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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희자(1935년생, 77세)_가정3리 | |
조사일시 | 2011년 7월 15일 오후 2011년 8월 2일 오전 & 오후 |
가족관계 | 남편 박화순, 남편과 큰아들과 함께 거주 |
특징 | 7월 15일 박화순씨와 이삼순, 박달순씨 인터뷰 참여 *이삼순(가정3리_80세) 강촌 광주이씨 집안에서 잿골로 시집옴 *박달순(가정3리_80세) 박암리 밀양박씨 집안에서 잿골로 시집옴 집에 다식판, 함지 등 전통 농기구, 요리기구 보관 중 |
* 이삼순
- 가정3리 류연풍씨의 부인(2년 전 사망)
- 남편 류연풍씨가 재궁동 산신제때 제관으로 자주 참여했다.
- 시어머니가 93세에 돌아가셨는데, 시어머니를 잘 모셨다고 하여 춘천시에서 효행상을 내림.
- “강촌에서 가정리로 시집오면서 가마를 탔는데, 산을 넘으면서 가마꾼들이 힘들어서 죽는다고 했었다. 당시 ”류가들이 양반노릇을 지겹게 해서 아랫말 윗말에서 (류씨가 아닌 사람들을) 다 부려먹었었다”
- 당시 중매쟁이 이야기만 듣고, 신랑 얼굴도 보지 못하고 시집을 왔다.
- 박화순, 류희자 부부가 대례를 치르기 2일 전에 혼례를 올렸다.(섣달 스무날) 류희자씨와는 새댁 동기
- 근친 : 당시는 시집오고 3년은 돼야 근친을 갔다. 엿동구리 하나 해서 친정으로 갔다. 친정에서 1달 정도 있다가 시댁으로 똑같이 음식을 해서 돌아왔다.
- 창호지에 검정글씨(=사주단자)에 하나에 팔려왔다. 아무것도 못 받았다.(채단으로 치마저고리 유땡 하나만 받았다)
<인적사항>
박화순씨의 증조모가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자 아들(박화순씨의 조부)를 데리고 친정이었던(진주강씨) 가정3리로 들어왔다. 상주박씨가 가정리에 거주한지 80~90년 정도 되었다. 상주박씨는 장남인 박화순씨 혼자 살고 있다. 동생들은 모두 외지로 나갔다. 군대를 다녀와서도 집에 계속 머무르지 않고 밖에서 사업을 하거나 일을 하면 왔다갔다 했다. 특히 겨울에 나가있는 사업을 해서 마을 일을 잘 알지는 못한다.
류희자씨는 가정2리 고흥류씨 집안에서 가정3리 상주박씨 박화순씨 댁으로 시집옴. 시집 온 뒤 바로 남편은 군대를 갔다. 남편이 제대하기 전 까지 홀로 시부모, 시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큰아들은 헌병대 중사였다가 퇴직하고 고향으로 현재 소주고개 파가니카 골프장 경비로 근무 중이다.
-효행상
시아버지를 잘 모셔서, 춘천시에서 주는 효행상을 받았다.
*화장
화장이라는 건 시집올 때 가져온 박가분을 물에 개워 찍어발랐던 것 밖에 없다. 이것도 몇 번밖에 못 해봤다. 이 외에는 화장이라는 것을 여적지(여태까지) 모르고 살았다.
<마을상황>
3리에도 류씨가 많이 살았다. 현재는 거주하던 류씨가 상당수 외부로 나갔다.
- 작목반
가정3리 오이, 가지 작목반 사람들은 더운 날에 다 같이 모여 먹고 즐기는 모임을 갖음. 올해 7월 16일에 모여서 놀았다.
- 쟁골
정확히 하면 약물터 있는 곳 골짜기가 쟁골이나, 근래에는 사람들은 가정3리 마을쪽도 쟁골이라 칭하기도 한다.
<꿩닭>
2006년도에 닭(암)과 꿩(수)이 교배해서 꿩닭이 나왔다. 큰아들이 꿩병아리를 60마리를 사다가 길렀는데 2쌍이 남았다. 한 쌍은 가평에 주고 꿩 한 쌍이 있었는데 암컷이 죽었다. 꿩 우리 안에 닭과 함께 키웠다. 홀아비 꿩이 홀로 지내다가 암탉과 교미를 했다. 류희자씨가 먹이를 주면서 장끼가 암탉에게 잠깐 올라섰다가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닭이 들어앉아 알을 품었는데 새끼를 4마리를 깠다. 암평아리 2, 수평아리 2인데, 하나는 영락없는 닭이고 나머지 3개는 닭도 아니고 꿩도 아닌 꿩닭이었다. 이후에 암꿩을 우리에 새로 넣어주자 수꿩이 더 이상 암탉과 교미하지 않았고 암탉이 근처에도 못 오게 한다. 주위사람들이 그걸 잡아먹으면 어떤 맛일까 하고 한번 먹어보자고 하지만, 큰 아들이 꿩닭들을 신주 모시듯 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2세 꿩닭들은 아무것도 낳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 ‘멍텅구리’이다. 성격이 순하다. 알을 품지 못한다. 가끔씩 우는데, 꿩닭의 울부짖는 소리가 이상하다. 마치 쾍쾍 갈매기 소리와 같다. 쪼는 것은 닭보다 잘 쫀다.
꿩닭으로 매스컴에 여러 번 나왔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 mbc 지역뉴스에 방송되었다. 3리 마을회관 앞 다리 옆에 꿩닭 알림판이 붙어있다. 꿩닭을 보려는 구경꾼들이 많이 왔다 갔다. 동물학 박사 2명이 왔다 갔는데 꿩과 닭이 교미해서 자식이 나오는 것이 어려운 일이고, 그리고 2세는 종족을 번식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10년 전에 원주에서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는데 박화순씨댁 꿩닭이 유전학전으로 두 종의 교미가 확실히 이루어진 경우라고 했다.
<화전농사>
과거에는 다들 화전을 해서 농사를 지었다. 류희자씨의 경우 산으로 10리를 걸어 밥을 날랐다. 과거에 함지에 밥을 이고 산을 올랐다. 큰성골 산잔등에 올라서면 가평다리가 보이는 곳에서도 화전을 일구었다. 밥 지고 올라가는데 1시간은 족히 걸렸다. 그렇게 다녀서 그런지 산은 매우 잘 탔다.
산에 불을 놓을 때에는 불이 안 나게 가운데에 부댓가지를 모아놓고 불을 붙였다. 나무 많이 놓은 곳이 부댓가지이다. 탄 재들을 바깥쪽으로 퍼뜨렸다. 재가 때문에 배추나 옥수수를 심으면 농사가 잘 되었다. 농산물의 맛도 좋고, 색깔도 좋았다.
화전 논은 2년 정도 하고 딴 데를 찾았다. 화전도 영림소에 일정량의 도지를 물었다. 도지는 수확물에 따라 달랐다. 이때는 산림감독이 제일 무서웠다.
수확시즌에는 마을 사람들이 두레를 통해 한 번에 수확 일을 마쳤다. 수확하는 날이면 조반 먹기 전에 한 짐씩들 가지고 내려오고 해당 집에서는 일꾼들에게 아침을 해 먹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울력’이라 했다. 조반을 먹은 뒤에는 제 각각 일을 갔다. 이렇게 하면 한 집의 수확이 하루아침에 끝났다.
* 과거에 지고 나른 함지 2,3개를 아직 보관하고 있다.
화전 경작 작물_콩, 팥, 조 등 먹을 거 다 싶었다.
산돼지가 심어 놓은 옥수수를 다 먹어치우기도 했다.
<두레>
요즘에는 기계로 모를 심지만 과거에는 동네사람들이 두레를 통해 하루 한 집씩 모내기를 해주었다. 줄을 쳐서 모를 심었다.
화전 농사를 지을 때에도 수확시절에 아침나절에 한집씩 돌아가며 일을 해주었다.
이렇게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집일을 해주면 식사를 대접했다.
두레가 이루어질 때는 젊은 인력의 협력이 중요했다. 노인들도 젊은 사람이 마땅치 않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음식>
- 식혜
질금가루를 걸러 가라앉혔다가, 그 물을 끓인다. 한 연기 나간 밥은 부어 놓고 삭은 다음에 밥알이 두 알 뜨면 끓이면 된다. (8월 2일 류희자씨 댁에서 식혜를 맛보았는데 그 맛이 독특했다)
-방아찧기
보리쌀의 경우 매일 발방아(디딜방아)로 찧어 밥을 했다.
1반별로 각각 있었다. 아녀자들은 밤에 방앗간에 모여 방아를 찧었다.
밀의 경우도 지금은 편하게 사다먹지만, 일일이 갈아 먹어야 했다.
- 메밀
메밀을 반죽해 눌러서 막국수도 해먹고, 칼국수도 해먹었다.
가정3리 회관 바로 뒤에 메밀막국수를 해주는 집이 있다. 이 집은 그 자리에서 반죽을 해서 눌러 국수를 뽑는다. 시내에서도 사람들이 먹으러 온다. 간판을 걸면 허가를 받아야 해서 그냥 간판 없이 장사 한다.
<약주술 만들기>
류희자씨는 10년 전까지(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담그지 않는다) 술을 담가서 제사를 지냈다. 이 근방에서는 거의 다 근래까지 제주는 집에서 직접 담근 술을 이용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고 귀찮아서 하지 않는다.
* 누룩 만들기
- 밀을 갈아서 체에 흔들어 밀가루는 빼고 그 나머지를 이용한다.
- 반죽을 하고 밟는다.
- 쑥을 베다가 반죽의 아래, 위로 덮고 한 번씩 뒤집는다.
- 열흘정도 지나면 누룩이 뜬다.
이때 사용하는 쑥은 봄에 나오는 잎이 작을 때 딴 것을 쓰는 것이 좋다. 이것을 쓰면 누룩이 하얗게 아주 잘 뜬다. 말려놓으면 아주 뽀얗다. 잘된 누룩은 속이 뽀얗다. 이걸로 술을 해서 거르면 찌거지가 빠르스르 뽀얀물이 나온다. 술은 누룩에 달렸다!
