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신재 한림대 명예교수가 말하는 장절공 신숭겸 장군 신숭겸은 원래는 궁예의 부하
궁예의 폭정 심해지자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 이가 곧 태조
생명 걸고 킹에이커 역할 성공
어느날 왕과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
하늘 높이 기러기 세 마리 날았고
그는 "너느 기러기 쏠까요?"
"세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
명중했고 태조는 이를 기념하여
평산으로 본관을 삼게 하였다
평산(平山) 신(申)씨 시조 된 이유
개국공신 그는 벼슬 욕심 없이
왕을 대신해 죽은 충신
태조가 견훤의 군대에 포위되자
병거(兵車)를 타고 과감히 돌진
견훤군은 그의 목을 치고,
태조는 위기를 모면하였다
왕은 국가적 행사로 그를 추도
춘천에 있는 묘는 봉분이 세 개
그가 전사했을 때 머리를 잃어
태조가 금으로 주조해 합쳐 장사
혹시 몰래 건드릴까 두려워
봉분 셋으로 만들어 분간 못하게 해
이것이 1,000년 전의 일이다1120년 10월15일, 서경(西京), 팔관회(八關會).
이때는 고려 제16대 왕 예종 15년이고, 서경은 지금의 평양이다.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위한 위령제, 국가 지배계층의 권력 서열을 확인하고 결속을 다짐하는 단합대회, 가무백희를 즐기는 축제 등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는 종합적인 의례이다. 개경(개성)에서도 거행하고, 서경에서도 거행했는데 서경에서는 영봉문, 흥국사, 장명사 등에서 거행했다. 예종이 팔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개경에서 서경으로 온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이 팔관회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두 가상(假像)이 관모를 쓰고, 비녀를 꽂고, 자줏빛 관복을 입고, 금빛 홀(笏)을 들고, 말을 타고 뛰면서 뜰을 돌아다녔다. 예종이 이상하게 여겨 저들이 누구냐고 묻자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신숭겸과 김락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오래전에, 정확히 말하면 193년 전에 죽어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이에 앞서 제1대 왕 태조가 서경에서 팔관회를 베풀 때에는 이러한 일이 있었다. 신하들과 팔관회를 한창 즐기다가 태조는 불현듯 신숭겸과 김락이 보고 싶었다. 임금을 대신하여 죽은 충신! 이 즐거운 자리에 그들이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태조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짚으로 신숭겸과 김락의 인형을 만들고, 조복을 입히게 했다. 그리고 이 즐거운 자리에 함께 앉게 했다. 태조는 신숭겸의 인형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그 술은 곧 없어졌다. 신숭겸의 인형은 술에 취하여 일어나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춤을 추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인형극이다. 팔관회에서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는 인형극을 한 것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씻김굿(오구굿)을 한 것이다. 씻김굿에서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워놓은 `영돈'은 망자의 상징이다. 태조는 이러한 추도극을 매년 거행하도록 했다.
예종 때의 팔관회에서 가상이 말을 타고 뛰어다닌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가면극이다. 신숭겸과 김락이 전쟁터에서 태조 대신 죽는 장면을 광대 두 명이 가면극으로 재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연극사에서 인형극이 가면극으로 변모한 사례이다. 시인이기도 한 예종은 느꺼운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시를 지었다. “충의는 천고에 빛나고 / 살고 죽음은 한때의 일 / 임금 위해 칼날에 서니 / 이것이 나라 터전 지키는 일”(忠義明千古 死生惟一時 爲君蹄白刃 從此保王基 - 후반부).
그러나 예종은 시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광대의 몸을 빌려서 팔관회 현장에 나타난 신숭겸과 김락의 모습을 보면서 일어나는 벅찬 감격을 한문으로 표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거기에다 한시는 일부 지식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예종은 시를 다시 지었다. 이번에는 우리말로 읊었다. 그는 벅찬 감격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시, 글로 쓴 시가 아닌 말로 노래하는 시, 모든 백성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읊고 싶었다. “님을 온전케 하온 /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 넋이 가셨으되 / 몸 세우고 하신 말씀 // 직분 맡으려 활 잡는 이 / 마음 새로워지기를 / 좋다 두 공신이시여 / 오래 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져” (김완진 해독).
