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pds.catholic.or.kr/pds/bbs_view.asp?num=14&id=158770&menu=4805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조각가 김세중 (1)
자신의 이익은 관심 밖, 오로지 예술 부흥에…
- 김세중 조각가.
“돌의 내면에 불을 켜고 / 청동의 녹 위에 꽃잎을 피운 사람 / 그 더운 가슴으로 / 영원의 사랑 안에 쉬다”
1986년 조각가 김세중(프란치스코) 선생이 선종한 이듬해, 서울대 미술대 조소과 동문회와 서울조각회 등 후학들이 세운 추모비에는 이처럼 아름다운 추모의 글귀가 담겼다. 글귀는 문학평론가 이어령씨가 썼다.
그의 유덕을 기리는 후학들은 이어서 추모비에 김세중 선생은 1928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해 천주교에 입교했다고, 그의 세례명은 프란치스코라고 새겼다. 서울대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을 1회로 졸업한 후 평생을 서울대 미대 교수로 후진을 양성했고, 3대에 걸친 서울대 미술대학 학장과 한국미술협회이사장, 서울조각회장, 가톨릭미술가협회장,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의 직책을 맡아 미술계 발전에 헌신했다고, 또한 대한민국 문화예술상과 대한민국문화훈장(추서) 등을 받았다고 써내려갔다.
창작생활 40년간 한 번도 개인전을 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이기는 절대 좇지 않았던 스승, 한국과 한국교회 조각계에 거목으로 뿌리 내렸던 그의 삶을 후학들이 회고한다.
신이 흙을 빚어 남자를 만들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바로 조각을 했다는 의미이다. 신과 조각가가 만난 상황을 꾸민 이야기가 있다.
신이 인간을 만든 후 인간의 삶이 궁금하여 모든 이를 불러 모아 물었다.
“자네는 무엇을 하나?”
농부, 어부, 상인, 법관 등등의 직업이 답으로 돌아왔다. 한참 후 “네, 저는 조각가입니다” 하고 마지막 사람이 말했다. “뭐, 조각가라니 그게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네, 조각은 입체로 창조하는 직업입니다.” “아니, 나는 너희에게 창조하는 권한을 준 적이 없는데, 그럼 너희가 나와 똑같이 창조를 한단 말이냐?” 하고 신이 놀랐다고 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 혜화동 로터리에 둥글게 휘어진 담이 재미있어 막대기를 그으며 걷는데, 순간 길옆에 있던 엄청난 조각이 시야를 가두었다. 그 조각은 바로 지금도 존재하는 혜화동성당의 전면 부조 ‘최후의 심판도’(1960)이다. 이것이 필자가 본 최초의 조각이다. 이렇게 우연히 김세중 선생님과 인연을 갖게 됐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 필자에게 ‘조각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인지하게 해주었고, 그 후 비누 조각이나 목판 조각, 석고 조각을 할 때면 혜화동성당의 부조는 내 조각적 창조의 근원이 됐다.
한번은 선생님의 수업 중 어떤 여학생이 투정을 부리듯 작업을 안 하고 고개를 숙이고 무언의 반항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우유와 빵을 가져와 여학생에게 건네시면서 “자네 이거 먹고 힘내서 작업하게”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우리 모두는 선생님의 아버지 같은 자상함에 감격했다. 선생님은 학생들 작품에 일일이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그분이 지나간 뒤면 우리들의 조각은 이루어졌다. 그분의 카리스마는 바로 조각 교육 방법론이었다. 즉 선생님은 표정으로 가르치셨던 것이다. 또 선생님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주어 학업을 포기하지 않게 해, 많은 학생이 선생님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 국립현대미술관 공사 현장에서 김세중 조각가(맨 오른쪽).
선생님은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많은 헌신을 하셨는데, 그중 외국의 명문 미술대학과의 교류를 빼놓을 수 없다. 또 선생님은 국립현대미술관을 지을 재원이 없는 정부를 설득해 미술관을 짓는데 힘을 실으셨다. 당시 선생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우리는 세계적 규모의 국립현대미술관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선생님은 과천 공사 현장을 수시로 찾아 사비로 공사장 인부들에게 식사를 사며 격려해주셨다.
자신의 이익은 전혀 좇지 않는 삶을 사신 분이시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혼란과 격변기를 거치면서 더욱 척박해진 한국 문화와 미술을 위해 헌신하고, 외로운 길을 가신 분이다.
