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기원전 230년부터 기원전 221년 까지 10년 사이에 6국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전중국을 통일, 함양(咸陽: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에 도읍을 정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봉건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였다. 진(秦)의 통일로 오랫동안 제후들의 할거와 혼전이 끊이지 않던 국면이 종식됨으로써,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고 생산력은 증대되었다. 영정은 천하를 통일한 후에 최고통치자를 '황제(皇帝)'라 규정하고,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일컬었다. 그는 진왕조의 통치가 만대에 걸쳐 지속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정책을 추진하였다. 첫째, 국가의 모든 정무는 황제가 결재하였으며, 중앙에는 삼공구경제(三公九卿制)를 시행하여 황제의 군정업무를 보좌하였다. 둘째, 군현제(郡縣制)를 추진하여 전국을 36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는 현(縣)을 설치하였으며, 군현의 장은 확제가 직접 임면하였다. 셋째, 도량형과 화폐, 문자를 통일하고, 도로를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다. 진시황이 취한 이러한 조치들은 봉건국가의 통일을 굳건히 다지면서, 백성들에 대한 통치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는 기원전 214년에 남쪽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민중(闽中), 남해(南海), 계림(桂林), 상군(象郡: 지금의 광서 숭좌현<崇左縣>) 등 4개의 군을 증설하였다. 같은 해에 다시 대장군 몽염(蒙恬)을 북으로 파견하여 흉노를 정벌하고, 지금의 내몽고 하투(河套) 일대를 수복, 내륙의 백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이에 진나라의 국경은 동으로는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로는 농서(陇西), 북으로는 장성(長城: 만리장성) 일대, 남으로는 상군(象郡)에 이르게 되어, 진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된 다민족 봉건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정은 유능한 정치가로 중국역사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시황의 통치시기에는 각종 부역이 많고 형벌이 혹독하였다. 백성들은 수확의 3분의 2를 세금으로 내야 했으며, 이 외에도 각종 무거운 부역과 병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는 70여만명을 징발하여 위수(渭水) 남쪽의 아방궁(阿房宮)과 여산릉(驪山陵) 건설에 거액을 쏟아부었다. 그는 또 농민을 징발하여 진(秦), 조(趙), 연(燕)나라의 북방에 있던 장성을 연결하고 동서로 더욱 확장하였다. 즉 서쪽 임도(臨洮: 지금의 감숙성 민현<岷縣>)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요동(遼東: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遼陽市> 서북)에 이르는 장성을 건설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그것은 고대 중국의 위대한 토목공사의 하나로, 고대 중국인민들의 피와 땀과 지혜의 결정체이다. 당시 전국에서 병역과 부역으로 징집된 인원이 무려 150여만명에 달했으며, 남자가 부족하면 여자들도 보급물자 수송에 잡혀갔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어갔다. 진시황의 통치시기에는 법률도 대단히 엄격하고 가혹하였다. 백성들의 반항을 막기 위해, 그는 민간의 무기를 수거하여 없앴으며, 이 외에도 한 사람이 죽을 죄를 지으면 '족주(族誅)'라 하여 그 친족들도 함께 사형에 처하고, 한 집이 법을 어기면 '연좌(連坐)'라 하여 그 마을도 모두 같은 죄로 다스렸다. 백성들은 언제든지 법률 위반으로 고발당하여, 그 벌로 힘든 부역을 하거나 다리를 잘리거나 코가 베이거나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으니, 관청으로 압송되는 죄인이 항상 길에 가득하였다. 기원전 213년에 진시황은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나라의 역사, 의약, 점술, 식수(植樹) 이외의 책은 모두 불사르게 했다. 