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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
시 부문 마윤지 여름방학 외 9편
평론 부문 당선작 없음
마윤지
199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cucurumajee@hanmail.net
■ 당선작
여름방학
너 매미가 언제 우는지 알아?
동트기 전부터 아침 먹을 때까지 우는 애가 참매미다
아침부터 낮까지 우는 매미는 말매미고
에스파뇰 공부를 한다고 했지
우리는 마당에 앉아서
따르르르 아르르르 한참 연습했다
보쏘뜨로-스 보쏘뜨라-스
너무 뜨거운 날엔 옥상에 물을 뿌렸다
크고 넓은 나뭇잎
일 층 대문 밖 골목
옆집 뒷집에까지 몰래 그렇게 했다
너넨 울면서 새도 쫓고 더위도 잊는다고 하던데
아니야 매미는 떨면서 소리를 내는 거야
가득 찬 고무 대야
아주 느리게 헤엄치는 날개들
불이 너무 뜨거워 불 속에 손을 넣었다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했다 *
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
우리는 농담을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나는 평생 그런 걸 해 본 적이 없어
손에 땀이 났습니다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여기에 왜 왔나요?
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유롭게 말해 보세요
돌아가면서 농담하는 시간인가 봐
사람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옆자리 앉은 사람이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로
우리가 어떤 농담을 하는지 보러 왔다고 했습니다
당신 차례가 되었습니다
안동에서는 조문객들이 절을 할 때마다
어이 어이 어이 어이
곡소리를 낸다고
그러면 상주와 가족들이
어이 어이 어이 어이
곡을 받는다고
사흘 장이 끝날 때면 목이 아파
아무도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했습니다
선생님이 창문을 반쯤 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서울에서 밤을 보내며
흠흠. 목을 가다듬고 소리 내어 말해 봅니다
개구리가 저기서 맹하면 여기서 꽁한다
그게 맹꽁이다
날이 무더워지기 전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초여름
장독대 안에는 분명 매실이 있습니다 *
생활과 비생활
공용주차장에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이제 막 서늘한 바람이 부는데 언니는 짧은 바지를 자주 입었다
비가 많이 왔다 앞을 볼 수 없어서
건물 사이를 잇는 다리 밑에서 기다렸다
손 안 놓을 거지
그래 그만 물어봐
언니 방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다
포스터가 말려 있고 책상 서랍엔 일기가
문제집 앞 장엔 함께 과외받는 친구들이 별명을 적어 꾸며 놓은 낙서
담배를 몇 번 태웠다는 것
가끔 학교 사물함에 쓰던 세 자리 비밀번호 자물쇠가 문에 걸려 있었다
뭐야 나 진짜 화났어
자전거는 이렇게 배우는 거야
그건 그냥 거짓말이야
언니는 이제 충주에 산다
강줄기가 있고 민물고기 낚시터가 많은
무릎이 자주 저리다면서 오랜만에 같이 자기라도 하는 밤이면
발바닥을 주물러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어색하고 어리둥절해지는 곳
얼마 지난 미래에 저울의 영점을 두는 방법이나
의자 다리의 나사를 겉돌지 않게 조이는 법
슬프지 않게 안부를 전하거나 칼을 가지런히 꽂아 두는 법
입술이 두꺼웠나 그림을 잘 그렸나 빨리 떠올리는 법
구름만 보고도 태풍 읽는 방법을 알고 싶어졌다
사실 자전거를 어떻게 타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고
언니가 없는 사진들 언니만 있는 사진들
작고 얕은 그릇에 우유와 으깬 과자를 섞어
골목의 쓰레기 더미 아래에 놓을 때
숨을 고르며 우리가
같이 있었다는 것 정도만
탄금호 수류를 따라 서울에서 이어지는 길
송전탑이 들어서고 있었다 *
폭염
―충주
강에서 낚시를 하던 날
마을에 불이 났다
큰불일수록
혼자인 사람에게 가서 붙는다고
미끼를 몇 차례 다시 끼우며
모든 초록색과 모든 갈색으로
빛나는 잉어를 보았다
불이 자꾸만 강이 되었다
바다보다 강이 깊다는 말을 자주 떠올렸다
죽은 남자가 누군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혼자인 여럿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찌는 주저앉을 때 부르르 떠는 모양
조용한 강가
나란히 죽은
여름의 잉어 떼
햇빛이 느티나무 아래
갈라진 몸을 안고 오래도록
서 있다 *
괴산에서
사람들은 산자락에 구덩이를 파고 살았다
슬픈 일이 있을 땐 울었다
아주 어리거나 아주 아팠다
퇴비 썩는 냄새가
오래된 흙의 틈새에 묻어 있었다
건넛마을이 불에 타며 반짝였다
곧 새 치아가 날 거야
어떤 기도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지난날 꿈에서 본 공터
과일 껍질로 만든 장난감 배
운동화 밑창에 붙어 있던 이파리를
땀이 식을 때까지 중얼거리며
구덩이 속에서 손을 잡았다
늦게 자면 키가 줄어든다고
물어본 적도 없는 걸
먼저 묻힌 우리가 이야기해 주었다
어제와 오늘은 더 작은 구멍 속
심장을 심은 자리
텅 빈 밤 내내
돌들이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
무릉리 무릉도원집
이 집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죽는 생각을 했다
우울 속엔 땅콩버터와 유람선
가까운 곳엔 귤나무와 돌고래
눈물을 많이 흘린 날엔 잠을 잘 잔다
한라산 등반 코스 중에는
한라산으로 이어지지 않는 길이 있다
산에서 평지를 생각하고
섬에서 육지를 생각해
해가 집의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 나가는지
지켜보게 되는 일
파도와 바람
몸살을
구분하는 일
그만둬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찾아와 집을 보겠다고 한다
몇 분이 사십니까
조금 많습니다
몇 분이 사십니까
삼백 명입니다
무얼 하시렵니까
옷만 갈아입고 가겠습니다
어디에나 창문이 있어 열어 두었다
멀리서 내가 죽었다는 말을
꿈에서 자꾸만 들었다
겨우 시를 읽고 겨우 돌아누워
그림처럼 그 집이 좋았다 *
석모대교
어느 식당에서
밥공기에 주문을 걸어 준다
입술을 묻고 조용히
오래된 소금밭
오래 반짝이고 어둡고 알갱이가 되는
노을
쓸려 가고 몇이
손에 박혀 따가운
천 년이 된 그런 소금밭
다리를 건너는 동안
영원히 다리를 건너는 사람처럼
서울에 심어 놓고 온 대파 생각을 한다
잘 자라라 잘 솟아라
이 세계에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사람에게
주문을 건다
오늘 당신은 아프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습니다
강화도 천일염은 단맛이 많이 난다
사람들이 한길로 나갔다가 한길로 들어온다 *
동지(冬至)
십이월에는 흐린 날이 하루도 없으면 좋겠다
그런 약속이 있으면 좋겠다
놀이터엔 애들도 많고 개들도 많으면 좋겠다
살도 안 찌고 잠도 일찍 들면 좋겠다
조금 헷갈려도 책은 읽고 싶으면 좋겠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차표를 잔뜩 사고 안 아프면 좋겠다
삼십만 년 전부터 내린 눈이 쌓이고
눈의 타임캡슐 매일의 타임캡슐
다 흘러가고 그게
우리인가 보다
짐작하는 날들이 슬프지 않으면 좋겠다
묻어 놓는 건 숨기는 게 아니라 늘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지
그 무엇보다 많이 만져 보는 거지
나중엔 번쩍 번개가 되는 거지
오렌지색 같은 하늘이 된다 맛도 향기도
손가락이 열 개인 털장갑
이를 테면 깍지
햇빛의 다른 말이다 *
해안순환버스
동굴이 많은 섬에 가면
옷이 젖고는 한다는데
삼십 분 간격이야
어디에서나 다시 탈 수 있대
이민지나 전민지가
연등에 자기 소원을 묶을 때
이 해안의 끝에서 끝까지
허공의 손바닥들이 뒤집히며
차르르 차르르르
기사는 친절하고 심심한 사람들
사월에는 음악회를 해요
소리가 멀리까지 울리겠죠
이즈음 건너편 섬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 울음이 들린다고도
동굴 천장이 닫히면 검은 모래 해변까지
파도가 높게 친다
바람 이후에 바람
바람 다음에 바람
바다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동굴이었다면
믿었을까
아빠와 동생이 물에 발을 담갔다
엄마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언니
섬 뒤쪽을 보세요
등대까지 걸어가면 더 잘 보인답니다
소 뒷다리 같은 모양이죠?
