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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2041년인가?
흠,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완전한 진실을 말하고 있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냥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인정하는 게 쑥스럽긴 하지만 내가 그날 남극의 바람 속에 토해내던 약속은 내 귀에도 거짓으로 들렸다.
당시 나는 남극을 보호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사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남극의 신에게 내놓기에 그럴듯한 제안으로 느껴졌을 뿐이다. 만약 그 약속에 실제로 무엇이 수반되는지 알았더라면 나는 필경 그날 그 로스 빙붕의 가장자리에서 그런 말도,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약속은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남극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곳을 세상의 마지막 청정 자연 지역으로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쏟겠다는 나의 맹세를 지키라고 계속 종용했다. 나는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수년을 애쓰다가 결국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점을 바꿔 오늘의 이야기부터 해보자. 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남극점과 북극점 둘 다에 걸어서 도달한 사람이다. 세계 어디를 가든 그 수식어가 나를 따라다닌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경은 내가 두 번째 극점 정복을 준비할 때 내게 모종의 경고를 한 바 있다. “정말 그럴 작정인가? 정말 그러고 싶으냐고?” 그는 이렇게 묻고는 곧바로 말했다. “그런 일은 일단 이루고 나면 당사자가 어떤 사람이든 다른 무엇을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지. 늘 그게 따라다니며 그게 그 사람을 정의해버리니까. 근데 자네는 아예 그런 일과 결혼을 하고 싶다고?” 그러고 나서 경험자로서 약간 진력이 난다는 듯 이렇게 덧붙였다. “시간이 좀 지나면 그게 좀 성가시고 피곤한 일이 되거든. 그래서 하는 말일세.”
내 마음속 깊고 깊은 곳에서는 사실 내게 따라붙는 그 수식어에 한두 마디를 덧붙여야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두 극점 모두에 걸어서 도달했을 정도로 ‘충분히 어리석은’ 사람이다. 남극대륙 맥머도 만에서 남극점까지 1,450킬로미터(1986년 1월), 캐나다령 엘즈미어 섬에서 북극점까지 885킬로미터(1989년 5월)를 말이다.
나는 배우는 속도가 느린 편이다. 위의 두 여정을 거의 모두 마칠 무렵에야 비어드모어의 찬바람을 향해 속삭인 그 약속에 무엇이 수반되는지 깨달았다. 양쪽 극지방이 직면한 최대의 위협은 인간이 유발하고 있는 기후변화다. 오늘날 화석연료를 태우고 탄소를 배출하는 산업화 문명이 마치 촛불의 양쪽을 태우듯 지구의 양 극단을 태우고 있다.
따라서 두 가지 과업이 서로를 보완하는 상황인 셈이다. 우리는 극지방의 얼음이 녹는 것은 물론 북극과 남극이 개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극지방, 특히 남극의 옹호자가 되겠다는 나의 약속은 이미 지구 온난화에 맞서 싸우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합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왜 고어Al Gore와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Robert F. Kennedy Jr. 등의 인물 그리고 세계자연기금World wildlife Fund과 그린피스Greenpeace, UN기후변화 관련 정부 간 협의체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 등의 기관과 손을 잡아야 했다는 얘기다.
나는 나의 약속을 이 책의 제목과 내가 설립한 환경재단의 이름인 ‘2041’에 구체적으로 담았다. 2041년은 남극을 보호하는 국제 협약이 재검토 및 조정 국면에 들어가는 시기다. 지구상의 마지막 대자연의 운명이 결정되는 시점인 것이다. 내가 처음 2041년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재앙이 보다 선명하게 대두됨에 따라 2041년은 보다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나는 그 21세기 중반의 경향과 데드라인을 각종 매체와 관련 행사에서 언급하기 시작했고, 그럼으로써 2041은 다수의 환경적 변동들이 수렴해서 대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는 시점에 대한 일종의 이정표가 되었다. 2041년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 온실가스(특히 이산화탄소)의 방출이 현 추세로 계속될 경우 연간 700기가톤(즉, 7000억 톤)에 이를 것이다. 다음 세기 동안 지구의 평균 기온을 5도C 상승시키는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수준이다. 지구온난화가 현실이 되어 극단적인 기후 패턴을 촉발할 것이며 해수면이 상승할 것이고 자원 부족으로 인한 생태계의 폭넓은 파괴가 유발될 것이다.
