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근대역사관>
익산역 앞 근대문화예술의 거리 안에 있다. 말 그대로 익산의 근대역사를 전시한 곳이다. 조선조까지 한적한 시골마을이 어떻게 대도시가 되고 교통의 요지가 되어 한국의 주요도시로 떠올랐는지, 그러다 맞은 77년 이리역대폭발의 참사를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 태어났는지 많은 사진자료를 중심으로 발전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1. 전시관 얼개
명칭 : 익산근대역사관
위치 : 익산시 중앙로 12-151(중앙동 2가 40-2)
전화 : 063-837-3545
문화재 : 등록문화재 제180호
입장료 : 없음
2. 둘러보기
방문일 : 2022.6.1.
우선 건물 자체가 최고의 볼거리이다. 삼산의원을 옮겨온 복원한 건물 자체가 문화적 역사적 의의가 있다. 2층으로 되어 있는 역사관은 1층은 모두 전시실, 2층은 일부가 교육장, 일부는 전시공간이다.
역사관 건물은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삼산 김병수의 삼산의원을 복원한 것이다. 1920년대의 발전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건물을 그대로 옮겨와 등록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부터 1층 전시실을 둘러본다. 1912년 호남선의 이리역 개통이후 이리가 어떻게 신도시로 떠오르는지 살펴보자. 호남선을 끌어안은 이리는 발전 일로를 달렸고, 호남선을 반대한 전주는 침체되었다.
침체되었던 덕분에 전통문화와 유적을 보전한 전주는 100년 이후는 다시 전통의 도시로 맛의 도시로 한옥마을의 도시로 명실상부한 호남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 그런 면에서 각 도시의 역할도 대등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는 우리말 이름으로 솜리라 불렸고, 그 이름은 나이든 촌부들에게는 지금도 유효하다. 솜리는 또한 익산의 상호로서 아직도 다양하게 쓰이며 익산의 정신을 나타내는 이름으로도 쓰인다. 솜리는 남일면의 작은 마을이었다.
'솜리'를 여기서는 한자어의 의미와 연결시켜 '갈대밭 속에 있는 마을'의 의미라고 추정했지만, 필자는 목화로 만드는 이불솜의 고장이라는 의미라고 들어왔다. 이리라는 한자어는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을 터이므로 이리로부터 의미를 추적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어휘가 만들어질 때는 중요 의미부분에서 취자하므로 '갈대'를 취하지 '속'을 취하지 않는다. 속을 취자했다면 거꾸로 갈대 밖마을이 대응되게 있어야 한다. 음운변동을 겪었다면 '방리' 정도가 되겠고, 한자음으로는 '표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으므로 속을 취했다는 것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갈대마을' 정도가 더 적절할 것이다. 갈대의 털이 솜같아서 멀리서 보면 솜 속에 들어앉은 마을이라 해서 '솜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전주가 철도역 건설을 반대했다면 그것은 아이러니다. 철도 덕분에 대도시가 된 이리와 철도 거부로 침체의 길을 걸은 전주의 대조가 그것이다. 그러나 호남평야의 쌀을 실어나르는 데는 군산과 가까운 익산지역이 더 지리적으로 유리했을 것이다. 아마 논란과는 별 관계없이 이리역으로 결정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든다.
'이리농림은 수원농림, 진주농림과 함께 조선의 3대 명문이었다.' 실제로 서울대(경성제대)보다 더 선호했고, 더 입학하기 어려운 학교였다고도 한다. 해방후는 전북대의 농대로 오랫동안 익산에 있었다.
* 다음은 2층 전시실
2층은 전시공간과 교육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근대문화역사관 앞 거리. 근대예술문화의 거리로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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