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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화의 역사
미술사적으로 민화는 통상 조선시대 전통회화의 영향을 토대로 일반 서민들 사이에 유행하던
소박한 예술을 지칭한다.
그러나 자료가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은 확실한 것이 우리의 민화이다. 또한 조선시대를 민화가 시작된 거점으로 함은 이 당시 가장 왕성한 제작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비록 병화(兵火)와 전란(戰亂), 약탈(掠奪)로 인한 소실(燒失)이 커 남아 있는 작품만으론 기껏해야 3백여 년에 머무르지만 여러 가지 고문(古文)이나 현장을 기초로 넓혀보면 그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일예로 울주(蔚州)의 청동기(靑銅器) 암벽화(巖壁畵),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그림이나 백제전(百濟塼)에 부조(浮彫)된 물과 구름, 바위나 나무의 뜻과 모양은 훗날 조선 왕조의 민화와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후 신라 토기(土器)에서, 그리고 고구려 자기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과 문양(文樣)에서도 조선왕조 시대의 가구나 그림, 도자기에 남아 있는 민화와 비슷한 모양들이 수없이 나온다.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걸어 놓았던 충신 그림이나 선박(船舶)은 물론 전각(殿閣) 등에 한국식 색깔로 단청(丹靑)한 것도 민화의 성격과 정체성을 담보로 한다.
그만큼 민화는 우리와 가까웠으며 역사가 장구(長久)함을 증명하고 있음이다.
1) 고구려시대
고려 후기의 삼국유사에서 나오는 솔거가 그린 황룡사 벽에 그린 단군의 초상화는 분명한 민화적 소재이다.
처용성화(處容說話)에서 처용의 화상을 문설주에 붙이면 역신이 들어오지 못할것 이라는 대목은 고대부터 벽사를 위한 그림을 대문에 붙이던 풍습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러한 풍습은 조선 말기까지 금강신장, 별신마마 등그림을 붙이던 풍습까지 이어졌다.
또한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중심으로 풍속적인 요소들이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안악 3호분을 비롯하여 덕흥리 고분, 무용총, 각저총 등 4세기 후반에서 6세기경에 제작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계세사상(繼世思想) 등을 배경으로 행렬도·수렵도·전투도·무용도·투기도. 곡예도
불공도와 당시의 생활과 직결된 부엌,· 방앗간,· 푸줏간,· 마구간,·외양간 등의 정경이 많이 그려졌다. 인물들은 주로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하여 힘찬 필치로 그려져 고구려 회화 특유의 동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복식이나 각종 기물(器物)들도 충실히 묘사되어 풍속인물화의 발전과정뿐만 아니라 당시의 복식사·. 생활사·. 풍습사 등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풍속적인 요소는 7세기에 이르러 도교의 유행으로 사신도(四神圖)와 신선도 계열의 그림들이 성행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중기까지 지속되었다.
한국 회화사에서 풍속화적인 요소가 다시 대두된 것은 고려 후기부터이다.
이 시기에는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와 같은 불교회화의 하단부분에 소를 몰아 밭을 갈고, 벼를 베고 타작하는 농경장면이 묘사되었으며, 궁정 풍속화인 의종야연도(毅宗夜宴圖)와 사대부들의 풍속을 담은 태위공기우도(太尉公騎牛圖), 해동기로회도(海東耆老會圖), 원암연집도 (元岩腸集圖), (독곡산보도(獨谷散步圖)등이 그려졌다.
