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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제덕산계정주」 조식
[ 題德山溪亭柱 曹植 ]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청컨대 천석 종을 보라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어찌하면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이 울려도 오히려 울지 않을 수 있을까?
〈감상〉
이 시는 덕산 계정의 기둥에 쓴 것으로, 남명(南冥)의 높은 기상을 보여 준 대표적인 시이다.
십이만 근이나 되는 종은 매우 크기 때문에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거대한 종은 물론 남명 자신에 대한 비유이기도 함).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어떠한 상황에도 천석의 종처럼 의연함을 지키고 싶다는 자신의 이상을 의미함)?
이 시에 대해 『상촌잡록(象村雜錄)』에는 “조남명(曹南溟)의 이름은 식(植)이고, 자는 건중(楗中)이다.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천길 절벽(絶壁)에 선 듯한 기상이 있었다. 숨어 살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짓는 데에도 기위(奇偉)하고 속되지 않았으니, ······와 같은 시는 시운(詩韻)이 호장(豪壯)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부함도 얕지 않다(曺南溟名植(조남명명식) 字楗中(자건중) 尙節義(상절의) 有壁立千仞之氣(유벽립천인지기) 隱遯不任(은둔불임) 爲文章(위문장) 亦奇偉不凡(역기위불범) 如請看千石鍾(여청간천석종) 非大叩無聲(비대고무성) 萬古天王峯(만고천왕봉)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不徒詩韻豪壯(불도시운호장) 亦自負不淺也(역자부불천야))”라 평하고 있다.
그리고 『성호사설』에서는, “남명 조 선생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는데, 한낱 낮은 벼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병이 나서 급하므로 감사가 장계를 올려 아뢰자, 어의를 보내어 약을 가지고 가서 간호하게 하였고, 급기야 작고하자 특별한 예로 대사간(大司諫)을 증직하였다. 그를 예우함이 이토록 극진하였으니 한 세상을 풍동(風動)할 만하다. 진실로 그런 분이 아니었다면 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고인(古人)의 언행(言行)·인격(人格)을 논한 사람들이 모두 벽립만인(壁立萬仞,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왕공목태위(王公目太尉) 암암청치(巖巖淸峙) 벽립천인(壁立千仞)’이라는 것이 보임. 절벽이 만 길이나 된다는 뜻으로 즉 사람의 기개를 비유함)으로 공을 지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그의 「뇌룡명(雷龍銘)」·「계복명(鷄伏銘)」을 보고서 그 사람됨을 상상해 보았거니와, 또 그의 시에, ‘청간천석종(請看千石鍾) 비대고무성(非大叩無聲) 만고천왕봉(萬古天王峯)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이라 하였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역량과 기백인가? 비록 퇴계(退溪)의 일월춘풍(一月春風, 주광정(朱光庭)이 처음 정명도(程明道)에게 배우고 돌아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한 달을 봄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 하였음)과는 비교해 논할 수 없겠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심첨(心瞻)이 저절로 부풀게 한다.”라는 평이 실려 있다.
〈주석〉
〖石〗 섬(120근) 석, 〖扣〗 두드리다 구, 〖爭〗 어찌 쟁
각주
1 조식(曺植, 1501, 연산군 7~1572, 선조 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함.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처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사직 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정구(鄭逑) 등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61세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宣祖)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우음」 송한필
[ 偶吟 宋翰弼 ]
花開作日雨(화개작일우)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花落今朝風(화락금조풍) 오늘 아침 바람에 그 꽃이 지는구나
可憐一春事(가련일춘사) 애달프다, 한철 봄이
往來風雨中(왕래풍우중) 비바람 속에 왔다 가누나
〈감상〉
이 시는 우연히 읊은 것으로, 인간의 무상함을 절감하는 시이다.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오늘 아침 바람이 불자 금방 그 꽃이 지고 말았다. 애달프게도 봄의 온갖 보람이 비바람 치는 속에서 잠시 왔다가 간다.
여기서의 꽃은 청춘이나 목적을 이루었을 때요, 바람은 그 달성한 것을 잃게 하는 요소, 즉 귀양살이나 가문에서 오는 한계일 것이다. 어제 얻은 목적이 오늘 아침 바로 잃게 되었으니, 인간의 삶이란 이렇게 잠시 왔다가 가는 봄과 같으니, 애달픈 것이다.
이 시에 대해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운곡 송한필의 ······습재 권벽(權擘)의 ‘비 내려 꽃이 피고 바람 불어 꽃이 지니, 봄 가고 가을 오기 그 가운데 있구나. 어젯밤 바람 불고 비 내리더니, 배꽃은 만발하고 살구꽃은 사라졌네.’ 두 시는 가진 뜻은 일맥상통하지만, 제각기 다른 풍치를 가지고 있다(雲谷宋漢弼詩(운곡송한필시) ······ 權習齋詩曰(권습재시왈) 花開因雨落因風(화개인우락인풍) 春去秋來在此中(춘거추래재차중) 昨夜有風兼有雨(작야유풍겸유우) 梨花滿發杏花空(이화만발행화공) 意則一串(의칙일관) 而各有風致(이각유풍치)).”라 언급하고 있다.
