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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김삿갓 방랑기
2020. 9. 5.
방랑시인 김삿갓 (31)
*가련과 보내는 밤
" 훈장 노릇이 그렇게도 괴로운 일 인가요 ? "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 그러니 훈장님 훈장님 하지 말게."
"그럼 뭐라 부르지요 ?"
"자네 마음대로 .."
"그럼 , 서방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 "
"그거 좋군 ! "
두 사람은 여기서 말을 멈췄다.
가까운 곳에서 밤 개가 짖는 소리가 나는 듯 한데 , 그 소리가 무엇엔가 파묻혀 ,아득하게 들린다.
이순간,밖에서 눈이 내리는지 방안의 공기는 잠잠하고 촛불은 흔들림 없이 고요한 빛을 내고 있었다.
김삿갓은 갑자기 가련을 안아 보고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서방님. 서방님께서 지은신 시가 왼지, 소첩의 신세를 읊픈 것 같아 눈물이 나려 하는군요."
"아니 그건 내 신세타령을 한것 인데 자네 처지와 같다니 그건 무슨 말인가 ? " 김삿갓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감정이 미묘해졌다. 그것은 가련이 입에서 나온 , 서방님과 소첩이라는 말 때문 이었다.
"권주가를 부르고, 가야금과 장고소리에 저의 꽃다운 시절이 모두 지나가 버릴 것 같아서요."
"허허 , 그럴 법도 하군. 허나 사람들의 세상살이가 모두 다 그렇게 지나는걸 ..."
"그럴까요 ? "
"그렇다니까 , 그러니 자기 생각대로 뜻있게 살아가면 되는걸세."
"서방님 ,소첩도 부모님 덕분에 시문을 좀 배워 알고는 있지만 서방님같은 시제는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서방님 ,소첩에게는 간절한 소망이 한가지 있는데 들어 주시겠어요 ? "
"뭔가 ? 말하여보게."
김삿갓은 가련이 기생의 몸이다 보니 말을 함에 있어, 해라를 하여도 될것 이나 혀가 돌아가지 않았다.
따라서 가련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엉거주춤한 반말이 되었다.
"서방님을 곁에서 모시면서 시문을 배웠으면 해서요 ..."
"이번에는 가련의 훈장 노릇을 하란 말 인가 ? 하하하 ..이러고 보니 다 뜻이 있어 날 불렀군 그래."
"달리 생각지는 마세요. 첫째로는 서방님이 좋으니까 곁에서 모시려고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시가 좋아 배우려는 것이에요. 들어 주시겠어요 ? "
가련이는 말을 하며 엉덩이를 방바닥에 끌듯 붙여, 삿갓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앉는다.
"그러다간 이 안변 땅에서 쫒겨나기 십상이지."
"그건 또 왜요 ? "
"사또 자제의 훈장 노릇을 하는 것도 시기가 나 , 나를 쫒아 내려는 사람이 많은데 , 한 발 더 나아가 자네, 가련이와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나보게. 나를 기둥서방이라고 점찍어 배 아파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걸세."
"서방님 , 제가 누구에게 매인 몸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 "
"우선 서진사가 가만히 있지 않을게야."
"서진사가요 ? 호호호호 ..."
가련이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 영감이 제게 침을 흘리고는 있지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지난 봄에는 제 머리를 얹어 주겠다며
이천 냥을 줄테니 당신 ,소실로 들어 오라고 며칠을 두고 치근덕 거렸지요."
"그래 , 거절했단 말인가 ? "
"거절 했지요. 누가 그런 영감탱이 한테 순결을 바치겠어요 ? "
"순결 ? "
삿갓은 눈이 크게 떠졌다. 기생이 순결이라니 ..별스럽게 들리기 까지 했다."
그러자 가련이 눈치를 채고 .."서방님은 기생에게는 순결이 없는 줄 아세요 ? "
"글쎄 , 정절이라는 말은 들은바 있으되 순결 이라는 말은 아직 들은바 없네."
가련이는 갑자기 샐쭉해 지더니 한숨을 푹 하고 쉬었다.
"기생이 순결을 말하다니 어떻게 생각하면 가당치 않지요. 하지만 소첩은 아직 동기 (童妓)예요.
여자는 첫 정을 준 남자를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하는 법이에요. 우리같은 기생들도 마찬가지죠.
그동안 머리를 얹어 주겠다는 사내들은 많았지만 어차피 사내들 틈에서 시들어 갈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첫 정 만큼은 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바치고 싶었어요."
김삿갓은 가련의 말을 듣고 그럴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평생 처녀의 몸으로 늙어 가겠군."
"호호호 ..걱정 마세요. 가련이의 처녀성도 이제는 경각에 달렸으니까요."
"경각이라니 ? "
"아이참 , 서방님도 어쩜 그리 둔감하세요. 제 머리는 오늘밤 서방님의 손으로 정히 올려질 거예요."
이 말을 듣자 김삿갓은 가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 .. 가련의 첫 정의 상대가 되나 ? "김삿갓은 어림없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건 외람 되오나 제가 결정할 문제여요. 서방님, 부디 제 곁에 오래 있어 주세요. 제가 서방님을
편하게 모실수 있어요. 싫다 하시면 기생질을 못해도 좋아요."
김삿갓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가련이와 정이 들더라도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하룻밤 불장난이라면 모르겠지만...
김삿갓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련의 손을 잡았다.
보드랍고 따듯한 손이 그녀의 마음을 손에 쥐어 보는 것 같았다.
"헛참 이거 정말 ,큰 일이군 ! "
김삿갓은 이런 마음이 앞섯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따로 놀았다.
가련의 앵두같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 보았다.
가련의 입에서 흥건한 향기가 났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마신 향기로운 술 냄새였다.
김삿갓은 가련의 목덜미를 자신의 팔로 감아 더욱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자신의 혀를 가련의 입 속으로 넣었다. 코 끝에 가련의 깊은 숨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가련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속 숨을 아낌없이 교환했다.
"아아 ..이러면 안되는데..." 김삿갓의 머리속에선 가련을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끊임없이 샘 솟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가련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가련이 삿갓의 손을 살며시 걷어냈다.
"서방님 잠깐만 .." 가련은 김삿갓의 성급함을 말렸다.
난데없는 가련의 제지로 김삿갓은 머쓱해졌다.
"상 좀 물리고 , 금침을 펼께요."
가련의 의도가 늦게나마 파악된 삿갓은 무안의 웃음을 지었다.
"자네로 향하는 마음이 너무 성급해 미안하네..."
김삿갓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가련은 눈동자를 위로하고 삿갓을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무안해진 김삿갓은 빠른 손놀림으로 주안상을 윗목으로 물리는 가련의 모습을 멍 하고 보다가
술이 취한척 그자리에 벌렁 누워 버렸다.
"서방님, 서방님..."
상을 물리고 비단금침을 펴놓은 가련은 술취해 잠든 척 누워있는 삿갓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자신의 입을 삿갓의 귀에 대고 소근소근 불렀다.
삿갓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전의 성급했던 무안감 때문에 이제는 모든 것을 가련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아이참 .." 가련은 술 취한 척 누워있는 삿갓의 옷을 살며시 벗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활활 타던 황촛불을 끄고 바스락 소리를 내며 옷을 벗더니 삿갓 곁으로 파고 들었다.
팔팔한 젊은 남녀가 자리를 같이하니 열정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삿갓은 가련의 몸을 애무했다.
마치 비단잉어를 만지듯 가련의 몸은 매끄럽기 그지 없었다.
"내 언문 시조를 한수 읊을까 ?" 좀전까지 취한척 했던 삿갓이 속삭이듯 가련에게 말했다.
"그러셔요." 이렇게 말을 한 가련의 입에서는 더운 숨이 뿜어져 나왔다.
"큰 솔밭 밑에 작은 솔밭 .. 작은 솔밭 아래 옹달샘 ..옹담샘을 돌아가니 여우굴이 나왔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 ..." 삿갓은 가련에 귀에 대고 소근소근 말을 했다.
"얼굴이지요. 큰 솔밭은 머리털이고 작은 솔밭은 눈썹일 테고 ..여우굴은 콧구멍이 아니겠어요 ?"
"참말, 맞았다..." 삿갓은 어둠속에서 빙긋이 웃었다.
삿갓이 가련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다가 살금살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 수 읊으랴 ?" ..
"농담하시면 싫어요." 가련은 샐쭉 눈을 흘겼다.
삿갓은 가련의 몸을 어루만져 쓰다듬으며 나지막히 말을 했다.
"창 밖에는 동지섣달 함박눈이 내리는데 금침 속에서는 봄을 맞아 복숭아 두알이 향기롭게 익었도다.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언덕아래 옹달샘은 월궁 선녀가 목욕하는 자리인가 ? "
김삿갓은 이렇게 읊조리며 가련의 옥문을 더듬었다.
"아이 ... "
가련은 몸을 꼬았다.
쌍심지에 불을 붙인듯 활활 타오르는 삿갓의 욕정은 더이상 참을수 없었다.