그 이듬해 방사(方士)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은 진시황의 독재 전횡과 강압 정치에 대해 몰래 모의하였다. 뒤에 진시황이 그 사실을 알고 그들을 잡아들이려 하자 노생과 후생은 도주하였다. 이에 크게 진노한 진시황은 그에 연루된 유생 460여명을 잡아다 전부 생매장하였다. 이 두 사건을 역사에서는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한다. 이를 통하여 진시황이 당시에 사상과 문화를 얼마나 혹독하게 탄압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진시황은 또 공명심이 강하고 낭비가 극심하였다. 그는 즉위한지 12년 동안 다섯 차례나 순행(巡行)에 올라 많은 관리와 군대를 거느리고 다녔으며, 길가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자신의 공적을 천하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진시황의 폭정으로 진나라는 내부 갈등이 격화되어 소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마지막 순행에 올랐을 때,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中車府令: 황제의 문서를 관리하는 환관) 조고(趙高), 가장 총애하던 막내 아들 호해(胡孩)가 그를 수행하였다. 그는 전당강(錢塘江)을 지나 회계군(會稽郡)의 오중(吳中)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평원진(平原津: 지금의 산동성 평원현 동남)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사구(沙丘: 지금의 하북성 광종현<廣宗縣>)에 이르러 병세가 더욱 위중해졌다. 스스로 더 이상 안되겠다는 것을 알아차린 진시황은 황급히 이사와 조고에게 유서를 작성하여 유서와 옥새를 장남 부소(扶蘇)에게 전달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즉시 함양으로 돌아가 장례를 주관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사가 유서를 작성하여 진시황의 결재를 맡으러 갔을 때 진시황은 이미 세상을 떠나 버렸다. 당시에 부소는 진시황에게 '갱유' 사건의 부당함을 간언하다 진시황의 미움을 사서 경성에서 쫓겨나 상군(上郡) 몽염의 군중에서 감군(監軍: 군대를 감독하는 벼슬)을 맡고 있었다. 조고는 그때까지 몽염의 집안과는 원수 관계에 있었던지라 부소가 왕위를 계승하여 몽염이 중용되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라 판단하여, 유서를 내놓지 않고 비밀리에 호해와 왕위 찬탈을 모의하였다. 그는 또 갖은 협박과 회유로 이사를 끌어들여 가짜 유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이 가짜 유서의 내용은 부소가 외지에서 공을 세우지도 못한채 오히려 아버지를 원망하기만 하니 유서를 보는 즉시 몽염과 함께 자살하라고 명하는 것이었다. 몽염은 이 가짜 유서의 내용을 보고 미심쩍은 곳이 많아 자살하지 않았지만, 부소는 사람됨이 충직하고 온후하였던지라 유서의 내용을 사실로 믿고 즉시 자살하였다. 조고는 진시황의 죽음을 발설하지 않고 비밀에 붙인채 진시황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수레의 문을 닫은 다음 주렴을 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백관들에게는 진시황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매일 수레 밖에서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군을 거느리고 수레를 호위하면서 황급히 함양으로 돌아갔다. 무더운 날씨 탓에 진시황의 시신이 부패하여 악취가 밖으로 새어나가자, 조고는 절인 생선을 많이 사오게 하여 수레마다 가득 싣게 하였다. 시신 썩는 냄새를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절인 생선 냄새를 함께 섞여 나오도록 하였던 것이다. 함양에 도착한 후에 조고는 진시황의 죽음을 공포하고 호해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진시황은 역사상 시황제 영정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2. 당의 고조 이연