그리고 서민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근로의 모습을 주제로 한 민생도류(民生圖類) 풍속화의 선구적 의의를 지니는 무일도(無逸圖)와 빈풍도(豳風圖)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를 통해 형성된 풍속화의 전통은 조선 초기로 계승되어 더욱 다양하게 발전했다.7) 산신, 무속에서 나오는 천왕, 지신, 무덤주인공의 부부초상 등은 민화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후기의 사신도 양식은 공주의 송산리(宋山里)고분과 부여의 능산리(陵山里)고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백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에도 수락암동(水落岩洞) 1호분에서처럼 사신도가 12지신상과 함께 다루어졌고, 석관에 조각되는 등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 왕릉의 내부 장식과 민화의 소재로서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2) 백제민화
백제시대의 민화는 거의 찾아볼수 없으나 민화를 소재로 제작된 백제의 산수문전(山水文塼)8)과
백제금동향로(百濟金銅大香爐)9)가 민화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산수문전은 보물 제 343-1호로서 구워 만든 벽돌로 이들 문양전은 모두 산수문전(山水紋塼)과
산수봉황문전(山水鳳凰紋塼), 산수귀문전(山水鬼紋塼), 연대귀문전(蓮臺鬼紋塼), 연화문전(蓮花紋塼), 와운문전(渦雲紋塼), 봉황문전(鳳凰紋塼), 반룡문전(蟠龍紋塼) 등 8매로 경질의 점토로 틀에서 찍은 것이다. 이 중 산수문전은 암반(巖盤)과 암벽을 전경(前景)으로 하고, 그 뒤에는 삼봉으로 이루어진 연산(連山)이 첩첩이 들어서 있다. 산봉우리마다 소나무 숲이 서 있고 산 위의 하늘에는 서운(瑞雲)이 흐르고 있다.
근경(近景)에 나타난 암벽 뒤의 산중턱에 지붕에 치미가 있는 건물이 있고, 오른편 암반 위에는 이 집을 향해서 걸어가는 한 인물이 표현되어 있는 7세기 백제의 산수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외 7점도 모두 같은 크기의 것으로 봉황, 반룡, 와운, 연화귀(鬼), 산수귀(山水鬼), 산수봉황을 주제로 정교하게 제작하였다.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2.5cm이며 용 모양의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져 있는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있는 향로 뚜껑, 뚜껑 위의 봉황 장식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황과 향로 뚜껑은 하나의 주물로 제작되어 있어, 제작 과정에서 세 개의 주물 틀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로 본체의 가운데 테두리의 구름 문양 아래에는 연꽃이 핀 연못이 있고, 그 위인 뚜껑에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들이 있다.
이 산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으로 보이는 사람들, 호랑이, 사자, 원숭이, 멧돼지, 코끼리, 낙타 등 많은 동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곳곳에 폭포, 나무, 불꽃 무늬, 귀면상 등이 있다. 제단 모양으로 꾸며진 정상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춤추고 있고, 그 아래에는 5악사가 있는데 이들은 소, 피리, 비파, 북, 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그 주위의 다섯 봉우리에는 각각 기러기로 보이는 새가 봉황과 함께 춤추는 형상이 있다. 향로의 몸체에는 연꽃이 있는데 그 위에 각가지 새와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또 한쪽에는 무예를 하는 인물도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발가락이 다섯 개 있는 용이 위의 연꽃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 용틀임을 하고 있다.10)
7) 김철순, 한국민화 논고,서울예경,1995. p184
8) 산수문전(山水文塼) / 보물 제 343호 / 백제시대
9) 백제 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 국보 287 / 백제시대
10) 서정록, 백제금동대향로, 2001년, 도서출판 학고재
3) 신라의 민화
조선시대 조속(趙涑,1595-1668)이 김알지 탄생신화를 소재로 그린 그림, 금궤도(金櫃圖)는
계림고사도(鷄林故事圖)라고도 하는데 이 그림은 인조(1623-1649)의 어제(御製)가 포함된 그림 속 글에 의하면 왕명에 따라 조속이 그린 것으로 돼 있다.
모란꽃은 꽃 중에 왕이라 하여 화중왕(花中王이)라 하며 부귀영화와 행복을 준다 하여 부귀화(富貴花)라고도 한다.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모란도에는 다른 그림과는 달리 나비를 넣지 않는 특징이 있다. 다른 꽃처럼 향기가 있는 모란꽃에는 삼국유사에 신라의 27대 왕이었던 선덕여왕의 일화가 담겨있다.
당나라 태종이 비단과 모란도를 보내왔는데 모란도에는 나비나 벌이 없으므로서 향기가 없는 꽃으로 표현 했는데 태종이 선덕여왕의 남편이 없음을 비웃는 뜻으로 해석 되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에 왕이 모란을 감상한 기록이나 모란꽃이 피는 것을 길조로 기록한 것이 있다.
