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이씨 선조유적지 - 교리공파(면천파) -당진면천 및 서산 음암 |
면천-교리공파(校理公派) 홍문관부제학 황해도관찰사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신 근재공(휘 孟賢, 1436-1487)의 큰아드님은 휘가 상(瑺)이며 1483년의 진사시에 장원하고 148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시대의 사간원정언(司諫院 正言)을 거쳐 교리(校理)의 직위까지 올랐으나 애석하게도 일찍 별세하시어 묘소는 남양주의 금대산아래에 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나 임진왜란을 맞아 손자이신 진사공(휘 衡)이 당진군 면천으로 피난하여 일시 세거하였으므로 교리공파를 통상 면천파라고도 부른다. 현재 후손들은 석보의 논실과 서산의 음암면 율목리 해미읍 포천 등지에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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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파의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대치리 기록 :2003년 5월 25일 병석(秉錫)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대치리에는 근재공(휘 孟賢)의 장자이신 교리공(휘 瑺)의 후손이 뿌리를 내리고 일시 세거하였던 곳으로 우리는 교리공파를 일명 면천파라 부른다. 교리공파는 우리 재령이씨중에서 가장 많은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파이다. 근재공께서 1460년(세조 6년)에 문과에 장원한 이후 아드님 교리공은 1483년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1486년에 문과에 올랐으며 교리공의 5세손과 9세손도 문과에 각각 급제하으나 애석하게도 급제하신 세분 모두 타고난 우수한 두뇌와 학문을 마음껏 펼치기 전에 수(壽)를 누리지 못했다. 또 현재 면천의 대치리에는 종친이 거의 살고 있지 않으며 후손은 영양답곡 서산 해미 당진 등지에 살고 있다. 따라서 교리공파를 잘 모르는 종친이 많은 것 같아 이번에 유적지탐방을 계기로 좀더 선조의 기록을 찾아 소개할까 한다. 면천에 입향하신 분은 교리공의 손자 별제공(휘 衡)으로서 임진난 전후에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필자가 찾은 문헌을 요약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별제공 의 부친은 만경군수를 역임한 사도시(司寺)부정(副正)이고 휘는 은우(殷雨)인데 군수공은 만년인 1548년에 정신적 큰 고난을 겪으신다. 즉 사위가 사관(史官)인 안명세(安明世, 1518-1548)인데 약관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인종-명종시기에 한림(翰林)에 이르러 사화의 근원이 된 을사-병오년의 시정기 및 승정원일기를 기록한 주서(注書) 및 정자(正字)의 직에 이르렀다. 춘추(春秋)의 필법에 따라 사실대로 직필(直筆)한 것은 사관의 임무인데 여인천하의 시대(연속 사극 명칭에 의함)에 간흉(奸凶)인 이기와 정순붕의 미움을 사게 되어 사화(士禍)을 입었으니 1548년 (명종 3년) 2월에 사위는 참수를 당하고 따님은 종의 신분으로 수난을 당했는데 사위는 면천에 입향하신 별제공과는 처남매부지간이 된다. 실록에 임금이 사슴고기(鹿肉)를 좋아한다는 내용을 트집잡아 사관을 추죄하니 그당시 같은 사관 손홍적(孫弘績)이 기록한 것인데 손홍적은 참형을 면하고 대윤(大尹)파의 내용을 두둔했다는 죄명으로 군수공의 사위만 3일만에 참(斬)형을 당한 사건이다.[조선왕조실록]참조 군수공의 첫째 부인은 대사헌 성세순(成世純)의 따님이며 처남은 그 당시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청송당(聽松堂) 성수침(成守琛)으로 파주에 은거하여 남명 조식과 쌍벽을 이룬 징사(懲士)이다. 공의 둘째 부인은 진사 송옹(宋雍)의 따님인데 송진사(後嗣 없음)의 묘소가 진천송씨 족보에 따르면 이곳 면천 대치에 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면천 입향조 별제공은 외조부 송진사가 살던 이곳으로 임진난을 피해 오신 것으로 추측된다. 교리공 군수공 지재공의 묘소는 남양주 금대산의 근재공의 묘소 맞은 편에 있고 이곳 대치리에는 입향조의 아드님인 좌승지공(휘 德驥)의 묘소만 있다. 그외 많은 선조분의 묘소는 수암산(秀巖山)에 있으나 최근 개통된 고속도로로 인하여 이장을 하게 된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