-현재의 에너지 이용 패턴과 수요 증가율을 고려할 때 전 세계의 원유 생산량은 일일 2,000만 배럴 미만으로 떨어질 것이다. 산업 문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치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수준이다.
-중국과 인도의 석탄 때는 공장과 조리용 난로에서 나오는 매연과 검댕이 히말라야 산맥의 빙하 표면에 축적되어 태양 에너지의 반사량보다 흡수량이 많아질 것이다. 태양 에너지의 반사량이 75퍼센트 줄어 수십 억 인구의 물 수급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그린란드와 남극 가장자리의 만년설과 빙하가 현재의 가속화 추세로 계속 녹으면 해수면이 50센티미터 상승할 것이다. 이는 곧 해안가 거주지의 10분의 1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호주 케언스의 도로 가운데 절반이 물에 잠길 것이다. 이런 수준의 해수면 상승으로 2억 명이 거주지를 빼앗길 것이고 10억 명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
-현재의 북극점 서식지 파괴와 개체 수 감소 추세가 이어진다면 알래스카에서는 모든 북극곰이 굶주리다 멸종된 상태가 될 것이다. 대체로 2014년이면 지구상 생물의 멸종 속도가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어섰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육상 생물 100만 종이 사라진 상태가 될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로 인해 유명해진 킬리만자로(케냐)의 눈과 몬태나 빙한 국립공원(미국)의 빙하가 모두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이제 내가 2041년을 어떻게 보는지 이해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 당장 우리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과 보다 중요하게는 우리 아이들의 삶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에 직면할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숫자부터 떠올린다. 2041년 1월 1일까지 남은 날짜를 헤아리는 것이다. 아무 때건 내게 그날까지 며칠이나 남았는지 물어보라. 나는 언제든 정확하게 답할 수 있다. 우리의 2041 웹사이트에 타이머 프로그램을 깔아놓고 날짜를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화선이 타들어가고 한 시간용 모래시계가 매 시간 위치를 바꾸며 시간을 거꾸로 세고 있다. 액션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시한폭탄에 붙은 디지털 타이머와 같은 종류다. 째깍, 째깍, 째깍.
솔직히 말해서 2041 개념은 부분적으로는 자극용 도구다. 불가피한 대재앙의 날짜가 아니라 국제 협약의 운용에 대한 단순한 재검토의 시점일 뿐이다. 2041년 1월 1일에 세상이 돌연 망하는가? 필경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말이 다가온다’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돌아다니는 헝클어진 머리칼의 종말론자인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수년간 리더 그룹과 일하며 사람들에게 행동을 취할 것을 촉구하면서 나는 해당 과업을 시급성과 데드라인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유용한지 알게 되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행동을 취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2041년에 대한 예측 모두에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이라는 전제가 붙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유류 소비의 한계점과 종의 감소, 해수면 상승, 지구온난화 등 이 모든 것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합의에 따른 국제적 행동으로 그 모든 것을 피하거나 바꾸거나 해결할 수 있다.
한편 일부 기후변화 활동가들과 냉정한 과학자들은 2041의 관점에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2020년대에 대해 말한다. 어쩌면 내가 낙관론자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2041년까지가 아닌지도 모른다. 실로 얼마 안 남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의문은 이것이다. 생물권(생명체가 사는 지구 표면의 공간)에 미치는 변화에 멈출 수 없는 가속도가 붙는 시점은 언제인가?
그런 위기가 가장 명확하고 그런 위협이 가장 임박한 곳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땅, 남극대륙이다. 그래서 내가 기후변화에 도전하는 행보를 걷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남극을 보전하려면 우리는 세상을, 세상 사람들을 바꿔야 한다.
