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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9.10. 중추절
문안하라
빌립보서 4:21~23 (한가위)
I. 문안
지금까지 교회를 섬기면서 대략 2만번 이상의 설교를 했을 터인데 서신마다 나오는 “문안하라”는 이 말씀으로 설교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또 설교를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습니다.
오늘 “문안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 마지막 3절 서신의 마무리 인사 말씀입니다.
21절과 22절 두 절 안에 “문안한다”는 말이 3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문안”은 “축복을 전하는 인사”를 말합니다.
“문안”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아름다운 교제입니다.
사도신경 신앙고백에 담길만큼 참 소중한 일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누구를 만나든지, “어느 집에 가든지 평안을 빌라” 말씀하 셨습니다.
이 평안은 “아스파라스테”이 말은 문안하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평안을 빌라는 이 말은 문안하다는 말과 동일한 단어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교역자들이 속교회별로 목장을 방문합니다.
봄이 되면 가정, 가정을 방문합니 다.
그리고 좋은 일이 있을 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병든 가족이 있을 때, 시험든 가족이 있을 때에 가정을 방문합니다.
이 모든 방문이 문안사역입니다.
광부들은 광산 갱도 안에 카나리아 한 마리를 넣어두곤 합니다.
문안하는 새입니다.
그리고 광부들의 안전을 지키는 새입니다.
갱도에 공기가 탁해졌을 때 카나리아가 먼저 비틀거립니다.
그러면 갱도 안에 있던 모든 광부들이 신속하게 그곳을 탈출해야 합니다.
칠레의 산호세 광산 갱도에도 카나리아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먹이를 주면 카나리아는 노래를 부르며 광부들에게 문안합니다.
2010년 8월 5일 그날 아침도 광부 들이 출근하며 먹을 것을 주었고 카나리아는 여느 때처럼 노래를 했습니다.
아뿔싸! 일을 막 시작했을까요?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를 하며 갱도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33명의 광부들이 지하 622m 지하갱도에 매몰되어 집니다.
지하 매몰사상 최고의 깊이 안에 갇히게 된 것입 니다. 카나리아의 노래소리도 문안도 멈추어지고 광부들은 두려움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서로를 경계하고 치고받는 싸움까지 벌어집니다. 이때 루이스 우르수아라는 사람이 카나리 아를 대신해서 문안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마다 수시로 사람들을 돌아보며 “반드시 잘 될 것입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십시다. 용기를 내십시다.” 광부들은 그때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문안하기 시작했습니다. 용기와 격려와 축복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문안인사가 들려옵니다. 모두 살아있습니까? 모두 건강하십니까? 힘을 내십시오. 우리 정부와 국민들은 여러분 한분 한분 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구출계획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 려 주십시오. 갱도 안에서는 이제 살았다. 환호성과 함께 서로의 포옹과 눈물로 바뀌어지고 있었습니다. 칠레 우리 교민들은 희망을 상징하는 33마리의 종이학을 접어 갱도 안에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물과 음식이 공급되고 산소 공급되기 시작되었습니다. 무려 69일 33명의 모든 광부 가 구출되었습니다. 그 날에 칠레의 모든 언론들은 한결같이 이 놀라운 기적은 갱속에 지도 자 우르수아의 문안인사 한 마디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전했습니다. II. 성도 오늘 본문 누가 누구에게 문안하라고 되어 있습니까? 성도가 성도에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 여기서 “성도”는 saint 성자,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판타하 기온(헬) 문안이란 말은 너무나 소중해서 모든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따라서 축복을 전하는 인사를 문안이라 합니다. “성도”라는 이 말은 대단히 존귀한 말, 존귀한 신분입니다. 목사도 있고, 교회 안에 장로도 있고, 권사도 있고, 집사도 있습니다만, 누군가 내게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많은 일들 가운데 총회장, 한교총 대표회장까지를 포함해서 하나를 남기라고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남기겠습니까? 묻는다면 저는 주저하지 아니하고 “성도”라는 이름을 남길 것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불러내 거룩하게 구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구별했다고 하니까 얼굴이 새롭게 예뻐진 것입니까? 키가 커진 것입니까? 갑자기 건강이 좋아 졌습니까? 사회적인 신분이 달라졌습니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불러내 당신의 자녀 삼으셨다는 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우리는 구별된 사람 “성도”가 된 것입니다. 제가 손에 들고 있는 이 마이크, 강대상, 여러분이 앉아있는 의자... 이것들을 “성구” 거룩한 도구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금으로 도금이라도 한 것입니까? 우리는 왜 성구라고 부르는 것입 니까?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구별하여 사용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 주신 산을 이름하여 “성산” 거룩한 산이라고 합니다. 호렙산, 시내산, 성산, 거룩한 산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만나 주신 산이라는 뜻입니다. 