요즘은 술약을 사서 사용한다. 아니면 막걸리나 소주 사다 넣어 술을 만드는데 이런 건 독하기만 하고 옛날만의 술 맛이 안 난다. 아랫말에서 요즘 사람들이 술을 만드는 것을 보니 큰 독에 막걸리 10말, 소주 댓병을 갖다 붓고 그렇게 술을 만들더라. 그런데도 맛이 좋다고 한다. 요즘 건 너무 쓰고 독하다.
* 술밥 짓기
술밥을 지을 때에는 솔잎을 뜯어다 실내에 한 켜 깔고 쌀을 건져 놓았다 찐다. 밑에 찐 물을 쏟아 붓고 그걸 비벼서 섞어 놓는다. 마른 누룩을 갖다 일일이 (밤새도록) 비벼서 다 해놓았다가 식은 다음에 그것을 퍼서 먹기도 했다. 쌀 1말마다 물 1되씩 붓는다.
술을 만들어야 하기에 장사를 5일, 7일 동안 지내야 했다. 삭으면 막걸리고, 그것을 더 오래두고 가라앉히면 동동주이다. 술이 잘 돼서 가라앉으면, 노랗게 가라앉는다. 찌거미는 아래로 앉는다. 밥알만 동실동실 떠다닌다. 잘 만든 술은 2-3년이 지나도 쉬지 않는다.
<시어머니 사망>
하루는 가평다리가 보이는 산꼭대기에서 콩을 뽑는데 까마귀는 짓고 몸에 이상한 기운이 돌았는데, 집에 계신 시어머니가 얼마 안 있다가 돌아가셨다.
9월 초닷새날이 타작이었는데, 어머니가 상태가 좋지 않아 9월 초하루날에 가평으로 나가서 시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급보를 군대에 있는 남편에게 쳤다. 타작날에 남편이 급보를 듣고 왔다. 그런데 닷새를 계셔도 안 돌아가시고 있으시다가 부대 복귀 하루전날 9월 14날에 돌아가셨다. 이웃 용골 아버지를 부대로 보내 휴가증 열흘을 끊어가지고 와서 남편이 장례를 마치고 돌아갈 수 있었다.
<길쌈>
시집오기 전에도 베를 짰고, 시집와서도 천자 정도 짰다. 류희자씨의 경우 시집와서도 20년 동안 했다.(1960년대까지) 지금은 돈 가지고 척척 사 입지만, 예전에 시집왔을 때에는 일일이 실을 만들어, 베를 짜서, 그리고 가세로 잘라 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계절별 베, 무명, 명주를 짰다. 가을에는 목화 심은 걸 따서, 물레에 잦아서 실을 만들어 겨울옷 바지저고리를 만들었다. 목화 안에 있는 씨를 일일이 빼 내야 했다. 정월달이 가까워지면 설날에 가족들 새빔을 하주기 위해 열심히 실을 잦고 천을 짜고 바느질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정월이 지나면 가족들의 여름옷 만들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여름에는 삼을 심어 크면 베어 찐다. 찌고 난 뒤에 껍데기를 벗겨 무릎팍에서 일일이 꽈서 실을 잣는다. 그리고 그 실을 이용해 천을 짰다. 명주의 경우 짜는 거 보다는, 보통 누에고치를 키워 내다 팔았다. 찌거지만 실을 내는 것으로 사용했다. 누에는 모를 낼 적에 두잠을 잔다(?). 산으로 뽕잎은 따러 죄 다녔고, 그걸 이고 내려왔다. 이때는 무겁고 힘든 것 보다는 없어서 더 못 이고 내려오기 바빴다. 누에고치는 배타고 가평에 나가서 팔았다. 이것은 보통 남자들이 팔았다. 수동이 젤 좋은 것이고 특등은 둘째고, 일등은 3등이다.
시아버지 또는 시어머님 출타 하실 때에는 도포나 옷을 하얗게 빨고, 다림질 하고 풀을 먹여야 했다. 다림질도 다듬이 돌에 놓아 방망이질을 했으며, 빨래를 할 때는 콩짚+메밀짚을 태워 잿물을 만들어 삶았다.
<생활권>
춘천으로 통하는 도로사정이 나아지기 전, 그리고 춘천으로 나가는 버스 편이 생기기 전에는 가평이 생활권이었다. 가평소재 장, 약방, 한의원 등 이용
30년 전에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가정3리의 경우 수러니 고개를 넘어, 무늬골에서 배를 타고 북한강을 넘어 가평에 닿았다.
<재궁동(쟁골) 산신 제사(‘산제당 제사’)>
- 산제당 신 = 남신(男神)
- 3개의 제당
상당은 하늘, 중당은 땅, 하당은 인간신을 모신 제당
- 산제 역사는 100년이 넘었다.
- 2년에 한 번씩 지냄. 정월에 날을 받아 월초에 지낸다(정월 10일 전에 지냄). 정월 초순에 부정이 일어나지 않을 때 일찍 제사를 진행한다. 제삿날 낮에 11시~12시 사이에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금줄을 달아 놓는다. 금줄은 왼새끼를 꼬아 문창호지를 끼워 놓는다.
- 제사비용
마을 집집마다 쌀 한 되, 돈 2만 원씩 추렴한다. 여기서 살다가 나갔다가 설에 온 이들은 소지를 올려달라고 1만 원씩 낸다. 류희자씨도 올해 1만 원씩 내서 가족들의 소지를 모두 올렸다.
- 제관
제사에 참여하는 축관, 유사, 당주, 심부름꾼을 선정한다. 마을 사람 중에 생기복덕을 가려 나이가 맞는 사람으로 뽑는다. 섣달 그믐날에 당주부터 뽑는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된다. 과거에는 한문을 잘 아는 마을 어른이 직접 생기복덕을 가려 뽑았으나, 현재는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가정2리 류연오씨가 봐주고 있다. 류연오씨가 날태기, 제관선정, 축 쓰기도 맡고 있다. 제관으로 뽑힌 이들의 경우 부부의 궁합도 고려한다. 박화순씨는 4년 전에 축관을 한 번했다.
- 제물에 사용하는 돼지의 경우 항상 수퇘지(숫총각돼지)를 사용한다. 예전에는 각 집에서 키우는 돼지 중에 실한 놈으로 골랐다. 제물용 돼지로 선택되면 주민들은 선선히 내놓는다. 류희자씨도 자신이 기른 돼지를 제물로 보낸 적이 있다. 한번은 희철네 돼지가 제물로 뽑혔는데, 자신이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꼬챙이만 들고 이끄는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제당 길로 갔다. 제사 심부름꾼이 아침에 해당 집으로 돼지를 가지러 온다. 돼지는 꼭 산 돼지를 데리고 가서 제당 앞 개울가에서 잡는다. 큰 가마를 걸어 국을 끓이고 제사 후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다들 음복한다. 돼지는 머리만 사용한다. 과거에는 소머리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소를 사용할 때에도 황소머리를 사용한다. 이는 남신이기 때문에 수컷을 쓴다고 한다.
- 제사음식을 장만하는 사람을 당주라고 한다. 당주를 도와주는 심부름꾼(사인군)을 너댓 명을 붙인다. 당주의 집에는 금줄을 하여 부정을 막고 몸가짐을 조심히 한다. 당주는 눈 속에 골을 파서 항아리에 밥을 해서 술을 만드는데 사흘이면 술이 되는데 이것을 제주로 사용한다.(이것은 술도 아니고 감주도 아니다) 당주의 부인도 함께 제수마련을 돕는다. 떡은 쌀 3되3홉으로 시루떡(백설기)을 찐다. 떡은 상,중,하 제당에 놓기 위해 3개를 한다. 메도 3개를 준비한다. 메는 냄비채로 올린다. 제기는 따로 다 마련해 놓았다. 마을 창고에 제기들을 보관 해 놓는다. 과거에는 옹기 재질의 제기를 썼으나 현재는 개량한 양은시루를 사용한다. 제물로 돼지머리(삶은 것), 떡, 메, 통북어, 과일을 놓는다. 그리고 제주로 담근 술을 사용한다.
- 제사가 진행되면 당주가 음식을 사인군을 통해 전달한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는 제관 1명과 축관 1명만 참여한다. 당주는 평복을 입어도 되지만 제관과 축관은 도포를 입고, 건을 쓴다. 당주는 음식만 만들지 제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제사는 상당부터 중당, 하당 순으로 지낸다. 일반적인 제사 진행과 유사하다. 단잔을 드리고 축을 읽는다. 3개 제당을 차례대로 지낸다. 3단까지 다 제사를 끝낸 다음에 소지를 태운다. 마을 소지→당주 소지→제관 소지→ 축관 소지→사인군 소지 그리고 나서 마을 사람들의 소지를 올린다. “이소지 일장은 춘천시 남면 가정리 어디 사는 누구인데 앞으로 사업을 하면 사업을 잘 되기, 농사 잘 되고, 자녀들 잘 크고 무고 하게 잘” 해달라고 빈다. 만약 소지를 태울 때 잘 안 오르면 다시 한다. 가끔씩 잘 안 오르는 것이 있는데, 해당 소지 주인들이 맘이 안 좋을 것을 고려해 “이것이 젖었나” 하며 다시 태워 올린다.
- 여성들은 제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일체 참여를 하지 않는다. 제사가 끝나면 음복은 전 주민이 함께 한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고기를 먹는다.
- 제사비용 결산
찬조금으로 제사 비용으로 모자란 것을 충당한다. 3리에 굵직굵직한 외부인(한화별장, 더존사장 등)이 있어 찬조금을 내기도 한다. 남는 돈은 3리 마을기금으로 넣는다. 모자르면 마을 기금에서 메운다. 구정 때니까 외부에서 명절을 새러 온 이들이 앞으로 일을 잘 되길 바라면 소지를 올려 달라 하며 찬조금을 낸다.