각주
1 송한필(宋翰弼, ?~?):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장가.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계응(季鷹), 호는 운곡(雲谷). 송익필(宋翼弼)의 동생으로, 신분상의 제약을 크게 받다가 아버지 대부터 양민 노릇을 하였다. 그의 형 익필은 이이(李珥)를 시종 옹호하였는데, 소장사류(小壯士類)들은 이이(李珥)가 동서분쟁에 중립적 태도를 취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신진사류를 옹호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으로 익필을 심의겸(沈義謙)의 당(黨)으로 지칭하고, 이이(李珥)에 대한 함원(含怨)을 동인(東人)들이 익필에게 전가하여 1589년(선조 22)에 일족을 노예로 환천(還賤)시켰다. 그리하여 일족이 유리분산(遊離分散)되는 비극을 당하였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 길이 없지만, 그는 형 익필과 함께 선조 때의 성리학자요 문장가로 이름이 있었다. 이이(李珥)는 성리(性理)의 학을 토론할 만한 사람은 익필 형제뿐이라고 하였다.
「남산팔영」 정이오
[ 南山八詠 鄭以五 ]
「雲橫北闕(운횡북궐)」
玉葉橫金闕(옥엽횡금궐) 옥빛 구름은 금빛 대궐에 비껴 있고
朱甍照碧天(주맹조벽천) 붉은 지붕은 푸른 하늘에 빛나네
丁東傳促漏(정동전촉루) 똑똑 급한 물시계 소리 들려오는데
戌北釀霏煙(술북양비연) 북쪽에서는 안개가 뭉게뭉게 일어나네
佳氣晴相擁(가기청상옹) 아름다운 기운 갠 날 서로 둘렀는데
高標望更連(고표망갱연) 높은 기상 바라보니 다시 잇따랐네
南山將獻壽(남산장헌수) 남산 같은 높은 복을 우리 임금께 드리니
穆穆萬斯年(목목만사년) 오래오래 만년을 누리소서
〈감상〉
이 시는 남산(南山)에 대해 읊은 8수 가운데 첫 번째 시로, 구름이 대궐에 비껴 있는 것에 대해 노래하면서 새 왕조에 대한 송축(頌祝)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옥빛 같은 구름이 대궐에 비껴 있고, 높이 솟은 대궐의 붉은 지붕이 푸른 하늘에서 빛난다(금(金)과 벽(碧)의 색채(色彩) 대비(對比)가 선명함). 물시계 소리가 똑똑 급하게 들려오는데, 북쪽으로 안개가 뭉게뭉게 일어나고 있다. 맑게 갠 날, 아름다운 기운이 대궐 주변으로 둘러 있는데, 높은 기상이 연이어 있다. 저 남산 같은 높은 복을 우리 임금님께 드리니, 우리 임금님께서는 오래오래 만수무강(萬壽無疆)하십시오.
〈주석〉
〖玉葉(옥엽)〗 채색 구름. 〖甍〗 용마루 맹, 〖丁東(정동)〗 소리의 상형. 〖漏〗 물시계 루, 〖戌〗 서북쪽 술,
〖釀〗 빚다 양, 〖霏〗 연기가 오르는 모양 비, 〖擁〗 안다 옹, 〖高標(고표)〗 높이 솟음.
〖獻壽(헌수)〗 예(禮)를 바치고 장수를 기원함. 〖南山~壽〗 『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여남산지수(如南山之壽) 불건불붕(不騫不崩)”이라 하여, 임금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기리는 말로 쓰임.
〖穆穆(목목)〗 성대히 모인 모양.