삿갓은 가련의 몸 위에 포개졌다.
가련의 아래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삿갓은 냄새에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처(妻)와 첫날 밤을 맞았을 때와 같은 냄새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김삿갓은 느즈막히 눈을 떳다.
어느결에 일어 났는지 가련은 이미 몸단장을 곱게 한 뒤였다.
"잠도 곤하게 잘 주무시네요." 가련이 이렇게 말하고 얼굴을 붉혔다.
"자네 탓일세.."
잠이 덜 깬 삿갓의 능청스러움에 가련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눈은 게 눈 처럼 샐쭉 흘겼다.
"예쁘다..."
누워서 올려다보니 가련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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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32)
*예측할수 없는 사람의 운명 .. 가련과의 영원한 이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김삿갓은 항상 안변을 떠나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가련과의 사랑에 얽매어 좀체 , 다시 길을 떠날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가련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항상 걱정이 되는 것은 혹시라도 가련의 몸에 아기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가련과 일생을 같이 한다면 모르겠거니와 김삿갓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처없는 방랑길에, 한순간 불같은 열정에 사로잡혀 저지르고 있는 일 인데 ,만일 아기가 생긴다면 자신 보다 가련의 불행이요, 아이의 불행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가지 생각 때문에 김삿갓의 마음이 이곳 안변에 더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날 사또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더니 사또가 펄쩍 뛰었다.
"이왕 방랑길에 나섯음에 , 무엇이 그리 바쁘단 말이오.우리집 아이가 급제 하는 것이나 보고 떠나도록 하시오. 누가 가르친 아이인데 결말을 아니보고 떠난단 말이오 ? "
사또는 김삿갓을 극구 만류하였다. 사람과의 일로 ,거만이나 아니꼬운 사태에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만 인정과 도리에는 약한 김삿갓, 인정에 얽매어 마냥 속절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사또의 자제가 알성시에 응시하여 장원은 아니었으나 급제를 하여 한양으로 떠났다.
그러자 안변 일대에 돈 깨나 있는 집안에서는 김삿갓을 독선생으로 모셔가려고 난리가났다.
그들은 사또에게 별의별 청을 하는등 한동안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사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김삿갓을 편하게 하고 곁에 두고 싶어했다.
그해 가을이 가고 겨울도 가고 봄이오자 김삿갓은 이제는 기필코 떠나리라 결심을 했다.
지난 일년여 처럼 편히먹고 계집과 잠자리를 즐기려고 고생하는 아내와 어린자식을 두고 가출한 그가 아니었다.
이곳 저곳을 정처없이 떠돌면서 후한 대접보다는 박대를 받는 것이 오히려
편했고, 또 글로써 그들을 매도하여 질타 하는 것을 보람과 즐거움으로 여기는 김삿갓이 아니던가 ?
어느덧 사월이 되어 푸른싹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산야는 진달래의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새봄 바람에 얹혀 삿갓을 쓰고 훠이훠이 도포자락을 날리며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 삿갓은 가련이와 술상을 마주한 자리에서 슬며시 말을 꺼냈다.
"임자, 내가 그동안 너무 바깥세상을 외면하고 지냈네. 사또의 은혜와 자네의 따사로운 품속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었지. 이제 봄도 되었으니 북쪽으로 두만강까지 두루 유람을 하였으면 하네."
김삿갓이 말을 마치자 가련의 두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제 곁을 떠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
"잠깐 외지 바람을 쏘이겠다는 것이지.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 올것 이니 걱정 말게나."
"그렇게나 늦게요 ? "
김삿갓의 방랑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련은 겨울이 오기전 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던 모양이다.
"자고로 시인 묵객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 주유천하(周遊天下) 하는 법이네. 그러면서 자기의 시를
살찌울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지. 내, 일정 전 이라도 자네품이 그리우면 그대로 돌아 올 것이니 너무 염려는 말게나."
김삿갓은 되도록 가련이를 안심시켜 주려고 이렇게 말을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가련이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서방님 뜻이 그러하시다면 할수 없는 일이지만 꼭 돌아 오시는거죠 ?"
몇 번이라도 그녀는 다짐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틀림 없대두. 함흥, 북청으로 해서 두만강 까지 갖다 오려면 빨라야 늦가을 쯤 되겠지..."
"꼭 돌아 오셔야 해요. 만약 동짓달까지 서방님이 돌아 오시지 않는다면 가련이는 죽고 말거예요."
"죽어 ? "
김삿갓은 가슴이 뜨끔했다.
"네 , 저를 살리려면 꼭 그때까지 돌아오세요."
"돌아오지"
허나 자신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이별을 앞둔 그날 밤 , 여늬날 보다 더 두 사람의 사랑은 불보다 뜨거웠다.
다음날 아침 밥상을 물린 김삿갓은 시를 한 수 지었다.
"막상 길을 떠나려니 나도 왠지 서글프구나. 붓을 주게."
그의 심정은 매우 착찹했다. 오가다 만난 인연이었지만 일 년 이라는 시간의 거미줄에 서로의 깊은 정을 얽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먹물을 찍어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썼다.
가련문전 별가련 가련행객 우가련 ( 可憐門前 別可憐 可憐行客 尤可憐 )
가련막석 가련거 가련가망 귀가련 ( 可憐莫惜 可憐去 可憐不忘 歸可憐 )
가련이 문전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행객이 더욱 가련 하구나
가련아 가련하게 떠남을 슬퍼 말아라
내 너를 잊지 않고 떠난 듯이 다시 오리라.
가련이 시를 읽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의 절저한 사랑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에 슬픔은 더욱 북받쳤다.
가련이는 노자돈을 후하게 내 놓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한사코 받지 않았다.
"임자, 돈을 쓰면서 유람 하는 것은 내 분수에 맞지 않네. 그냥 두어 두게. 나는 빈 몸이 좋아."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대문에서 눈물을 흘리는 가련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이를 악 물고 걸음을 재촉했다.
김삿갓이 관아로 돌아와서 사또에게 불문곡직, 하직을 고하니 사또가 매우 섭섭해 만류 하였으나 삿갓의 결심이 너무도 굳건한 것을 알게된 사또는 체념을 하였다.
그 역시 후하게 돈을 내어 놓았으나 삿갓이 한사코 받지 않으려 하자 ,
"그래 가련이와는 이야기를 잘 나누었소 ?" 가련이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사또가 물었다.
"예, 돌아 다니다가 고달프면 돌아 오겠다고 했습니다. 하오나 기약없는 약속이지요."
"관북을 모두 돌아 보려면 이 삼년은 족히 걸릴 것이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려주시오.
내 그때까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자리가 바뀌더라도 일러놓고 가리다.
그리고 아들놈 가르친 수고는 권해도 받지 않으려 하니 , 대신 가련에게 보내도록 하겠소."
"보살펴 주신 은혜도 백골난망 이온데, 더 없는 배려를 하심을 어찌 잊겠습니까."
김삿갓은 큰 절로써 사또와 작별을 하였다.
이렇게해서 김삿갓은 일년이 넘도록 정이 들었던 안변을 떠나 다시 정처없는 방랑길에 올랐다.
방랑시인 김삿갓 33
석왕사에 얽힌 내막. "상편"
김삿갓은 마침내 본연의 생활로 돌아왔다.
집을 떠난지 이년째 , 그는 안락한 생활보다 천대를 받으며 찬밥 한술로 끼니를 때우게 되더라도
술만 한잔 더해 진다면 바람따라 흘러다니는 지금의 생활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김삿갓이 안변 관아를 떠나 북쪽으로 길을 잡아 발길을 옮긴지 하루째 , 안변 설봉산 석왕사(釋王寺) 앞에 이르렀다. 이곳은 이태조(李太祖)의 건국신화가 서려 있는 곳이었다.
김삿갓이 이곳 석왕사에 온 까닭은 금강산 입석암을 떠나때 " 혹시 안변 석왕사에 가게되면 반월 행자를 찾으시오. 그 아이는 나의 제자로 지금은 그곳에 있소이다. 사람이 선량하고 다정하니 , 삿갓선생을 정성껏 도울것 이오."라는 노스님의 당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설봉산 석왕사는 규모가 워낙 크고 웅장해서 금강산의 장안사나 유점사에 견주어도 규모면에서 조금도 손색없는 큰 절 이었다.
특히 절을 둘러싸고 있는 천년 노송들은 향기짙은 송진 냄새를 풍겨주고 있어 , 금강산과는 또 다른 정치가 물씬 풍겼다.
김삿갓이 경내에 들어서자 처음 보이는 것은 사대천왕 이었다. 사대천왕은 무시무시한 덩치에
머리에는 관(冠)을 쓰고 손에는 커다란 창을 꼬나쥐고, 앉듯이 서서 .. 두 눈을 성큼 부릅뜨고 이곳을 출입하는 죄 많은 중생들을 노려 보고 있었다.
김삿갓은 경내 곳곳을 휘둘러보며 입석암 노승이 말한 반월 행자를 찾았다.
나이가 삼십가량 되어 보이는 반월 행자는 김삿갓을 만나자 크게 반가워했다.