우리말을 적을 문자가 없어 그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향찰(鄕札)로 적었다. 이것이 곧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마지막 향가인 `도이장가(悼二將歌)', 즉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을 추도하는 노래이다.
이 향가의 전반부는 무한한 공간을 노래하고, 후반부는 영원한 시간을 노래한다. 두 장군의 넋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위기에 처했던 `님'(여기서 `님'은 태조 왕건이자 나라이다)을 온전하게 한 그 충절의 마음은 땅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가득 차 있다. 그 충절의 마음이 지금 광대의 몸을 빌려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이다(전반부). 두 공신의 마음은 영원히 살아서 오늘날 나랏일을 맡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구나(후반부).
신숭겸은 927년에 지금의 대구인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전사하였다. 927년은 신라(경순왕 1년), 후백제(견훤 36년), 고려(태조 10년)가 공존하던 때이다.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김부(경순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가자, 고려와 후백제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태조와 견훤이 공산 동수에서 전쟁을 벌였는데 태조의 전세가 불리하였다. 태조는 견훤의 군대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에 신숭겸이 태조의 병거(兵)를 타고 김락과 함께 견훤군 쪽으로 과감하게 돌진하였다. 신숭겸은 태조의 병거를 탔을 뿐 아니라 얼굴의 모습도 태조와 비슷했다. 견훤군은 신숭겸을 집중적으로 에워쌌다. 그들은 신숭겸의 목을 치고, 그의 얼굴을 창에 꿰어 높이 들고, 태조를 죽였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러는 통에 포위가 풀어지고, 태조는 위기를 모면하였다.
신숭겸은 원래는 궁예의 부하였다. 그는 궁예의 마군(馬軍) 소속 기장(騎將)이었다. 궁예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신숭겸은 같은 기장들인 홍유, 배현경, 복지겸과 함께 자기들의 상관인 궁예를 몰아내고, 역시 궁예의 휘하에 있는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건은 918년 6월 15일에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가 곧 고려 태조이다.
신숭겸은 생명을 걸고 킹메이커 역할을 수행하여 성공을 하였다. 성공을 하고 나서 그는 그 성공을 누리는 일은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개국공신으로 표창만 받았을 뿐,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왕은 숭겸 등 무인들을 데리고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갔다. 그들은 삼탄(三灘)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때 하늘 높이 기러기 세 마리가 날고 있었다. 누가 쏘겠느냐고 태조가 물으니 숭겸이 나섰다. 숭겸이 “어느 기러기를 쏠까요?” 하고 물으니 태조는 웃으면서,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라고 하였다. 숭겸은 말을 타고 달려 나아가 주저하지 않고 활을 쏘았다. 화살은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명중시켰다. 태조는 감탄하며 이를 기념하여 평산으로 본관을 삼게 하였다. 또한 기러기를 쏜 근처의 밭 300결을 하사하고 그곳의 지명을 궁위(弓位)라고 지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숭겸(崇謙)은 평산(平山) 신(申)씨의 시조가 되었다. 아마도 신숭겸의 생애에서 이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나라를 새로 세우는 큰일을 해내고도, 그 나라에서 높은 벼슬 하지 않고 지내던 이 시절.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신숭겸의 묘가 있다. 이 묘는 봉분이 세 개다. 풍수지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묫자리는 원래 도선(道詵)이 왕건을 위해서 잡아놓은 명당인데 왕건은 자기를 대신해서 죽은 신숭겸에게 이 명당을 내주었다고 한다. 신라말 음양풍수설의 대가인 도선은 왕건의 탄생과 그의 건국을 예언한 바 있다. 왕건은 도선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를 사상적 스승으로 섬겼다.