-개인적 치성
류희자씨의 시어머님이 쌀을 9번을 씻은 것으로 깨끗하게 메를 지어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
포천서 인삼 농사를 지으러 온 이봉삼이라는 사람은 항상 마을에 오면 산제당에 술을 놓고 치성을 드리고 간다. 얼마 전에도 막걸리 한 잔 부어 놓고 갔다. 이봉삼씨가 마을에 처음 왔을 때 개고기를 먹고 왔는데, 무서워서 산제당 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겠어서 도로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쪽집게 무당이 있어 물었더니 “그 골짜기는 난리에도 기관총이 내려오면 신령 할아버지가 휘파람을 불면 다 쫓겨 가서 그 동네 다친 사람이 없는데, 어디를 비린내를 피우고 그 앞을 가느냐고 호령을 막 하더래. 그 다음부터는 그이가 아주 개고기를 끊어버렸어. 그러니까 자기가 그걸 아니까 거기 가서 술을 부어 놓는 거야. 오면은 항상 술을 한 병 사가지고 와서 부어놓고 가. 그래야 자기가 맘이 편하대요. 한번을 여기를 왔다 가다가 그냥 갔대. 그런데 어디쯤 가다가 차가 걸려서 혼났다고, 거기를 그냥 가서 그렇다고 그 여자가 그렇다고. 아주 그이는 와서 술 부어 놓고 가면, ‘아 지당할아버지한테 술 부어놓고 가야지’ 그러고 술을 수술해서 안 먹거든”
“내가 시집왔을 때 58년 전에 마을 이서방네가 당주 할 적에 호랑이가 돌아다닌다고, 여느 사람도 그러더라고, 내가 시집오니까 할머니가 연석네 일꾼이 낭구를 베었는데, 제당에 나무 베는 걸 모르고. 그랬더니 개를 홀랑 물어다가 거기다가 놓구서 나무 구녕에다 피를 하나도 안 쏟고 그냥 올려놔버렸더래. 그래서 거기를 갈 때는 할머니가 부정하다고 (그 근처에서는) 소변도 보지 말라고. 그건 평생 안 잊어버리는데... 그래서 개를 못 먹었대요. 그리고 몇 해 후에 형님이 옥시기 많이 했잖아. 이렇게 옥시기를 갖다 두다가 낑겼는데 웬 강아지가 이 만큼씩한 강아지가 이게 아주 어디 상처도 안 나고 감쪽같이 희한하다고 그러더라고. 그 소리로 한 동안 쑹숭거리더라고. (질문자: 강아지는 어떻게 됐어요?) 옥수수 가리에서 상처 없이 감쪽같이 죽었지. 다들 희한하다고 그러더라고, 바로 제당 앞에서. 신서방네가 여기 와서 살았는데 대낮에 오줌 주러 가다가 글쎄 도로 와, 난 주고 오는데. 왜 오시냐고 물었더니, 그 지당 고서 밭을 했거든. 근데 무거워서 못 하겄다 그래서 도로 왔대. 근데 우리는 항상 지사(제사)를 져서 그러는지 거기를 들가도 절대 그런 걸 몰라요. 근데 그때 그 집에서 그렇게. 대낮에 멀쩡하게 오줌 주러 가다가 제당 앞에 (오줌통을) 놓고 왔다니까. 항상 우리는 그걸 믿어서 그런지 우리는 그런 걸 몰라요.”
- 산제당 당집은 과거 돌멩이로 만들었고 지붕은 짚풀로 돼 있었다. 평상시에는 그냥 놔두었다가 2년에 한 번씩 제사 지낼 때에 손질한다. 89년~91년도 즈음에 마을 자금이 여유가 있어 표지석을 새로 했다. 각각의 제당에 실, 한지, 북어포를 걸어둔다. 한지는 3장 정도 접는다. 한지는 예단이라고 하여 건다.
- 산신의 마을 보호
교회에서 하느님을 믿듯이, 이 마을 사람들은 산신을 믿고 잘 모신다. 산신을 잘 모셔서 가정3리는 난리 때(한국전쟁) 군인 나가서 전사한 거 빼고는 다른 주민들 모두 무과했다. 이에 대해 나이 있는 주민들은 산신령이 돌봐서 평안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가정1리와 2리의 경우 폭격으로 망가진 집들이 많았는데 3리는 일체의 폭격이나 기관총의 피해도 없었다.
- 산제당 앞 우사
산제당 근처에서는 부정한 행위를 일체하지 않았다. 현재는 우사가 지어져 있는데 이것에 대해 죄 똥이 천지인 것에 대해 주민들은 좋지 않은 견해를 갖고 있다. 우사 주인 원철이네가(원철이 57세) 암에 걸렸다.
- 예전에(2000년대 초기) 영자라는 사람이 산제당 근처에 친정집 땅이 있어서(현재 우사 자리) 수 백 마리의 닭을 키웠는데 몇 마리씩 닭이 죽다가 어느 하루 100마리씩 죽어나가는 일이 발생했다. 닭이 병이 들었을까 해서 약을 먹여보았는데도 듣지 않았다. 이상해서 어디로(무당) 가서 물어보니 “아니 그 제당이 얼마나 정갈하고 무서운 할아버지라고 그러더래. 거기다가 새 새끼를 갔다가 키우냐고 막 야단을 치더래” 그러고 와서 목욕을 하고 몸을 정갈히 한 다음에 비싸게 주고 좋은 것으로 사온 실과와 돼지를 갖고 가서 빌었다. 그 다음에는 더 이상 닭이 죽지 않았으며, 그 후로 양계장을 정리해서 나갔다.
- 재궁동 거북놀이
1984년 또는 85년도에 박화순씨가 이장을 보던 시절에 강원도민속예술제에 춘성군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가정3리의 경우 산제당 제사를 오랫동안 모셔 와서 민속놀이 참여하는 말을로 적지라고 여겨 군청 문화예술과에서 제안하여 참여하게 되었다. 제대로 시연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했으나 가정3리만으로는 부족해서 가정 1,2리도 함께 참가했다. 그리고 이 마을에 농악에서 상쇠를 하던 이가 이주해 와있어서 농악을 집어넣었고 거북놀이도 추가시켰다. 원래 산제사는 조용하게 지내는 것인데 쇼적인 요소가 부족하여 거북놀이를 넣었다. 시에서 농기구 농악기 일체를 지원해 줘서 한 달 가량 연습해서 속초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했다. 수상은 하지 못했으나 참가에 의의를 두었다. 이후에 산제사를 지낼 때 몇 번 농악을 두드리기도 했다.
<가정3리 거릿제사>
예전에는 거릿제사를 지냈으나 1970년대 이후부터 지내지 않았다. 한화제약 입구 다리에서 개울을 따라 3리 입구 논바우에서 거릿제사를 지냈다. 도로를 닦으면서 과거 길로 사용하던 곳이 폐도가 되면서 더 이상 거릿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을 군인들이 비상도로 닦았고 나중에 포장도로가 되었다. 제물로 개 한 마리를 사용한다(+ 밤, 대추를 쓰고 포는 사용하지 않음). 격년으로 음력 2월에 했다. 다시 시작하고 2번 정도 지냈다. 산제당 제사 지내는 해 2월에 지낸다. 마을에서 젊은이들이 이왕하던 것이고 교통사고 예방 차원으로 그리고 거릿제사를 지내는 게 (경제적 비용 면에서) 그리 부담스럽지 않으므로 다시 시작하자고 하여 재개했다. 거릿제사는 길을 다닐 때 안전하게 다니라는 기원으로 지냈다. 과거에 거릿제사를 지내는 자리가 과거 노인네들에 따르면 호랑이가 나타나던 곳이었다고 함. 산제사와 같은 해라서 산신당 제관들이 거릿제사까지 그대로 행한다.
<가정2리 서낭>
류희자씨 친정집(현재 류인석기념관 자리) 뒤편으로 서낭이 있었는데 서낭에 창호지 한 장 갖다 놓고 동전 서푼, 쌀 3스푼을 넣어 싸서 서낭에 메달고 서낭고사를 했다. 비릅나무인데 그게 허사가 아니다. 내가 조그만해서 정말 잊어버리지도 않아. 우리가(남동생과 옆에 친척아이와 함께) 조그마해서 그걸 펴봤어요. 펴보니까 그렇게 있어. 근데 그 동전(하얀 1전짜리 세 개)을 가지고 장난을 하다가 도로 싸서 그곳에다 놓아두었어. 그런데 그날 바로 그 저녁에 우리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나서 별안간에 아파서 죽는다고 그래. 그랬는데 미사리에서(가평 설악면 미사리) 옹기장사 한다는 사람이 애를 요렇게 업고 왔는데 그 애가 태주가 실렸대요. 근데 어저께 아침에 그렇게 했는데 그날 저녁에 아파 죽는다고 했는데 그걸 딱 보더니 서낭이 노해서 그렇다고 서낭에 서낭고사를 하래요. 서낭고사를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서낭에 밥을 놓고 빌래. 우리 할아버지가 냄비 채 밥을 갖다 놓고 빌었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그랬는데 그냥 감쪽같이 낫고 괜찮아. 난 그거 생전에 안 잊어.
* 옹기장사 엄마가 업고 온 아이가 신이 들어 이를 태주가 실렸다고 했다. “장락산 신령님이 빨리 인도해 달라”(장락산이 옹기장사가 온 가평 설악면에 있는 산이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한번은 서낭을 지나가는 길에 배가 고팠는데, 서낭에 떡 하나를 지폐에 싸 놓은 것이 있었다. ‘서낭님 이것을 먹겠습니다’ 하고 절을 3번한 뒤에 먹었는데 아무 탈이 없었다.