각주
1 정이오(鄭以吾, 1347, 충목왕 3~1434, 세종 16):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 또는 우곡(愚谷), 시호는 문정(文定),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1374년(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394년 선주부사(善州府使)로 나간 것을 시작으로, 성균관대사성·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76세에 풍질(風疾)에 걸려 벼슬에서 물러났다. 성석린, 이색, 정몽주 등과 교유하였으며, 신유학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문물을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는데, 1398년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렸고, 『사서절요(四書節要)』를 찬진(撰進)하기도 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화석정」 이이
[ 花石亭 李珥 ]
林亭秋已晩(임정추이만)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시인의 뜻이 끝이 없도다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먼 물줄기는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다
山吐孤輪月(산토고륜월) 산은 외로운 보름달을 토해놓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었다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소리가 저물어 가는 구름 속에서 끊어지네
〈감상〉
이 시는 율곡(栗谷)이 8세에 파주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지은 시이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쓴 「문성공율곡이선생묘지명(文成公栗谷李先生墓誌銘)」에는 다음과 같이 이 시와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가정 병신년(1536) 12월 26일에 강릉(江陵) 북평리(北坪里)에서 선생을 낳았다. 신 씨의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들었는데, 조금 후에 선생이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는 자를 현룡이라 하였다. 선생은 우선 생긴 바탕이 보통과는 달랐고, 말을 하자마자 곧 문자(文字)를 알았다. 그리하여 나이 3세 때 석류를 보고는 즉석에서, ‘쪼개면 분홍색 진주가 나온다’는 시구를 지었다. 또 5세 때는 신 부인이 병을 심하게 앓자 몰래 사당에 들어가 빌었다. 언젠가는 누가 물을 건너다가 넘어지자 보는 사람들 모두가 손뼉을 치며 웃었지만 선생은 유독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다가 그 사람이 건너고 난 후에야 한시름을 돌렸다. 이처럼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남을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타고난 것이었다.
7세에 「진복창전」을 지었는데, 그 줄거리를 보면, ‘군자(君子)는 덕(德)이 자기에게 충만해 있기 때문에 항상 너그럽고 여유가 있으며, 소인(小人)은 속에 야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근심과 불만 속에 빠져 있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복창은 근심과 불만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만약 저러한 사람이 어느 날 제 마음대로 하게 된다면 뒷날 근심거리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복창은 과연 사화(士禍)의 매파 역할을 하였다.
8세 때 화석정에다 쓴 시에, ‘산은 외로운 보름달을 토해놓고, 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었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당시 입에서 입으로 전송되기도 했다(以嘉靖丙申十二月二十六日(이가정병신십이월이십륙일) 生先生于江陵北坪里(생선생우강릉북평리) 申氏夢黑龍自大海騰入寢室(신씨몽흑룡자대해등입침실) 俄而先生生(아이선생생) 故小字見龍(고소자견룡) 姿相異常(자상이상) 能言便知文字(능언편지문자) 三歲(삼세) 見石榴(견석류) 卽誦碎紅珠之句(즉송쇄홍주지구) 五歲(오세) 申夫人疾亟(신부인질극) 潛禱于祠堂(잠도우사당) 嘗見人渡水顚仆(상견인도수전부) 人皆拍笑(인개박소) 先生獨憂形於色(선생독우형어색) 其人獲免乃已(기인획면내이) 其孝親愛物之心(기효친애물지심) 天性然也(천성연야) 七歲(칠세)
作陳復昌傳(작진부창전) 略曰(약왈) 君子德充於已(군자덕충어이) 故坦蕩蕩(고탄탕탕) 小人荏藏乎內(소인임장호내) 故長戚戚(고장척척) 今復昌常有戚戚之容(금부창상유척척지용) 使斯人得志(사사인득지) 異日爲患(이일위환) 庸有極乎(용유극호) 後復昌果爲士林禍媒(후부창과위사림화매) 八歲(팔세) 題詩花石亭(제시화석정) 有山吐孤輪月(유산토고륜월) 江含萬里風之句(강함만리풍지구) 一時膾炙(일시회자)).”
그리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율곡의 「행장(行狀)」에도, “8세에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배워 학업이 날로 향상되었다. 일찍이 화석정(花石亭)에 올라가 시를 지었는데, 그 격조가 혼성(渾成)하여 시율(詩律)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따를 수 없었다(八歲就外傅(팔세취외부) 業日進(업일진) 嘗題詩花石亭(상제시화석정) 調格渾成(조격혼성) 雖老於詩律者(수로어시율자) 有不能及也(유불능급야)).”라 하여, 이 시에 대한 평을 남기고 있다.
〈주석〉
〖騷客(소객)〗 시인. 〖含〗 머금다 함, 〖塞(새)〗 한(寒)으로 된 본도 있음.
각주
1 이이(李珥, 1536, 중종 31~1584, 선조 17):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명(兒名)을 현룡(견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전후 9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이이의 이기론(理氣論)이 가지는 특색은 다음과 같다.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며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理)는 기(氣)의 주재자(主宰者)이고 기(氣)는 이(理)의 기재(器材)이다. 즉 이(理)는 이념적 존재이므로 시공을 초월한 형이상적(形而上的) 원리로서 만물에 공통적인 것이며, 기(氣)는 질료적(質料的)·작위적(作爲的) 존재로서 시공의 제한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이하적(形而下的) 기재로 국한적인 것이다. 이이는 이와 같이 무형과 유형의 차이로 이통(理通)과 기국(氣局)을 설명하고, 유위와 무위의 차이로 기발(氣發)과 이승(理乘)을 설명했다. 이이의 개혁사상은 16세기 사회발전의 진전에 따라 동요하는 사회체제와 신분질서를 다시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고정시키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이이는 점진적으로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향촌질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이의 사상은 17세기 이후 그의 문인들로 형성된 서인 노론계에 의해 계승되어 이들의 정치사상·정국운영의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 격렬하게 진행되던 봉건사회 해체 양상에 신진관료·지주 중심의 정치사회 운영론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이들은 이이의 사상이 주자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것임을 밝히는 데 주력하는 한편, 이황이나 조식(曺植) 등의 사상을 계승한 학파·정파를 배제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17~18세기의 격변기에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이이학파는 이 같은 작업에 토대를 놓음으로써 이후 정치·사상계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했다.