성산이 되었다고 나무를 새롭게 심었습니까? 꽃 한 송이라도 새롭게 피어난 것입니까?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기 때문에 성산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으면 세상에서 내가 어떤 형편,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나는 성도,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으로 불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하든 병이 들었든, 많이 가졌든 가지지 못했든, 많이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으면 구별된 사람 saint“성도”가 된 것입니다. 성자입니다. 심지어는 내 행동이 거룩해지지 못해도 하나님의 나를 성자로 부르시니 나는 성자로 살아가 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거룩하시니나도 거룩하 다.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시 16:3) 내가 나 자신을 보더라도 못마땅한 구석뿐인데 나를 존귀하다 말씀하셨으니 나도 나를 존귀 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섬기는 사람들, 어쩌다가 이런 사람들이 내 곁에 있을까? 못마땅할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존귀하다 말씀하셨으니 나도 존귀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내 느낌과 상관없습니다. 그들의 형편 처지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존귀하다 말씀하셨으니 나도 존귀하게 그들을 사랑하 고 대하는 것입니다. 원래 문안은 자식이 부모에게, 하인이 주인에게 신하가 왕에게 드리는 인사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문안은 모두가 형제임을 기억하고 형제가 형제에게 인사하고 축복하는 것을 말합니 다. 할아버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손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세상으로 보면 족보가 조금 이상하지요. 그래도 우리는 형제로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 서열이 정해집니다. 그러나 서열이 없는 곳이 교회요 가정입니다. 교회는 맡은 일에 직분이 있을 뿐입니다. 서열이 없습니다. 가정 안에 들어가면 서열이 없습니다.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지고 밖에서는 사장, 대통령이라고 불려져도 집안에 들어오면 작은 자로 섬기는 것입니다. 제가 밖에서 다닐 때는 누구도 제게 하대하지 않습니다. 제가 총회장이 되기 전까지 가까이 지내는 영남신학대학교 권용근 총장하고 저하고는 오랜 친구로서 만나면 날 보고 영모야~ 그럽니다. 저는 용근아~ 그렇게 부르지요. 그런데 총회장이 된 다음에는 영모야~ 부르지 않습니다. 총회장님~ 그럽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저에게 하대하는 어르신이 계십니다. 우리 집에 들어오면 류새움 어르신이십니다. 할아버지 이리 와! 할아버지 여기 앉아! 할아버지 그림 그려! 온갖 명령을 다 합니다. 제가 한번은 새움아, 그래도 할아버지가 밖에 나가면 총회장님인데 이리 와 저리 와 그러면 되겠니? 그러자 총회장 할아버지 이리 와! 제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집에 들어가면 손주의 친구로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 다. 이게 가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어르신들, 선생님들, 장로님들, 가족공동체 교회 안에서 어린이들, 새신자들, 젊은이 들을 잘 높여서 문안하시라는 겁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을 보면 때로는 복장이 마음에 안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젊을 때도 우리 어르신들이 그랬을 거예요. 원시인들이 살던 동굴에도 요즘 젊은이들 복장이 이상하다. 그렇게 쓰여져 있대요. 이게 항상 세대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을 보면 직장이 변변한지 무릎이 다 찢어졌는데 기워입지를 못하더라고요. 그들 나름대로의 패션이고 그들 나름대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교회에 올 때도 배꼽 드러내는 청년들도 있다고 그래요. 너 왜 그렇게 배꼽을 드러내고 다니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중심을 밝히 드러냅니다. 그러더랍니다. 요즘 청년들보면 귤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머리가 노래졌습니다. 비트를 먹어서 그런지 머리가 빨개진 아이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예뻐요. 네 머리 곱게 물들었다! 칭찬하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 청년들 가운데 청년예배 가지 않고 어른예배에 참석하시면서 모자를 쓰고 예배하는 아이 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내하는 집사람이 모자 벗고 예배하면 안 되겠니? 그랬더니 집사님은 왜 안경 쓰고 예배하세요? 나는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쓴다. 그랬더니 나는 머리가 나빠서 모자를 씁니다. 그러더랍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문안하는 사람들 중에 오늘 본문에 보면 특별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가이사의 집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크리스챤이 되었는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복음 전하기를 원했으나 도무지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가운 데 사도 바울이 로마 황궁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랬더니 왕을 지키는 시위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지키는 겁니다. 