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내용은 제가 우연히 들른 CaromTV.com에서 보게 된 Ira Lee선수가 쓴 故
많은 오역, 의역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해 주시고 다소 내용이 길더라도 당구를 좋아하거나, 당구관련 일을 하거나, 그냥 한국인으로서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사람이 죽기 전에 나라를 구하는 업적을 모든 사람이 쌓을 수는 없지만 타인을 위하여 최소한의 무언가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봅니다.
당구계의 발전을 위하여 힘써주신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글을 쓰신 분에게도 감사드리며, 당구가 더욱 더 높은 수준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보면서 서투르고 미천한 이 글을 고인이 되신 당구의 거장
---------------------------------------------------------------------------------------------------
Sang Chun Lee : His Life in Billiard
by Ira Lee
수년간
그 당시 한국은 법적으로 10대 초반의 아이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당구장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반면, 그들은 탁구를 칠 수 있는 레크리에이션실에서 방과후 시간을 보내는 것은 허락되었지만 상천은 탁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우리에게 다행스럽게도, 그는 각 레크리에이션실의 구석에 있는 1/3 크기의 당구대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그 테이블은 정식경기에 적합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모든 관심을 지배하여 넋을 잃게 만드는 공의 회전과 다양한 패턴에 관한 무언가가 있었다. 여하간 그는 그가 당구클럽에 입장할 수 있는 성인이 될 때까지 이런 방식으로 당구게임을 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한국당구장들은 전형적으로 포켓테이블이 없었으며 규모는 작고 오직 캐롬 테이블만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4구게임을 했다. 1940년대 초반에 클럽에서 게임을 하는 한국인들은 오랜 전통의 신사적인 환경을 유지했고, 젊은이들이 클럽에 오면 엄격한 예의범절을 강요하였다. 한국 내 당구장들은 습관적으로 반사각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매 게임마다 테이블 위의 쵸크가루를 진공청소기로 청소했고 공을 새로 닦았다. 상천은 후에 이런 높은 수준의 에티켓과 청결함을 미국 당구 클럽으로 가져왔다.
방과후마다, 상천은 당구연습을 위하여 이런 당구클럽에 몰래 출입했다. 어른들은 그의 뛰어난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고 그가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그의 출입을 못 본 척했다. 학업대신에 당구 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의 우수고교인 경기고를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했고 1974년 한국의 ‘하버드’인 서울대학교에 입학한다.
이때 상천의 4구게임 수지는 이미 측정불가였다. 한 이닝 200포인트로 게임을 끝낼 수 있는 4구 최고 핸디가 2000인데 상천은 이를 너무 쉽게 해내곤 했다. 4구게임을 통달한 후에 그는 이미 프로경기의 표준이 된 3쿠션경기에 집중했다.
입학 2년 후 상천은 군대를 가는데 그 기간 동안 당구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 18개월의 복무 후에는 국내 3쿠션 선수들 사이에 가장 위험한 3쿠션선수로 여겨졌다. 아마 이런 명성은 그가 각 도시 최고의 선수들을 제압할 때까지 그들의 근거지로 찾아가 각자에게 도전했기 때문에 얻은 것 같다. 그들은 그를 발음이 마치 기차소리 같은 ‘칠칠, 팔팔’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77, 88’로 해석되는 이 숫자는 3~4이닝에 30~40포인트를 기록해 버린다는 의미였다. 이런 도전형식의 시합 중에, 상천은 그들이 경기한 국내식중대(4 x 8 feet)에서 50점 이상의 하이런으로 유명했다. 이 소문은 좀 과장된 듯하고 아마 상천의 실제 하이런은 뱅크샷이 2점인 한국룰을 감안하면 30점 중반인 듯하다. 이런 훈련으로 상천은 후에 뱅크샷에서 세계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된 듯하다.