당(唐) 고조(高祖)는 이름이 이연(李淵: 566 ~ 635), 자가 숙덕(叔德)이다. 태원(太原)에서 거병하여 장안(長安)으로 진격해 들어갔다가, 수(隋) 양제(煬帝)가 양주(揚州)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피살된 후에, 장안에서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9년간 재위하다가 그의 아들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강요로 황위를 선양한 후에 70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장지는 헌릉(獻陵: 지금의 섬서성 삼원현<三原縣> 동북)에 있다. 이연(李淵)은 농서(陇西) 성기(成紀: 지금의 감숙성 진안현<秦安縣> 서북) 출신이다. 일설에는 농서 적도(狄道) 출신이라 하기도 하고, 거록군(鉅鹿郡) 출신이라 하기도 한다. 조부 이호(李虎)는 서위(西魏) 팔주국(八柱國) 사람이었고, 부친 이병(李昞)은 북주(北周) 안주총관(安州總管)이었다. 서기 617년 이연은 수나라 태원유수(太原留守)를 역임하였다. 당시 수나라 정권은 농민대봉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 그는 차남 이세민과 부하 유문정(劉文靜) 등의 종용으로 수나라를 타도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11월에 장안을 점령한 후 대왕(代王) 양유(楊侑)를 황제로 옹립하고 양제를 태상황으로 추존하여 천하를 호령하였다. 서기 618년 5월 갑자일(甲子日)에 양유를 쫓아낸 다음 자신이 직접 황제에 올라 국호를 '당(唐)', 연호를 '무덕(武德)'이라 하고 장안에 도읍을 정했다. 이연은 주색을 좋아한데다 우둔하고 무능하여, 나라를 세울 뜻도 없었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었다. 태원(太原)에서 거병하여 당왕조를 건국하고 전국을 평정할 때까지, 주로 차남 이세민의 지략과 전투에 의존하였던 것이다. 그는 황제에 오른 후에 간신배들을 중용하고 공신들을 시기하였다. 수왕조에서 진양궁(晋陽宮) 부감(副監)을 지냈던 배적(裴寂)은 진양에 있을 때 이연과 술친구였다. 그는 궁녀를 몰래 이연에게 보내주고, 이연과 밤낮으로 주색잡기를 즐기며 황음무도한 생활을 하였다. 진양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도 배적은 이연에게 궁녀 5백명을 데리고 행군하게 하였다. 이연은 황제에 오른 후에 배적의 공로를 가장 크게 여겨, 그에게 높은 작위와 많은 봉록을 내리고 측근으로 삼았다. 원래 진양령(晋陽令)이었던 유문정(劉文靜)은 이세민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각지를 전전하며 싸운 당왕조의 개국공신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연의 의심과 시샘을 사서 모반을 했다는 죄명으로 억울하게 살해되었다. 이연의 장남 이건성(李建成)은 그와 더불어 주색을 즐기며 불량배와 악독한 호족들을 가까이 했는데도 이연은 그를 태자에 책봉했다. | | 그러나 개국에 노고가 많고 공적이 뛰어난 차남 이세민에 대해, 이연은 그의 위세와 명성이 날로 드높아지자 그를 더욱 의심하고 시기하였으며, 이건성 등이 그를 음해하려는 계획을 묵인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아 여전히 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완전히 제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한 번은 이건성, 이연의 애첩 장첩여(張婕妤)와 윤덕비(尹德妃)가 이세민이 황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이연은 그들의 말을 믿고 즉시 이세민을 불러들여 꾸짖었다. "천자는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지, 네가 술책을 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내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찌 이렇게 조급하게 구느냐!" 이세민은 여러 차례 결백을 주장하였지만 이연은 믿으려 하지 않고 탁자를 치면서 크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때 돌궐족이 침입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연은 즉시 분노를 가라앉히고 웃으면서 말하였다. "됐다, 됐어. 돌궐족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서나 의논해 보자!" 서기 626년 6월 이세민이 '현무문(玄武門)의 변'을 일으켜 이건성과 넷째 동생 이원길(李元吉)을 죽이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8월 갑자일(甲子日) 이세민은 다시 이연을 협박하여 황위를 선양받고 이연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존하였다. 636년 10월 경인일(庚寅日) 이연은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연이 죽은 후 그의 묘호를 고조(高祖)라 하였다. |
