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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送權仲謹兄北戍 (송권중근형북수) |
권중근 형을 변방 북수에 보내며 |
壯士輕一死(장사경일사) |
장사는 한 번 죽음을 가벼이 여기나니 |
香閨非所思(향규비소사) |
향기로운 규방(부인)을 생각할 바 아니로다. |
明年斬月氏(명년참월씨) |
내년에 월지(오랑캐)를 다 참살하고 나면 |
歌舞綠楊時(가무록양시) |
우거진 푸른 버들 날리는 시절에 노래하고 춤추리라. |
1591년(선조24) 별시무과(別試武科)에 급제하였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권전(權詮) 1591년(선조24) 무과급제 별시(別試) 병과(丙科) 6위(41/300)]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는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에 의해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영병장(領兵將)에 추대되어 중임(重任)을 맡았다. 그 후 축산포만호(丑山浦萬戶)가 되어 축산의 창녕전투(昌寧戰鬪)에 참전하였다. 이어서 7월 29일에는 영해(寧海)의 위정산(葦井山; 일명 용두산(龍頭山)) 골짜기에서 장졸(將卒) 200여 명을 이끌고 많은 왜군을 격퇴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용궁(龍宮) 지역 의병을 이끌고 우두원(牛頭院)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敗戰)하였다.
1594년(선조 27) 1월 별시무과(別試武科)의 시관(試官)이 되었다.
정유재란 발발 전(前) 잠시 의병장 곽재우 의병진에서 활약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발발 후인 4월 고성현령(固城縣令)에 제수되었다. 그 후 류성룡(柳成龍)이 이순신에게 안동 출신 무장 권전을 수군만호로 천거(매일신문 2015년 2월 10일 기사 「임진왜란, 그리고 류성룡과 징비록」참조)하여 8월 당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 휘하로 가서 적량만호(赤梁萬戶)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적량(현 남해군(南海郡) 창선면(昌善面) 진동리(鎭洞里)) 진영 해안(海岸)에 전투에 대비하기 위한 성곽을 축조하였으며(일부 현존 함), 판옥선함장(板屋船艦長)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해남(海南)의 명량해협(鳴梁海峽)에서 신묘한 책략(策略)으로 왜적을 대파(大破)하고 남서(南西)의 제해권(制海權; 바다를 지배하는 권력)을 장악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후 이순신의 아장(亞將; 준장군)을 겸임하며 장군선(將軍船)에 올라 이순신을 보좌하였다.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50세의 나이로 이순신과 함께 역전동사(力戰同死)하였다. 이때 시신은 수렴하지 못했다.
1605년(선조38)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시신을 수렴하지 못해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있다가 1606년(선조39) 안동의 유생(儒生)들이 논의하여 안동시 풍산읍(豊山邑) 계평리(桂坪里) 서쪽에 위치한 청성산(靑城山) 불당곡(佛堂谷) 선영(先塋) 아래에서 간좌(艮坐)에 의관으로 장사지내고 분황고유(焚黃告由)하였다.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효복동 망우당 공원 내의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동생 권극과 함께 위패가 모셔져 있다. 2011년부터는 6월 1일을 국가기념일인 “의병의 날”로 지정하여 매년 임란의병 315위 중 한 사람으로 향사(享祀)되고 있고 또한 임란공신충의선양회(壬亂功臣忠義宣揚會)에서도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호국사(護國祠)에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음력 4월 13일에 향사되고 있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현감(縣監) 주윤숙(朱允琡)의 손녀이자 강진현감(康津縣監) 주윤(朱贇)의 딸 증 숙부인(贈淑夫人) 신안주씨(新安朱氏)인데 자식이 없다. 둘째 부인은 효절공(孝節公) 이현보(李賢輔)의 손녀이자 진사(進士)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 : 왕자사부, 의병장)의 딸 증 숙부인 영천이씨(永川李氏)로 2남을 두었다. 첫째 아들 초명은 권득명(權得明)인데 개명하여 충의위(忠義衛) 권윤박(權潤珀)이고, 둘째 아들은 권득창(顴得昌)이다.