"삿갓 선생님이시라고요 ? 나의 스승이신 큰스님의 기별을 통해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잘 도와 드리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내가 석왕사에 오래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지만 , 있는 동안 구경이나 잘 시켜 주시오."
"예, 석왕사에 대하여는 제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물으시는 대로 설명을 해올리지요."
반월 행자가 앞장서 석왕사 경내를 안내하며 하는 말이,
"선생은 이 절이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해 창건 되었으며 , 절 이름을 석왕사로 부르는지 아십니까 ?"
하고 물었다.
"글쎄요 , 석왕사는 어떤 유래를 가진 절 입니까 ?"
"그럼 제가 자세한 사연을 설명 드리지요."
그리고 반월 행자는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유래를 들려 주었다.
고려말 이성계가 영흥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청년 이성계는 무예를 닦는라고 각지로 떠돌아 다니다가 어느 날 밤에 안변 산속에 있는 조그만 암자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무너져 가는 집에서 서까래 세개를 짊어지고 나오는 꿈이었는데 ,집안에 거울은 깨져 있고
화원에 꽃은 모두 낙화(落花)되어 있었다.
꿈에서 깬 이성계는 마음이 착찹하기 이를데 없었다.
해서 , 암자의 중에게 물었다.
"스님은 혹시 해몽을 할 줄 아시오 ? "
"저는 꿈을 풀 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부근에서 혹시 해몽을 잘 하는 사람은 없을까요 ? "
"여기서 저 산속으로 십 리쯤 더 들어가면 토굴 속에서 수행중인 도사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이 파자점(破字占)을 잘 치기로 소문난 분이니 꿈 해몽도 잘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 도사의 이름은 무어라하오 ? "
"무학(無學) 도사라 부르옵니다."
이성계는 즉시 토굴로 무학도사를 찾아 갔다.
무학도사는 육십 가량 되었을까 , 토굴 속에서 혼자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파자점을 치러 먼저 찾아온 손님이 한 사람 있었다.
"평생 신수를 보려면 당신이 마음 속에 두고 있는 글자를 한 자만 써보여 주시오.
그러면 그 글자를 가지고 점을 쳐주겠소."
생긴 것도 준수하고 입은 옷도 말끔해 보이는 앞선 사람이 붓을 들어 문(問)자를 써보인다.
이성계는 글자를 가지고 어떻게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칠수 있겠나 하는 ,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무학도사는 問자를 손에 받아 들고 , 눈을 감더니 오랫동안 명상에 잠긴다.
그러다가 홀연 눈을 뜨더니 , 問 자를 이리도 놓고 저리도 놓고 바라 보면서 "쩝쩝" 소리를 내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문득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음 ..평생 신수가 아주 고약하군 그래, 당신은 암만해도 거지 신세를 한평생 면하기가 어렵겠소."
그 소리에 놀란 것은 장본인 뿐만 아니었다. 등 뒤에서 무심히 듣고 있던 이성계도 깜짝 놀랐다.
무학도사가 말한 한평생 거지꼴을 면할수 없다는 사람은 어디로 보나 거지차림이 아니었다.
그는 옷도 깨끗하게 입었고 생김새도 준수하여 거지 같지 않았다.
"스님 ! 제가 어째서 거지 팔자를 타고 났다 하십니까 ? 저는 거지가 아니옵니다."
거지로 단정받은 사나이가 이렇게 항의하자 무학도사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했다.
"바른대로 말하라구 ! 問자는 입구(口)자가 문에 걸렸으니, 그대가 문전 걸식을 하는 거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 "
당사자는 그 말을 듣고 움찔 하더니, 한동안 아무말 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
"나는 거지 신세를 면해 볼까 하여 옷까지 깨끗하게 갈아 입고 점을 치러 왔건만,
아무래도 팔자 도망은 못 하는 모양이구나 ! " ...
혼자 장 탄식을 하며 총총히 달아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
그리고 보면 무학도사의 파자점은 족집게 처럼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이성계는 놀라면서도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무학도사의 이론대로라면 문(問)자를 써 보인 사람은 모두 거지라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계는 놀라움과 함께 은근한 실망감도 생겨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찾아 왔는고 ?"
무학도사가 이성계를 바라보며 물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이성계가 말했다.
"저도 파자점을 쳐보고 싶어 왔사옵니다."
"올치 , 그럼 마음 속에 두고있는 글자를 써 내보이게. 그래야 그 글자를 가지고 점을 칠게 아닌가."
도도하기 이를데 없는 말씨였다.
이성계는 도사를 골탕 먹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무 글자나 써내도 상관 없겠습니까 ? " 하고 물었다.
"물론이지 ! 무슨 글자라도 좋으니 당신이 쓰고 싶은 글자를 써보이게."
이성계는 주저하다가 조금전 거지라고 단정 받았던 사내가 썼던 글자와 똑 같은 問자를 써보이며
말을 했다. "이 글자로 점을 쳐보아 주십시오."
무학도사는 問자를 받아 들더니 또다시 눈을 감고 오랫동안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런 연후 , 눈을 뜨더니 문자를 들고, 조금전 사내 때와 같이 이리저리 돌리며 바라보기만 할뿐,
좀처럼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더니 앉아있는 이성계에게 합장 배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
깜짝 놀란 이성계가 만류하자 도사는 이렇게 말을했다.
"장차 이 나라에 주인이 되실 귀인께서 왕림해 주셨으니 이런 황공한 일이 없사옵나이다."
하는 것 이었다.
너무나 뜻밖의 말에 이성계는 크게 놀라며 당황했다.
"도사님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게요.조금전에 다녀간 사람이 問자를 내 놓았을 때는 거지 신세를 한평생 면하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소.
나도 그사람과 같은 글자를 내 놓았는데 나에게는 어째서 엉뚱한 말씀을 하시오."
그러자 무학도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파자점이란 아무리 똑같은 글자를 내놓더라도 그 사람의 심지(心志)와 품성과 기상에 따라
점쾌가 제각기 다르게 나오는 법입니다. 글자가 같다고 점쾌도 같다면 그게 무슨 점이겠나이까 ? "
조금전 까지도 반말지거리를 하던 도사였지만 , 어느새 말투가 존대어로 변했다.
"아무리 그렇기로니, 같은 글자의 해석이 그렇게도 다를수가 있단 말이오 ? "
무학도사는 다시 경건한 자세로 합장 배례하며 말을했다.
"소승은 다만 점쾌가 나오는 대로 여쭈었을 뿐이옵니다. 거기에는 추호도 거짓이 없사옵니다."
이성계는 기가 막혔다.
이런 그의 모습을 간파한 무학도사가 말을 이었다.
"똑 같은 問자라 하더라도 , 조금전에 거지가 내 놓았던 問자와 귀공이 내 놓으신 問자는 근본이 아주 다른 問자 이옵니다."
"근본이 다르다니 그건 또 무슨소리오. 問자가 똑 같은데..."
"소승이 자세한 설명을 올리겠사옵니다. 아까 그 사람이 써낸 問자는 입(口)이 문(門)에 매달려 있는 問자 였습니다.
허나, 귀공께서 내 놓으신 問자는 입이 문에 매달린 문(問)자가
아니옵고 ,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임금군(君)자가 되오니 장차 이 나라에 임금이 되실 분의 글자라 아니하겠습니까 ? "
이성계는 너무도 기막힌 파자점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자신이 장차 이 나라의 임금님이 되실 분이라고 까지 하니 , 가슴이 설레어 견딜수 가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짐짓 마음을 가라 앉히고 웃으며 말을 하였다.
"실상인즉 , 내가 도사를 찾아 온것은 파자점을 치려는 것이 아니고.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기에
하도 이상하여 해몽을 해 보고 싶어 찾아 온 것이오. 도사는 물론 해몽도 하시겠지요 ?"
무학 도사는 합장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을했다.
"파자점이나 해몽이나 모두가 같은 원리이옵니다. 어떤 꿈을 꾸셨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해몽해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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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34)
*석왕사에 얽힌 내막. "하편"
이성계는 간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어떤 낡은 집에 있노라니 , 별안간 모든 닭들이 일시에 "꼬끼오 ! " 하고 요란스럽게
울었습니다. 닭의 울음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내가 있던 집이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뛰쳐 나오려는데 이미 지게에는 서까래 세개를 얹어 놓았더란 말입니다."
"꿈은 그뿐이었습니까 ? "
"아니지요.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밖으로 나오니까, 뜰어 피었던 꽃이 별안간 떨어지고 , 그와 동시에 난데없이 거울이 깨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거예요.
아무리 생각 하여도 예사 꿈은 아닌듯 한데 , 혹시 흉몽이 아닌지요 ? "
무학도사는 꿈 이야기를 모두 듣고,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숙연히 말을했다.
"네 가지로 나뉘어 꾼 꿈은 더할 나위 없는 길몽 입니다."
자신의 느낌과 전혀 다른 무학도사의 해몽에 이성계는 어리둥절 하였다.