이 묘역에 있는 신도비(神道碑)는 1805년에 세운 것인데 비문을 지은이는 김조순(祖淳, 1765~1832년)이고, 글씨를 쓴이는 신위(申緯, 1769~1845년)이다. 신위는 신숭겸의 후손이고, 춘천부사를 지냈었다(1818~1819년). 이 비문에 의하면 “높다랗게 솟은 봉분이 세 개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오기를, 태사(太師, 곧 신숭겸)가 전사하였을 때 그의 머리를 잃어 고려 태조가 태사의 얼굴을 금으로 주조하여 시체에 합쳐 장사를 지내면서 혹시 몰래 이것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봉분을 셋으로 만들어 잘 분간할 수 없게 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사연이 있다고도 하나 “연대가 오래되고 문헌을 상고할 수 없어”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어쨌든 신숭겸 묘의 봉분이 세 개인 것은 스토리텔링의 좋은 자료이다.
역시 비문에 의하면 신숭겸은 백제 땅 욕내(지금의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아마도 광해주(지금의 춘천)로 이주해온 듯하다고 한다(其先出百濟欲乃郡 而史稱光海州人 欲乃今谷城縣 光海卽春川 或自谷而遷於春也).
신숭겸은 왕건을 고려의 시조로 만들어주었고, 태조 왕건은 신숭겸을 평산 신씨의 시조로 만들어주었다. 개국공신 신숭겸은 벼슬자리 등에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있다가 왕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고, 태조 왕건은 신숭겸을 추도하는 일을 국가적 행사로 이어가게 했다. 이것이 1,000년 전의 일이다. 1,000년 전의 일이, 요즈음의 정치 상황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대통령 주변 인사들의 처신 방법과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군인들에 대한 국가적 대우의 정도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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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강원인물]“천년 전 충의로 가득찼던 한 사나이의 길 잠시 떠올려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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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도연씨와 찾아간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역
고등학생 시절, 강촌에 살던 내 친구는 평산 신씨였다
그 친구로부터 처음 신숭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에서 머리가 잘려 황금으로 대신 만들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봉분을 세 개나 만들었는데
그 묘가 바로 서면에 있다는 얘기까지…
춘천에서의 청춘 시절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번개시장 건너편 나루에서 배를 기다렸다
뱃전에 기대 어디로 가야 되는지 묻고 또 물었다
금산 나루에서 내가 헤매던 춘천을 바라보며 취했고
무작정 걸어서 장절공 묘역까지 도착했다
그 자리에서 다시 내게 물었다
다른 사람의 길을 위해 네 목을 바칠 수 있겠느냐고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돌아와야만 했다
장절공 묘역에서 보는 풍광은 장관이다
의암호가 희디흰 창호지처럼 펼쳐져 있고
춘천의 집들은 의암호 건너편 봉의산 치맛자락에
오순도순 모여 있는 것만 같다
신라 말의 승려이자 풍수설의 대가인 도선이
왕건의 집안을 위해 잡아준 자리다
왕건이 그 자리를 신숭겸에게 내어준 것이다
오랜만에 장절공 묘역을 찾았다. 습기 많은 날씨였다. 춘천에서 장절공 묘역으로 가려면 몇 갈래의 길을 놓고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의암댐을 건너 호수를 오른쪽에 끼고 가는 방법이 그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지금은 황막해진 고슴도치섬 위를 건너가는 다리를 통해서다. 아예 춘천댐까지 올라가 강을 왼쪽에 끼고 내려오는 방법도 있다. 춘천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나는 배를 타고 서면 금산으로 갔다. 금산에서 막걸리 한 병 마시고 장절공 묘역까지 걸어서 갔다. 햇살이 물결에 어룽거리고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그 길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노을에 얼굴 붉히며 막배를 타고 돌아와 소양로 번개시장에서 다시 막걸리를 마셨다. 서면 장절공 묘역의 그 붉은 소나무들을 떠올리며.