「우설월중상매운」 이황
[ 又雪月中賞梅韻 李滉 ]
盆梅發淸賞(분매발청상) 화분의 매화가 맑은 감상을 발하고
溪雪耀寒濱(계설요한빈) 시냇가의 눈은 찬 물가에서 빛나네
更著氷輪影(갱저빙륜영) 다시 차갑고 둥근 달 그림자 떠오르지만
都輸臘味春(도수랍미춘) 한겨울인데도 봄을 맛보네
迢遙閬苑境(초요랑원경) 아득하니 신선의 경지요
婥約藐姑眞(작약막고진) 아름다우니 막고야산의 선녀일세
莫遣吟詩苦(막견음시고) 시를 읊조리느라 고심하지 마시오
詩多亦一塵(시다역일진) 시가 많은 것도 또한 하나의 흠이라오
〈감상〉
이 시는 또 눈 내린 달밤에 매화를 감상한 시에 차운한 것으로, 시를 짓는 것은 말기(末技)에 지나지 않는다는 퇴계의 문학관(文學觀)이 잘 드러난 시이다.
방 안 화분에 핀 매화가 맑은 흥감을 자아내고, 방 밖 시냇가 차가운 물에는 흰 눈이 빛을 발하고 있다. 어제 뜬 달이 다시 떠오르지만, 매화가 꽃을 피우니 한겨울인데도 봄인 것 같다. 이러한 경지는 신선의 경지와 같고 곱고 아름다우니 선녀와 같다. 성학(聖學)을 궁구하는 것이 학자의 일이니, 시를 읊조리느라 고심하지 말라. 시를 많이 짓는 것도 또 하나의 흠이 될 수 있다.
시(詩)를 많이 짓는 것이 흠이 될 수 있다던 퇴계 역시 시를 많이 지었는데,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퇴계 이황 선생은 성리학만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문장도 여러 작가들에 비교하여 탁월하다(退溪先生非徒理學之爲東方所宗(퇴계선생비도리학지위동방소종) 文章亦卓越諸子(문장역탁월제자)).”라고 언급하여, 시문(詩文)이 뛰어남을 말하고 있다.
〈주석〉
〖耀〗 빛나다 요, 〖濱〗 물가 빈, 〖都〗 모두 도, 〖臘〗 섣달 납(랍), 〖迢遙(초요)〗 먼 모양.
〖閬苑(랑원)〗 전설상에 신선이 거처하는 곳. 〖婥約(작약)〗 아름다운 모양. 〖藐姑(막고)〗 막고사(藐姑射)로, 신화 속에 존재하는 산이나 선녀를 뜻함. 『장자(莊子)』 「소요유(逍遙游)」에 “藐姑射之山有神人居焉(막고사지산유신인거언) 肌膚若冰雪(기부약빙설) 綽約若處子(작약약처자)”라는 말이 나옴.
각주
1 이황(李滉, 1501, 연산군 7~1570, 선조 3):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搜). 이황의 학문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주자의 서간문(書簡文)을 초록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은 그가 평생 정력을 바쳤던 편찬물이다. 이황의 성리학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체계화한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보다 풍부히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理)를 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란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理)를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주재(主宰)하는 우주의 최종적 본원이자 본체로서 규정하고 현상세계인 기(氣)를 낳는 것은 실재로서의 이(理)라고 파악했다. 이황의 학문·사상은 이후 영남(嶺南)·근기(近畿)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학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영남지방에서 형성된 학통은 유성룡(柳成龍)·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 등의 제자와 17세기의 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를 이어 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 등 한말까지 내려왔다. 근기 지방에서는 정구(鄭逑)·허목(許穆) 등을 매개로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등 남인(南人) 실학자(實學者)에게 연결되어 이들 학문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능했다. 한편 이들의 학통계승은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각 학파·당파의 정치투쟁과 궤를 같이하면서 전개되는데 이들은 남인 당색하에, 이이의 학문을 사상적 기반으로 기호지방에서 성장한 서인과 치열한 사상투쟁·정치투쟁을 벌이며 조선 후기 사상계·정치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