"일시에 집이 무너지고 ,꽃도 떨어지고 ,거울이 큰 소리를 내며 깨진 것이 어째서 길몽이라 하시오. ?"
무학도사는 옷깃을 바로 여미며 경건한 어조로 말을 했다.
"닭은 만인에게 새 아침을 알려주는 영물 이옵니다. 모든 닭이 일시에 울었다 함은 바야흐로 새 시대, 새 아침이 밝아 올 징조를 알려주는 성스러운 조짐입니다. 더구나 닭이 '꼬끼오"하고 울었다고
말씀 하셨는데 , 꼬끼오를 한문자로 바꾸어 쓰면 '고귀위(高貴位)'가 되는 것입니다.
즉, 임금님을 칭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등에 서까래 새 개를 짊어지고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임금왕 (王)자가 되는것 입니다. 따라서 귀공께서는 장차 임금님이 되실것이 틀림 없습니다."
듣고보니 이론이 정연한 해몽이어서 이성계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다면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큰 소리를 내며 깨진 것은 무슨 뜻 이오니까 ?"
"그 역시 길몽의 마무리 입니다. 열매가 맺으려면 꽃이 떨어지는 것이 이치이니, 일시에 낙화 한
것은 열매도 일순간 맺을 좋은 조짐 입니다.
그리고 거울이 요란하게 깨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새 나라가 탄생 하는데 만 천하가 어찌 크게 떠들썩 하지 않겠습니까 ? 염려마소서."
"하챦은 꿈을 이처럼 대견하게 풀어 주셔서 고맙소이다."
"빈도의 해몽은 결코 헛된 말이 아니오니 귀인께서는 소승의 해몽을 굳게 믿으시고
금후에는 만사에 자중자애 하시옵소서."
이성계는 무학 도사의 격려까지 듣고 나자 가슴이 자꾸 두근거렸다.
"고맙소이다. 그러나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과연 그런 기회가 올 수 있겠습니까 ? "
무학도사는 합장 배례를 세 번씩이나 거푸 하고 나무라듯 말을 했다.
"모든 운수는 하늘에서 정 하여 주시는 것이지 ,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소승이 지금까지 여쭌 말씀은 모두가 천기에 속하는 기밀이옵니다. 이런 천기를 누설하면 될 일도 틀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저와의 있었던 일은 일체 입 밖에 내지 말아 주옵소서."
무학 도사로 부터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는 당부를 받은 이성계는 ,옷깃를 바로 잡으며 말했다.
"제가 아무리 철이 없기로 이러한 일을 어찌 감히 입밖에 꺼내오리까. 도사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가슴에 아로새겨, 금후에는 일거 일동에 더욱 신중을 기하겠습니다."
무학도사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앗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인께서는 부디 뜻을 크게 품으셔서
기어이 대업을 성취하도록 하시옵소서."
이성계는 왕후 장상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자, 갑자기 새로운 용기가 북돋아 났다.
"고맙습니다. 저를 격려해 주시고 아껴, 깨우쳐 주신 오늘의 은공은 평생을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이성계가 이같이 말을 하자 ,무학도사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날을 위해 소승이 부탁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들려주시옵소서."
"매우 외람된 부탁이오나 ,후일 대업을 성취하시거든 중생을 구제하는 도량으로 이 토굴 자리에 불전을 하나를 지어 주시옵소서."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무학도사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날이 오기만 하면 어찌 불전 뿐 이겠습니까 , 이곳에 절을 지어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도사님을 대궐로 모셔다가 대정(大政)을 자문하는 국사(國師)로 받들어 모실 것 이옵니다."
무학도사는 다시금 합장 배례하며, "너무도 과분한 말씀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오면 이곳에 지을 절 이름은 뭐라 하시겠습니까 ? "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
이성계는 그 말을 듣자 어이가 없었다.
"절 이름은 그때 가서 결정해도 될 일이 아니옵니까 ? "
그러자 무학도사는 고집스럽게 다시 말을 했다.
"옛 글에 일일지계는 재어신(一日之計 在於晨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세우고)이요,
일년지계는 재어춘(一年之計 在於春..일년의 계획은 봄에 세운다 )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목표를 세우고 매진하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절은 나중에 세우시더라도 이름만은 지금 지어 주시옵소서."
"도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나의 신념을 굳히기 위해서라도 절 이름을 미리 지어 두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만, 절 이름을 당장 짓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일 이옵니까 ? "
무학도사가 즉석에서 나무라듯 말했다.
"무슨 일이나 쉽게 생각하신다면 ,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 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 이라도 신명을 다해 애쓰지 않으면 제대로 이루어 지는 일이 없는 법 이옵니다."
이 말도 이성계의 장래를 훈계하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도사님의 훈계는 명심하겠습니다. 하오나 , 절 이름을 제가 짖기 보다는 도사께서 직접 지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 "
무학도사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붓을 들어 종이에 釋王寺 ( 석왕사..왕이라고 풀어낸 곳) 라는 세 글짜를 써 보였다.
"석왕사 .. ? 좋습니다 ! 후일 , 이 자리에 반드시 절을 짖도록 하고, 그 이름은 도사님이 꿈과 글을 풀었다하여 반드시 석왕사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석왕사라는 절 이름은 태조의 등극전에 만들어 진것 이다.
이와같이 석왕사의 유래를 이야기한 반월 행자는 이어서 말을 하였다.
"이성계는 변방을 지키는 한낱 장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나 무학 도사를 이곳에서 만남으로써
하늘의 계시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산을 내려 갈때 에는 "나는 왕이 될것 이다"라는 결심을 확고하게 하게 되었으니 조선왕국의 개국에 무학 도사가 미친 영향은 실로 위대하다고 하겠습니다."
"허허 ..영향을 줄 수는 있었겠지요. 허나 국가대사의 도모는 불심의 힘만으로는 가능치 않은 일
이지요." 김삿갓은 같은 불제자라고 반월 행자가 무학도사만 편드는 것 같아 이쯤으로 말을 했다.
"그런데 삿갓 선생 , 이성계가 이곳 설봉산을 내려 갈때 눈 앞에 전개되는 천산 만봉을 굽어보며
읊은 시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 "
"오 호 ..이성계가 시를 읊었다니 ? 그 시가 어떤 시였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구려."
"제가 외어 드리겠습니다."
반월 행자는 이성계의 시를 읊어 보였다.
칡넝쿨 움켜잡고 푸른 봉에 오르니 ( 인수반나 상벽봉 引手攀蘿 上碧峰 )
조그만 암자 하나 구름 속에 있구나 ( 일암고와 백운중 一庵高臥 白雲中 )
눈에 보이는 산천이 모두 내 땅이라면 ( 약장안계 위오토 若將眼界 爲吾土 )
초월 강남인들 어찌 수용하지 못하랴. ( 초월강남 기불용 楚越江南 豈不容 )
김삿갓은 그 시를 듣고 이성계의 웅장한 기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하더니 ,이성계야 말로 선천적으로 대왕의 기질을 타고 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였다.
방랑시인 김삿갓 (35)
*땡중과 마나님의 승부
석왕사에서 반월 행자와 작별을 한 김삿갓은 다시 북쪽을 향해 정처없는 발길을 옮겼다.
그러면서 금강산 입석암 노승을 비롯하여 반월 행자까지 불가에 귀이하여 수도를 하는 인물은 자신과 다르게 대단한 사람들 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고생을 스스로 선택한 그들의 삶은 김삿갓으로서는 따라할 수 없는 고행이 아니던가 , 새삼 그들의 선택에 마음속 깊이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가는 길은 계속 산길로 이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 김삿갓은 다리도 쉬어갈겸 노견으로 물러나 반려 행자가 헤어질때 싸준 주먹밥을 풀어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만치 ,몸에는 장옷을 입고 머리에는 남바위를 쓴 행세 깨나 하는 양반댁 마나님 차림의
여인이 하인도 없이 산길을 바쁜 걸음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허, 수행하는 종자도 없이 산길을 가다가 도둑이라도 만나면 어쩔려고 저러실까."
김삿갓은 마음 속으로 공연한 걱정을 하며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길가로 나섰다.
그런데 여인이 지나간 얼마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녀간 시비를 가리는 소리가 아득히 바람결에 들려왔다.
거리 관계로 말소리의 내용은 알수 없었지만 , 주고 받는 말소리의 억양으로 보아 , 시비를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런, 조금전에 지나간 마나님이 산길에서 도둑이라도 만난 것이 아닐까 ? "
김삿갓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소리가 난 곳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얼마를 가다가 앞을 살펴보니, 저만큼 잔디밭에서 아까 지나쳐간 마나님이 오십 쯤 되어 보이는 스님과 말다툼을 하는 것이 보였다.
도둑을 만난 것이 아니기에 천만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젊잖은 댁 마나님이 지나던 스님과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 싶어 , 김삿갓은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 보았다.
그때, 스님이 마나님의 손목을 움켜잡으려고 팔을 뻣으며 말을 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이 깊은 산중에서 한번쯤 정을 나누기로 뭐가 나쁘단 말이오 ? " 하고 해괴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 이었다.