선생님은 세계 부조사에 새겨질 작품을 혜화동성당에 남기셨다. 또 광화문에 세운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은 우리나라의 상징적 이미지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로 각인됐다. 조각이 한 국가의 대표 브랜드가 된 예는 미국 뉴욕 ‘자유의 여신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예수상’ 등 몇 안 되는데, 우리에게는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 있다.
김세중 선생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개인 주문의 초상 조각은 만들지 않으셨고, 문화 예술 부흥이라는 화두를 지키셨다. 김세중 선생님의 작품이 미술사적 차원의 평가와 함께 미학적, 사회학적 차원의 평가가 함께 이뤄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릴케가 쓴 ‘로댕 어록’을 읽고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김세중 선생님은 신의 부름을 받은 조각가처럼 지금도 우리에게 로댕의 글귀를 들려주신다.
“예술가는 한 방울 한 방울 바위에 파고드는 물처럼 느리고 조용한 힘을 가져야 한다.”
* 신현중 교수(서울대학교 미술대학) - 서울대 미술대 조소과와 미국 뉴욕 프렛 대학원을 졸업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19일, 신현중 교수(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조각가 김세중 (2)
위 수술 후 종교적 주제로 작품 활동 매진
- 1958년경 혜화동성당 조각물 작업 현장에서. 왼쪽부터 최만린, 장발, 김세중, 송영수.
김세중 선생은 우리나라 조각가 제2세대에 해당한다. 그는 해방 이후 설립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제1회 입학생으로 윤승욱, 김종영 선생 등에게서 배웠고, 24세 나이에 서울대 교수에 임명, 이후 서울대 미술대 학장과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을 역임하면서 명실공히 해방 이후 세대의 가장 대표적인 조각가로 남아 있다.
미술대 입학 이후 그에게 누구보다 큰 영향을 주었던 교수는 장발(루도비코)이었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장발 선생은 김세중 선생에게 미술뿐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서도 크게 영향을 주었고, 그를 가톨릭교회로 이끌어 대부도 되었다. 김세중 선생이 일생에 거쳐 종교 조각을 탐구했던 것도 장발 선생의 영향이 컸다.
김세중 선생의 데뷔작은 1949년 대학생 신분으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해 특선을 한 ‘청년’이었다. 이어 1950년 종교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유학 수속을 밟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일단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1954년 서울대 전임강사로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됐다.
- ‘골룸바와 아그네스’, 1954, 청동, 국립현대미술관.
김세중 조각의 결정체는 무엇보다 종교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그리스도교 미술은 한국교회가 창설되고 여러 시각 형상이 제작되면서 시작했다. 초기엔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교 미술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여러 성당 건축이 들어선 이후부터였다. 장발 화백은 여러 의미에서 교회 미술의 선구자였고, 그가 학장으로 있던 서울대 미대는 김세중뿐 아니라 윤승욱, 김종영, 이순석 등의 교수들이 모두 가톨릭신자였으므로, 당시 서울대는 종교미술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세중 선생의 종교 조각에 대한 열정은 그가 초기부터 여러 종교 작품을 제작한 점에서도 나타난다. 1954년 그가 26세 나이에 제작한 한복 입은 ‘골룸바와 아그네스’는 성인 자매이다. 이 작품은 1954년 열린 ‘성미술전’에 출품됐고 1983년에 다시 한 번 ‘두 여인’이란 이름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의 종교 조각을 보면, 당시 그를 사로잡은 것은 중세 유럽의 교회 조각이었다고 생각된다. 서울 혜화동성당 조각의 하나인 ‘순교자상’은 신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정신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려 했던 중세 조각과 유사하다. 또 혜화동성당 ‘최후의 심판도’에 종교적 도상을 정확하게 사용한 사실을 통해 그가 서양 종교 미술에 대해 상당한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세중 선생이 가장 많이 남긴 종교적 주제의 하나가 ‘성모자상’이다. 1980년 위 수술을 한 후 그는 조형물보다는 종교적 주제에 더 매달렸다. 특히 이상주의와 사실주의가 아름답게 융합한 르네상스 종교 미술보다는 오히려 약간 경직되고 단순하면서도 엄숙한 중세 종교 이미지에 바탕을 두면서, 우리나라 초창기 그리스도교 미술 양식과 도상을 성립시키고 그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세중 선생은 약 1000점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회고한 바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서울 세종로 네거리에 우뚝 서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다. 또 ‘유관순 동상’, ‘유엔 참전 기념탑’ 등 상당수의 동상과 조형물을 제작해 공공 조각 부문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대한민국 아이콘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주요 조각이 서양 조각의 여러 모티브에 의존한 경우가 많았던 것에 비해, 좀 더 한국적 전통에서 아이디어를 찾았다는 점이다. 서양의 경우 장군의 동상은 주로 기마상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순신 장군의 우뚝 선 자세는 오히려 조선 시대 능묘의 무관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 성모자상 옆 김세중 조각가.
