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감리교회의 형성과 발전
영국에서 감리교회는 영국성공회와 분리를 원치 않는 웨슬리 때문에 영국성공회 소속으로 있었으나 미국에서는 영국성공회와 분리되어 독립된 감리교회로 시작했다.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해 갔다. 그들 때문에 미국에서도 감리교 운동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점점 신도 수가 늘어나자 그들은 감리교회를 이끌 지도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훈련받은 전도사를 보내달라고 웨슬리에게 요청했다. 이에 1771년 웨슬리는 프란시스 애즈베리를 파송하고 그에게 미국 감리교회를 책임지게 했다. 애즈베리는 영국의 식민지로 있는 미국의 독립을 후원했고 당연히 영국 국교회에 소속된 미국 감리교회 독립을 위해서도 열심히 애를 썼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이듬해 1782년 2월에 웨슬리는 미국 감리교회를 위하여 감리교 헌법을 제정하고 25개 조항으로 된 《신조》를 채택했다. 이것은 웨슬리가 영국 감리교 헌법 38개 조항 중에 칼빈주의적인 것만 제거한 것이다. 그해 9월에는 미국 감리교회 감리사로 보낼 코크와 다른 세 선교사에게 처음으로 감리교회 안수례를 베풀고 미국으로 보냈다. 이처럼 웨슬리는 제도를 마련하고 사람을 보내어 미국감리교 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감리사 코크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먼저 연회(Annual Conference)를 개최하도록 준비했다. 이들보다 먼저 미국에 파송된 애즈베리와 함께 1784년 12월 24일부터 1785년 1월 2일까지 10일 동안 특별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연회 회기 중 성탄절이 들어 있어서 크리스마스 연회라고 한다. 이 연회는 장차 미국 감리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사항들을 결정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결정된 사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감리교회 운동(Methodist Movement)을 미국 감리교회 감독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in America)로 조직한다. 둘째, 만일 미국 설교가들의 합의가 없으면 웨슬리의 감리사 임명을 거부하기로 한 애즈베리를 감리사로 추대한다. 셋째, 39개 조항의 《신조》를 웨슬리가 줄여준 24개 조항에 웨슬리의 신약성서 주해를 교리의 표준으로 삼는다는 조항을 추가하여 25개 조항의 《신조》를 받아들인다. 넷째, 설교가들은 약으로 쓰는 것을 제외하고 술을 금한다. 다섯째, 노예제도를 반대한다. 이렇게 중요한 사항들을 결의한 크리스마스 연회는 감리교 신도회(the Methodist Society)를 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이 연회 이후에 사실상 미국에서 감리교회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미국 감리교회는 프랜시스 애즈베리와 토머스 코크의 인도 아래 명실상부 자치권을 지닌 교단으로 설립되어 미국에서의 감리교 운동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할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당시 미국 감리교회 교세 현황은 목회자 104명, 교인 수 18,000명, 교회 수는 60여 개였다.
1785년에 개최된 연회는 웨슬리의 견해에 따라서 교회 통치 기구를 감독체계로 만들었다. 정회원과 준회원을 정하고 이들을 관리하고 지도할 감리사 제도를 시작했다. 이 연회에서 20명의 정회원과 4명의 준회원이 선출되었다. 통치 구조에서 교역자와 평신도를 동수(同數)로 만들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민주적인 방식으로 감리교회를 운영할 체계를 세웠다. 의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감리교회에서는 감리사(Superintendent)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 연회에서는 감리사 직책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감리사는 사회하는 정회원(Presiding Elder), 지역을 관리하는 지방 감리사(District Superintendent), 감리교도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People called Methodist)에게 세례를 베푸는 임무가 주어졌다. 또한 감독의 직무도 정했는데 초기 장정에서 규정한 감독의 직무를 보면 목사 임명, 연회 시 사회, 목사의 인사를 관할하며 시험하는 임무, 연대구조를 통한 여행, 영적 세속적 업무의 관장이었다. 그 후 1787년 연회에서는 장정 개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일부 조항을 개정하였으며 감독제를 채택하였다. 개정된 장정에 따라서 애즈베리와 토머스 코크가 감독으로 추대되었는데 이들이 미국 감리교회의 초대 감독이 된 것이다. 이들은 웨슬리가 정한 원칙에 따라서 미국 감리교회를 조직하였다. 다만 정착이 아직 이루어지는 지역과 미개척지역의 현실에 맞추어 수정하며 감리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비록 감리교 순회설교가들이 독립전쟁 직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하였지만 19세기 중엽까지 감리교는 미국의 다른 어느 교단보다 많은 교인을 확보하고 계속 발전해 나갔다. 이처럼 눈부신 성장과 발전은 미국 변방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는 감리교 순회 목사들이 말을 타고 변방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쉬운 말로 설교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머물던 곳곳마다 심은 복음의 씨앗은 감리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고 미국 감리교회는 더욱더 풍성한 결실을 향하여 힘차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 결과 1792년 미국 감리교회는 최초로 총회를 조직했다. 이는 의회 민주주의 체계를 갖춘 감리교회로서는 최고 의결기구를 조직한 셈이고 그 자체만으로도 감리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증거가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사도행전 6:7).
미감리회 초대 감독 토마스 콕
첫댓글 미감리교회 초대 감독 토마스 코크
미감리교회 초대 감독 프란시스 애즈베리
크리스마스 연회 때 애즈베리 감독의 안수식(1784.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