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상에 빛나는 문어상가, 대○수산
이학주
김○란(여, 58) 씨가 대풍수산을 한 지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다. 문어를 팔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이십대 중반에 장사를 시작했다. 그때 남편이 문어를 잡았기 때문에 쉽게 문어 판매를 할 수 있었다.
“큰바람을 몰고 오고 싶었어요.”
어떻게 대풍수산이란 상호를 달았냐고 했더니 그렇게 답했다. 처음부터 이야기하는 내내 여걸 같은 면이 드러났다. 정말 씩씩했고 무서움 모르고 제 갈길 가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실천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어찌 하든 김○란 씨의 진취적인 모습은 그렇게 드러났다.
수산물시장은 기존의 상권에 틀이 짜여 있다. 상도덕은 아니지만, 거래처나 지역이 대부분 암암리에 정해져 있다. 그 때문에 새롭게 그 틈새를 파고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몇 개월 동안은 한 마리도 팔지 못했다. 남편과 아주버니가 잡는 문어가 냉동고에 가득차서 더 이상 보관할 수 없을 정도로 포화 상태였다. 정말 한계에 봉착했다.
그때였다. 추석 밑인데, 날씨가 김○란 씨를 도와주었다. 풍랑이 일어 배가 바다로 가지 못하자 문어 물량이 달렸다. 그러자 판로의 틈새를 주지 않던 기존 상인들이 김○란 씨를 찾아왔다. 기회가 온 것이다. 그동안 재고로 쌓였던 내동창고의 문어가 모두 팔린 것은 물론이고, 그 기회로 단골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묵호에서만 판매를 한 것이 아니었다. 판매처를 전국으로 넓혀가기 시작했다. 새벽 6시 10분에 영주로 떠나는 기차를 활용했다. 그 기차는 상인들이 많이 이용했다. 묵호에서 나는 수산물을 경상도로 가져가는 도매상이었다. 기차 상인들에게 물량을 대기 위해 새벽 2시에 집에서 나와 문어를 삶아 상품을 만들고 도매로 넘겼다.
“100원 먹을 걸 50원 먹으면서 그분들도 이윤을 남기게 했죠.”
그래서 판로가 개척됐다. 그렇게 장사는 수월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어도매도 IMF(국제통화기금)를 그냥 넘지 못했다. 그때 중소기업청에서 상인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켰는데, 김○란 씨의 생각과 장사가 완전 180도 바뀌었다. 고객 한 명 한 명 모두 소중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소매를 시작했다. 도매를 할 때는 건방진 태도로 장사에 임했다.
“당신이 필요하면 나를 찾으시오.”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교육을 받으면서 이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님 한 분 한 분이 정말 소중한 분이라는 사실이었다.
“한 분의 손님이 몇 분의 손님을 연결을 해 주시니까 몇 배로 늘어나는 거예요.”
생각이 바뀌니 손님들도 많이 찾아들었다. 그래서 IMF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100퍼센트 만족 시켜드리지는 못하겠지만, 항상 최선을 다하여 손님을 대하였다. 그랬더니 오히려 손님들이 더 미안해하였다. 모든 손님들께 고마움을 갖고 임한다.
요즘은 전국에서 택배주문이 많이 들어온다. 90퍼센트 이상 삶은 문어를 보내는데, 손님들이 공업용 가스렌지가 없어 화력이 약하다. 화력이 좋아야 맛있는 문어로 삶을 수 있다. 삶는 기술도 필요하다. 비리지도, 질기기도, 물렁하지도, 물컹거리지도 않게 삶아야 한다. 입에 들어가면 혀끝에 짝 달라붙게 해야 한다.
김○란 씨는 그동안 문어장사를 하면서 나름대로 어려움이 참 많았다. 부모님이 장애를 가져서 클 때 무척 힘들었다. 그때 주변 분들로부터 받은 도움이 고마워서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그랬더니 그 공적을 인정받아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정말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온갖 수모와 어려움을 참고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왔던 삶 때문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여개 묵호시장상인들이 모두 잘 됐으면 좋겠어요. 장사도 잘 되고 즐거운 삶을 누렸으면 해요. 그 이상 더 바랄 게 없지요.”
김○란 씨는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살다보면 항상 어려움이 있지만, 슬기롭게 넘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화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