세계 최초의 오일 산업은 오하이오나 펜실베이니아 또는 텍사스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그것은 뉴잉글랜드에서 시작됐다. 당시 그 산업의 산물은 지하의 공동(空洞)에서 펌프로 뽑아올린 석유가 아니라 작살로 잡은 북극고래나 수염고래의 지방을 끓여서 추출한 오일이었다. 그렇게 고래를 잡은 100년 세월 동안 포경선들은 갈수록 먼 바다로 나가야 했다. 인근 해역의 고래는 점차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원유를 얻기 위해 갈수록 더 멀리 나가고 더 깊이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이제 대양의 바닥과 얼어붙은 북극에 눈을 돌리고 있다. 원유에 대한 갈증으로 인해 만약 우리가 오염되지 않은 남극에까지 손을 댄다면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극이 될 것이다.
잠시 19세기로 돌아가 우리가 난터켓(매사추세츠 주 동남 해안 앞바다의 섬)에서 고래오일 산업에 종사한다고 상상해보자. 세상에 등불과 에너지(그리고 옷을 뻣뻣하게 만들 때 쓰던 고래수염 코르셋 스테이)를 제공하는 방대한 성장 산업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산업은 고래를 멸종 위기로 몰아갔다. 결과적으로 해당 산업 종사자들은 겨우 몇 십 년 만에 산업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목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19세기의 실리콘밸리는 소멸되었고 더불어 우리의 밥벌이도 사라졌다.
한때 북적거리던 포경 기지에 어안이 벙벙한 채 서서 문 닫힌 창고들과 을씨년스런 모항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과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필경 준비되지 않은 채 자기기만에 당한 사람들이 던지는 그 영원한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다음은 뭐지?”
흠… 다행히도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와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에너지 자원을 발견했다. 이제 새로운 난터켓으로 휴스턴과 텍사스가 부상했고, 이어서 두바이와 브루나이, 스코틀랜드 등이 떠올랐다. 하지만 또 세월이 흘러 우리는 고지를 넘어 시장이 점차 줄어드는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다음은 무엇인가? 현대판 난터켓과 석유 산업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엄청난 선물을 안겨줬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중앙난방과 조명, 그리고 운송 체계, 생활수준 및 건강관리의 현격한 향상, 휴대전화와 모바일 기기 등이 우리의 놀라운 현대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진정으로, 다음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스스로 빨리 제기하면 할수록, 하루라도 빨리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정직하고 진정성 있게 노력을 기울일수록 우리는 산산이 부서지는 현대판 난터켓에 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너지를 조달할 새로운 방법이며, 그 방법은 환경 관련 우려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지속가능한 방법이어야 하며 기온을 올리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빛과 열과 동력을 제공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발견된 대륙에 들어가는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다. 지난 10년 사이에 남극을 방문한 사람들의 수가 그 대륙의 발견 이래 20세기 말까지 그곳을 찾은 사람들보다 많았다. 로알드 아문센Roald Amudsen과 로버트 스콧, 어니스트 새클턴이 각자 그 영웅적인 탐험을 전개하고 고작 100년밖에 안 지났는데도 그렇다. 그렇다면 과연 고작 100년 전 탐험의 발길이 닿은 곳에 기후변화가 그렇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수 있는 것인가? 인류가 정말 그렇게 빠른 속도로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건가?
앞을 내다보려면 과거를 돌아보는 게 도움이 된다. 이 책의 첫 번째 파트는 남극점과 북극점에 도달한 우리의 탐험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경위로 탐험에 나섰고 어떤 난관에 부딪혔으며 어떤 경험을 통해 내 생각이 바뀌었는지 등에 관한 내용이다. 물론 무엇 때문에 내가 급한 마음과 희망을 품고 2041년이라는 미래를 내다보게 되었는지도 돌아볼 것이다.
내 개인적인 이력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은 사실 내가 태어나기 오래전에 이뤄진 업적에 영향을 받았다. 내 삶의 중요 부분이 이른바 ‘남극 탐험 영웅 시대’로 인정받는 극지방 발견 역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두 번째 파트를 이룬다. 나의 개인적인 세 영웅인 스콧과 새클턴, 아문센을 위시해 그들 이전에 어떤 식으로든 대담하게 그곳에 도전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살펴볼 것이다.
