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자익과 조덕삼의 만남
1904년 테이트 선교사가 설립한 금산교회는 옛날에는 팟정이교회·팟정리교회·두정리교회(豆頂里敎會)로 불렸다. 금산사 바로 코앞에 있는 이곳은 예부터 팟정이[두정리]라 불렀는데, 서울로
가려면 이곳에서 말을 빌려 팟정이를 지나 청도리와 유곽을 거쳐 재를 넘어가야 했다. 그 때문에 팟정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테이트 선교사도 조랑말을 타고 팟정이로 와서 선교 활동을 펼치면서 조덕삼(趙德三), 이자익(李自益), 박화서(朴化西), 왕순칠(王巡七) 등을 만나 전도하고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금산교회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자익은 경상남도 남해 출신으로 6세 때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성장했다. 16세가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지만 가난을 면치 못하자 집을 떠나 하동으로 갔다. 하지만 하동에서도 있을 만한 곳을 찾을 수 없어 전라도 남원과 전주를 거쳐 김제 금산리 삼거리에 도착하였다.
이자익은 삼거리에서 똑바로 가면 유명한 금산사가 있었으나 그 길로 가지 않고 두정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가장
큰 집을 찾았다. “여보세요, 주인 어르신 계신가요? 저는 경상도 남해도란 섬에서 왔는데 주인 어르신을 뵙고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주인인 조덕삼은 이자익을 안으로 들여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딱하게 여겨 당장 일감을 주었는데 바로 마부 일이었다. 이자익은 열심히 일하면서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전주선교부를 오가며 성경을 배우고 매 주일마다 사랑채에서
예배를 올리면서 신앙을 키워 나갔고, 조덕삼·박희서 등과
함께 금산교회에서 테이트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2. 금산교회 장로에서 목회자의 길로
금산교회는 해가 지나면서 교인들이 늘어나자 1908년 장로를 선출하였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지주인 조덕삼이 장로로 선출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머슴이며 마부인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마부가 장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금산 지역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금산교회로 몰려 왔다.
이때 조덕삼이 자신의 배밭 일부를 교회에 기증하자 힘을 얻은 테이트 선교사는 이자익과 의논하여 교회당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조덕삼은 또 모악산 중턱에 있는 제각을 판다는 소식을 듣고 그 제각을 사들이기도 하였다.
1908년 3월 남녀 신도석을
따로 갖춘 교회당이 완성되어 당회장인 테이트의 집례로 헌당식을 치렀다. 다음 주일부터 여자 신도석에서
따로 예배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여성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곧 금산리뿐만 아니라
원평에도 전해져 원평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였다.
한편 용화동에 살고 있는 사람이 이자익을 좋게 보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고 논 다섯 마지기까지 내주었으나 장로가
된 이자익은 목사가 되고자 장인에게서 받은 논을 팔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조덕삼은
이자익의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도 지원해 주었다.
이자익은 신학을 공부하면서 임실 지방의 순회 조사로 활약하였고, 1909년부터는
전라북도를 대표해서 황운성·최태국·김필수·최흥서 등과 함께 총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흥덕·남원 지방의 조사를
겸하였다.
1915년 입학한 지 7년
만에 신학교를 졸업한 이자익은 전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김제군 구봉리교회와 금산교회의 목사로 청빙되었고,
남장로교 선교부는 이자익을 인정하여 고부·정읍·고창·김제 지역을 선교 구역으로 할당하여 주었다. 조덕삼은 이자익의 뒤를
따라 다시 금산교회의 장로가 되었는데, 1919년 세상을 떠났고, 아들
조영호가 뒤를 이어 장로가 되었다.
1917년 이자익은 원평교회의 전신인 구봉리교회로 전임하였다. 구봉리교회는 구봉리에 사는 정창화·김기환이 구봉리에서 금산교회까지
먼 거리를 다니자 테이트 목사와 이자익이 이들을 위해 세운 교회이다. 이자익이 부임한 뒤 구봉리교회는
크게 발전하였고, 원평들의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신자가 되었다.
이자익은 특히 법 이론에 밝아서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법통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고, 그에 힘입어 1924년 교세가 강한 이북 지역의 인사를 물리치고
제13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이후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총독부의 간섭에 저항하면서 교회를 잘 이끌어 33대, 34대
총회장에 연이어 선출되어 이 방면의 신화를 창조하였다.
구봉리교회에서는 김준기(金準基)가 장로로 시무하면서
이자익을 보필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구봉리보다 원평리에 사는 신도들이 늘어나자 김준기는 이자익과 상의하여
교회를 원평으로 옮기고 교회 이름을 원평교회로 고쳤다. 김준기는 전라북도에서 장로 출신으로는 최초로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이자익은 대전성경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1952년에는 대전노회를 조직하여 첫 노회장이 되었다. 1954년에는
대전신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추임하였고, 만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제2의
고향인 원평에서 여생을 보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① 조덕삼 장로의 후손으로 손자 조세형 장로(前국회의원)가 있고 이자익 목사의 손자로 이규완 장로(연변과기대 교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