그렇다고 해 주세요
아니다
어둠 속에서 잠을 자는 사람
그릇 돌담 메아리
희고 하얀
너도 봤잖아
너도 봤잖아
영원은 물빛
오래전에 출발했다
노을이 너무 아름다워요
다음엔 하루 묵고 가세요 *
천사가 아닌
안녕하세요? 저예요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겨울에게도 안감을 덧대면 어떨까요
조금 두툼하게요
세상 모든 첨탑과 내리는 눈 위에
달걀프라이를 얹어 볼게요
사람들은 왜 높은 곳에서 보는 작은 불빛들을 각별해하나요
자세히 보면 징그러울걸요
어디가 팔꿈치고 손가락인지 모를걸요
아 아름다운 거군요
너무 사랑하지는 않겠습니다
너무 아프고 싶지는 않거든요
라고 말하는군요
아주 귀여워해도 마지않을 존재는 안감이 필요한가요
지금보다 조금 더 폭신한 꿈이어야 좋을까요
창밖엔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종착지들 하양들
흐린 날입니다
바늘에 실도 끼우지 못할
한사코 겨울의 풍경
거리에서는 저마다
그릇에 첫눈을 가득 퍼 담아 주면서
이걸로 과일도 사 먹고 옷도 지어 입으렴
귀한 것이니 다른 것은 만들지 말으렴
그래도 저는 감히
오랜 밤 오랜 공터
이 세상에서 막 첫잠에 드는
헐벗은 슬픔이 누워 있다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 보기 위해 온 것만 같습니다
당선 소감
저에게 당신이 묻어 있습니다
많이 두렵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교만인 것 같아 주춤하게 됩니다. 신인이 이렇게 소심해서야 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사를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윤지예요. 오랜 겨울을 지나, 이 봄에 시인이 되었습니다. ‘최고의 고통과 최고의 희망을 향해 동시에 나아가’도록 기회를 주신 심사 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엄마와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던 날, 자전거를 타는 엄마의 엉덩이가 너무 웃겨 웃음이 났습니다. ‘엄마가 언제까지 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슬픈 생각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본 적 없는 움직임이었다고 할까요. 가끔 함께 자전거를 타는 친구에게 우리 엄마 자전거 타는 뒷모습이 너무 웃기다고 하니, 친구는 제게 ‘네가 누구에게 자전거를 배웠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군요. 제 모습도 썩 자연스럽진 않았나 봅니다. 자전거 타는 나의 모습을 본 적 없듯, 타인의 모습이 불현듯 저의 삶에 알리바이가 되기도 하고 나라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 제게 누군가의 시간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그것을 시를 읽고 써 보면서 조금씩 감각하게 되었습니다. 서로에게 묻어 나올 수밖에 없는 얼굴이 언젠가는 슬픔이나 부재가, 후회나 분노가 되기도 하겠지요. 지우고 싶겠지요. 잊고 싶지 않기도 하겠지요. 아 잊지 않고 싶다. 아 잊고 싶다. 저를 이렇게 붙드는 순간들을 시라는 이름으로 기록하는 일이 언제부턴가 간절했습니다. 평생 눈부시게 잔인하고 뼈저리게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내 시보다 삶을 더 소중히 하고 싶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무수한 얽힘과 복잡함이, ‘나’라는 분명함으로, 이따금 삶의 수면 위로 모습을 보이는 찰나를 위해. 그 힘으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의 장면들, 자꾸만 되묻게 되는 것들, 하릴없이 다정하고 다정해서 쓴맛이 나는 마음들을 포기하지 않고 시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엄마,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엄마의 엄마가 되어 살고 싶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는 아빠, 정말 고맙습니다. 좀 더 다정하겠습니다. 새 이불을 내주는 언니와 형부, 어여쁘고 애틋한 막내, 온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선생님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식지 않는 손의 기쁨을 오래 살겠습니다. 쓰는 사람인 마윤지를 인내하고 보듬어 주는 내 연인, 함께 쓰고 함께 우는 친구들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심사 경위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 공모 마감 결과, 시 부문에 193명, 평론 부문에 10명이 응모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었던 점은 응모자의 연령대였다. 물론 이삼십대가 대다수이긴 했지만, 십대 청소년부터 고희를 넘긴 분들까지 문청의 푸른 꿈을 고루 펼쳐 보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계간 파란 신인상에 응모한 분들이 몇 분 있었다는 점도 지면에 적어 둘 만한 대목이었다.
심사는 응모자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예심을 진행하면서 검토한바 응모작 수준이 고루 상당하여 작년에 비해 예심을 한 차례씩 더 진행하기로 했다. 즉 시 부문은 1차, 2차, 3차 예심 후 최종심을, 평론 부문은 예심 후 최종심을 진행하였다. 심사 결과 시 부문 당선자로 마윤지 씨를 선정하였고, 평론 부문은 아쉽지만 다음 해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아래는 부문별 예심 결과와 심사 위원 명단이다.
시 부문 1차 예심 결과 32명: 강신명, 권계성, 권루스, 김나나, 김예슬, 김우, 김원호, 김윤, 김이비, 김지영, 나상화, 나지환, 마윤지, 바림, 박선아, 박소현, 배지예, 예시영, 은지금, 이나임, 이두은, 이상돈, 이성은, 이시현, 이현정, 이형준, 이효영, 장제이, 정지민, 정희영, 한소리, 황현.
시 부문 2차 예심 결과 16명: 권계성, 김나나, 김원호, 김윤, 김지영, 나상화, 나지환, 마윤지, 바림, 박선아, 박소현, 이나임, 이두은, 이성은, 이형준, 황현.
시 부문 3차 예심 결과 7명(최종심 대상자): 권계성, 김지영, 나지환, 마윤지, 박소현, 이나임, 황현.
평론 부문 예심 결과 4명(최종심 대상자): 고민제, 윤수하, 황사랑, 황현.
시 부문 심사 위원: 이찬, 장석원, 이현승, 김건영, 정우신, 조대한.
평론 부문 심사 위원: 이찬, 조대한.
시 부문 당선자인 마윤지 시인에게는 축하의 말과 함께 부디 문운이 창성하시길 그리고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에 응모하신 분들 모두 자신이 바라던 글과 꿈을 이루시길 기원한다.
심사 총평
‘活潑潑’, 또는 ‘費隱’의 시학을 위하여
“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 심사를 진행하며 줄곧 떠오른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2,500년 전 자사(子思)가 쓴 <중용>을 1189년 주희(朱熹)가 33장으로 나누어 다시 편찬한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 기록된 것이며, 본래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 편에 등장하는 시구입니다. “솔개는 날아올라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로 번역될 수 있을 저 ‘오래된 미래’의 형상이 섬광처럼 스친 것은 아마도, <중용장구>의 주석으로 나타난 정호(程明道)의 “활발발지(活潑潑地)”라는 기막힌 풀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총 193명의 응모자 가운데 한 분의 주인공을 가려 뽑은 시 부문이나, 10편의 글 중에서 결국 당선작의 영예를 되돌려 드릴 수 없었던 평론 부문에서도, 그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이 글이 감당해야 할 소명이자 책무라면, <중용>의 한 구절로 시작된 ‘심사 총평’이란 일종의 우언(寓言)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서 살아 펄럭거리면서 저토록 아름다운 ‘활발발(活潑潑)’의 자태로 휘날리는 “鳶飛戾天 魚躍于淵”의 풍경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부부지우(夫婦之愚)”에서 “찰호천지(察乎天地)”에 이르는 <중용장구> 제12장 전체의 무궁무진한 아이러니와 그 주제어로 나타난 “비은(費而隱)”을 좀 더 느릿느릿한 걸음새로 숙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시와 문학이란 태초의 순간부터 우리 모두를 저릿하게 일깨우는 감응(感應)의 기억술이자 팽팽한 긴장의 리듬으로 되살아나는 온몸의 무대화(mise-en-scène) 장치였음을 그대의 안광(眼光) 위로 되비추어 보십시오. 그리하여, 자사(子思)가 <시경>의 한 대목을 마름질하여 <중용>에 다시 새겨 넣은 “물고기가 뛰놀고(魚躍)” “솔개가 날아오르는(鳶飛)” 저 청신한 ‘활발발(活潑潑)’의 풍경을 마음껏 누려 보십시오. 어쩌면 이 풍경이야말로, 2,500년으로 셈해지는 까마득한 시간의 깊이와 문명사의 무수한 협곡들을 가로질러 우리 마음속 등불로 타오르는 에피파니(epiphany)의 신성한 위력을 휘감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뒤흔드는 카이로스(kairos)의 비약적 특이점으로 되살아나는 광활한 잠재력을 품은 ‘비은(費隱)’의 형상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군자지도 비이은(君子之道 費而隱)”은 <중용장구> 제12장의 주제문으로 자리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희는 “비 용지광야 은 체지미야(費 用之廣也 隱 體之微也)”라는 주석을 달았습니다. 따라서 ‘비(費)’가 나날의 삶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넓디넓은 쓰임새와 익숙한 테두리를 일컫는다면, ‘은(隱)’이란 ‘성인(聖人)’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심오한 그 무언가를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그 누구라도 볼 수 있으며 우리가 매일매일 껴안은 채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을 ‘비(費)’라고 지칭할 수 있다면, 이른바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들조차 알 수 없는 것이 ‘은(隱)’에 주름진 묘리(妙理)일 것입니다.(“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踓聖人亦有所不能焉.”) 나아가 ‘비은(費隱)’이란 언제 어디서나 항상 볼 수 있는 것이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제 진면목(眞面目)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않는 ‘시(詩)’ 또는 ‘시적인 것’의 묘리를 집약한 표현으로 다시 호명되고 재탄생하는 계기를 맞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계간 파란’이란 이름의 글쓰기 공동체는 ‘비은(費隱)’을 ‘시’와 ‘시적인 것’만이 육화할 수 있을 생동하는 세계와 더불어 저토록 드넓으면서도 은은하게 아롱진 빛살로 숨어드는 순결한 감응의 순간을 가장 첨예하게 집약할 수 있는 일종의 도상(圖像)으로 재정립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 평론 부문에서 당선자를 선정할 수 없었던 이유 역시, ‘비은의 시학’이라는 출사표에서 비롯합니다. 