황제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모든 길은 로마로, 황제를 통하여 세계인이 구원받는다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신앙고백되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 예수를 믿음으로써 그들의 가정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하는 신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에게로, 아그립바 왕에게로, 가이사에게로 끌려다니면서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자기의 신변을 지키기 위하여 소명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자신의 소명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단순한 복음을 믿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황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기타 등등의 사람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가이사의 집 사람들입니다. 도무지 복음이 들어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예수 믿을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 와서 신앙 생활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특별히 잘 돌보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문안하라고, 그들이 또한 교회를 문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 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 신앙생활하기 만만치 않은 환경 속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여러분 한분 한분이 가이사의 집 사람들입니다. 명절에 방문했습니다. 예수 믿는 나는 고난과 시련과 여러가지 고통을 겪습니다. 건강도 변변치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 다니는 동생은 세상에서 잘 나갑니다. 그 자식들까지 잘 나갑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마다 내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형님이나 잘 믿으세요. 나는 그러지 않아도 잘 삽니다. 형님이 예수 믿고 나보다 잘 된 게 뭐 있어요.” 복음을 전할 때마다 벽에 부딪혀 돌아옵니다. 그들이 가이사의 집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특별히 문안하고 복음을 잘 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택된 백성이면 언젠가는 돌아올 줄로 믿습니다. 명절이 있는 이유는 가족들이 만나는 이유는 이 가이사의 집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힘으로 말미암아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진전 공병대가 길을 닦아놓듯이 명절이 오히려 진전의 기회가 되어져서 여러분의 가정이 복음화되어지는 그 날이 언젠가는 올 줄로 믿습니다. 어떤 중소도시에 전도를 잘하는 집사님이 계셔서 술집 사장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유명한 술집이랍니다. 술집 사장님이 전도한 집사님께 “교회 왔더니 우리 집 고객들 이 꽤 됩니다” 그러더랍니다. 어떤 분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화들짝 놀라며 외상술값까지 내어놓더랍니다. 술집 주인도 성도가 되어 여러분에게 문안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 가이사의 집 사람입니 다. III. 은혜 빌립보서 마지막장 마지막절 문안의 내용이 나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빌 4:23)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로 시작한 빌립보서는 “은혜가 있을지어다”로 끝맺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을 주제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내가 이해가 안되는 상황속에서도,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은혜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점에서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요 동시에 은혜의 서신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환상 중에 스승 프란체스코가 하나님 나라에서도 주님 곁에 서 큰 사랑을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선생님은 이 땅에서도 존경 을 받고 하나님 곁에서도 사랑을 받습니까?” 프란치스코가 얘기합니다. “내가 너무 모자라는 사람인지라 하나님이 내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그런 것일세.” “선생님, 그건 지나친 겸손입니다. 지나친 겸손은 교만입니다.” “아닐세 자네가 몰라서 그러 네. 자네 같은 사람이, 내가 받은 은혜를 받았다면 자네는 아예 천국에서 예수님 품에서 살고, 예수님 품에서 잠이 들 것일세. 내가 이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일세.” 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강도도 은혜를 입으면 낙원에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성인군자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마귀처럼 지옥에 떨어집니다. 살인자도 은혜를 받으면 천국백성이 됩니다. 천사도 은혜를 잃어버리면 마귀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어르신들이 물을 때마다 늘 하는 대답이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말씀합니다. 제가 젊을 때는 그것이 어른이 되면 그렇게 말하는 관용구인 줄로 알았습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어디에 가든지 간에 사람들이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밖에 할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이것만이 정답입니다. 