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자교관공(孝子敎官公) 정려비문(旌閭碑文) 공(公)의 휘는 인교(仁敎)이고 자(字)는 은삼(殷三)이시며 본관은 재령이시니 부제학 근재공의 14세손이시다. 부친은 휘가 효일(孝一, 일명 孝百)이시니 진사시에 입격하고 우노전(優老典)을 입어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에 이르셨는데 학행이 뛰어나셨다. 공은 순조 25년(1825)에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에서 출생하여 고종 27년(1890) 자택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6세이시다. 공은 학문이 독실하고 효우(孝友)가 특출하였으며 친척과 이웃을 두루 구제하여 선인(善人)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고종 11년(1874)경 9년대한(大旱)으로 기민(饑民)이 유이(流離)하자 창곡(倉穀)을 내어 구제한 바가 많았다. 또한 어머니께서 중풍으로 앓아누워 공이 곁에서 음식을 손수 떠 넣으셨는데 흘리는 음식은 버리지 않고 받아서 당신이 잡수시는등 4년여를 하루같이 지성으로 간호하셨다. 어머니께서 천년(天年)으로 운명(殞命)하시자 자기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드림으로서 다시 갱생(更生)하였고 변을 보자 친히 맛을 보았는데 변의 맛이 쓰므로 환자의 변이 쓰면 회생한다는 옛말을 믿고 기뻐하였으나 끝내 삼일뒤에 세상을 뜨셨다. 출천지효(出天之孝)가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 소문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동몽교관(童蒙敎官)조봉대부를 증직하고 고종28년(1891)에는 정문을 내려 효행을 기렸다. 이 정문(旌門)은 1969년 종가의 이주로 인해 없어지고 현판만 전해오다가 이제 방손들이 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성금을 모아 비각과 효행비를 세우고 그 비각에 다시 걸게 되었다. 명(銘)은 이러하다. 아! 효도(孝道)는 백행(百行)의 근본(根本)이리니 다른 덕행(德行) 물어서 무엇하랴 빗돌세워 공(公)의 효행(孝行)기리니 지나는이 옷깃여며 경의(敬意) 표하리 방후손 장영(莊永) 근찬(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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