평론 부문에 투고된 10편의 응모작 가운데서 그 이름에 걸맞은 수준과 스타일과 질적 내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고민제 씨, 윤수하 씨, 황현 씨의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이어 갈 수밖에 없었던 글 역시 마지막으로 호명된 응모자 황현 씨의 것이었습니다. 그의 「메타버스 시-하기」는 이지아 시인의 <오트 쿠튀르>를 대상으로 삼아 지난해 최고의 유행어로 떠오른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사유 공간과 ‘시-하기’라는 기성 한국시 담론의 첨점(尖點)을 융합하고 횡단하려는 과감한 시도와 미학적 용기를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떠오른 최첨단의 개념어와 선명한 미시정치학적 엠블럼(emblem)으로 이루어진 선언적 담론의 좌표와 방향성이 그것에 필적하는 사유 내용과 분석의 구체성과 미래 전망을 수반하지 못할 때, 그것은 오히려 ‘시적인 것’의 겉면만을 뒤따르는 기이한 아이러니의 미궁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오랫동안 반추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 시대 문학적 우세종에 기댄 군중심리의 유행을 고스란히 추종하면서 그 지배적 기율과 공통감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다수의 창작과 비평을 어떻게 보고 느끼고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좀 더 깊은 사유와 발본적인 성찰의 시간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어쩌면 이 시간은 계간 파란 신인상 평론 부문에 참가했던 응모자만이 아니라, 공식 등단 절차에 도전하는 모든 신인과 더불어 우리 시대 문학인 모두에게 요청되는 필수 불가결한 상황과 조건으로 이미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1세기 벽두에 시작된 아방가르드 충동과 유행 사조가 이루는 ‘새로운 상투성’으로부터 우리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 시 부문 당선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천수천족수(千手千足獸)”의 촉(觸)을 드리웠던 자리는 ‘비은’을 꿋꿋하면서도 날랜 몸부림으로 잡아챌 수 있는, “기운생동(氣運生動)”의 발견술이었습니다. “길은 恒時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라는 빼어난 모순 형용이 넌지시 일러 주는 것처럼, 우리는 기기묘묘한 오브제(objet)와 “색은행괴(素[索]隱行怪)”로 무장한 포에지의 거죽을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날의 몸을 에두르고 있을 무한한 감응의 터전으로서의 살(la chair)을 찾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비은’을 보이지 않는 빛살의 파장으로 휘감아 오는 포에지의 핵, 그 심부의 불꽃을 한국시의 다른 미래를 열어 나갈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자 촉매로 간직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부부(夫婦)가 나날의 삶에서 언제나 마주칠 수밖에 없을 저 아둔함과 어리석음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이 시작되는 첫 실마리이며 그 지극함에 이르러선 천지에 가득하여 빛난다(“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고 역설한 <중용>의 한 대목이 생기를 잃어버린 화석화된 명구(名句)가 아니라, 마력과 반향을 수반한 매혹적인 포에지로 휘날려 올 수 있는 맥락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일매일 ‘시’와 ‘시적인 것’이 “恒時 어데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결국 아무 데도 없다”는 절망의 모서리를 박차고 날아오르려는, 저 아슴아슴한 ‘감응의 빛살’을 되비치는 낱말의 밀도와 구절의 기세, 행간의 깊이와 여백의 짜임새를 살뜰한 눈빛으로 마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울러 우리의 시선은 저토록 웅숭깊은 침묵의 그늘과 저토록 완강한 치곡(致曲)의 공들임이 현란하게 엇갈리며 아로새기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풍경들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21세기 벽두의 한국시를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로 나아가게 했던 아방가르드 예술 풍조와 더불어 그 세부를 구성했던 강박적 실험 풍토와 그 배면의 시대정신이 우리에게 행사했던 군중심리의 지배적 기율을 넘어서려는 계간 파란의 또 다른 예술적 기투(企投)에서 비롯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미래로 나아가려는 ‘방법으로서의 유토피아’, 그것을 향한 원초적 그리움과 간절한 역사 전망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배반’의 수사학이 나날의 ‘삶/정치’에서 생겨나는 무수한 우여곡절조차 망각하게 만드는 추상성의 푯대 위로 나부낄 때, 우리는 어쩌면 우리 시대의 그럴싸한 풍문과 또 다른 허위의식에 무의식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현대 세계의 일상 곳곳에 매설된 ‘환등상(Phantasmagorie)’의 최면술은 “恒時 어데나 있고” “결국 아무 데도 없”는 물신주의(fetishism)의 실제 효과이면서도, 언제나 늘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환유 연쇄이자 환상의 신기루로 나날의 몸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저 ‘환등상’이라는 욕망의 기관차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생활세계에서 또 다른 ‘비은(費隱)’의 모양새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지금-여기, 제4차 산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원격정보문명의 전면적인 도래와 더불어, 훨씬 더 광범위한 ‘욕망의 원인/대상(objet petit a)’으로 기능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행하는 저 무수한 새로움의 실험들이 생경한 추상화의 구호에 그치거나 상품 미학의 전시효과를 겨냥한 한시적 소모품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는, ‘부부지우(夫婦之愚)’와 ‘부부지불초(夫婦之不肖)’로 표상되는 나날의 얼룩지고 뒤틀린 ‘삶/정치’를 필요충분조건처럼 전제해야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부지우(夫婦之愚)’로 대변되는 비루하고 일그러진 나날의 ‘삶/정치’를 발 딛고 살아가는 자에게만, 그야말로 생동하는 감응의 터전으로서의 ‘시’와 ‘시적인 것’의 ‘살(la chair)’은 제 몸에 깃든 ‘활발발(活潑潑)’의 풍경을 활짝 열어젖힐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가 다시 새롭게 정초하려는 ‘비은’의 시학은 ‘신성한 잉여’를 창출할 수 있는 ‘활발발’의 현실성(費)과 잠재력(隱)을 동시에 품은 것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수 년 전 한국시에서 발흥하기 시작한 알레고리 표현 양식의 예술적 재발명과 창조적 진화에 대하여 전폭적인 응원과 지지를 보내면서도, 그것의 암묵적 재생산과 고정된 패턴화가 이루어 놓는 ‘새로운 상투성’에 대하여 계간 파란이 우려와 경계의 시선을 거두어들일 수 없었던 단서(端緖) 또한 이와 같은 자리에서 비롯합니다. 우리가 새롭게 정립하려는 ‘비은의 시학’이란 2,500년이란 숫자로 압축된 광대무변한 풍화작용을 거슬러 오르려는 진중한 모험인 동시에, 그 시간의 마디마디를 타고 흐르는 창조적 스펙트럼을 ‘무언(無言)의 말’로 집약할 수 있는 단자(monad)의 무늬들을 제 풍경의 일부이자 다른 미래로 펼쳐질 예감의 빛살로 거느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율곡(栗谷)이 그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증풍악소암노승(贈楓岳小庵老僧)」을 통해, “시운 연비려천 어약우연 언기상하찰야(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는 <중용>의 어구들을 변주하여 “어약연비상하동(魚躍鳶飛上下同)/저반비색역비공(這般非色亦非空)”을 새롭게 창안했다는 사실을 다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그는 ‘유・불’의 사상적 중핵을 횡단하고 융합하는 크로스오버의 창조적 실험을 감행했으며, 이를 기반 삼아 좀 더 차원 높은 사유의 공간을 빚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암묵적으로 변주된 ‘비은(費隱)’의 정수는 유가의 규범적 전통으로 관습화된 구태의연한 사유와 감각이 아니라, 불가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과 숨겨진 맥락으로 이웃하면서, 좀 더 깊고 넓은 철학적 사유의 차원으로 진화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달리 말해, ‘사문(斯文)’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에게나 친숙한 ‘유가적 전통의 세계(費)’를 계승하면서도, 이를 그 누구도 온전히 거머쥘 수 없는 ‘유・불 융합적 사유의 묘리(隱)’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전혀 다른 ‘비은’의 세계를 창출했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율곡은 그 누구나 볼 수 있는 “어약연비(魚躍鳶飛)”로서의 ‘비(費)’와 그 누구도 분명하게 알아챌 수 없을 “비색역비공(非色亦非空)”으로서의 ‘은(隱)’을 각각 불가의 ‘색(色)’과 ‘공(空)’에 오랫동안 비추어 보게 만드는 일종의 자기 문답법을 만들었던 셈입니다. 유가의 ‘비’와 ‘은’ 역시 불가의 ‘색’과 ‘공’이 맺는 순환의 원리로 이루어는 ‘동일한 것(同)’이만, 그것은 또한 ‘활발발(活潑發)’의 실제 효과를 중시하는 것(非色亦非空)으로서의 “費이자 隱일 수밖에 없다(費而隱)”는 질문과 답변이, “물고기 뛰고 솔개 나니 이치는 같아(魚躍鳶飛上下同)/이것은 색도 공도 아님일세(這般非色亦非空)”라는 시구에서 동시에 암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곡은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맥락을 ‘유・불’의 핵심 사상을 횡단하는 매우 과감하고 파격적인 크로스오버 용법과 스타일로 실천했던 셈입니다.