오늘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있을지어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축복권을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축복권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 믿음의 후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네가 복의 근원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축복할 것이고, 네가 축복하는 대로 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적인 예배에서 축도는 목사가 합니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내 자녀에게 축복할 수 있는 권세는 어버이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내가 먼저 예수를 믿었으면 내게 맡겨진 사람들을 축복하는 God bless you! 축복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일까요? 쉽게 이야기하면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만난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용서 받아 천국 백성이 된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반드시 가지고 가야 될 귀한 사역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 나는 구원받았다. 다른 것 다 잃어버려도 이것 가지고 가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 나는 용서했다. 이 깨끗한 흔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용서하는 겁니다.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용서하는 겁니다. 선생님은 제자를 제자는 선생님을, 목사는 교인을 교인은 목사를... 여러분들 가운데 목사도 용서할 사람이 있나? 그러겠지만 목사도 용서해야 될 사람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했다는 이 분명한 확신없이 살면 잘못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건강보다 중요합니다. 용서는 부자가 되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살아가는 것은 민주주의를 이룬 것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우선 되는 일입니다. 용서가 은혜요 용서가 평강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빌 4:23) 너희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특별히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이 용서하는 마음, 그리고 축복하는 마음, 문안은 반드시 마음에 전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 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이 내 곁에 있을 때에, 마음과 영혼과 몸이 아픈 사람이 내 곁에 있을 때에, 외로운 사람이 있을 때에, 시골에 계신 부모 형제 그들 곁에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문안입니다. 그들과 함께 있어 주는 게 은혜입니다. IV. 한가위 문안법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지방에 흩어져 살다가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몰려듭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구약의 선민들의 명절은 제사 중심,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명절이었습니다. 우리의 명절은 부모님 계신 고향으로 찾아가는 절기입니다. 우리의 문화는 문안의 문화로 명절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늙은 어버이에게 문안하러 가는 게 우리의 명절입니다. 어제 추석을 지내고 고향에 다녀오신 분이 많이 계실 터인데, 모든 인간에게는 귀향 욕구 즉 고향을 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 사는 분들은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라를 그리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병이 있습니다. 미국 교포 교회 가운데 “꿈에도 그리운 내 고향 교회”가 실제로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고향 다녀오신 분들 계시고, 지금도 고향에서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많이 계실 터인 데, 지난 2년 동안 명절이 되어도 우리가 모이지 못했습니다. 2년만에 가족이 모일 수 있어 서 아마 고향길이 고생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고향을 가셨을 것이고 다녀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만났을 때에 내게 있는 이 고귀한 신분, 내가 성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나는 복을 받은 자이고 복 덩어리가 되었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축복할 수 있는 축복의 권세가 내게 있다. 이걸 망각하고 가족을 만나고 어버이를 만나고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가위과 기쁨과 휴식은커녕 스트레스, 가족 간의 마찰과 갈등을 갖고 돌아올 때가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그래서 명절이 끝나고 나면 한 2-3달 어간 동안에 평상시보다 이혼율이 20%쯤 증가한다고 합니다. 부부가 함께 다녀오신 분들 조심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의 혼자 사는 가구가 40%가 되었습니다. 문안의 품성이 없습니다. 또 오랜만에 형제자매들이 만났으니 술 한잔 걸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제력을 잃어버립 니다. 혼자서 쌓아두었던 불평, 원망, 섭섭증을 터트립니다. 그래서 깊은 갈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형님이 잘 산다고 그러더니, 누나가 잘산다고 그러더니, 동생이 성공했다고 그러더니 우리에 게 봉투 하나씩 돌릴 줄 알았는데 그냥 돌아갑니다. 