춘천시 서면 방동리 석파령 가는 길에 자리한 장절공 묘역으로 가며 나는 날씨를 걱정했다. 폭염이 지나간 뒤 요즘 비의 성깔이 만만찮은 터였다. 다행히 습기만 많을 뿐 화악산 자락에서 비구름은 몰려오지 않았다. 말수가 적고 우직한 권태명 기자와 나는 먼저 `고려태사장절공 신숭겸장군상'이란 글이 적힌 동상 앞에 섰다. 매미 소리가 요란했다. 동상 왼쪽의 은행나무엔 아직 익지 않은 은행이 촘촘하게 매달려 있었다. 우람한 몸체의 신숭겸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칼을 든 채 서 있었지만 천 년 후의 지금은 한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하지만 동상 뒤편 화강암에 설치한 부조 조각품에는 당시의 긴박했던 장면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대구의 공산(公山)에서 견훤과 싸우던 장면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왕건은 5,000의 군사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는데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장군 여덟 명 모두와 병사 4,930여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대패를 했던 것이다. 물론 신숭겸도 전사했다. 대신 왕건의 목숨을 살리고. 퇴각하는 왕건으로서는 그야말로 피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었던 전투였을 것이다. 신숭겸이란 이름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목이 잘린 채.
묘역으로 가는 길. 연못에는 자색, 노란색 연꽃이 만개해 있었다. 수양버들이 수면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연못을, 붉디붉은 연꽃을 나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연꽃의 수를 세어보려고 했던 생각을 지우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병사들의 눈물 같은 연못도 지워버리고 묘역을 향해 걸었다.
3만 평 규모의 묘역 입구로 들어서자 역시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먼저 손님을 반겼다. 초록의 잔디가 물결치듯 산을 타고 내려왔다. 매미가 울었고 메뚜기가 뛰어 올랐다. 까치가 소나무 우듬지를 날아다녔다. 소나무의 키는 어림잡아 삼사십 미터는 돼 보였다. 하나하나의 자세도 남달랐으며 껍질의 붉은빛도 윤이 흘렀다. 잠자리 떼가 나무 사이를 잔디 위를 가뿐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1976년 강원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장절공 묘역의 잔디를 나는 아주 천천히 밟으며 올라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메뚜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흩어졌고 나뭇가지의 까치들은 마치 길을 안내하듯 저만큼 앞서서 깍깍거렸다. 한가한 월요일의 방문객에 신이 난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나는 꽤 여러 사람과 장절공 묘역을 방문했다. 참배의 형식이라기보다 왠지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해졌던 듯하다. 묘역을 에워싸고 있는 울창한 소나무들과 푸른 잔디의 언덕을 보고 걷는 것만으로도 어떤 위안을 받았던 것이다. 어떤 날은 글을 쓰는 선후배들과 왔었고 또 어떤 날은 멀리서 찾아온 손님과도 걸었다. 고등학생 시절, 강촌에 살고 있던 내 친구는 평산 신씨였다. 나는 그 친구로부터 처음 신숭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에서 머리가 잘려 황금으로 대신 만들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봉분을 세 개나 만들었는데 그 묘가 바로 서면에 있다는 얘기까지. 아마 그때부터 나의 서면 방문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춘천에서의 폭설 같았던 청춘 시절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번개시장 건너편 나루에서 배를 기다렸다. 뱃전에 기대 어디로 가야 되는지 묻고 또 물었다. 금산 나루에서 내가 헤매던 춘천을 바라보며 술에 취했고 무작정 걸어서 장절공 묘역까지 도착했다. 그 자리에서 다시 내게 물었다.
다른 사람의 길을 위해 네 목을 바칠 수 있겠느냐고.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돌아와야만 했다. 내 청춘은 얇고 내 꿈은 미미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일개 병졸이었다.
장절공 묘역에는 세 개의 묘가 있다. 그곳에서 보는 풍광이 장관이다. 가까이 있는 마을에서 소가 우는 소리가 올라온다. 개 짖는 소리도 올라온다. 아직 고개를 숙이지 않은 벼들이 모여 자라는 논은 초록이다. 그 사이사이 인삼밭이 보인다. 민가도 있다. 그 너머에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의암호가 희디흰 창호지처럼 펼쳐져 있다. 춘천의 집들은 의암호 건너편 봉의산이 남쪽으로 넓게 펼쳐놓은 치맛자락에 오순도순 모여 있는 것만 같다. 마지막이 대암산이다. 구름을 지고 있는 대암산이 이 모든 풍광의 마지막을 완성한다. 신라 말의 승려이자 풍수설의 대가인 도선이 왕건의 집안을 위해 잡아준 자리다. 왕건이 그 자리를 신숭겸에게 내어준 것이다. 나는 땀을 훔치며 묘역을 내려다보았다. 우리를 안내해준 까치들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잔디밭에 일렬로 내려앉아 폴짝폴짝 뛰며 메뚜기를 잡아먹고 있었다. 마치 김을 매듯.