* 기름을 짜거나 떡 해서 오는 길이면 서낭에 조금 놓고 오던지 해야 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기름을 짜서 왔는데 그날 저녁에 두드러기가 돋는다고 난리를 하시는데, 마을에 권기창이라는 용한 사람이 있어 불렀더니 ‘에휴 서낭에 기름을 놓고 오지 그냥 오셨수?’ 그러더니만 수수밥을 짚신에 3숟갈을 해서 뒷간을 한 바퀴 돌려서 아홉 발자국을 갔다가 내버리는데, 아니 가려서 돌아간다고 홀랑 뒤집고 난리를 했는데 그거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 차 길을 닦으면서 서낭이 없어졌다.
* 갯길댁_18칸의 부자집.
<쟁골 약물터>
“내가 시집을 오니가 우리 할머니가 쟁골 약수터에 도 장관 부인이 4인규를 타고 왔다가 걸어나갔대. 그만큼 영험하다는 이야기야. 근데 거기는 내가 실지로 지나보니까 정성드려야지. 정성 안 드리면 못 가. 부정한 사람이 가면 물이 말라 있고, 그때 개경자 개그댁 아주머니가 갔는데 그때도 물에 실뱀이 날라 다녀서 못 먹었다는 거 아냐. 쪽박에서. 그리고 여기 흥구네 아버지도 갔다가 물을 몇 번을 떴는데도 실뱀이 덤벼서 못 먹었는 거 아냐. 그게 부정한 거야. 시집와서 2년 뒤에 흐르래기를 따라 갔어요 갔는데 뭐 알아 아무것도 모르고 갔었지. 가다가 보니까 바우가 이만한 게 내려다 보여. 그래서 거기 밑에를 바짝 갔어, 가보니까 처음에는 이렇게 들어앉을 하탕이 있더라구. 그러고 가운데만 네모반듯하게 짜 놓고, 고 저 구석에는 꼭 요만하게 바위가 파인 거야. 근데 요만한 종지가 세 개가 있더라고. 이제 시집오기 전부터 그 소리를 들었거든. 그런데 벼랑 간 밭 갈다가 갔으니까 어떻게, 비를 함박 먹고 볼만하지. 아우 이렇게 약물터 오다가 이렇게 오다가 잘 못 왔다고 고맙다고 절을 3번 하구서 더워죽겠는데 시원하게 하탕에서, 근데 물이 뽀애. 거기서 씻고 중탕에서 세수를 하고 고기서 절을 세 번을 하고, 물을 세 번을, 배가 고프잖아. 물을 세 컵을 종지로 다가 3컵을 먹고 그러고서는 왔는데 아무렇지도 않고 아주 좋더라구. 그리고 몇 해 후에 생리가 있는데 나무를 하러 간 거야 그런데 저 위에 있는데 이 밑에 구렁에 올라서는데 벌써 머리에 아가리를 물고 깨물듯이 아픈 거야. 생리가 있으니까 올라가지 말라는 거야. 내가 그거를 느껴 본 거야”
“도깨비 아들도 꼴 비러 갔다가 무서워서 지개도 내버리고 내려 왔다는데”(이삼순)
- 약물 상탕의 물은 아무리 퍼도 줄지 않는다.
- 선몽을 한 이가 약수터로 와서 두 내우가 7년을 거기서 살다가 갔다.
- 주민들은 이 집 두 내우가 와서 물을 망쳤다고 여김. 원래는 상탕 외에 중탕 하탕에도 물이 흘렀으나 이들이 살면서 아래로 돌을 막아놓았다.
- 가는 길이 험해서 약물터까지 가기 어렵다.
- 아랫말 동규 작은 어머니, 영규 어머니가(가평 거주) 발을 똑바로 펴지 못해 제대로 걷지 못했는데 약물터에서 물을 3번 먹고 나서 씻은 듯이 나은 경험이 있다.
- 부정한 상태로는 올라가선 안 됨. : 닭(계란 포함), 개고기 등 먹고 올라가면 안 되고. 생리하는 이, 장사집에 갔다 온 이도 안 됨. 부정한 사람이 올라가려면 까마귀가 내려와 방해한다. 그리고 가는 길에 뱀을 보면 약물터로 올라가서는 안 된다.
- 빗고개 약수
가평 하색리의 한 사람도 빗고개 약물터에 가는 길에 뱀을 보았으나 그대로 올라가 물을 먹었더니 그날로 눈이 멀었다고 한다. 무늬골에 한번 갔는데 빗고개 물 먹으러 갔는데 누가 닭을 잡아가는 것을 보고 그냥 돌아오는 사람을 만났었다. 류희자씨도 빗고개에 3번을 정성 드리러 갔다 온 적이 있다. 이 물이 아주 용하다. 이물도 탕이 상-중-하 세 탕이 있다. 서낭에 종이 한 장 깔고, 가져간 쌀을 한 줌 떠 놓고, 촛불 켜 놓고 “이 물 먹고 영험하게 낫게 해달라”하고 빌고 절 세 번하고 밥해서 먹고, 머리 감고, 나도 그 머리가 헐어서 갔어요. 머리 감고 밥해먹고 왔는데 낫더라고. 현재는 그 자리에 절이 생겼다고 한다. 가정2리 이상인씨네 큰아들이 피부염이 있었는데 빗고개 물로 효염을 보았다.
<옻물>
옻을 오른 사람이 이 물을 먹고 씼었더니 옻이 나았다고 하여 옻물이라 한다.
가정3리 마을회관 뒤편 개울가에 옻물 약수터가 있다. 남면 그리고 춘천시에서 가장 깨끗한 물이라 평가 받는다. 춘천시에서 약수터로 깨끗하게 공사해 놓았다. 시내 사람들이 물을 많이 퍼간다. 가정 3리 사람들도 퍼서 식수로 이용하고 있다. 물이 차고 물맛이 좋다.
지장산물이 나오는 물이었다. 산에서 물이 내려왔는데, 약수터를 좀 파보면 지장산골(산골)이 동실동실 떠서 몇 번을 건져 먹기도 했다. 지장쌀 알갱이처럼 노란 것이 둥실 둥실 떠다녔다. 지금은 다 파해쳐서 공구리 공사를 해 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산골을 볼 수 없다.
옻물이 매우 차가워서, 옻물을 먹다가 다른 물을 먹으면 매우 미적지근하다.
<매독을 고치는 이>
권기창이라는 사람이 가정3리에서 머물렀는데, 이 양반은 모두 고무신도 못 신을 때 꼭 하얀 운동화 또는 구두를 신고 다녔고 옥양목으로 깨끗한 흰 옷만 입고 다녔다. 이 집에서 남자들의 매독을 고쳐주었다. 오강에(놋 또는 사기) 연기를 피운다. 환자들이 이것을 깔고 앉게 한다. 하체에 연기를 쐐 준다. 권기창씨 집에서 한동안 치료하고 가면 매독이 나았다. 그렇기에 치료비는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외부에서 다양한 이들이 권기창씨를 찾아왔다.
권기창이 아는 소리를 많이 해서 여러 군데 불려 다녔다. 이 사람이 대를 잡기도 했다. 대를 붙잡고 한 번은 새처럼 싸리나무 담장을 넘어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춘천 정족리 보광사에 주지가 되었다.
* 가평의 박근배씨는 수은을 이용해 치질치료를 한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류연훈씨가 이집에서 하숙을 해서 치료하는 것을 목격했다. 권기창씨도 수은을 이용해 치료했다.
<도깨비>
마을에서 한 사람이 헛개비에 홀려 울타리를 붙잡고 해보자하며 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박화순씨는 못 먹고 헛게 보여 그런 것을 도깨비에 홀린 것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석(도깨비가 아니라 헛개비라 함).
<일생의례>
- 돌
류희자씨가 자신의 동생 돌상을 차렸을 때, 쌀, 물, 돈, 책, 실 등을 놓고 안 보이게 뚜껑을 다 덮어 놓고 돌잽이를 하는 것을 보았다. 동생이 물을 집었는데 9살에 사망했다. 류희자씨는 돌상을 차려주지 않았다. 쌀을 집으면 농사를 잘 짓는다고 여겼다.
아이의 첫 생일에 수수반대기를 하는데 제일 처음 3개를 건져서 살풀이를 한다고, 내려가는 여울 돌에 살풀이를 하는 것을 보았다. 내려가는 여울에 아무개 오늘 돌인데 일 년 열두 달 술술 물처럼 잘 크라고 살풀이를 했다. 옛날 노인네들은 꼭 했다.
-혼례-
- 대례날 신랑에게 장난 걸기
대례를 올리기 위해 신부댁으로 들어가는 신랑에게 마을 주민들이 봉지에 재를 넣어 담아 쳤다. 멍석 위에 콩을 놓고 신랑이 엎어지게 만들었다. 또는 돗자리를 잡아 당겨 신랑을 자빠뜨렸다. 짓궂은 이는 사채방에 신랑이 머무는 동안 가마 꼭대기 위에 잿봉지를 묶어 놓아 신랑이 재를 뒤집어쓰게 하기도 했다. 잿봉은 부정 타지 말라는 액막이의 의미에서 행했다.
- 우귀
신부가 시댁으로 처음 들어올 때 먼저 문안편지를 읽고, 귀신 따라오지 말라는 의미에서 신부의 머리 위로 총을 쏴서 울렸다. 문안편지는 사돈이 서로 주고받는다. 류희자씨의 문안편지는 훈장 권선생님이 써주었다. 방으로 들기 전에 솥뚜껑을 밝고 지나간다. 방으로 들어서면 하님이 일어주는 쪽으로 앉는다. 아주머니들이 신랑을 굴뚝 뒤로 데리고 가 바가지에 담겨 있는 국수를 장작개비를 젓가락으로 이용하여 먹었다. 먹는 동안 친구들이 뺏어 먹기 위해 신랑을 괴롭혔다. 류희자씨와 이삼순씨의 경우 2일 차이로 혼인해서 똑같은 하님이 수발을 해주었다.