"피차간 아는 사이인가 ? " 김삿갓은 이러한 생각도 들었지만 여인의 다음 대답으로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우연히 길을 가다 만나게 된 사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석존(釋尊)의 십계 중에 불사음계 (不邪淫戒)라는 대목이 뚜렸하거늘 , 어찌 대사는 일시적 사념으로 파계 (破戒) 하시려 하오.
내, 오늘 일은 못보고 안 들은 것으로 할것 이니 사념을 버리고 수행에 전념 하도록 하십시오." 하며 점잖게 스님을 꾸짖고 있었다.
김삿갓은 그들이 다투는 이유를 그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고 "저런 죽일 놈" 하고 자신도 모르게 스님에게 욕이 튀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중놈의 부당한 요구에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내놓는 마나님의 태도에 존경심이 일었다.
그러나 욕정의 화신이 되어버린 중놈은 좀처럼 물러서질 않았다.
오히려 여인에게 금방이라도 덤벼들 자세로 꼬임의 말을 더하는 것이었다.
"만물은 인연의 소생이오. 우리가 깊은 산중에서 이렇게 단 둘이 만난 것도 전생부터의 인연일 것이오. 그대는 어찌 전생의 인연을 무시하고 , 나의 간절한 요구를 거절 하려 하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두말 말고 나의 소원을 꼭 들어주시오."
그러나 마나님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의연하였다.
"대사는 무슨 당치않은 말씀을 자꾸 하시오. 반야경에 색즉시공(色即是空),공즉시색(空即是色)
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소이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인데,
이런 경전을 읽고 수행 하는 대사는 아직도 육근(六根)을 떨치지 못하고 탐욕과 진애 (瞋恚),
우치 (愚痴)의 번뇌마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니, 한시바삐 자아의 세계에서 벗어나 해탈의 눈을 속히 뜨시오. 그것만이 불제자가 걸어가야 할 정도 일것 이오이다."
마나님은 불교에 대한 소양이 풍부한지 , 중놈에게 설법 하듯 ,도도하게 꾸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애욕의 열정에 갇혀버린 환장한 중놈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 갈리가 없었다.
중놈도 우격다짐으로는 성사가 안 될 것을 깨달았는지. 이번에는 방법을 바꿔,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그대와 더불어 불경을 토론할 생각이 없소. 나는 이미 그대를 범할 것을 결심했는데 ,
그대는 나의 소원을 끝까지 들어주려고 하지 않으니 그러면 우리는 말재주로써 승부를 가리면 어떠하겠소."
설득으로 성공할 자신이 없었음을 깨닫자 , 중놈은 또 다른 방법으로 나왔다.
마나님도 계속 입씨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
"말재주로 승부를 결정하자는 것은 무슨 말씀이오니까 ? " 하고 다져 물었다.
중놈이 대답하는데 , "내가 지금부터 1,2,3,4,5,6,7,8,9,10의 순서로 그대에게 요구하는 일을 말로 들려 보일 터 인즉,
그대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을 해보시오. 만약 ,그대가 대답을 끊기지 않고 잘하게 되면 내가 순순히 물러날 것이로되 , 만약 대답을 못해 막힘이 있게 되면 ,그대가 진것이 되니 나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하오."
김삿갓은 혀를 찼다. 도데체가 중놈의 요구는 부당하기 이를데 없으며 , 노상에서 오가다 만난 생면부지의 여인에게 감히 몸을 요구하는가.
그런데도 마나님은 겁을 내는 기색조차 없이 중놈을 꾸짖었다.
"나는 이미 대사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니 여러말 말고 물러나시오."
그러나 타이른다고 순순히 물러날 중놈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말재주로 결정하자고 이미 타협안을 내놓았소이다. 그러니 말재주로 승부를 결정 하던가, 나의 요구에 순순히 따라 주거나,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시오."
그늘속에 숨어서 이같은 광경을 지켜보던 김삿갓은 "저런 죽일놈을 보았나"하며 분노했다.
그리고 불현듯 뛰쳐나가 마나님을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으나 상황이 그의 용기를 억누를 정도로 흥미진진한 면도 있었다. 따라서 저 마나님은 이같은 곤경을 어찌 벗어 냐려나 ? 하는 호기심 또한, 발동하여 좀더 지켜 보기로 하였다.
"좋소이다. 그러면 대사가 내기 말을 걸어 오시오. 내가 답 하리다."
마나님은 중놈의 고집을 꺾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중놈의 내기에 응하고 있었다.
그러자 중놈이 이제는 됬다 싶었던지 크게 기뻐하며 즉석에서 내기말을 시작 하였다.
"일 , 일룡사 (一龍寺) 사는 중이
이, 이룡사 (二龍寺) 가는 길에
삼, 삼로 (三路) 길에서
사, 사대부인(士大夫人)을 만났는데
오, 오음 (五陰)이 불통하여
육, 육효 (六爻)로 점을 치니
칠, 칠괘 (七卦)도 좋다마는
팔, 팔괘 (八卦)는 더욱 좋다
구, 구부려라
십, † 좀 하게."
중놈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도 해괴한 소리였다.
김삿갓은 중놈에 이같은 음담패설에 저 마나님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걱정반 기대반을 가지고
지켜보며 마나님의 대답이 막혀 , 땡중 놈에게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해지면 자신이 나설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마나님의 태도는 의연해 보였다.
그리고 중놈을 향하여 호통을 치는것 이었다.
"이 천하의 잡놈아 ! 내가 다시 한번 훈계를 내릴테니 그대는 똑똑히 내 말을 듣거라."
그리고 그녀는 말재주 내기에 대한 응답을 시작했다.
"일, 일편단심(一片丹心) 이 내 마음
이, 이심 (二心)이 있을 손가
삼, 삼강 (三鋼)이 살아 있고
사, 사리 (事理)가 분명 하거늘
오, 오할 (五割) 할 이 잡놈아
육, 육환장 (六環杖) 둘러 짚고
칠, 칠가사 (漆袈裟)를 걸쳐 입고
팔, 팔도 (八道)를 편답(遍踏)하며
구, 구하는게 고작
십, † 이더냐 이 잡놈아 !
마나님의 호통은 이렇게 추상같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대사님 대사님"으로 돌중 놈을 깍듯이 예우해 주었으나, 이제와서는 오활을 할 잡놈이라 불호령을 질렀으니 그 위세가 실로 당당하기 이를데 없었다.
"예끼, 천하에 무서운 계집 같으니..."
중놈은 더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그자리를 박차고 줄행랑을 노았다.
중놈이 도망가 버리자 마나님은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산 길을 다시 조용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부인이기에 김삿갓은 먼빛으로 나마 ,사라져가는 마나님을 향해 머리를 몇 번이고 수그려 보였다.
방랑시인 김삿갓 (36)
* 방중 개존물 이요,선생 내불알 이라..
원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김삿갓은 하루에 육십리를 걸어야겠다고 작정을 했는데 막상 길을 나서고 보니 그리 되지가 않았다. 하긴 바쁜 걸음도 아니었다.
길을 가다가 힘들거나 고달프면 아무 곳이나 앉아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어둠이 내릴 즈음 아무집이나 들려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면 그만이었다.
이렇듯 여러날을 걸어가던 김삿갓은 오늘은 어쩐지 걷기가 도무지 귀찮아 한 마을로 썩 들어섰다.
때는 오후였다. 봄도 저물어 제법 더워지기 시작하는 오후의 햇살은 먼 길을 가는 나그네의 몸을 무척이나 나른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쉬어 갈곳을 찾아야 하겠군."
가진 돈이 있다면 주막으로가 술이나 한잔 하고 그곳에서 묵으면 될것 이나 우선은 가진 돈이 없다.
이럴땐 동네 사랑방을 찾으면 밥은 못 얻어 먹더라도 그곳 동리의 인심을 엿볼수 있다.
혹간 밤이 깊어 출출한 시장기를 달래는 막걸리나 요기거리가 나오는 경우도 왕왕있어 김삿갓 처럼 무일푼 과객에게 동네 사랑방은 요긴한 하룻밤 쉬어갈 곳이 되곤하였다.
어느 동네나 잘사는 사람이 있다. 그중에서는 벼슬을 지냈거나 인심이 제법 후해 오가는 과객을
접대하는데 넉넉한 인정을 베푸는 집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해도 아직 지지않은 이른 오후는 인심후한 집이나 동네 사랑방을 찾기는 너무 이른시간이었다.
해서 김삿갓은 서당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서당은 살림집을 겸하는 경우가 없기에 학동들의 공부가 끝나면 빈방이 되기가 일쑤이고 지나는 과객의 하룻밤 휴식처로 안성마춤 이었다.
서당에 하루밤 쉬어 갈것을 청하기 이른시간이지만 그곳에 가서 학동들 공부하는 모습도 지켜 보면서 훈장 선생님하고 시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시간 보내기가 제일 좋을것 같았다.
그리고 뉘 알겠는가.멋들어진 훈장이라도 만나면 술이라도 한 상 내어 놓을지..