어쩌면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는 세 매듭의 형상을 “魚躍鳶飛上下同”이라는 단 하나의 시행으로 압축했던 바로 그 순간, 율곡은 이미 ‘부부(夫婦)’의 ‘지(知)’와 ‘능행(能行)’과 대극(對極)을 이루는 ‘성인(聖人)’의 ‘부지(不知)’와 ‘불능(不能)’이라는 말에 깃든 아이러니의 깊이와 그 다면성의 진의를 알아채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踓聖人亦有所不能焉.”) 나아가 <중용장구> 제12장 전체의 복잡다단한 아이러니가 불러오는 자기 문답법의 암시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달리 말해, 그는 <중용>에 깃든 자기 문답법의 분광(分光)으로서의 진리 산파술을 일찌감치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중용>의 저 오묘한 모순 형용의 어구들을 불가의 근본 명제에 덧대어 놓음으로써, 이들 모두를 좀 더 깊고 넓은 차원의 묘리(“非色亦非空”)로 앙양시키는 창조적 진화를 이루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계간 파란이 새롭게 정립하려는 ‘활발발’의 세계, ‘비은’의 시학을 충실하게 견지하고 있는 미래의 주역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고심했던 시 부문의 응모자는 권계성 씨와 마윤지 씨 두 분이었습니다. 권계성 씨의 「카페 소소」 「먼지의 역사」 「기도하는 사람」 같은 작품이나, 마윤지 씨의 거의 모든 시편은 그 누구나 보고 느끼고 매만질 수 있는 나날의 감각과 일상적 에피소드에 초점을 두고 있으면서도, 그 마디마디의 사이 공간에서 그 누구도 훤히 열어 밝힐 수 없을 시적인 분위기(Aura)를 은은한 그림자로 비추는 매력적인 ‘감응의 빛살’을 에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날의 삶의 공간인 ‘카페’에서 흔히 겪는 “투명 플라스틱 컵을 떨어뜨”리는 일과 그것이 불러오는 “쨍그랑,//소리”에 담긴 청각적 이미지의 반향, “걸레질이 사라진 자리에 정오의 태양이 비친다” 같은 시각적 이미지의 잔영들을 매우 더딘 속도로 펼쳐지는 활동사진처럼 스케치한 권계성 씨의 「카페 소소」는 계간 파란이 나아가려는 ‘비은(費隱)’의 시학에 적확하게 부합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먼지의 역사」가 밀착 묘사의 촬영법으로 “화면 속”에 담은 “기타 치며 노래하는 당신” 같은 형상 또한, “인천, 인천행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인산인해 사람들이 당신의 연주를 지운다”는 ‘역사’의 일상적 풍경(費)과 대조적인 소리의 반향(隱)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니, 소음으로 가득 찬 ‘역사’의 자동화된 속도와 이를 타고 흐르는 군중의 무관심(費)과 그 사이에서 어렴풋이 일어나는 시인의 비애감(隱)을 명료하게 가늠할 수 없는 어떤 “기분”(費而隱)으로 드리워 놓습니다.
‘역사’를 가득 메운 군중과 무수한 사물들이 함께 내뿜는 무심한 속도와 차가운 소음이야말로 우리가 나날의 삶에서 마주치는 ‘비(費)’의 세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의 평준화된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역사’의 속도와 군중의 소음과 함께 그 뒷면에서 소리 없이 일렁이는 무관심과 비애감의 현란한 엇갈림은 ‘먼지’처럼 둔중하게 가라앉은 우리 생의 전체적 의미 연관을 이상한 ‘기분’으로 느끼게 만듭니다. 달리 말해, 하이데거가 주제화한 ‘근본기분(Grundstimung)’으로서의 ‘불안(Angst)’을 그 마디마디의 여백의 짜임새에 ‘은(隱)’의 흔적으로 깃들게 합니다. 따라서 「역사의 먼지」 또한 ‘역사’에 가득한 일상적 움직임의 속도(費)와 시인의 아릿한 내면적 비애감(隱) 사이에서 우리 모두의 ‘근본기분’으로서의 ‘불안’(費而隱)을 탁월한 대위법적 변이의 이미지로 아로새긴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게다가 “엇박의 박수”라는 윤리적 이미지의 거멀못을 통해, 그 전후좌우에 가로놓인 이미지의 다발에 침묵처럼 스민 ‘기분’의 대위법적 배치와 그 역동적인 변이 과정 전체를 장면화하는 솜씨 역시, 미래의 시인으로서 권계성 씨의 앞날을 한껏 기대하게 합니다. 저 거멀못은 「먼지의 역사」에서 생동하는 ‘기분’의 대위법적 변이 과정과 그 윗면으로 솟아오른 ‘비은(費隱)’의 형상들을 빠짐없이 조율하는 미학적・윤리적 평형추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출중한 이미지 조각술과 더불어 반향과 공명의 섬세한 스타일과 정교한 구성법을 두루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계성 씨를 당선자로 선정할 수 없었던 까닭은 다른 투고작들이 보여 주는 고르지 않은 완성도와 일관되지 않은 시 형식과 스타일, 편차가 심한 예술적 짜임새에서 비롯합니다. 또한 온전한 자기화에 이르지 못한 것이 틀림없을 들쭉날쭉한 미학적 태도와 예술적 지향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살핀 두 편의 수작만으로도 권계성 씨는 계간 파란과 함께 나아갈 내일의 동료이자, 한국시의 다른 미래를 짊어질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충실하게 예증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권계성 씨를 시인으로 만나는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되리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마윤지 씨가 「여름방학」에 아로새긴 “따르르르 아르르르”는 우리 한국인들이 마른 입을 풀기 위해 매일같이 사용하는 소릿값의 흔한 의성어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해 ‘여름방학’ 시인의 “에스파뇰 공부”에서 온 것이 틀림없을 스페인어 2인칭 대명사 “보쏘뜨로-스 보쏘뜨라-스”(vosotros vosotras)라는 저 ‘은(隱)’의 목소리는, 친숙한 입말로서의 ‘비(費)’의 목소리 “따르르르 아르르르”와 서로를 마주 보면서 작품 전체로 울려 퍼집니다. 그리고 그 넓은 공명통의 메아리 효과로서 산뜻하고 정갈한 미감을 내뿜습니다. 따라서 위아래로 나란히 늘어선 두 갈래의 상반된 목소리는 그 소릿결의 반향과 공명만으로도 이미 ‘비은’의 시학을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작품 내부의 다른 이미지들에 깃든 침묵의 음영들과 더불어 울리면서, 우리 생의 궁극적 의미 연관 전체를 들춰 보게 만드는 ‘근본기분’, 하이데거가 ‘존재의 목소리(die Stimme des Seins)’라고 일컬었던 ‘은(隱)’의 세계를 말없이 도래하게 합니다.
어쩌면 ‘존재의 목소리’란 「여름방학」의 고유한 시적 아우라, 그것에 깃든 ‘비은(費隱)’의 시학을 익숙하면서도 담박(淡泊)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은은(隱隱)한 뉘앙스로 감돌게 하는 어떤 기색이자 낯선 징후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수천 년의 역사로 이어져 내려온 <주역(周易)> 철학사에서 ‘묘리(妙理)’라는 말로 표현되었던 측정 불가능한 그 무엇에 대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여름방학」 끄트머리에 매달린 “불이 너무 뜨거워 불 속에 손을 넣었다/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했다” 같은 이미지의 매듭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목소리’인 동시에 ‘묘리’로서의 ‘은(隱)’의 세계를 현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력과 반향으로서의 ‘시적인 것’이 나타날 수 있도록 추동하는 어떤 실존론적 징후이자 운명론적 몸부림을 휘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에 나타난 “안동에서는 조문객들이 절을 할 때마다//어이 어이 어이 어이/곡소리를 낸다고”라는 구절이나, 「해안순환버스」의 모서리에 들어박힌 “이 해안의 끝에서 끝까지/허공의 손바닥들이 뒤집히며/차르르 차르르르” 같은 시구 역시, 상갓집이나 여행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풍경이나 에피소드를 소묘한 이미지들일 것입니다. 물론 이들은 나날의 삶에서 종종 접하는 의례적이고 반복적인 상황에서 온 것이지만, “어이 어이 어이” “차르르 차르르르”라는 다소 낯선 의성어와 결부됨으로써, ‘비(費)’의 세계에 가려진 ‘은(隱)’의 보이지 않는 자취들이 드러날 수 있는 존재론적 실마리를 어슴푸레한 기색으로 드리운다고 하겠습니다. 이들은 각각 “날이 무더워지기 전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초여름//장독대 안에는 분명 매실이 있습니다”(「이 세계를 걱정하는 방법」), “그릇 돌담 메아리//희고 하얀//너도 봤잖아/너도 봤잖아//영원은 물빛”(「해안 순환버스」) 같은 형상들과 보이지 않는 별자리를 이루면서, 서로를 비추는 상응(相應)의 메아리로 울려 퍼지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마윤지 씨의 시 형상들이 이루는 저 상응의 메아리는 일상의 안정된 질서를 정지시키면서 느닷없이 휘감겨 오는 생의 무의미와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을 침묵의 반향으로 개시(開示)한다고 하겠습니다.