1978년, 상천은 처음으로 국제식 대대(5 x 10 feet)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해 같은 해, 그는 처음 공식적으로 한국챔피언쉽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 때까지 상천의 삶은 당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었고 1979년 그는 당구장사업에 뛰어든다. 그 후 7년간, 그는 한국에 6개의 당구장을 오픈한다. 안정된 수익과 함께 그는 1986년까지 매년 최고 선수로서 한국 3쿠션을 지배해 왔다. 그는 10년간 반박의 여지 없는 전국적인 챔피언이라는 인식을 달성했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나라밖에서는 아무도 그를 몰랐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챔피언이었다. 그래서 상천은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다.
그는 자신을 알리려고 시도도 했지만 그보다도 당구게임이 미국 문화속에서 부활하게 되면 세계적으로 번성하리란 비젼을 가졌다. 그는 그의 꿈들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이루어야 함을 느꼈다. 이와 같이 상천의 목표는 ‘미국에서 3쿠션을 번성시키는 것’이 되었다. 1987년 그는 미국에 첫 발을 내디뎠고 오래전 인기 있었던 3쿠션을 회복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1989년 상천은 그의 아내 경순을 만나 결혼하고 딸 Olivia와 함께 가정을 이루어 정착한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뉴욕 퀸즈에 S.L Billiards를 오픈한다.
상천이 공식적으로 미국을 대표하기까지 거주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3년을 기다려야 했고 1990년 처음으로 US Championship에 참가하게 된다. 그 기간에 그는 종종 8시간에 걸쳐서 때론, 오직 먹거나 선잠을 자는 시간을 빼고 며칠을 이어서 훈련했다. 그의 경기력이 최고조를 향해 가면서 심지어 그의 연습경기들도 극적인 볼거리가 되었다. 입소문을 타고 그는 미국전역, 남미와 유럽에 걸쳐 그의 화려한 플레이를 직접 보기 위한 사람들을 매혹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대단한 실력과 따뜻한 인간성을 통하여 사람들을 그의 세계로 끌어당기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하여 선수들의 인기는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상천은 미국인들에게 세계적인 재능을 보여주기 위하여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초대하는데 그의 경기상금을 많이 소비하였다. 그리하여 1992년 퀸즈에 있는 S.L. Billiards에서 주최되는 첫 번째 상리인터네셔널 토너먼트가 탄생한다.
3쿠션을 홍보하고 선수들이 제대로 연습하도록 권장하면서 상천은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따기 위하여 전념하게 된다. 1993년 1년에 걸친 BWA(세계당구협회) 월드컵 연맹전을 치루고 최고의 선수들을 물리침으로써 그는 목표를 달성했다. (비록 결승은 1994년 1월에 개최되었지만 그것은 공식적으로 1993시즌의 폐막식이였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뉴욕으로 돌아왔지만 축하와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업적은 미국내 캐롬당구의 불명확한 인기로 충분한 인식과 인정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상천은 미국 내 당구의 위상을 세우는 데 집중하기 위하여 다음해부터 해외원정을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선수로서의 그의 재능과 능력에 관한 충분한 자료는 있지만, 상천은 또한 3쿠션의 혁식적인 지지자였다. 상천이 주최한 이벤트 분위기는 단지
1995년 상천은 그의 토너먼트를 포기하고 US National Championship을 주최했고 1997년대규모 당구클럽을 지을 목표로 그의 시설을 팔기 전 1996년 상리인터네셔널 토너먼트를 한 번 더 주최했다. 1998년에 이르러 그 대회는 총상금 $135,000에 달하는 1년 내내 벌어지는 이벤트인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USBA Carom Corner Tour로 발전한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참가하는 그 이벤트는 새롭게 관심을 보이는 어떤 도시에서라도 개최되었다. 그 사이에, 상천은 그의 업그레이드된 3쿠션 당구클럽 장소를 계속해서 물색하고 있었다.
