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식 발판 파티
건강을 위하여 운동은 필수다. 반드시 시간을 내서 운동해야 하지만 여건이 안 될 때는 생활 속 운동을 실천해야 한다. 예컨대, 앉아 있는 것보다 서 있는 시간을 늘리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수시로 온몸에 힘의 강약을 조절한다. 운동량이 부족한 목회자들의 경우는 예배 때 운동을 병행하는 방법도 있다. 예배 때 목회자들이 강단 위에서 할 수 있는 생활 속 운동 중에 종아리 근육 강화 운동만큼 좋은 게 없다. 흔히 종아리는 제2의 심장이라고 한다. 심장은 온몸에 혈액을 돌게 하는 엔진이다. 심장에서 나온 혈액은 동맥에 올라타서 모세혈관을 통하여 온몸 구석구석 다니다가 정맥을 거쳐서 심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장 12만km의 혈관 대장정에 오른다. 혈액은 우리 몸에 산소와 기타 영양소를 실어 나르는 화물차요 혈관은 고속도로와 같아서 원활한 혈액순환은 건강에 필수적이다. 그 여행길에는 숨찬 구간도 있다. 발까지 내려간 혈액을 다시 올려야 하는 구간이다. 짐승과 달리 인간은 직립보행하기 때문이다. 두 배의 박동이 필요한 이 구간 때문에 심장은 늘 피곤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심장이 노화되면 혈액이 이 가파른 구간을 오르기가 더더욱 힘들다. 이때 종아리 근육이 혈관을 눌러주는 펌프 역할을 함으로써 심장의 부담을 덜어준다. 종아리 근육이 제2의 심장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 근육을 강화하는 방법으로는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것이다. 움직일 수 없을 때는 그렇게 서있기만 해도 효과는 매한가지다. 한 주간 동안 한국교회의 예배 횟수는 평균 10회요, 대략 8시간 정도다. 운동 시간을 따로 확보하기가 어려운 목회 현장에서 예배 시간을 이용한다면 하루에 1시간 이상 종아리 운동을 하는 셈이다. 어느새 나는 예배 시간 내내 발뒤꿈치를 올리는 게 습관이 되었다.
봉평교회에 부임하고 2달 동안 변함없이 이렇게 예배를 인도하며 힘차게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운동은 노동으로 변하는 듯했다. 원인은 강대상에 발판이 없었기 때문이다. 키가 크면 굳이 발판이 필요치 않지만 그렇지 못한 단신으로 발판 부재의 강대상에 서면 파묻혀 있는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종아리 운동의 효과를 노리고 습관적으로 발뒤꿈치를 들었는데 기대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운동은 언제든지 중단할 수 있지만 노동은 그럴 수 없다. 강단에서의 노동이 아닌 운동으로서 효과를 보려면 발판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해서 어떤 분야든지 두루두루 섭렵하고 있는 우리 교회 마당발 원문자(元文子) 권사에게 임무를 맡겼다. 봉평으로 이사 왔을 때부터 그는 낯설어할 담임목사 내외에게 자상한 안내를 자처했다. 여선교회장으로서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의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타고난 천성 탓이었다. 강단 정면에 앉아 있는 청중들과는 달리 찬양대원인 그는 강대상 측면의 찬양대 석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설교하는 담임목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설교의 열정이 특심하면 저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발판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있던 차에 발판 제작 임무가 떨어지자 그는 자신의 성정대로 쇠뿔도 단김에 빼고야 말았다. 곧바로 진부면 하진부리에 있는 제작 공장에 찾아가서 발판을 만들어 왔다. 마치 용감한 해병대원처럼 일사천리(一瀉千里)로 한 날에 모든 임무를 완수했다. 그날이 2022년 1월 12일 수요일이었다. 제작비용을 묻자 원 권사는 하나님께 봉헌한다면서 극구 비용 수령을 거부했다. 열심히 설교하는 담임목사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고 싶었다고 그간의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변함없이 계속 봉평 목장의 양 무리에게 신령한 꼴을 먹여달라고 부탁했다. 말씀 사역의 발판이 된 것이 그에게는 기쁨인 듯했다. 사실 원 권사는 말씀의 사역을 위한 발판 사명을 전부터 감당하고 있었다. 모든 예배 때마다 강대상 위에 생수를 올려 놓는다. 목소리 높여 복음을 전하는 담임목사의 말씀 사역의 발판이 되고 싶어 자원한 섬김이었다. 때로는 깊은 맛이 배어있는 따뜻한 차를 올린다. 그 맛의 향기에는 그의 정성이 그대로 묻어 있다. 그는 강대상 아래위로 발판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의 발판 섬김은 강단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지난 1월 22일에는 올해도 또 신년 맞이 발판 사명을 완수했다. 목회자, 장로, 여선교회장들을 섬기려고 여수 산(産) 석화(石花)와 포항 산 과메기 등 겨울철 보양식을 긴급 공수하여 작지만 전혀 조촐하지 않은 파티를 배설했다. 발판이 되고 싶어 마련한 일명 ‘문자식(文子式) 발판 파티’다.
발판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반이나 기반이 되는 널빤지다. 발판은 항상 누군가의 발아래에 있으면서 그를 높여준다. 자신을 철저하게 아래에 감추고 상대방을 드러내는 인생이다. 사람들의 눈길이 머물지 못한 곳에 있어서 그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할 경우가 항다반사(恒茶飯事)다. 그래서 무가치하게 취급될 때가 많다. 발판은 늘 그런 자리에서 혼자 엎어져 있다. 짓밟히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짓밟힐수록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자신을 짓밟은 그 원수를 오히려 높여주면서 기뻐하는 발판의 처지는 마치 원수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발판처럼 살다가 가는 인생은 따질 것도 없이 숭고하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 원수가 되어 죽어야 할 인간을 대신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자기 백성을 구하러 이 세상에 오신 우리 주님의 삶이 꼭 발판 같다. 낮고 천한 십자가 발판에서 무참하게 짓밟히다 돌아가신 예수님은 죽음의 그늘에 가려진 어둠의 자식을 빛의 자녀로 하늘 높이 빛나게 하신다. 무참하게 짓밟는 원수에게 사랑의 빛을 비추는 발판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셨다. 원 권사는 이런 주님을 닮아보려고 발판 사명을 감당하는듯했다. 이런 발판이 많아야 하나님의 기쁜 교회요, 발판 같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나님의 기쁜 그리스도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8).
첫댓글 강단에 놓인 발판
원문자 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