- 초야
신방에 상이 차려져 있는데 이 위에 쌀, 물, 술, 과일 등을 뚜껑을 덮어 놓는데 신랑이 처음 열어보는 것에 따라 앞날을 점쳤다. 물을 열면 신랑의 성격이 시원하고, 쌀을 열면 좋다고 하고, 술을 열면 답답하다고 여겼다. 문창호지를 뚫어 신방을 엿보았다. 이를 신방을 지킨다라고 했다. 옛날에 모자란 신랑이 밖에서 여자를 벗겨라는 이야기를 듣고 옷을 벗기는 게 아니라 살가죽을 벗겨 신부를 살해한 일이 있어, 그 이후로 신방을 지킨다는 이야기가 있다.
- 신랑다루기
옛날에는 신랑을 심하게 달았다. 재향을 가면 친구들이 모여 신랑을 달아먹었다. 삼으로 꼬아 만든 밧줄로 신랑의 한 발을 묶어 들어 올리고, 발바닥이 아닌 복사뼈를 때렸다. “냉발이(돼지고기) 몇 쟁기, 괭이눈(약주술) 몇 동이, 원산말뚝(북어) 몇 캐” 하면서 신부댁에 음식을 요구했다. 명절 등에 사위가 처가댁에 가면 처남댁 등이 만두에 매운 고춧가루를 넣어 먹도록 장난을 치기도 했다.
-상례-
- 장사 일 수
보통 예전에는 못사는 집이 5일장, 보통은 7일장, 잘 사는 집에서는 9장을 치렀다. 이는 부고를 돌리는 시간과 술이 익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길게 장사를 치렀다.
- 사잣밥
류씨네는 사잣밥을 차리지 않아서 류희자씨는 사잣밥을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조서방네에 상이 나자 초혼을 부르기 전에 사잣밥을 해놓으라고 해서 사잣밥 차린 것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 초혼
망인의 깨끗한 적삼을 들고 나가 초혼을 부른 뒤에 지붕 위로 올린다. 초혼은 타인이 불러야 한다고 했다. 류희자씨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놋점댁 할아버지가 와서 “광주이씨 복복복” 하고 지붕으로 치 얹었다. 이때 할머니의 깨끗한 적삼을 꺼내 달라고 하여 류희자씨가 할머니의 모시 적삼을 건네주었다. 회심곡을 보면 초혼을 할 때 혼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대문간에 서서 다 듣고 서 있다고 한다.
- 상여놀이
박화순씨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일이 장사면 그 전날에 상여를 꾸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이를 ‘수비’한다고 했다. 찾아가는 집마다 담배를 주었다. 보통 친척네를 찾아갔다. 먹고 살기 힘든 곳은 가지 않았다. 상여놀이는 호상일 때만 했다. 류연훈씨도 어렸을 때 상여가 전날에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상두꾼들이 미리 상여를 조립하고 빈 상여를 들고 한 바퀴 돈다.
- 진사놀이
장인 장모가 돌아가면 맏사위를 데리고 소굴레를 짜서 시커멓게 거멍 칠을 해서 황소라 부르며 데리고 다니며 장난을 쳤다. 이렇게 해서 마구간에 들이기도 했다.
- 자리걷이
자리걷이 하는 이들은 무당에게 부탁한다.
류희자씨가 구경한 것에 따르면 내일이 발인이면 오늘 저녁에 시신 머리맡에 키에다 재를 흔들어 놓는다. 망자가 뱀이 되면 뱀이 지나간 모습이 있고, 새가 되면 새 발자국이 찍혔다.
-제례-
-제수준비
예전에는 보름 전에 엿을 고고 술을 만들었다. 정월 설에 쓸 거면 섣달 초열흘이면 술을 담글 준비를 한다. 술의 경우 자손번창의 의미에서 발효주를 사용한다. 근래에는 집에서 술을 안 만들면서 백화수복을 사서 쓴다.
그 다음에 과즐을 만든다. 한과를 만들기 위해 한 달 전에 찹쌀을 담겨 놓는다. 찹쌀 1되면 콩을 한 숟가락을 넣어 같이 빻아 가루를 만들어 반죽을 해서 쪄서 찰떡을 만들어 쏟아 방망이로 찧어, 도마에 놓고 쭉 펴서 네모 반듯반듯하게 자른다. 이것을 바짝 말리고 튀겨내어 산자를 만들었다. 말리는 것은 적당히 말려야 했다. 튀긴 것에 조청을 발라 밥풀을 붙였다. 찹쌀을 삶아 말린 다음 그것을 튀겨 밥풀로 사용했다. 그런데 근래에는 강정으로 튀겨 쓴다. 박산은 요렇게 동그란 것으로 한 입에 먹기 편한 것. 강정은 요렇게 길다란 한 것. 산자는 네모 반듯한 것. 다식은 3가지로 쌀, 까만 깨, 송화가루로 조청에 묻혀 다식 틀로 박아낸 것. 다식의 경우 쌀가루는 하얀 조청으로 만들고, 까만 깨와 송화가루는 일반 누런 조청으로 만든다. 과줄은 약과를 일컬음. 약과는 반죽해서 도마에 올려놓고 네모 반듯반듯하게 썰어서 기름에 일구면 된다. 찹쌀(기장쌀)로 해야 맛있는데 근래에는 도나스가루를 사서 사용해 맛이 덜하다. 약과의 경우 북간도댁이 둥글게 맛있게 잘 일군다.
나물의 경우 류씨 친정집에서는 3가지 나물(숙주, 고사리, 무 등을)을 쓰나, 시댁 박씨네에서는 1가지(주로 도라지나 무 사용)만 사용한다.
박씨네에서는 탕의 경우 하나는 고기 덮고, 다른 하나는 다시마를 덮는다. 2탕을 사용한다. 류씨네는 두부 덮고, 고기를 덮은 탕을 사용한다. 류연훈씨네는 단탕 사용. 탕에 들어가는 재료는 굵게 썰어 써야 자손이 굵직굵직 잘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적은 육적(돼지고기, 소고기), 계적, 어적(북어)를 사용한다. 마른 북어를 포고, 물에 담겨 불려서 머리, 꽁지를 자르고 양념해서 물에 구워 적으로 쓴다. 적은 소고기(육적)-닭(계적 또는 봉적)-북어(어적) 순으로 놓는다. 계적의 경우 배가 위로 올라오게 제껴놓고 사용. 머리는 잘라서 사용. 봉적은 병아리 많이 까서 번성하라는 의미에서 쓴다고 한다. 또는 학처럼 날아오르라는 뜻이 있다. 과거에 제사를 지내는 동안 삼헌을 진행하면서 3적을 나눠 올렸으나 요즘에는 한 번에 올려서 쓴다. 모사를 두는데 이는 모래에서 자라는 버들나무처럼 잘 퍼지라는 의미에서 사용한다. 모사에 술을 붓는다. 개울에서 판 모래를 쓰고, 물은 우물이나 개울에서 담아온 물을 사용했다.
전은 도라지 껴서 알을 씌워 부친 것(호양누르미), 고기 갈아서 계란을 씌워 부친 것(전야), 메밀로 크게 네모나게 한 것은 그냥 부치개. 미는 원래 소고기만 갈아 맛있게 뭉쳐서 계란을 예쁘게 씌워서 해야 하는데 요즘에는 두부나 햄을 써서 맛이 없다.
과일은 쓰고 싶은 거 다 쓰지만 예전에는 꼭 씨가 있는 것만 제상상에 올렸다. 대추는 씨가 한 개라서 씨를 하라는 의미에서 대추를 첫째로 친다. 자손이 번창하라는 의미에서 머루(꿀에다 재운 것)를 쓰기도 했다. 여름에는 과실이 많이 달리는 것을 이용했다. 배, 사과, 밤, 대추, 감은 꼭 사용했다. 밤은 세 톨이면 꼭 가운데 제일 큰 것만 골라 썼다. 이는 양쪽에서 보호하고 좋은 것만 사용하려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다. 대추는 사람이 십리를 가다가 하나만 먹어도 요기가 된다고 할 정도로 정말 사람에게 좋은 음식이라고 하여 제사상에서도 처음에 놓인다. 배의 속이 간장의 약이라고 했다.
어물로 북어를 포로 쓰고, 자반으로 조기 자반을 놓거나 민물고기 큰 거를 잡아 놓기도 했다. 보통 비늘이 있는 눈치를 사용하기도 했다. 제사상에는 꼭 자손을 생각해서 비늘이 있는 어물을 사용했다. 비늘을 자손이라 간주했다. 오징어는 포로 사용하지 않음. 뼈가 없다고 하여 절대 사용하지 않음.
김치의 경우 고춧가루를 안 쓴 빨갛지 않은 물김치를 쓴다. 나물도 새빨갛게 하면 예전 노인들이 자손이 독하다고 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사에는 고사리가 아닌 고비를 사용한다. 고비는 한 움큼씩 나와서 쓰는 건데, 지금은 그 뜻도 모르고 외대로 하나씩 나오는 고사리나물을 쓰기도 한다. 고사리 외에 숙주나물 무채나물을 세 가지 나물로 쓴다. 아무리 제수 준비를 못하더라도 포로 쓰는 북어와 감주(식혜)는 꼭 마련한다. 그 외 간장, 김치, 나물을 준비했다. 차례의 경우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 기제사보다 제수를 많이 마련한다.
갱물은 마셔서 처리한다. 이것을 마시면 무서움을 안탄다는 말이 있다. 제사상의 식혜의 경우 경기하는(놀라는) 사람이 있음 마시게 했다. 식혜의 경우 밥알들이 동동 뜨듯이 자손의 번창의 의미도 있다.
*한 사람이 3년상 동안 상식에 올라간 메밥만 먹으면 골이 빈다고 했다. 조상이 분명히 제물을 운감을 한다고 한다. 3년 동안 조석상식을 올릴 경우 사용한 메를 다른 것과 섞어 먹으라고 했다. 조상이 운감하는 것도 산사람과 같아 탕국 메를 가장 정성 드려 해야 한다. 제수 준비는 정성이 최고이다.
-제사 전 금기
제사가 가까워지면 장사집에 가지 않고,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제삿날에는 빨래를 하지 않는다.