권윤박은 안동에서 상주로 이거(移居)하였으며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그의 첫째 아들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권중남(權仲楠)이고, 첫째 부인은 김해김씨(金海金氏), 둘째 부인은 밀양손씨(密陽孫氏)이다. 둘째 아들은 권중희(權仲熙)이고, 부인은 김석구(金錫九)의 딸 월성김씨(月城金氏)이다. 첫째 사위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윤영(尹泳), 둘째 사위는 대구서씨(大邱徐氏) 영산현감(靈山縣監) 서준리(徐準履)이다. 권중남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권순(權舜)은 성균진사(成均進士)로 효종(孝宗)때 뛰어난 효행과 문학(文學)으로 상주읍지(尙州邑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에 조성된 권순의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의 묘소 비석(碑石)에는 부인의 품계(品階)가 숙부인(淑夫人)으로 되어 있는데 권순의 품계나 관직에 대해 전해지는 내용이 없다. 그러나 부인의 품계로 보아 권순 또한 그에 알맞은 품계(通政大夫)와 관직을 지냈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 이를 상고할 수 있는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그의 후손(後孫)들은 경상북도 상주와 충청북도 보은군 탄부면에 문중(門中)을 이루며 살고 있다.
3. 활동사항
1) 정유재란 전의 활약
권전은 1582년 식년무과 급제 후 선전관 등을 역임하고 함경북도 변방을 방위하는 일을 맡았다. 그 후 1591년에는 별시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던 1592년 4월 일본의 괴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豊臣秀吉)]가 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아 조선 7도(道)를 모두 함락하여 자신들의 군현(郡縣)으로 만든 뒤 조선 사람을 앞세워 중국까지 점령하려는 야욕을 품고 20만 왜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하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당시 왜군은 부산으로 상륙한 뒤 파죽지세로 동래성(東萊城) · 김해성(金海城) 등을 점령한 뒤 충주(忠州)까지 점령해버렸다. 이에 충주에 배수진을 치고 있던 신립(申砬)이 자결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4월 30일 서둘러 관서지방으로 파천하였다. 결국 왜군은 한반도에 발을 내디딘 지 20일 만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한양까지 점령해버렸다. 그러자 그해 5월 조선군의 힘만으로는 왜군을 격퇴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조선은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로인해 6월에 명나라에서 파견한 지원군이 조선에 도착한 후 조ㆍ명 연합군이 성립되었고, 이들은 협공작전으로 왜군과 맞서 싸웠다.
이에 앞서 권전은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는 안집사 김륵에 의해 안동대도호부 영병장에 추대되어 왜군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 마음대로 도망간 수령(守令)들을 관아로 돌아와 일을 보도록 하는 중임(重任)을 맡았다. 이러한 사실은 아래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 <임진년 상(壬辰年上)> 7월 9일에 권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린 것을 통해 확인된다.
□ 조경남의 난중잡록 「임진년 상」 <앞페이지>
○ 안집사 김늑이 안동에 당도하니 선비와 벼슬아치들 50여 명이 찾아왔다. 그래서 전 도사(都事) 안제(安霽), 전 검열(檢閱) 김용(金涌)을 수성장으로, 출신(出身) 권전(權詮)을 영병장(領兵將)으로 삼았다. 인하여 각 읍에 영을 전달하여 도피한 수령들은 관아에 돌아와 일을 보게 하였다. 이때에 적의 군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령들이 제 마음대로 도망갔는데, 유독 예안 현감 신지제(申之悌)만은 관문에 군사를 모으고 말에 재갈을 물리고서 변란을 대비하며 토적(土賊)을 잡아 죽이고 창고를 굳건히 지켰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그 후 권전은 축산포만호가 되어 축산의 창녕전투에 참전하였다. 이어서 7월 29일에는 영해의 위정산 골짜기에서 왜군과 격전을 벌였다. 당시 권전이 위정산에서 왜군 격퇴에 힘쓴 사실은 고종실록과 아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20년(1883) 10월 27일 좌목 <효자 신규년에게 정려의 은전을 시행하는 일에 대해 재결할 것을 청하는 예조의 계>에 권전과 관련한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을 통해서 확인된다.