2000년 11월 상천은 그의 파트너 마이클강과 함께 꿈의 당구클럽을 세상에 공개한다. 그것은 2년여의 힘든 노력의 성과물이었다; 25,000 제곱 피트의 “Carom Café Billiards”는 세계에서 가장 큰 3쿠션 당구클럽 중 하나가 되었고 상천이 다가올 미래에 개최될 토너먼트를 위하여 특별히 디자인한 밝은 조명의 무대가 그 중심부에 있었다. 그가 뉴욕 클럽에서 해왔던 것처럼, 그는 고객을 위해 매 경기마다 세심하게 테이블을 진공청소하고 공을 닦을 특별한 직원들을 고용했다. 클럽에는 고속인터넷과 웹캠이 설치되어 인터넷을 이용해 누구나 Café 내부를 들여다보거나 3쿠션경기를 동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몇 개월간 프로대회에 참가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천은 1999년 월드챔피언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의 마지막 샷이 머리카락 하나 차이로 빠지면서 그는 2위에 만족해야 했다.
2000 ~ 2004년까지Carom Café Billiards는 Hoppe Cup을 포함한 쇼케이스 이벤트를 주최했고 월드팀 이벤트에서는 스웨덴 팀이 우승했다.
프로모터 상천은 향후 올림픽게임 종목 채택을 위한 정부와의 협력을 목표로 2003년 고국으로 돌아왔고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선수들을 규합하고 단합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어로 ‘진정으로 당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선수들의 협회를 만들었다. 상천은 성공적으로 젊고 유망한 한국 선수들을 위한 산업체 후원도 마련했다. 그는 한국 내 다양한 지역에서 개최되고 새로 설립된 협회의 이름으로 된 12개 이상의 토너먼트를 위한 기업체 후원도 조직하였다. 예선전들은 그의 이벤트 활성화를 위해 각 지역에서 개최되었고 400명 이상의 선수들은 3~4개 선망지역에서 대결하곤 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상천도 다시 한번 관중들을 흥분시키면서 30번이 넘게 토너먼트에 출전했는데 그는 1.7 ~ 1.8 이상의 에버리지를 기록했다.
2004년 6월, 상천은 한국 정부 기관인 한국당구협회(KBF)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회장직에 있으면서 한국 당구계의 의미 있는 발전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위암이 생겼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매우 아픈 상태에서도 토너먼트를 만드는 동안 수도 없이 전화를 걸고 끊임없이 일하면서 선수촌 안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상천은 사랑하는 아내 경순과 어여쁜 딸 Olivia를 곁에 두고 50의 나이로
최상의 기량을 보여준 상천은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었다. 그는 단연 가장 천부적인 재능의 선수였고 3쿠션을 구사하는 방식에는 마법과도 같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깊이 파고드는, 꼭 필요한 순간 최고의 플레이를 하는 능력을 가진 무서운 선수였다. 미국 역사상 어떤 선수도 그와 같은 높은 수준의 정교한 스트록, 섬세한 터치, 그리고 강심장을 가지진 못하였다. 왠지, 상천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쉽게 만드는 능력을 가졌었다. 미국 3쿠션 선수들의 시각에서 그는 수퍼히어로였다.
그의 지식의 깊이는 3쿠션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당구 시스템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상천은 새로운 해결책이 요구되는 유사해 보이는 샷들의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여 완벽히 각인하는 능력을 소유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경기에서 난구를 만났을 땐, 노련한 선수들조차도 그가 독창적인 해결책을 펼치는 것을 보려고 가만히 응시하곤 했다.
상천의 게임에 대한 생각과 철학은 다른 사람들과는 남달랐다. 그는 제자들에게 모든 샷마다 완전히 몰두하도록 강조했고 자신들의 직관을 믿고 연습하도록 격려했다. 또한, 제자들이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쳤고 모든 미스샷 후에는 깊이 있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권했다. 상천은 최선을 다해 게임할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중요한 생각은 자신이 살아있고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혜택인가 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선수들이 열린 사고방식을 유지하고, 호기심을 가지며, 같은 상황에 많은 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그리고 주어진 문제에 오직 하나의 해결책에 집착하지 않는 행동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좋은 습관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선수들이 자신의 모든 샷에(연습하는 동안도) 최선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천은 당구선수들이 경기장 안팎에서 에티켓과 스포츠맨정신의 역할모델로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는 연습생들이 경쟁적 활동으로 몹시 이기적으로 되는 것을 경고했고 경기에서 공동체의식을 준수하도록 상기시켰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식공유와 새로운 선수들의 보살핌을 통한 동료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선수들에게 관중에 대한 배려심을 가지고 게임을 통한 친선대사가 되길 충고했다.