“오늘이 제사라 그러면 머리도 안 감고, 빨래도 안하고, 애들도 안 나물라요. 그날을 조상이 살은 날로 지내기 때문에 부모가 돌아가기 전에 조용하게 지키고 앉았는 날이어서 일절 큰소리 안 나게 해요. 그 뜻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아주 가만히 지키고 있기 때문에 일절 애들이 무얼 망가뜨려도 나무라지 않아요. 그리고 그 이튿날 파제사잖아 그날은 돌아간 날이잖아요, 부모가 돌아간 날이라서 아무 말 없이 조용하게 지내라는 말이야. 예전에 노인네들이 그러더라구요. 나는 그전에 울 동상이 무얼 해서 깨뜨렸는데 그날에는 아주 못 본 척하고 아무소리도 안 하더라구”
그 이튿날도 조상이 돌아가신 날 바지사날이기 때문에 조심히 있는다.
- 강신
제사 지내기 전에 조상님들이 들어오시라고 대문을 열어 놓고 아무리 추워도 방문을 다 열어놓았다. 그리고 한 시간 전에 불을 켜 놓았다. 과거에는 광숯불 또는 난포불을 켜 대문밖에 걸어두었다.
- 곡제사
축을 읽을 때 곡을 하며 제사를 지냈다.
- 철상 후
철상을 한 뒤에도 한참이 지난 다음에 불을 꼈다.
제사 지낸 다음에 메밥을 높이 올려놓아야 자손이 높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탕국, 북어를 높이 올려놓았다. 밥을 땅에다 놓으면 자손이 기어 들어간다고 했다.
축과 지방은 손안에서 살라 소각한다.
-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집안에 병환이 있거나 초상이 나거나 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불을 켜서 제사날 밤을 새운다. 제사를 안 지내게 되면 꿈에 조상님이 보인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고 하여 꿈에서 머라 그러지는 않고 그냥 나타날 뿐이다. 류희자씨의 경우 큰 아이가 수술을 앞두고 있어 시부모님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자 그날에 어머님 아버님이 꿈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작은 아이가 집안에 불화가 있어서 죽으려고 약을 먹었는데 류희자씨 부부는 멀리 떨어져 있어 몰랐는데 그날 꿈에 시부모님 두 분이 보였다. 그러더니 밤 1시에 전화가 와서 약을 먹었다고 그래서 병원에 가보니 수면제를 50알을 먹었는데 다행히 그 50알을 다 꺼냈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류희자씨는 조상님들이 돌봐주었다고 생각했다.
- 생신제
돌아가시고 5년 정도 챙겨드리고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생신날 아침에 묘소에 가서 주과포를 놓고 절을 한다. 요즘에는 거의 생신제를 하지 않는다.
- 명절 제사 : 설과 추석
- 시제(상주박씨네)
가정리에는 박씨네 조상이 없어서 춘천 신북 지내리 선산이 있어서 거기로 가서 시제를 지내고 그리고 가평 하색리에도 선산이 있어 거기에서도 제사를 지낸다. * 동생 류희수씨의 6번에 걸쳐 12번의 절을 올린다.
* 가정리는 대개 류씨네 식을 따라 제사를 지내고 있음.
<세시풍속>
- 정월
설에는 차례를 지냄. 떡국 사용. 떡국은 만두, 떡 순으로 고명을 얹는다.
고조, 증조, 조부, 부모 식으로 단설한다. 떡국, 포, 시저, 잔, 탕을 바꾼다.
세배는 항렬 순으로 그리고 아들-딸- 손자들 순으로 한다. 형제들 간에도 세배를 하는데 맞절한다. 새해에 아무쪼록 건강하고 복 많이 받으라고 덕담해 준다. 학생들은 공부 잘 하고 건강하라고 말하고 세배돈을 준다. 동네 이웃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데, 젊은 축은 아직도 세배를 다닌다.
차례가 끝난 뒤에 성묘를 간다. 주과포를 가져가 술을 드리고 절하고 내려온다. 눈이 오더라도 치우고 간다.
설빔은 과거에는 며칠 밤을 새서 만들어 입혔다. 설이라고 새 옷 해주느랴 힘들었다.
예전에는 설날에 윷놀이 등의 여러 가지 놀이를 했다. 시집왔을 때 보니까 시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탈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장난을 치고 그랬다. 물동이에다 바가지를 엎어 놓고 물장난도 치고 아주 처음에 오니까 구락아주머니가 우리 친정에서 못 봤는데, (아주머니들이) 영감님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춤을 추고 모여 앉았는데 물동이를 떠서 바가지 장구를 치고 놀이를 하셨다(= 물박장단). 이때 종지놀음을 했다. 여자들이 다 앉으면 뒤로 종지를 돌린다. 게임의 룰은 수건돌리기와 같다. 자신의 뒤에 있는 종지를 찾지 못하면 노래를 해야 했다. 종지를 갖고 있는 이가 술래이다. 종지를 돌릴 때 종지 못 찾는 사람은 노래하기다하며 게임을 시작했다. 한 방에 앉을 틈도 없이 여자들이 꽉 찼다. 여자들은 정월 초 나흘 닷새부터 보름까지 이렇게 놀았다. 보름날이나 귀신날에는 특히 일을 안 해서 이때는 편하게 놀 수 있었다. 여자들은 초나흘이 되어야 남의 집에 갈 수 있었다. 정월 초부터 여자가 나다니면 방자하다고 했다.
정초에서 보름사이에 윷놀이를 많이 있다. 이외 널뛰기도 했다.
정초에 복 많이 받으라는 의미에서 주고받았다. 복조리는 돈, 성냥을 함께 넣어 두었다. 성냥은 재산이 불처럼 일어나라고 하여, 복조리 장사가 아예 서냥과 함께 팔았다.
설 근처에는 엿을 과서 까만 깨, 들깨, 콩을 볶아 강정을 해서 간식으로 먹기도 했다. 콩엿을 고았는데, 엿은 보통 쌀이 귀해 옥수수, 수수로 고았다. 술도 옥수수로 하면 노란 기름이 둥둥 떠다녔다.
14일에는 여름날이라고 하여 낭구 9짐을 하고 9그릇의 밥을 먹으라고 했다. 여자들은 삼을 9광주리 삼으라고 했다. 오곡밥을 해먹었다. 찹쌀, 보리쌀, 콩, 수수쌀, 멥쌀 등을 넣어 밥을 한다. 오곡밥은 건강하라고 해 먹었다. 시집와서 보니 시할머니가 오곡밥을 하면 한 그릇을 퍼다 장독간에 두고 용왕님이 이거 오곡밥 운감하시라고 했다. 오곡밥은 집집이 돌아가며 먹었다. 제일 먼저 오곡밥을 한 사람에게는 ‘혼자 일꾼 다 얻는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시아버님이 꼭 회관 사람들 먹인다고 밥을 일찍 하라고 하셨다. 여름날은 저녁을 일찍 해먹는 날로, 아침에는 만둣국을 끓여먹고, 점심에 오곡밥을 해먹었다. 이날에 하는 만두는 선만두라고 했다. 저녁때 아이들이 집집들을 돌며 오곡밥을 얻으러 다녔다. 이날에 여름을 나라고 하여 8가지 나물을 해서 먹었다.
정월 보름 전날에 귀신을 쫒는 예방으로 엄나무를 걸었다.
잣불로 신수점 보기_열나흘날에 잣불을 바늘에 키면서 일 년 열두 달 나이는 몇 살인데 365일 과년 하루 더 한달 더 들면 윤달을 추가하였다. 그렇게 해서 바늘에 잣을 끼워 불을 밝히면 옆에서 할아버지가 축원을 해주었다. 잣불이 잘 켜지면 좋다고 여겼다. 조용히 타면 조금 아프다고 여겼다. 당시 5형제 모두 잣불을 태웠는데 류희자씨 포함 3명은 조용히 탔고, 다른 2명의 동생의 경우 잣불이 타지 않아 다시 했는데도 또 잘 타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해 3월에 형제들이 모두 홍역에 걸렸는데 잣불이 타지 않은 동생 2명이 홍역으로 사망했다. 실에 잣을 하나 끼우면서 “몇 살 인데 일 년 신수점을 밝힙니다. 미련한 인간이 12달 365일 ...” 등으로 축원하면서 불을 붙인다. 잘 타는 거는 기름이 뚝뚝 떨어지면 잘 탄다. 친정에서는 했지만 시집와서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여름날에 더위팔기를 했다. 이날에 제일 먼저 보는 사람에게 내 더위 사가라고 했다.
부자집의 기운을 얻어 온다고 하여 그 집의 흙을 얻어 와서 집의 둘레에 부었다. 14일에는 쥐날 콩 볶아 먹기를 했다. 마을에 한 집이 일본인에게 사망한 적이 있었는데 이 집은 콩 대신 팥을 볶았다.
보름날은 가을날이라고 하여 황새알로(제일 먼저 물을 뜬 는 것) 밥을 해먹어야 한다고 했다. 가을날에는 송편을 해먹었다. 가을날에 하는 만두는 볏섬만두라고 했다. 만두와 송편을 크지막하게 만들었다. 이것을 섬만두, 섬떡이라고 했다. 이는 가을에 농사가 잘되기를 바래 크게 만들었다. 가장 먼저 온 이는 자신이 제일 먼저 왔다 갔다는 표시를 해 놓고 온다. 당시 집 앞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4집이 함께 먹었다. 15일 새벽이면 서로 먼저 물을 뜨려고 노력했다.
달맞이_저릅을 자신의 나이대로 엮어주어 들고 돌리면서 달맞이를 했다. 달을 잘 보기 위해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관솔을 넣으면 불이 잘 꺼지지 않았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할라고 12살이면 12매, 9살이면 9매 엮어 주었다. 저릅이 없으면 수수깡, 삐앙대, 닥나무로 대신했다. 저릅과 수수깡이 젤 잘 탄다. (저릅을 또는 다른 것) 빌미를 남기지 않고 다 태워야 좋다고 했다. 이것은 달맞이 액막이로 행했다. “달맞이 후워 불알 떼먹어”(류연훈) 또는 “몇 살 먹은 아무개가 훨훨 날아가게 해 주십시오”, “아무개 몇 살 먹은 게 건강하게 해주십오”고 하기도 했다.