2041년은 마침 영국의 해군장교 제임스 클락 로스James Clark Ross가 1841년 남극 해안의 지도를 만든 지 200주년이 되는 해다. 나는 그가 남극 탐험 영웅 시대의 진정한 서막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1985년 내가 올랐던 그 빙붕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로스 역시 내가 어린 시절부터 숭배하던 영웅 중 한 명이다. 로스는 증기 시대가 본격화되기 이전에 통 모양의 박격포 전함 두 척, HMS 에레보스Eerbus와 HMS 테러Terror를 이끌고 미지의 바다로 대담하고 놀라운 항해를 펼쳐 콜럼버스Columbus 못지 않은 업적을 세웠다.
로스가 지도를 만들기 전에 남극에 대한 지도 표기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 ‘많은 섬과 단단한 빙판 지대’, ‘무수한 얼음 섬’, ‘방대한 얼음 산맥’, 이곳은 ‘mare concretum’, 즉 얼어붙은 바다였으며 배를 난파시키고 가라앉히는 장소였고 로스 이전의 선장들을 멈춰 서게 만든 장애구역이었다.
하지만 로스의 행보는 지침이 없었다. 1841년 1월 4일 유빙을 뚫고 들어가 5일 동안 해안을 훑다가 다시 외해로 나왔는데, 그 바다에도 그가 발견한 빙붕과 마찬가지로 나중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노르웨이의 위대한 텀험가 아문센은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오늘날 그의 영웅적인 행위, 인간의 용기와 열정에 대한 그 눈부신 증명의 진가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들은 유빙의 중심부를 향해 배를 몰았다. 이전의 극지방 탐험가들 모두가 죽음의 길로 여기던 그곳으로 들어간 것이다.”
제임스 클락 로스는 인간의 눈길이 전혀 닿은 바 없던 광경으로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가 자신이 섬기던 젊은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랜드Victoria Land’라고 이름 붙인 그 ‘극적인 장관을 이루는’ 산맥과 자신의 배 이름을 따서 ‘에레보스’라고 이름 붙인 그 연기 기둥이 솟아오르던 활화산을 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거대하고 순전한 얼음 장벽이었다. 그는 지도를 그리며 그 ‘수직 남극대륙’에 로스 빙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에레보스와 테러의 수병들 역시 그 남극대륙의 장관에 넋을 잃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쓴 글을 읽어보자.
“모두 갑판으로 나와 천지 창조 이래 인간의 눈이 목격한 가장 희귀하고 가장 장엄한 광경을 바라봤다. 모두 멍하니 서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수 초가 흐른 후에야 옆의 동료와 감탄을 나눌 수있었다.”
배의 대장장이었던 이 선원은 자신이 “화가나 제도사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이 본 것의 아름다움을 어떻게든 전달하고픈 마음이 그렇게나 컸다. 에레보스의 군의관은 그 남극대륙에 최면 걸린 듯이 사로잡혀 24시간 동안 갑판을 떠나지 못했다.
청소년 시절 로스에 관해 읽으면서 나는 거기에 탐험가의 완벽한 미적분학이 담겨 있다고 확신했다. 미지의 세상으로 떠나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장애에 직면하고 역경을 이겨내며 상상할 수 없는 경이를 목도하는 최초가 되는 것에 말이다. 이런 이야기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장 쉬운 것으로 그 모든 것에 담긴 모험심에 감탄하고 도취하는 것이다. 로스는 모두가 죽음의 길이라고 확신하는 장애에 직면했지만 굴하지 않고 나아갔다? 와우! 또 다른 방식은 로스나 그와 같은 인물들이 그런 업적을 이루는 데 무엇이 필요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용기와 리더십 그리고 무모함의 어떤 요소가 유빙 속으로 뛰어드는 그런 운명적인 결정을 내리게 이끈 것일까?
