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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선교장(船橋莊)>
1)
선교장은 조선 시대 상류주택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궁궐밖 살림집으로서는 규모가 전국 최대라 한다. 이름도 선교장(船橋莊)이다. 장은 직접 물품을 생산하여 자족하는 형태를 가진 경우에 사용하는 이름이다.
거기에 지역 부호가 가지고 있는 재력의 위력과 예술 향유 후원 및 지역민들 속에서 만들어지는 신화가 그 가치를 더 높여주고 있다. 선교장이 갖는 공간적 의미를 다른 전통마을과 비교하며 생각해본다.
전주 한옥마을은 1900년대 이후 집장사들이 지어 팔았던 집들로 이루어진 마을이어서 전형적이고 역사적인 한옥을 찾기는 힘들다. 최근에는 매우 상업화되어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좋은 점은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실제적 생활공간이라는 점이다. 최다의 관광객을 끌어모아 전통공간에 대한 친화력과 이해수준을 높이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최근 관광객들의 한복 착용이 유행하면서 사라져가는 전통 생활문화인 주택과 의복이 짝을 지어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이로 인해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초래하는 것은 부수적인 효과이다.
서울의 북촌한옥마을의 경우도 비슷하다. 조선조 왕족과 상층의 거주공간으로 일부 솟을대문이 있는 상층 가옥이 30여채 정도 남아있었으나, 이후 일제 말기, 혹은 6.25후에 계속 생겨나서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이곳은 상업화되지 않은 거주민들의 생활공간이므로, 소위 침묵관광을 해야 한다.
곳곳에 소음금지 및 시청에 대응을 촉구하는 항의문이 걸려 있다. 가옥은 모두 사적 공간이므로 내부 구조 등을 보러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거대하고 화려한 한옥이 이루고 있는 마을 분위기와 골목은 그 자체로 이전 상층 주거지역의 분위기를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간혹 찻집으로 문을 연 곳에서 살짝 북촌의 분위기에 젖어볼 수 있어 조금 위로가 된다.
안동 하회마을은 전통성과 역사성에 있어서 참 놀라운 공간이다. 마을 전체의 분위기는 놀랍지만 중심적인 건물인 양진당이나 충효당의 규모는 이보다 작으며 위상 자체도 이와 다르다. 풍산 유씨의 집성촌으로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있는 것도 원인일 것으로 생각된다.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은 현재형 생활공간으로 보이는데, 하회마을보다 마을 사람들이 더 친화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여기도 선교장같은 가옥은 보이지 않는다. 둘 다 관광지로 알려지면서 생활공간의 의미는 전보다 약화된 거 같다.
아산 외암리민속마을은 양동마을과 비슷하다. 번듯한 기와집들은 개인 생활가옥으로 문을 닫아 놓은 경우가 많고, 그 규모도 크지 않다. 여전히 주민의 주거 공간이면서, 전통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서울과 멀지 않아서 영화의 단골촬영지다.
선교장은 위의 여러 민속마을이나, 초가 위주의 순천 낙안읍성처럼 마을 속의 주택이 아니라 딱 한집으로 이루어진 온전성을 갖는 점이 특별하다. 그러면서 전주한옥마을이나 북촌과 달리 전통적이고 300년 역사의 무게는 그대로 갖고 있다.
거기다 경포대와 뒷산과 어우러지는 배산임수의 풍수지형이 그 자체로 압도적인 풍광을 자랑한다. 서울과의 거리에 비례하여 갖는 독자적인 지역색과 그래서 갖게 되는 자족적인 왕궁과 같은 독립성은 어떤 마을이나 집안도 가지지 못하는 독점적인 장점을 갖고 있다.
상층 양반집이면서 강릉지역의 특성을 가진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공간으로 최고의 문화재가 되어 있다. 실제로 그 크기만 해도 현존 살림집 한옥 중에서는 가장 큰 집으로 하인들이 살던 집까지 치면 300칸에 이르고 본채만 해도 102칸이라는 집이다.
한복처럼 한옥도 언젠가부터 우리 생활영역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전국민의 50% 이상이 아파트에 산 지 오래고, 나머지도 전통 한옥에 사는 경우는 드물다. 한옥은 이제 일상에서 벗어나 한복처럼 특별한 경우, 특별한 때나 접하고 구경하는 예외적인 공간이 되어 버렸다.
선교장의 외별당에는 아직 후손이 산다. 그래서 이쪽은 공개되지 않는다. 이곳을 제외한 모든 공간, 즉 본채와 한옥스테이가 이루어지는 공간 및 전시공간 등은 모두 공개되고 있다. 생활공간이면서 공공의 공간인 이중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 상업성에만 맡기지 않는 인간의 기운이 느껴져 좋다.