4) 조선시대
민화는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의 주택사(住宅史)의 발달과 생활문화에 따라 다양한 계층에서 폭넓게 활용되고 발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창기의 민화는 집안의 장식이나 행운, 벽사를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실용성(實用性)이 강한 그림이었다.
그린 이는 무명(無名)에서부터 전문적인 화원들이 그린 것까지 화자의 범위도 상당히 넓다.
지금의 초등학생이 그렸을 법한 그림으로부터 구 호암미술관이나 서울역사박물관 등에서나 접할 수 있는 명작에 이르기까지 그 질(質)도 천차만별이다. 종류도 다양해 무속, 도교적 민화라든가 불교적 민화, 윤리와 도덕을 강조한 유교 계통의 민화, 그리고 「인물(人物)」이나「산수(山水)」, 「화훼」, 「화조(花鳥)」 등을 그린 장식용 민화까지 그 폭도상당히 넓다.
17~18세기에 이르러 민화는 그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게 되어 여러 가지 종류의 민화가 제작되어 민화에 있어서 그 전성기를 형성하였다. 문인의 세계 속의 편안함과 민속적인 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까닭에 민화는 주거공간의 장식에 필수적 요소로 등장함으로서 집중적으로 그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진경산수와 더불어 조선후기 회화에서 가장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풍속화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이미 조선 초기와 중기의 각종 계회도(契會圖)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도 있겠으나, 속화라고 불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역시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후기 화원들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잠시 19세기 후반의 정치적 격동과 함께 회화 역시 위축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의 회화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중국을 통한 서양 화법의 전래와 수용이다.
명암법과 원근법 및 투시도법이 특징인 서양법은 청조에서 활약한 서양 신부들에 의해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는 연경을 오고가는 사행원 들의 손을 거쳐 전래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김두량, 이희영, 박제가 등의 일부 18세기 화가들이 수용하기 시작한 서양화법은 그 후에도 화원들에 의해 궁궐의 의궤도(儀軌圖)나 민화의 책꽂이 그림 등에도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 화가들이 수용한 서양화법은 오늘날의 유화와는 달리 한국적 소재를 명암이나 요철법 또는 투시도법을 가미하여 다룬 수묵화의 한 가지이다.이 화법은 널리 유행하지 못했다가 이러한 기법을 응용한 대표적인 것이 민화의 한 형식인 <책가도> 이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에 무르익어 19세기 전반기까지 계속되었으나 조선 말기로 편년되는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민화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민화라는 용어로 부른 것은 일본 민속화의 일종인 오오쓰에(おおつえ)11), 에마(えま)12)의 연장선상에서 보아 민화의 범주를 창의성보다 실용성이 강조되고 조선의 이름 없는 떠돌이 화가 또는 아무나 본을 떠서 몇 장씩 되풀이 하여 옮겨 그리는 그림이 민화의 의미요, 성격이라 규정하였다.
당시의 국내 화가들조차 그러한 편견으로 한국 회화의 전통성을 주장하는 동양화와 새로운 기법을 묘사했던 서양화의 화법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무시되었다가 최근 20세기에 와서 학계와 일반인들의 관심 속에 활발하게 제 조명되기 시작했다.
11) 오오쓰에 / おおつえ [大津絵]
(江戸えど 시대, 近江国おうみのくに大津おおつ에서 팔리기 시작한) 먹으로 휘갈겨 그린 그림. 《처음에는 불화(佛畵), 후에는 주로 토속화(土俗畵)·희화(戱畵)로 바뀌었음》
12) 에마 / えま [絵馬]
발원(發願)할 때나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그 사례로 신사(神社)나 절에 말 대신 봉납하는, 말 그림의 액자. 《나중에는 말 이외의 그림이나 글씨를 쓴 것도 있었음》
첫댓글 결코 짧지 않은 민화의 역사를 들여다 봅니다.
감사해요..^
민화사랑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민화라는 단어만 알고 있었는데 민화 역사에 대해 잘 배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 합니다
혹시 궁금하신점 있으시면 아는 한 답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