김세중 선생은 미술 행정인으로서도 매우 바빴다. 그는 작품뿐 아니라 교육, 행정 등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던 제2세대의 리더였다.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맡았던 당시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세대는 운명적으로 작품에만 몰두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졸업하자 후진을 가르쳐야 했고, 단체를 이끌어야 했고, 국가의 문화 행정에도 참여해야 했던 세대지요. 내가 지금 맡고 있는 현대미술관 관장직도 그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가 지나가면 다음 세대는 각자 자기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젊은 작가들이 부럽습니다.”
이후 김세중 선생은 위 수술을 하고 입원해 있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에는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많이 참여했지만, 앞으로 더 살 수 있다면 나의 예술, 나의 조각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의 이러한 희망은 많은 성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1986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준공을 독려하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케일 크고 묵직했던 인품과 리더십 덕분에, 한국 조각계의 거목으로 많은 미술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 김영나 교수(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덕성여대 교수, 서양미술사학회 회장,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26일, 김영나 교수(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조각가 김세중 (3)
“진리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구도적 과정 담아”
- ‘최후의 심판도’, 1960, 화강석, 서울 혜화동성당.
2006년 3월 2일 문화재청은 서울 혜화동성당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고 발표했다. 선정 이유로 “혜화동성당은 건립 당시 고딕양식으로 정형화돼 있던 가톨릭 성당의 건축 틀을 깬 새로운 건축물로, 50년대 후반부터 건축되는 성당 건축의 모형이 될 정도로 기념비적인 건물”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청의 설명처럼 이 성당의 건축 양식은 전형적인 교회 건축의 틀을 벗어났는데, 이러한 건축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 건축 정면의 큰 벽면을 차지하는 대형 부조이다.
이 부조는 당시 서울대 미대 학장이자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장발 선생의 감수 아래 김세중 선생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회미술 기록에 따르면 “초기 설계 때는 정면 부조를 기획하지 않았으나, 설계를 확정하는 최종 단계에서 추가하기로 결정했는데, 180여 개의 화강암 조각에 새겨진 이 부조는 김세중이 원도를 작성하고 송영수와 최만린이 협력해 먼저 흙으로 만든 뒤 김세중과 장기은이 직접 조각하였다”고 한다. 이 부조는 교회미술의 도상학을 충실하게 반영해 만들어졌고, 낮은 돋을새김으로 제작됐지만 빛을 받아 음영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화강암 특유의 질감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부조가 새겨진 벽면으로부터 약간 후진해 솟은 종탑의 붉은 벽돌로 마감한 벽에는 이 본당의 주보성인인 베네딕토 성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 부조 역시 김세중 선생의 작품이다.
‘최후의 심판도’나 ‘성 베네딕토’의 조형적 특징은 김세중 선생의 부조 작품 특유의 단순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세부 묘사를 최대한 절제하고 작품의 내용을 암시하는 최소한의 형태만 표현함으로써, 선적이면서도 동시에 회화적인 특징이 강조된 김세중 선생의 조형 언어가 이미 1950년대에 구축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혜화동성당에는 청록색 대리석으로 제작한 제대와 제대 십자가, 도자 벽화 뒤에 걸린 십자고상 등 김세중 선생이 제작한 종교 미술품들이 있다. 이런 점에서 혜화동성당은 김세중 선생의 종교미술을 볼 수 있는 작은 미술관으로 봐도 과언이 아니다.
김세중 선생은 대학 재학시절에 이미 작가로 데뷔했다. 또 제2한강교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탑골공원의 ‘3·1운동 기념 부조’, 국립극장 분수 조각 ‘군무’, 장충동공원 ‘유관순 동상’,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 동상’, 국회의사당 ‘애국애족의 군상’ 등 기념 조형물 제작에 앞장섰고, 후기에는 예술 행정가로서 활동했다. 게다가 예순을 앞두고 타계해,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품 수가 적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단 한 번도 개인전을 갖지 않았지만 국전과 한국미술협회를 통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고, 대학시절부터 제작한 작품을 포함하면 1000여 점에 이른다. 김세중 선생이 제작한 작품 중 상당수가 종교적 목적을 지닌 까닭에 전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발표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김세중기념사업회’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김세중 선생은 모교의 전임강사로 부임하던 1954년 벨기에 엑스포에 ‘마돈나’를 출품했다고 한다. 같은 해 서울 명수대성당(현 흑석동성당) 외부 ‘예수성심상’과 내부 ‘성모상’ 등을 제작했다. 가톨릭대 성신교정의 ‘평화의 모후’, 세종로성당의 ‘동정 마리아’, 절두산순교성지의 ‘순교기념상’과 ‘요한바오로2세 상’, 성라자로마을의 ‘새 삶의 예수상’, 불광동성당의 ‘예수상’, 춘천 죽림동성당 ‘성모자상’ 등 수많은 교회미술품을 제작했다. 절두산성지의 건립 때는 미술을 담당해 종탑 부조 순교자상과 함께 성당 대리석 제대와 감실을 제작했다.