"애, 아가야 이 마을 서당은 어디 있느냐 ? "
삿갓은 꼴망태를 메고 오는 초립동이 녀석에게 물었다.
"서당은 왜 찾으셔요."
녀석은 삿갓을 눌러 쓰고 등에는 작은 행랑과 구절 지팡이를 짚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온 김삿갓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던 듯 이렇게 반문 하였다.
"훈장 선생님을 만나려고 한다. 어디 있느냐 ? "
"저쪽 세번재 기와집이여요." 하며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그래, 고맙다."
김삿갓은 녀석이 가르쳐 준대로 서당을 찾아갔다. 서당은 제법 커 보였다.
마당도 넓었을 뿐 만 아니라 글방도 큼직 했는데 학동들은 열명이 될까말까 하였다.
"애들아 선생님 어디 계시냐 ? "
아이들은 선생님 없이 저희들끼리 글을 읽다가 불현듯 나타난 삿갓의 차림새를 보면서 대답은 하지 않고 저희들 끼리 수근거렸다.
"애들아, 선생님 어디 계시냐고 내가 묻지 않았더냐 ? "
삿갓은 다소 언성을 높였다.
어린것 들이 꽤나 버릇이 없어 보였다.
"누구신데 우리 사부님을 찾으세요."
그중 한놈이 눈을 말똥말똥 굴리면서 야무지게 물었다.
"이놈아 어른이 물으시면 대답이나 썩 할 일 이지 묻기는 왜 묻느냐 ? "
김삿갓은 울컥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호통을 쳤다. 그리고 학동놈들의 방자한 태도를 보아 선생이라는 작자의 인품도 가히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호통을 당한 녀석이 멀쑥한 표정을 짓더니 어물어물 말을 한다.
"선생님은 지금 안채에 계셔요."
"그래 너희들 글 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들어 앉아 계신단 말이냐 ? "
"책이나 읽고 있으라고 하셨어요."
"허참, 까다롭구나. 길 가는 과객이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을까 하여 찾아 왔다고 말씀드려라."
녀석이 안채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찌푸린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선생님은 지금 나오실 수 없으니 그냥 돌아 가시랍니다."
"그래 ? "
김삿갓은 부화가 치밀었다. 꼴에 훈장이랍시고 거드름을 피우는 모양이었다.
삿갓은 아이들이나 훈장이나 그렇고 그런것 같아 머물기를 단념했다.
그렇지만 그냥 돌아서기에는 어쩐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휘 돌아보니 마침 훈장의 탁자에는 갈아 놓은 먹과 종이가 보였다.
삿갓은 붓을들어 시 한수를 갈겨 써 놓았다.
서당내조지 생도제미십 書堂乃早知 生徒諸未十
방중개존물 선생내불알 房重皆尊物 先生來不謁
서당이란 내 일찍부터 알았거늘
공부하는 학동은 채 열이 안되는데 방안에 있는 녀석들은 제 잘난척 만 하고 선생이란 작자는 내다 보지도 않는구나.
"여봐라 이따 네 선생 오시거든 이 글을 드리거라."
김삿갓은 종이를 휙 내던지듯 놓고 방을 나와 침을 퇙 뱉고는 서당을 빠져나와 바람처럼 떠났다.
이무렵 훈장이란 작자는 거들먹 거리며 마누라에게 어깨 주무름을 받고 있었다.
"어 거참 시원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렇듯 재미를 보고 있는데 생면부지의 과객이 왔다해서 어찌 나갈 수가 있겠나.
훈장은 낮잠조차 늘어지게 자고난 연후 ,마지못해 글방으로 건너왔다.
"선생님 아까 거지 같은 손님이 이 글을 써 놓고 가셨어요."
학동은 김삿갓이 써놓은 글을 선생에게 내놓았다.
"뭐냐 ? "
훈장은 실 눈을 뜨고 종이를 받아 읽는데, 차츰 얼굴색이 변하며 종이를 쥐고 있는 두 손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죽일 놈이 있나 ! "
훈장의 입에서 앙칼진 욕이 튀어 나왔다.
내용이야 그렇다치고, 써 놓은 글을 음에 따라 읽다보면 학동과 선생인 자기를 길거리 똥개를 욕하 듯이 써놓지 않았는가 ?
"허, 고약한 놈이로다."
훈장은 이를 갈았다. 이런 모양을 지켜 보던 아이 한 놈이 물었다.
"선생님 왜 그러셔요. 나쁜 말이라도 써있습니까 ? "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훈장이 불호령을 내렸다.
"네 이놈, 네가 무엇을 안다고 나서느냐. 당장 회초리 가져 오너라."
훈장은 엉뚱하게도 죄없는 학동을 잡으려는 심산이다.
그래야만 속이 풀릴것 같았다.
한편 훈장을 욕해준 김삿갓은 서당을 찾아 갈때 와는 달리 ,훠이훠이 시원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처음에 방랑 길을 떠났을 때는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만 들어도 분통이 터지고 화가
치밀었는데 이제는 조소와 박대를 당해도 세상인심이 그러려니 하고 대범하게 넘기게 되었다.
"흠, 지금쯤 그 알량한 훈장이 펄펄 뛰고 있겠군.."
김삿갓은 좀 심한 욕설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자책감도 들었지만 거드름 피우던 그가 자기가 써 놓은 글을 읽고 핏대를 올리는 광경이 떠오르니 속이 다 시원하였다.
삿갓은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며 한참을 걸었는데 어느덧 석양의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목까지 컬컬한 것이 잠자리를 찾기 보다, 술 한잔 생각이 더욱 간절 하였다.
저녁 노을과 함께 김삿갓의 발걸음은 자연히 빨라졌다.
얕트막한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생각지도 않은 주막이 보였다.
김삿갓은 주막을 보니 반가움이 앞섰다.
하지만 그는 돈이 없지 않은가. 허실 삼아 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돈이 있을리가 없었다. 김삿갓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출렁출렁 뛰어 보았다.
그런데 ? 필낭속에서 분명히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것 참 , 이상하군. 아까도 뒷짐 속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김삿갓이 등뒤에 지고 있는 행랑이라야 , 겨울 옷 한벌에 주먹만한 연적과 붓 몇자루와 고작하여
종이 몇 장과 벼루 뿐인데 , 쇠붙이 소리가 나는 것은 의외였다.
그는 길가에 앉아 행랑을 끌러 보았다.
뜻 밖에도 엽전 꾸러미가 나왔다.
"돈이 ? "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누구에게도 돈을 받은 일이 없는데 , 돈이 있다는 것은 희안한 일이었다.
"허허, 이 무게도 보통은 아닌데, 내 어찌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 "
그는 손바닥 위에 엽전 꾸러미를 올려보며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족히 한근은 넘을 무게였다.
"그런데 이 돈을 누가 넣었을까 ?"
고개를 갸웃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안변을 떠나올 때 사또가 내놓은 엽전은 이미 마다하지 않았던가 ? 게다가 그 돈은 가련이에게
보내겠다고 했으니 , 사또가 별도로 넣어 주었을리는 없을테고 , 그렇다면 가련이 밖에는 없었다.
김사갓이 떠나 올때, 가련이 또한 노잣돈을 내 놓았지만 한사코 받지 않는 사이에 슬며시 넣어 준것이 틀림 없으리라.. 생각이 이에 이른 김삿갓은 새삼스럽게 가련이의 뜨거운 사랑을 뼈저리게 느꼈다.
"감사하오 가련이..."
김삿갓은 백어(白魚) 같던 가련이의 손길을 만지는듯 엽전을 한동안 만지다가 필낭 속에 넣고 일부는 떼어 옆구리에 찼다.
갑자기 필낭의 무게가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이만하면 내 오늘은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김삿갓은 목을 한번 길게 빼밀어 보고 휘적휘적 주막을 향하여 발걸음을 떼 놓았다.
방랑시인 김삿갓 (37)
*사라진 옥관자.
원산을 거쳐 함흥으로 가는 길도 산길로 이어졌다.
날 또한 저물자 까마귀조차 극성스럽게 울부짖으며 자기 둥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김삿갓은 신안 마을 입구에서 만난 동리 사람을 붙잡고 물어 보았다.
"말씀 좀 물어 봅시다. 황 별감 댁이 어디오 ? "
김삿갓이 이곳에 이르기 전에 들은 바로 , 이곳 신안 마을에 황 별감 댁은 길가는 나그네를 소홀히
내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바 있었기 때문이다.
"황 별감 댁은 저기 산 밑에 있는 기와집이라오."
동리사람은 팔을 들어 가르쳐준다.
황 별감 집은 산 밑에 있는 제법 큰 기와집이었다.
김삿갓이 문앞에 이르러 주인을 부르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왔다.
첫눈에 무척 인자해 보인는 후덕한 노인이었다.
김삿갓은 인사를 정중히 올리고 나서 , "지나는 과객이옵니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고 찾아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황 별감은 매우 민망한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모처럼 내집을 찾아온 손님을 내쫒는 것 같아 매우 미안하오. 우리 집에서는 공교롭게도 며칠전에 손주 며느리가 몸을 풀어서 손님을 재워 드릴 수가 없구료.