이런 지방에서 마을 배경 없이 혼자서 덩그마니 대저택을 이루고 있는 이유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선교장은 구경은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다.
처음 이 집에 와 본 건 20년 전쯤이었던 거 같다. 그때의 충격이 지금도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시간이 없어서 대강 봤지만 충격의 강도를 줄이지 못했다. 이런 집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옛날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이번 재방문은 오랜 동안의 숙원이었다. 다시 봐서 반갑고, 그 동안 퇴락했을 고가가 품위를 잃지 않게 더욱 잘 다듬어놓은 정성이 고마울 따름이다.
방문일 : 2020.7.10.
입장료 : 성인 5,000원(이제는 입장료도 받는다.)
2) 강릉선교장은 효령대군의 후손 이내번(李乃蕃, 1692~1781)이 충주에서 강릉으로 이거하여 이곳에 안주하면서 순차적으로 후손들에 의해 가내 여러 건물이 증축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선교장의 이름에는 여러 설이 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12Km), '배타고 건넌다'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했는데, 여기서 선교(船橋), 배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선교장 안내문에는 집앞이 바로 경포호여서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녀서 선교장이라 한다고 했다.
합리성만 따지면 전자가 더 신뢰도가 높다. 배를 연결하여 놓는 배다리는 임금 정도 되어야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싶어서다.
또 다른 설은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하게 해서 선교장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집터가 길고 유선형 모양인 것이 배와 비슷하기도 하다.
모두 배와 관련이 있다. 경포호라는 아름답고 큰 호수 곁에 있고 배다리 마을에 있는 집이다보니 이와 관련된 이름이 붙은 거 같다. 이처럼 여러 각편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니나 다를까, 이 집은 소유지가 하도 넓어서 한때는 북쪽으로 주문진, 남쪽으로 울진까지 이어졌다 한다. 그러니 이 지역 사람들 상당수가 선교장의 소작인이 아니었겠는가. 만석꾼 지주네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많았겠는가.
이런 설화적 접근은 1대 이내번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배경에서도 나타난다. 집지을 터를 찾아다니던 이내번이 산 속에서 족제비 무리를 만났는데, 떼지어 날던 족제비가 한 곳에 이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곳이 바로 이곳, 배다리골이다.
족제비는 구비문학대계에서도 복을 가져다 주는 동물로 묘사하고 있다. 민간에 길한 동물로 인식되고 있다는 건데, 실제로도 쥐나 뱀을 잡아먹으므로 보호해야 할 동물로 알려져 있다. 이내번 족제비 집터 설화는 대표적인 족제비 설화로 보인다.
선교장(船橋莊)의 '장'은 장원의 줄임말이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선교장은 안채, 사랑채, 동별당, 서별당, 사당, 정자, 행랑채를 골고루 갖춘 사대부 상류주택의 대표적인 집이다. 본채 밖으로 연못이 정방형으로 꾸며져 있고 정자 활래정(活來亭)이 있다.
최근에는 여러 채의 건물이 추가로 건축되어 박물관, 생활유물전시관 및 한옥 숙소로 쓰이고 있다. 선교장 구역 밖으로는 한식집이 있고, 안쪽으로는 카페와 목공방이 있다. 카페는 한옥에 내부는 널직하고 트여 있어 선교장이 그대로 보여 전망이 좋다. 커피맛도 좋다.
3)
외국의 전통마을은 프랑스의 아름다운 마을, 핀란드의 헬싱키 옆 00마을 등이 기억된다. 고성에 딸린 마을은 많이 들러볼 수 있지만, 전통마을만의 구경은 쉽지 않다.
들러본 프랑스의 아름다운마을은 리옹에서 멀지 않은 페루즈마을이었다. 이곳은 전란을 피해 외지고 높은 지대로 이전해와서 고립되어 살다보니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게 된 곳이다. 여전히 아름답지만, 관광객 위주의 마을로 바뀌어서 관광철이 아니면 마을이 고즈넉하게 폐허의 느낌이 난다.
핀란드 헬싱키 근교의 마을은 아름답고 그대로 생활공간이었으나 건물이 오래되지 않았고, 전통적인 느낌은 별로 나지 않는 마을이었다. 쓰던 물건을 내놓고 파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전통주택을 박물관으로 만들어놓은 것이 흥미로웠다. 길지 않은 역사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주민들의 노력이 느껴진다.
이태리 베네치아도 사실 그런 공간이다.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발달한 무역기지가 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물가에 형성된 마을이다. 그 때문에 확보한 교통의 편의성과 상업적 이점이 물자의 풍요로움을 가져와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고,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룬 지역의 자산이 그대로 관광자원이 되었다.