3. 원의 세조 쿠빌라이
원(元) 세조(世祖)는 이름이 쿠빌라이(忽必烈: 1215 ~ 1294)이고, 예종(睿宗) 투루이(拖雷)의 넷째 아들이며, 헌종(憲宗) 몽케(蒙哥)의 동생이다. 몽케가 죽은 후 제위를 계승하였다. 35년간 재위하였으며, 80세를 일기로 병사하여, 기련곡(起輦谷)에 안장되었다. 쿠빌라이는 몽케가 즉위한 후에 고비사막 이남의 중국 영토를 다스리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각 민족의 지식계층과 군벌들을 모집하였으며, 유병충(劉秉忠), 양유중(楊惟中), 요추(姚樞), 학경(郝經) 등의 영향을 받아 '한법(漢法)'을 채용하여 둔전(屯田)을 일으키는 등 생산력 증대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일찍이 남방으로 진격하여 대리(大理)를 멸망시키고 토번(吐蕃: 지금의 티벳)을 굴복시켰다. 1256년에 개평(開平: 지금의 내몽고 정란기<正藍旗> 서볘수무<石別蘇木>)을 건설하였다. | | 몽케(蒙哥)가 합주(合州)에서 죽었을 때 그는 마침 남송의 악주(鄂州: 지금의 호북성 무한시<武漢市>)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몽케의 사망 소식을 접한 그는 책사 학경의 계책을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몽케의 영구를 맏이하면서 대칸(大汗)의 옥쇄를 차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송의 권신 가사도(賈似道)와 비밀리에 협약하여 군대를 철수하였다. 1260년 3월 그는 대칸을 선출하는 후리러타이(忽里勒台) 제도를 폐지하고 개평(開平)에서 스스로 황위를 계승, 설선칸(薛禪汗)이라 칭한 후 연호를 '중통(中統)'이라 하였다. 쿠빌라이가 즉위한지 한 달도 안되서 몽케의 명을 받들어 화림(和林)에 주둔하고 있던 동생 아리크부카(阿里不哥)도 자기를 대칸이라 선포하였다. 이에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한 쿠빌라이는 그 이듬해 고비사막 북쪽에서 아리크부크를 물리치고 1264년에 항복을 받아내었다. 1267년 쿠빌라이는 대도성(大都城: 지금의 북경시)을 건설한 후 대도로 천도하였다. 12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고쳤으며,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키고 전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재위 기간에 행성(行省) 제도 등 행정, 군사, 조세제도를 수립하였으며, 농업을 중시하여 수리사업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탄(李璮) 및 해도(海都), 내안(乃顔)의 반란을 진압하여 변경지역의 관리를 강화하고, 다민족 통일 중국의 기틀을 다지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무력 진압과 사상 통제로 인하여 내부적으로 계층간 민족간 갈등이 첨예해져 민중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원래 상케(桑哥)를 중용하였다. 그러나 상케는 권세를 믿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조정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어느날 쿠빌라이가 사냥을 나갔을 때 신하 철리(徹里)는 상케가 없는 틈을 타서 쿠빌라이에게 상케의 악행을 밀고하였다. 쿠빌라이는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가 고의로 대신을 모함하는 것으로 판단, 호위병에게 그의 뺨을 몽둥이로 후려치게 했다. 철리는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지면서도 큰소리로 외쳤다. "신은 상케에게 어떤 개인적인 원한도 없습니다. 오직 나라를 위해서 대담하게 말씀드리는 것 뿐이니 부디 간신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지금 폐하께서 신의 말씀을 듣고 상케를 사형에 처하신다면, 신은 내일 죽어도 원한이 없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한 쿠빌라이는 직접 비밀리에 조사해를 보니 과연 상케의 죄상이 낱낱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쿠빌라이는 즉시 상케를 파면하고 가산을 몰수한 다음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는 "상케는 나를 속이고 4년 동안이나 악행을 저질러왔는데, 대신들은 어찌하여 그러한 사실을 아무도 몰랐더란 말이냐!"