상천에게 3쿠션은 스포츠나 단순한 취미 그 이상이었다 - 그것은 삶의 방식이었다. 경쟁상황에서, 당구는 실력을 향상시켜 나가는 자신의 한계치를 향한 투쟁이며 대대로 계승되고 공유되어야 할 표현예술인 것이다. 게임은 자신의 참을성, 인내력, 그리고 용기를 강화시키는 스승인 것이다.
상천이 꿈꾸어 왔던 것처럼, 이 추모대회는 리그전으로 펼쳐지는 세계최고수준의 가장 큰 모임이며 정상의 선수들(세계챔피언들과 살아있는 전설들)은 그가 이룬 무대에서 함께 경쟁하고 그를 추모함으로써 상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당구동호인으로 이곳에 모여든다. 흠 잡을 데 없는 스타일 그리고 침착함과 함께, 상천의 비젼, 열정, 그리고 멈추지 않는 에너지는 살아 숨쉬며 3쿠션에서 우리모두에게 새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2005년 상리 인터네셔널은 이런 정신을 간직한 채 막이 오를 것이다. “브라보! 거장
---------------------------------------------------------------------------------------------------
Sang Chun Lee : His Life in Billiards
by Ira Lee
There are plenty of stories and articles written about Sang Lee over the years. Most of them chronicle his breathtaking tournament performances while others attempt to put into words his wondrous talent as a player. But the stories alone do not give us a sense of the man—and if talent were all that there was to recognize about him, then I suspect that there would not be half as many people gathered at this memorial event to pay tribute to him. Sang Lee’s life in billiards is a story about inspiration, vision, conviction, and the courage to follow one’s dreams. Sang discovered his own life’s path as a boy of only fifteen years old, an age when dreams are perhaps in their purest form.
Due to Korean regulations at the time, children in their early teens were not permitted to enter billiard establishments until they were adults. They were, however, allowed to pass time after school inside recreation rooms where they usually played table tennis. But Sang showed no interest in ping-pong. Luckily for us, he was instead drawn to the one-third size carom table that was often kept in the corner of each rec-room. And even though the table was hardly playable by any standards, there was something about the spinning balls and complex patterns that mesmerized Sang to the point that he directed all of his attention to it. He was relegated to playing billiards this way until he reached an age where he could pass for being old enough to be admitted into the players’ clubs for adults.
Korean billiard rooms typically had no pool tables in them. The rooms were usually small and they only had carom tables. Most of their patrons played a form of straight-rail billiards called “4-ball.” As early as the 1940s, the Korean elders that played in the clubs maintained a gentlemanly environment that was steeped in tradition. Upon initiating younger members into their clubs, the elders enforced strict rules of respect and conduct. As a matter of custom, billiard parlors across
After school each day, Sang snuck into these carom clubs to practice. The elders immediately recognized his prodigious talent for the game and cast a blind eye to his age to let him develop. Despite all of the hours spent on the table as opposed to his studies, Sang graduated from Kyung Kie, the country’s elite technical High School, at the top of his class. In 1974, he applied and was admitted to the prestigious
By this time, Sang’s rating in the 4-ball game was already off the charts. The maximum handicap assigned to anyone was 2000, which meant that one was capable of running out a game to two hundred points in a single inning—a routine that Sang managed with great ease. Having mastered the 4-ball discipline, he concentrated on the 3-cushion form of the game, already becoming the standard professional contest.