보름날에는 개 보름 새기라 하여 개를 하루 굶긴다. 류희자씨 경험에도 보름날 아침에 밥을 한 번 주면 희한하게도 개웠다(토했다). 열나흘날 실컷 먹게 주고 보름날에는 달 보기 전에는 밥을 주지 않았다.
정월 14,15일에는 맨발로 나가지 말라고 했다. 만약 맨발로 나가게 되면 “까치눈 튼다” 발가락 사이가 터진다고 했다.
부럼깨물기_14,15일 양일에 깨문다. 14,15일에는 부럼 깨물고 나서 울타리를 두드리며 새 쫓기를 한다. 그리고 양일에 귀밝이술을 먹게 했다.
한 50년 전에 아랫말 웃말 대항 줄다리를 한 적이 있었는데 2번 밖에 하지 않았다. 동아줄을 매우 크게 틀었다. 서로 이겨라, 이겨라 외쳐댔다.
귀신날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일을 하게 되면 음식이 티 또는 벌거지가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있어 절대 못하게 했다. 바느질도 하지 않았다.
귀신날에는 체를 대문 밖에 걸고 면화(목화씨), 고춧가루, 소금을 화로에 놓고 태운다. 이때 엄나무를 갖다 꽂고, 신발도 실내로 들여 놓는다. 체는 귀신이 들어왔다가 체의 구멍을 세다가 날이 새우게 하기 위해서 걸어두었다. 신발은 신어보고 피를 떨구고 가면 신발 주인이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어 실내로 감추었다. 목화씨와 고춧가루는 그 태우는 냄새가 심해 귀신이 오다가도 피해서 간다고 했다. 이 목화씨가 사흘까지 탔다. 석유가 귀할 때 산초기름, 목화기름은 그으름도 없이 밝고 잘 탄다. 부시럼 나는 사람이 산초기름으로 부침을 해먹으면 효험이 있다고 했다.
정월 보름 안에 안태고사를 한다. 성주(상기둥), 터주(뒷터), 지석(웃방 기둥) 신을 모셨다. 터주에는 터줏가리를 씌워 놓았다. 시루떡, 정화수, 북어, 실을 제물로 사용했다.
* 건립/안택_농악대가 집집을 돌았는데 이를 건립이라기보다 안택한다고 했다. 안택할 때는 쌀과 술을 상에 갖다 놓고 한 바탕 놀아주는 것에 대한 보답을 했다. 모든 집을 찾아가지는 않고 더러더러 잘 사는 집 위주고 갔다. 대개 신작로를 따라 움직였다.
* 서낭에서 말제사를 지냈다.
* 간장 담그기_간장은 꼭 정월달에 담근다. 1월 담그면 간장에 소금도 덜 들어가고, 좋다고 꼭 말날에 담갔다. 말날도 갑오날과 경오날이 있는데 이중에 갑오날에 했다. 말이 항상 건강하다고 하여 말처럼 간장도 항상 좋으라는 뜻에서 말날에 했다. 장을 담글 때에는 부정 탄다고 하여 솔가지를 꺾어 항아리에 둘러 매 놓았다. 숯을 빨갛게 달궈 항아리 안에 놓았다. 이렇게 하면 장이 부글부글 끓는데 맛이 변함없으라고 이렇게 했다.
-2월
2월 초하루날에 부지런한 사람들은 낭구를 가렸다. 아침에 일꾼들 불러서 밥을 해 먹였다. 낭구를 가린다는 것은 산림감수가 지켜서 낭구를 해오는 게 힘들었다. 부지런한 사람은 낭구갈이 갈으면서 섬떡해서 청년들이 다해서 먹었다. 이를 머슴날이라고 했다. 과거에는 꼭 떡을 해서 일꾼들을 위했다.
입춘에 입춘첩 = 입춘대길을 쓴다. 이것은 입춘시에 맞춰 붙였다. 류희자씨 댁에서는 절에서 써 오신걸 붙였는데, 친정 할아버지는 직접 써서 붙였다. 이날에 ‘노래기’(?_벌레 또는 빈대 같음)를 글씨를 써서 ‘소꼬천리’라 하며 서까래 끝에 거꾸로 달았는데 이후에는 노래기가 없어졌다. 입춘에 부적걸이를 한다. 부적걸이는 입춘시에 맞춰 한다. 받은 시간에 따라 달리 한다.
입춘 아침에 보리피를 뽑으면 묵은삭뿌리인데 저녁때 피를 뽑으면 햇뿌리가 하얗게 3뿌리가 내리면 보리가 대풍년이 들것이라 예상했다. 이를 보리점치기라 함.
보리밟기_겨울에 보리가 가라앉으라고 보리밟기를 한다. 그래야 뿌리가 딱 붙는다.
- 3,4월
3월 3일 삼짇날에는 제비가 나오는 날로, 제사를 지냈다. 삼질제사라 하여 산에서 지냈다. 과거에는 3월3일(또는 한식), 9월 9일에는 절사를 꼭 지냈다. 제비가 처음 오는 걸 보고 제비가 온다고 그러면 좋지 않다고 하여 제비를 보면 인사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이날에 뱀도 나온다. 이날에 도마뱀을 먼저 보면 몸이 가벼우나 긴 뱀을 먼저 보면 몸이 무겁다고 했다.
한식에 여전에는 절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사초를 함. 한식은 청명이자 한식이라 꼭 가서 성묘하고, 사초를 했다. 한식에는 찬밥을 먹는데, 이는 봄을 맞이하기 위해 앞으로 더위를 먹지 않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한다.
과일나무 장가들이기를 한다. 특히 대추나무 장가들이기를 꼭 했다. 이날에 일어나서 말을 하지 않고 바로 대추에 돌을 끼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을 대추나무 장가들인다고 했다. 이것은 대추의 풍년을 바라는 행위였다.
경칩에는 개구리가 집으로 들어오면서 드러누워 있으면 사람이 죽고(자기 신세가 편안치 않아 긴병이 들어 죽는다_몸에 진동이 든다), 앉아서 지고 들어오면 풍년이 들고, 앞에서 이렇게 들면 흉년이 든다고 했다. 개구리 처음 듣는 날을 경첩이라 한다.
* 흙 벽 바르기_손 없는 날에 집을 고치기 시작한다.
곡우_곡우날에 비가 오면 땅이 석자석치가 탄다고, 가문다 했다. 그래서 곡우날에는 비가 오지 말아야 했다. 곡우 전에는 아무 나물을 뜯어 먹어도 탈이 없으나 곡우 지나면 나물에 독성이 생긴다고 했다.
볍씨 담그기_날보고 일진이 좋은 날에 볍씨를 담근다. 보통 갑오날 이런 날에 주로 한다. 예전 노인네들은 꼭 일진을 봐서 볍씨를 담갔다.
4월초파일_느티나무 잎을 빻은 것에 쌀을 섞어 떡을 해서 먹었다. = 느티나무떡. 느티나무는 항상 건강하다고 하여, 느티나무 떡을 해서 애들한테 주었다. 류희자씨의 경우 불자여서 절(발산2리 태평사)에 다닌다. 태평사는 생긴지 15년 정도 됐다. 절에 다닌 지는 20년 정도 되었다.
* 태평사는 나라를 항상 위하고 있다. 특히 나라의 통일을 기원한다. 절의 전 둘레를 태극기를 달아서 행사를 하기도 함. 전에는 청룡사였는데 선몽을 한 뒤에 태평사로 이름을 바꿨다. 큰 가마솥을 해서 그 위에 약사부처님을 해 갖다 붙여놓았다. 발산리가 밥그릇 발자여서 그렇게 해 놓았다고 한다. 부처님 선몽한 뒤로부터 환자의 환부를 정확히 알아맞힌다. 스님이 지압과 뜸으로 환자를 고쳐주기도 한다. 특히 골이 아픈 사람들을 잘 고쳐서 골박사라고 한다.
-5월
단오가 가까워지면(4월 그믐께부터) 그네를 크게 매 단다. 남정네들이 큰 밤나무에 걸어두었다. 여자들은 서로 높게 뛰기 경연을 했다. 3리에도 3,4개를 매두었다. 그네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사람들을 내려다보기 위해 뛰었다. 옛말에 따르면 춘향이가 이도령을 보기 위해 뛰었다는 소리가 있었다.
5월 단오 아침, 식전 약쑥을 뜯어와 엮어 달아 왔다. 이것을 그늘에 말렸다. 베이거나 생채기가 난데는 약쑥을 이용해 치료해 주었다. 아이를 낳으면 좌욕으로 약쑥을 해주었다.
창포물로 머리를 감았다.
식전 상추의 이술을 받아 분을 개서 얼굴에 바르면 좋다고 했다. 이렇게 하면 버짐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취를 캐다가 수리취떡을 해 먹는다. 이것을 해먹으면 더위도 안 먹고 여름에 건강하라는 의미에서 해서 먹었다.
문창호지로 크게 부채를 만들고 난을 그려서 대청에 달아 놓았다. 이렇게 하면 바람에 따라 부채가 펄럭 거리며 바람이 오고갔다. 임금님도 신하들에게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라고 부채를 선물했다.
하지날에는 꼭 “감자가 하지래요, 감자하지니 꼭 감자 불알 떼야지 그러고서 한 솥을 캐다가 쪄 먹는 거에요” 이날 처음 감자를 캤다. 지금은 하지 되면 감자를 다 캐낸다.