라고 하면서, 대부분의 대신들을 파면하고 완택(完澤), 불홀술(不忽術) 등을 중신으로 기용하여 조정은 평화를 되찾았다. 1285년 한 어사(御史)가 쿠빌라이에게 제위를 태자 진금(眞金)에게 선위할 것을 주청했다. 또 어떤 사람이 이 틈에 태자가 제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밀고하여 쿠빌라이는 크게 진노하였다. 평소에 매우 효성스럽고 온순하였던 진금 태자는 이러한 비방을 듣고 공포증에 시달리다 죽었다. 아들의 죽음에 쿠빌라이는 매우 비통해하였다. 1294년 정월 초하루 쿠빌라이는 병으로 쓰러졌다. 그로부터 십 며칠이 지난 후 병세가 더욱 위독해지자 승상 백안(伯顔)과 불홀술을 불러 황태손 테무르(鐵穆耳)에게 제위를 계승한다는 고명을 전하고, 21일에 병사했다. 쿠빌라이가 죽은 후에 그의 묘호를 세조(世祖)라 하고, 시호를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라 하였다. |
4. 명의 성종 영락황제
명(明) 성조(成祖) 영락황제는 이름이 주체(朱棣: 1360~1424)이며,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넷째 아들이다. 조카인 혜제(惠帝) 건문황제(建文皇帝) 주윤문(朱允炆: 1377~?)에게서 황위를 찬탈하였다. 22년간 재위하였으며,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비사막 북쪽 정벌에 나섰다가 돌아오던 도중에 65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장지는 장릉(長陵: 지금의 북경시 북쪽 창평현 <昌平縣>의 십삼릉<十三陵>)에 있다. | | 최근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주체(朱棣)는 사실 고려여인 공비(碽妃)의 소생인데 황위 쟁탈 때 자칭 태조의 적자라 주장하였다고 한다. 주체는 연왕(燕王)에 책봉되어 북평(北平)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1390년 원(元) 왕조의 잔여세력 나일부화(乃兒不花)를 정벌하여 전승을 거둠으로써 태조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태조로부터 북부 변경의 군대를 통솔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또한 여러 차례 명을 받고 출정하여 그 위용과 명성을 크게 떨치기도 하였다. 한번은 태조 주원장이 태손(太孫) 주윤문에게 "바람이 불어오니 말총이 천가닥 실날같네(風吹馬尾千條線)"에 대한 대구를 짓게 명하였다. 이에 주윤문은 "비가 내리니 양털에서는 한가닥 노린네(雨打羊毛一片膻)"라 응대하였다. 이것을 듣고 기분이 상한 태조의 안색이 좋지 않자 옆에 있던 주체가 얼른 "햇살이 비치니 용비늘이 만조각 황금같네(日照龍鱗萬点金)"라고 응대하였다. 이에 크게 흡족한 태조는 그에게 아주 대구를 잘 지었다고 칭찬하였다. 그후 태조는 주체가 문무를 겸비하였다는 것을 알고 그를 더욱 총애하여 주윤문을 후계자로 세우지 않을 생각까지도 하였다. 그러나 종법제를 유지하고 내분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주윤문을 태손으로 책봉하라는 신하들의 강력한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가 병사하면서 건문황제(建文皇帝) 주윤문에게 황위를 계승토록 하고, 번왕(蕃王: 변방을 지키는 제후)인 자식들에게는 경성으로 달려올 필요 없이 영지를 지키라고 명하였다. 주체는 홀로 밤중에 남쪽으로 내려왔으나 회안(淮安)에 당도하였을 때 건문제가 보낸 사자에 의해 제지당하여 다시 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주체는 건문제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건문제는 변방의 제후국인 번(蕃)을 없애려고 하였으나 주체가 전력을 다해 끝까지 반대하였다. 주체 자신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는 태조의 <<황명조훈(皇明祖訓)>> 중의 "누구든 감히 조상의 제도를 고치려는 자는 간신으로 간주하고 처형하라"는 조문을 인용하여, 군주의 측근에 있는 간신배들을 몰아낸다는 것을 명분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그후 남경으로 진격하여 1402년 6월에 황위를 찬탈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고쳤다. 주체는 황제에 즉위한 후에 먼저 3일간 황궁 청소를 명령하고 궁녀와 내시를 거의 다 죽였다. 그리고 항복하지 않으려는 건문제의 옛신하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으며, 이때 제태(齊泰)와 황자징(黃子澄)은 산채로 사지가 찢겨 죽었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철현(鐵鉉)은 경성으로 압송되어 주체를 보고도 의연히 돌아서서 굽히지 않고 항변하였다. 