After two years at the university Sang left and joined the military service which gave him more time to concentrate on his billiards. By the time he completed his mandatory military commitment (18 months), he was already unofficially regarded by the player community as the most dangerous 3-cushion billiard player in the country. Sang probably received this notoriety because he actively best players in each town and challenged each one of them—on their home-turf—until he bested them all. They started calling him “Chil-Chil, Pahl-Pahl” which, when spoken, sounded a lot like a locomotive train. Translated as “Seven-seven, eight-eight”, a reference to his devastating strings of runs in which he would score a blistering thirty or forty points in only three or four innings. During these challenge bouts, Sang was reputed to have 3-cushion runs that exceeded 50 points on the small 4x8’ tables they played on. These seemingly exaggerated figures warrant some explanation. Sang’s actual runs were probably only in the mid-thirties since the Korean rules for 3-cushion awarded two points for any cushion-first shot. It was this training that would later earn Sang his reputation for being the best cushion-first player in the world.
In 1978, Sang Lee began entering tournaments on regulation sized 5x10’ tables for the first time. That very same year, he won his first official Korean National Championship on the large unheated tables.
By this time, every aspect of Sang’s life began to revolve around billiards and he jumped into the billiard-room business in 1979. Over the span of the next seven years, he opened six different billiard rooms in
Sang sought to prove himself at the world level, but even more than this he had a vision that the game of billiards could blossom to mass recognition if it were revived within the American culture. He felt that the only way for him to achieve his dreams was to leave
Before Sang could formally represent the
He had a unique ability to draw people into his world through his tremendous performance and warm personality. Inspired by him, the player population began to return slowly. To further fuel interest, Sang spent much of his tournament winnings to invite the best players from around the world to compete with him in staged exhibition tournaments with the purpose of showcasing the international talent to the American people. Thus was born in 1992 the first of a series of annual Sang Lee International tournaments hosted at S.L. Billiards in
All the while promoting the game and encouraging the players in his room to practice the game properly, Sang Lee kept his mind set on achieving the title of World Champion. In 1993, he realized his goal by completing the yearlong international circuit of BWA World Cup tournaments and besting all of the most skillful cueists (although the final and deciding tournament took place in January of 1994 it was still officially the closing of the 1993 season).
There was a short-lived celebration and fanfare when he returned victoriously to
His talent and abilities as a player are well documented, but Sang was also an innovative promoter of three-cushion billiards. The atmosphere at Sang’s events was much more than just players in head-to-head matches. Sure enough, the competition was fierce, but it was also a gathering of billiard friends. By day, the players would be fully engaged in heated battle. Come nightfall, the same players would be swapping stories and sharing their knowledge about shots over dinner, as Sang was known for treating his guests to lavish Korean banquets.
In 1995 Sang Lee hosted the US National Championship, foregoing his usual international tournament that year. He hosted one more Sang Lee International tournament in 1996 before selling his establishment in 1997 with the goal of building a much larger billiard room. By 1998 the exhibition tournaments had grown from one per year into the donation-funded USBA Carom Corner Tour, a series of events throughout the year with prize funds totaling up to $135,000 annually. The events featuring the world’s best players and were hosted in any city or town that showed budding interest in the game. In the meantime, Sang continued to search for the ideal location for his upgraded 3-cushion billiard room.
In November 2000, Sang and partner, Michael Kang, unveiled their dream billiard room for the world to see. It was a culmination of over two years of hard work; the 25,000 square foot “Carom Café Billiards” was one the largest three-cushion rooms in the world. At its heart was a brightly-lit tournament arena pit that Sang specially designed for future exhibition tournaments in the years to come. As he had done with his first
Despite largely withdrawing from the pro-billiard circuit for several months at a time, Sang almost became the 1999 World Champion. Missing by a hair on his final shot, he had to settle for second place.
From 2000-2004, Carom Café billiards continued hosting showcase events each year including the Hoppe Cup, a world team event won by the Swedish team.