그렇다. 우리의 극지 탐험에 대한 이야기에도 모험의 요소가 담겨 있다. 물론 로스나 여타의 초기 탐험가들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우리도 탐험 길에서 자칫하면 빠져서 영원히 나오지 못할 크레바스들을 만났고 조난사고를 당하기도 했으며 바다표범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의 이면에는, 내 생각에는 더 중요한 것으로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 습득한 리더십 아이디어가 있다. 초기의 탐험가들이 남긴 교훈과 내가 그들을 따르며 발견한 교훈 말이다. 그런 교훈들이야말로 남극에 관한 진정한 인간 유산이다. 그것들은 팀을 짜고 오랜 시간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모든 모험과 사엄에 적용 가능하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세 번째 파트를 구성한다.
애초부터 리더십에 대한 나의 초점은 어떤 식으로 끝까지 리더십을 유지하느냐 하는 문제에 맞춰져 있있다. 리더들은 한없이 고된데다가 예정보다 깊어지기 일쑤인 탐험 과정 내내 어떻게 리더십을 유지하는가? 이것은 집권 정부나 사업체를 이끄는 경우에도 해당하는 문제다. 나는 이 세상에 리더들은 넘쳐날지 모르지만(어쨌든 앞으로 나서서 리더를 맡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지속가능한 리더십은 흔치 않다고 믿게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필수적인 자산임에도 말이다.
강연장이나 세미나에서 청중에게 우리의 탐험 이야기를 들려주면 늘 한 가지 반응이 나를 놀라게 한다. 사람들은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음 땅에 대해 묘사할 때면 진정으로 흥미로워한다. 그들 대부분이 결코 가보지 않을 곳이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어떻게 탐험을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 한다. 어떤 과정을 어떻게 밟아 그 엄청난 모험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는가? 그들은 그 모든 복잡한 여정의 계획을 짜고 팀을 구축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등에 대한 핵심적인 세부사항 속에서 자신의 문제에, 자신의 곤경에, 자신의 삶에 즉각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오지 여행과 탐험을 통해 개발한 지속가능한 리더십의 아이디어들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최대의 환경 문제에 어떤 식으로든 적용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산업 시대로 인한 환경의 질적 저하를 되돌려 지구를 인간 친화적으로, 생명 친화적으로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그저 환경론자로 분류되어 ‘녹색’ 상자에 처박히고 묵살되길 원치 않는다. 내게 환경은 하나의 대의가 아니라 모든 것이다. 환경적 현안이 리더십 개념과 만나는 곳에서, 꿈이 그것을 현실화하려는 노력과 만나는 곳에서, 그 결정적이고도 궁극적으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영역에서, 나는 이 책이 살아 숨쉬길 원한다.
2041년이라는 해는 데드라인이자 도전과제다. 만약 우리가 국제협약을 갱신하지 않는다면, 만약 우리가 그 순전하게 아름답고 꾸밈없고 무서운 대륙의 속을 파헤치는 굴착과 채굴을 허용하고 만다면 그것은 단순히 나의 보잘것없고 효과도 별로 없는 노력의 실패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사람으로서, 하나의 생물종으로서 우리에게 살 곳을 주는 지구를 보호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실패를 의미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겠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그 망가지기 쉬운 극지방의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내가 첫 번째 남극 탐험대를 조직한 이유는 내 자신을 시험하고 (앞서 언급했듯이) 나의 영웅인 로버트 스콧과 어니스트 섀클턴, 로알드 아문센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1986년 1월 11일, 900마일(약 1,450킬로미터)을 걸어 남극점에 도달한 이후에도 내가 주로 생각한 것은 모험이었지 보존이 아니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는 어린 시절에 받은 나쁜 영향 탓이었다. 무모한 모험담이나 해적 선장 스토리, 두려움을 모르는 탐험가들 이야기 등에 빠졌던 탓이라는 얘기다. 부모님은 여느 부모님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복잡한 것 없고 조용하고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렇게 키우고자 했던 부모님의 계획은 내가 11살이던 어느 날 무너졌다. 그날 내가 영국의 고향집 거실에서 따사로움을 즐기며 TV로 영화 한 편을 보다가 영웅적 탐구의 매력에 홀딱 반해버렸기 때문이다.(26~39)
[출처] ANTARCTICA 남극 2041
Antarctica: My Quest to Save the Earth’s Last Wilderness
로버트 시원·길 리빌 지음, 안진환 옮김, 기획: W재단(홍경근·이욱), 한국경제신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