 서울에서는 동양고와 용문고가 2년 연속 지원자 미달 사태를 겪으며 일반고로 전환됐다.
미달 사태로 신입생 정원을 줄여 달라는 요청도 나왔다. 서울 우신고와 경문고 등이 학교 운영 부담으로 학급을 줄이면서 내년 서울지역 자사고 신입생 정원이 630명 줄었다. 시 교육청 관계자는 “신일고가 학급 감축을 요청했지만 이를 받아들일 경우 이 지역 자사고 입학 정원이 줄게 돼 학생선택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학급 감축을 승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사고를 떠나는 학생 수도 늘고 있다. 서울 지역 자사고의 학생 이탈률은 2010년 3.4%에서 지난해 4.2%로 늘었고 민족사관고, 하나고 등 전국단위 모집 자사고의 경우도 2010년 2.7%, 지난해 3.1%로 올랐다.
이는 대입 수시모집 비중이 확대되면서 내신을 중시하는 경향이 커져 2학년에 올라가면서 일반고로 전학 가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학부모들 사이에 자사고는 수능에서 특목고에 치이고 수시에서 중요한 내신은 일반고에 치인다는 시각이 퍼져 있다.
그러나 자사고 실패를 거론하기는 이르다는 시각도 있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지난해 미달 사태를 빚은 자사고들은 주로 교육 환경이 낙후된 지역에 많이 있어 자사고를 지원하는 학생 수가 적은 것이 주요 원인”이라면서 “자사고 졸업생들이 입학사정관제나 특기자 전형에 더 유리할 것으로 보여 자사고 위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임성호 하늘교육 이사 역시 “올해 13개 자사고가 첫 졸업생을 배출하는데 모의평가 등의 성적을 보면 일반고보다 월등히 좋다는 분석이 있다”면서 “이들의 대학 진학 결과에 따라 자사고의 인기가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교과부도 신입생 미달은 일부 학교의 문제일 뿐 다른 학교에서는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는 입장이다. 교과부 관계자는 “지난해 조사결과 자사고 학생들의 수업만족도가 5점 만점에 3.54점으로 자율형 공립고의 3.32점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면서 “올해 첫 편제가 완성된 만큼 앞으로 자사고가 특화된 프로그램과 교육 만족도를 홍보하게 될 경우 정착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교과’보다 ‘적성’ 위주로 운영 자율권 줘야
도입 3년차인 ‘자율형 사립고’(자사고)의 성공과 실패를 놓고 교육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지만 하나로 일치되는 대목이 있다. 현 상태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사고 운영에 대해 전반적인 검토와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상당수 자사고가 다양한 교육을 실현한다는 본래 도입 취지와 달리 입시 위주의 교과과정 운영과 높은 등록금 등 여러 가지 병폐를 드러내고 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좌초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팽배해 있다.
다양화·특성화를 통해 교육 경쟁력을 높인다는 당초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교과’가 아닌 ‘적성’ 위주의 자율적 운영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자사고는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 가운데 교과 이수단위의 50% 이상만 편성하고 나머지는 학생들의 특기와 적성에 맞춰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문경민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장은 “많은 자율권을 부여받은 자사고는 현행 입시 위주의 교육과정을 넘어선 전인적인 교육과정 운영을 통해 새로운 학교 교육의 모델을 보여 줘야 한다”면서 “자사고가 기존의 특목고나 국제고처럼 대학입시에 유리한 학교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특색 있는 교육과정을 운영해야 도입 취지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 수 감소와 수시 위주의 대입전형 변화에 따라 특목고와 자사고 등의 선발인원을 대폭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자사고를 지원하는 학생들의 수요 조사 등 철저한 검증 없이 학교를 승인하면서 신입생 미달사태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임성호 하늘교육 이사는 “현재 서울지역의 중학교 3학년 학생이 11만 명 정도인데 서울에 있는 특목고와 자사고 입학 정원이 1만 1000명”이라며 “학생 10명 중 1명은 특목고나 자사고에 가야 한다는 얘기인데 현실적으로 정원이 많다”고 말했다.
학교 수를 줄이되 자율권은 현재보다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애초에 지원할 학생들의 숫자가 적은 곳까지 자사고를 배치한 것이 문제”라면서 “지원자 규모에 맞게 자사고의 수를 조정하고 특화된 프로그램을 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충분히 주는 것이 해법”이라고 말했다.
자사고 측도 할 말이 많다. 학교 운영의 자율권을 확대하는 대신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있지만 정작 학생선발권을 주지 않아 껍데기뿐인 자율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사관고 등 과거 ‘자립형 사립고’로 인가받았던 6개 자사고는 현재도 전국 단위로 신입생을 모집해 학생을 선발하고 있다.
반면 나머지 자사고는 거주 지역 내에서만 지원자를 받아 추첨으로 신입생을 가린다. 올해 신입생 미달 사태를 빚은 서울의 한 자사고 교감은 “수업시간 등 학교 운영에 대해서는 교육청이 일일이 간섭하는 반면 자사고라는 이유로 지원은 전혀 없다”면서 “재단에서 전입금으로 해마다 10억 원에 가까운 돈을 쏟아 붓고 있는데 원하는 학생을 뽑을 권한도 없어 애초의 자율성 확대라는 취지가 훼손된 것 같다”고 말했다.
교과부 관계자는 “이제 막 편제가 완성된 상황에서 나타난 초창기의 시행착오는 시간을 두고 점차적으로 개선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일부 학교들이 일반고로 전환하면서 전반적인 상황은 더 나아졌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