「폭염」에 나타난 “죽은 남자가 누군지/아무도 알지 못했다/혼자인 여럿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생활과 비생활」의 “얼마 지난 미래에 저울의 영점을 두는 방법이나/(중략)/구름만 보고도 태풍 읽는 방법을 알고 싶어졌다”, 「무릉리 무릉도원집」에 등장하는 “어디에나 창문이 있어 열어 두었다//멀리서 내가 죽었다는 말을/꿈에서 자꾸만 들었다” 같은 이미지들을 다시 한번 천천히 되새겨 보십시오. 계간 파란이 출사표를 던진 ‘활발발’의 세계, 저 ‘비은’의 시학을 이미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는 동시에 그것을 일관된 열정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다른 미래의 주역으로 마윤지 씨를 선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근거를 직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윤지 씨에게 단순한 축하 인사가 아닌 동료 문인이자 하나의 글쓰기 공동체로서 계간 파란의 부푼 기대를 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이루어 가야 할 한국시의 다른 미래를 더불어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계간 파란과 함께 다른 미래로 나아가는 시의 대장정을 시작해 봅시다. (이찬)
심사 소감
파란의 두 번째 신인 시인으로 선정된 마윤지의 시는 안정적이다. 투고한 모든 시들이 소위 평균 이상을 보여 줬다. 마지막까지 거론되었던 권계성의 시가 불안감을 노출시켰던 이유는 심사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매력적인 시를 보증해 주지 못하는 나머지 시들의 낮은 성취도 때문이었다. 숙련도 면에서 마윤지가 보여 주는 고르고 빼어난 아름다움은 파란의 구성원들이 새로운 시인의 탄생으로 확신하기에 충분했다. 마윤지 시인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신인의 개성은 유행하는 흐름에 올라타서 물에 빠지지 않고 ‘서핑’하는 것으로는 획득될 수 없다. 앞 세대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동시에 그들 시의 빈곤을 타격해야 한다. 한국 현대시의 전체 지형도를 인지해야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시가 어떤 좌표를 형성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트렌드의 물결 위에 둥둥 떠 있는 시를 읽고 도래할 희망의 실현을 그릴 수는 없었다. 변별 지점 없이 고만고만하게 찍어 내거나, 기술 있는 선생이 잘 다듬어 준 서정시는 읽을 수가 없다. 산문시가 아니라 좋지 않은 산문시가 나쁘다. 시의 경계 확장이 아니라, 시로 귀속시키는 어떤 질서도 없이, 유폐된 자아의 독백을 누가 더 길게 뽑아낼 수 있는지 내기하는 것 같은, 게임하듯 현실과 가상 세계를 착종시키는, 지루하고 피곤한, 의미 없이 긴 산문시들은 현대시의 곤경과 난경을 증명한다. 짧은 시가 시의 본질이 아닌 것처럼 무모하게 긴 넋두리가 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산문시와 산문은 다르다. 일상과 생활의 비루함이 무분별하게 표현된 시들……. 시가 지녀야 할 분별이 무엇인가를 따져 본다. 거름종이가 필요하다. 수식어의 홍수, 너무나 시적인 포즈의 범람…….
내가 마윤지의 시를, 그의 시인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믿게 되었던 작품은 「생활과 비생활」이었다. 언어를 함부로 다루지 않는 진지함, 행과 연으로 시의 사건과 이미지를 조절하는 능력. 삶을 짊어진 채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고 하는 욕망이 가지런하게 표현된 구절. “의자 다리의 나사를 겉돌지 않게 조이는 법/슬프지 않게 안부를 전하거나 칼을 가지런히 꽂아 두는 법/입술이 두꺼웠나 그림을 잘 그렸나 빨리 떠올리는 법/구름만 보고도 태풍 읽는 방법”은 고독과 절망과 그리움 같은 감정의 하중에 짓눌린 우리에게 시가 선사하는 결곡한 사랑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소중한 의미에 대한 천착이었다. 하여, 우리는 조금 더 살아갈 힘을 얻는다.
중국에서, 호주에서, 1955년생부터 2005년생까지, 공간과 시간의 폭이 광대한 등단 지망생들의 이력. 파란 신인상에 응모해 준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나에게 읽는 행복을 준 새로운 시, 내가 ‘애정’하는 작품도 많았다. 이분들은 ‘등단’이라는 절차와 상관없이 이미 시인이다. 「말의 주름에 관한 보고서」, 「방 탈출 카페」, 「워킹클라스」, 「믹스드」, 「Kiswah」, 「드라이아이스가 녹는 방식」, 「오이스터 케이크」, 「시작하는 빛」, 「메리 크리스마스」. 예심과 최종심 과정에서 가슴 깊게 품고 있었던 작품은 「말의 주름에 관한 보고서」였다. (장석원)
심사란 무엇인가? 가려 뽑는 일이다. 뽑는 사람에게는 뽑는 기준이 있고, 뽑힌 사람에게는 뽑힐 만한 이유 같은 게 있다. 물론 떨어진 사람에게는 떨어지기에는 아까운 재능이 있다. 그러므로 심사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질문을 만나는 일이다.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내 외로움이 이렇게 붉어졌다고 적힌 대답을 읽는 일. 시가 외로움을 가중시키는 건지 경감시키는 건지 헤아려 보다가 시를 쓰는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생각이 미치는 일. ‘가갸’를 왜 ‘가갸’라고 노래했는지, ‘거겨’는 어떻게 ‘거겨’로 비틀렸는지를 제 몸의 소름 더듬듯 들여다보는 일. 그러다가 ‘어허’와 ‘아하’가 나오는 원고들을 만나는 일이 심사를 하는 사람이기 전에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쓰는 사람이 먼저 좋아야 읽는 사람이 좋은 것이듯이, 가려 뽑기 전에 우선 읽으면서 느끼고 배우고 싶은 욕심이 더 크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반복되어 더 명확해진 것이 있었다. 여전히 많은 원고들이 모였고 다종다기한 감정의 언어들이었다. 시적인 언어의 형식도 다양하고 하다못해 투고자의 나이도 여전히 다양했는데, 어린 사람들의 언어가 반성적 거리나 여과 없이 이루어지는 시가 많았다면 도리어 노익장이랄까 나이가 많은 분들의 시에 더 실험적인 시가 많았다는 것이 특기할 만했다. 비판적 거리를 가지고 자기감정을 응시하고 얼마간 그 가상의 질서를 횡단하려는 모험심을 갖는다는 것은 느낌을 받아 적는 것이 아니라 느낌의 거푸집이 시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미적 형식으로서 시를 이해하는 일. 그 형식 안에서 이미 자유로운 분들이 있었고, 아직 연습하는 사람들처럼 어딘지 익숙한 기성의 언어를 끼고 있는 투고자들도 보였다. 그러나 새로움이라는 말의 함의를 너무 야심차게 앙양하다 보면 가장 먼저 침식되는 것이 현실(감)이라는 점도 심사 중에 쉽게 보이는 점들이었다. 작년에도 투고했었던 분들은 그 이름과 원고가 새삼 반가웠다.