○ 예조가 아뢰기를,
“경상좌도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의 별단을 인하여, 의정부의 복계 안에 ‘영덕(盈德)의 고 의사(義士) 신규년(申虯年)의 절개가 곧고 충성스러우며 의로운 절개는 정려(旌閭)를 시행하는 데 합당하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는데, 윤허를 내렸습니다. ……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났는데 …… 관동(關東)의 적이 남쪽으로 영해를 침범하자 신규년은 축산포 만호(丑山浦萬戶) 권전(權詮)과 함께 동쪽과 서쪽에서 나누어 공격하기로 약속을 하고 스스로 기병(奇兵)이 되어 위장산(葦長山) 아래에 매복을 한 채 적들이 오는 길을 막고 있었는데, 뜻밖에 적병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형세상 대적하지 못하고 무리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의 종 은구(銀九)가 말고삐를 당기며 울면서 호소하기를 「사태가 위급합니다. 죽어도 보탬이 없으니 살기를 도모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하니, 신규년이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국난에 신하가 죽는 것은 분의(分義)로 보아 당연하다.」 하고, 주먹을 쥐고 칼날을 무릅쓰면서 몇 명의 적을 잡아 죽였으나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빠져서 굴복하지 않고 죽으니, 향인(鄕人)들이 의롭게 여기고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었습니다.
당시 권전은 신규년(申虬年)에게 힘을 합쳐 강원도로부터 남하하여 경상도로 침입하려는 왜군을 막자고 제안하였다. 이때 신규년이 쾌히 승낙을 하자 권전은 자신의 장졸(將卒) 200여 명을 이끌고 가서 신규년 의병진과 합세하여 남하하는 왜군을 창수면(蒼水面) 신기동(新基洞) 위정산 밑에서(구교량) 동서로 나누어 공격하여 왜군을 격퇴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권전은 수많은 왜군을 격퇴시키고 많은 양의 무기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위장산 아래 매복해 있던 신규년은 갑자기 들이닥친 왜군에게 굴하지 않고 끝까지 분전하다 전사하고 말았다.(신규년의 「풍림실기」임란사적」참조)
권전이 신규년과 함께 위장산에서 왜군 격퇴에 힘쓴 사실은 아래 신규년의 풍림실기(楓林實記) 「임란사적(壬亂事蹟)」 <축산만호권공(전)일기(丑山萬戶權公(詮)日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신규년의 「풍림실기」임란사적」<축산만호권공(전)일기>
그 후 권전은 용궁 지역 의병을 이끌고 우두원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안타깝게 패하고 말았다. 이때 권전은 자신의 남은 병사를 의병장 풍은(豊隱) 이홍인(李洪仁)에게 인계하고 돌아왔다.
정유재란 발발 전 권전은 잠시 곽재우 의병진에서 의병활동을 벌였다. 권전이 곽재우 진영에서 언제 어떠한 활약을 펼쳤는지는 정확히 확인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권전이 곽재우 의병진에서 활약한 사실은 아래 곽원갑(郭元甲)의 창의록(倡義錄)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 그의 이름이 실린 것을 통해서 확인된다.
□ 곽원갑의 창의록(倡義錄)「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
2) 명량대첩
한편 1592년 6월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는 1593년(선조26) 3월부터 일본과 강화회담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부터 화의 기간이 시작되면서 왜군은 경상도 남쪽 지방인 동래 · 웅천(熊川) · 거제(巨濟) 등지로 철수한 뒤 장기 주둔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1596년(선조29) 6월에는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小西行長)] 등까지 모두 일본으로 철병하면서 왜군은 부산의 사둔 지역에만 남겨졌다. 그런데 그 해 9월 명ㆍ일 간의 화의 교섭이 결렬되면서 왜군은 재침할 것을 천명하였다.