베니스는 <동방견문록>의 마르코 폴로의 고장이고, 섹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의 유대인 수전노 셔일록의 고장이다. 금전과 교통이라는 지역의 특성을 이 두 작품과 인물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유럽의 많은 도시가 전통마을을 안 가진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전통마을을 잘 보존하고 있지만,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베니스일 것이다. 수세기 동안 이루어진 다양한 건축양식의 건물들은 훌륭한 유물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역사적 예술적인 민간 저택도 450여채가 남아 있는 곳이다.
오염과 침수 때문에 훼손되어가는 베네치아를 구하자는 움직임이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요즘은 오버투어리즘으로 생활공간이 침해당하며 밀려나는 고통을 거주자들이 호소하고 있어 관광지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지역이 되었다 .
생활공간과 관광공간을 겸하는 전통마을들이 모두 외국의 사례를 눈여겨봄직하다. 아울러 관광객도 우리의 전통마을이나 고가가 갖는 의미와 향후 지향점을 함께 생각해보아야 한다.
선교장 자료를 보면 한결같이 서로 중복되는 내용과 감탄이 주를 이루고, 정작 국내 다른 마을과의 비교나 해외 유사 지역과의 비교를 통해 의미를 따져보는 글은 찾기 어렵다. 어떤 문화적 현상이든지 비교를 통해서만 그 의미를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이런 글을 쓰기에는 문외한이지만, 선교장의 의미를 너른 시각에서 찾아보고자 과용을 부려 시도해본다. 이 글이 전문가가 제대로 된 글을 써주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영광이겠다.
전통마을은 어디서나 대개 생활공간, 상업공간, 전시공간의 의미를 갖지만 조화를 이루기가 어려운 거 같다. 더구나 생활공간은 관광공간과 완전 상충되는 의미를 갖는다. 어떻게 이 세가지 요소가 조화를 이루면서 역사적 의미를 현재적 의미로 바꾸어 놓을 것인지 선교장이 보다 본격적으로 고민해주면 좋겠다.
선교장은 왼쪽 영역만 개방하면서 입구 쪽의 여러 건물은 숙박용 건물로 사용하고 있고, 오른쪽 외별당 공간은 생활공간으로 개방하지 않고 있다. 이 정도면 현재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 아닌가 한다.
4) 구경하기
오른쪽 공간은 외별당이다. 선교장 장주의 후손이 지금도 기거하고 있는 사적인 공간이어서 개방하지 않고 있다.
신선이 기거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선교유거’(仙嶠幽居)란 현판이 걸려 있는 솟을대문으로 이 집의 정문이다.
‘선교’(仙嶠)는 이백의 시에 나오는 구절로 신선의 산을 가리킨다. . 이백(李白)의 〈송하감귀사명응제(送賀監歸四明應制)〉에 “이슬 머금은 요대엔 성신이 가득하고 허공에 뜬 선교엔 도서가 아스라하네.〔瑤臺含露星辰滿 仙嶠浮空島嶼微〕”라고 하였다.
‘선교’(仙嶠)는 집 이름 선교장과 같은 발음이어서 중국어나 한문에서 자주 사용하는 해음이라는 언어유희를 활용하여 이미지를 빌려오고 확대하는 수법이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보자. 집이 하도 커서 문만 12개라는 집이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도 겹겹이 문이 또 대기하고 있다.
솟을 대문을 넘어 또 작은 문을 지나면 사랑채, 행랑채, 안채 등에 이른다.
*행랑채. 행랑채 규모를 보면 얼마나 큰 살림을 꾸렸는지 알 수 있다. 행랑이 죽 연결되어 있어 줄행랑이라고 했다. 손이 오는 경우에도 이곳에서 묵었다.손님의 신분이나 중요도에 따라 묵는 곳을 달리 배치했다.
*서별당. 서고 겸 공부방, 혹은 할머니의 거처로 사용된 집
*서별당 앞 연지당, 집안 내 홀로 된 여인들이 거처하던 곳. 앞마당은 '받재마당'이라 하여 안채로 반입되던 물건을 확인하던 곳.
*동별당. 선교장 주인의 거처. ‘오은고택’(鰲隱古宅) 현판이 걸려 있다. 오은은 이내번의 손자 이후(李后)의 호이다. 이후는 열화당, 활래정을 지었다. 글씨는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선교장에 머물다가 썼다.
현판 아래 마루 밑 작은 문이 보인다. 아궁이로 들어서는 문이다. 하인이 이 문 안으로 들어가 좁은 공간에서 불을 땠다.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의 거리는 어디서나 멀기만 하다.
*동별당 내부
*안채주옥. 동별당과 기역자로 연결되어 같은 마당을 쓴다. 1703년 이내번이 이곳에 정착한 후 처음으로 지은 건물이다. 이후 30여채의 건물이 10대에 걸쳐 증축되었다.
이곳은 종부의 거처다.