이에 크게 진노한 주체는 그의 귀와 코를 잘라서 삶은 후에 그의 입속에 밀어넣어라 명령하고는 그에게 맛이 어떤지를 물었다. 철현은 사나운 목소리로 답하였다. "충신과 효자의 고기가 어찌 맛이 없겠소이까!" 주체는 다시 그 자리에서 바로 그를 칼로 난도질하여 베어 죽이라 명하였다. 철현은 죽어면서도 입을 놀리지 않고 욕을 해대자 주체는 또다시 그의 시체를 기름솥에 집어넣어 태우라 명했다. 문학박사 방효유(方孝儒)는 건문제가 분신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상복을 입고 곡을 하며 궁궐로 들어갔다가 주체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 며칠 후 주체는 그에게 자신의 등극을 위해 즉위 조서를 작성하라 명했다. 방효유는 붓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울면서, "죽일테면 죽여라. 난 절대 조서를 쓰지 않겠다!"라고 욕하자, 주체는 "네가 아무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설마 너의 구족도 돌아보지 않을까?"라고 말하였다. "구족이 아니라 십족을 멸해도 난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큰 소리로 말한 후에 방효유는 붓을 주워들고 종이 위에 큰 글자를 몇 자 써서 주체에게 던졌다. 주체가 그것을 들고 보니 "연적찬위(燕賊簒位: 연의 도적이 황위를 찬탈하다)" 네 글자였다. 화가 난 주체는 방효유를 꽉 잡으라고 한 후에 칼을 들어 그의 입을 귀 옆까지 베어버리고 다시 감옥에 가두었다. 주체는 또 방효유의 종족, 친구, 문하생, 십족 등 873명을 체포하여, 한명 한명 그를 만나게 하였다. 그래도 그가 끝까지 동요하지 않자, 주체는 방효유와 그의 십족을 모두 죽이라 명했다. 건문제에게는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주체는 그를 55년간 가둬 두어 멍청이로 만들었다. 항복을 바라는 건문제의 옛신하들에 대해서는 주체는 과거를 묻지 않고 능력에 따라 등용하였다. 남경을 함락시켰을 당시 건문제 때 여러 신하들이 올린 책략서를 획득하였다. 신하가 그것을 들고 가서 그에게 보이자 그는 "이들은 당시에는 건문제의 신하였기에 당연히 그를 위해 계책을 내놓아야 했을 것이니 굳이 그것을 살펴볼 필요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 책략서들을 모두 불태우라 명함으로써 그에게 투신한 많은 대신들의 근심을 없애주었다. 주체는 비록 그의 정적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지만 그가 번왕(藩王: 제후)들의 병권을 해제한 것은 중앙집권을 공고히 다지는데 대단히 유리하였다. 그는 정화(鄭和)를 서양으로 파견하여 쇄국의 벽을 허물고 무역을 희망하는 30여개국과 교류를 가졌다. 그리고 노아간도지휘사사(奴兒干都指揮使司)를 설치하여 흑룡강(黑龍江), 우수리강, 우띠하(烏第河), 쿠예도(庫頁島) 등지를 관할하게 하였으며, 고비사막 북부를 다섯 차례나 원정하여 원나라의 재건 세력을 평정하였다. 북경성 건설과 북경 천도, 만리장성 중수, <<영락대전(永樂大典)>> 편찬 등은 모두 중국 역사상 커다란 업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황성의 동안문(東安門) 북쪽(현재의 동창후퉁<東廠胡同>)에 동창(東廠)을 설치하여 탄압정치를 강화하고, 환관을 중용하여 환관이 정사에 간여하고 농민을 심하게 착취함으로써 당새아(唐賽兒)의 농민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주체의 황후는 개국공신 서달(徐達)의 장녀이다. 서황후(徐皇后)가 병사하자 주체는 그녀의 여동생 서묘금(徐妙錦)을 황후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서묘금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주체는 끊임없이 궁녀를 보내 서묘금을 설득하였으나 그녀는 모두 거절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그후 주체의 명을 받은 궁녀가 서묘금의 안방으로 뛰어들어가 반드시 황궁으로 가야 한다고 재촉하자, 그녀는 "내겐 여성적 매력이 없어 황후가 되기에 부족하니 폐하께 다른 훌륭한 여자를 간택하시라고 고해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궁녀가 궁궐로 돌아간 후 그녀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이 일로 주체는 매우 낙심하여 다시는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다. 1424년 주체는 다시 북벌을 떠났으나 달단족(명대에는 동몽고인을 가리켰는데 지금의 내몽고와 몽고인민공화국의 동부에 거주했음) 군대를 찾지 못하여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는 도중에 병이 나서 7월에 유목천(楡木川: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다륜현<多倫縣> 서북쪽)에서 죽었다. 