최종심에서 심사 위원들의 지지를 받았던 신인들은 권계성, 김지영, 나지환, 마윤지, 박소현, 이나임, 황현의 원고였다. 「시작하는 빛」 외 9편을 응모한 김지영의 시는 고르고 여일한 리듬이 있었다. 사물과 사유의 켜를 찾아 파고드는 세련도가 일정했다. 그런데 언어적 세련도가 내적 깊이를 앞선 것처럼 보였다. 독자적인 세계를 갖도록 충실함을 당부드린다. 나지환의 시는 “마주 앉은 사람이 울 때의 적막함/그걸 이 시간만 되면/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의 수만큼 곱절로 느껴야 한다”(「가을 궤도」)라는 구절처럼 텅 빈 시간에 경험과 감정의 옷을 입힐 수 있는 분이다. 변죽을 울린 기미를 통해서 가닿는 세계가 아직 미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은하수」와 「부활」에서 보듯 상상의 이야기를 밀고 가는 패기가 있지만 작품이 완결되고 나면 다소 장황하다는 생각이 든다. 박소현의 시는 표제작의 제목처럼 “교차하지 않는” 세계에서의 삶을 잘 누빌 줄 아는 시이다. 오늘보다 더 많은 눈물이 예비된 ‘재난’의 하루하루를, 아무것도 교차하는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공활해진 세계를 곧잘 알레고리화한다. 그의 시는 예측 가능하지 않은 방향으로 시를 밀고 가는 능력이 있다. 행간도 매력적이다. 나든 누구든 쉽게 반성적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알레고리가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더욱 일관된 사유의 힘을 필요로 한다. 이나임의 「일상성」 외 9편은 슬픔이나 절망에 갇히지 않는 언어적 도약이 돋보였다. “이목구비가 젖는 동안 허기가 졌습니다”(젖는/졌다)나 “지나치지 못할 만한 장미가 되고 싶었는데/지나치게 퍼붓다가 장마가 되어 버렸습니다”(지나치지/지나치게, 장미/장마), “곡성인지 곡조인지는 박수하는 잎들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들숨으로 불은 번지고 날숨으로 물은 범람해”와 같이 매 편마다 시상의 전개가 활달하게 직진한다. 제목이기도 한 ‘일상성’을 하이데거가 발견한 ‘백색왜성’의 이름이라고 눙을 치거나, 숲의 정령의 이름을 ‘약시(yaksī)’라고 하거나 ‘사보타주’를 기르기 쉬운 식물이라고 명명할 때 이 시인의 언술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아방가르드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창조와 파괴의 동시성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필연성이었다. 그러니 이 신인에게는 하나의 퍼즐만 완성되면 고지가 눈앞이다. 황현의 시는 단도직입의 번득임이 있다. 그런데 행간을 너무 의식해서인가 연결이 쉽지 않았다. 도약은 흐름의 산물이다. “사람이 죽는 날에도/밥을 먹는 게 억척스럽지/매일매일이 기일이다”나 “얼굴이 터질 것 같을 때면/세상도 잠깐 아름다워졌다”와 같은 문장들이 어떤 기대감을 갖게 한다면 “남은 것들이 구질구질할 때는/얼굴을 잘 개어 메리 크리스마스, 말한다”는 읽은 문장을 의심하게 했다. “천지에서 심연을 팔았다. 나는 돈을 털어 심연을 샀다. 사람들은 웃으며 심연으로 사라졌다.” 같은 주석의 문장들은 그 필요도 문장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르톨랑 신화」에서 “오물이 엉긴 하수구로 떠내려가도/기어코 너는 끌어올려질 것이다” 같은 문장은 보다 벼려지고 확장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만든 작품은 마윤지와 권계성의 시들이었다. 축약해서 말하자면 마윤지의 시들은 고르고 안정감을 갖고 있었다. 권계성의 좋은 시들은 아주 좋은 짜임을 가지고 있었고, 행간의 간극도 매혹적이었다. 무엇보다 카페의 적막을 “쌓이는 정오가 카페의/허공을 채운다”고 말할 때의 언어적 재기도 소소한 공감을 발하지만, 플라스틱 컵을 떨어뜨려 적막이 깨지는 순간을 “공간은/자주 균열로 채워지니까”라고 말할 때 ‘균열’은 컵의 것이기도 하고 카페의 것이기도 하며 전체의 공간감을 가로 묶는 것이기도 하다(「카페 소소」). 「기도하는 사람」에서는 “누구나 각자의 자물쇠를 갖고 있다”는 첫 행 뒤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을 배치하는 식의 면밀한 행의 배치가 돋보였다. 말과 말을 겯고 가는 이런 시들은 이 시인의 가능성이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을 역설해 준다. 다만 전체적인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않고, 좋은 작품의 절제와 긴장이 다른 작품에서는 잘 보이지 않거나 그다지 재미없는 장광설과 시 배면의 임팩트 없는 질문들로 빛이 바랬다. 마윤지의 시들에서도 참신한 긴장으로 행간을 밀고 갈 줄 아는 말의 힘이 미더웠고, 무엇보다 작품의 질이 전체적으로 고르며, 이를 반증하듯 작품들 간의 상호텍스트가 재밌게 읽혔다. 「여름방학」에서는 매미가 우는 시간대로 매미의 종류를 식별하다가 이어지는 연에서 외국어(에스파뇰)를 공부하는 사람과 매미의 울음소리를 포개는 행간은 절제된 쾌감과 매혹을 불러일으켰다. 외국어이자 존재의 함성인 매미 울음이 물질적인 존재감을 얻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크기에 걸맞은 화자를 내세울 줄 아는 미덕이 있다. 「여름방학」의 마지막 연에 있는 “불이 너무 뜨거워 불 속에 손을 넣었다”와 같은 불완전한 문장은 어린 화자의 목소리 안에서 그 불협화음을 상당 부분 거두어들인다. “이 집에서 태어나 이 집에서 죽는 생각을 했다”나 “해가 집의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 나가는지/지켜보게 되는 일//파도와 바람/몸살을//구분하는 일” 같은 구절(「무릉리 무릉도원집」), “오늘 당신은 아프지 않습니다/내가 알고 있습니다//(중략)//사람들이 한길로 나갔다가 한길로 들어온다”(「석모대교」) 같은 시행을 읽을 때 느껴지는 화자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유순하고 작은 목소리들인데 충분히 이 시인을 미덥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맞닥뜨리게 될 앞으로의 어려움들조차 예쁘게 잘 헤치고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이 사라진 시대처럼 보이는 이 풍경이 사실 살풍경이라는 것을 마윤지 시인이 착하게 잘 품어 내는 언어들이 보여 주리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당선권에서는 얼마간 떨어져 있었지만 재미난 이야기의 재능이 있는 「효영 낭독회」 외의 이효영, 작금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부단히 문제적인 정황을 발굴하고 이를 매력적으로 형상화한 「욕조」 외의 이성은, ‘일 포스티노’의 재현인 듯, 매혹적인 소리들의 세계를 언어화한 「.wav」의 은지금, 거주지 옥상의 물탱크에 대한 여러 진술들 끝에 사람이 죽은 사고를 슬쩍 덧붙여 소름끼치는 상상력이 끼어드는 형질전환을 보여 준 「비명」 외의 한소리에게도 건투하여 자기 앞의 세계를 완성하시라고 응원의 말씀을 드린다. 결국 이분들이 오늘의 당선자 마윤지 씨의 도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윤지 씨에게 다시 축하의 말씀을 건넨다. (이현승)
올해로 두 번째를 맞는 신인상 심사에 참여하며, 작년보다 더 많은 고민에 빠졌다. 좋은 시란 과연 어떤 것인가. 얼마만큼의 수준이 신인으로 호명될 수준일까. 어떤 원고는 만듦새에 집중한 나머지 시인의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몇몇 원고는 개성과 자신만의 화법을 가지고 분투하고 있었으나, 그 때문에 시편의 짜임새가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저마다의 미학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예심부터 깊은 고민을 하며 여러 차례 원고들을 읽었다. 예심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아쉬운 원고들이 많았다. 내 눈이 어두워 좋은 원고를 골라내지 못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손을 내밀어 주지 못한 원고들에 미안함을 전한다.
많은 원고들을 어쩔 수 없이 골라내며 등단 제도의 한계와 장점에 대한 고민 또한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의 예심과 최종심을 거치면서 이 기회에 호명하고 북돋워 줘야 할 시인을 한 명만을 골라내야 한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고려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시편마다 완성도와 함께, 자신만의 발성을 가진 시인을 단 한 명만 뽑아야 했다. 스스로의 안목에 대한 의심을 끊임없이 한편에 두고 원고를 읽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1회의 신인상을 거치고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 어려운 일과 고통을 기껍고 고마운 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확신을 가진 사람들만이 무언가를 고르고 뽑는 세계는 금세 망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을 추구할 때 버려지는 것들은 불완전한 것들이라는 사실은 당연하다. 어려운 자리를 맞아 고민과 망설임은 당연한 것이라 믿으면서 개인적으로는 너무 오랜 세월 심사를 하는 소위 대가인 분들은 좀 물러나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다양성을 잃은 생태계는 멸종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인원만 선발되는 자리는 그래서 무척 귀한 자리이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이 귀한 자리에 소중한 원고를 투고해 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한 시인의 탄생은 별의 탄생과 같은 무게를 가진다고, 습작기에 괴로워하던 내 손을 잡고 말해 주던 선배 시인의 말을 전한다.
이미 관문을 한 차례 통과한 상태에서 본 풍경은 또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입장이 바뀌면 말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관찰자의 위치가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선을 온전히 전해 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최선은 이런 것일 것이다. 좋은 독자가 반드시 좋은 창작자일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아는 선에서 좋은 창작자는 모두 신실한 독자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문장의 배열에서부터, 맞춤법, 띄어쓰기와 들여쓰기 같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서 실수를 했을 때 원고에 대한 믿음이 떨어졌다. 최선을 다했을 원고를 바깥에 내놓을 때 매무새를 다듬지 않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또한 등단이라는 제도를 통과함에 있어 최근의 젊은 시인들에게 과도할 정도로 영향을 받은 경우 큰 감점 요인이 되었다. 동시대의 시인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일이 예술가로서의 향후 작품 활동과 세계관에 도움이 될지를 떠올려 보면 온당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관련하여 한 시편 내에서 장면을 전환하며 특수 기호를 사용한 경우가 자주 눈에 띄었다. 이것 역시 최근 젊은 시인의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를 부정적으로 읽은 이유가 세 가지 있다. 첫째로 한 편의 시를 온전히 장악하고 구성할 능력이 없다는 혐의를 내포하고 있다. 두 번째로 시는 다른 장르보다 훨씬 짧기 때문에 작은 기호까지도 시인의 사유 안에서 다듬어 사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당연한 이유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동시대 젊은 시인을 무조건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최종적으로 마윤지와 권계성의 원고를 살피며 오래 고민하였다. 권계성의 원고는 초반부에는 좋은 시편들이 많았으나 후반부의 몇몇 시편은 완성도가 떨어졌다. 역량이 있고 앞으로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조금만 더 집중한다면 곧 시편들을 지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윤지의 원고는 전체적으로 안정적이고 차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시편 안에서 진술들이 추상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이는 시편이 착상되는 확실한 공간이나 기억을 시인이 예민하게 느끼고 포착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이 자체로도 귀한 일이며 시인의 일을 능히 해냈음을 증명한다. 거기에 더하여 발판 삼아 더 깊은 시적 모험을 떠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보낼 수 있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한여름의 매미 소리처럼 당신의 울음이 널리 퍼지기를 기원한다.