김세중 선생의 종교 조각 중에서 예술적 성과가 뚜렷한 작품의 하나로 ‘골룸바와 아그네스’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김세중 선생은 숭고한 종교적 주제를 형상이 아닌, 형태와 질감, 구조, 상징 등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장식이 배제된 단아한 선과 하나의 덩어리로 완결된 인체, 죽음을 초월하는 정신의 승리를 보여주려는 듯 강직하게 처리된 얼굴과 마디가 분명한 손, 최소한의 주름 외에 불필요한 부분을 생략한 의복 표현 등은 십자가나 나뭇잎 못지않게 이 작품의 상징성을 고양하는 요소다.
김세중 선생은 1984년 봄, 한 인터뷰에서 “그동안 내 작품은 초기의 극단적인 사실을 거쳐 조형적으로 요약하고 단순화하는 과정을 지나왔지요. 예술적 흐름에 대한 나의 해석과 수용에는 후회가 없었지만, 좀 더 정돈되고 결론적인 작품을 남기고 싶었어요. 앞으로는 거의 종교 작품만을 만들 생각인데, 이 작품들을 통해서 나의 신앙과 삶을 결산해보고 싶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김세중 선생은 1980년 위 수술을 받고 여러 달 입원해 있는 동안 1960년 작 ‘그리스도의 얼굴’을 옆에 두고 늘 어루만지면서 병마의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그의 작업이 단지 심미적인 것의 추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한한 인간이 종교적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구도적 과정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의 얼굴’은 그의 종교 조각 중에서도 비교적 사실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예수의 긴 얼굴과 지그시 감고 있는 눈에서 묵상, 종교적 초월, 신비 등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그가 남긴 수많은 종교 조각은 신앙 고백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김세중 선생은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바티칸미술관과 프랑스 외무부 및 문화부, 독일 퀼른대교구의 협조를 받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국제종교미술전’을 열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 회장으로서 이 협회를 국제기독교미술인협회에 가입시켰고,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제종교미술전’을 통해 한국의 가톨릭 미술 작품을 유럽에 소개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전력을 기울여 추진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의 준공과 개관을 앞두고 1986년 지병과 과로로 인해 58세의 일기로 선종했다.
* 최태만 교수(국민대 미술학부) - 제2회 김종영학술상과 제1회 조각평론상을 수상했고, 2014 창원조각비엔날레 예술감독 등으로 활동했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3일, 최태만 교수(국민대 미술학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조각가 김세중 (4 · 끝)
‘신의 섭리와 진리’ 숭고한 예술로 승화
- 김세중기념사업회(이사장 김남조)는 ‘김세중 조각상’을 제정, 운영하고 있다. 사진은 7월 23일까지 김세중 조각가의 자택을 새로 단장한 문화예술공간 ‘예술의 기쁨’에서 열리고 있는 ‘김세중 조각상’ 30주년 기념전.
조각가 김세중은 종교적 믿음을 예술로 승화시킨 많은 조각을 통해 신의 섭리와 진리를 숭고한 예술로 구현하고자 했고, 다른 순수한 조각 작품을 통해 예술에 대한 열정을 구체화시켰다.
우리는 김세중의 조각에서 인간 내면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끌어내려 했던 한 예술가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그는 모든 예술은 엄격하고 가혹한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고행이 따라야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의 조각에는 그러한 고행의 흔적이 순수한 예술혼과 결합해 탄생한 숭고미가 흐른다.