*안채주옥 내부
사랑채 열화당. 1815년에 지어진 건물. 앞에 덧대어진 보첨은 선교장에 머물렀던 러시아 공사관원의 선물로 우리 살림집의 전통적인 모습은 아니다.
선교장은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관동팔경과 금강산 구경을 하기 위해 묵어갔던 곳이다. 그중 학식이 높고 귀한 상층 손님을 묵게 한 곳이 이곳이다. 요즘은 매주 음악회가 열린다. 손님을 위한 숙소로는 행랑채도 쓰였다.
열화당(悅話堂)은 이내번의 손자 오은 이후가 건립한 사랑채다.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가져왔다.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 즐기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근심을 떨치리라'라는 구절에서 가져와 친척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근심을 없앤다는 의미로 열화당을 당호로 정했다.
그런데 열화당이라는 이름이 매우 낯익다. 바로 출판사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미술 분야의 책을 비롯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책을 많이 발간했다. 2004년에는 파주 신사옥으로 이전하면서 열화당책박물관을 열어 동서양 양서 4만여 권을 전시하고 있다.
열화당을 운영하는 이기웅 사장이 바로 이 선교장 후손이다.
열화당은 그 자체가 도서관이자 출판사였다. 장서가 1만권이 넘었고, 족보도 문집도 찍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이기웅이 선대의 뜻을 이어 출판사를 건립(1971)한 것이다.
*활래정. 1816년에 이후에 의해 건립되었다. 주자의「관서유감(觀書有感)」 중 '문거나득청여허, 위유원두활수래(問渠那得淸如許,爲有源頭活水來·연못의 물이 이리도 맑은 것은 근원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오는 까닭일세)에서 따온 말이다.
활래정의 물은 서쪽 태장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곳 연못으로 들어오고 경포호수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활수는 흐르는 물, 살아 있는 물이니 맑은 물이 계속 흘러 들어오는 정자라는 말이겠다.
활래정은 정방형 연못가에 있다. 연못 가운데는 소나무가 있는, 역시 정방형의 작은 섬이 있다. 연못에는 연이 가득하니 그야말로 연당이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과 흡사한데, 부용정의 연못에는 이만큼 연이 많지 않다. 사람의 흔적이 더 많이 닿아서인지 활래정이 훨씬 그윽한 느낌이 난다.
활래정 안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이 이곳에 들러 담소를 나누었을까.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등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보고자 했던 당대 유명 인사는 아마 다 다녀간 듯하다. 이들이 써준 편액을 위해 선교장은 전문으로 액자를 표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활래정은 여섯 개의 편액이 있어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편액을 볼 수 있다. 물론 모두 정병조 등 당대 유명 인사가 쓴 것들이다.
활래정은 건축가의 눈으로 보면 두 채의 벽을 붙여 지은 쌍둥이 건물이라 한다. 지세가 약한 것을 보완하려는 풍수상의 이유에서다. 자연과 합일하며, 자연을 보완하고, 건물은 자연으로 지원받는 우리의 오랜 건축 미학이 정점을 이룬 경우다.
활래정으로 통하는 월하문. 퇴고의 고사를 낳은 가도의 당시 ‘제이응유거(題李凝幽居) 한 구절에서 온 이름이다. 이름을 빌려온 그 시는 월하문(月下門) 기둥에 ‘조숙지변수’(鳥宿池邊樹: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들고), ‘승고월하문’(僧鼓月下門: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 대련으로 붙어 있다.
달빛 아래 찾아오는 늦은 손님도 마음대로 들어오라는 말이렸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 있는 집이다.
강원도 최고의 만석꾼으로 오는 손 꺼리지 않아 손을 위한 소반만 300개가 넘었다는 집이다. 손을 위한 식량도 마음도 풍족하여 묵고 떠나는 손을 위해 옷까지 지어줬다는 인심, 덕분에 지역민들과 잘 조화를 이루며 현재까지 품격도 평화도 잃지 않는 집이다.
강릉의 자산을 넘어 한국의 자산, 모두의 자산이다.
#강릉선교장 #강릉가볼만한곳 #활래정 #열화당 #강원도만석꾼 #사대부고가
2023.2.23.재방문
열화당
활래정
박물관
첫댓글 지난 일요일 당진에 내려와 머물고 있습니다. 오전 8시 큰딸 직장에 데려다주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재밌게 읽었습니다. 공력이 많이 들어간 글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동서와 남북을 아우르는 비교 고찰은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경지입니다. 연경선생만이 쓸 수 있는 여행 답사기라 하겠습니다.
긍정적으로 봐주시며 턱없는 글에도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이야말로 깊은 동양적 식견을 여행기에 담아 풀어내시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저야 가볍게 여기저기 보고, 함께 비교하며 생각하려는 시도일 뿐이지만, 선생님의 깊은 식견은 보다 더 의미있는 여행기를 그려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선 당진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