Sang, the promoter, returned to his native country in 2003 with the goal of working with the government to lobby for the recognition of billiards in future Olympic events. Using his celebrity status, he began by rallying and uniting the players. He started a players’ association whose Korean name literally translated to “People Who Really Love Billiards.” Sang successfully arranged for industry sponsorship for the new young up-and-coming Korean players. He organized corporate sponsorship to fund more than a dozen tournaments, all bearing the name of his new-found association and held in various South Korean states. Separate qualifiers were held in each state to fill openings in his events, where upwards of 400 players would compete for three or four coveted spots. Since his return to
In June 2004, Sang became President of the Korean Billiard Federation (KBF), a branch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 In this political position, he was able to make significant strides for billiards in
Sang spent his last days in
At the top of his game Sang was one of the best ever. He was arguably the most talented instinct player to ever hold a cue. There was something magical about the way he played three-cushion billiards. He was a fierce competitor with the ability to dig down deep and play his best when it mattered the most. No other player in American history had his otherworldly level of imagination, exquisite control of stroke, delicate touch, and strength of heart. Somehow, Sang had the capability to make what seemed impossible appear easy. In the eyes of the American three-cushion players, he was a superhero.
His depth of knowledge went beyond the limitations of billiard systems commonly employed to decipher three-cushion. Sang seemed to possess a photographic memory that empowered him to recognize subtle nuances between similar looking shots that demanded new solutions. As he would approach an intricate problem on the table, even expert players would gaze puzzlingly until they watched his ingenious solution unfold before them.
Sang’s ideas about the game and philosophy for play was different from others. He advocated that his students immerse themselves completely into each shot and encouraged them to exercise and trust their intuition. He taught players to treasure their moments at the table and recommended deep and honest introspection after each missed shot. Sang once confided that when he was playing his best, the thought most forefront in his mind was how privileged he felt to be alive, standing in front of the table and playing billiards.
He emphasized the importance for developing players to keep an open mind, to engage their curiosity, to explore many different approaches to the same situation, and to avoid becoming fixated on only one solution to a given problem. In order to insure that good habits became deeply ingrained, he stressed that players must always apply their maximum effort on every shot—even during practice.
Sang wanted billiard players in general to be recognized as role models of etiquette and sportsmanship whether on or off the table. He warned practitioners to beware of becoming overly selfish in their competitive pursuits, and reminded them to respect the strong sense of community in the sport. He showed others how to cherish the contact they had with their peers through the sharing of knowledge and the act of nurturing new players in the game. He advised players to always be considerate of their audience and be good ambassadors for the game.
To Sang, three-cushion billiards was much more than just a sport or a mere pastime in which to indulge—It was a way of life. In the competitive context, billiards was about the striving toward one’s personal best—always raising the bar of excellence higher and higher. Billiards was an expressive art form to be shared and passed dow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The game was a teacher to strengthen one’s patience, perseverance, and courage.
Sang Lee’s legacy is more than a list of championship titles. He was largely responsible for the resurgence of three-cushion in the
Exactly as Sang Lee would have dreamed it, this memorial tournament is the largest assemblage to date of world-class talent playing in round robin. Top players from every billiard-playing nation—world champions and living legends amongst them—gather here as billiard friends to pay homage to Sang by competing and remembering together in the arena that he conceived and built. With impeccable style and aplomb, Sang Lee’s vision, passion and unstoppable energy lives on, showcasing something new and beautiful for all of us in three-cushion billiards. The 2005 Sang Lee International Open rolls on with this spirit at its core. “Bravo! Maestro Sang.”
첫댓글 정말 멋집니다..이상천선수
이젠 그의 경기를 볼 수 없다는게 안타깝네요..
사장님도 해외진출 계획이 있으신지~~?
ㅎㅎ 해외진출까지는 능력이 부족하지만 여유가 생기면 해외 곳곳을 누비며 선수들을 만나보고는 싶네요~~ 야! 코드롱 한 판 붙어 ㅋㅋㅋ 생각만 해도 설레이는데요 (넌 1개 1점 난 10점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