김세중에게 예술은 인간 부재의 참혹한 시대를 구원하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따라서 김세중은 전후 황폐한 시기에도 평화를 주창했고, 지난한 근대사의 과정을 지나오면서 이 땅에 문화예술운동을 일으키고자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이 땅에 인간적 아름다움과 종교적 숭고함, 역사적 기념성을 두루 갖춘 조각상들을 남겼고, 그리하여 한국 조각계의 거목으로서 우리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인간의 정신은 개별자로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확인하고 싶어 하면서도 영원한 진리에 도달하고 싶어 한다. 가장 일상적인 삶의 모습에서부터 고독과 열정이 뒤범벅된 영혼의 고통스런 몸짓까지 인간의 모든 존재는 이렇듯 죽음을 향한 결단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죽음은 바로 우리가 영원을 만나는 지점이다. 김세중 선생은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영원의 모습’을 주제로 ‘종교미술국제전’을 열면서 종교미술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창조주의 모상이며 그 생명은 영원에까지 이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감동적인 문구에서 우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술가가 감내할 수밖에 없는 천형을 발견한다.
보통 사람들은 일상에 파묻혀 당장 급한 일에 휘둘리면서 죽음으로부터 눈길을 돌린다. 그러나 예술가는 언제나 죽음을 마주 대하는 고행의 길을 가야 한다. 자신의 존재가 소멸하는 순간까지 영원과 순간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다. 예술가로서의 자신에게 ‘영원의 형상화’라는 불가능한 사명을 부과했던, 그래서 늘 고독했던 조각가 김세중. 물론 산다는 일 자체가 그에게는 ‘고독한 행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원을 사모하는 이들에게는 삶 자체가 신의 부재와 사랑하는 이의 부재로 인해 언제나 고독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에게 예술의 길은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림도 조각도 음악도 글도 모든 예술은 엄격하고 가혹한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고행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이 어려운 것을 왜 하나’ 하는 회의감마저 가지면서… 하지만 이런 고행 없이 안 되는 것이 예술의 길이기는 하지요.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고행, 이것이 예술의 마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리움의 대상이 김세중에게는 신 자체였다.
“모든 예술은 신의 모상입니다. 때문에 끝없이 추구해 가는 것, 그것은 신 자체가 아닐까요? 나는 이것을 학생 때부터 지표로 삼아왔고 지금도 이에 긍지를 느끼고 있습니다. 작가가 오만할 수도 고고할 수도 겸허할 수도 있는 것이 이 때문이 아닐까요?”
작가로서 김세중 선생은 오만하지도 조롱을 일삼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중세 조각을 연상케 하는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소박한 숭고함’이 넘쳐흐른다. 또한 모든 예술은 신의 모상 일진대 어떻게 어떤 작품에서는 영원의 추구를 포기하거나 무시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모든 예술은 알레고리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글로든 소리로든 시각적 이미지로든 예술은 그 자체로는 말할 수 없는 것,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형상화한다. 그래서 예술은 언제나 불가능한 시도다. 시로 풀지 않을 가장 착하고 진한 말은 사신(私信)에 바치고 그것으로도 다할 수 없는 말은 기도에 바친다던 어느 시인이 궁극적으로 할 수 있었던 말이 ‘가라앉는 침묵’이었던 이유도, 그 인생의 동반자였던 한 조각가에게 그의 작품이 ‘가슴을 에는 기도의 소산’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김세중 선생은 자신의 마음에서 아직 승낙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작 생활 40년 동안 한 번도 개인전을 열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의 반려자인 시인도 자신이 발표한 시들에 대해 “설익은 술을 퍼내어 손님들을 대접한 심정”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신의 모상’을 구현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로 인해 끝없이 고독하고 좌절하면서도 서로가 바빠 사랑하는 이의 빈자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묶어준 것은 바로 이러한 겸손함, 예술에 대한 열정과 예술의 본질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아니었을까?
작품으로 인해 예술가는 후세에 영원히 빛나는 이름을 남기게 된다. 작품을 완성해가며 십자가의 천형을 겪어야 했던 작가가 바로 그 작품을 통해 부활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예술가와 작품의 관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서 비로소 예술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진리가, 신의 광휘가 자신의 작품을 뚫고 솟아오를 때 예술가는 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제 예술가는 더 이상 불가능한 시도를 하며 끝없이 좌절하는 무모한 사람이 아니다. 김세중 선생은 행복한 시시포스다. 그렇다면 한 조각가의 가슴을 에는 기도, 지난한 창작 과정은 결국 ‘신의 모상’으로 완성된 작품을 통해 자신이 느낄 행복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 행복은 지금 그가 누리고 있을 궁극적인 행복, 신 앞에서의 영원한 현존으로 인해 느낄 행복의 예시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는 세상에 남긴 수많은 작품을 통해 여전히 우리 옆에서 숨 쉬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독한 예술혼’은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화두로 남을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7월 10일, 김세중기념사업회 「조각가 김세중」(2006/현암사) 중에서]
|
첫댓글 무심코 지나 다니던 혜화동성당에 갈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