결국 다음해인 1597년(선조30) 1월 5만여 왜군을 이끈 왜장 모리 히데모토[모리수원(毛利秀元)]와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조선을 침범하면서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시작되었다.
한편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 1월 21일 도원수(都元帥) 권율은 이순신이 주둔하고 있던 한산도(閑山島)를 직접 방문하였다. 이때 권율은 조선에 호의적(好意的)이었던 왜인 요시라(要時羅)가 조정에 올린 헌책(獻策)에 따라 이순신에게 부산 근해로 출동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평소 요시라를 이중간첩으로 생각하고 있던 이순신은 요시라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한 후 조선 수군을 섬멸시키고자 간계(奸計)을 낸 것이라고 판단하고 출동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정으로 이순신이 출동을 하지 않아 왜장을 놓아주는 꼴이 되었으니 이는 나라를 저버린 것이라는 모함이 들어왔다. 이에 이순신은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순신이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자 왜군 격퇴를 위해 모여들었던 군민(軍民)들이 흩어져버렸다. 그리고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된 후 투옥된 사실을 알게 된 왜군은 이순신이 없는 남해에서 기세등등해졌다. 그러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이 이순신이 없으므로 인해 조선 수군(水軍)의 전세가 불리해졌음에 대한 장계를 올렸다. 이에 이순신은 4월 1일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명령을 받고 풀려나 남해로 내려왔다.
한 편 원균(元均)은 7월 16일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참패한 뒤 왜군 손에 살해되었다. 그러자 이순신은 자청해서 조선 수군 수습에 나섰고, 8월 3일 마침내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제수되었다. 이때 권전은 고성현령을 역임하고 있다가 그해 6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자 영의정 류성룡이 권전을 천거하여 이순신 휘하로 들어가 적량만호에 제수되었다. 이때 권전은 적량의 진영 해안에 전투에 대비하기 위한 성곽을 축조하였으며, 판옥선함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권전은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구한다는 일념으로 현령직을 그만두고 스스로 수군(水軍)에 들어가 최일선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 이순신은 칠천량에서 살아 돌아온 수군을 재정비하여 부서진 전선(戰船)들을 수리하고 출전태세를 갖추었다.
그 후 8월 29일 이순신은 전라도 해남의 명량해협의 문턱인 벽파진(碧波津)으로 진지(陣地)를 옮겼다. 그리고 9월 15일 이순신은 함대를 다시 우수영(右水營) 앞바다로 옮겼다. 이때 이순신은 각 전선의 장령들을 소집한 뒤 한 사람이 길목을 제대로 지킨다면 1,000명의 적도 두렵지 않을 것이라며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는 말로 필사즉생할 것을 엄중히 지시하였다.
다음 날인 16일 이른 아침, 이순신은 수백 척의 왜선이 명량해협으로 진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왜군의 명량해협 진입을 저지시키기 위해 전선 12척을 거느리고 출동하였다. 명량해협, 일명 ‘울돌목’은 평소 물살이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급류로 변하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므로 지형을 잘 알지 못하는 왜선이 명량해협으로 들어왔다가는 바로 사고를 당하기 좋은 지형이었다. 이때 권전은 이순신이 추가로 합류시킨 전선 1척을 포함해 총 13척의 전선(戰船)과 12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선봉(先鋒)에 서서 왜선(倭船) 133척(隻)을 명량해협으로 유인한 뒤 바닷물의 흐름을 이용한 신묘한 책략을 펼쳤다. 결국 권전의 책략에 따라 명량해협으로 들어선 왜선 31척이 급류에 휘말려 격파되면서 왜군 수군은 대파되었다. 그러자 명량대첩에서 대패한 잔여 왜군 수군은 웅천(熊川)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권전이 용맹을 떨치며 참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린 명량해전(鳴梁海戰)이 조선 수군의 대첩으로 끝이 나면서 조선 수군은 남서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 왜군 수군의 서해 진출 또한 완벽하게 저지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정유재란 후 위기에 빠져있던 조선의 전세(戰勢)를 역전시키는 전기(轉機)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더해 조선 수군은 해전에 강한 왜군 수군을 격퇴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3) 노량해전
명량해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후 권전은 이순신의 아장이 되어 장군선에 올라 가까운 거리에서 이순신을 보좌하였다.