최종심에 오른 분들 중 안타까웠던 경우가 많았다. 나지환의 시편들은 독특한 발성과 시적 발화 지점으로 눈길을 끌었다. 다만 뻗어 나가려는 감각을 다스리지 않으며 얻을 수 있는 개성적 구성과 시적 모험의 감각이 시편들 한 편 한 편의 구성적 안정성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첫 회의 신인상 투고작보다 한층 발전한 감각을 응원한다. 다만 갈고닦은 개성 있는 감각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시편의 구성적인 안정을 꾀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면 한다. 그것을 시인의 고유한 방식으로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김지영의 작품들도 오래 여러 번 되뇌며 읽었다. 잔잔한 언술 안에서 저 아래 깊이 묻힌 감정의 불씨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정황을 구축할 때 주로 추상어를 사용해 모호한 공간을 구성하였다는 점이다. 때문에 정경이 상대적으로 원경(遠景)으로 인식되고 문장의 이면에 잠재한 감각들을 적극적으로 읽어 내기 어려워졌다. 사진을 예로 들어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이더라도 찍는 사람에 따라 대상과의 감정적 거리가 차이 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좋을 듯하다.
황현의 작품들은 독특한 정황과 소재를 통해 발상을 시작한다. 매력적인 첫인상을 보이나 깊이 읽을수록 소재의 신선도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동시대의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들이 선점해 버린 이미지들을 사용할 때 그보다 못한 시편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어렵고 험난한 일이지만, 시인 자신의 내면에 침잠한 감정을 직시하여 시편을 착상하는 방식을 더 주목해 보면 어떨지 조심스럽게 이야기해 본다. 시인과 화자의 간극에 대해서 생각하고 다시 시인의 삶을 통해 화자를 상연(上演)하는 작업은 겉으로 보기에는 간단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박소현의 작품은 정황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진술을 주로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아쉽게도 그 진술이 일반적 사실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고 직면한 감각을 장난스레 비트는 경향으로 나아가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것을 유려함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회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대상을 진술로 묶어 상태를 고정해 버리는 경우의 문제이다. 화자 혹은 시인이 정경들을 손쉽게 다룰 수는 있지만 감각의 확장은 절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지 않을까. 진술은 인식을 고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껴야 할 때가 더 잦을 것이다.
이나임의 작품은 다양한 방식의 행 갈이나 연 갈이를 통해 리듬을 창출하는 데에 능숙했다. 기법과 함께 내장한 도회적 감수성과 맞아떨어지며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하지만 너무 잘 맞는 옷을 입은 세련됨은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방법적 능숙함이 시인의 내면과 개성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다만 우리가 아는 적당한 세련됨 정도로만 읽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심스레 지적하고 싶다. 앞으로 두 가지 방향이 있을 것 같다. 극단적인 방식으로 스타일을 정제해 나가는 방식을 통해 의미 차원을 넘어서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려 시도하는 방식, 반대로 스스로가 왜 그것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내면의 이유를 찾아 스타일을 내적 신념과 합치시키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은 방법적 차이만 있을 뿐 결국 같은 지점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들 외에 안타까웠던 작품들이 많았지만, 특히 아쉬웠던 두 분은 이형준과 바림이었다. 이형준은 원고의 순서 배열이 미덥지 않았다. 원고의 초반부 두 편이 나머지 원고들보다 못해서 초반부터 매력을 잃고 시작하는 원고였다. 나머지 시편들은 빛이 바래게 되었다. 스스로의 시편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배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 또한 열 편이나 되는 원고를 투고해야 하는 신인상 제도에서 중요하게 판단할 가치임을 떠올리게 된다. 바림의 시편들은 상투적인 비유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구어와 문어의 차이를 섬세하게 판단하지 않은 부분이 눈에 걸렸다. 그러나 시편마다 마음이 덜컥 넘어지게 하는 감각적인 진술들이 눈에 띄었다. 충분한 시간과 사려 깊음으로 자신만의 단단한 언어를 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 더 좋은 원고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심사자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전하려 열심히 해 보아도 어느 정도 전달될지 미지수이며, 이것이 옳은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심사 제도는 완벽한 것이 아니며 심사자는 시를 읽는 기계도 아니다. 작품의 수준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경우는 제도를 통과한 이후에도 자주 있을 것이다. 시험을 치는 경우 정답을 맞히는 것을 목적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데에 시험의 의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의 조언도 그대로 듣는 것은 옳지 않다. 철저히 복기하고 자신이 하려던 작업을 고집스레 지속하며 저들의 진단을 어떻게 돌파하거나 회피하여 시인의 작품 세계를 관철할 것인가를 고민해 주었으면 한다. 나는 여기서 확신 없이 떨고 있을 테니, 어서 같이 와서 함께 두려워해 줬으면 한다. 독자로서 소양이 모자랄 때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읽고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진단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김건영)
신인상 응모작들을 읽는 내내 설렜다. 각자의 자리에서 작품을 창작했을 시간과 고투의 모습들이 언어로 드러나 빛나고 있었다. 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생활을 개진해 나가려는 태도가 모든 세대에서 보였다. 예심에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작품들은 짧은 형태의 잠언과 격언, 에세이, 다른 텍스트의 인용이나 삽입 등의 것들이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투고를 해 주신 것에 감사를 표하지만 그것이 신인상을 뽑는 자리에서 과연 새로운 것인지 재고해 주셨으면 좋겠다.
최근의 경향일 수도 있겠지만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 공모에 투고된 시들은 전반적으로 느슨하고 밋밋했다. 은유와 이미지를 표현한 시보다 서사와 리듬으로 언어를 운영하는 작품이 많았다. 기교나 창작 방법이 유려한 작품들 사이에서 내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노이즈였다. 김나나, 황현, 권계성, 마윤지의 언어에 귀를 기울였다.
김나나의 「거짓말 같은 장난치기」 외 작품들은 발화가 거침이 없고 유연했다. 다음 세대의 목소리가 예열이 끝나고 이제 곧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특히 ‘나’를 왜곡시키고 적분시키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다만 그것이 인간-신의 구도에 갇혀 있다는 점을 지울 수 없었다. 불쑥 타고 들어오는 박자와 어긋남이 새로웠으나 그것을 구현해 내는 과정이 조금은 익숙했다. 시가 진행되는 과정을 친절하게 보여 줄 필요가 있었을까. 시라는 언어의 회로에서 우리는 회로도를 익히는 것보다 전류를 느끼고 싶다. 김나나의 작품들은 이미지가 희미하고 기표로 끌고 가기엔 그것이 의미하는 속성과 함량을 느끼기 어려워 아쉬웠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다듬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황현의 「메리 크리스마스」 외 작품들은 우선 신뢰감을 주었다. 시행의 운영이 안정적이었고 인상적인 구절들이 많았다. 다만 열 편의 투고작에서 스스로의 표준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후반부의 작품들은 초반부에 배치된 시들에 비해 ‘나’를 객관화시키는 시점이 흐릿했다. 한 편의 시에 관념어와 구체어가 필요 이상으로 노출되었고 그 안에서 녹여 내고자 하는 감정의 폭이 컸다. 최종심에 오른 분들 모두 해당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열 편을 만들어 내기 위해 급하게 작품을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또한 신화나 이야기에서 소재를 차용한 것보다 일상이나 ‘애인’의 관계에서 비롯된 작품의 울림이 컸다고 말해 주고 싶다. 표준을 깨부술 자기만의 기폭제를 쌓아 가길 바란다.
마지막까지 고심한 작품은 권계성과 마윤지의 것이었다. 권계성의 「카페 소소」 외 작품들은 명랑하고 활달했다. 특히 시적 순간을 언어화하여 자신의 경험 장소를 돋보이게 하는 재주가 보였다. 행간의 산뜻한 운영도 믿음직했고 관습화된 세계 속에서 발현된 슬픔과 우울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건져 노래 부르는 방식도 좋았다. 다만 후반부에 배치된 시들이 아쉬웠다. 더 보여 줬으면 하는 시편과 덧붙은 말로 초점을 잡기 어려운 시편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진술과 묘사의 차이, 누군가 바라보는 풍경과 화자가 응시하는 풍경의 차이에 대해 심도 있게 구분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곧 다른 지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최종적으로 당선된 마윤지의 「여름방학」 외 작품들은 쾌적하고 안정적이었다. 차분하고 집요하게 일상의 틈을 파고들어 가 세계의 이면을 뒤집어 놓고 능청스럽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발견하였다. “매미가 언제 우는지 알아?”라는 질문을 “따르르르 아르르르” “보쏘뜨로-스 보쏘뜨라-스”(「여름방학」)로 연동하거나, “텅 빈 밤 내내/돌들이 구르는 소리”(「괴산에서」), “허공의 손바닥들이 뒤집히며/차르르 차르르르”(「해안순환버스」)라고 표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언어에 귀를 열고 있으면 일상의 장소가 환상적인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다른 응모작들에 비해 작품 간의 편차도 적었다. 시적 소재의 기시감과 균등한 미적 시선을 우려하기도 하였으나 심사 위원들은 열띤 토론 끝에 마윤지를 꼽기로 하였다.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으로/살아 보기 위해 온 것만 같습니다”(「천사가 아닌」)라고 발언한 시인의 탄생을 축하한다.