- 6월
6월 2일은 좀삵날이라고 했다. “조마생이가 북두칠성이에요. 삼태성이는 북두칠성이 일곱이에요. 초엿새날이면 달이 빨리 봐야 해요. 조마생이가 이 만큼 떨어져서 가면, 조마생이 학생이면 삼태성이는 박광주리래요. 그래서 조마생이가 밥 얻어먹으러 가는데 천천히 가도 실컫 얻어 먹는다 그러고 요만큼 떨어져 가면 그게 맞는 거고 풍년이 드는 거고, 이게 바짝 쫒아 가면 밥이 적으니까 바짝 쫒아간대. 그래서 조마생이 보는 날은 노인네들이 꼭 그걸 보고 이야기를 하더라고. 바짝 쫒아 가면 흉년이 들고, 너무 멀리도 아니고 요만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으면 풍년 든다고. 그게 그 뜻이야. 다른 날은 안보여도 그날에 보면. 항상 칠성이 달을 앞서 가요 근데 그날은 뒤에서 가요. 지금도 그날에는 그걸 본다고”
6월 6일 유두에는 별로 한 것은 없었다.
6월 보름 즈음에 삼거리에서 환자의 머리카락을 넣고 태워서 경을 외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것은 ‘할 줄 아는’ 복술이나 점쟁이(마을에서 정만용가 점을 쳤었다)를 시켰다.
-7월
칠석_맷돌에 밀을 갈아 논에 밀부치기를 해놓고 농사 잘되라고 기름내 쐬고, 무쥐 쏠지 않게(쥐가 벼를 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전에는 꼭 이렇게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벌써 그전에 우리 아버님은 10리 밖에 논이 있었는데 오시면 칠석 전에 “기름내를 빨리 쐐야 하는데 칠석날에 얼른 가서 해야지” 하셨다. 당시에는 부침이 귀해서 얻어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칠성고사를 지냈다. 백설기를 시루 채 쪄서 장독대에 갖다 놓고 정화수 하나를 놓고 비손한다. 칠석고사는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했다. 요즘에는 칠석을 안 챙기며 절에서나 칠석기도를 한다.
복_고기 먹고 놀았다. 상복에 말금(거미)을 병에 잡아다 놓았다가 헌데 나는데 발랐다. 그리고 복마다 비가 오면 기름기가 없어서 사람이 먹은 기운이 없고, 복마다 비가 안 오면 조금 먹어도 사람이 영양가가 있다고 했다.(곡식에 영양가가 없다는 뜻)
복날이면 미나리폭포(복희안)에 가서 물놀이를 갔다. 거기는 아무리 더워도 물이 차다. 예전에는 기껐 먹는 게 닭이었다. 이제야 개고기 돼지고기를 먹는다. 복놀이는 꼭 했다. 복에 고기를 안 먹으면 골이 빈다고 했다.
호미씻기_김을 다 메고, 칠석까지 김을 못 맨 사람은 밥을 빌어 먹는다고 했다. 칠석에는 호미를 씻는다고 죄 모여 천렵을 했다. 가래울버덩(한화별장 쪽)에 모여 씻고 먹고 놀았다.
백중(7월 보름)_집에서는 안하고 절에서는 한다. 거지가 백중날은 다 차려줘서 먹는데요. 절에서 백중날 제사를 지내면 우리내 조상 중에서도 집에 못 들어오고 떠도는 이들이 얻어먹는 데요. 그래서 백중제사래요. 조상 중에 떠돌이 조상이 있으면 절에서 백중제사를 지낸다.
벌초_7월 20일 안으로 다 한다. 그믐 안으로 다 한다. 요즘에는 추석날 당일에 하는 이들도 있다. 산소에 오면 조상님께 왔다고 술 한 잔 부어 놓고 벌초한다.
-8월
추석_차례 지내고 성묘 갔다 온다. 이날에는 햇과일, 햇곡, 송편을 쓴다. 송편은 반달 모양으로 빚는다. 송편의 소로 밤, 고구마, 팥, 콩, 대추를 쓴다. 햇곡식이 아니면 그냥 묵은 곡식으로 차린다.
8월 추석 전후로 국화꽃 같은 거 서리 안 맞고 그런 것을 말려서 차로 달여 먹거나 술에 담그는 것을 했다. 머리가 맑으라고 베개 속으로 넣기도 했다.
-9월
9월 9일 중양에는 구렁이뱀이 들어간다고 했다. 과거에는 이때 절사를 지냈으나 근래에는 하지 않는다. 구절초를 뜯어다 다려 먹으면 여자들은 냉이 없어진다고 했다.
* 요즘에 농촌에서 추수를 끝내고 관광을 간다. 보통 봄에 모내고 나서 그리고 가을에 단풍놀이를 간다. 가정리의 경우 회를 먹으러 속초나 서해안 쪽으로 간다. 만약 좀 더 늦게 가면 김장 전에 새우젓 관광을 가기도 한다.
- 10월
10월 상달에는 10월에 텃고사를 한다(또는 1월). 마구간, 대문간, 대문간이 수문장이라고 놓고, 소 잘되라고 마구에 놓고, 웃물은 용황님이라고 하고, 터에는 터주, 제석 성주 등. 텃고사 하는 사람은 다 그렇게 해요. 떡이나 부침개를 해당 장소에 잠시 가져다 놓았다. 류희자씨는 아직도 안택도사를 한다. 3리에서는 노인회장집과 류희자씨네 2집만 가을떡을 한다. 요즘에는 떡집에서 떡을 해서 한다. 그전에는 발 방아에 쪄서 했다. 빨간 팥을 써서 부정 타지 말라고 하여 빨간 팥으로 시루떡을 한다.
초가집 지붕 잇기_초가집일 때 지붕 잇는 날을 받아 사람들을 얻어서 했다. 지붕을 다 해 얹으면 음식을 잘 해서(닭 잡고) 대접해 먹인다. 지붕 잇기 전에 며칠 이엉을 잇는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저녁에 모여 이었다.
10월 20날 = 손돌멩이 날은 추워서 뱃사공이 얼어 죽은 날이라고 하여 손돌멩이 추위라고 했다. 예전에 배 삯 제방을 하면 동지 이후면 쌀을 한 되 더 주었다.
김장_대개 10월에 김장을 했다. 과거에는 입동 전에 했지만 현재는 입동 뒤에도 했다. 김치냉장고가 있어 아무 때나 해도 된다. 과거 김장을 1년 농사라고 할 정도로 중요했다. 달랑무, 깎두기, 배추김치, 동치미 등을 했다. 동네 아녀자들이 모여서 한 집씩 했다.
-11월
동지는 애가 원래 병덩어리인데, 이 아이가 팥죽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옛날 부자집은 팥죽을 써서 지붕이나 온 집에 팥죽을 발랐다. 그래서 동지팥죽은 병덩어리가 오지 말라는 그 뜻이라고 함.
애동지는 초순에 드는 것이고, 노동지는 늦게 드는 것이다. 중간에 드는 건 중동지라 한다. 초순에 들면 초동지라 하여 팥죽을 하지 않았다. 애동지는 팥죽을 안 쑤어먹고, 노동지에 해 먹는다. 팥죽을 할 때는 찹쌀 옹심이를 해서 넣었다. 류희자씨는 팥죽을 쓰면 집 귀퉁이 마다 팥죽을 발랐다. 팥죽은 동치미와 함께 먹는다. 오후 5시쯤 팥죽과 술 한 잔을 놓고 동치 차례를 지냈다.
* 얼기 전에 마지막 비가 올 때 삽을 대고 고기를 잡았다. 가정 1,2리는 꽤 했으나, 가정3리는 물이 얕아서 잘 하지 않는다. 가정1,2리는 아직도 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섣달
과거 친정에 있었을 때 섣달 그믐날이면 집안을 대청소하고, 목욕하고 새옷으로 갈아입고 사당에 지직을 깔고서 묵은세배를 꼭 했다. 그런데 시집와서는 박씨네에서는 안 했다. 마을 어른신들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섣달 그믐날에는 자지 않고 밥을 새운다. 이는 한해를 보내고 좋은 새해를 맞기 위해 자지 않고 새운다고 했다. 노인네들은 이때 그냥 자면 눈썹이 새하얗게 된다고 했다. 자는 아이한테 밀가루를 붙여주고 눈썹 쉬었다고 놀렸다.
12월에는 남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아야 했다. 못 갚으면(품을 못 갚으면) 섣달 그믐날에 가서 떡 지개를 쳐야 했다고 한다. = 종일 떡매라도 쳐 주어야 했다. 종일 떡 쳐주는 것이 힘들었다.
새잡기_그물을 쳐 놓고 참새를 잡았다. 과거 초가집일 때 참새들이 구멍 속에 들어가 있으면 횃불로 해서 새를 잡았다. 물고기 잡던 삽을 좁게 해서 구멍에 넣어서 잡기도 했다. 생총아(활총아)라고 하여 그것을 거꾸로 엎어놓고 새가 걸리게 했다. 창애, 지창을 이용하기도 했다. 비둘기가 새끼 2마리밖에 까지 않는다고 하여 예전 노인네들은 절대 애들한테 비둘기 고기를 주지 않았다.
고드름이 조 이삭이라고 하여, 아이들이 고드름을 못 따게 했다. 고드름을 따면 조 이삭이 안 된다고 하여 못 따게 했다.
-윤달
윤달에는 아무거나 해도 탈이 없다고 하여 수의를 만들거나, 이사, 사초, 이장(밀레장사) 등을 했다. 하지만 혼인은 하지 않았다. 수의를 미리 만들어 놓으면 오래 산다고 했다.
* 달 부르기
매달 14일 저녁때 콩자루를 우물가에 갖다 놓는데, 보름날에 저녁때 꺼내 보는데 콩이 안 부르면 그 달은 비가 안 오고 부르면 그 달은 비가 온다. 이것을 달 부르기 한다고 했다. * 고시레_떡을 해다가 논 밭에 조금 떼다 “고시레”라고 내버리고 온다. 류희자씨 조부에 따르면 원래는 고시레가 아니라 고씨네하고 불렀던 것이라 했다.
* 썩은달_6월 ,12월에 썩은달이라고 하여 혼인하는 것을 피하였다. 섣달은 마지막 가는 달이라서 그러고 6월은 덥고 비가 많이 와서 그렇다. 그리고 양가 부모가 결혼한 달은 비껴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