한편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왜군은 서해 진출이 좌절되면서 곤경에 처했다. 이에 더해 조선 수군의 전세 상승은 더욱 왜군을 힘들게 하였다.
그러던 1598년 2월 18일 이순신은 고금도(古今島)에 수군 진영을 설치하였다. 그 후 7월 16일 명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이 명나라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조선 수군과 합세하였다. 그런데 그해 8월 19일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군에게 조선에서 물러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일본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이에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철병하기 위해 전라도 순천(順天)에 집결한 뒤 철병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철병하는 왜선을 한 척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과 함께 고금도 수군 진영에서 출발하여 노량 앞바다로 갔다. 그곳에서 이순신은 육지의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과 합세하여 수륙합동작전으로 순천에 진을 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전멸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조ㆍ명 연합군의 제지로 철병이 여의지 않다고 판단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장수 진린에게 뇌물을 보내 화의를 도모하면서 퇴각로(退却路)를 보장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각배 하나도 철병하도록 둘 수 없다며 결연한 태도로 화의 요청을 물리쳤다.
그런데 진린은 이순신 몰래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낸 뇌물을 받고 통신선 1척이 빠져나가도록 방조하였다. 그 후 진린은 왜선 통신선 1척이 빠져나갔다고 이순신에게 거짓으로 통보하였다. 이에 화가 난 이순신은 통신선을 빠져나도록 방조한 진린을 꾸짖었다.
당시 이순신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빠져나간 통신선을 이용해서 사천(沙川) 등지의 시마즈 요시히로[도진의홍(島津義弘)]와 남해, 부산 등지의 소오 요시토모[종의지(宗義智)]의 도움을 받아 조ㆍ명 연합수군을 협공한 뒤 퇴각할 것임을 예측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조ㆍ명 연합수군을 재정비하고 협공해 올 왜군 수군을 격퇴시킬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던 11월 18일 밤 이순신이 예상했던 대로 왜선 500여 척이 경상도 남해 노량 수로와 순천 왜교(倭橋) 등지로 집결하더니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당시 조ㆍ명 연합수군은 왜선의 절반도 안 되는 200여 척의 전선(戰船)밖에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병사들에게 전투태세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 경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조ㆍ명 연합수군은 노량해협으로 진격하였다.
그 후 다음날인 19일 새벽 2시경 노량해협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소오 요시토모, 다치바나 도오도라[입화통호(立花統虎)] 등이 이끄는 왜선 500여 척과 조ㆍ명 연합수군이 접전을 벌이면서 노량해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권전이 포함된 이순신 진영에서 5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하고 200여 명의 왜군 수군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자 왜군 수군은 이순신이 탄 배를 포위한 뒤 이순신을 잡고자 하였다. 이때 진린 휘하의 명나라 수군이 이순신이 탄 배를 포위한 왜군 수군을 공격하면서 이순신은 위기에서 벗어났다. 날이 밝기 전까지 야간전투가 밤새 치열하게 진행되는 동안 권전은 이순신 진영에서 왜선 200여 척을 격파(擊破)하고 150여 척을 파손시키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결국 날이 밝아오면서 패색이 짙어진 왜군 수군은 패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조ㆍ명 연합수군의 공격은 낮 12시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때 왜군 패잔선 150여 척 가운데 100여 척이 조ㆍ명 연합수군에 의해 나포되었다. 그로인해 왜선은 겨우 50여 척만 경상남도 남해의 관음포(觀音浦) 방면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이순신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왜선의 퇴로를 차단하던 중 왜선에 포위된 진린을 구해냈다. 그 후 계속해서 남해 방면으로 도주하는 왜선을 추격하던 이순신은 왜선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전사(戰死)하였다. 이때 정유재란 발발 직후부터 이순신과 생사를 같이하던 권전은 끝까지 분전하던 중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 일명 관음포 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노량해전에서 권전과 이순신을 비롯해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홍양현감(洪陽縣監) 고득장(高得藏) 등 여러 명장을 잃는 피해를 입었지만 노량해전은 조ㆍ명 연합수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 후 순천 왜교에 봉쇄당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수군이 부산으로 퇴각한 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왜군과 합류한 뒤 서둘러 일본으로 철수하면서 7년간 이어지던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권전이 이순신과 함께 순국한 사실은 정조(正祖)의 명으로 편간된 아래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전(權詮)>에 “권전(權詮)은 예(輗)의 손자로 등무과(登武科)하고 임란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과 노량대첩(露梁大捷)에 역전동사(力戰同死)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 이충무공전서「권전」
해전(海戰)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에서 왜군 수군 섬멸에 힘쓰던 권전은 죽음으로 정유재란을 종식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이때 권전의 시신이 수렴되지 못하면서 장사를 지내지 못하였다. 그 후 권전은 1606년 의관으로 장사를 지냈다.