섭섭증이 생기는 겁니다. 너도나도 내가 섬길 준비를 해야지, 내가 문안할 준비를 해야지...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문안받기를, 이해받기를, 사랑받기를, 봉투받기를, 기대하다가 갈등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특별히 소중한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된, 말해서 는 안 되는 겁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감정이 끌어오르는 대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입에서 터져 나온 대로 쏟아내는 게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다듬어야 되는 것이고, 우리의 품성으로 다듬어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저들에게 주고 싶은 문안인지 축복인지 헤아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니까 너한테 해 주는 거야. 이 인간아. 너니까 하면 안 되는 거야. 이 아이가 지금 취직을 하고 싶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노량진학원을 컵라면 한 그릇 먹고 뛰어다니는데, 초등학교때 너보다 공부 못한 옆집에 아무개는 대기업에 취직을 해서 뭘 한다고 하더라. 비교하는 그 앞에서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집을 못가서 안달하는데 살 빼! 그러니까 사람이 안 붙지! 구박을 합니다. 여러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될 말을 구별하는 게 문안입니다. 하지 말아야 될 말을 하지 않는 것, 해야 될 말을 하는 것,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고 싶고, 전하고 싶은 은혜의 말을 하는 것이 문안이요 축복입니다. It’s OK. 괜찮아. 네 얼굴을 보니깐 주님 얼굴 본 것 같다. 오랜만에 모였는데도 여자들만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남자는 앉아서 밥 먹고 리모컨 들고 1번부터 502번까지 왔다 갔다 합니다. 이때 잔소리하지 말고 “힘센 당신이 이것 한번 들어 주면 어떨까?” 남자는 갑자기 힘세다는 말 한 마디에 알통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으면 아령 들기 시작합니다. 그게 남자거든요. 돌아오는 길에 또 칭찬하는 겁니다. 고맙다고, 당신이 열심히 일해서 내 면이 살았다고 인사 를 하는 겁니다. 함께 명절을 보내고 돌아가는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며느리에게 칭찬 한마디 해서 보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가야 애썼다. 네가 일주일 내내 직장생활 하느라고 얼마나 바빴니? 쉬어야 되는 시간에 여기 와서 온갖 일을 다하고 가는구나. 네가 복덩어리다. 네가 우리 집 안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 우리 집에 안 된 일이 뭐가 있니? 가서 건강하거라. 칭찬 잔뜩하면 닫아놓았던 주머니 열고 봉투 하나 만들어서 몰래 시어머니 배게 밑에 봉투 놓고 가는 겁니다. 이게 가족이고 문안입니다. “문안하라”는 설교말씀을 준비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더니, 제가 35-36년 전에 담임으로 다른 교회에서 담임을 섬겼는데 그때는 영상훈련도 없었습니다. 알파코스도 없었습니다. 성공의 사다리, 중보기도학교... 이런 게 없었 습니다. 그냥 정해진 예배시간 예배하고,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에 평균 15가 정 심방하러 다니는 겁니다. 가정방문 하는 겁니다. 그때는 요즘처럼 아파트 문화도 아니고 제가 목회하는 지역은 방 하나 부엌 하나 거적대기 하나. 거적대기 들고 넘어가면 또 방 하나 부엌 하나 거적대기 하나. 많을 때는 20가정 이상 심방을 합니다. 평균 한 14가정을 심방하고 집에 들어오면 목에서 피가 나올 것 같습니다. 찢어지는 것처럼 목이 아픕니다. 항상 목이 쉬어 있었습니다. 월요일마다 하는 사역이 있습니 다. 신촌에 가면 김성진 이비인후과가 있었습니다. 장로님이셨던 것 같아요. 김성진 이비인후과에 가서 치료하고 또 일주일을 견뎌내고 매일같이 목이 쉬어서 가글을 하고 다니곤 했습니다. 지금은 교회들마다 그렇게 하는 교회도 없고 현대 문화가 그렇게 되어 있지도 않고 그렇게 살 목사도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에 젓가락 몇 개인지, 숟가락 몇 개인지, 그 집에 연탄이 떨어졌는지, 쌀독에 쌀이 있는지 없는지 다 알고 살았습니다. 그 집 강아지가 감기에 들은 것까지 다 알고 삽니다. 지금은 제가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 때에 목자가 양 한 마리를 쓰다듬으면서 오늘 하루 동안 풀 뜯다가 벌레한테 물린 곳은 없는지, 꼬챙이에 찔린 곳은 없는지, 발톱은 제대로 붙어있는지 살펴보는 목자처럼 교인들을 어루만졌던 문안의 세월들이 있었던 겁니다. 교회 개척하면서 한 명을 만 명처럼 만 명을 한 명처럼 목회하는, 영혼을 아끼는 목회를 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우들을 일일이 그렇게 돌보지 못하지만 그 품성, 그 목자의 마음으로 평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문안에 세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축복권을 주셨습 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부어 주셨고 복음의 언어, 축복의 언어를 물려주셨습 니다. 이제 이 명절 뿐만 아니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향하여,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 들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문안하는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축복의 권세가 매일같이 작동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에 복을 받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사람으로 바뀌어지는 은혜가 있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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