평산 신씨의 시조이기도 한 신숭겸 묘역을 관리하는 분은 34대 손인 신현택(75) 씨였다. 농협을 다니다 퇴사하고 10년째 묘역을 지키고 있었다. 일 년 중 가장 큰 일은 음력 3월3일과 9월9일에 지내는 제사라고 한다. 전국에서 후손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춘기제례 때는 천여 명, 가을제사 때는 육칠 백 명의 후손들이 방문한다고. 사진으로 본 제사 장면도 장관이었다. 3만여 평의 잔디밭 가득 후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심지어는 평상시에도 거의 매일 지역별로 참배를 온다고 한다. 참배를 하면 후손들이 하는 일이 잘된다는 속설도 생겼단다. 신현택 씨의 안내로 조선 순조 때 세운 신도비를 훑어보았다. 신도비의 글에는 상서로운 붉은 기운이 아직 서려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영의정 김조순이 글을 짓고 춘천 부사를 지낸 신위가 글을 썼다고 한다. 장절사(壯節祠)에는 1976년 김기창 화백이 그린 영정이 모셔져 있었는데 거기에 서려 있는 기개가 대단했다.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소나무가 젖고 산중턱의 묘가 젖고 있었다. 연꽃도 젖고 동상도 젖어갔다. 매미와 까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메뚜기와 잠자리는 어디로 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묘역 인근 두부찌개를 잘하는 집은 월요일엔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들었다. 다시……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나는 권 기자의 차에 실려 비에 젖어가는 장절공 묘역을 떠났다. 평범한 농민이었던 능산(能山)이 걸어간 길을 떠올려 보았다. 신라 말기의 어지러운 시절 궁예를 만나고, 왕건을 만나고…… 성(姓)을 얻고, 시호를 얻고, 그 성을 만들어 준 임금에게 기꺼이 목숨까지 바쳤는데…… 그러나 나는 겨우 비에 젖은 우울을 달래줄 술집이나 찾고 있었으니…….
세상의 길 없음에 마음이 어지러운 날, 당신, 소양로 소양다리 아래편 나루에서 금산 가는 배를 한번 타시길. 금산에서 매운 짬뽕 한 그릇 드시고 걷고 걸어 천 년 전 한 사내의 길을 가만히 훔쳐보시길. 다시 그 배 타고 노을을 등에 진 채 돌아와 보시길.
⑴ 장절공 신숭겸 장군 사당에서 평산 신씨(平山 申氏) 34대손이며 묘역관리인인 신현택(75)씨가 김도연 소설가에게 장절공 신숭겸 장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⑵ `고려태사장절공 신숭겸장군상'이란 글이 적힌 동상.
⑶ 1805년 건립된 신숭겸 신도비(申崇謙 神道碑·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이 비는 김조순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조선시대 4대 명필가인 신위가 썼다.
⑷ 봉분이 3개로 된 독특한 형태의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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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2012년 8월 23일자 보도>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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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재및덕양사전경
덕양사
용산재및덕양사
종 목 |
전라남도 기념물 제56호 |
명 칭 |
용산재및덕양사 (龍山齋및德陽祠) |
분 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사우 |
수량/면적 |
일원 |
지정(등록)일 |
1981.10.20 |
소 재 지 |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36,목사동면 구룡리 180 |
시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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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소유단체) |
사유 |
관리자(관리단체) |
평산신씨종중 |
상 세 문 의 |
전라남도 곡성군 지역개발과 061-363-1633 |
용산재및덕양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고려의 개국 공신 신숭겸(?∼927)의 탄생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장군의 유적이다.
신숭겸은 왕건을 도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워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다. 고려 태조가 즉위한 몇 년 뒤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크게 분개한 태조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이 때 신숭겸이 태조를 구하고 후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유적지에는 제사를 모시는 용산재와 구룡문, 유허비, 유허단 및 비각이 있으며 해마다 9월 중에 제사를 지낸다.
첫댓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