마지막으로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에 응모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심사 위원이라는 무거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심사에 임하였으나 여러분의 작품을 두루 살피기에 미력함이 있었을지 모른다. 모든 분들의 창작 활동에 무한한 응원을 보내고 싶다. 지면으로 인연을 맺었지만 언젠가는 좋은 자리에서 만나 담소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정우신)
계간 파란 신인상의 심사가 다소 특이한 것은 예심과 최종심에 참여하는 심사자 전원이 투고된 원고 전부를 각자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공모전마다 투고되는 원고의 숫자가 다르고 물리적인 한계가 상이하므로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여타 심사의 경우 대개 예심 심사자들이 인원수에 맞춰 등분된 원고를 나눠 읽고 그곳에서 각기 추린 원고들을 모아서 본심을 진행하곤 한다. 금번 계간 파란 신인상 공모에 참여한 분들의 수는 대략 200명이고 요구된 시의 편수가 열 편이었으니, 심사자들에게는 약 2,000여 편의 시 읽기가 개인의 몫으로 할당된 셈이다. 물론 원고에 따라서는 형식이나 내용이 예심 통과 기준에 못 미친다 판단되어 몇몇의 작품만으로 읽기가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선뜻 결정이 어려워 한 작품을 수십 번 재독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당연하게도 정확한 숫자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응모자들이 보내 준 시 묶음은 투고 후 그저 휘발되는 것이 아니라, 최소 여섯 번의 읽기와 여섯 명의 독자를 거치게 된 작품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빼어난 응모작이 선정될 가능성을 높여 준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실제 수천 편의 작품을 모든 심사 위원들이 반복하여 읽는다 한들 숨겨져 있던 보석 같은 시가 새로이 나타나 당선작이 뒤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경험상 당선작으로 결정될 정도의 원고는 미적 취향에 따라 최종 선정의 의견 차이는 있을지언정, 예심을 통과하는 일에는 대체로 동의할 정도의 시적 발상이나 완성도를 이미 갖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잘 쓰인 응모작 한 묶음을 뽑는 결과값은 달라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심사자 전원이 천 단위의 작품을 읽고 한 표 이상의 추천을 받은 작품을 모두 모아 다시 재독을 하는 일에 기꺼이 동의한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보답 없는 쓰기와 간절한 시의 마음들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경쟁과 비교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공모전 형식에서는 제 강점을 보이지 못하는 호흡의 작품들이 늘 있기 마련이기에 이런 방식은 그들의 누락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일종의 안전장치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최종 결정 단계로 진입하고 나면 심사자 저마다의 기준은 또 달리 적용된다. 누군가는 신인에 걸맞은 새로움을, 다른 누군가는 형식적인 안정감이나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가중치를 두기도 할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기준이 없고, 심사 과정은 본인의 안목에 대한 메타-심사이기도 한 까닭에 최종 결정 과정은 언제나 1차로 추리는 과정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나의 경우 앞서 언급된 기준들에 더해 시 읽기의 미적 쾌감이 느껴지는 작품들, 한 명의 독자로서 다시 읽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에 결국 마음이 쏠렸다.
그런 재미에 가장 뚜렷이 부합하는 응모작은 나지환의 「가을 궤도」 외 9편이었다. 독특한 서사적 상황 안에 짜임새 있는 구조를 갖추면서 동시에 시적인 긴장감을 유지하는 능력이 엿보였다. 무엇보다 자기 색채를 뚜렷이 지니고 있어 읽는 이에게 즐거운 독서 경험을 선사하는 텍스트였다. 불법 유턴을 도는 택시 기사의 넉살과 공회전처럼 헛도는 존재의 어두움이 맞닿고, 그 외로운 저녁의 끝에 그럼에도 “오늘의 특선 메뉴인 잡채밥을 주문”하리라는 묘한 낙관과 고집이 담긴 시라고 해야 할까. 다만 그런 매력에 푹 빠져 작품을 읽는 와중에도 나는 이 응모작이 끝내 최종 당선작이 되진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관적인 매혹만큼이나 객관적인 빈틈이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몇몇 시들은 설정의 독특함만이 도드라져 있을 뿐 시적으로 충분히 다듬어지지 못해 새로움보다는 서투름이 부각되었다. 또한 유사한 형식과 발상을 반복하고 있는 작품들도 다소 눈에 띄었다. 장점은 드러내되 자신의 단점을 숨기거나 최소화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애정 어린 사견을 덧붙여 본다.
김지영의 「시작하는 빛」 외 9편은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작품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얇고 투명한 발화만이 눈에 들어왔는데 반복해 읽을수록 그 두터운 완성도가 체감되는 원고였다. 그러한 신뢰는 시의 배치에서 더욱 확고해졌다. 다수의 원고 묶음들을 살피다 보면 상대적으로 서투르거나 과잉되어 있는 시를 표제로 내걸고 오히려 가장 인상적인 시를 눈에 덜 띄는 중간 즈음에 배치해 둔 케이스가 종종 눈에 띈다. 물론 이는 그만큼 시가 자기 객관화가 어려운 장르라는 의미일 테고, 무엇보다 한 편의 시를 쓰는 일과 시집처럼 복수의 시를 쓰고 묶어 배열하는 일은 조금쯤 결이 다른 일이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강약이 조절되어 배치된 응모자의 빼어난 안목이 돋보였다. 초침 같은 속눈썹의 떨림과 기지개의 부들거림 사이에 도착한 아름다운 계절의 풍경, 항아리 위에 오이지를 쌓아 가듯 시간의 여백 사이를 채워 가는 섬세한 문장들도 인상적이었다. 이 자체로도 충분히 완결된 소시집이었지만 최종심에 올라온 다른 원고들에 비해 시적인 강도나 에너지가 조금 적게 느껴진다는 점은 아쉬웠다. 투명하고 담담한 발화들을 그 특징으로 하는 시고인 탓에 경쟁적인 공모전의 형식에서 손해를 본 듯싶다.
마지막까지 선정을 고민한 원고는 권계성과 마윤지의 원고였다. 아마 계간 파란 신인상이 열 편이 아니라 서너 편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면 더 힘든 심사가 되었을 듯싶다. 그러니까 이 최종 당선을 가른 중요한 요소는 고른 완성도였다는 말이다. 빛나는 한 편을 쓰는 일도 어렵지만 자신이 쓰는 모든 시의 완성도를 최소치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일도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권계성의 「카페 소소」 외 9편 내에는 빛나는 작품들이 많았다. 가령 표제작만 하더라도 투명한 플라스틱 컵이 깨지는 듯한 소리, 실수로 튄 커피 방울 등의 소소한 사건과 연이은 문장들로 시공간에 흠집을 내고 그 균열을 다시 채워 나가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다만 그렇게 멋진 문장들을 잡아당기거나 그 성과마저 의심하게 만드는 소수의 작품들이 있었다. 「함께하는행복특별시햇살길7소망주택」, 「노량지앵」, 「날개공장」 등의 시편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를 쓸 수 있다는 면을 보여 줬다는 점에서는 플러스였다. 하지만 특정한 형식이나 주제 혹은 어구를 반복하여 사용하는 일은 그 이유가 확실히 수긍되지 않는다면 도리어 독이 될 수 있고 이번에는 그러한 시도들이 선명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마윤지의 「여름방학」 외 9편은 거의 모든 심사자들의 중복 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하게 받은 원고였다. 특별히 빼어난 작품들을 포함하여 응모작 대부분이 일정 수준 이상의 시적 완성도를 자랑했다. 신인상이라는 것이 가장 잘 쓴 작품을 뽑는 일임과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 잘 써 나갈 것 같은 작품을 예측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마윤지의 원고는 그 미래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말매미의 울음소리와 스페인어의 발음을 아무렇지 않게 겹쳐 놓는 의뭉스러움부터, 삼십만 년 전에 내린 눈의 타임캡슐로 우리의 시간을 연결하는 상상의 깊이까지 모두 인상적이었다. 특정한 시공간을 조탁하는 탁월함 외에도 여러 장점들이 논의되었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을 울렸던 것은 그 세계를 대하는 시적 주체의 태도와 삶의 방식이었다. 어둠이 가장 길게 늘어진 겨울 한복판 털장갑 사이의 깍지 낀 격자들 속에서 햇빛을 발견하는 것, “헐벗은 슬픔이 누워 있”을 뿐인 이 세계에 무언가를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이 살아가리라 여기는 것. 그것이 이 시인이 세계를 걱정하며 농담을 던지는 방식이고 그 묘한 온기에 나는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지면의 한계로 모두 거론할 수는 없었지만 시를 향한 애정과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이제 막 시를 쓰기 시작한 듯한 열정적인 작품들과 자신의 발화에 기쁘게 도취되어 있는 풋풋한 작품들을 읽으며 도리어 내가 설렘을 느끼기도 했다. 언어의 첨단을 겨루는 자리이고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하는 공모전이기에 어쩔 수 없이 탈락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발화들이 시가 아닌 것은 아니다. 각자가 처한 불확실한 미래와 시간을 쪼개어 시어를 매만지는 일이 얼마만큼 힘든 일인지를 알기에, 그분들 모두에게 시를 계속 써도 된다는 허황된 격려를 하는 것은 내 깜냥과 책임을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다만 언제든 읽고 응답해 줄 이들이 있다는 말은 남기고 싶다. 특히 권루스, 김원호, 나상화, 박선아, 이두은, 이현정, 한소리의 응모작은 단순히 한 명의 독자로서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비평가로서도 내가 매혹되었던 감정의 이유를 해명하고 행간에 췌언을 덧붙여 그들의 언어와 나란히 함께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드는 작품들이었다. 모두에게 다정한 감사 인사와 함께 진심 어린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조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