그러나 저녁만은 대접할 수 있으니 바깥 사랑에서 저녁만 자시고 잠자리는 다른 곳에서 구해 보도록 하시오."
그제야 깨닫고 보니, 황 별감 댁 손주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는지 대문간에 빨간 고추가 매달려 있던 인줄이 가로 걸려 있었다.
"저녁만이라도 주시겠다니 고마운 말씀 입니다. 그러나 댁에 산모가 계시다면 저는 다른 곳으로
가 보겠습니다." 김삿갓은 발길을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황 별감은 부랴부랴 옷소매를 붙잡으며 만류한다.
"산모가 있기로서니 ,바깥 사랑에서 저녁을 자시는 것 쯤이야 무슨 상관 있겠소.
잠자리까지 제공하지는 못할 망정 , 내집을 찾아 온 손님을 저녁대접도 하지 않고 돌아서게 하는 것은 인사가 아니니 들어 갑시다."
김삿갓은 황 별감의 호의가 하도 고마워, 저녁밥을 그 댁에서 얻어 먹기로 하였다.
이윽고 바깥 사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 반찬도 여러 가지로 나와 ,가족이 먹는 식탁이지,
낮선 과객에게 한 덩이 던져주는 밥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 별감조차 밥상머리에 지키고 앉아 많이 먹으라고 연신 권하는 것이 아닌가 .
"젊은 양반이 어디를 가는 길인데 길이 이렇게 늦으셨소 ? "
"네 ,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멀리 두만강 까지 관북천리를 돌아 보고자 합니다."
"허어, 금강산 구경을 하셨다고요 ? ...금강산이 그렇게나 좋다는데 나는 금강산 구경을 한번도 못했다오."
"여기서 금강산이 그리 멀지도 않은데 한 번 다녀오시죠. 천하의 절경이 그곳에 모두 있습니다,"
"내 나이 이미 칠십이라오. 이제 무슨 기력으로 금강산 구경을 하겠소. 어디 , 좋은 구경한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김삿갓은 황 별감의 말을 듣자 ,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진해 천하의 명산을 구경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 한편으로 자신은 아직 젊어 , 천하를 두루 유람할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밥상을 물린 김삿갓은 다녀온 금강산의 절경을 황 별감에게 들려 주면서 당시 자신이 지었던 절경을 담은 시를 읊어 드렸다
"朝登立石 雲生足" (조등입석 운생족)
아침에 바위를 밟고 서면 발아래 구름이 일고
"暮飮黃泉 月掛脣" (모음황천 월괘순)
저녁에 황천물을 마시면 달이 입술에 걸린다.
"水作銀杵 春色壁" (수작은저 춘색벽)
물은 은절구공이가 되어 절벽을 찧고
"雲爲玉尺 度靑山" (운위옥척 도청산)
구름은 옥자가 되어 청산을 가늠터라.
"松松白白 岩岩廻" (송송백백 암암회)
소나무 잣나무 바위는 돌고돌아.
"水水山山 處處奇" (수수산산 처처기)
물도 산도 곳곳이 기묘하도다.
"허어, 그렇게나 좋던가요 ? "
"제가 아직 죽어 ,무릉도원은 가 본바 없으나 , 천상에 무릉도원이 있다면 지상에는 금강산이 있을 것 입니다."
김삿갓은 그가 읊은 싯귀 한 소절 마다 , 감탄을 내지르는 황 별감에게 이 같이 말을 해주었다.
삿갓은 밤이 으슥해서야 그 집을 나왔다.
황 별감이 일러 주는대로 동구밖에 있는 서당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황 별감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문득 생각이 난 듯, 김삿갓의 손을 잡으며 말을 했다.
"서당에서는 잠만 자고 내일 아침 식사는 우리 집에 와서 드시오. 내 집에 오신 손님을 쫒아내는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하구료."
김삿갓은 남의 신세를 수없이 지며, 이곳에 이르렀지만 황 별감처럼 따듯한 인정을 만나 보기는 매우 드문일 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장께서 저를 쫒아내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저녁을 융숭하게 대접받은 것만으로도 고맙기 그지없사옵니다. 그러나 내일 아침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아무리 산모가 있기로 바깥 사랑에서 아침을 자시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겠소.
조금도 거북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침에 꼭 와주시오. 내가 기다리겠소."
"이렇듯 고마운 말씀을 하시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김삿갓은 손을 잡아 흔들며 간청하다시피 하는 황 별감의 요청에 그만 감격하여 이렇듯 아침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고마운 노인이시군."
그리고 서당을 찾아 가려니 길이 어두워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황 별감 집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길을 찾다 보니 , 연자방앗간이 보였다.
그 연자방앗간 옆에는 광인듯 싶은 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올 바에야 구태여 서당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
김삿갓은 문득 그 같은 생각이 들자 , 방문을 열어 보았다.
방에는 새로 짠 듯한 ,빈 가마니만 싸여 있어서 하룻밤을 보내기에는 적당하였다.
김삿갓은 서슴치 않고 광 속으로 들어가 바닥에 깔린 볓짚 돗자리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웠다.
황 별감 집에서 밥도 든든히 먹었겠다. 잘 곳도 마련이 되었겠다.
아쉽다면 술 한잔이 없을 뿐인데 ..오늘도 운이 좋아 하루를 힘들지 않게 보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아침이 환히 밝았다.
김삿갓은 연자방앗간 광 속에서 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 부랴부랴 옷을 추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아침을 얻어 먹으려고 황 별감 집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일러보여 , 황 별감 마당 부근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그때, 황 별감 집 대문이 열리며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손에는 구슬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애야, 너 이 댁 아이냐 ? "
어린아이는 김삿갓의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하고 구슬을 가지고 이리저리 던지며 혼자 장난을 치며 놀다가 별안간 "어마 ! 내 구슬 어디갔어 ? "
하고 울상을 지으며 대문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어린아이가 잃어버린 구슬을 찾아 주려고 이곳저곳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구슬은 눈에 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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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38)
*다시 찾은 옥관자
김삿갓은 마당을 찾아보다 못해 조금 떨어진 시궁창 까지 와보니 어린아이가 잃어버린 구슬은 다행히 시궁창 언저리에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색깔이 좋은 옥관자(玉貫子) 인듯 싶은 , 매우 값진 보물로 보였다.
김삿갓이 그 구슬을 줍기 위해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 때마침 시궁창에서 먹이를 찾던
오리 떼 중에 청둥오리란 놈이 썩 다가가 그 구슬을 냉큼 집어 삼켜 버리는 것이 보였다.
"이크 , 큰 일이군 . 귀중한 보물인듯 싶은데 오리란 놈이 그만 삼켜 버렸으니 , 어쩐담 ! "
김삿갓이 그런 탄식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황 별감 댁 대문이 열리며 아이의 아비인 듯한 20세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부산스런 모습으로 아까 그 어린아이를 안고 나오며 ,
"네가 가지고 놀던 옥관자를 저 아저씨가 가져갔단 말이지 ? " 하고 말을 하며, 김삿갓을 괘씸한 눈으로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안겨 있던 아이조차,
"응 ! 저 아저씨야 ! " 한다.
졸지에 김삿갓은 도둑으로 몰렸다.
김삿갓에게 다가온 젊은이는 ,
"여보시오, 이 아이가 가지고 놀던 옥관자는 우리집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귀물이니 욕을 보지 않으려면 빨리 내놓으시오." 하며 거두절미로 김삿갓을 몰아 부쳤다.
김삿갓은 옥관자를 청둥오리가 삼켜 버렸다고 사실대로 말을 할까 생각도 하였지만 성미가 급해 보이는 젊은이가 대뜸 청둥오리 배를 갈라 볼것 같아, 애꿎은 생명을 잃게하고 싶지 않았다.
("반 나절만 지나면 그 구슬이 오리의 배설물에 섞여 나올 것을..그때까지 잠시 내가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되면 생명도 하나 살릴수 있지 않은가 ? ) 이렇게 생각된 김삿갓은 젊은이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을 하였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던 옥관자는 내가 훔쳤소이다. 그러나 반 나절 후에는 반드시 돌려드릴
터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오."
그러자 젊은이는 화를 벌컥내며
"뭐 어쩌구 어째 ? 남에 귀한 물건을 훔쳤으면 당장 내놓을 것이지 무슨 잔소리야 ! "
하고 호통을 치더니 , 즉시 하인들을 불러내어 김삿갓을 결박하라고 일렀다.
젊은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 너,댓이 일시에 달려들어 불문곡직 하고 김삿갓을 밧줄로 꽁꽁 올가 묶었다.
김삿갓은 꼼짝없이 결박을 당한후 혼자 생각을 하건데 ..
(황 별감은 부처님 처럼 인자하신 분인데.. 이 젊은이는 그의 아들인지, 손자인지는 알수 없으나,
어찌하여 조상을 닮지 못하고 성미가 이리도 사나울까 ? )
젊은이는 결박진 김삿갓을 땅바닥에 꿇어 앉힌후 또다시 호통을 질렀다.