4. 맺음말
1592년 중국 침략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선조31) 왜군에게 조선에서 물러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병사(病死)하면서 7년간의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두 차례의 왜란이 끝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조정에서는 1604년(선조37) 6월 25일,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공신(功臣)들에게 공적의 대소(大小)에 따라 대대적으로 시상을 하였다. 이때 선조가 파천을 할 때 어가(御駕)를 뒤따르던 사람들에게는 호성공신(扈聖功臣)을, 왜군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 및 군량미 등을 댄 사신들에게는 선무공신을, 임진왜란 중이던 1596년(선조29) 7월 충청도에서 왕실의 서얼인 이몽학(李夢鶴)이 일으킨 난을 평정한 공신들에게는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호칭하고 각각 3등급으로 나누어 시상하였다.
그 가운데 18명을 선무공신 1, 2, 3등으로 책봉할 때 빠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정에서는 1605년(선조38) 4월 9,060명을 선무원종공신 1, 2, 3등으로 나누어 녹훈하였다.
이때 권전장군은 고경명(高敬命)ㆍ고종후(高從厚)ㆍ곽재우(郭再祐)ㆍ김면(金沔)ㆍ류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당시 함께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된 사람들의 행적으로 미루어보면 권전장군이 임진왜란 때 세운 전공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함께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된 사람들에 비해 권전장군의 이름과 행적은 생각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다. 이는 해전의 기록보다 육지전의 기록이 많이 남겨졌기 때문에 연구 또한 대부분 육지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일어난 일로 파악된다.
권전장군은 정유재란 이전 김륵과 곽재우 진영에서의 활약은 물론, 정유재란 이후 이순신 휘하의 선봉에서 명량해전을 대첩으로 이끄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에 더해 노량해전 때 끝까지 분투하다 이순신과 함께 역전동사하였다.
육지전에 비해 해전에서 공훈(功勳)을 세운 인물들 가운데 알려진 예가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해전에서 분전하다 이순신과 함께 순국한 권전장군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며 이에 더해 그는 차디찬 추운 겨울 노량해전에서 전사했을 때 시신을 찾지 못해 훗날 의관으로 장사를 지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그의 이름과 행적을 널리 알려 시신도 없이 의관으로 장사를 지낸 그의 넋을 기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고를 통해 이순신과 함께 역전동사한 병암(屛庵) 권전(權詮)장군의 이름과 그의 임진왜란 때의 행적이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
□ 참고문헌
慶尙巡營錄
金溪誌
亂中雜錄(趙慶男)
매일신문
雙修堂實紀(李洪仁)
宣武原從功臣錄券
承政院日記
辛卯別試文武科榜目
安東權氏大同世譜
盈德郡誌
울진신문
李忠武公全書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최효식, 국학자료원, 2004.
朝鮮王朝實錄
蒼水面誌
倡義錄(郭元甲)
楓林實記(申虬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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