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동광 시장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궂은 비가 내렸다. 시청 앞 동광 시장 소매점에는 국제시장 도매상으로 우산을 구매하기 위해 급하게 달려가야 할 때가 잦았다.
6‧25동란이 지난 후 수년이 지났지만, 부산은 피난민으로 복작거렸다. 내 처지와 같은 고학생도 부지기수였다. 자동차는 타기가 불편해서 뛰어서 가는 것이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평소에는 복작거리던 광복동 거리도 비가 내리는 날에는 한산했다. 국제시장 우산도매점에 도착할 때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주인이 준 돈만큼 우산을 도맷값으로 샀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비닐로 포장해서 어깨에 둘러메고 가려는데 도매점 안주인이 불러 세웠다.
“학생, 비가 억수로 오는데 우째 갈라 카노? 이 돈으로 고마 타꾸시 타고 가거래이”
하시며 내 손에 꼭 들려주었다. 그 돈이 눈물겹도록 고맙기는 했지만, 한 푼이 아쉬운 판에 택시를 탈 수가 없었다. 눈을 찔끔 감고 그냥 뛰는 걸음으로 동광동 시장에 도착했다.
이까짓 비쯤이야 아무리 퍼부어도 살가죽만 적실뿐이지 뚫고 들어오진 못할 것이라는 배짱이었다. 나중에 그 돈을 안주인께 돌려드리며 말했다.
“우산도매점 사장님이 타꾸시 타고 가라고 주신 돈인데 그냥 뛰어왔습니다.”
그런데 웬걸, 수고비로 줄줄 알고 주었는데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는커녕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인사도 없이 받아 넣었다.
그때, 고학생들은 대개 점원, 신문팔이, 신문 배달, 아이스케키 장수 등 갖은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아이스케키 통을 매고 다니며 외치는 습관으로
“아이스 – 께ㅡ이키
하고 외칠 때처럼 ‘아줌마아ㅡ예’ 하며 말을 느리고 길게 하면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 당시 부산역 주변에는 큰 건물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눈에 띄는 큰 건물이 국제극장과 대구관 식당이었다. 피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유일한 노점 식당이 현대극장 앞에 아줌마들이 질그릇 단지에 담요를 감싸 따뜻하게 파는 팥죽, 수제비, 호박죽은 그 맛이 일품이었다.
역 주변의 국제시장에는 지게꾼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기가 항상 보였다.
크게 부족함 없이 살면서 자식도 다 장성한 지금에서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은 어느 날 아이스케키 팔려고 염주동 판잣집 동네에서 외치고 있는데, 잘생긴 청년이 부르며 으슥한 창고같이 생긴 집으로 오라고 했다.
“몇 개나 남아 있노?”
하고 묻더니
“낼로 다 팔아 주꾸마!”
하고 호기롭게 말했다. 순간 나도 잘’됐다‘라는 생각에 ’오늘 장사는 제수 좋다’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래, 얼른 먹어라’하고 돈 주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내 기대와는 달리 날벼락 같은 말을 귀에 대고 나직이 했다.
“낼로 자알 묵었데이, 그렇긴 한데 네 내한테 돈 받을라고 하면 죽을 수도 있다. 내가 집 밖에 나가서 지붕에 돌을 던지면 그때 나오그래이.”
그 순간에 나는 무서워서 두 말도 하지 않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무서운 감정에 눈물을 머금고 그저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이스케키 공장에 외상값 갚을 걱정만 했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꾹 참고 속으로 삼켰다. 그 당시에 잠은 지인의 도움으로 부산역 구내 이 층 형사 파견소에서 해결했다. 잠만 자고 일어나면 그 자리에서 밥 지어 먹고 긴 의자에서 새우잠을 잤다. 아침에는 기관차 기적소리와 수증기 김빠지는 소리에 잠을 깼다. 그런 생활에서 점원으로 취직한다는 건 행운이었다. 점원에 채용된 건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힘이 든 때였다. 채용해 준 이유는 매일 제때 제시간에 동광 시장 안을 돌아다니며 아이스케키 통을 매고 외치는 내 꼴이 불쌍했는지 하루는 큰 옷가게 주인아줌마가
“학생, 장사가 힘이 들지 않나 우리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해 보면 어떻겠노?”
라고 넌지시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예 해보겠습니다.”
하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아줌마의 제안에 응하고 일하면서 늘 감사한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그리고 성실히, 열심히 보답하는 마음으로 일했다.
“학생이 할 일은 아침 일찍 점포 여러 개의 문을 열고, 저녁때는 조금 늦게 닫는 일인데, 그 외는 잔심부름을 하며 점원으로서 일을 배우다 보면 좋은 일이 있을 건데 어떻겠노?”
그 당시에 내 처지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안집에서 일하는 아줌마(식모)가 친자식처럼 보고 불쌍해서 쌀밥에 고기반찬을 더해 먹게 해주니, 얼마나 맛있던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살이 뽀얗게 올랐다.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할 수가 없는지라 밤에 주인집 국민 학생들을 개인지도까지 했다. 그 수업이 끝나고서야 『서울강의록』 중학생 과정의 책으로 독학을 했다. 그 당시 내 나이가 이팔청춘인 열여섯이었다.
국제시장 우산 도매 집 주인이 준 택시 값이며 동광동 시장 옷가게 주인이 나를 가엾게 보고 채용해 주신 선의가 아니었다면 오늘 내 삶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본다. 지금 60년도 더 지났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고 내 가슴 속에 아름답게 살아있다. 그래서 오늘도 그 시절의 어려운 고비를 고마운 분들이 잘 견디게 해준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
첫댓글 홀로 일어서려는 이에게
열 손가락 중 하나만이라도 잡게 해보자.
그 보탬이 얼마나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는지
스스로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