죽기전에 영국공(英國公) 장보(張輔)를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태자 고치(高熾)에게 황위를 계승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주체가 죽은 후에 그의 시호를 효문황제(孝文皇帝)라 하고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그러나 1538년 가정제(嘉靖帝)가 그의 묘호를 성조(成祖)라 고쳤으며, 역사에서는 습관적으로 그를 영락황제(永樂皇帝)라 칭하기도 한다. 주체가 죽은 후에 궁녀 30여명을 함께 순장했다고 한다. 궁녀들을 순장하기 전에 먼저 잔치를 벌여 후하게 대접한 다음 방안으로 데리고 가니 일시에 곡소리가 밖으로 울려퍼졌다. 그녀들이 작은 받침대 위에 올라서서 각자 자기의 목을 천장에 매단 후 내시가 그 받침대를 치워버림으로써 그녀들은 산채로 매달려 죽었다. 이러한 행위는 통치자들에 의해 "투환순주(投缳殉主)"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도 하였다. |
5. 청의 태조 누르하치
청(淸) 태조(太祖)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는 만주족으로 명왕조의 용호장군(龍虎將軍)이었으나 후에 '후금(後金: 청나라)'을 세웠다. 11년간 재위하였으며 전쟁중에 화포에 맞아 68세에 죽었다.(일설에는 악성 종기로 죽었다고도 함) 장지는 심양복릉(沈陽福陵: 지금의 요녕성 심양시<沈陽市> 동북쪽 천주산<天柱山> 기슭)이다. 누르하치의 선조는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건주좌위(建州左衛: 명대 중엽 이후 지금의 요녕성 신빈현<新賓縣> 경내에 있었음) 도지휘사(都指揮使)에 책봉되었다. 그는 일찍이 도독첨사(都督僉事), 용호장군(龍虎將軍) 등에 책봉되었다. 1583년부터 그는 30여년간 여진족 각 부락을 통일하고 군정합일의 팔기제도(八旗制度)와 만주글을 창조하였다. 1616년 정월 임신일(壬申日)에 칸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도읍을 허투아라(赫圖阿拉: 지금의 요녕성 신빈현 서쪽)에 정한 후,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후금(後金)'이라 부른다. | | 1618년부터 그는 요동(遼東)의 명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요동지역을 점령하였으며, 1625년에 심양(沈陽)으로 천도하였다. 누르하치는 만년에 이르러 자기 아들 중에 국정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후계자를 확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8명의 화석패륵(和碩貝勒: 패륵은 청나라의 종실 및 몽고 외번<外藩>에 수여된 작위. 지위는 군왕<郡王>의 아래 패자<貝子>의 위)에게 공동으로 조정대사를 처리토록 지시하였다. 1626년 초에 누르하치는 대군을 이끌고 영원(寧遠: 지금의 요녕성 흥성현<興城縣>)을 공격하였다. 명나라 조정의 영원성(寧遠城) 수비 대장 원숭환(袁崇煥)은 완강히 버티면서 성을 타고 기어 올라가던 만주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켰으며, 이로써 만주군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누르하치는 병사들을 지휘하여 성 아래에 구멍을 뚫어 성벽을 허물고 입성할 준비를 시켰다. 이를 발견한 원숭환은 서양에서 도입한 화포로써 반격을 가하였다. 이에 누르하치는 포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여 황급히 전군을 이끌고 후퇴하였다. 같은 해 7월 누르하치는 상처가 재발하여 청하탕천(淸河湯泉)에서 요양을 하기도 하였으나, 8월에는 상처가 더 심해져 배를 타고 심양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일찍이 대패륵(大貝勒)과 간통한 적이 있던 왕비 나라씨(納喇氏)를 목매어 자결토록 명하였다. 8월 경술일(庚戌日)에 누르하치는 상처가 더욱 악화되어 애계보(애鷄堡, 애=雲+愛: 지금의 요녕성 심양시 남쪽)에서 죽었다. 청나라가 건국된 후에 누르하치는 태조(太祖)로 추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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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예년기온과 비슷한 날씨가 이어진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