"네가 훔친 옥관자를 아직도 내놓지 못하겠느냐 ? "
김삿갓은 얼굴을 들어 젊은이를 올려다 보며 말을 하였다.
"옥관자를 내가 훔친 것이 분명하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 있어 반 나절이 지난후에 돌려 주겠다고 했는데 결박까지 짓다니 너무 성급한것 아니오 ? "
젊은이는 그 소리를 듣고 더욱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다.
"이놈아 ! 남에 물건을 훔쳤으면 주인에게 당장 돌려줄 일이지 반 나절을 보낸후 돌려주겠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
"이봐라 ! 아무래도 저 놈이 옥관자를 몸에 감추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저 놈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 젊은이가 이같이 말을하자 하인들이 썩 나서서 김삿갓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러나 김삿갓의 몸에서 옥관자가 나올 턱이 없었다.
젊은이는 다시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지며 하인들에게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런 놈을 섣불리 다루다가는 큰일나겠다. 집에서는 아무리 달래도 내놓지 않으니 관가에 끌고가 치도곤을 청해야겠다. 썩 끌고 관아로가자 !"
그리고 김삿갓을 굽어보며 엄포의 말을 이어갔다.
"이 고을의 사또는 우리집안의 어른이시다. 네 놈이 관아에 끌려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하게 될것이니 죽기전에 옥관자를 순순히 내어 놓거라 ! "
관아로 끌려가면 김삿갓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렇다고 애매한 청둥오리를 죽게야 할수 없지 않은가 ?
몇 시간만 참으면 청둥오리가 옥관자를 도로 내어 놓을걸 ..그러면 만사가 해결 될것 아닌가 ?
그러나 청둥오리를 내버려둔 채 자기만 관아로 끌려가면, 옥관자를 찾을 길 또한 묘연해지지 않겠나?
생각이 이에 이른 김삿갓은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다.
"나에게는 공법자가 있소. 나를 관아로 끌고 가려면 공범자도 함께 가도록 해주시오."
"뭐 ? 네놈에게 옥관자를 훔친 공법자가 있다고 ? ..누구냐 그놈이 ! "
김삿갓이 얼굴을 들어보니 , 옥관자를 삼킨 청둥오리는 아직도 시궁창에서 다른 오리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김삿갓은 문제의 오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의 공법자는 저기 있는 청둥오리요. 그러니 옥관자를 찾고 싶으면 저 오리도 나와 함께 관아로 데리고 가 주시오. 우리 둘이 함께 가지 않으면 옥관자는 영원히 찾을수 없을 것이오."
젊은이는 그 소리를 듣고 어이없어 하면서 ,
"이놈아 !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 청둥오리가 너와 공범이란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 ? "
그러나 김삿갓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말을 했다.
"말이 되고 안되는 것은 재판을 받아보면 될것 이오. 아무튼 저 청둥오리가 나와 공범인 것은
확실하오.
따라서 옥관자를 찾으려면 관아에 함께 가야만 할것 이오."
젊은이가 총명한 위인이라면 이쯤에서 뭔가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것 이나 ,옥관자 찾는데만 급급하여 사리와 총기를 잃어버린듯 "네놈의 이야기는 미친자의 횡설수설 같구나 .
그나 저나 청둥오리가 너와 공범자라 하니 함께 묶어 가기로 하겠다." 하고 하인에게 청둥오리를 당장 잡아 묶으라 하는 것
이었다.
이리하여 김삿갓은 결박을 진 채 , 두 다리를 묶인 청둥오리와 함께 사또가 있는 읍내로 끌려가게 되었다.
젊은이 휘하의 하인들도 모두 동행하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인들은 김삿갓을 끌고가며 동정하는 마음으로 은근히 귀뜸을 해주는데,
"문천 고을 사또 어른은 황별감의 조카사위 되는 분이라오. 당신이 동헌에 끌려가면 목숨이 남아나기 어려울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옥관자를 선선히 내어 놓으시오.
그러면 살아날 길이 있으리다."
그러나 김삿갓은 듣기만 할 뿐 대답할 수 없었다.
옥관자를 돌려주고 싶어도 돌려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안 마을에서 문천 읍내 까지는 30리가 넘었다.
일행이 관아에 도착한 때는 이미 한 낮이 지났다.
젊은이는 김삿갓과 청둥오리를 형리에게 인계하여 동헌 마당에 꿇어 앉혀놓고 관아에 들어 가더니 사또와 무슨 공론을 하는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이방의 안내를 받으며 사또가 동헌 대청마루에 좌정하더니 김삿갓을 굽어보며 다짜고짜
서슬이 퍼런 호통을 내지른다.
"오리와 공모하여 황 별감 댁 옥관자를 훔쳤다는 자가 바로 네놈이냐 ? "
문천 군수 이호범은 처가 댁으로 부터 부탁을 단단히 받았는지 ..처음부터 무시무시한 태도로 나왔다.
그러나 김삿갓은 머리를 정중히 수구려 보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황 별감 댁 자제께서 저를 다짜고짜 도둑으로 몰아 , 제가 오리와 공모하여 옥관자를 훔쳤노라
대답한 것입니다."
사또는 그 말을 듣고 , 눈알을 부라리며 벼락 같은 호통을 쳤다.
"이놈아 ! 네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오리는 말 못하는 짐승이 아니더냐. 헌데, 오리와 공모하여 옥관자를 훔쳤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 "
그러나 김삿갓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태연자약 하였다.
"제가 미치고 안 미친 것은 두어 시간 뒤면 저절로 알게 될것 입니다."
"이놈아 ! 네놈이 본관을 우롱해도 분수가 있지 , 방자스럽게 누구더러 기다려라 말라 하느냐 ! "
"저 같이 못난 자가 어찌 감히 사또 어른을 우롱하겠사옵니까. 다만 두어 시간 후에 저 청둥오리가 황별감 댁 옥관자를 반드시 돌려 드릴것 이오니 ,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옵소서."
문천 군수 이호범은 머리가 비상한 사람으로 김삿갓의 말에서 어떤 암시를 받은듯..
잠시 머리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더니 얼굴을 번쩍 들며 물었다.
"옥관자를 오리가 돌려 준다니 ? 그렇다면 오리란 놈이 옥관자를 삼켰단 말이냐 ?
그래서 두어 시간 후에 똥과 함께 배설해 놓을 것 이란 말이렸다 ? "
사또가 이렇게 김삿갓을 문초하고 있던 바로 그때 , 김삿갓과 함께 묶여 동헌에 끌려온 오리가
몸을 움츠리는듯 싶더니 똥을 싸는데 , 반짝반짝 빛나는 옥관자를 함께 내어 놓는 것이 아닌가 !
김삿갓은 옥관자를 보자 ,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크게 질렀다.
"사또 어른 ! 더 기다리실 것도 없습니다. 지금 막 , 오리가 옥관자를 내 놓았습니다 ! "
사또는 형리를 시켜 똥에 섞여나온 옥관자를 깨끗하게 씻어 올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손수 검색을 하여 보니 그것은 황 별감댁 옥관자가 분명하지 않은가 ?
이에 사또는 크게 깨달은 바 있는 듯 , 고개를 신중하게 끄덕이며,
"잃었던 물건을 찾았으니 저 사람을 풀어 주어라." 형리에게 명령을 하고 김삿갓 에게 물었다.
"옥관자를 오리가 삼킨 것을 뻔히 알면서 그대는 어떤 까닭으로 스스로 도둑을 자처 했는고 ? "
김삿갓은 결박이 풀리자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또를 올려다 보며 대답했다.
"오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제가 잠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나섰던 것이옵니다."
"하챦은 오리 한마리를 살리려고 죄를 뒤집어 썼다 ?"
"예, 저는 저 청둥오리가 옥관자를 삼키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옥관자를 찾으려는 젊은이가 너무도 성급해 보였기에 ,사실대로 말을 하면 필시 오리의 배를 갈라 옥관자를 꺼내려 하겠기에 어쩔수 없이 제가 훔쳤노라고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또는 그 말에 크게 감명을 받은듯,
"허어 ! 오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대가 죄를 뒤집어쓰고 나섰다는 것은 이만저만 가상한 일이 아니로다. 그대는 정녕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인가 ? "
"오리가 비록 미물이오나 , 목숨이 소중하기로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여깁니다. 제가 잠시라도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됨으로써 오리의 목숨을 구할수 있다면 그런 일이야 누군들 못하오리까."
"허어 ! 그대의 말은 들을수록 명언이로구나 ! 그대는 이름을 무어라고 하는가 ? "
"이름조차 없이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몸이오니 사또 앞을 이만 물러가게 해주시옵소서."
김삿갓은 사또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돌아서더니 황 별감 댁 하인에게 말했다.
"나의 삿갓과 지팡이를 돌려주시오."
김삿갓은 삿갓을 뒤집어 쓰기 무섭게 동헌 대문 밖으로 총총히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사또는 그때까지 김삿갓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별안간 일어서며, 좌우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